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백자와 단색백자: 조선후기 新채색백자의 출현과 전개*
Polychrome and Monochrome Porcelain: The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new type of colored white porcelain in late Chosŏ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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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최소 2개 이상의 색으로 장식한 ‘다채백자’와 기면 전체를 마치 유약으로 시유한 것처럼 채색한 ‘단색백자’는 조선후기 들어 새롭게 등장한 신품종으로 이른바 ‘新’ 채색백자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백자에 등장하는 여러 색의 변주는 조선백자 생산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그 배경에는 채색백자로의 전환이 이루어져 이미 일상생활에 보편화된 청과 후발주자인 일본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외래 채색자기의 문화를 수용하는 조선은 청 문물을 적극 평가하며 그 도입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성리학적 위계질서 하에 尊卑等威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색의 개방이 전격 이루어졌다. 또한 조선후기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로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신분에 따른 색의 제한이 작동되지 못한 상황은 색의 자유로운 표현으로 이어졌다.19세기 북학에 의한 고증학의 수용은 현실에 바탕을 두어 사물을 변증하고자 하였고, 색의 사용은 바로 대상에 대한 객관적 정보와 사실성을 중시하고자 한 표현이었다. 전 계층에 의해 향유된 색은 다양한 채색자기의 탄생과 사용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조선후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색의 복권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Trans Abstract
Two novel types of colored porcelain appeared in late Chosŏn: polychrome porcelain that was decorated with two or more colors, and monochrome porcelain colored all-over with a single color, as if with underglaze. The use of various colors on late Chosŏn porcelain was a significant turning point for its production.
This development was likely caused by influences from Qing and Japan. In Qing, colored porcelain was the dominant type, already in everyday use, and Japan was following Qing closely. Chosŏn accepted this foreign culture of colored porcelain, and actively valued and embraced the culture and products of Qing. Whereas colors had served to distinguish different social classes in the Neo-Confucian hierarchy, they began to be employed more liberally. In late Chosŏn, the rapid growth of commodity and monetary economy meant that the existing social system that was built with yangban in the center was being upturned. Now, colors could be used more freely without any social restrictions.
In the 19th century, scholars of the Northern Learning received influence of the Kaozheng school and tried to explain the world according to what was real. For them, colors provided a way of expressing the importance of subjective information and veracity. As all social classes could enjoy colors, different colored porcelain was developed and widely used, representing the new-found importance of colors in late Chosŏn.
Ⅰ. 머리말
토기부터 자기까지 색을 더해 장식하는 장식기법은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긁고 파내는 기법과 함께 오랫동안 도자 공예 장식기술의 축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룩한 도자 장식 기술의 발전은 선명한 색과 더욱 많은 색상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도자기의 종주국인 중국을 보면, 일찍이 唐(618~907) 長沙窯에서 산화철과 산화동을 이용하여 釉下彩 기법으로 器面을 장식하였고, 元代(1260~1367)에 들어서면 백자에 산화코발트로 장식한 청화백자의 시대가 개막하였다. 이후 明(1368~1615) 成化年間(1465~1487)에는 鬪彩와 같은 釉上彩 기법이 적극 활용되어 藍, 紅, 黃, 綠 등의 색상이 선명하게 발색되었다. 물론 淸(1616~1911) 강희(康熙, 재위 1662~1722) 말년 제작에 성공한 법랑채는 기면에 더욱 다양한 색상의 구현을 실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이처럼 천여 년의 시간 동안 도자기 위에 아름다운 색을 표현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에서도 자기 위에 색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 철화청자와 동화청자가 이에 속했고, 조선 청화백자와 철화백자, 동화백자가 이에 해당한다. 특히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단색의 안료만을 이용해 장식하는 방식에서 최소 두 가지 색상이 혼합되거나, 단색유를 대신하여 그릇 전면을 채색하는 방식도 시도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색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는 단일 안료로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전통적 청화백자와 철화백자, 동화백자와 분명 차이가 있다.
