송정과 칠광의 소환, 1910년 채용신의 〈칠광도(七狂圖)〉: 이미지를 통해 전하는 도강 김씨 문중의 메시지

Summoning Songjŏng and Ch’ilgwang (Seven Madmen): The Message of the Togang Kim Family in Ch’ae Yongsin’s 1910 Ch’ilgwangdo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4;322():33-57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June 30
doi : https://doi.org/10.31065/kjah.322.202406.002
*Curator, Jeonju National Museum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Received 2024 May 17; Revised 2024 June 7; Accepted 2024 June 23.

Abstract

‘칠광(七狂)’은 광해군대 1613년 계축옥사를 계기로 낙향하여 자연을 벗삼으며 세월을 보내던 김대립 등 7명을 의미한다. 이들 중 5명에 다른 5명을 더해 ‘송정’이라는 정자에서 음풍명월하던 이들을 ‘십현(十賢)’이라 불렀다. 채용신이 1910년에 모사하여 그린 〈칠광도〉와 〈송정십현도〉 두 그림은 20세기 전반에 수백년 전 역사 속 인물을 당시 실제 산수를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칠광도〉는 계회도와 초상화, 별서도 성격이 융합된 것이었다. 18세기까지 전해 내려오는 〈칠광도〉의 전래 상황을 살펴보았고, 이상형의 6세손이 〈칠광도〉를 보여주며 선조의 활약상을 설명하는 기록을 통해 시각 이미지의 역할에 대해 주목하였다. 19세기 이후 도강 김씨 문중은 태인 지역에서의 문중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송정을 반복적으로 중수하고 후송정과 영당을 건립하였을 뿐 아니라, 실경의 자세한 묘사에 능했던 채용신에게 주문하여 칠광의 시각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송정을 포함한 태인 풍경을 넓게 조망하고 그 안에 칠광을 그린 것은, 실제 소유지 풍경을 묘사한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의 용진정사(湧珍精舍)를 그린 〈용진정사도〉와 산수화 병풍을 배설한 〈채면묵 초상〉과 마찬가지로 산수와 초상이 교차하며 대대로 지역에서 명성과 세력을 유지해 온 가문의 역사와 위상을 함께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Trans Abstract

Ch’ilgwang (七狂, Seven Madmen) a group of seven individuals, including Kim Taerip, who sought refuge in nature following the significant political event, Kyech’uk Oksa (癸丑獄事), in 1613 during the reign of King Kwanghae. Of these seven, five were later joined by another five, who together embraced an ideal, tranquil lifestyle at a pavilion known as Songjŏng. This larger group came to be known collectively as Sip’yŏn (十賢, Ten Sages). Ch’ae Yongsin’s 1910 paintings, Ch’ilgwangdo (七狂圖, Painting of the Seven Madmen) and Songjŏng sip’yŏndo (松亭十賢圖, Painting of the Ten Sages at Songjŏng), feature these historical figures from centuries past set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early 20th century landscapes. Ch’ilgwangdo integrates the visual features of three painting genres, gathering painting (kyehoedo), portraiture, and estate painting (pyŏlsŏdo).

This paper examines the transmission of Ch’ilgwangdo up to the 18th century and brings to bear the role of visual imagery by analyzing an account by Yi Sanghyŏng’s sixth-generation descendant, who showcased the painting and explained his ancestor’s significant achievements. Post-the 19th century, the Togang Kim family initiated several projects to elevate their clan’s status in the T’aein region. These projects included multiple renovations of Songjŏng, construction of the Rear Songjŏng, and an ancestral shrine. Commissioning Ch’ae Yongsin, known for his detailed expressions and real scenery landscape paintings, was part of this effort to visualize the Seven Madmen. The placement of Ch’ilgwang figures within the broader landscape of Taein, including Songjŏng, in Ch’ae’s painting echoes a similar intent found in O Chunsŏn’s (1851~1931) Yongjin chŏngsado (湧珍精舍圖, Painting of Yongjin Private Residence for Educating Students) and Portrait of Ch’ae Myŏnmuk, both of which portray the actual landscapes of his estates. This interplay of landscape and figure representation underscores the history and status of the Kim family, which has upheld its high renown and influence in the region for generations.

Ⅰ. 머리말

어진을 그렸던 화가 석지 채용신(1850~1941)은 1906년 정산(지금의 충청북도 청양군) 군수 직에서 물러나 전라북도 지역으로 내려와 지역 사회의 수요에 응하며 많은 그림을 그려주었다. 익산에 공방이 있었다고 하지만, 정읍, 김제 일대에 며칠씩 머물면서 그려주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채용신이 1910년에 모사하여 그렸다고 전하는 〈칠광도(七狂圖)〉(Fig. 1)와 〈송정십현도(松亭十賢圖)〉(Fig. 2)는 정읍 태인(泰仁) 지역을 배경으로 17세기 초 역사 속 인물인 칠광과 십현을 그린 그림이다.1 ‘칠광’은 광해군대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를 계기로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여 스스로 ‘일곱명의 미치광이’라고 부르며 자연을 벗삼으며 세월을 보내던 김대립(金大立, 1550~?) 등 7명을 말한다. 이들 중 5명에 다른 5명을 더해 ‘송정(松亭)’이라는 정자에서 음풍명월하던 이들을 ‘십현(十賢)’이라고 불렀다.

Fig. 1.

채용신, 〈칠광도〉 Ch’ae Yongsin,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2.

채용신, 〈송정십현도〉 Ch’ae Yongsin, Songjŏng sip’yŏndo, 1910, Color on Cotton, 119.0×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6)

호남 지역 실경을 그린 그림은 전충효(全忠孝, 17세기)의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소장),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우금암도(禹金巖圖)〉(미국 LACMA 소장),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영광풍경도〉(리움미술관 소장) 등이 있으며, 제작 예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지 않으나 그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는 주제는 역사인물 고사이지만, 실제 그들이 활동했던 지역 산수를 구체적으로 그림 배경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실경산수 측면에서도 주목이 된다. 〈칠광도〉에는 지금의 정읍 내 성황산(城隍山), 무성서원(武城書院), 태산사(泰山祠), 그 외 지역의 경물들이 매우 자세하게 반영되었다.

