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를 향한 추모와 효심의 공간과 상징물: 경모궁 망묘루와 봉안 어진 연구

A Place and Symbols of Remembrance and Filial Piety for Crown Prince Sado: A Study of Mangmyoru at Kyŏngmogung Shrine and the Enshrined Portrait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4;322():5-32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June 30
doi : https://doi.org/10.31065/kjah.322.202406.001
*Senior Curator,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손명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
Received 2024 May 12; Revised 2024 June 7; Accepted 2024 June 20.

Abstract

본고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 재실의 일부인 망묘루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어진 봉안처로 확립되어 간 과정과 그 기반이 된 봉심 관리 체계를 고찰하고, 문헌에 기록된 봉안 어진들의 도상 및 현전하는 망묘루 봉안 어진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또한, 망묘루의 확장과 위상 강화에 따른 감실 구성 및 배설 병풍의 변화 양상을 검토하였다.

망묘루는 1780년대 초부터 비공식적으로 정조 어진을 모시기 시작했는데, 1791년 정조의 원유관본 어진 소본을 공식적으로 봉안한 이후 고종 대까지 다섯 국왕 총 9본의 어진을 모신 조선 후기 대표적 어진 봉안처로 자리잡았다. 순조와 문조의 어진 봉안 이후 경모궁 망묘루는 정조 어진 소본의 봉안처에서 사도세자의 혈통을 이은 역대 국왕의 어진 봉안처로 성격이 변화했으며 봉안된 어진의 형태도 소본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의 감실에 여러 점의 어진이 함께 봉안되기도 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 현전하는 6본의 망묘루 봉안 어진은 19세기 전반 전통적인 안면 묘사 방식과 음영법을 조화롭게 절충한 화풍에서 19세기 중·후반에는 과감하고 양식화된 음영법이 적용되는 화풍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확인시켜 주었다.

정조 대 마련된 규장각 각신 등이 참여한 정기적 봉심과 관리 체계는 망묘루가 국가적 어진 봉안처로 자리 잡고 후대에 추가적인 어진 봉안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후대 왕들의 어진에 대한 추가 봉안 및 순조 이후 고종 대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진 현왕의 망묘루 전배·봉심으로 망묘루는 규모가 확대되고 위상이 강화되었다. 망묘루의 규모와 위상이 달라짐에 따라 망묘루 감실의 공간 구성뿐 아니라 십장생도병풍이 오봉병으로 바뀌는 등 배설 의물에도 변화를 보였다. 이러한 망묘루의 확장과 위상 강화 속에서 경모궁 정당에 모셔진 사도세자는 망묘루 봉안 어진을 통해 다섯 국왕의 계통의 근원으로 현현할 수 있었다.

Trans Abstract

This paper examines the ascent to prominence of Mangmyoru Pavilion within Kyŏngmogung Shrine, dedicated to Crown Prince Sado, as a principal repository for enshrining royal portraits (御眞, Ŏjin) during the late Chosŏn period. It also explores the regular inspection and management system of both the chambers inside the pavilion and the portraits enshrined there, which formed the basis for its prominence. Furthermore, the paper delves into the iconography and format of the portraits as documented in historical records, as well as the stylistic characteristics of the existing royal portraits from Mangmyoru. Lastly, it considers how the interior chambers and screen paintings installed in the pavilion changed over time.

Mangmyoru began unofficially housing portraits of King Chŏngjo in the early 1780s. With the official enshrinement of a half-length portrait of King Chŏngjo in 1791, the repository ascended to a principal site for royal portraits throughout the late Joseon period, eventually housing nine portraits of five kings during King Kojong’s reign. After the enshrinement of portraits of King Sunjo and King Munjo, Mangmyoru’s role expanded from solely housing King Chŏngjo’s portrait to enshrining portraits of kings in the direct bloodline of Crown Prince Sado. Furthermore, the format of enshrined portraits was not confined to half-length; sometimes, multiple copies of portraits were housed in a single chamber.

The six royal portraits enshrined in Mangmyoru, now part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collection, present the stylistic changes of 19th-century Chosŏn art. Early 19th-century portraits seamlessly blended traditional facial depiction techniques with shading methods, while midto-late 19th-century portraits exhibited bold and stylized shading techniques. The regular inspection and management system for the chambers and the enshrined portraits, established during King Chŏngjo’s reign, cemented Mangmyoru’s role as a premier repository for royal portraits, facilitating the addition of subsequent portraits. The scale and prestige of the repository were further enhanced by the addition of royal portraits, accompanied by regular royal visits and inspections. As the status of Mangmyoru elevated, changes were also made to its spatial arrangement and interior adornment, such as replacing the Ten Longevity Symbols folding screen with the Five Peaks. Through this trajectory, Crown Prince Sado, enshrined in the main hall of Kyŏngmogung Shrine, emerged as the progenitor of the lineage of five kings, represented through the enshrined portraits in Mangmyoru.

Ⅰ. 서론

경모궁(景慕宮)은 왕세자로 영조를 대신해 청정까지 행했으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사당으로 지은 원 건물이 너무 장려하다며 축소해 이건(移建)하도록 하고 수은묘(垂恩廟)란 묘호(廟號)를 내렸다.1 정조 즉위 직후 수은묘 개건 도감을 설치하고, 사도세자의 존호(尊號)를 장헌(莊獻)으로 올리면서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격상하였다.2 경모궁은 개건을 통해 기존보다 3배 이상 규모가 커지고 장대해졌으며, 어재실(御齋室)과 재실(齋室)을 구분해 만듦으로써 국왕의 친제(親祭)가 정기적으로 거행되는 제향 공간의 모습을 갖추었다.3

경모궁에 대해서는 영조 이래 확립된 궁원제(宮園制)에 대한 논의 속에서 조명되고 위상의 변화상 등이 논해졌으며, 개건에 따른 건축 규모의 변화와 관련 도형·도설에 대한 연구 등이 다양하게 행해졌다.4 또, 경모궁 망묘루(望廟樓)에 정조 어진이 모셔진 점을 주목해, 조선 후기 어진 봉안과 봉안처에 대한 개괄적 논의 속에서 망묘루에 대한 검토가 이뤄지기도 했다5 본고는 선행 연구를 토대로 망묘루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어진봉안처로 확립되어 간 과정을 고찰하고, 문헌에 기록된 봉안 어진들의 도상과 형식 및 현전하는 망묘루 봉안 어진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아울러, 기존 연구에서 다루지 않은 망묘루 봉안 어진의 관리와 봉심 체계, 감실 구성과 배설 병풍 등을 검토해 망묘루 위상의 변화상과 기능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Ⅱ. 어진봉안처로서 경모궁 망묘루의 확립 과정

정조 즉위 후 행해진 경모궁 개건 시 재실 10칸 중 1칸을 누각으로 마련하고, 이후 이곳을 ‘사당을 바라보는 누각’이란 뜻을 지닌 망묘루라고 하였다(Fig. 1). 망묘루는 정조가 1791년 어진 도사 후 영조가 소본(小本) 어진을 육상궁에 봉안했던 전례를 따라 본인의 어진 소본 1본(本)을 봉안하면서 어진봉안처로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그런데 정조 재위 초인 1780년 3월에서 1782년 1월 사이의 『일성록』 기록에 정조가 경모궁 전배(展拜) 후 망묘루로 나아가 어진을 펼쳐 봉심[御眞展奉奉審]한 기록이 6차례나 적혀 있어 주목된다.7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 내 재실의 일부인 망묘루란 봉안 장소와 ‘어진’이란 용어를 고려하면, 정조가 직접 망묘루에서 봉심한 어진은 영조나 사도세자의 초상화가 아닌 정조 본인의 초상화로 짐작된다.

Fig. 1.

