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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0;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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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ozsika Parker & Griselda Pollock, Old Mistresses: Women, Art, and Ideology (1981) (New York: Bloomsbury, 2021).
3) Rozsika Parker, The Subversive Stitch: Embroidery and the Making of the Feminine (1984) (London: I.B.Tairis, 2010).
5) 현대자수를 포함해 자수는 회화, 조각은 물론 도자, 금속공예 등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최공호에 따르면 1945년부터 2007년까지 출판된 공예사 논저 1773편 가운데 대다수가 도자와 금속공예를 다루고, 48편의 섬유공예 관련 연구 중 자수 관련 연구는 12편에 불과하다. 최공호, 「한국 공예사학의 장르관습과 위계구조」, 『한국미술사교육학회지』 21 (2007), p. 377.
6) 삼성문화재단 한국미술기록보존소 편, 「해방이전 일본에 유학한 미술인(Ⅱ), 동경여자미술학교 수학자들」, 『한국 미술기록보존자료집 2』 (2003); 김철효, 「근대기 한국 ‘자수’미술 개념의 변천」, 『한국근대미술사학』 12 (2004); 김주현, 「여성공예와 한국 근대자수: 페미니즘 예술개념을 위한 비판적 분석」, 『한국여성학』 25(3) (2009); 임소영, 「한국 근대 섬유공예 연구: 자수미술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김철효, 「구술사를 통해 본 20세기 한국의 자수 미술가들」, 이화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학센터, 『여성의 눈으로 보는 근대기의 여성 자수』(2011); 최보람, 「한국 근대 자수공예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13); 권혜진, 「한국 근대 자수문화 연구」, 『복장』 63(8) (2013); 김소정, 「한국 근대 자수교육에 관한 연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권행가, 「미술과 기예의 사이: 여자미술학교 출신의 여성 작가들」, 『신여성 도착하다』 (국립현대미술관, 2017); 이성민, 「한국 근대 자수교육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
8) 양수정, 「18세기 이후 자수와 제작가에 관한 제면모」, 『미술사학』 54 (2020); 김우경, 「근대 자수천수관음보살도의 양상과 조성배경」, 『한국미술사교육학회지』 39 (2020); 김수진, 「19-20세기 평안도 안주 자수의 성쇠와 그 의미」, 『대동문화연구』 119 (2022). 김수진이 논의했듯이 19세기 말~20세기 초 평안남도 안주 지방 남성 자수 장인들의 존재가 갑자기 부상된 것은 교통의 발달과 자수 병풍의 국내 수요 증가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만국박람회 등을 통해 근대적 기술 및 상품으로서 자수와 직조의 위상을 재고하게 된 고종이 일본의 예, 즉 메이지(明治) 시기 일본 정부의 식산흥업 정책을 등에 업고 고가의 수출품으로 등극한 소위 ‘자수회화’를 제작한 남성 장인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이를 조선에서도 실현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20세기 초 조선 왕실 초상 사진 배경에 등장하는 일본식 자수병풍에 대해서는 김수진, 「근대 전환기 조선왕실에 유입된 일본 자수 병풍」, 『미술사논단』 36 (2013) 참조. 당시 일본 수출 자수 중 많은 부분은 교토 다카시마야(高島屋) 백화점 내 자수공방에서 고용한 남성 장인들에 의해 제작되었고, 이러한 역사로 인해 일본에서는 자수를 제작하는 남성의 존재가 한국에 비해 익숙하다. 현재 일본의 자수 인간문화재 역시 남성이다. 20세기 초 자수병풍은 당시 다카시마야에서 수출한 자수병풍일 가능성이 높기에, 향후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왕실에 헌상된 안주수와 다카시마야 제작 병풍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메이지기 수출자수, 자수회화에 관해서는 松原史, 「近代’刺繡繪畵’の誕生: 近代的特徵と前近代からの系譜」, 『ART RESEARCH』 13 (2013); 中川麻子, 「明治時代後期における’刺繡’の誕生と發展」, 『デザイン學硏究特輯號』 19-4(76) (2012) 참조.
9) 검약을 숭상하고 여공(女功)을 강조한 조선시대에 “아름답게 무늬를 내고 새기고 아로새기는 자수(錦繡纂組)”는 금제(禁制) 대상이었으므로, 주로 왕실과 지배층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의장(意匠)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그 지위에 따라 계서적(階序的)으로 사용되거나 불교의 전례로서 공덕(功德)의 매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일부 계층의 호사(豪奢)였던 자수는 점차 계층적으로, 지리적으로 저변화되었다. 양수정, 「조선 17세기 자수그림의 전승과 이행」, 『미술사학보』 48 (2017) 참조.
