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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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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덤을 천장할 때에는 그 종류에 따라서 천릉(遷陵), 천원(遷園), 천묘(遷墓)라고 칭하였으며, 왕실에서 조성한 무덤을 옮기는 경우 천봉(遷奉), 천장(遷葬) 혹은 천조(遷厝)라고도 하였다. 조선 왕실 무덤을 옮길 때 설치된 임시 관청은 천릉도감(遷陵都監), 천원도감(遷園都監), 천묘도감((遷墓都監), 천봉도감(遷奉都監) 등이 설치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천릉과 천원을 함께 다루기 때문에 이를 포괄하는 왕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 천봉(遷奉)을 주로 사용하며, 무덤의 구분에 따라 천릉과 천원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3) 황정연,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능제(陵制)의 도입과 그 영향」, 『인문사회과학연구』 15-3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14); 박수정, 「『국조오례의』 의례 시행과 개정 논의」, 『한국학』 40-2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4) 김민규, 「朝鮮 王陵 長明燈 硏究」, 『미술사학연구』 274 (한국미술사학회, 2012 6); 김이순, 「세종대왕 ‘구 영릉(舊 英陵)’ 석물 연구」, 『한국학』 3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신재훈, 「조선 전기 천릉(遷陵)의 과정과 정치적 성격」, 『조선시대사학보』 58 (조선시대사학회, 2011); 안경호, 「세종대왕 초장지(舊 英陵)에 대한 재론(再論)」, 『한국학』 31-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5) 이희중, 「17, 8세기 서울 주변 왕릉의 축조, 관리 및 천릉 논의」, 『서울학연구』 17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1); 김충현, 「효종(孝宗) 영릉(寧陵)의 조성과 능제(陵制)의 변화」, 『역사문화논총』 7 (역사문화연구소, 2012); 이현진, 「1789년(정조 13) 永祐園에서 顯隆園으로의 遷園 절차와 의미」, 『서울학연구』 51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 연구소, 2013); 차문성, 「인조 舊 長陵의 위치비정과 석물에 관한 고찰」, 『민족문화』 44 (한국고전번역원, 2014); 신병주, 『조선왕실의 왕릉조성』 (세창미디어, 2017); 김민규, 『융건릉: 정조대왕 서거 220주기 기념출판』 (수원박물관, 2021); 이현진, 「1855년(철종 6) 徽慶園의 遷園과 그 성격」, 『동양고전연구』 88 (동양고전학회, 2022).
10) 정해득, 「조선초기 왕릉제도의 정비과정」, 『조선시대사학보』 63 (조선시대사학회, 2012), p. 10.; 황정연, 「조선 태조비 신덕왕후 정릉의 조성과 봉릉 고찰」, 『서강인문논총』 46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p. 252;
17) 『세종실록』 권113, 1446년(세종 28) 7월 19일; 해당 기사에서 석실 구성과 봉분 주변의 석물 구조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이 내용은 『세종실록』오례의와 『국조오례의』흉례 치장조에 그대로 이어진다(전나나,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 『문화재』 45-1 (국립문화재연구원, 2012), pp. 54-55).
28) 『세종실록』 권9, 1420년(세종 2) 9월 16일; 『세종실록』 권17, 1422년(세종 4) 9월 6일; 『세종실록』 권113, 1446년(세종 28) 7월 19일; 『세종실록』 권134, 오례 흉례 의식, 치장조를 통해서 세종은 각각 헌경왕후 승하에 따른 헌릉의 조성과 태종 승하에 따른 쌍릉의 조성, 소헌왕후 영릉을 합장릉으로 조영하는 형식을 제도화하였고, 세종실록 오례의에서 봉분 내부는 석실이고 외부는 합장릉으로 규정하였다.
30) 『重訂南漢志』 卷11 「三陵紀事」…中廟初葬高陽 禧陵同塋宅兆不吉尹元衡力贊 文定王后遷于漢濱卑湫之地人莫敢言世傳遷 陵時哭聲自壙中出役者無不聞之翌年順懷世子卒越二年 文定后薨又明年 明宗升遐人謂遷陵之咎至壬辰被倭賊掘發之變臣民之痛尙忍言哉.
41) 인조가 사친을 추존하는 과정은 김한신, 「仁祖代 前半期 왕권과 정치질서 재편(1623-1636)」, 『한국사학보』 78 (고려사학회, 2020), pp. 132-139 참조.
64) 현재 순조 인릉에는 1857년에 세운 철종 어필 표석과 1900년에 세운 고종 어필 표석이 있다(황정연, 「조선시대 능비(陵脾)의 건립과 어필비(御筆脾)의 등장」, 『문화재』 42-4,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1857년 인릉에 순원왕후가 합봉한 후에 개수한 이 표석은 본래 1835년에 조성하였던 인릉 표석을 1856년 천봉시 깎아서 다시 사용하였고, 이듬해 합봉한 후에 다시 표석의 음기를 다시 새겼다. 1835년, 1856년, 1857년에 바뀐 인릉 표석 음기를 탁본한 내용이 장서각에 전해진다.
65) 김이순, 「세종대왕 ‘구 영릉(舊 英陵)’ 석물 연구」, 『정신문화연구』 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안경호, 세종대왕 초장지(舊 英陵)에 대한 재론(再論)」, 『정신문화연구』 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68) 『[顯穆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日錄, 1823년; 『徽慶園遷奉園所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日錄 1855년; 『[顯穆綏嬪]徽慶園遷奉園所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日錄, 18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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