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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2; 2024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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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성환, 앞의 논문, pp. 163-164; 정송이·한동수, 「경모궁 건축특징의 변화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33-2 (2013), pp. 211-212.
4) 정경희, 「조선후기 宮園制의 성립과 변천」, 『서울학연구』 23 (2004), pp. 157-193; 정경희, 「정조대 사도세자 관련 宮·園의 변천과 의의」, 『분류별 의궤해설집』 (서울대 규장각, 2005), pp. 103-121; 최성환, 앞의 논문, 139-181; 김세영, 「사도 세자 廟宇 건립과 「景慕宮舊廟圖」 연구」, 『장서각』 28 (2012), pp. 237-264; 유재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지도—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작업과 事蹟圖」, 『미술사연구』 33 (2017), pp. 7-37.
5) 조선미, 『한국 초상화 연구』 (열화당, 1983), pp. 122-123; 조인수, 「조선 후반기 어진의 제작과 봉안」, 『다시 보는 우리 초상의 세계—조선시대 초상화 학술논문집』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pp. 27-31; 김지영, 「19세기 眞殿 및 御眞奉安處 운영에 대한 연구」, 『장서각』 26 (2011), pp. 162-187.
8) 『景慕宮改建都監儀軌』 (1776), 「景慕宮改 建圖」; 『宮園儀』 (1779), 「圖說」景慕宮圖; 『경모궁의궤』 (1783),「本宮全圖設」『궁원의』는 1779년(정조 3) 간행한 책을 예각(藝閣)에서 1800년에 신전(新鐫)한 판본이며, 이후 1785년 중간되었다.
10) 진준현, 「영조·정조대 어진도사와 화가들」, 『서울대학교박물관 연보』 6 (서울대학교박물관, 1994), pp. 28-31; 윤진영, 「장서각 소장 『어진도사사실』의 정조~철종대 어진도사」, 『장서각』 11 (2004), pp. 286-294; 『승정원일기』 정조 5년 8월 26일 병신. 영조 재위 기간 어진의 비공식적 제작과 봉안이 이뤄진 선례가 있다. 손명희, 「영조어진과 봉안처에 대한 재고찰: 어진의 다양성과 의미, 봉안처의 기능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103 (2023b), pp. 205-236 참조.
11) 창경궁 동쪽에서 경모궁 서쪽으로 이어지도록 월근문과 일첨문을 만들고 의위(儀衛)없이 승지·사관과 입직한 총부, 병조의 당상·낭청 정도만을 수행토록 한 채 여를 타고 간소하게 경모궁을 빈번하게 방문했던 점을 고려하면, 신축년 소본을 규장각에서 경모궁 망묘루로 비공식적으로 옮기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실록』 권8 정조 3년(1779) 10월 10일 경신; 『홍재전서』 권177, 「일득록」 17, 훈어 4.
12) 『일성록』은 세손 시절 정조의 개인 일기로 시작되었는데, 재위 7년(1783)부터 정조 자신이 작성하던 것을 규장각 각신이 작성한 후 본인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허태용, 「규장각의 『日省錄』 편찬과 正祖의 정통성 강화」, 『한국문화』 103 (2023), pp. 248, 255-264, 269.
14) 『일성록』 정조 15년 10월 6일 정미. 표제 쓰기를 마친 후 어진 소본을 어련(御輦)에 받들어 경모궁에 나아가 망묘루에 봉안할 때 각신들이 모두 수행[배진(陪進)]하도록 했다 (『일성록』 정조 15년 10월 7일 무신). 이날의 『일성록』 기사들에서 정조는 어진 소본의 경모궁 망묘루 보관이 영조의 고사를 준용하고, (어버이를) 아침저녁 문안하는 예 [替省定之禮]를 대신하며 우러러보고 의지하는 생각 [寓瞻依之思] 을 부치는 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15) 『영조실록』 권120, 영조 49년 3월 8일 정유. 영조 말년 어제를 통해 육상궁 냉천정을 후대 왕의 전배처로 확립한 내용은 손명희, 앞의 논문, 2023b, pp. 232-233.