<本宮全圖說>(세부), 『景慕宮儀軌』 Map of Kyŏngmogung Shrine (detail), in Kyŏngmogung ŭigwe, 1784, Chosŏn, Ink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db.snu.ac.kr)

『경모궁개건도감의궤』(1776)와 『궁원의』(1779)는 「경모궁도」에서 어재실(재전) 위쪽에 자리한 건물을 ‘소차(小次)’로 적고 “소차 10칸”으로만 부기하였다.8 그런데 『경모궁의궤』(1783)와 중간(重刊)된 『궁원의』(1785)는 소차와 동일한 건물을 재실로 표기하고 “10칸 내 망묘루가 1칸”으로 설명하고 있어 1780년경 이후 재실 누각이 망묘루로 칭해졌음을 알 수 있다.9 망묘루란 누각명과 1칸이란 설명의 별도 기재는 해당 공간에 특별한 의미와 기능이 부여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1780년에서 1782년 초에 걸친 정조의 망묘루 어진 봉심 기록은 이 망묘루의 기능과 의미를 확인시켜준다. 즉, 1780년경 재실의 누각에 어진을 봉안하면서 이곳을 망묘루로 칭한 것이다. 당시 망묘루에서 정조가 봉심한 어진은 관련 기록이 찾아지지 않아 특정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다만, 문헌 기록상 1780년 이전 제작된 정조 어진으로 1773년 영조의 80세 어용을 제작할 때 그려졌으나 1781년 8월에 정조가 제작 후 세본(洗本)했다고 언급한 세손 시절의 초상화가 있는데, 이 초상화를 망묘루에 봉안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10 한편, 1781년(신축) 9월 익선관본 대본(정본)과 소본의 정조 어진이 제작된 후, 이 소본 어진으로 기존 망묘루 봉안 어진을 대신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1

1780~1782년 정조가 망묘루 어진을 봉심한 기록은 『일성록』이 정조의 사적 기록물의 성격을 띠던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12 규장각이 『일성록』의 편찬을 공식적으로 맡은 1783년 이후 망묘루 어진 봉심에 대한 기록은 한동안 기재되지 않다가 정조가 신해년(1791) 도사(圖寫) 소본을 망묘루에 공식적으로 봉안한 뒤에서야 다시 나타난다. 1791년 어진의 도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정조는 강사포(원유관) 1본을 경모궁 재실 협실에 봉안할 뜻을 밝히고 봉안 장소를 살펴보도록 명하였다.13 이후 어진의 표제 의식을 앞두고 “정본은 소중한 곳에 모셔 봉안하는 데 써야 하고, 으레 마련하는 소본 한 본은 선조께서 봉안각에 소본을 봉안한 고사(故事)대로 내일 표제를 쓴 뒤에 경모궁의 망묘루에 보관하겠다”고 전교하였다.14 육상궁 봉안각(냉천정)에 소본 어진을 보관한 영조의 고사에 근거해 경모궁 망묘루에 신해년 원유관본 소본의 봉안을 공표한 것은 영조가 어진 봉안으로 생모의 사당에 ‘늘 뫼시는 뜻[常侍之意]’을 대신한 사례를 계승하고 냉천정을 후대 왕의 전배(展拜) 공간으로 확립해 사친묘의 위상을 강화한 사례를 염두에 두었음을 시사한다.15 정조 사후 후대 왕들은 정조의 의도대로 경모궁 전배·전알(展謁) 또는 성생기(省牲器) 의식을 행한 후 망묘루로 가 친히 전배와 봉심을 행하였다.16

경모궁 망묘루는 헌종 대 순조와 문조(효명세자, 익종)의 어진을 추가로 모시면서 봉안 공간의 확장과 열성어진을 봉안한 의례 공간으로서 위상의 강화라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1836년(헌종 2) 11월 순조와 문조(당시 익종)의 신주를 종묘 16실과 17실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준비하는 중 창덕궁 규장각과 연경당에 봉안되어 있던 순조와 문조의 어진을 옮겨 모시는 것에 대한 논의가 행해졌다. 당시 청정(聽政)을 한 순원왕후는 궐내 진전인 선원전을 더 이상 증건(曾建)하지 않기로 결정한 후, 두 왕의 어진을 정조의 진전인 화성 화령전(華寧殿)에 봉안하려 했으나 제향이 행해지는 점을 고려해 뜻을 바꿔 순조의 부친인 정조의 어진이 봉안된 경모궁 망묘루와 순조 생모의 사당인 경우궁(景祐宮) 재실에 나눠 봉안하도록 하였다.17 1837년 4월 순원왕후의 전교로 순조 어진 4본 중 2본, 익종 어진 4본 중 1본이 경모궁 망묘루로 옮겨져 봉안되었다.18

고종 재위 초 편찬된 행정법규집인 『육전조례』(1867)에 따르면, 경모궁 망묘루에는 감실 공간에 모신 정조·순조·문조의 어진 외에도 서협(西挾) 청헌(廳軒)에 『홍재전서』, 『순재고』, 『경헌집』 등 세 국왕의 문집 및 『전성록』, 『영괴대명』, 『용주사기복게』, 『궁원의』, 『화성성역의궤』, 『돈효록』, 『은중경』 등 정조 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사모의 마음과 효성에서 편찬한 서책들이 봉장(奉藏)되어 있었다.19 이와 같이 헌종 대 순조와 문조의 어진을 모시며 확장된 경모궁 망묘루는 사도세자의 혈통을 이은 세 국왕의 어진과 문집, 그리고 사도세자를 향한 효심의 표상인 서책을 봉안한 장소로 왕통을 이은 사도세자의 혈손에 대한 집단적 기념 공간이자 사도세자를 향한 추모와 효심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확립되었다.

경모궁 망묘루의 두 번째 확장은 고종 대 헌종과 철종의 어진을 옮겨 모시면서 이뤄졌다. 1875년 문조(당시 익종)를 세실(世室)로 정하면서, 선원전에 말아 봉안한 헌종의 병오년(1846) 익선관본 대본과 천한전(天漢殿)에 봉안한 철종의 임자년(1852) 어진 2본 및 신유년(1861) 어진 2본을 망묘루로 이봉하기로 하였다.20 신정왕후(1808~1890)의 명으로 문조의 대통을 계승해 왕위에 오른 고종에게 양부인 문조를 종묘에서 신주가 옮겨지지 않는 세실로 삼은 결정은 문조를 높이면서도 고종 본인의 효성을 드러내는 조치였다.21 이와 함께, 경모궁에 문조의 아들이자 사도세자에게는 고손자인 헌종의 어진과 정조의 이복형제 은언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에게 증손자인 철종의 어진을 추가로 봉안하기로 한 결정도 “인정과 예법상 합당한 일”이자 “신리(神理)와 인정에 맞는 것”으로 평가되며 고종의 효심을 빛내고 정통성을 강화해 주었다.22 정조·순조·문조에 이어 헌종과 철종의 어진을 봉안함으로써 경모궁 망묘루는 사도세자의 혈통을 이은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두 모시게 되었다. 경모궁 정당은 사도세자의 혈손인 다섯 왕의 어진이 밤낮으로 항시 “바라보며[望廟]” “우러러 사모하는[景慕]” 공간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사도세자는 다섯 국왕의 계통의 근원으로 현현하였다. 이는 24년 뒤 이뤄진 사도세자의 장조(莊祖) 추존 및 영조의 명으로 효장세자(진종)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은 정조가 장조(사도세자)에게서 혈통과 왕통을 모두 이은 것으로 바뀌는 변화를 예시해 주는 듯하다.23

1899년(광무 3)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장조의 신위를 종묘에 부묘하면서 경모궁은 폐지되었다. 망묘루 건물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으로 옮겨져 평락정(平樂亭)이라 칭해졌으며, 망묘루에 모셨던 어진 모두 평락정으로 옮겨 봉안되었다.24

Ⅲ. 경모궁 망묘루 봉안 어진과 봉심 관리 체계

1. 경모궁 망묘루에 봉안된 어진의 도상과 특징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경모궁 망묘루에 공식적으로 봉안된 최초의 어진은 신해년(1791) 도사한 정조의 원유관본 소본이다. 1791년 9월 어진 도사 시 정조는 영조가 면복본 어진을 그린 50세의 나이에 이르지 않았기에 대신 원유관본 어진 대·소본을 그리고, 동년 10월에 소본 1점을 어련(御輦)에 받들어 경모궁 망묘루에 공식적으로 봉안하도록 했다.25 1791년 원유관본 대·소본의 어진 도사 시 군복본 대·소본도 제작되었는데, 1792년 1월 말 정조의 현륭원 행차에 맞춰 군복본 소본을 가져가 현륭원 재전(齋殿)에 봉안하도록 명하였다.26 생모의 사당인 육상궁의 봉안각에 영조가 생전 자신의 소본 어진을 봉안한 고사를 따랐기에 망묘루와 현륭원 재전에 봉안된 정조 어진 모두 소본이었다. 한편, 기존 1781년에 제작한 익선관본 소본도 있었으나 격식이 더 높은 1791년의 원유관본 소본을 망묘루에 봉안하고 현륭원에는 군복본 소본을 모신 것은 경모궁과 현륭원의 성격을 고려한 조치임을 시사한다. 즉위 직후 정조는 경모궁 개건과 함께 경모궁 제향을 국가 사전(祀典)에서 ‘중사(中祀)’로 정하고 국왕의 친향 시에는 종묘·사직과 같이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인 ‘대사(大祀)’로 규정하였다.27 즉, 국왕이 가장 큰 규모의 제사를 친히 행하는 경모궁의 위상에 맞춰 망묘루 봉안본으로 격식이 높은 복색을 한 원유관본 어진에 육상궁 봉안각의 예를 따라 소본을 봉안한 것이다. 정조는 현륭원에 행행(行幸)할 때 사도세자가 1760년 온천 행행 시 착용한 복색을 따라 군복을 착용했는데, 현륭원 봉안각에도 해당 복색을 따른 1791년 군복본 어진 소본을 봉안해 사도세자의 사업을 계승하고 추모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28