이처럼 조선이 여러 색을 수용하고 표현하려는 시도는 조선후기 들어 급격히 증가하는데, 그 배경에는 채색백자로의 전환이 이루어져 이미 일상생활에 보편화된 청과 후발주자인 일본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은 급변하는 조·청 관계 속에서 청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고, 이런 양상은 조선백자의 문양이나 기형 면에서 적지 않게 확인된다. 當代의 풍류를 표현한 회화는 물론 문헌기록 등에서 청의 도자는 조선 사회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은 이미 선행 연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1 이후, 19세기 말기 개항이 되면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소위 왜사기의 유입이 증가하였고, 이 또한 조선백자의 문양 장식에 영향을 미쳤다.2 물론 청과 일본은 선명하면서도 다양한 색상을 구현할 수 있는 유상채 기법의 발달로 일찍이 화려한 채색백자가 생산되었지만, 유상채 기법이 도입되지 않은 조선에서는 이들에 버금가는 여러 색이 사용된 채색백자의 구현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18세기 후반 이후 증가하는 채색백자의 향연은 모종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 조선 사회 도자문화의 변화를 가져온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에 본 연구는 단일 안료로 문양을 장식했던 전통적인 청화·철화·동화백자와 뚜렷한 시각적 차이를 보이는 새로운 양식의 채색백자 출현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른바 최소 2개 이상의 색으로 장식한 ‘다채백자’와 기면 전체를 마치 유약으로 시유한 것처럼 색을 칠한 ‘단색백자’는 조선후기 들어 새롭게 등장한 신품종으로 조선백자 생산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3 다만 지금까지는 조선후기 대외교류의 흐름 속에서 이와 같은 ‘新’ 채색백자의 생산 자체에 주목했다면, 이를 소비한 당대의 사회 문화도 같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소비는 특정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소비자는 소비행위를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에서 용인되고 이해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진 조선후기 이후, 변화된 사회적 미감과 이를 수용했던 사회·문화, 혹은 이 문화를 소비한 주체자들에 대한 탐구는 ‘新’ 채색백자의 출현과 그 의미를 더욱 명확히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4
Ⅱ. 조선에 유입된 新채색백자의 양상
18세기 후반 활발해진 청과 일본의 문화교류는 색의 다양화를 경험한 조선인들의 미감을 쫓아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되었다. 가령 두 가지 이상의 색을 동시에 사용한다든지, 유약 대체용으로 기존의 ‘그리는 것’보다 ‘채색’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전통적인 안료 사용법을 넘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배경에는 모종의 시각적 자극과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에 유입된 외래 채색백자는 선명한 발색과 다양한 색상이 어우러진 유상채 기법으로 명·청시대의 오채와 법랑채자, 단색유자기, 그리고 일본의 색회자기 등이다. 유하채 방식에 의해 생산된 조선의 채색백자와는 기법부터 문양, 기형까지 전혀 다른 풍미를 보여주기 때문에 당대의 조선인들에게 시각적 자극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외래 채색백자가 언제부터 조선에 유입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를 접한 조선의 경험은 오늘날 전하는 몇몇 사례를 통해 확인된다.
1. 기록과 회화에 보이는 외래 다채백자와 단색백자