16) 정조 사후 국왕의 망묘루 전배·봉심에 대한 기록은 『일성록』에서 순조 2년 이후 고종 30년(1893)까지 지속적으로 찾아진다. 『일성록』 순조 2년 9월 9일 정축; 순조 4년 7월 29일 을묘; 고종 30년 1월 3일 정해 등 60여 건. 『일성록』 순조 2년 9월 9일 정축; 순조 4년 7월 29일 을묘; 순조 5년 7월 20일 경오; 8월 3일 계미 등 다수.
20) 『고종실록』 권12, 고종 12년 11월 25일 무오; 『승정원일기』, 고종 12년 12월 10일 계유. 철종 어진 4본의 목록은 [Table 1] 참조(『선원전영정수개등 록』 (1935), 「御眞影幀修補工程明細書」, 제10실).
26) 『일성록』 정조 16년 1월 22일 임진. 1791년 어진도사 시 원유관본 대·소본과 함께 군복본 대·소본이 제작되었음은 윤진영, 「화령전 정조 어진의 이봉 내력」, 『조선시대사학보』 87 (2018), pp. 223-255.
31) 손명희, 「회화를 통해 본 효명세자의 삶」,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국립고궁박물관, 2019), pp. 175-177. 『승정원일기』 1837년 1월 16일 기사는 익종의 법복본과 면복본이 대본인 것으로 적었으나, 동일자 『일성록』의 기사는 군복본과 면복본이 대본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승정원일기』 헌종 3년 1월 16일 갑오; 『일성록』 헌종 3년 1월 16일 갑오). 그런데 1846년 경우궁 성일헌에서 선원전으로 이봉한 익종어진에 대한 기록에 ‘군복본병술대본’과 ‘익선관 본경인소본’이 명시되어 군복본이 대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내각일력』 1846년 8월 6일 무오).
38) 고종어진은 1872년(고종 9)과 1902년(광무 6년) 도사되었는데 20대 초인 1872년 제작된 소본 어진은 군복본과 복건본이었다. 『선원계보기략』 (1932), 「선원세계」; 『선원보략수정의궤』 (1902~1904), 「來照」, 光 武八年五月十五日.
39) 헌종은 1846년 도사된 익선관본 대·소본, 면복본 대본, 군복본 대본 총4본의 어진을 남겼는데 헌종 사후 4본 모두 선원전에 봉안되었다가 이 중 익선관본 대본이 1875년 경모궁 망묘루로 옮겨졌다(『승정원일기』 헌종 12년 9월 22일 갑진; 고종 12년 11월 25일 무오; 『선원계보기략』 (1907), 「선원세계」). 일제강점기 당시 신선원전 제7실(순조실)에는 익선관본 2본과 원유관본 2본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1846년 선원전으로 이봉된 경인년 익선관 소본이 1900년 선원전 화재로 소실되어 대신 경인년 원유관본의 모사본을 제작한 점을 고려하면 신선원전 제7실에 봉안된 익선관본 2본은 무진년 제작된 대·소본임을 알 수 있다(『내각일력』, 1846년 8월 6일 무오; 『선원전영정수개등록』 (1935), 「御眞影幀修補工程明細書」).
40) 1852년과 1861년 철종 어진 도사에는 이한철, 김하종, 조중묵 등의 화원이 공통으로 참여했다. 『궁중서화』 Ⅱ, 도판 14·15·16 참조. 이한철 초상화풍은 강관식, 「이하응 초상 일괄」, 『한국의 초상화』 (문화재청, 2007), p. 25.
42) 『내각일력』 정조 16년 8월 1일 정묘; 8월 7일 계유; 정조 17년 8월 10일 경오; 정조 18년 8월 10일 갑자; 정조 21년 8월 9일 을사; 정조 22년 2월 9일 계묘; 정조 24년 2월 10일 계사; 고종 17년 2월 3일 신축; 고종 17년 8월 2일 무술; 고종 18년 2월 2일 갑오 등 다수.
43) 『내각일력』 정조 16년 8월 1일 정묘; 정조 18년 1월 16일 갑진; 3월 1일 무자; 4월 1일 정사; 4월 15일 신미; 5월 1일 정해; 6월 15일 경오; 7월 15일 경자; 8월 1일 을묘; 8월 15일 기사; 9월 1일 을유; 9월 15일 기해; 10월 1일 기묘 등 다수.