1837년(헌종 3) 4월 순원왕후는 규장각에 봉안된 순조 어진 4본 중 무진년(1808) 익선관본(곤룡포본) 소본과 경인년(1830) 원유관본 대본, 연경당에 봉안된 문조의 어진 4본 중 병술년(1826) 면복본 어진 대본 1본을 경모궁 망묘루로 이봉하고 나머지는 경우궁 성일헌으로 옮기도록 하였다(Table 1).29 규장각에 봉안된 순조 어진은 무진년의 익선관본(곤룡포본) 대·소본과 경인년의 원유관본 대본 및 익선관본 소본이었다.30 그리고 연경당에는 문조 어진으로 병술년(1826)의 면복본 대본, 군복본 대본, 복건본 소본 및 경인년의 익선관본 소본이 봉안되어 있었다.31 경모궁 망묘루 봉안본으로 순조의 경인년 원유관본 대본과 문조의 면복본 대본을 선택한 결정은 국왕의 친향이 대사로 규정된 경모궁의 위상이 반영된 조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순조 생모의 사당인 경우궁 성일헌에는 순조의 무진년 익선관본 대본을 제외하면 복건본, 군복본처럼 법복에서 벗어나는 의복 차림의 어진과 소본이 봉안되었다(Table 2).32 이러한 봉안 어진의 선정은 국가의 공식 제향이 행해진 진전인 영희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국왕의 어진이 대부분 생전 제작한 어진 가운데 면복 또는 원유관본으로 가장 격식 높은 복식을 한 대본인 반면, 궐내 비공식 진전인 선원전은 의복의 격식이나 대·소본 등의 형식적 요건에 구애받지 않고 어진을 봉안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33 또한, 경우궁 재실 봉안본은 영조가 육상궁 재실에 익선관 소본 및 초본 그리고 갓에 도포를 착용한 대본의 어진을 봉안한 선례를 떠올리게 한다.34

<경모궁 망묘루 봉안 어진> Royal Portraits Enshrined in the Mangmyoru Pavilion of Kyŏngmogung Shrine

<경우궁 성일헌 봉안 어진> Royal Portraits Enshrined in the Sŏngilhŏn of Kyŏngugung Shrine

순조와 문조의 어진 봉안 이후 경모궁 망묘루는 정조 소본 어진의 봉안처에서 사도세자의 혈통을 이은 역대 국왕의 어진 봉안처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봉안된 어진의 형태가 소본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하나의 감실에 여러 점의 어진이 함께 봉안되기도 하였다. 1858년에는 영희전 제6실(순조실)의 증건으로 망묘루에 봉안된 순조의 경인년 원유관본 대본 어진이 영희전으로 옮겨졌다. 1875년 고종이 망묘루에 헌종과 철종의 어진 봉안을 결정하며 망묘루는 5개의 감실을 갖추게 되었다. 제4실에는 선원전에 봉안되었던 헌종의 병오년(1846) 익선관본 대본 어진을 모시고, 제5실에는 천한전에 있던 철종의 임자년(1852) 면복본 대본 및 익선관본 소본, 신유년(1861) 원유관본 대본과 군복본 대본을 봉안하였다.35

경모궁이 폐지된 후 선희궁 평락정으로 옮겨진 망묘루 봉안 어진은 1908년 제사 제도의 개정[享祀釐正]에 따라 다시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졌다가 1921년 신선원전으로 이봉되었다.36 신선원전에 보관되던 조선 국왕의 어진들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부산으로 옮겨졌으나 1954년 용두산 화재로 다수가 소실되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망묘루 봉안 어진 9본 가운데 얼굴과 의복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철종 어진(군복본)〉과 얼굴·복식·명문 등의 일부분만이 남은 5본의 어진이 전해져 일부나마 당시 어진의 모습과 양식을 살펴 볼 수 있다(Table 1).37

〈순조 어진(익선관본)〉으로 추정되는 반신상(小本)은 익선관 일부와 입술 주변 및 홍색 곤룡포의 일부분만이 남아 있다(Fig. 2). 입술 위로 듬성듬성 난 짧은 수염과 맑은 안색의 표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젊은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20세 전후에 익선관본 소본의 어진을 제작한 왕은 순조, 헌종, 철종이 있다.38 헌종의 병오년(1846) 도사 어진 소본은 헌종 사후 선원전에 봉안되어 1900년 화재로 소실되었기에, 순조와 철종의 익선관본 소본만이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었다.39 이 어진은 현전하는 철종 어진 3본에 보이는 뚜렷해진 명암의 대비, 갈색의 선을 이어 그려 살결을 묘사해 낸듯한 양식화된 필묘법과는 거리가 있다.40 담갈색의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그리고 인중과 입술 주변 등 안면의 굴곡을 은은한 선염을 이용한 농담의 차이로 구현한 방식, 단정하게 다문 또렷한 윤곽의 선홍색 입술, 의복의 주름 선 주위를 선염해 표현한 음영 등에서 18세기 말 이명기와 김홍도가 합작한 〈서직수 초상〉(1796)에 보이는 화풍과 유사성을 보인다(Fig. 3). 전통적인 초상화법에 명암법을 조화롭게 절충한 면모뿐 아니라, 용보의 정면을 향해 똬리 틀고 있는 용을 금색으로 칠한 뒤 다시 금선으로 얼굴을 그리고 몸통 비늘 내부에 짧은 선을 그려 넣어 질감과 문양 효과를 살리고 있는 점도 18세기 후반 이뤄진 화원계의 뛰어난 성과가 지속된 19세기 전반 궁중 회화의 수준을 반영해 준다. 따라서 이 반신상 어진은 망묘루에 봉안된 순조의 무진년(1808) 익선관본 소본으로 볼 수 있다.

Fig. 2.

Unidentified artist, Portrait of King Sunjo (details), 1808, Chosŏn, Colors on Silk, 134.5×80.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Fig. 3.

Yi Myŏnggi and Kim Hongdo, Portrait of Sŏ Chiksu (details), Chosŏn, Colors on Silk, 148.8×72.4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한편, 〈순조 어진(원유관본)〉은 오른쪽 상단에 “연덕현도 경인순희 왕의 춘추 41세 어진이다. 즉위 30년 경인년 3월에 그렸다(淵德顯道景仁純禧王春秋四十一歲御眞 卽阼三十年庚寅季春圖寫)”라는 표제가 순조 사후 경모궁 망묘루에 봉안된 원유관본 대본임을 알려준다(Fig. 4). 화재로 화면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으나, 원유관에 강사포 차림을 한 순조가 용무늬 화문석 위에 놓인 교의에 앉은 전신좌상의 대체적 구도 및 짧은 세로선을 색상을 달리하며 비스듬히 이어 그려 화문석의 재질감과 엮인 문양을 정교하게 표현해 낸 세부 묘법을 확인할 수 있다.

Fig. 4.

Kim Kŏnjong and eight other painters, Portrait of King Sunjo, 1830, Chosŏn, Colors on Silk, 231.3×121.4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익종…효명대왕 십팔세 어진(翼宗…孝明大王 十八歲 御眞)”이란 표제가 있어 병술년(1826) 도사한 효명세자의 예진임을 알 수 있는 〈문조 어진(면복본)〉은 화면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으나 왼뺨과 귀의 표현에 보이는 갈색 선과 은은한 선염 위주의 묘사 방식, 옷 주름 선 주위로 의복보다 진한 색상을 칠해 입체감을 살린 표현에서 전통적 안면 묘사 방식과 음영법의 절충을 확인할 수 있다(Fig. 5). 이와 달리, 현전하는 철종 어진 3본은 더욱 과감하고 양식화된 음영법의 적용 양상을 드러낸다. 〈철종 어진(면복본)〉(1852)과 〈철종 어진(원유관본)〉(1861)의 교의 팔걸이에 보이는 명암의 두드러진 대비, 〈철종 어진(군복본)〉(1861)의 안면에서 곡선의 가는 갈색 선을 중첩해 마치 살결을 그려 넣은 듯 보이는 필묘법 등은 19세기 중엽 어진 화풍의 변화 양상과 함께 이들 어진 제작의 주요 화원이었던 이한철·조중묵 등의 화법의 일례를 보여준다(Fig. 6, 7). 이상의 현전 망묘루 봉안 어진은 〈철종 어진(군복본)〉을 제외하면 일부분만이 남아 있지만 19세기 어진의 화풍과 양식의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자료로 의미가 있다.