본고에서는 〈칠광도〉와 〈송정십현도〉의 제작 배경을 살펴보고, 계회도와 초상화, 별서도 성격이 융합된 것으로 〈칠광도〉를 규정하고자 한다. 두 그림은 그동안 여러 차례 전시에서 소개되었고, 채용신 관련 학위논문 및 연구논문에서 채용신의 정읍에서의 활동 면에서 다루어지거나, 무성서원 인근 경관 분석을 위한 자료로 활용 분석된 바 있다.2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18세기까지 전해 내려오는 〈칠광도〉의 제작 및 전래 상황을 문헌 기록을 통해 정리하고 19세기 이후 송정의 중수, 후송정(後松亭)과 영당(影堂)의 건립과 더불어 도강 김씨 문중에서 〈칠광도〉 모사를 주도했음에 주목하여, 〈칠광도〉와 〈송정십현도〉의 성격을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분석 고찰하였다. 또한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의 용진정사(湧珍精舍)를 그린 〈용진정사도〉와 그 외 산수화 병풍을 배설한 초상화 등과 함께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인 실경 표현이 개인적 자아와 집단적 정체성, 문중의 세력화 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활용되면서 그림에 힘과 설득력을 부여하는 결과로 이어졌음을 결론으로 끌어내었다.

Ⅱ. 17세기 전반 ‘칠광십현’ 그림 제작과 전래

〈칠광도〉는 17세기 초반 태인(泰仁) 고현(古縣,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에서 활동했던 칠광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광해군 즉위 후 1613년 계축옥사, 1618년 인목대비 경운궁에 유폐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낙향하고 은거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김대립(金大立, 1550~?) 등 7명 역시 정치적으로 세상이 어지러울 때 벼슬에 나가지 않고 ‘칠광’이라 부르며 은거하였고, 그들에게 터전이 되어 주었던 땅이 정읍 태인이었다. 태인 사람이 5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태인으로 낙향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지역은 그렇게 칠광의 명성과 함께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칠광과 십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Table 1).3

<칠광과 십현의 구성> Composition of Ch’ilgwang and Sip’yŏn

칠광으로 불린 사람 중에서 김대립과 이상형이 빠진 5명에 김관, 김정, 양몽우, 김급, 김우직이 추가되어 십현이 되었다.4 후대의 기록에는 칠광의 7명과 추가된 5명을 모두 일컬어 12현이라고도 하였다. 총 12명 가운데 태인 사람은 9명이나 된다. 송민고만 서울 사람이고, 나머지 2명은 멀지 않은 남원, 담양 출신이다. 도강 김씨는 6명이다.

‘칠광’의 결성과 유래, 그리고 그림으로 제작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칠광의 한 사람이었던 송치중(宋致中, 1591~1643)은 고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한양으로 상경하였고, 161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던 인물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계축옥사 등으로 세상이 혼란스럽고 윤리가 단절되자 이상형(李尙馨) 등 두어 사람과 상소를 올려 폐모(廢母)에 대한 논의를 강력히 배척하였으나 회보가 없었다. 드디어 과거(科擧)를 보지 않기로 하고 동지 6인과 더불어 강산을 방랑하니 이름하여 칠광(七狂)이라 하였다.”고 하였다.5 또한 이상형(李尙馨, 1585~?)의 시장(謚狀)에는 ‘동방(同榜) 송치중 등 6인과 같이 항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산을 방랑하며 칠광이라 불렀고 당시에 그 뜻을 높여 칠광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하였다.6 이상형의 시장을 지은 사람은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이다.

김응빈(金應贇, 1553~1632)의 행장에도 광해군대에 송정칠광의 모임을 만들어, 시와 노래, 가야금 등으로 앉고 누워 지내며 이를 그림으로 계첩으로 만들고 이상형이 서문을 썼으며, 신유년(1621)에는 십현으로 새로운 계를 결성했다는 내용이 있다.7 이 글은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실려 있다. 비록 모두 18세기의 기록이지만 이상형과 김응빈의 행장을 통해, 칠광으로 불렸던 이들을 〈칠광도〉로 그렸음이 확인된다.

송민고의 작품이라고 밝힌 것은 황윤석이다. 도강김씨 김광억(金光億, 1743~1799)의 둘째 형 광직(光直)이 서울에 가서 〈칠광도〉 한 폭을 가져왔는데 선조인 김대립과 이상형, 송치중 등이 광해군대에 칠광이라 부르며 고현에서 함께 모여 노닐었을 당시 송민고가 계회도를 그려 나누어 준 것이 전래된 것이라고 하면서, 김대립의 집안에는 전하는 것이 없고 송치중 가장본도 잃어버렸으니 오직 송민고 문중 소장본이 그 문인(門人)으로 한양에 사는 박모 집안에 전한다고 기록하였다.8 이 기록을 통해 〈칠광도〉가 계회도의 성격으로 여러 점 그려져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졌고 전래되면서 이미 많이 소실되었으며 18세기 말경에는 송민고 문중 소장본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민보(李敏輔, 1720년~1799)도 〈칠광도〉를 보고 글을 남겼다. 이상형의 6세손 이석주(李錫疇, 18세기 말 활동)가 보여주는 〈칠광도〉를 보고 그는 호남칠군자(湖南七君子)로 이들을 칭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을 실천한 이들을 숭상하는 데 제약이 없으나 그림으로 그 일을 전한 것은 드물다고 하면서 200년 가까이 된 데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먹빛도 변함없어 새것 같다고 하였다.9 18세기 말까지 원본이 태인에 전해지고 있었고, 칠광의 명성은 그림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고 공유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민고가 〈칠광도〉를 그렸다는 것은 모두 18세기 이후 기록에 근거하고 그 이전 당대 기록에 송민고가 그렸다는 언급은 없다.10

〈칠광도〉에 대한 기록은 19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칠광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송정의 뒤를 이은 후송정과 영당이 건립되고, 1899년에는 후송정에서 아집을 가진 문사들이 『후송정아집(後松亭雅集)』이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맨 앞에 실려 있는 실기(實記)에 따르면

