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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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적인 저서로는 Thunø Erik and Wolf Gerhard, eds., The Miraculous Image in the Late Middle Ages and Renaissance, Analecta Romana Instituti Danici, Supplementum 35 (Rome: L’Erma Di Bretschneider, 2004); Megan Holmes, The Miraculous Image in Renaissance Flore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3); Sandra Cardarelli and Laura Fenelli, eds., Saints, Miracles and the Image: Healing Saints and Miraculous Images in the Renaissance (Turnhout: Brepols, 2017)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학술저서 외에도 수많은 관련 논문들이 있다.
2) William B. Taylor, Theater of a Thousand Wonders: A History of Miraculous Images and Shrines in New Spain (New York, 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를 대표적인 저서로 꼽을 수 있다.
4) 필자가 박사논문을 쓸 때 당시 대학원생들이 많이 참고했던 David Freedberg, The Power of Images: Studies in the History and Theory of Response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와 Hans Belting, Likeness and Presence: A History of the Image before the Era of Art, translated by Edmund Jephcott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와 같은 책들이 그러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연구들이다.
5) 불상이 나타냈다고 하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동양에서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서술자의 사상에 따라 다른 단어로 표현되었다. 요즘 서구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miraculous image”라는 단어의 직역은 “기적의 상”이겠지만, 기적(奇跡)이라는 단어는 과거 동아시아 불상 관련 문헌에서 잘 사용된 단어가 아니다. 따라서 본고는 문맥에 따라 조선 유학자들이 바라본 불상의 발한(發汗)에 대한 내용을 다룰 때에는 이적(異跡)이라는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불교 문헌에 수록된 기록을 다룰 때에는 신이(神異), 영이(靈異), 영험(靈驗) 등 불교 문헌에서 자주 등장했던 용어를 사용한다. 이적이라는 단어는 불교, 도교와 관련된 신비롭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현상을 일컫는 단어이며, 고려시대 유학자들의 문집에서부터 조선시대 사료를 포함한 한국 고문헌에서 사용된 용례가 수백 건 이상 발견된다.
6) Richard H. Davis, eds, Images, Miracles, and Authority in Asian Religious Traditions (Boulder, CO: Westview Press, 1998); 이주형, 「한국 고대 불교미술의 상(像)에 대한 의식(意識)과 경험」, 『미술사와 시각문화』 1 (2002. 10), p. 26, 각주 7에서 해당 저서를 언급한 바 있다.
7) Koichi Shinohara, “Stories of Miraculous Images and Paying Respect to the Three Jewels: A Discourse on Image Worship in Seventh-Century China,” in Images in Asian Religions: Texts and Contexts, Phyllis Granoff and Koichi Shinohara ed. (Vancouver: UBC Press, 2007).
10) 그런데 한국에서 쓰여진 역사기록과 고문헌들을 살펴보면, 기적을 보인 불상들을 ‘서상’으로 표현한 경우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은 기적을 일으키는 상들에 대해 중국과는 다른 인식 내지 명칭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차후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11) 최선아, 「역사적 맥락에서 본 중국 불교 서상(瑞像)-전설, 외형, 문헌」, 『불교미술사학』 25 (2018), pp. 7-45. 해당 논문에서 최선아 교수는 미술사학계 내에서 서상의 도상, 양식, 편년, 정치적 의미 등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서상과 관련된 전설 자체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지적했다. 소현숙, 「6세기 말~7세기 전반 신라 불상의 새로운 경향과 對中交流-『三國遺事』에 나타난 불상의 출현 및 제작의 靈異談을 중심으로-」, 『신라사학보』 52 (2021).
12) 이주형 교수의 연구 보고서의 정리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43건의 불상과 관련된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무려 37건이 불상이 땀을 흘렸다는 내용으로, 불상의 이적에 대한 기록 중 약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이주형, 앞의 책, p. 83.