Fig. 5.

Unidentified artist, Portrait of King Munjo (Crown Prince Hyomyŏng), 1826, Chosŏn, Colors on Silk, 148.6×45.2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Fig. 6.

Yi Hanch’ŏl, Cho Chungmuk, and three other painters, Portrait of King Chŏljong, 1852, Chosŏn, Colors on Silk, 212×117.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Fig. 7.

Yi Hanch’ŏl, Cho Chungmuk, and seven other painters, Portrait of King Chŏljong, 1861, Chosŏn, Colors on Silk, 294×112.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2. 경모궁 망묘루 봉안 어진의 봉심 관리 체계

1791년 신해년 원유관본 소본 어진을 경모궁 망묘루에 공식적으로 봉안한 뒤, 정조는 경모궁 망묘루 어진에 대한 봉심 등 관리 체계를 마련해 갔다. 1792년 8월 7일 정조는 추향대제를 앞두고 경모궁 전배와 제향에 쓸 제기·제물을 살피는 성생기 의식 후 망묘루 가을 대봉심을 친히 행했는데, 당시 규장각 원임제학이자 경모궁도제조였던 채제공이 참여하였다.41 1792년 이후 경모궁 망묘루의 봄·가을 대봉심을 규장각 시원임 각신 등이 행하고 왕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마련되어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42 봄·가을 대봉심 외에도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삭망(朔望)]에 경모궁 망묘루 겸별감(兼別監)이 어진의 봉심 내용을 내각(內閣, 규장각)을 통해 왕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확립되어 역시 19세기 말까지 행해졌다.43 『육전조례』(1867)에 기록된 경모궁 망묘루에 대한 규정은 망묘루 봉심 절차를 좀 더 명확히 알려준다.44 매해 봄과 가을 경모궁 봉심일에 각신과 경모궁 제조가 망묘루 어진을 봉심하고, 의물이 손상된 것이 있으면 내각에서 호조로 이문(移文)해 고치거나 다시 만들 곳을 개비(改備)했다. 이때 예조가 날을 잡고 호조가 거행했으며 각신과 제조가 감독하였다. 매 삭망에는 겸관관원(兼管官員)의 봉심 후 경모궁 수복 중 1인으로 내각에서 별단을 올려 임금의 재가를 받은 인물인 겸별관이 내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위에서 살핀 경모궁 망묘루 어진의 관리와 봉심 체제는 1792년 5월 수원 현륭원 어진봉안각의 응행절목(應行節目)을 마련하면서 함께 체계화된 것으로 보인다.45 정조는 현륭원을 관리하는 원관(園官)이 어진봉안각을 겸하여 관장하고 참봉과 수복이 별감을 겸하며 하속(下屬) 역시 겸관(兼管)하도록 하였다.46 이는 망묘루에 경모궁 관원이 겸하여 관장하는 겸관관원과 경모궁 수복 중 1인이 별감을 겸하는 겸별감을 둔 것과 동일하다. 두 봉안처의 춘추 대봉심과 삭망 봉심이 기록에 나타난 시기도 유사하다. 현륭원 어진봉안각의 경우도 1792년 8월부터 각신과 수원부유수가 행하는 봄·가을 대봉심이 시작되었으며, 1794년부터 삭망 봉심 결과에 대해 망묘루처럼 현륭원 봉안각 겸별감이 내각에 보고하고 그 내용이 왕에게 보고되었다.47

경모궁 망묘루와 현륭원 어진봉안각에 봉안된 어진의 봉심과 관리에 규장각이 주요 역할을 하고 있는데는 어제(御製), 어서(御書) 및 어진의 봉안소란 규장각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48 정조는 1781년 어진 정본과 소본을 도사한 직후 어진의 규장각 봉안 및 이안, 봉심 등의 절차와 절목을 마련하고 이를 『규장각지(奎章閣志)』(1784)에 기재하였다.49 이로써 현왕 어진의 봉안, 봉심 및 입직(入直) 등을 통한 관리가 규장각의 업무가 되었으며, 정조는 “어진을 수호하는 것은 바로 각신의 직책”이라며 강조하기도 했다.50 1791년 도사한 소본 어진을 경모궁 망묘루와 현륭원 봉안각에 봉안하도록 한 정조의 조치는 규장각의 정조 어진에 대한 관리 범위가 본각(本閣)을 넘어 경모궁과 현륭원의 어진봉안처로 확대되도록 하였다.

망묘루와 현륭원 봉안각에 대한 봉심은 규장각 본각의 어진 봉심과 차별화되었다. 1781년 마련된 규장각 어진 봉심 절목에 따르면, 매년 봄과 가을의 첫 달(春秋孟朔, 음력 1월과 7월)에 왕세자가 시원임 각신을 거느리고 길일을 택해 봉심하고, 봄·여름·가을·겨울의 첫 달(四孟朔, 1·4·7·10월) 보름(望日)에는 시원임 각신이 일제히 봉심하며, 매달 5일 간격(每朔間五日)으로 제학·직제학 중 1인, 직각·대교 중 1인이 인원을 갖추어 봉심하는 절차가 있었다.51 문효세자의 이른 사망과 뒤늦게 얻은 순조의 어린 나이로 정조 대 규장각 어진에 대한 왕세자의 봉심은 행해지지 못했으나, 1781년 이후 사맹삭 망일의 대봉심과 매달 5일 간격으로 거행하는 봉심이 정기적으로 행해졌다.52 규장각 봉안 어진에 대한 봉심과 비교할 때, 망묘루와 현륭원 봉안각은 경모궁 대제조 또는 수원부유수 및 시원임 각신의 봄·가을 대봉심과 겸관관원의 삭망 봉심을 수행해 좀 더 간략화·간소화된 양상을 보인다. 대봉심을 행하는 각신의 규모 또한 축소되었는데, 각신이 일제히 참여하는 규장각과 달리 직제학 또는 검교직각 등의 각신 1인 만이 경모궁 제조 또는 수원부유수와 함께 대봉심을 거행하였다.53

규장각 어진 봉심에 비해 간략했지만 경모궁 망묘루와 현륭원 어진봉안각의 봉심 제도는 두 곳을 제향이 행해지는 외방진전을 제외한 궐 밖 어진봉안처로는 이례적으로 당상관급인 시원임 각신과 경모궁 제조 또는 수원부유수의 정기적인 대봉심이 거행되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행해지는 봉심 내용이 국왕에게 공식 보고되는 공간으로 확립해 주었다. 어진의 봉안과 규장각이 관여하는 정기적인 어진 봉심 관리 체계는 경모궁과 현륭원을 육상궁 등 다른 사친의 사당 및 묘소와 차별화하며 격상된 위상을 드러낸다. 정조 사후 현륭원 어진봉안각은 봉안 어진의 화령전 이봉으로 폐지되었으나 경기전 망묘루는 19세기 말까지 지속되며 확장되었다. 망묘루의 체계적인 봉심과 관리 체제는 정조 사후에도 후대 왕들의 어진이 망묘루에 추가적으로 봉안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Ⅳ. 경모궁 망묘루의 감실 구성과 배설 병풍

경모궁 망묘루에서 어진을 봉안한 공간은 합 안(閤內)의 온돌이 설치된 곳이었다.54 이곳에 봉안된 정조의 신해년(1791) 원유관본 소본은 정조 재위 기간 펼쳐져 봉안(展奉)되었다.55 정조 대 규장각 봉안 정조 어진을 어탑[어좌] 위의 함(櫃) 안에 넣어 보관하고 대봉심 때만 전봉한 것을 고려하면, 망묘루의 상시 어진 전봉은 이례적이었다.56 망묘루에 어진을 공식적으로 봉안한 3개월 뒤인 1792년 1월 현륭원 재전에 신해년 도사 군복본 어진 소본을 봉안하면서 정조는 “남쪽을 향해 봉안하는 것이 진실로 좋으나 만일 동쪽의 협실에 서쪽을 향해 봉안한다면 원소(園所)를 항상 바라보고 의지하며 사모하는 뜻이 더욱 인정과 예의에 흡족할 것이다”라고 하며 어진을 옮겨 모실 때 펼쳐 봉안하도록 하였다.57 망묘루에 어진을 전봉한 조치도 펼친 어진으로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경모궁 정당을 항시 바라보며 모시고자 한 정조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정조 재위 기간 전봉되던 어진은 정조 사후 노출에 따른 어진의 습기 피해에 대한 우려로 함 안에 말아 봉안(捲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58

1837년 순조와 익종의 어진에 대한 망묘루 이봉을 준비하면서, 망묘루의 동서 두 방 사이에 있는 마루(廳軒)를 온돌로 바꾸어 두 임금의 어진을 위한 감실을 조성하고 대신 서온돌을 마루로 바꾸기로 하였다.59 이때 함께 행해진 망묘루의 감실 구성과 배설(排設) 의물(儀物)에 대한 논의는 정조 대 마련된 망묘루 감실과 헌종 초 확장된 망묘루 감실의 구성 및 배설 병풍의 변화를 알려준다.