… 스스로 미치광이들의 결사(結社)라 자처하고는 술을 마시고 시가(詩歌)를 읊으며 스스로 달랬는데 이들을 칠광(七狂)이라고 했다. (중략) 1621년 8월 또 칠광 중 오현(五賢)이 다른 다섯 명과 더불어 거듭 계를 맺고 술을 마시며 시가를 읊으며 스스로 평안하게 함으로써 나라가 쇠망(衰亡)함을 달래니 이들을 십현(十賢)이라 했는데, 그림을 그려 이 행적(行蹟)을 남겼는데 칠광도, 십현도라 한다.11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는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1814년에 모사했다고 하단에 기록한 〈송정수계도〉가 전한다(Fig. 3). 송산사(松山祠)에 남아 전하고 있다고 알려진 〈송정수계도〉는12 오른쪽에 하천이 굽어져 흐르는 것이 실제 현재 정읍 송정 일대 풍경의 특징적 면모를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10명의 인물이 모여 시를 읊고 음주를 함께 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상단에 전서체로 쓴 제목과 중앙에 모임 장면 그림, 하단에 좌목 구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지방에서 열린 작은 수계였지만, 공식적인 계회도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좌목 좌우에 매화와 대나무를 배치한 형식은 1542년 〈연방동년일시계회도〉와 1585년 봉상시의 전현직 관원들이 강가에서 모인 전경을 그린 〈태상계회도(太常契會圖)〉 등에서 유사한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17세기 원본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Fig. 3.

작가미상, 〈송정수계도〉 Author Unknown, Songjŏng sugyedo, 1814, Ink and Color on Paper, 100.0×59.9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Chŏngŭp, p. 37)

Ⅲ. 19세기 이후 도강(道康) 김씨 문중의 부흥 전략과 칠광 소환

1. 1910년 〈칠광도〉와 〈송정십현도〉 화가와 제작시기

〈칠광도〉와 〈송정십현도〉에는 화면에 제목과 제작연대 및 작가와 관련된 관서(款書)가 적혀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이 그림은 1910년에 채용신이 태인의 항일우국지사 김직술(金直述, 850~1920)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일가 초상화 여러 점과 함께 그린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로 전해진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이는 1979년에 저술된 석사학위논문에서 밝힌 것으로, 김직술의 손자 김덕기(金德基)의 전언에 근거한다.13 1979년은 김직술이 세상을 뜬지 59년 되는 해였고, 그때만 해도 그의 손자를 통해 채용신이 정읍 지역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려주던 과거 당시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직술은 무성서원에 배향된 도강(道康) 김씨 김약묵(金若默, 1500~1558)과 김관(金灌, 1575~1635)의 후손으로, 도강 김씨는 무성서원 주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서원을 이끌어 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14 〈칠광도〉 제작 배경에는 도강 김씨 문중이 있었다고 보게 되는 지점이다.

당시 채용신은 1906년 관직생활을 마치고 낙향하여 김제, 정읍 일대에 며칠씩 머물며 지역에서 요청하는 그림을 수응해서 그렸다. 이는 『석강실기』 기록과 아직도 지역에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1909년에 정읍 영주정사에 주자 등 열두 성현 초상을 그렸고(원본 분실되고 사진으로만 전함), 1912년 정읍 일대에 머물면서 안요묵(安堯黙)의 요청으로 아버지 안재호(安在頀, 1821~1873) 초상을 그렸던 일화, 1916년 진안 이덕응(李德應, 1866~1949)의 집에 여러 날 머물면서 이덕응과 제자들 초상 등을 그렸던 일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15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이 채용신의 작품임을 화면 위에 밝힌 〈영모도〉(국립전주박물관 소장)는 1910년 이전에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의 집인 호문당(好問堂)에서 그린 것으로 김제 지역에도 머물렀던 사실을 알려준다.16 정리하면 1910년 이전 김제, 1910~12년 정읍, 1916년경 진안 일대에 머물렀던 것이 기록과 작품으로 확인된다.17 1910년에 정읍에서 누군가 선대의 행적을 담은 그림을 모사할 일이 있었다면, 채용신에게 주문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비용이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18 〈칠광도〉나 〈송정십현도〉와 같이 큰 화면의 그림을 같이 그리는 데에는 개인이 아닌 문중의 후원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다.19

화가를 채용신으로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화풍이다.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는 화풍 상으로도 채용신의 산수, 인물, 건물 화풍을 잘 보여준다. 동글동글한 얼굴을 한 인물의 이목구비 표현과 신체 비례, 필선의 특징, 기와지붕을 한 건물의 표현 등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생도〉, 〈무이구곡도〉 등과 유사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Fig. 4, 5). 또한, 바위와 지면 곳곳에 구사된 노란색은 채용신 그림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면모이므로, 화가가 채용신임은 확실해 보인다.

Fig. 4.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5.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한편, 관서가 그림의 뒷면에 적혀져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액자 안에 보관되어 있어 뒷면을 확인할 수 없다.20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 출품 당시 촬영한 뒷면 배접 상태를 확인한 결과, 배접지 뒷면에 남아있는 관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뒷면에 관서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김직술 손자의 전언에 따라 1910년이라는 제작시기 추정은 가능하나 결정적인 근거는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하여 〈송정십현도〉에 그려진 송정(松亭)의 현판에 ‘경술삼월(庚戌三月)’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주목된다(Fig. 6). 송정 건립 연대, 중수 연대 등 관련 여러 기록 중에 경술년은 해당하지 않는다.21 따라서 현판에 경술이라고 적음으로써 화가가 작품의 제작시기를 재치있게 숨겨 놓은 것은 아닐지 추정한 것은 수긍이 간다.22 또한, 1910년경 〈김직술 초상〉, 〈김영상 초상〉, 〈박만환 초상〉 등 정읍 지역에 머물면서 초상화를 그렸던 것을 감안하면23, 여러 가지 정황상 〈칠광도〉와 〈송정십현도〉의 작가는 채용신이며, 제작시기는 1910년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Fig. 6.

