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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0;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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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지 발굴은 1975년 3월 25일부터 1976년 3월 25일까지 1년간 진행하였고 주변 건물지는 1976년 5월 10일에서 12월 30일까지 발굴 조사하였다. 출토 유물은 완형 15,000점, 파편 18,000점으로 약 33,000점이며, 금속제 완형 843점, 목재 완형 1,132점, 용기류 완형 1,748점, 와전류 완형 5,798점 등으로 파악하였다. 文化財管理局, 『雁鴨池 發掘調査報告書』 (1978);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못 속에서 찾은 신라, 45년 전 안압지 발굴조사 이야기』 (2020), pp. 84-85 참고.
2) 월지 출토품을 중심으로 통일신라 금속제 기명을 정리한 연구는 이난영, 「統一新羅의 銅製器皿에 대하여: 雁鴨池 出土品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32 (국립중앙박물관, 1983), pp.1-18; 통일신라 청동 숟가락을 고찰하면서 월지 출토품을 검토한 연구는 정의도, 「청동숟가락의 등장과 확산」, 『석당논총』 42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8), pp. 271-380; 「통일신라시대 식도구 연구」, 『석당논총』 73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9), pp. 287-340; 월지 출토품 중에 평탈 장식이 있는 칠기를 주목한 연구는 이종석, 「한국 고대 칠기 연구: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4); 同著, 「統一新羅期의 平脫遺物 數例」, 『蕉雨 黃壽永博士 古稀紀念 美術史學論叢』 (通文館, 1988), pp. 607-623; 신숙, 「통일신라 평탈공예 연구」, 『미술사학연구』 242·243 (한국미술사학회, 2004), pp. 29-61; 명문이 있는 유물에 대한 검토는 고경희, 「新羅 月池 出土 在銘遺物에 對한 銘文 硏究」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94)이 있으며, 유물의 명문에 대해서는 추가 발견과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4) 本稿는 국립경주박물관이 2022년 12월 16일 <‘경주 동궁과 월지’ 연구의 현단계와 쟁점>을 주제로 개최한 신라학 학술대회의 발표를 토대로 내용을 보완하여 작성하였다. 당시 토론을 통해 여러 견해를 제시해 주신 선생님들과 박물관 관계자분들께 지면을 빌어 감사함을 밝힌다.
18) 姜懷英, 邱宣充, 『大理崇聖寺三塔』 (文物出版社, 1998), pp. 73-74 ; 李昆聲, 『云南考古學論集』 (云南人民出版社, 1998), pp. 357-358; 雲南省博物館(www.ynmuseum.org/detail/1430.html) 참고.
20) 칠기편의 명문 판독은 육안으로 쉽지 않아, 그간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1975년 발굴 당시에는 ‘壬⼦龕第⼀’로 파악하였고(야장 TR 16 기록; 文化財管理局, 앞의 보고서 (1978), p.16), 일부 연구에서는 음각된 부분이 명확하지 않아 ‘◯龕第⼀’로 판단을 유보하였다(고경희, 앞의 논문(1994), p. 55). 이후 2002년 출간된 국립경주박물관 도록에 ‘佛龕第⼀’로 언급되면서(국립경주박물관, 『⽂字로 본 新羅 - 新羅人의 記錄과 筆跡』 (2002), p.97), 다수의 논문에 같은 내용이 소개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王寺龕第⼀’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양은경, 「동궁과 월지 출토 불상의 봉안양상과 신라왕궁 속 불교시설」, 『신라문화』 62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23), pp. 179-180). 어떤 주장이라도 불감과 연관된 칠기 현판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23) 簫는 竹管을 나무틀에 꽂아서 만든 악기로 세로로 부는 피리의 한 종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인 안악 3호분, 덕흥리 고분벽화, 집안 17호분 등에 簫의 모습이 나타나며, 부여 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의 악사 중에도 연주 모습이 등장한다. 또한 백제 멸망 직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연기군 碑巖寺 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에도 소를 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27) 신숙, 「통일신라 금속공예의 성취와 국제교류: 국보 제174호 <금동 수정장식촛대>」, 『미술사학연구』 290 (한국미술사학회, 2016), pp. 43-66; 양은경, 「고대 한일 해양 네트워크: 정창원 소장 신라 가위」, 『한국상고사학보』 106 (한국 상고사학회, 2019), pp. 81-107.
31) 東野治之는 臘蜜을 藥物로, 蜜汁은 기타로 구분하였고 皆川完一은 蜜과 蜜汁을 모두 약물로 분류하였다. 東野治之, 「鳥毛立女屛風下貼文書の硏究-買新羅物解の基礎的考察」, 『史林』 57권 6호 (1974), pp. 16-17; 皆川完一, 「買新羅物解拾遺」, 『正倉院文書硏究』 2 (吉川弘文館, 1994), p. 150 참고.
40) 正倉院 北倉 소장 漆胡瓶의 素地 구조와 표면의 옻칠 성분에 대해서는 寺田晁, 「正倉院宝物漆胡瓶の素地造り私考」, 『梅光女学院大学論集』 25 (梅光女学院大学, 1992), pp. 1-12 참고.