“(이)지연이 아뢰기를, 봉안할 때에는 마땅히 오봉병을 써야 하는데 망묘루에 예전에 배설한 병풍은 십장생도입니다. 이번에 봉안할 때 이 병풍을 더 만들어 배설해야 합니까? 오봉병을 만들어 배설해야 합니까? 대왕대비전이 이르기를, 오봉병 3좌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지연이 아뢰기를, 망묘루의 면장(面帳)은 본래 홍초(紅綃)로 만들었는데 조금 색이 바랬으니 지금 장차 개비해야 할 터인데 장보각의 예에 따라 홍갑사(紅甲紗)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고 경우 궁 봉안처소는 마땅히 당가(唐家)를 써야하는데 망묘루는 본디 당가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장기(帳機)를 배설했으니, 이번에 당가 3좌를 만들어 함께 들여보내 배설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면장과 장기는 한결 같이 옛 제도대로 하고 초(綃)는 특별히 직조하여 사용하며 경우궁에 봉안할 때에도 이 제도를 사용하되 당가를 쓰지 말라.”60

위 기사에 따르면 정조와 순조 대까지 경모궁 망묘루 감실은 당가 없이 단지 홍초 면장과 이를 다는 틀(장기)을 설치하고 뒤로는 십장생도병풍을 펼쳐 위의를 갖추었다. 당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규장각의 예를 따르면서 의물의 격식을 간략히 하고자 한 의도를 보여준다.61 위 기사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망묘루 감실에는 병풍과 함께 어탑(御榻)도 배치되었다.62 어탑은 비슷한 시기 조성된 현륭원 어진봉안각에 병풍과 평상(屛床)을 두었다는 기록에 미루어 볼 때 평상 형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63 규장각 어진봉안처에 배치된 어탑의 경우 영희전 어탑에 비해 좀 더 작은 규모였다.64 영희전 어탑은 윗면에 연잎 장식 기둥의 난간을, 밑면에는 구름 문양 발을 단 용평상이었다(Fig. 8).65 따라서, 망묘루의 어탑도 평상으로 규장각의 사례를 따라 영희전 용평상과 유사하나 규모가 작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Fig. 8.

Illustration of a Royal Platform with Gilt Dragon Patterns (yongpyŏngsang), in Pumyo togam ŭigwe, 1778, Chosŏn, Ink and Color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db.snu.ac.kr)

장기와 어탑의 간단한 감실 구성과 함께, 기존 망묘루에 오봉병이 아닌 십장생도병풍을 배설한 점 또한 주목된다. 십장생도병풍은 왕실의 가례, 대왕대비 등의 축수(祝壽)를 위한 왕실 잔치(진연·진찬)에 주로 사용된 병풍이다.66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했을 당시 봉수당에서 행한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진찬례)에서 혜경궁이 자리한 봉수당의 온돌방과 전퇴(前退) 부분에 위치한 왕의 자리에 모두 십장생도병풍 1좌씩을 설치하기도 했다.67 영조가 본인의 어진으로 강화도 장녕전에 봉안한 숙종 어진을 모시고자 1745년(영조 21)에 설치한 만녕전(萬寧殿)에는 영조 어진 봉안을 위해 당시 오봉산병풍(오봉병)을 사용하였다.68 정조가 현륭원 어진봉안각의 절목을 마련하며 영조가 1745년 시행한 강화부 만녕전의 예를 많은 부분 참조한 사실을 고려할 때, 기존 망묘루에 배설된 십장생도병풍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사친에 대한 정조의 배려를 보여준다.69 또한, 망묘루가 어진봉안처소로 확립된 정조 대까지 오봉병이 국왕의 어진 봉안 시 반드시 펼쳐져야 하는 의물로 자리 잡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시해준다.

위 기사에서 순원왕후는 세 임금의 어진을 모실 각 감실에 기존의 예를 따라 당가 없이 장기만을 배설하고 전면의 홍초장을 설치하도록 했으나, 병풍의 경우 기존의 십장생도병풍 대신 오봉병을 만들어 사용하도록 했다. “(어진을) 봉안할 때 마땅히 오봉병을 써야하는데”라는 신하의 발언과 오봉병 3좌를 사용토록 한 순원왕후의 결정은 헌종 초 당시 국왕의 상징물인 오봉병이 어진 봉안 시 필수 의물로 자리매김했음을 알려준다. 이에 따라 일렬로 늘어선 세 개의 감실에 각각 펼쳐진 오봉병은 망묘루 감실 공간의 위격(位格)을 시각적으로 한층 더 높여주었을 것이다.

1844년(헌종 10)에는 망묘루 어진봉안처소의 온돌을 고쳐 모두 마루로 바꾸었다.70 이후, 고종 13년(1876) 헌종 어진 1본과 철종 어진 4본의 봉안을 위해 경모궁 망묘루의 증축이 행해졌다.71 이 증축 공사로 망묘루 내 감실은 3개실에서 5개실로 늘어났다. 당시 망묘루 내부 모습은 1894년(고종 31) 경모궁에 일본군이 난입한 뒤 이뤄진 봉심 결과에 대한 보고에서 유추할 수 있다.

“또 망묘루로 가서 분합을 깨부순 다음 각 실의 문을 다 열고, 또 어재실과 동쪽 재실도 분합을 깨부수었습니다. … 제조 서정순이 달려가 봉심하니, 전(殿) 안은 안녕하였고 열성 어진도 안녕하였고 합 안(閤內)과 함(櫃子) 안은 모두 손상되거나 잃어버린 물건이 없었습니다만, 제4실 용상(龍床)의 동쪽 용두(龍頭)가 손상되었는바 … 황송함을 금할 수 없어 대죄합니다.”72

위 기사는 19세기 말 망묘루의 분합문을 열고 들어가면 5개의 감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실마다 문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 “용상의 동쪽 용두”의 손상에 대한 언급에서 용상은 경운궁 선원전 관련 의궤에 기록된 뒷면의 등받이가 있고 좌우 팔걸이에 용머리 장식을 단 긴 의자형으로 추측할 수 있다(Fig. 9).73 즉, 고종 대 망묘루 감실에는 평상형 어탑 위로 용두 장식을 한 용상이 올려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처럼, 추가적인 어진 봉안과 감실의 확장으로 망묘루의 성격이 달라지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망묘루 감실의 공간뿐 아니라 의물의 구성과 배치도 조금씩 변화하였다.

Fig. 9.

Illustration of a Royal Bench (yongsang) with Dragon-head Decorations, in Yŏngjŏng mosa togam ŭigwe, 1900, Korean Empire, Ink and Color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db.snu.ac.kr)

Ⅴ. 결론

경모궁 망묘루는 비공식적이었으나 1780년대 초부터 정조 어진을 봉안한 어진 봉안처로 기능했으며, 정조가 1791년 어진 도사 직후 원유관본 소본을 공식적으로 봉안하면서 공식 봉안처로 변모했다. 헌종 대 순조와 문조의 어진을 추가로 모시면서 망묘루는 봉안 공간의 확장과 열성어진의 봉안처로서 위상의 강화라는 변화를 맞이했다. 사도세자의 혈통을 이은 세 국왕의 어진과 문집, 그리고 사도세자를 향한 효심의 표상인 서책을 봉안하며 왕통을 이은 사도세자의 혈손에 대한 집단적 기념 공간이자 사도세자를 향한 추모와 효심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확립되었다. 1875년 헌종과 철종의 어진 봉안으로 망묘루는 두 번째 확장이 이루어졌으며, 경모궁 정당은 사도세자의 혈손인 다섯 왕의 어진이 밤낮으로 항시 바라보며 사모하는 장소가 되었다.