채용신, 〈송정십현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Songjŏng sip’yŏndo, 1910, Color on Cotton, 119. 0×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6)

2. 송정의 반복된 중수(重修)와 그림 모사(模寫)의 의미

그렇다면, 1910년에 〈칠광도〉가 재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일까. 19세기에는 〈칠광도〉와 〈송정십현도〉의 배경이 되었던 송정을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1813년에 옛 수계를 이어가고 전하려고 했으나, 결국 1824년(갑신년)에 십현의 후손들에 의해 옛터에 송정의 중건이 성사되었다.24 현재 송정은 정면 3칸과 측면 3칸의 아담한 정자로, 사방에 마루를 놓고 중앙에 작은 방을 하나 두어 비바람을 피하게 하였다(Fig. 7). 송정 중건을 도모한 자들을 살펴보면 10현의 후손 가운데 도강(道康) 김씨와 여산(礪山) 송씨가 중심이었다. 송정이 있는 태인 지역은 향약이 일찌감치 만들어지고 지속되었던 곳이었다. 태인에서 가장 벌족이었던 것이 도강 김씨였고, 고현동 향약[古縣洞約]에서도 도강 김씨가 전체 동약 구성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19세기 들어 예전보다 참여하는 문중의 수, 인원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도강 김씨의 영향력이 작아지고 있었음을 지적한 연구는 흥미롭다.25 향약 구성원이 많지 않았을 때는 도강 김씨 문중이 압도적으로 향촌사회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었다면, 참여자수가 많아지고 참여 문중도 많아지면서 그 영향력은 예전같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1814년 도강 김씨 김치응(金致膺, 1759~1818)이 주도하여 〈송정수계도〉가 모사된 것은 주목된다. 그때는 아직 송정을 중건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그림을 통해 수계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자 〈송정수계도〉를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 송정이 없는 이유는 18세기 전반 그곳에 송정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송정을 그려넣지 않음으로써 ‘송정이 없는’ 〈송정수계도〉를 그렸다. 이는 송정의 중건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Fig. 7.

<송정> Songjŏng Pavilion, Chŏngŭp City (Photograph by the author)

검정 선으로 윤곽을 하고 그 안에 제목과 그림, 좌목을 적어 넣었는데 그 바깥쪽 하단에는 1814년 김치응이 모사에 관여했음이 밝혀져 있다.26 이렇듯 도강 김씨 문중은 송정의 중건을 추진하였으며 〈송정수계도〉의 모사를 진행했고, 결국 1824년에 이르러 옛 터에 송정을 중건하였다. 그 후 1898~99년에 후송정과 영당까지 새로 짓고 초상화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태인 지역에서 도강 김씨 문중이 점점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7 송정은 1824년 이후로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910년 채용신에게 〈칠광도〉를 주문한 김직술은 1899년에 후송정을 짓고 1900년에 남긴 「후송정기」에서

10현 중 김정(金鼎, 1587~1636)은 나의 9대조이신데 선인(김직술의 아버지 김영준(金永準, 1828~1893)를 말함)께서 선조 사업에 추감(追感)하여 옛 정자를 중수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다시 계를 만드시니, 선조를 잇는 아름다운 뜻이거늘 시작도 하기 전에 불행히 돌아가시고 … .28

라고 하였다. 아버지 김영준이 송정을 중수하고 칠광십현의 뜻을 계승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은 후송정의 건립이었다. 그 후 1899년 도강김씨 문중은 후송정을 새로 짓는 등 지역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는 칠광 십현이 지켰던 선비로서의 절의를 계승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1910년에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를 모사한 것은 시각적으로 그러한 입지를 재확인하고 기념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10년 전라북도 정읍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이러한 그림 제작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불리는 1910년은 전북 유림들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합병조약(合倂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정읍 태인 지역에서는 1906년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이 임병찬(林炳贊, 1851~1916)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장소가 바로 무성서원이었다. 왜적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자 한다는 상소를 올리고, 전국의 선비와 백성들에게는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포고문을 전했다. 전북 최초의 의병 운동으로 상소 중심의 의병 활동이 무장 활동으로 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채용신은 이러한 상황 하에서 최익현, 임병찬, 김직술, 김기술 등 의병 활동을 했던 지역 인사들의 초상을 그렸다. 또한 칠광 십현의 정신을 계승하는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를 함께 그렸다. 한편, 이곳에는 일찍이 일본인이 진출해 있었다. 그들이 1902년 정읍 신태인읍 화호리로 진출한 뒤 1930년대까지 넓은 땅을 소유하고 농장을 경영하며 거주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김직술의 주문으로 그려진 〈칠광도〉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과 같은 부감시를 사용하여 주변 경관까지 넓게 화면에 담았던 것은 매우 주목된다. 이러한 조망은 조선시대 별서도 전통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일본인에 의해 잠식되어 가는 지역에 대한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전례없이 중요해진 지역, 바로 그 땅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황산이 위에, 시산이 아래에 위치하고, 성황산 오른쪽에 영당, 송정이 그려져 있으며, 가운데에 무성서원, 왼쪽에 무성리 석불입상이 그려져 있다. 또한 태산사(泰山祠)29와 원촌마을까지 넓은 경관을 담았다. 무성서원은 1910년 당시 정읍 태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성황산을 배경으로 무성서원까지 그려 넣음으로써, 〈칠광도〉는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강김씨 문중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반영할 수 있었다. 채용신은 지역 경물을 매우 자세하게 반영하였다.30 그림 속 송정 묘사도 실제 정자와 매우 유사하고(Fig. 7), 지금도 무릎까지 땅 속에 묻혀 전하는 무성리 석불입상도 그림 안에 그려져 있다(Fig. 8, 9). 거북바위라 불리던 바위는 거북이의 모습으로 그려졌을 뿐 아니라(Fig. 10), 화면 중간에 표현된 원촌마을 건물 현판에 ‘동각(東閣)’ 등 이름을 적어 넣은 것도 확인된다(Fig. 11). 거대한 산수화 속에 포함된 작은 건물들이라, 현판을 그리고 글씨까지 적어 넣는 작업은 용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채용신이 정 확한 건물명을 표기하였던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림 속에 그려진 후송정 인근 바위에는 ‘후송(後松)’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역시 실제 풍경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31 17세기 당시에 후송정은 없었지만 채용신은 1910년에 모사하면서 당시 존재했던 후송정을 추가하였다. 채용신은 1899년에 완공된 영당과 산 아래 동진천 변의 후송정을 모두 그려 넣어서 칠광이 활동하던 시기가 아닌 채용신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인 1910년경의 경관을 담은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32 실제 풍경을 대상으로 그리면서 눈에 보이는 경물을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표현하는 것은 채용신 회화의 특징이다.33 칠광과 상관없는 지역 내 여러 경물들을 이렇게 자세하게 묘사함으로 인해, 그의 산수화는 힘과 설득력을 갖는다.34 이와 관련하여 텍스트에 대한 이미지의 과잉이 그림을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지적한 연구는 흥미롭다.35 이러한 회화적 관습은 19세기 김홍도의 〈기로세련계도〉에서 이미 보이는 것으로 그러한 전통을 채용신이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Fig. 8.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 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9.