문헌기록 상 청이나 일본의 오채와 색회자기(이하 다채백자) 혹은 단색백자를 명확히 나타내는 용어는 찾기 어렵다. 대부분 색을 더해 문양을 장식하는 의미인 畫磁器,5 彩文器,6 靑畫器,7 畫彩8 등으로 등장한다. 그나마 다채백자를 연상케 하는 명칭으로는 광해군8년(1616) 사헌부에서 복식·기물에 차별을 두어 나라의 기강을 세울 것을 청하는 부분 중 내자시·내섬시·예빈시가 사용하는 그릇이 사옹원에서 제작된 ‘靑紅阿里’라 밝히고 있다.9 ‘청홍아리’라는 명칭은 마치 청과 홍색을 동시에 사용한 다채자기로 마치 코발트와 산화동(혹은 산화철)이 함께 장식된 다채백자가 연상된다. 그러나 1616년 기준으로 그 이전까지 운영된 관요, 탄벌동요지(1606~1610년)와 학동리요지(1613~1618년)에서 생산된 예를 보면,10 철화백자만 소량 출토될 뿐이다. 다만 청홍아리의 용어는 명종10년(1555) 『經國大典註解』중 예빈시에서 彩文器를 사용한다는 것을 광해군때 다시 ‘예전 규례대로 청홍아리를 쓴다[則竝依舊例, 用靑紅阿里]’고 하였으므로, 16세기 중반경 생산된 청화나 철화백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19세기 때 편찬된 의궤나 1891년부터 약 20년간 分院貢所의 貢人이었던 池圭植이 쓴 『荷齋日記』에서 ‘靑彩器’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 역시 청화를 안료처럼 채색한 푸른색의 단색유를 연상케 하지만, 문맥상 분원에서 생산된 청화백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11 그 외 彩花銅沙器의 용어가 등장하는데,12 이 명칭은 유일하게 정조19년(1795)에 등장한 이후 보이지 않는다. 정확하게 어떤 그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채화 즉 색깔이 있는 그림이 그려진 그릇이라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彩花銅’이라는 문자만 봤을 때, 사기 재질에 동과 같은 금속성분의 안료를 채색한 그릇이 연상된다. 이와 함께 영조42년(1766) 연경사행을 떠난 洪大容(1731~1783)이 남긴 『湛軒書』 중 ‘서양의 자기는 속이 銅器이고 겉은 자기로 발랐는데, 이야말로 자기 가운데의 교묘한 물건이다.’라는 구절이 주목된다.13 이는 동기 표면 위에 유리질화 된 유약의 효과로 마치 자기처럼 보이는 동태화법랑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건륭치세(1736~1795)로 일명 ‘화법랑’이 청 황실을 대표하는 공예품이었다. 이후 정조10년(1786, 건륭 51년) 청 황실의 하사품으로 처음 조선에 정식 유입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이미 화법랑기에 대한 경험이 이미 존재했을 것이다.14 따라서 彩花銅沙器라는 명칭은 경험의 습득에 의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법랑자기를 의미하는 명칭은 이미 그 이전에 洋磁(1778), 洋磁琺瑯(1787) 등으로 등장하므로,15 정조19년(1795) 이전에 조선인들은 법랑자기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또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銅沙’, 즉 ‘동+모래’로 산화동 모래, 혹은 산화동 가루 등으로 해석하여 ‘산화동 가루로 채색한 그릇’의 의미도 가질 수 있다. 이는 곧 환원염에서 산화동으로 발색이 되는 붉은색으로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 즉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동화백자’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18~19세기 동화백자의 제작이 증가한다는 점에서 고려해 볼 수 있는 해석이다. 그 외 상술한 것처럼 ‘다채백자’를 의미하는 명확한 명칭은 법랑채자로 정조2년(1778) ‘洋磁’로 등장하며, 당시 청궁에서 사용되던 瓷胎洋彩가 조선에 유입된 사실이 확인된다. 특히 청대의 법랑채자는 이후 19세기 후반 간행된 7권의 의궤에 등장하여 정조 초반 조선왕실에 유입된 이래 왕실 연회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16 그 밖에 조선에 유입된 일본의 색회자기에 관한 기록 역시 많지 않다. 그나마 18세기 등장하는 일본산 자기의 기록으로는 『通信使謄錄』 중 일본의 幕府와 差倭가 조선으로 보낸 예물목록 중 伊万里大天目, 伊万里大皿, 畫陶, 畫彩 등이 확인된다.17 畫陶, 畫彩, 畵磁 등으로 언급되어 그 품종을 명확히 알기 어렵다.18 그럼에도 ‘彩磁累合’ 혹은 ‘薩摩陶花甁’과 같은 채색자기를 뜻하는 유의미한 용어가 확인되어 그 실체를 파악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19 彩磁累合의 ‘彩磁’가 청화인지 유상채 자기인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薩摩陶花甁은 가고시마현에 위치한 저명한 사츠마 가마에서 생산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병이 유입된 19세기 후반의 사츠마 가마는 색회자기로 명성이 드높았기 때문에 이 화병 역시 다채백자일 가능성이 높다.