44) 一然, 『三國遺事』 卷第5 感通第7 月明師兜率歌, “王嘉之賜品茶一襲水精念珠百八箇.”; 卷第3 塔像第4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義湘法師…齋戒七日浮座具晨水上龍天八部侍從引入崛內參禮空中出水精念珠一貫給之.”
46) 『舊五代史』 卷138 外國列傳2 高麗, “周顯德六年, 高麗遣使貢紫白水晶二千顆.”; 『冊府元龜』 卷972 外臣部 朝貢第五, “世宗顯德…六年…十一月高麗複遣使貢銅五萬斤白水精各二千顆.”
48) 『朝鮮王朝實錄』 太宗 13卷, 7年(1407) 5月 3日, “得水精石於順興府小白山.”; 太宗 23卷, 12年(1412) 3月 29日, “慶尙道都觀察使安騰進回回沙門都老所採水精三百斤.”; 太宗 27卷, 14年(1414) 6月 20日, “前司正李宥智進水精石及墨炭宥智來自江原慶尙道曰高城順興有水精石.”; 世宗 24卷, 6年(1424) 5月 27日, “慶尙道監司進順興府産出水精石.”; 世宗 27卷, 7年(1425) 2月 18日, “傳旨安東府使府所産水精石多採以進禁人私採.”; 世祖 34卷, 10年 (1464) 8月 2日, “江原道觀察使進高城杆城等邑所出水精石.”; 燕山 15卷, 2年(1496) 6月 9日, “命馳書于慶尙全羅江原監司採水晶如此樣者以進.”; 燕山 45卷, 8年(1502) 8月 27日, “江原道産出水晶曾命採進.”
49) 『朝鮮王朝實錄』 世祖 34卷, 10年(1464) 9月 16日, “全羅道觀察使採茂長縣紫色水精石以進命禁人採取.”; 燕山 45卷, 8年(1502) 7月 9日, “下書于全羅道觀察使崔漢源江原道觀察使朴元宗曰無瑕品好白紫水晶採取以進.”; 燕山 45卷, 8年(1502) 7月 18日, “採進紫水晶一塊曰.”
51) 『唐會要』 卷95, “開元…十二年 興光遣使獻果下馬二匹 牛黃 人參 頭髮 朝霞紬 魚牙 納紬 鏤鷹鈴 海豹皮 金銀等.”; “天寶…七載 遣使獻金銀及六十總布 魚牙 納朝霞紬 牛黃 頭髮 人參.”; “大歷…八年 遣使來朝 並獻金銀牛黃魚牙納朝霞紬等方物.”
52) 일본 正倉院 문서 가운데 『東大寺獻物帳』의 <國家珍寶帳>에는 赤漆欟木厨子에 수납된 품목이 열거되었는데, 그 중에는 牙笏一枚, 通天牙笏一枚, 大魚骨笏一枚 등이 나타난다. 기록에 보이는 세 점은 正倉院 北倉에 현존하며, 그 밖에도 中倉에 木笏과 魚骨笏이 있고 南倉에 木笏이 있어, 모두 6점의 홀이 남아있다. 野尻忠, 「魚骨笏の来歴」, 『鹿園雑集』 9(奈良国立博物館, 2007), pp. 63-74 참고.
58) 伊東忠太, 「奈良模樣の起源に就て(下)」, 『考古學雜誌』 3-6(1913), pp. 308-309; 原田淑人,「統一新羅時代の瓦甎文に就いて」,『東亞古文化硏究』(1940), pp. 341-348; 林良一, 『シルクロ―ド』(美術出版社, 1962); 渡邊素舟, 『東洋文樣史』 (富山房, 1971); 增田精一, 「綬帶をつけた鳥獸意匠の比較-東西文化交流に關連して」, 『東洋學術硏究』 3(東洋哲學硏究所, 1972); 森豊, 『花喰鳥文樣展開』 (六興出版, 1974); 井口喜晴, 「咋鳥文の系譜」, 『Museum』 375(東京国立博物館, 1982), pp. 4-14; 林良一, 『東洋美術の裝飾文樣』 (同朋舍出版, 1992).
59) 김원룡, 「古代韓國과 西域」, 『美術資料』 34 (국립중앙박물관, 1984), pp. 1-6; 이난영, 「統一新羅와 西域」, 『石堂論叢』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994), pp. 165-185.
60) 曺圭和, 「寶相花文樣考」, 『論文集』 17 (국민대학교, 1980), pp. 219-238; 임재영, 「花喰鳥文樣考」, 『한성대학교 논문집』 10 (1986), pp. 543-563.
62) 임영신, 「統一 新羅 時代의 瓦當과 塼에 나타난 寶相花紋의 硏究」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82); 김민식, 「新羅 寶相華文 수막새의 變遷」 영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9).
63) 신숙, 「統一新羅와 唐의 銜鳥文研究」, 『미술사연구』 24 (미술사연구회, 2010), pp. 61-85; 同著, 「8세기 동아시아의 유행: 상상의 꽃, 보상화의 이미지와 문양」, 『한국중세고고학』 11(한국중세고고학회, 2022), pp. 7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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