<무성리 석불입상> Musŏng-ri Standing Stone Buddha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10.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11.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칠광도〉에서 송정 주변을 클로즈업하면 바로 〈송정십현도〉가 된다. 〈송정십현도〉에는 10명의 인물이 돗자리 2개를 펴고 송정 앞에 둘러 앉았는데, 마치 초상화를 보듯이 각각 얼굴에 개성이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명암법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Fig. 12). 가장 가운데에 앉아있는 인물을 보면, 얼굴에 주름이 가장 많고 수염이 혼자만 하얀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당시 71세로 십현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김응빈인 것으로 보인다. 인물이 앉은 자세, 도포와 세조대의 색도 모두 제각각이며 앉은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다리에 사선(紗扇)을 걸치고 있는 인물은 아마도 사선을 소지하고 외출한 듯 보이는데, 생생하게 일상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Fig. 12.

채용신, 〈송정십현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Songjŏng sip’yŏndo, 1910, Color on Cotton, 119.0×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6)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는 산수 배경 속에 그려진 집단 초상화의 성격을 가진다. 칠광, 십현으로 묶이면서 그들의 정체성은 확실해졌고, 단독 초상화보다 계회도를 통해 한층 더 정체성을 시각화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활동 배경을 넓게 조망하고 세부 경관을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림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채용신은 이렇게 사실적인 산수 표현을 통해 칠광의 고사가 정읍 태인 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온 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미 여러 우국지사의 초상을 그렸던 채용신은 〈칠광도〉를 통해 다시 한번 나라를 걱정하고 절의를 지켰던 옛 선조들의 정신을 시각화하고, 일본인이 이 지역의 땅을 구매하여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던 상황에서 칠광 십현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했던 도강 김씨 문중의 지역 내에서의 역할과 위상을 재확인하고자 하였던 주문자의 요구사항을 이행하고 있다.

Ⅳ. 맺음말—1920년대 산수 배경 초상화의 제작

17세기 후반에 그려진 〈석정처사유거도〉는 김한명(金漢鳴, 1651~1718)의 은거지를 그린 것으로 호남 지역 실경을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 작품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배산임수의 주변 경관을 담고 그 안에 은거지를 그린 전체적인 구도가 〈칠광도〉와 유사하다.36 〈칠광도〉는 계회도 성격으로 그려져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준 것인데, 실제로 그림만 보았을 때는 주변의 경관을 넓게 조망하고 자세하게 경물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별서도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호남 지역 별서도 전통은 채용신이 1924년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의 용진정사(湧珍精舍)를 그린 〈용진정사도〉로 이어진다.37 고종의 승하를 맞아 백립을 쓴 모습으로 세월을 보낼 정도로 절의가 높았던 선비 오준선은 호남의병을 대표하며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했던 일화로 잘 알려져 있는데, 1910년 8월 이후 후학을 양성하며 용진정사에서 지냈다고 전한다.38 이러한 오준선의 모습과 삶은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채용신에게 주문하여 초상화와 〈용진정사도〉를 그려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던 것이다(Fig. 13, 14).

Fig. 13.

채용신, 〈오준선 초상〉 Ch’ae Yongsin, Portrait of O Chunsŏn, 1924, Color on Silk, 74.0×57.5cm, Private Collection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ch’osanghwa, p. 117)

Fig. 14.

채용신, 〈용진정사도〉 Ch’ae Yongsin, Yongjin chŏngsado, 1924, Color on Silk, 67.5×40cm, Private Collection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wangjang, p. 38)

1920년대부터 채용신은 ‘그림 속 그림’으로서 산수 병풍이 배설된 초상화를 활발하게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초상화는 책가도 병풍을 뒤에 배치하고 찍은 20세기 인물 사진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39 즉 자신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그림을 선택하여 뒤에 배치한 것이다. 채용신은 초상화 주인공을 그리면서 『주자대전』 등의 서적, 부채, 안경 등의 소품을 손에 쥐어주기도 했는데,40 더 나아가 산수 병풍을 인물 뒤에 배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병풍에 그려진 산수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혹시 그들이 소유한 땅을 암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초상화의 주인공이 지역에서 사회적 권력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은 〈채면묵 초상〉이다(Fig. 15). 1932년 62세 채면묵(蔡冕默, 1871~1952)의 모습과 산수화가 인물 뒤에 배설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가옥의 표현이 일반 관념산수와는 다른 차원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채면묵은

Fig. 15.

채용신, 〈채면묵 초상〉 Ch’ae Yongsin, Portrait of Ch’ae Myŏnmuk, 1932, Color on Silk, 118. 8×68cm, Musuem Sol (Photography courtesy of Museum Sol)

(전북 부안) 연봉은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며, 산 또한 대대로 선조를 모신 선산이다. 조부께서 효도와 선행으로 명성이 있었는데 일찍이 선산 아래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그 곳을 서성이며 지적하니, 사람들은 송정처사라 불렀다.41

라고 하였다.

채면묵은 7세에 부친을 여의고 장성하여 3년을 추복(追服)하였으며, 늙어서도 성묘를 거르지 않았고 선산에 입석(立石)하고 제전(祭田)을 마련하며 제각(祭閣)을 건립하였고, 선산 밑에 추모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채용신이 그린 〈채면묵 초상〉에 등장하는 산수화를 보면, 울타리가 쳐져 있고 부섭지붕을 덧대서 추가 공간을 유동적으로 마련한 가옥구조의 표현이 구체적이다(Fig. 15-1).42 이러한 초가집은 관념산수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므로, 초상 뒤의 병풍 속 산수는 부안 연봉에 대대로 살아온 바로 그 터전을 그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는 기우만(奇宇萬, 1846~1916)에게 사사하며 유학자로서 그 계통을 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배경으로 산수화를 그려 초상화 배경으로 배설함으로써, ‘부안 연봉 지역에 대한 평강 채씨 가문의 오래된 가세(家勢)와 송정(松亭)이라 칭해진 조부 채인영(蔡寅永)을 이은 후송(後松) 본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을 아닐까 생각된다.

