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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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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시대까지는 보탑을 든 상이 북방 다문천왕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보탑을 든 상이 서방 광목천왕이다. 이와 관련한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임영애,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의 방위문제와 조성 시기」, 『서지학연구』 10 (2005), pp. 73-95; 이승희, 「고려말 조선초 사천왕도상 연구」 『미술사연구』 22 (2008), pp. 117-150; 임영애. 「북방 多聞天과 그의 持物 寶塔-원과 고려이전 양상-」, 『미술사와 시각문화』 9 (2010a), pp. 86-115; 임 영애. 「조선시대 사천왕상 존명의 변화」, 『미술사학연구』 265 (2010b), pp. 73-104; 박은경·한정호, 「사천왕상 배치 형식의 변화 원리와 조선시대 사천왕 명칭」, 『미술사논단』 30 (2010), pp. 273-302; Lim Young-ae. “The Four Heavenly Kings of Jikjisa Temple Dated to 1665 of the Joseon Period and Their Significances,” Korea Journal 57-2 (2017), pp. 129-152; 임영애, 「천왕문의 등장: 한국 사천왕상의 봉안 위치와 역할 변화」, 『신라문화』 52 (2018), pp. 45-70.
2) 1676년에 조성한 홍천 수타사 사천왕상 역시 서방 광목천왕이 쥐를 쥐었다. 그러나 수타사 사천왕상의 배치가 통상의 조선 후기 사천왕상과 다르고, 쥐를 쥔 손도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세 사찰과는 제작 시기, 지역, 도상에 차이가 있어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1688년 예천 용문사 사천왕상,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무렵 안성 칠장사 사천왕상 역시 오른손에는 幢을 들었지만, 왼손에는 탑을 들지 않고 손을 왼 허리춤에 대고 있다. 얼핏 보면 쥐를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쥐는 없고 옷자락을 잡거나 손을 왼 허리춤에 올려 둔 것이어서 역시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3) 17세기 전반 화엄사 불전의 재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이강근, 「화엄사의 불전과 17세기 재건역」, 『불교미술』 14 (1997), pp. 80-89; 이강근, 「17세기 벽암 각성의 해인사·화엄사 재건에 대한 연구」, 『강좌미술사』 52 (2019), pp. 75-97.
5) 白谷 處能, 임재완 옮김, 「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 『大覺登階集』 2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5), p. 295; “壬申 修葺華嚴寺 薦貨者塡衢 藹爲䕺林”(ABC, H0165 v8, p. 330c04-c05).
6) 벽암 각성은 화엄사 동오층석탑의 중수도 했다. 화엄사 동오층석탑 중수기에 아쉽게도 중수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공덕주로 벽암 각성이 등장한다. 화엄사의 동오층석탑 중수기에 대해서는 이철호, 「구례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1), pp. 137-138 참조.
8) <표1의 ②>에는 벽암 각성의 탑이나 탑비가 건립된 사찰은 지리산 화엄사, 조계산 송광사, 가야산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라고 적었다. ABC, H0165 8:331a. 그런데 <표1의 ②>와 달리 <표1의 ③>에는 가야산 해인사가 아니라 지금의 완주 송광사에 탑이 세워진 것으로 적고 있어 차이가 있다. 네 곳에 세워진 비 가운데 현재는 화엄사와 법주사의 비문만이 전한다. 비문의 전문은 이지관 편, 「법주사벽암당각성대사비명」, 「화엄사 벽암대사비문」, 『한국고승비문총집』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pp. 174-177, 180-184를 참조하기 바란다.
10) 「화엄사 벽암대사비문」, 앞의 책, pp. 180-184; 고영섭, 「벽암 각성의 생애와 사상 - 李景奭 撰 「華嚴寺 碧巖堂 覺性大師碑文」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52 (2019), pp. 50-56; “癸巳 松雲 薦休于朝 檄致陣上 師亦仗劒”; 손성필, 「조선중후기 고승 傳記類 자료의 성격: 碧巖 覺性의 碑銘과 行狀을 중심으로」, 『佛智光照: 청계정인스님정년기념논총』 (논총간행위원회, 2017), pp. 686-712; 손성필, 「17세기 浮休系 僧徒의 碑건립과 門派 정체성의 형성」, 『조선시대 사학보』 83 (2017), pp. 129-171.
