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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2; 2024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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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시 이력은 2006년 국립전주박물관 〈정읍〉 특별전,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태인 고현동 향약〉 테마전, 2011년 국립전주박물관 〈석지 채용신—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특별전 등에 출품되었으며, 양진희, 「석지 채용신 회화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 박정민, 「1900년대 초 태인 고현내의 경관—칠광도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89 (2020), pp. 189-226; 유미나, 「20세기 초의 정읍과 채용신의 회화 활동」,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논문집』 24-3 (2024), pp. 345-379에서 도강 김씨 수응화 개념으로 다루어졌고, 국립전주박물관 학술총서 『석지 채용신 화조·산수화』 (2023)에서 상세 도판과 함께 소개되었다.
4) 이들은 칠광처럼 서인 계열이었고 대북파에 저항하는 입장이었다. 윤희면, 「朝鮮 後期 兩班士族의 鄕村支配—全 北 井邑의 松亭, 後松亭의 建立을 중심으로」, 『호남문화연구』 25 (1997), p. 158.
6) “萬曆壬子中進士, 時㐫黨倡廢母議, 公與同榜宋致中等六人, 抗 䟽 痛斥不見 納, 遂廢擧業, 放浪湖山, 號爲七狂. 時人高其義, 繪爲七狂之圖.” 尹定鉉, 「贈吏曹判書李公尙馨謚狀」, 『梣溪先生遺稿』 卷之六.
7) “…作松亭七狂之會 或詩或歌或弦或觴或醉或棊或坐或臥 而圖成契帖 尙齒爲序 其山水閭里草樹騾牛之微 亦 莫 不 隨 人可見 自是 益 放 浪倨 傲 爰自號悟 無 齋 以寓微旨 亦號獨醒翁 辛酉又與月峯子鳴川公灌以下十賢 申修舊契 而公爲之首….” 「有明朝鮮國故承仕郞濟用監奉事悟無齋金公行狀」, 『 頥齋亂藁』 卷 四 十二, 二十二日, 庚戌.
8) “得 泰 仁牛山金君光 億 初五答 書 聞四月其仲兄 光直 入 京 得七狂圖一幅以來 余曾聞 其 先 月峯 公大 立 與李修撰 尙馨 宋天安致中 金監察堪 金奉事應贇 宋蘭谷民百 及李逴 六公 當光海時 同稱七狂 游會于古縣 宋天安之松亭 宋蘭谷手墨作契圖分傳 而月峯本孫家無傳者 其宋天安家藏者 則失于外裔居楊根者 惟宋蘭谷家藏 而傳于 其門人京居朴某家者 今幸得之云.” 「七月七日 雲叟先生忌辰也 曉起食素 用朱子慕延平韻志感」, 『頥齋亂藁 卷』 四十一, 七日丁卯.
9) “…自古草澤隱淪 高尙其蹈者亦何限 而鮮有丹靑所傳. … 若湖南七君子, 卽世家華胄, 而天默李公, 以玉署名流. 標望尤別 與五人者 皆甞仕於朝 獨李松隱 止 於 老布 衣 出處顯晦之迹 未必相同 然其歸則一也 觀其臭味相合. 道義砥礪 未甞或畔於吾儒繩墨 要皆法門之遺 莊士之倫 而乃自號 爲七 狂者何哉 誦其書論其世 不知其人可乎 … 天默後孫錫疇甫, 示余詩山畫障子, 畫出於宋蘭谷. 蘭谷在當時七狂中, 以三絶稱者也. 此一幅, 今近二百年, 失而復得, 墨竗不渝, 眞蹟如新, 若鬼護而神相者, 不亦奇乎, 謹盥手而題之.” 「題七狂圖後」, 『豊墅集』 卷之七.
11) 표지에는 ‘후송정아집’이라고 적혀 있지만, 내지에는 ‘후송정정지실기(後松亭亭誌實記)’라고 하였다. 후송정은 10현을 흠모하던 후손들이 1899년에 송정(松亭) 아래쪽 백사장 위쪽 바위 곁에 정자를 짓고 십송정(十松亭)이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후송정(後松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립전주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판본은 2023년 국역된 바 있다. 刊寫者 미상, 丁判聲 譯, 『(國譯)後松亭雅集』 (서울: 가람문화사, 2023).
13) 전혜원, 「석지 채용신의 초상화에 대하여」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석사학위 논문, 1979), pp. 35-36. 전언에 의하면, <송정십현도>는 잃어버렸다가 찾은 것이고, 제목과 참석자 명단이 원래 있었으나 도난 당했을 때 찢어졌다고 한다.
16) 〈영모 도〉에 대해서는 국립전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학술총서—석지 채용신 화조·산수화』 (2023), 도 4, 도판 해설 참고. 어미 호랑이가 새끼 호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언덕 너머 달이 떠 있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하단에는 소나무 두 그루를 배경으로 다람쥐가 그려진 그림이다. ‘석지 채용신이 김제 요교 호문당에서 그리다’라고 하였는데 채용신의 인장이 있지만 글씨를 쓴 사람은 석정 이정직이다. 채용신 그림 관서에서 여러 사람의 필치가 확인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그림이다.
17) 진안 이부용 선생은 이덕응의 현손으로 이덕응 초상을 그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전언해 주셨다. 채용신이 며칠을 이덕응 댁내에 머물면서 초상을 그렸고, 그 이후 집에 불이 났을 때 초상 먼저 꺼내서 화재를 면했다고 한다.