Fig. 15-1.

채용신, 〈채면묵 초상〉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Portrait of Ch’ae Myŏnmuk, 1932, Color on Silk, 118.8×68cm, Museum Sol (Photography courtesy of Museum Sol)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세기 말 이상형의 6세손이 〈칠광도〉를 보여주며 선조의 활약상을 설명하던 기록을 통해 시각 이미지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19세기 이후 도강 김씨 문중은 태인 지역에서의 문중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송정을 반복적으로 중수하고, 칠광을 기리며 후송정과 영당을 건립하였을 뿐 아니라, 실경의 자세한 묘사에 능했던 채용신에게 주문하여 칠광의 시각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는 계회도와 초상화, 별서도 성격이 융합된 것으로, 송정이 있는 태인의 산수 속으로 칠광의 이미지를 소환한 결과물이었다. 이를 통해 태인 지역에서의 도강 김씨 문중의 권력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고, 7명이 함께 그려짐으로써 절개와 의리를 지켰던 그들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으며, 태인 지역 경치와 경물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그림은 설득력과 힘을 가지게 되었다. 송정을 포함한 태인 풍경을 넓게 조망하고 그 안에 칠광을 그린 것은, 실제 소유지 풍경을 묘사한 〈용진정사도〉와 산수화 병풍을 배설한 〈채면묵 초상〉과 마찬가지로 산수와 초상이 교차하며 대대로 지역에서 명성과 세력을 유지해 온 가문의 역사와 위상을 함께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Notes

1)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는 현재 정읍시립박물관에 기탁 보관되어 있다.

2)

전시 이력은 2006년 국립전주박물관 〈정읍〉 특별전,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태인 고현동 향약〉 테마전, 2011년 국립전주박물관 〈석지 채용신—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특별전 등에 출품되었으며, 양진희, 「석지 채용신 회화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 박정민, 「1900년대 초 태인 고현내의 경관—칠광도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89 (2020), pp. 189-226; 유미나, 「20세기 초의 정읍과 채용신의 회화 활동」,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논문집』 24-3 (2024), pp. 345-379에서 도강 김씨 수응화 개념으로 다루어졌고, 국립전주박물관 학술총서 『석지 채용신 화조·산수화』 (2023)에서 상세 도판과 함께 소개되었다.

3)

박정민 위의 논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힌다.

4)

이들은 칠광처럼 서인 계열이었고 대북파에 저항하는 입장이었다. 윤희면, 「朝鮮 後期 兩班士族의 鄕村支配—全 北 井邑의 松亭, 後松亭의 建立을 중심으로」, 『호남문화연구』 25 (1997), p. 158.

5)

“…時世道昏亂, 人紀斁絶. 公與李尙馨等數人陳疏, 痛斥廢母之論, 不報. 遂廢擧, 約同志六人, 放浪湖山, 號七狂.” 「宋致中墓誌銘」, 『國朝人物考』 三十八, 蔭仕.

6)

“萬曆壬子中進士, 時㐫黨倡廢母議, 公與同榜宋致中等六人, 抗 䟽 痛斥不見 納, 遂廢擧業, 放浪湖山, 號爲七狂. 時人高其義, 繪爲七狂之圖.” 尹定鉉, 「贈吏曹判書李公尙馨謚狀」, 『梣溪先生遺稿』 卷之六.

7)

“…作松亭七狂之會 或詩或歌或弦或觴或醉或棊或坐或臥 而圖成契帖 尙齒爲序 其山水閭里草樹騾牛之微 亦 莫 不 隨 人可見 自是 益 放 浪倨 傲 爰自號悟 無 齋 以寓微旨 亦號獨醒翁 辛酉又與月峯子鳴川公灌以下十賢 申修舊契 而公爲之首….” 「有明朝鮮國故承仕郞濟用監奉事悟無齋金公行狀」, 『 頥齋亂藁』 卷 四 十二, 二十二日, 庚戌.

8)

“得 泰 仁牛山金君光 億 初五答 書 聞四月其仲兄 光直 入 京 得七狂圖一幅以來 余曾聞 其 先 月峯 公大 立 與李修撰 尙馨 宋天安致中 金監察堪 金奉事應贇 宋蘭谷民百 及李逴 六公 當光海時 同稱七狂 游會于古縣 宋天安之松亭 宋蘭谷手墨作契圖分傳 而月峯本孫家無傳者 其宋天安家藏者 則失于外裔居楊根者 惟宋蘭谷家藏 而傳于 其門人京居朴某家者 今幸得之云.” 「七月七日 雲叟先生忌辰也 曉起食素 用朱子慕延平韻志感」, 『頥齋亂藁 卷』 四十一, 七日丁卯.

9)

“…自古草澤隱淪 高尙其蹈者亦何限 而鮮有丹靑所傳. … 若湖南七君子, 卽世家華胄, 而天默李公, 以玉署名流. 標望尤別 與五人者 皆甞仕於朝 獨李松隱 止 於 老布 衣 出處顯晦之迹 未必相同 然其歸則一也 觀其臭味相合. 道義砥礪 未甞或畔於吾儒繩墨 要皆法門之遺 莊士之倫 而乃自號 爲七 狂者何哉 誦其書論其世 不知其人可乎 … 天默後孫錫疇甫, 示余詩山畫障子, 畫出於宋蘭谷. 蘭谷在當時七狂中, 以三絶稱者也. 此一幅, 今近二百年, 失而復得, 墨竗不渝, 眞蹟如新, 若鬼護而神相者, 不亦奇乎, 謹盥手而題之.” 「題七狂圖後」, 『豊墅集』 卷之七.

10)

후대 관련 기록에는 모두 송민고가 화가임이 밝혀져 있다. 송정에 걸려 있는 김환상(金煥相)이 쓴 시액(詩額)에도 송민고가 〈송 정수계도〉를 그려 만들었다고 밝혔다.