망묘루에 봉안되었던 9본의 어진 중 〈철종 군복본 어진〉(1861)과 5본의 잔편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해지는데, 조선 후기 어진의 대다수가 소실된 상황에서 이들 어진은 비록 일부분이지만 19세기 전반 전통적인 안면 묘사 방식과 음영법을 조화롭게 절충한 화풍에서 19세기 중·후반에는 과감하고 양식화된 음영법이 적용되는 화풍으로 변화한 양상을 확인시켜 준다. 망묘루 봉안 어진에 대해서는 정조 대 시원임 각신과 경모궁 제조가 참여하는 봄·가을 대봉심 및 겸관관원의 삭망 봉심 후 겸별감이 내각에 보고하는 관리 체계가 마련되었으며, 망묘루는 정조 사후 현왕이 경모궁 전배 뒤 친히 들러 전배와 봉심을 행하는 공간으로 확립되었다. 망묘루 내 어진을 모신 감실은 정조와 순조 대까지 당가 없이 홍초 면장 및 이를 다는 틀만 설치하고 온돌 위로 평상형의 어탑을 놓고 십장생도병풍을 펼쳐 위의를 갖추었다. 헌종 대에는 감실의 온돌을 마루로 바꾸었으며, 십장생도병풍 대신 오봉병을 만들어 사용했다. 19세기 후반의 망묘루는 일렬로 배치된 5개의 감실을 갖추었는데, 감실마다 문이 설치되고 평상형의 어탑 위로는 용두 장식을 단 긴 의자형의 용상이 올려졌다.

이상과 같이, 경모궁 망묘루는 정조 대 공식적인 어진 봉안과 봉심 규정의 마련으로 국가적 어진봉안처로 자리 잡았으며, 헌종과 고종 대에 후대 왕들의 어진을 봉안함으로써 규모가 확대되고 위상이 강화되었다. 망묘루의 감실은 이러한 변화에 걸맞게 지속해서 증설되고 배설 의물에도 변화를 보였다. 망묘루에 봉안된 어진을 통해 경모궁 정당에 모셔진 사도세자는 다섯 국왕의 계통의 근원으로 현현할 수 있었다.

Notes

1)

최성환, 「사도세자 추모 공간의 위상 변화와 永祐園 천장」, 『조선시대사학보』 60 (2012), pp. 158-160.

2)

『정조실록』 권1, 정조 즉위년(1776) 3월 12일 계미; 3월 20일 신묘.

3)

최성환, 앞의 논문, pp. 163-164; 정송이·한동수, 「경모궁 건축특징의 변화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33-2 (2013), pp. 211-212.

4)

정경희, 「조선후기 宮園制의 성립과 변천」, 『서울학연구』 23 (2004), pp. 157-193; 정경희, 「정조대 사도세자 관련 宮·園의 변천과 의의」, 『분류별 의궤해설집』 (서울대 규장각, 2005), pp. 103-121; 최성환, 앞의 논문, 139-181; 김세영, 「사도 세자 廟宇 건립과 「景慕宮舊廟圖」 연구」, 『장서각』 28 (2012), pp. 237-264; 유재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지도—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작업과 事蹟圖」, 『미술사연구』 33 (2017), pp. 7-37.

5)

조선미, 『한국 초상화 연구』 (열화당, 1983), pp. 122-123; 조인수, 「조선 후반기 어진의 제작과 봉안」, 『다시 보는 우리 초상의 세계—조선시대 초상화 학술논문집』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pp. 27-31; 김지영, 「19세기 眞殿 및 御眞奉安處 운영에 대한 연구」, 『장서각』 26 (2011), pp. 162-187.

6)

위의 주;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0월 7일 무신.

7)

『일성록』 정조 4년 3월 15일 갑오; 4월 24일 임신; 6월 1일 무신; 7월 1일 정축; 정조 5년 3월 6일 기묘; 정조 6년 1월 6일 계묘.

8)

『景慕宮改建都監儀軌』 (1776), 「景慕宮改 建圖」; 『宮園儀』 (1779), 「圖說」景慕宮圖; 『경모궁의궤』 (1783),「本宮全圖設」『궁원의』는 1779년(정조 3) 간행한 책을 예각(藝閣)에서 1800년에 신전(新鐫)한 판본이며, 이후 1785년 중간되었다.

9)

경모궁의궤』 (1776 ~1783), 「本宮全圖說」; 『宮園儀』乾 (1785), 「景慕宮圖說」. “齋室 十間內望廟樓一間 望廟樓 見上.”

10)

진준현, 「영조·정조대 어진도사와 화가들」, 『서울대학교박물관 연보』 6 (서울대학교박물관, 1994), pp. 28-31; 윤진영, 「장서각 소장 『어진도사사실』의 정조~철종대 어진도사」, 『장서각』 11 (2004), pp. 286-294; 『승정원일기』 정조 5년 8월 26일 병신. 영조 재위 기간 어진의 비공식적 제작과 봉안이 이뤄진 선례가 있다. 손명희, 「영조어진과 봉안처에 대한 재고찰: 어진의 다양성과 의미, 봉안처의 기능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103 (2023b), pp. 205-236 참조.

11)

창경궁 동쪽에서 경모궁 서쪽으로 이어지도록 월근문과 일첨문을 만들고 의위(儀衛)없이 승지·사관과 입직한 총부, 병조의 당상·낭청 정도만을 수행토록 한 채 여를 타고 간소하게 경모궁을 빈번하게 방문했던 점을 고려하면, 신축년 소본을 규장각에서 경모궁 망묘루로 비공식적으로 옮기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실록』 권8 정조 3년(1779) 10월 10일 경신; 『홍재전서』 권177, 「일득록」 17, 훈어 4.

12)

『일성록』은 세손 시절 정조의 개인 일기로 시작되었는데, 재위 7년(1783)부터 정조 자신이 작성하던 것을 규장각 각신이 작성한 후 본인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허태용, 「규장각의 『日省錄』 편찬과 正祖의 정통성 강화」, 『한국문화』 103 (2023), pp. 248, 255-264, 269.

13)

『일성록』 정조 15년 9월 29일 신축.

14)

『일성록』 정조 15년 10월 6일 정미. 표제 쓰기를 마친 후 어진 소본을 어련(御輦)에 받들어 경모궁에 나아가 망묘루에 봉안할 때 각신들이 모두 수행[배진(陪進)]하도록 했다 (『일성록』 정조 15년 10월 7일 무신). 이날의 『일성록』 기사들에서 정조는 어진 소본의 경모궁 망묘루 보관이 영조의 고사를 준용하고, (어버이를) 아침저녁 문안하는 예 [替省定之禮]를 대신하며 우러러보고 의지하는 생각 [寓瞻依之思] 을 부치는 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15)

『영조실록』 권120, 영조 49년 3월 8일 정유. 영조 말년 어제를 통해 육상궁 냉천정을 후대 왕의 전배처로 확립한 내용은 손명희, 앞의 논문, 2023b, pp. 232-233.

16)

정조 사후 국왕의 망묘루 전배·봉심에 대한 기록은 『일성록』에서 순조 2년 이후 고종 30년(1893)까지 지속적으로 찾아진다. 『일성록』 순조 2년 9월 9일 정축; 순조 4년 7월 29일 을묘; 고종 30년 1월 3일 정해 등 60여 건. 『일성록』 순조 2년 9월 9일 정축; 순조 4년 7월 29일 을묘; 순조 5년 7월 20일 경오; 8월 3일 계미 등 다수.

17)

『헌종실록』 권3, 헌종 2년 11월 14일 계사.

18)

『헌종실록』 권4, 헌종 3년 4월 7일 갑인.

19)

『六典條例』 권5 (1867), 「禮典」. 景慕宮, 望廟樓.

20)

『고종실록』 권12, 고종 12년 11월 25일 무오; 『승정원일기』, 고종 12년 12월 10일 계유. 철종 어진 4본의 목록은 [Table 1] 참조(『선원전영정수개등 록』 (1935), 「御眞影幀修補工程明細書」, 제10실).

21)

『승정원일기』 고종 12년 11월 25일 무오.

22)

『일성록』 고종 12년 11월 25일 무오.

23)

『선원계보기략』 (1900), 「선원세계」.

24)

『고종실록』 권 39 고종 36년(1899) 9월 1일.

25)

『일성록』 정조 15년 9월 28일 경자; 10월 7일 무신.

26)

『일성록』 정조 16년 1월 22일 임진. 1791년 어진도사 시 원유관본 대·소본과 함께 군복본 대·소본이 제작되었음은 윤진영, 「화령전 정조 어진의 이봉 내력」, 『조선시대사학보』 87 (2018), pp. 223-255.

27)

『宮園儀』 上 (1780), 「辨祀」; 『춘관통고』 권14, 「길례」, 景慕宮, 辨祀.

28)

『일성록』 정조 24년 3월 17일 기사.

29)

『헌종실록』 권4, 헌종 3년 4월 7일 갑인; 『선원보략수정의궤』 (1837) 권1, 來關秩, 四月日.

30)

『선원보략수정의궤』 (1837) 권1, 來關秩, 四月日.