12) 자수가 최초로 전람회에 출품된 것은 제1회 시카고 만국박람회(정식 명칭은 ‘World Columbian Exposition, Chicago’, 1893)로 추정된다. 공식도록에 의하면 조선은 농산물, 수산물, 원예물, 광산물, 교통과 운수, 공예와 제조품, 교육, 임산물 등 분야에 출품했고, 『고종순종실록』에 출품사무대원 정경원(鄭敬源, 1841~?)의 보고에 따르면 이 가운데 천문발, 자개장과 함께 자수병풍이 외국인들에게 크게 관심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련해서는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13(2000) 참조. 이후 국내에서 열린 박람회에도 자수품이 전시되었는데, 강씨 집안 내에서 귀하게 전해지던 십장생 자수첩 <전가진완(傳家珍玩)>이 1915년 조선총독부 시정(始政) 5년 기념으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에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일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15) 조시비의 자수 교육에 관해서는 大﨑綾子, 「'女子美刺繡'硏究: 草創期資料から讀み解く松岡冬の敎育活動」, 『女子美術大學硏究槪要』 52 (2022); 「女子美術學校と刺繡敎育」, 『女子美術大學硏究槪要』 52 (2022); 「女子美術學校における刺繪畵-刺繡技法, 材料, 年代について」, 『服裝文化學會誌』 15(1) (2014) 참조.
16) 세필로 그려진 채색화를 공필화(工筆畵)라 한다. 신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공필화가 가운데 진지불(陳之佛, 1896~1962)은 도쿄미술학교 공예도안과를 졸업하고 도안과 공필화조도 두 방면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는데, 1954년 소주(蘇州) 자수연구소가 세워졌을 때 이곳에서 제작되는 자수품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다수의 공필 화조화 화고(畫稿)를 제공하기도 했다. 배원정은 공필화조화가 단순, 반복, 과장 등 도안적 특성을 갖추기 있었기에 자수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배원정, 「20세기 중국의 工筆花鳥畵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7), pp. 154-157.
17) 「고등여학교편 (1)숙명고등여학교」 『동아일보』 (1939. 2. 7). 근대기 도화교사는 서양화 출신이 많았는데, 여학교에는 재봉, 자수 등 여성 교양의 신장에 도움이 될 만한 종류의 도화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본화 전공자를 채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영일은 1935년부터 1943년까지 숙명여고에 근무하면서 제자들의 조선미전 출품을 독려하여 입선자를 다수 배출했다. 김소연, 「한국 근대 ‘동양화’ 교육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p. 102-104.
18) 20세기 한중일 공작도 유행에 관해서는 배원정, 「근대 여성화가 정찬영(1906~1988)의 채색화조화 연구」, 『미술사 학보』 53(2019), pp. 18-25 참조. 해방 후 공작도는 결혼식이나 환갑잔치, 호텔 로비 장식 등을 위한 자수병풍으로 인기있는 소재 중 하나였다. 일례로 미국 스미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e) 산하 국립자연사박물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1960년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러스크(David Dean Rusk, 1909~1994)에게 선물한 것으로 전해지는 백색 공작을 소재로 한 6곡 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이 병풍에는 공작 한 쌍과 함께 일제 강점기 이후 자수 화조도에 종종 등장하기 시작한 목련이 배치되었다.
19) 현재 경기여고 경운박물관과 강릉자수박물관에는 일본화가 고슌(吳春, 1752~1811), 마츠무라 케이분(松村景文, 1779~1843) 등의 비둘기 소재 회화를 바탕으로 한 학생들의 자수 작품, 경북여자고등학교에는 이토 자쿠추(伊藤若沖, 1716~1800)의 봉황도, 카노 호가이(狩野芳崖, 1828-1888)의 자모관음도를 바탕으로 한 학생들의 자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 정무정은 근대자수 작가 연구가 전무한 상황에서 박을복 개인의 자수 미학을 고찰했다. 그는 호미 바바(Homi K. Bhabha)의 혼종성 개념을 매개로 자수가 어떤 매체보다도 전위적이고 급진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했다. 그런데 박을복 자수의 독창성과 전위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녀의 <국화와 원앙>이 몽롱한 분위기의 일본화와 달리 화가의 본을 수용하되 그것을 변형시켰다고 해석하는 등, 회화와 다른 자수라는 매체의 특성이나 일제강점기 일본 자수, 해방 후 한국 자수의 시대양식 등을 간과한 점이 아쉽다. 정무정, 「박을복(1915~2015) 작품에 나타난 한국 자수의 위상과 의미」, 『고문화』 90 (2017).
22) Bibiana Obler, Intimate Collaborations: Kandinsky and Münter, Arp and Taeuber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14).
26) 이외에도 그는 일본색으로 ‘지나친 호분의 사용’, ‘사비의 표현’을 들었다. 김용준, 「제1회 국전의 인상」, 『자유신문』(1949. 11. 27.). 『근원 김용준 전집 5』(서울: 열화당, 2002), p. 289.