11)

표지에는 ‘후송정아집’이라고 적혀 있지만, 내지에는 ‘후송정정지실기(後松亭亭誌實記)’라고 하였다. 후송정은 10현을 흠모하던 후손들이 1899년에 송정(松亭) 아래쪽 백사장 위쪽 바위 곁에 정자를 짓고 십송정(十松亭)이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후송정(後松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립전주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판본은 2023년 국역된 바 있다. 刊寫者 미상, 丁判聲 譯, 『(國譯)後松亭雅集』 (서울: 가람문화사, 2023).

12)

송산사에 전해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필자가 원고를 작성할 시점에는 직접 조사하지는 못했다.

13)

전혜원, 「석지 채용신의 초상화에 대하여」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석사학위 논문, 1979), pp. 35-36. 전언에 의하면, <송정십현도>는 잃어버렸다가 찾은 것이고, 제목과 참석자 명단이 원래 있었으나 도난 당했을 때 찢어졌다고 한다.

14)

김진돈, 「조선조 개국공신 김회련과 도강김씨 후손들」, 『도강김씨 동정공파 기탁유물과 조선시대 문중문화』 (정읍시립박물관, 2014), p. 117.

15)

〈안재호 초상〉, 〈이덕응 초상〉에 대해서는 국립전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학술총서—석지 채용신 초상화』 (2020) 참고.

16)

〈영모 도〉에 대해서는 국립전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학술총서—석지 채용신 화조·산수화』 (2023), 도 4, 도판 해설 참고. 어미 호랑이가 새끼 호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언덕 너머 달이 떠 있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하단에는 소나무 두 그루를 배경으로 다람쥐가 그려진 그림이다. ‘석지 채용신이 김제 요교 호문당에서 그리다’라고 하였는데 채용신의 인장이 있지만 글씨를 쓴 사람은 석정 이정직이다. 채용신 그림 관서에서 여러 사람의 필치가 확인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그림이다.

17)

진안 이부용 선생은 이덕응의 현손으로 이덕응 초상을 그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전언해 주셨다. 채용신이 며칠을 이덕응 댁내에 머물면서 초상을 그렸고, 그 이후 집에 불이 났을 때 초상 먼저 꺼내서 화재를 면했다고 한다.

18)

당시 비용이 얼마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지역을 찾아다니며 초상화를 주문 제작 판매했던 채용신은 20년대부터는 정읍에 공방을 마련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상업적인 시스템을 갖춰나갔던 것으로 보이며, 관련해서는 초상화 100원부터 80원, 화조도병풍 80원 등을 언급한 광고전단지가 남아있어 채용신 공방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1910년대 상황도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광고전단지는 변종필, 「채용신의 초상화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2) 참고.

19)

유미나는 정읍 지역에서 채용신의 활동에 대해 포괄적으로 살펴보면서, 도강 김문의 요청에 따라 〈최치원 초상〉뿐 아니라 초상화 및 여러 수응화를 그렸음을 지적한 바 있다. 유미나, 앞의 논문.

20)

1910년에 채용신이 그렸다는 것은 이두희·이충구 공역, 『석지 채용신 실기』 (국학자료원, 2004), pp. 13-14 및 정읍문화원, 『정읍문화재지』 (정읍문화원, 2017), p. 517에 근거한다. 뒷면에 글이 있다는 언급은 양진희, 앞의 논문, p. 94. 각 주 244 참고.

21)

송정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重修有感譜次辛函梅上韻」에 의거하여 십현이 수계를 맺은 1621년으로 본 견해는 윤희면, 앞의 논문 참고.

22)

이를 처음 언급한 것은 양진희, 앞의 논문, p. 94.

23)

채용신이 1910년 정읍 칠보면에 머물며 박만환의 초상화를 그려준 사실은 국립전주박물관, 『석지 채용신—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2011), p. 82 참조.

24)

1824년에 송정이 새로 세워진 것은 「송정중수기」와 후대 『후송정아집』 기록에 ‘갑신년’이라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다. 「송정중 수기」 는 기사년(己巳年, 1869년)에 관찰사 서상정(徐相鼎, 1813~?)이 지은 글로 현재 송정 안에 편액에 기록되어 있는데, “계유(癸酉, 1813년)년에 김급(金汲), 송치중 등의 후손인 김치응(金致應), 김헌(金獻), 송익흠 (宋益欽)이 구계(舊契)를 고쳐 오랫동안 전하려고 하였다. 갑신(甲申, 1824년)년에 후손이 옛터에 송정을 중신(重新)하였다.”라고 하였다.

25)

윤희면, 앞의 논문, p. 162, 표 1 참고

26)

“天啓後四 甲戌下浣 晩悟公雲孫 致膺□模…” 글자가 일부 지워져서 확인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으나 만오재 김급의 후손 김치응의 이름과 모사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27)

〈칠광도〉가 태인 고현 내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을 넘어서 이 지역에서 도강김씨 문중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본 선행연구는 양진희, 앞의 논문, p. 96 참고.

28)

김직술, 「후송정기」; 정판성 역, 앞의 책, pp. 22-23.

29)

태산사는 현재 정읍 칠보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최익현을 모시던 사당을 말한다.

30)

실제 경물과 문화 유적의 상세한 묘사에 대해서는 박정민, 앞의 논문 참조.

31)

실제 현재 후 송정 근처에는 바위가 있고 ‘후송’이라 각자가 있다. 이 각자는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가 쓴 것으로 전해진다. 「후송정중수기」에는 “간재 전우 선생의 친서로 석벽에 ‘후송정(後松亭)’이라 제서하고 경향의 문인(文人)과 달사(達士)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김진돈, 「절개 높은 선비의 고결한 뜻 기리고자—정읍후송정」, 『새전북신문』 (2013. 7. 15). 1915년, 1922년 두 점의 채용신의 무이구곡도에는 무이도가가 좌우가 반전되어 화면에 적혀 있는데, 〈칠광도〉에서도 바위에 각자가 좌우반전하여 적혀 있다. 무이구곡도 글씨에 대해서는 국립전주박물관, 『석지 채용 신화조·산수화』 (2023) 참고.

32)

박정민, 앞의 논문, p. 190.

33)

채용신의 일생 중 특별한 10가지 순간을 10폭 병풍에 그린 〈평생도〉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장독대에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놓은 표현, 칠곡군수로 부임해서 가는 길에 보았던 장승을 화면 상단에 작게 그리면서도 “관아까지 30리”라고 장승 안에 세세하게 적어 넣은 것 등이 그 일례이다. 민길홍, 「채용신 평생도—편집된 기억의 시각화와 자의식의 표출」, 『미술사학연구』 330 (2023. 12).