31)

손명희, 「회화를 통해 본 효명세자의 삶」,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국립고궁박물관, 2019), pp. 175-177. 『승정원일기』 1837년 1월 16일 기사는 익종의 법복본과 면복본이 대본인 것으로 적었으나, 동일자 『일성록』의 기사는 군복본과 면복본이 대본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승정원일기』 헌종 3년 1월 16일 갑오; 『일성록』 헌종 3년 1월 16일 갑오). 그런데 1846년 경우궁 성일헌에서 선원전으로 이봉한 익종어진에 대한 기록에 ‘군복본병술대본’과 ‘익선관 본경인소본’이 명시되어 군복본이 대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내각일력』 1846년 8월 6일 무오).

32)

주 29, 주 31 참조.

33)

손명희, 「조선 후기 선원전의 제물과 제기, 의장, 그리고 봉안 어진의 성격과 기능」, 『미술사학연구』 312 (2021) pp. 57-61.

34)

손명희, 앞의 논문, 2023b, pp. 227-234.

35)

철종어진 4본의 목록은 『선원전영정수개등록』 (1935), 「御眞影幀修補工程明細書」 참조.

36)

『순종실록』 권2, 순종 1년(1908) 7월 23일.

37)

한국전쟁 당시 신선원전에서 부산으로 옮겨진 후 1954년 용두산 화재 후 수습된 어진들이 『고궁서화』 Ⅱ (국립고궁 박물관, 2019)에 소개되었다.

38)

고종어진은 1872년(고종 9)과 1902년(광무 6년) 도사되었는데 20대 초인 1872년 제작된 소본 어진은 군복본과 복건본이었다. 『선원계보기략』 (1932), 「선원세계」; 『선원보략수정의궤』 (1902~1904), 「來照」, 光 武八年五月十五日.

39)

헌종은 1846년 도사된 익선관본 대·소본, 면복본 대본, 군복본 대본 총4본의 어진을 남겼는데 헌종 사후 4본 모두 선원전에 봉안되었다가 이 중 익선관본 대본이 1875년 경모궁 망묘루로 옮겨졌다(『승정원일기』 헌종 12년 9월 22일 갑진; 고종 12년 11월 25일 무오; 『선원계보기략』 (1907), 「선원세계」). 일제강점기 당시 신선원전 제7실(순조실)에는 익선관본 2본과 원유관본 2본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1846년 선원전으로 이봉된 경인년 익선관 소본이 1900년 선원전 화재로 소실되어 대신 경인년 원유관본의 모사본을 제작한 점을 고려하면 신선원전 제7실에 봉안된 익선관본 2본은 무진년 제작된 대·소본임을 알 수 있다(『내각일력』, 1846년 8월 6일 무오; 『선원전영정수개등록』 (1935), 「御眞影幀修補工程明細書」).

40)

1852년과 1861년 철종 어진 도사에는 이한철, 김하종, 조중묵 등의 화원이 공통으로 참여했다. 『궁중서화』 Ⅱ, 도판 14·15·16 참조. 이한철 초상화풍은 강관식, 「이하응 초상 일괄」, 『한국의 초상화』 (문화재청, 2007), p. 25.

41)

『일성록』 정조 16년(1792) 8월 7일 계유; 『내각일력』 정조 16년 8월 7일 계유.

42)

『내각일력』 정조 16년 8월 1일 정묘; 8월 7일 계유; 정조 17년 8월 10일 경오; 정조 18년 8월 10일 갑자; 정조 21년 8월 9일 을사; 정조 22년 2월 9일 계묘; 정조 24년 2월 10일 계사; 고종 17년 2월 3일 신축; 고종 17년 8월 2일 무술; 고종 18년 2월 2일 갑오 등 다수.

43)

『내각일력』 정조 16년 8월 1일 정묘; 정조 18년 1월 16일 갑진; 3월 1일 무자; 4월 1일 정사; 4월 15일 신미; 5월 1일 정해; 6월 15일 경오; 7월 15일 경자; 8월 1일 을묘; 8월 15일 기사; 9월 1일 을유; 9월 15일 기해; 10월 1일 기묘 등 다수.

44)

『六典條例』 권5, 「禮典」, 景慕宮, 望廟樓.

45)

『일성록』 정조 16년 5월 25일 임술. 이때 한양과 외방 진전의 전례를 참조하되 봉안각의 성격을 고려해 절목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46)

『정조실록』 권 35, 정조 16년 5월 25일 임술; 『일성록』, 정조 16년 5월 25일 임술.

47)

『내각일력』 정조 16년 8월 16일 임오(대봉심); 정조 17년 1월 13일 정미(대봉심); 정조 18년 5월 1일 정해; 6월 1일 병진; 6월 15일; 7월 1일 병술; 7월 15일 경자; 8월 1일 을묘; 9월 15일 기해; 10월 1일 을묘; 10월 15일 기사; 11월 16일 경자; 정조 19년 1월 15일 무술; 3월 15일 병인; 8월 16일 갑오(대봉심) 등 다수; 주 37 참조.

48)

정조 대 정조의 어진, 어제, 어필, 책보, 인장, 御墨 등은 내각의 본 각인 규장각 건물에 보관되었다. 이이화, 「규장 각 소고: 규장각지를 중심으로 본 개관」, 『규장각』 3 (1979), pp. 149-165.

49)

『일성록』 정조 5년 9월 16일 을묘; 『 奎章閣志』, 奉御眞」.

50)

정조는 어진 봉안 후 수직하는 직책의 설치 대신 각신들의 입직 제도를 마련했다.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9월 18일 정사; 9월 19일 무오. 어진 수호가 각신의 직책임을 강조한 언급은 『일성록』 정조 6년 2월 24일 신묘.

51)

『奎章閣志』 (1784), 「奉御眞」. 신축년 정조어진의 제작과 함께의 봉심에 대한 논의가 행해졌으며, 9월말 대략적인 규장각 봉심 및 수직 절목이 마련되었다(『내각일력』 정조 5년 9월 19일 무오; 9월 27일 병인). 사맹삭 망일에 행한 봉심은 1월 15일, 4월 15일, 7월 15일, 10월 15일에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매삭간오일봉심은 초5일부터 30일에 이르기까지 5일씩 6차에 걸쳐 거행했다. ‘매삭간오일봉심’은 영조 대 태령전·만녕전의 규례에 의거하였으며, 사맹삭에 행한 전봉 봉심 또한 만녕전의 예에 의거한 것이다 (『정조실록』 권12, 정조 5년 9월 19일 무오). 유재빈에 따르면 정조대 규장각 어진 봉심의 특징은 봉심 의주를 통해 봉심을 의례화하고 제학, 직제학의 각신이 참여하면서 위상이 커진데 있다. 유재빈, 「정조대 어진과 신하 초상의 제작: 초상화를 통한 군신관계의 고찰」, 『미술사학연구』 271·272 (2011), pp. 157-158.

52)

사맹삭 대봉심은 『내각일력』, 정조 5년 10월 15일 갑신; 정조 6년 4월 15일 신사; 7월 15일 경술; 10월 14일 정축; 정조 7년 4월 15일 을해; 7월 15일 갑진; 10월 15일 계유; 정조 8년 1월 15일 신축 등 다수. 매삭간 오일 봉심은 『내각 일력』 정조 6년 1월 4일 신축; 1월 9일 병오; 1월 10일 정미; 1월 20일 정사; 1월 25일 임술; 1월 29일 병인 등 다수.

53)

주 42 참조.

54)

『일성록』 순조 12년 8월 10일 경술; 『헌종 실록』 권11, 헌종 10년 2월 4일 신축.

55)

『일성록』 순조 2년 8월 24일 임술.

56)

『규장각지』 (1784), 「어진봉안의」·「각신봉심어진의」; 『정조실록』 권12, 정조 5년 9월 19일 무오.

57)

『일성록』 정조 16년 1월 25일 을미.

58)

주 55 참조.

59)

『승정원일기』 헌종 3년 1월 16일 갑오.

60)

위의 주; 『일성록』 헌종 3년 1월 16일 갑오.

61)

규장각 주합루의 어진 봉안 공간은 어탑을 놓고 합문을 달아 개폐할 수 있도록 한 ‘ 榻閤’의 형태였다. 『정조실록』 권12, 정조 5년 9월 19일 무오.

62)

『내각일력』 헌종 3년 4월 17일 갑자.

63)

『일성록』 정조 16년 5월 25일 임술.

64)

『일성록』 정조 5년 9월 16일 을묘; 『정조실록』 권12, 정조 5년 9월 19일 무오. “永禧殿影禎設榻, 皆體大, 而今此設榻, 似爲差小矣.”