47) 『내각일력』 정조 16년 8월 16일 임오(대봉심); 정조 17년 1월 13일 정미(대봉심); 정조 18년 5월 1일 정해; 6월 1일 병진; 6월 15일; 7월 1일 병술; 7월 15일 경자; 8월 1일 을묘; 9월 15일 기해; 10월 1일 을묘; 10월 15일 기사; 11월 16일 경자; 정조 19년 1월 15일 무술; 3월 15일 병인; 8월 16일 갑오(대봉심) 등 다수; 주 37 참조.
48) 정조 대 정조의 어진, 어제, 어필, 책보, 인장, 御墨 등은 내각의 본 각인 규장각 건물에 보관되었다. 이이화, 「규장 각 소고: 규장각지를 중심으로 본 개관」, 『규장각』 3 (1979), pp. 149-165.
50) 정조는 어진 봉안 후 수직하는 직책의 설치 대신 각신들의 입직 제도를 마련했다.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9월 18일 정사; 9월 19일 무오. 어진 수호가 각신의 직책임을 강조한 언급은 『일성록』 정조 6년 2월 24일 신묘.
51) 『奎章閣志』 (1784), 「奉御眞」. 신축년 정조어진의 제작과 함께의 봉심에 대한 논의가 행해졌으며, 9월말 대략적인 규장각 봉심 및 수직 절목이 마련되었다(『내각일력』 정조 5년 9월 19일 무오; 9월 27일 병인). 사맹삭 망일에 행한 봉심은 1월 15일, 4월 15일, 7월 15일, 10월 15일에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매삭간오일봉심은 초5일부터 30일에 이르기까지 5일씩 6차에 걸쳐 거행했다. ‘매삭간오일봉심’은 영조 대 태령전·만녕전의 규례에 의거하였으며, 사맹삭에 행한 전봉 봉심 또한 만녕전의 예에 의거한 것이다 (『정조실록』 권12, 정조 5년 9월 19일 무오). 유재빈에 따르면 정조대 규장각 어진 봉심의 특징은 봉심 의주를 통해 봉심을 의례화하고 제학, 직제학의 각신이 참여하면서 위상이 커진데 있다. 유재빈, 「정조대 어진과 신하 초상의 제작: 초상화를 통한 군신관계의 고찰」, 『미술사학연구』 271·272 (2011), pp. 157-158.
52) 사맹삭 대봉심은 『내각일력』, 정조 5년 10월 15일 갑신; 정조 6년 4월 15일 신사; 7월 15일 경술; 10월 14일 정축; 정조 7년 4월 15일 을해; 7월 15일 갑진; 10월 15일 계유; 정조 8년 1월 15일 신축 등 다수. 매삭간 오일 봉심은 『내각 일력』 정조 6년 1월 4일 신축; 1월 9일 병오; 1월 10일 정미; 1월 20일 정사; 1월 25일 임술; 1월 29일 병인 등 다수.
66) 이성미, 「장서각소장 조선왕조 가례도감의궤의 미술사적 고찰」, 『장서각소장 가례도감 의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표 4, 87~88; 박본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십장생도〉」, 『미술사논단』 15(2002), pp. 385-400.
69) 『일성록』 정조 16년 5월 25일 임술. 순조 재위 기간 망묘루 내 의물의 교체·수리 등에 대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정조 대 규장각과 현륭원 어진봉안각에 병풍과 평상이 배설된 기록에 준거할 때 망묘루 또한 병풍을 설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순조 대에 정조 대 조성한 병풍을 다른 유형의 병풍으로 교체할 특별한 사유가 없기에 정조가 공 식적으로 망묘루에 어진을 봉안 하면서 십장생도병풍 이 배설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70) 『헌종실록』 권11, 헌종 10년 2월 4일 신축; 『일성록』 헌종 10년 2월 15일 임자. 이러한 결정은 헌종 초년 일어난 경모궁 망묘루의 화재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임하 필기』 권27, 「춘명일사」, 望廟樓失. 온돌에서 타다 남은 불씨가 타들어가 화재가 일어난 이후, 나무를 때는 대신 탄을 때는 것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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