28)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이 1945년 이화여자대학으로 개편되었을 때 3개원(한림원, 예림원, 행림원) 중 하나인 예림원에 음악과와 미술과가 설치되었고 후자에 동양화, 서양화, 자수 세 전공이 생겼다. 이듬해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체제를 개편하여 예술대학 미술학부 내에 동양화과, 서양화과, 자수과, 도안과가 설치되었고 한국전쟁 중에 염색, 사진, 실내장식 등의 전공이 추가되었다. 숙명여자대학교에도 1947년 미술과가 설치되어 동양화, 서양화, 자수・수예 교육이 실시되었으나, 1953년 서울 환도 후 미술과는 가사과에 병합되었다. 김영기, 「한국 여성 미술 40년사」, 김활란 박사 교직 근속 40주년 기념 논문집 편집위원회 엮음, 『한국여성문화논총』 (서울: 이화여대출판부, 1999), pp. 169-171.
33) 단색화가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성과 여성적인 것을 소외시킨 현상에 대해서는 윤난지, 「단색조 회화의 다색조 맥락: 젠더의 창으로 접근하기」, 『현대미술사연구』 31 (2012) 참조.
34) 즉흥적으로 제작되는 추상자수라 할지라도 “창의와 적극적인 사전준비가 잠정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자수에 있어서는 도안의 형식이 절실하게 요구”될 수밖에 없다. 임홍순, 「자수도안의 조형세계와 그 특수성」, 『繡(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자수학회집)』 2 (1973), p. 14.
35) 구상, 기하학적 추상, 다채로운 색채 등을 ‘한국성’에서 배제시킨 한국의 추상 담론에 내포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신지영, 「왜 우리에게는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을까?: ‘한국성’의 정립과 ‘한국적’ 추상의 남성성에 대하여」, 『현대미술사연구』 17 (2005) 참조.
36) 차영순,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 커리큘럼 변천사와 자수 포트폴리오 프리젠테이션」, 이화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학센터, 『여성의 눈으로 보는 근대기의 여성 자수』 (2011), p. 58.
38) 당시 민족주의와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문화예술 정책 아래 수출상품으로 제작된 전통공예에 대해서는 졸고, 「1950-1980년대 한국 자수계 동향 연구: ‘전통’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초조형학연구』 21(4) (2020), pp. 137-141 참조.
40) 「가내공업 가이드 자금지원과 현황 (6)자수」, 『매일경제』 (1966.12.3); 「취미 곁들인 가계 보탬 부업 (1) 동양자수」, 『동아일보』 (1973. 12. 4).
41) 「여원」 (1960. 12.), 장미경, 「1960~70년대 가정주부(아내)의 형성과 젠더정치: 『여원』, 『주부생활』 잡지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15(1) (2015), p. 148에서 재인용.
43) 최순우, 「서언」, 수림원, 『李朝의 자수』(1974); 예용해, 「최유현 한국 자수전 추천사」, 자수문화연구소 중수원, 『최유현 刺繡史: 바늘과 실로 수놓은 한평생』, p. 13.
44) 국가발전의 주체로 호명된 현모양처는 “유아교육에서 어머니의 역할, 화목한 가정의 배려, 가사의 과학화, 합리화, 국가 산업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현대여성’을 지칭했다. 김수진, 「전통의 창안과 여성의 국민화: 신사임당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80 (2008), p. 236.
45) 김정옥, 「책머리에 부쳐서」, 대한주부클럽연합회, 『불씨』 (서울: 바른사, 1986), 쪽수 없음. 미술분야에서 화가 박래현과 조각가 김정숙이 수상했고, 자수 분야에서는 나사균이 수상했다. 자수문화협회 초대회장인 이학은 서예 부문으로 수상했다.
47)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이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들의 작업은 남성의 창조물보다 열등한 것으로 규정된 ‘여류 미술’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여성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은 ‘여성미술’로, 서구 페미니즘 사상을 도입한 ‘여성주의 미술’로 범주화되어 이해되어 왔다. 이에 대해서는 김현주,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페미니즘 연구사」, 『미술사논단』 50 (2020); 조수진, 「한국 여성미술 연구사: 근대에서 1970년대까지」, 『인물미술사학』 16 (2020) 참조. 1970~80년대 여성 노동 연구에서 수방 여성들의 작업 현실에 대한 논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48) 본 연구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자수 작가들은 자수를 표현 매체로 삼아 사회비판을 하는 대신 사회활동, 예를 들면 독립운동이나 사회복지, 교육 영역에서 큰 자취를 남긴 경우가 적지 않다. 장선희는 일본 유학 전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조시비를 졸업한 윤정식(尹貞植, 1900`~2000)은 전통자수를 판매하여 의사 출신 남편이 남긴 유린 보육원을 운영했으며, 향상여자기예학원을 졸업하고 동경 교리츠(工立)미술학교에서 자수를 배웠으며 조선미술 전람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이운정(李雲貞, 1903~1992)은 작업을 계속하는 대신 일본인으로부터 기예학원을 인수해 재단법인 동명학원을 세우고 평생을 여학생 교육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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