65)

손명희, 「영희전 감실 및 이안소의 공간 구성과 오봉산병풍의 특징」, 『문화재』 56 (2023a), p. 105.

66)

이성미, 「장서각소장 조선왕조 가례도감의궤의 미술사적 고찰」, 『장서각소장 가례도감 의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표 4, 87~88; 박본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십장생도〉」, 『미술사논단』 15(2002), pp. 385-400.

67)

『원행을묘정리의궤』 권4 (1796), 「배설」; 박본수, 위의 논문, pp. 390-391.

68)

『승정원일기』 영조 21년 2월 3일 을사.

69)

『일성록』 정조 16년 5월 25일 임술. 순조 재위 기간 망묘루 내 의물의 교체·수리 등에 대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정조 대 규장각과 현륭원 어진봉안각에 병풍과 평상이 배설된 기록에 준거할 때 망묘루 또한 병풍을 설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순조 대에 정조 대 조성한 병풍을 다른 유형의 병풍으로 교체할 특별한 사유가 없기에 정조가 공 식적으로 망묘루에 어진을 봉안 하면서 십장생도병풍 이 배설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70)

『헌종실록』 권11, 헌종 10년 2월 4일 신축; 『일성록』 헌종 10년 2월 15일 임자. 이러한 결정은 헌종 초년 일어난 경모궁 망묘루의 화재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임하 필기』 권27, 「춘명일사」, 望廟樓失. 온돌에서 타다 남은 불씨가 타들어가 화재가 일어난 이후, 나무를 때는 대신 탄을 때는 것으로 바꾸었다.

71)

망묘루 중건 이전인 1875년 두 임금의 어진이 망묘루 이안청으로 먼저 옮겨졌다(『승정원일기』 고종 12년 11월 25일 무오; 11월 26일 기미). 망묘루 중건은 1876년 4월 16일 시작해 동년 윤5월 13일 완공되었다(『승정원일기』 고종 13년 4월 7일 무진; 윤5월 13일 계유).

72)

『승정원일기』 고종 31년 6월 22일 정묘.

73)

『영정모 사도감의궤』 (1900), 「도설 」, 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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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Yu, Chaepin (Yoo, Jaebin). “Chŏngjo tae ŏjin kwa sinha ch’osang ŭi chejak: ch’osanghwa rŭl t’onghan kunsin kwan’gye ŭi koch’al.” Misulsahak yŏn’gu 271·272 (December 2011): 145-172.
76. Yu, Chaepin (Yoo, Jaebin). “Abŏji e taehan kiŏk ŭi chido—Chŏngjo ŭi Sado seja ch’usung chakŏp kwa Sajŏkto.” Misulsa yŏn’gu 33 (December 2017): 7-37.
77. Yun, Chinyŏng. “Changsŏgak sojang Ŏjin tosa sasil ŭi Chŏngjo—Ch’ŏlchong tae ŏjin tosa.” Changsŏgak 11 (2004): 283-302.
78. Yun, Chinyŏng. “Hwaryŏngjŏn Chŏngjo ŏjin ŭi yibong naeryŏk.” Chosŏn sidaesa hakbo 87 (December 2018): 223-225.
79.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Digital Archive, http://yoksa.aks.ac.kr/main.jsp.
80. Chosŏn wangjo sillok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https://sillok.history.go.kr/.
81.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db.snu.ac.kr/.
82. Sŭngjŏngwŏn ilgi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https://sjw.history.go.kr/main.do.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本宮全圖說>(세부), 『景慕宮儀軌』 Map of Kyŏngmogung Shrine (detail), in Kyŏngmogung ŭigwe, 1784, Chosŏn, Ink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db.snu.ac.kr)

Fig. 2.

Unidentified artist, Portrait of King Sunjo (details), 1808, Chosŏn, Colors on Silk, 134.5×80.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Fig. 3.

Yi Myŏnggi and Kim Hongdo, Portrait of Sŏ Chiksu (details), Chosŏn, Colors on Silk, 148.8×72.4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Fig. 4.

Kim Kŏnjong and eight other painters, Portrait of King Sunjo, 1830, Chosŏn, Colors on Silk, 231.3×121.4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Fig. 5.

Unidentified artist, Portrait of King Munjo (Crown Prince Hyomyŏng), 1826, Chosŏn, Colors on Silk, 148.6×45.2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Fig. 6.

Yi Hanch’ŏl, Cho Chungmuk, and three other painters, Portrait of King Chŏljong, 1852, Chosŏn, Colors on Silk, 212×117.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Fig. 7.

Yi Hanch’ŏl, Cho Chungmuk, and seven other painters, Portrait of King Chŏljong, 1861, Chosŏn, Colors on Silk, 294×112.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Fig. 8.

Illustration of a Royal Platform with Gilt Dragon Patterns (yongpyŏngsang), in Pumyo togam ŭigwe, 1778, Chosŏn, Ink and Color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db.snu.ac.kr)

Fig. 9.

Illustration of a Royal Bench (yongsang) with Dragon-head Decorations, in Yŏngjŏng mosa togam ŭigwe, 1900, Korean Empire, Ink and Color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db.snu.ac.kr)

Table 1.

<경모궁 망묘루 봉안 어진> Royal Portraits Enshrined in the Mangmyoru Pavilion of Kyŏngmogung Shrine

Chamber Portraits Enshrined Year Enshrined Year (Place) of Relocation Accession Number
망묘루 봉안 어진 망묘루 봉안 연도 이봉 연도 및 장소
First (Chŏngjo) 1791 half-length portrait in court audience attire (wŏnyugwan) 1791 1899 (Sŏnhŭigung Pyŏnakjŏng) burned and lost in 1954
신해년(1791) 원유관본 소본 1908 (Sŏnwŏnjŏn)
Second (Sunjo) 1808 half-length portrait in winged-crown (Kr. yiksŏngwan, Ch. yishanguan) 1837 1899 (Sŏnhŭigung Pyŏnakjŏng) Changdŏk 27558
무진 년(1808) 익선관본 소본 1908 (Sŏnwŏnjŏn)
1830 full-length portrait in court audience attire (wŏnyugwan) 1837 1858 (Yŏnghŭijŏn) Changdŏk 6365
경인년(1830) 원유관본 대본 1908 (Sŏnwŏnjŏn)
Third (Munjo) 1826 full-length portrait in ceremonial attire (myŏnbok) 1837 1899 (Sŏnhŭigung Pyŏnakjŏng) Changdŏk 6369
병술년(1826) 면복본 대본 1908 (Sŏnwŏnjŏn)
Fourth (Hŏnjong) 1846 full-length portrait in winged-crown (yiksŏngwan) 1875 1899 (Sŏnhŭigung Pyŏnakjŏng) burned and lost in 1954
병오년(1846) 익선관본 대본 1908 (Sŏnwŏnjŏn)
Fifth (Chŏljong) 1852 full-length portrait in ceremonial attire (myŏnbok) 1875 11899 (Sŏnhŭigung Pyŏnakjŏng) Changdŏk 27560
임자년(1852) 면복본 대본
1852 half-length portrait in winged-crown (yiksŏngwan) burned and lost in 1954
임자년(1852) 익선관본 소본 1908 (Sŏnwŏnjŏn)
1861 full-length portrait in court audience attire (wŏnyugwan) Changdŏk 27561
신유년(1861) 원유관본 대본
1861 full-length portrait in military attire Changdŏk 6364
신유년(1861) 군복본 대본

Table 2.

<경우궁 성일헌 봉안 어진> Royal Portraits Enshrined in the Sŏngilhŏn of Kyŏngugung Shrine

Chamber Portraits Enshrined Year Enshrined Year (Place) of Relocation Accession Number
망묘루 봉안 어진 망묘루 봉안 연도 이봉 연도 및 장소
Sunjo 1808 full-length portrait in winged-crown (yiksŏngwan) 1837 1908 (Sŏnwŏnjŏn) Changdŏk 6367
무진년(1808) 익선관본 대본
1830 half-length portrait in winged-crown (yiksŏngwan) 1837 1846 (Sŏnwŏnjŏn) burned and lost in 1900
경인년(1830) 익선관본 소본
Munjo 1826 full-length portrait in military attire 1837 1846 (Sŏnwŏnjŏn) burned and lost in 1900
병술년(1826) 군복본 대본
1826 full-length portrait in fujin headgear (bokgŏn) for scholars 1837 1908 (Sŏnwŏnjŏn) burned and lost in 1954
병술년(1826) 복건본 소본
1830 half-length portrait in winged-crown (yiksŏngwan) 1837 1846 (Sŏnwŏnjŏn) burned and lost in 1900
경인년(1830) 익선관본 소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