15) 『현종실록』에 수록된 1662년 논쟁과 관련된 내용 전문은 본고 부록1을 참조. 현종 연간의 논쟁은 조선시대 불교사를 다룬 서적에 간혹 언급된 사례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정동주, 『부처, 통곡하다: 조선 오백년 불교탄압사』, (이룸, 2003), pp. 92-108은 현종 연간의 논쟁을 대중도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식으로 풀어 서술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서두에서 조선시대 불상이 땀을 흘린 것은 불교가 이단(異端)과 사교(邪敎)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불상 발한을 거시적인 역사적 흐름에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불상 발한은 불교를 숭상한 왕조에서도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17) 보국사는 금성사(金城寺)라고도 불렸으며, 그 사지가 현재 담양 금성산성(金城山城) 안에 남아있다. 보국사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동지지(大東地志)』, 『담양군읍지(潭陽郡邑誌)』 등에 금성사가 존속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19세기 말까지 절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 『한국의 사지-현황조사 보고서 上(전라남도 1)』, (문화재청, 2011), p. 391. 보국사에서 1662년 땀을 흘렸다고 하는 3구의 불상들은 금불이라고 묘사된 것으로 보아 금동불상으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현재 소재불명이다.
21) 『노봉집』 제4권, 소차(疏箚), 「청치전남감사장문불한지죄잉훼불상이식요와소 임인(請治全南監司狀聞佛汗之罪仍毀佛像以息妖訛疏 壬寅)」. 김정의 상소문은 민유중의 것과 동일하나, 끝부분에 불상의 발한에 대한 소문을 세상을 현혹시키는 요망한 말이라고 하며 분개를 금치 못하겠다는 등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문장들이 더 포함되어 있다.
22) 민유중의 상소문이 올라오고, 왕이 예조에 해당 사안을 보내어 의견을 듣고, 이에 준하여 상소에 답을 한 것은 아마도 여러 날에 거쳐 이루어졌을 것인데, 한꺼번에 정리하여 1월 20일 자 기록에 실은 듯하다.
34) 도선과 도세의 편찬물에 채록된 후한시대부터 당대에 이르는 불상의 신이에 대한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학문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찬물들은 이러한 신이가 채록된 7세기에 동시대인들이 이러한 신이에 대한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아래 언급할 형주의 장사사 불상이 땀을 흘렸다고 하는 『집신주삼보감통록』 의 서술은 실제로 이 불상이 5세기~7세기 초에 걸쳐 발한을 했다고 하는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을 통해, 도선이 해당 문헌을 편찬한 7세기 중엽에 장사사 불상이 땀을 흘리는 불상이라는 인식이 펴져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35) 중국 사료에 실린 신이에 대한 파악은 이주형 교수가 알렉산더 소퍼 (Alexander C. Soper)의 저서인 Literary Evidence for Early Buddhist Art of China를 바탕으로 원문 사료를 번역하여 정리해 놓은 자료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주형, 앞의 책, pp. 16-27.
36) 표1은 위의 책, pp. 16-27의 원문정리와 『집신주삼보감통록』, T2106, 52:415-416의 원문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41) 표2는 이주형, 앞의 책, pp. 16-27의 원문정리와 경전 원문들을 참조하여 만들었다.
42) 이주형 교수님의 보고서는 『집신주삼보감통록』, T2106, 52:419a1-4의 내용을 수록했으며, 『법원주림』, T2122, 53:400c2-3; 『고승전』, T2059, 50:412b20-22 에도 같은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43) 이주형 교수님의 보고서는 『집신주삼보감통록』, T2106, 52:419a의 내용을 수록했으며, 『고승전』, T2059, 50:412b; 『법원주림』, T2122, 53:388c; 『법원주림』, T2122, 53:400c 에도 같은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47)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불상의 땀을 멈추게 한 사람에 대한 기록에는 약간의 불일치가 보인다. 『고승전』은 이 사람이 팽성에 주둔하던 위양왕(僞梁王), 즉 북위(北魏)의 양왕(梁王)인 원량(元諒)이라고 적고 있다(T2059, 50:412b). 『법원주림』에는 비슷한 내용이 두 군데 수록되어 있는데, 각각 위나라 서주 자사(徐州刺史) 양왕(梁王)(T2122, 53:388c)와 위양(僞梁) 왕겸진(王謙鎭)으로 다르게 적고 있다(T2122, 53:400c).
50) 이주형 교수에 따르면, 문헌이 없는 것을 근거로 단순히 고려시대 이전에는 불상 발한의 이적이 없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삼국시대와 신라의 사료를 편찬한 사람들의 성향이나 편집방향으로 인해 관련 내용이 채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주형, 앞의 책, p. 37.
53) 『동국이상국집』 제25권, 기(記), 「왕륜사장륙금상영험수습기」. 해당 문장에 “故首座僧傑”의 번역을 도와주신 박광연 교수에게 감사를 표한다. 수좌(首座)는 고려시대 교종(敎宗)의 법계(法階)에서 승통(僧統) 바로 아래에 있는 두번째로 높은 승계이다.