12) 순천 송광사와 구례 화엄사의 천왕문이 다포 형식 또는 유사 다포 형식으로 건축되었다는 연구 성과는 류성룡, 「17세기 사천왕상 天王門의 건축형식 展開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21-5 (2012), pp. 69-82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한편 벽암 각성이 중창을 주도한 사찰에 대형 사천왕상이 조성된 점을 두고 벽암 각성으로 인해 ‘호국’과 관련한 사천왕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노명신, 「조선후기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 『미술사학연구』 202 (1994), p. 105; 노명신, 「송광사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 『강좌 미술사』 13 (1999), p. 95; 정은우, 「조선후기 대형 소조사천왕상의 구조와 제작기법 연구」, 『불교미술사학』 22 (2016), p. 153.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17세기 재건 사찰에 천왕문과 대형 사천왕상을 조성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을 모두 ‘벽암 각성의 호국정신’과 관련짓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물론 순천 송광사와 화엄사의 천왕문과 사천왕상은 벽암 각성과 관련 깊지만, 그 외의 사찰도 모두 동일선상에 두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사찰의 천왕문은 이미 13세기 후반부터 건립하기 시작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17세기에 같은 형식으로 재건했다고 보았다. 다만 전란 후 ‘천왕문과 대형 사천왕상’이 특별히 유행했던 것처럼 보인 이유는 재건한 천왕문이 지금까지 잘 유지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영애, 앞의 논문 (2018), pp. 45-70.
13) <목조석가불좌상> 시주질을 통해 1320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승려는 580명임을 알 수 있다. 장찬, 「구례 화엄사 대웅전 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1), pp. 11-13. 시주질 분석은 유근자,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조성기 「施主秩」 분석」, 『미술자료』 100 (2021), pp. 112-139 참조.
14) 대웅전 현판에는 “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 숭정9년(1636) 병자년 8월 의창군 이광이 쓰다”라고 되어 있다. 이종수, 「구례 화엄사 의승병의 구국 활동과 사찰 재건」, 『남도문화연구』 47 (2022), pp. 177-207.
15) “경과 사대부 중에 대사와 교류한 사람이 많았는데, 특히 동양위 (신익성)와 친했다. 卿士大夫多與之 東陽尉特相善 未幾南歸.” 「화엄사 벽암대사비문」, 앞의 책, p. 181; 「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韓佛全』 8, p. 330 下), “明年壬午(1642) 辭歸海; 申翊聖, 「贈義賢序」, 『樂全堂集』 5, “나는 각성과 평소 친분이 있어 한두 가지 일을 물어보곤 하였는데, 그 또한 불경에 깊이 통달하여 옳은 듯한 설법으로 불도를 수식할 수 있었고 그 재주는 스스로 웅대해질 만하였으니 이른바 정신과 역량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김은정, 「東陽尉 申翊聖의 駙馬로서의 삶과 문화활동」, 『열상고전연구』 26 (2007), pp. 215-254.
16) 각성은 1612년 투옥되었다가 방면된 후 봉은사에 머물렀는데, 각성은 봉은사에서 많은 사대부와 교유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신익성과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李景奭 撰, 「화엄사 벽암대사비문」(표1-③), 이지관 편, 『韓國高僧碑文總集』(가산연구원출판부, 2000), p. 181.
17) 申翊聖, 「樂全居士自敍」, 『樂全堂集』 序, “나는 열두 살에 부마가 되었는데 선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여 궁중을 거침없이 출입하도록 허락하였다”; 신익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김은정, 앞의 논문 (2007), pp. 215-254.