18) 당시 비용이 얼마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지역을 찾아다니며 초상화를 주문 제작 판매했던 채용신은 20년대부터는 정읍에 공방을 마련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상업적인 시스템을 갖춰나갔던 것으로 보이며, 관련해서는 초상화 100원부터 80원, 화조도병풍 80원 등을 언급한 광고전단지가 남아있어 채용신 공방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1910년대 상황도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광고전단지는 변종필, 「채용신의 초상화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2) 참고.
19) 유미나는 정읍 지역에서 채용신의 활동에 대해 포괄적으로 살펴보면서, 도강 김문의 요청에 따라 〈최치원 초상〉뿐 아니라 초상화 및 여러 수응화를 그렸음을 지적한 바 있다. 유미나, 앞의 논문.
20) 1910년에 채용신이 그렸다는 것은 이두희·이충구 공역, 『석지 채용신 실기』 (국학자료원, 2004), pp. 13-14 및 정읍문화원, 『정읍문화재지』 (정읍문화원, 2017), p. 517에 근거한다. 뒷면에 글이 있다는 언급은 양진희, 앞의 논문, p. 94. 각 주 244 참고.
24) 1824년에 송정이 새로 세워진 것은 「송정중수기」와 후대 『후송정아집』 기록에 ‘갑신년’이라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다. 「송정중 수기」 는 기사년(己巳年, 1869년)에 관찰사 서상정(徐相鼎, 1813~?)이 지은 글로 현재 송정 안에 편액에 기록되어 있는데, “계유(癸酉, 1813년)년에 김급(金汲), 송치중 등의 후손인 김치응(金致應), 김헌(金獻), 송익흠 (宋益欽)이 구계(舊契)를 고쳐 오랫동안 전하려고 하였다. 갑신(甲申, 1824년)년에 후손이 옛터에 송정을 중신(重新)하였다.”라고 하였다.
27) 〈칠광도〉가 태인 고현 내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을 넘어서 이 지역에서 도강김씨 문중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본 선행연구는 양진희, 앞의 논문, p. 96 참고.
31) 실제 현재 후 송정 근처에는 바위가 있고 ‘후송’이라 각자가 있다. 이 각자는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가 쓴 것으로 전해진다. 「후송정중수기」에는 “간재 전우 선생의 친서로 석벽에 ‘후송정(後松亭)’이라 제서하고 경향의 문인(文人)과 달사(達士)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김진돈, 「절개 높은 선비의 고결한 뜻 기리고자—정읍후송정」, 『새전북신문』 (2013. 7. 15). 1915년, 1922년 두 점의 채용신의 무이구곡도에는 무이도가가 좌우가 반전되어 화면에 적혀 있는데, 〈칠광도〉에서도 바위에 각자가 좌우반전하여 적혀 있다. 무이구곡도 글씨에 대해서는 국립전주박물관, 『석지 채용 신화조·산수화』 (2023) 참고.
33) 채용신의 일생 중 특별한 10가지 순간을 10폭 병풍에 그린 〈평생도〉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장독대에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놓은 표현, 칠곡군수로 부임해서 가는 길에 보았던 장승을 화면 상단에 작게 그리면서도 “관아까지 30리”라고 장승 안에 세세하게 적어 넣은 것 등이 그 일례이다. 민길홍, 「채용신 평생도—편집된 기억의 시각화와 자의식의 표출」, 『미술사학연구』 330 (2023. 12).
34) 등장인물의 성격 및 배경의 분위기에 대한 세부(detail) 묘사를 통해서 내러티브를 실제로 존재하는 상황처럼 느끼게 되는데, 일견 불필요해 보이는 세부 묘사가 오히려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만든다. 정선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매우 작은 점경인물도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정선은 이러한 세부 묘사를 통하여 작품의 감상자들이 그림 속 장소와 여정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다고 하였다. 김가희, 「정선(鄭歚, 1676~1759)의 화가적 정체성과 예술 전략」, 『미술사와 시각문화』 30 (2022), pp. 92-131.
36) 별서도를 소유지 그림의 의미로 주목한 연구로 조규희, 「소유지(所有地) 그림의 시각언어와 기능: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 를 중심으로」, 『마술사와 시각문화』 3 (2004. 10), pp. 8-37.
38) 오준선에 대해서는 장선희, 「근대전환기 유학자 後石 吳駿善의 활동 양상에 대한 고찰」, 『한국시가문화연구』 31 (2013), 오준선 초상에 대한 설명과 백립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민길홍, 「초상화 주인공이 흰색 모자를 쓴 이유」, 『아주 특별한 순간—그림으로 남기다』 (국립전주박물관, 2023).
39)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금관조복을 입은 인물의 사진에는 뒤에 책가도가 배설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조사보고서— 책가도 문방도』 (2023), p. 176.
41) 채면묵, 「모송정기」, 『후송유고』, 『전북 선현 문집 해제』 Ⅳ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 전주분원, 2003), p. 439. 김소연은 기록에 언급된 가옥 묘사와 병풍 속 모습이 유사함을 지적하고 초상화 배설 산수화 병풍이 실제 채면묵이 거주했던 곳을 그린 것으로 보았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동감하며 ‘부섭지붕’ 가옥 구조의 구체적 표현을 추가적인 근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김소연, 「채용신 초상화의 도상학—병풍배설형 초상화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연구』 35 (2018), p. 123에서 재인용. 지금도 부안에는 사산서원(士山書院, 원래는 사산사)에 채면묵을 비롯한 4명의 평강 채씨 인물을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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