55) 이 불상이 고려 전기에 관음보살상으로 만들어졌으나 이후 미륵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신은영,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圖像-尊名불일치 문제와 ‘世間’」, 『史學硏究』 117 (2015. 3), pp. 123-161.
57)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를 참조하고, 번역에 약간의 수정을 더함.
58) 관촉사 불상은 조선초 1411년에도 땀을 흘린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태종 실록』 12년(1411) 10월 23일; 이주형, 앞의 책, pp. 95-86에 해당 실록의 한글번역이 수록되어 있음.
59) 僧有辦來壬戌歲灌足寺彌勒石像龍華會者 求緣化文 旣筆以與之 因記舊日陪慈堂自鎭浦浮舟而上 獲與是寺法會 癸卯冬 降香作法 皆如夢中 作短歌以記之. 원문과 번역은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에서 발췌하고 약간의 수정을 더함.
60) 왕륜사 장륙상과 관촉사 석조미륵보상입상에 대한 기록 외에, 조선시대 편찬물이기는 하지만, 『고려사(高麗史)』에 원주(原州) 산간사(山澗寺)의 철불이 태조 11년(928)에 3일 동안 땀을 흘렸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이주형, 앞의 책, pp. 69, 74.
61) 실록에 수록된 불상 관련 이적의 연도별 정리는 위의 책, pp. 81-82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 고려 개성부에 위치했던 사찰에서 고보된 발한 이적은 모두 14건이 실록에 수록되었다. 1409년 이후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서 더 많은 불상 발한이 보고된다.
63) 번화현 서상에 대한 연구로는 김혜원, 「양주(凉州) 번화현(番禾縣) 서상(瑞像)의 도상에 대한 재고(再考)」, 『美術史學』 25 (2011), pp. 99-126; Wu Hung, "Rethinking Liu Sahe: The Creation of a Buddhist Saint and the Invention of a 'Miraculous Image'”, Orientations 27, no. 10 (1996), pp. 32-43; 肥田路美, 「凉州番禾縣瑞像の說話と 造形」, 『佛敎藝術』 217 (1994), pp. 33-54 등이 있다.
64) 측천무후의 정치적 상서 활용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 논저로는 Antonino Forte, Political Propaganda and Ideology in China at the End of the Seventh Century (Napoli: Istituto universitario orientale, Seminario di studi asiatici, 1976); Antonino Forte, Mingtang and Buddhist Utopias in the History of the Astronomical Clock: The Tower, Statue, and Armillary Sphere Constructed by Empress Wu (Paris: Istituto italiano per il Medio ed Estremo Oriente; E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Roma, 1988); Jinhua Chen, “ŚarĪra and Scepter: Empress Wu’s political use of Buddhist Relics,”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25, no.1-2 (2002) pp. 33-150; 주경미, 「중국 고대 황실발원 불사리장엄의 정치적 성격-역성혁명의 선전물로서의 진신사리공양」, 『동양학』 33, (2003. 2), pp. 363-382 참조.
65) 불교 신이와 상서를 정치적으로 사용했던 조선시대 왕으로는 불교를 숭앙했던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를 드문 예로 들 수 있다. 관련 내용은 이정주, 「世祖代 후반기의 불교적 祥瑞와 恩典」, 『民族文化硏究』 44 (2006), pp. 237-270; 박세연, 「朝鮮初期 世祖代 佛敎的 祥瑞의 政治的 意味」, 『사총』 74 (2011), pp. 25-66; 홍광표, 황민하, 「觀音現相記를 통해서 살펴본 조선 초기 상원사의 경관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1, no. 3 (2013), pp. 114-121 참조.
68) 『효종실록』 21권, 10년(1659) 3월 5일, 8일, 10일, 11일, 12일, 13일, 14일, 15일, 16일, 19일, 23일, 24일, 25일, 26일, 27일, 29일, 윤3월 1일, 2일.
75) 하상(何嘗)은 “어찌 일찍이 한 적이 있는가”라는 물음이나 부정의 의미를 담은 단어이다. 민정중의 상소문은 불상을 불(佛)과 불상(佛像)을 같은 의미로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83) 이주형, 앞의 책, pp. 153-157과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의 번역을 일부 수정하여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