18)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 이징(1581-?)이 그림을 그리고, 신익성이 서문을 지은 <이징 필 산수화조도첩>도 있다. 벽암 각성의 비문을 작성한 이경석도 이 그림의 제화시를 작성하고 있어 벽암 각성, 신익성, 이경석과 오랜 인연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경석은 영의정을 역임한 최고위 관인이면서 당대의 명문장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징필 산수화조도첩>에 대해서는 오세현, 「조선 중기 사대부들의 詩畫를 통한 교유에 관한 試論: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李澄 筆 山水花鳥圖帖》(보물 1985호)을 중심으로」, 『규장각』 58 (2021), pp. 439-474 참조.
19) 김은정, 앞의 논문 (2007), pp. 222-227; 이태호, 「17세기, 仁祖 시절의 새로운 회화경향 -東淮 申翊聖의 寫生論과 實景圖, 肖像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31 (2008), pp. 103-152.
23) 18세기로 넘어가면 1718년 양산 통도사 목조사천왕상의 進悅도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의 조각승에 대해서는 「順天 松廣寺 塑造四天王坐像 造成記」, 1628년 (綺山錫珎 編, 『曹溪山松廣寺史庫』 下, 1929, p. 641), “大明崇禎元年戊辰月日四天王新造成 …畫員 應圓 高閑 釋湖 法海 戒雄 釋森 懷澗 天翼 離幻 天然 性悅 三忍 信懷 法端 司果洪有智印均….” 참조할 것; 단응이 조성한 사천왕상에 대해서는 Lim Young-ae, 앞의 논문 (2017), pp. 129-152 참조.
24)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 역시 실물 조성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에 간행한 『曹溪山松廣寺史庫』에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좌상 조성기」가 수록되어 있어 1609년 천왕문을 중수하고, 1628년 응원을 대표로 하여 모두 13명의 조각승이 함께 사천왕상을 제작했음이 밝혀졌다(이 글의 위 각주 참조). 같은 내용은 북방 다문천이 들고 있는 비파의 뒷면 묵서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 대해서는 임영애, 앞의 논문 (2005), pp. 73-95 참조.
26) 이 글의 각주 23; 임영애, 앞의 논문 (2005), pp. 89-93. 조각승 응원과 인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손영문, 「조각승 인균파 불상조각의 연구」, 『강좌미술사』 26-1 (2006), pp. 53-82; 송은석, 「조선 후기 應元·印均派의 활동: 應元, 印均, 三忍」, 『한국문화』 52 (2010), pp. 219-249.
28) <화엄사 삼신불좌상>의 제작 시기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석가모니불 복장 시주질은 1634년 3월-1635년 가을, 노사나불상 복장 시주질은 1634년 3월-1635년 가을, 노사나불 대좌 내부 묵서명에는 1634년 3-8월, 『화엄사 사적』(표1-④)은 1636년이라고 적었다.
29) “…畵員秩 淸憲 應元 印均 法現 省根 英頤 元澤 善允 天曉 印希 善見 懶欽 学浩 法密 雲密 智学 尙日 尙仅” <화엄사 삼신불좌상>의 조각을 18명의 조각승이 분업했다는 견해는 송은석, 「조선 17세기 彫刻僧유파의 합동작업」, 『미술사학』 22 (2008a), pp. 94-103, pp. 99-102; 송은석, 「17세기 전반 曹溪山 松廣寺와 彫刻僧: 覺敏, 應元, 印均」, 『보조사상』 29 (2008b), pp. 311-322 참조.
31) 노사나불 대좌와 시주질의 기록에 1년의 차이가 있다(이 글의 각주 28 참조). 노사나불 대좌의 묵서를 기준으로 하면 일을 마무리한 때가 1634년이고, 시주질을 기준으로 하면 1635년에 공사를 마친 것이 된다; 화엄사 대웅전 불상과 조각승에 대해서는 최성은,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 불좌상에 대한 고찰」, 『미술자료』 100 (2021), pp. 140-171; 장찬, 앞의 논문, pp. 1-160을 참조할 것.