34)

등장인물의 성격 및 배경의 분위기에 대한 세부(detail) 묘사를 통해서 내러티브를 실제로 존재하는 상황처럼 느끼게 되는데, 일견 불필요해 보이는 세부 묘사가 오히려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만든다. 정선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매우 작은 점경인물도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정선은 이러한 세부 묘사를 통하여 작품의 감상자들이 그림 속 장소와 여정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다고 하였다. 김가희, 「정선(鄭歚, 1676~1759)의 화가적 정체성과 예술 전략」, 『미술사와 시각문화』 30 (2022), pp. 92-131.

35)

조규희, 「김홍도 필 〈기로세련계도〉와 ‘풍속화’적 표현의 의미」, 『미술사와 시각문화』 24 (2019), pp. 126-157.

36)

별서도를 소유지 그림의 의미로 주목한 연구로 조규희, 「소유지(所有地) 그림의 시각언어와 기능: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 를 중심으로」, 『마술사와 시각문화』 3 (2004. 10), pp. 8-37.

37)

양진희, 앞의 논문, p. 96.

38)

오준선에 대해서는 장선희, 「근대전환기 유학자 後石 吳駿善의 활동 양상에 대한 고찰」, 『한국시가문화연구』 31 (2013), 오준선 초상에 대한 설명과 백립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민길홍, 「초상화 주인공이 흰색 모자를 쓴 이유」, 『아주 특별한 순간—그림으로 남기다』 (국립전주박물관, 2023).

39)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금관조복을 입은 인물의 사진에는 뒤에 책가도가 배설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조사보고서— 책가도 문방도』 (2023), p. 176.

40)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에 대해서는 국립전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학술총서—석지 채용신 초상화』 (2020).

41)

채면묵, 「모송정기」, 『후송유고』, 『전북 선현 문집 해제』 Ⅳ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 전주분원, 2003), p. 439. 김소연은 기록에 언급된 가옥 묘사와 병풍 속 모습이 유사함을 지적하고 초상화 배설 산수화 병풍이 실제 채면묵이 거주했던 곳을 그린 것으로 보았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동감하며 ‘부섭지붕’ 가옥 구조의 구체적 표현을 추가적인 근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김소연, 「채용신 초상화의 도상학—병풍배설형 초상화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연구』 35 (2018), p. 123에서 재인용. 지금도 부안에는 사산서원(士山書院, 원래는 사산사)에 채면묵을 비롯한 4명의 평강 채씨 인물을 배향하고 있다.

42)

부섭지붕으로 공간을 확장하여 사용한 예는 김홍식, 『한국의 민가』 (한길사, 1992), pp. 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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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채용신, 〈칠광도〉 Ch’ae Yongsin,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2.

채용신, 〈송정십현도〉 Ch’ae Yongsin, Songjŏng sip’yŏndo, 1910, Color on Cotton, 119.0×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6)

Fig. 3.

작가미상, 〈송정수계도〉 Author Unknown, Songjŏng sugyedo, 1814, Ink and Color on Paper, 100.0×59.9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Chŏngŭp, p. 37)

Fig. 4.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5.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6.

채용신, 〈송정십현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Songjŏng sip’yŏndo, 1910, Color on Cotton, 119. 0×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6)

Fig. 7.

<송정> Songjŏng Pavilion, Chŏngŭp City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8.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 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9.

<무성리 석불입상> Musŏng-ri Standing Stone Buddha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10.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11.

채용신, 〈칠광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Ch’ilgwangdo, 1910, Color on Cotton, 127.7×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0)

Fig. 12.

채용신, 〈송정십현도〉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Songjŏng sip’yŏndo, 1910, Color on Cotton, 119.0×83.4cm, Songsansa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hwajo·sansuhwa, p. 186)

Fig. 13.

채용신, 〈오준선 초상〉 Ch’ae Yongsin, Portrait of O Chunsŏn, 1924, Color on Silk, 74.0×57.5cm, Private Collection (Jeonju National Museum, Sŏkchi Ch’ae Yongsin ch’osanghwa, p. 117)

Fig. 14.

채용신, 〈용진정사도〉 Ch’ae Yongsin, Yongjin chŏngsado, 1924, Color on Silk, 67.5×40cm, Private Collection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wangjang, p. 38)

Fig. 15.

채용신, 〈채면묵 초상〉 Ch’ae Yongsin, Portrait of Ch’ae Myŏnmuk, 1932, Color on Silk, 118. 8×68cm, Musuem Sol (Photography courtesy of Museum Sol)

Fig. 15-1.

채용신, 〈채면묵 초상〉 세부 Ch’ae Yongsin, Detail of Portrait of Ch’ae Myŏnmuk, 1932, Color on Silk, 118.8×68cm, Museum Sol (Photography courtesy of Museum Sol)

Table 1.

<칠광과 십현의 구성> Composition of Ch’ilgwang and Sip’yŏn

구분 Division 이름 Name 김응빈 김관 이탁 김정 양몽우 김대립 김감 김급 송치중 이상형 송민고 김우직
金應贇 金灌 李倬 金鼎 梁夢禹 金大立 金堪 金汲 宋致中 李尙馨 宋民古 金友直
Kim Ŭngpin Kim Kwan Yi T’ak Kim Chŏng Yang Mongu Kim Taerip Kim Kam Kim Kŭp Song Ch’ichung Yi Sang hyŏng Song Minko Kim Uchik
생몰년 1553~1632 1575~1635 1581~ 1587~1636 1589~1635 1550~? 1590~1662 1591~1643 1591~1643 1585~? 1592~1664 1594~1659
Lifetime
출생지 태인 태인 태인 태인 담양 태인 태인 태인 태인 남원 서울 태인
Place of Birth T’aein T’aein T’aein T’aein Tamyang T’aein T’aein T’aein T’aein Namwŏn Sŏul T’aein
본관 도강 도강 전주 도강 제주 도강 안동 도강 여산 전주 여산 도강
Family Origin Togang Togang Chŏnju Togang Cheju Togang Andong Togang Yŏsan Chŏnju Yŏsan Togang
칠광
Ch’ilgwang
십현
Sip’yŏ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