32) 표1-④의 『화엄사사적』에는 “만력 21년(1636) 大化士 懶黙과 希寶가 畵員 淸憲, 英頤, 印均, 應元 등을 요청하여 조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36) 1664년에 세워진 보은 법주사 벽암당 「각성대사비문」에서는 응원과 인균의 이름을 찾을 수 없으며(이지관 편, 「보은 법주사 벽암당 각성대사비문」, 『한국고승비문총집』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pp. 174-177), 법주사 사천왕상 역시 화엄사 사천왕상과는 도상, 양식에서 차이가 크다.
38) 여수 흥국사 사천왕상 역시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천왕문이 1645-46년 흥국사의 중문 및 봉황루가 건립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사천왕상 역시 대략 그 무렵에 조성한 것으로 본다.
41) 지금까지는 이 글의 표1-② 「벽암각성행장」의 화엄사 중건 시작 시기를 근거로 화엄사 사천왕상의 제작 시기를 1632년으로 기술해 왔다. 문화재청, 『구례 화엄사 대웅전 정밀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13), p. 43.
42) 서방 광목천왕이 왼손에 쥐고 있는 동물의 생김새로 보면 쥐보다 몽구스(Mongoose)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당서역기』를 비롯한 漢譯 경전에서는 寶鼠라고 번역하고 있어 이 글에서는 쥐로 서술한다. T51 2087:0944a21.
46) 영국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木板繪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A_1907-1111-68.
47)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William Woodville Rockhill. The Life of the Buddha and the Early History of His Order (London: Trübner & Co. 1982), pp. 233-237. Rockhill은 티베트 대장경의 호탄불교 관련 내용을 최초로 소개했다. 이외에도 R. E. Emmerick, Tibetan Texts Concerning Khotan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7), pp. 48-49; H. W. Bailey, Khotanese Buddhist Text, revised edition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p. 52 참조; 차상엽, 「티벳문헌에 기술된 호탄불교」, 『불교학보』 70 (2015), pp. 123-141.
48) 티베트에서는 ‘쥐를 쥔 천왕’을 북방 천왕으로 인식했다. 이는 중앙아시아 호탄지역에서 스스로 북방에 거주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북방 다문천(비사문천)만을 나라의 수호신으로 삼은 것과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T51 2087:0943a25. 호탄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에서도 쥐를 쥔 천왕을 북방에 두었다. 그러나 ‘쥐를 쥔 천왕’이 명나라로 전해진 후 명나라에서는 티베트, 즉 西藏에서 온 도상이라고 인식하여 서방 천왕이라 명명했다고 본다.
49) 란자나문자는 11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네팔과 티베트 지역에서 널리 사용된 문자이다. https://www.omniglot.com/writing/ranjana.htm
51) 심사자 가운데 한 분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었다. “명 1431년의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 도상과 조선 후기의 송광사, 화엄사, 흥국사 광목천왕상이 손이 쥔 보서는 위축된 모습이거나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광목천왕에게 잡혀 제압당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호탄에서 호국신으로 숭앙되었던 보서가 티베트에서 보물을 토하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까지는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달했을 때는 정반대로 사천왕에게 마치 조복 당하는 듯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나 배경을 이 논문에서 당장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쉽지 않겠지만, 같은 도상이 東傳하면서 출발점과는 상반되는 이미지로 바뀐 변화상 자체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그 과정에 대한 견해와 같은 부연 설명을 해주면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심사자의 지적은 타당하며, 그 이유에 대해 이 글에서는 명쾌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유념해 두었다가 추후 유사 주제의 논고에서 논의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다.
52) 조선시대 사천왕상은 이 외에도 몇 가지 판본의 영향을 받았다. 가장 큰 영향은 명나라 1417년에 제작된 『諸佛菩薩名稱歌曲』이며, 이 판본에서는 서방 천왕이 왼손에 탑을 들었다. 조선시대의 사천왕상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1417년 판본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임영애, 앞의 논문 (2010), pp. 73-104 참조.
53) 벽암 각성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고영섭, 앞의 논문 (2019), pp. 50-56; 신명희, 「벽암 각성의 행적과 사상」, 『보조사상』 64 (2022), pp. 3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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