단색유 혹은 색을 유약처럼 채색한 백자를 명확히 표현한 명칭 또한 찾기 힘들다. 다만 조선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였던 徐有榘(1764~1845)의 『林園經濟志』 중 분원에서 근래 絳礬으로 색을 낸 ‘茶褐色’와 ‘淡紫色’ 자기가 생산된다는 구절이 확인된다.20 그중 絳礬은 綠礬이라고도하며 황산제일철(FeSO4) 성분이다. 서유구가 그림이 그려진 畵瓷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도 했고,21 색이 강조된 ‘다갈색이나 담자색으로 만든 자기[作茶褐色, 淡紫色者]’라는 구절로 판단컨대 당시 분원에서 생산된 철채자기의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부족한 문헌기록 대신, 조선후기 회화작품에서 다색자기보다 단색자기가 월등히 많은 수량으로 확인된다. 먼저 1740년경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후기 문인화가 鄭敾(1676~1759)의 〈讀書餘暇圖〉는 단색유자기가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Fig. 1). 정선 본인으로 추정되는 그림 속 주인공은 당시 京華世族들의 고급 취향이었던 盆栽 수집과 감상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의 뒤 편 책장 안에는 황유병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본래 황유는 황제를 상징하는 중국 황실의 기조에 따라 명·청시기 엄정하게 관리된 품종 중 하나이자, 황실 제사용부터 황실 일가의 생활자기로 중시되었다.22 〈독서여가도〉가 그려진 시기는 건륭치세로 이때는 산화철을 착색제로 하는 전통적인 황유보다 강희말년 법랑채자 제작을 위해 서양에서 수입된 일명 ‘西洋黃’이 활발히 생산된 시기로 산화안티몬과 주석을 착색제로 한다.23 그러므로 황실에서 특별히 관리되는 값 비싼 ‘서양황’이 민간에서 생산되어 조선까지 수출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산화철을 착색제로 한 저온 황유는 민요에서도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이 황유병은 그중 하나로 여겨진다. 하지만 조선은 여전히 청화백자 사용이 우세인 상황에서 흔치 않았던 색유, 그것도 역대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황유의 가치는 분명 특별했을 것이다.
단색유 자기는 18세기 후반 이후, 회화자료에 다수 등장한다. 대략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太平城市圖〉에서 다양한 단색유 자기가 등장한다(Fig. 2).24 상업활동과 소비, 문화와 유흥의 중심지로 한양이 묘사되어 여러 청 문물이 등장하는데, 그중 2층의 상점에서 판매되는 다채로운 색깔의 단색유가 단연 눈에 띈다. 단색유의 쓰임은 비단 생활기명에 국한되지 않고, 儀禮器로 사용된 정황도 확인된다. 〈太平城市圖〉와 비슷한 시기인 1866년 제작된 남양주 흥국사〈甘露王圖〉에서 재단에 花罇으로 사용된 대형항아리가 이에 속한다(Fig. 3). 이외에도 19세기 말기부터 20세기초까지 제작된 감로도에는 단색유의 화준은 물론 속세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색색의 단색유 식기가 등장하고 있어, 당시 사회에서 유행했거나 혹은 익숙한 대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밖에 다채백자와 단색백자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록으로는 단연코 19세기 전반 이후 유행한 ‘책가도’이다(Fig. 4). 오늘날 전하는 여러 책가도에서는 청대의 기물로 여겨지는 각종 공예품들과 함께 단색유, 법랑채자 등이 다수 등장한다. 실제 이런 기물들이 조선에 유입되었는지 현재로서는 명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張漢宗(1768~1815)과 李亨綠(1808~?) 등 당대 궁중화원이 참여했고, 또 이들의 작품이 이후에도 계속 모사되는 경향으로 보아 실제 조선왕실에 유입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25
2. 전세 및 출토된 외래 다채백자와 단색백자
외래 채색자기에 대한 문헌기록의 부재는 전세 및 출토유물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 명 말기에 유행한 오채계의 유상채자기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지만, 명 萬曆年間(1573~1615) 이후 생산된 것으로 여겨지는 오채(홍록채)가 옛 한성부 시전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비록 소량이긴 하지만, 조선 역시 다색자기로의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진 동아시아 흐름을 따르고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다색자기의 편년자료로 가장 이른 淑愼公主(1635~1637) 묘 출토품 일괄은 검소를 지향할 의무를 지닌 왕실의 부장품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Fig. 5). 총 8점의 출토품 중 7점에 ‘大明萬曆年製’의 명문이 있으며, 그중 6점의 청화백자합과 2점의 오채로 구성되어 있다.26
청이 건국된 직후, 조선의 대청인식은 기본적으로 對明義理論과 反淸意識으로 점철된다. 비록 18세기 초, 연행을 떠나 목도한 청나라의 안정적인 경제 성장과 문화 융성기를 경험하면서 점차 청을 인정하려는 태도도 보이지만, 기본적인 基調는 역시 청에 대한 반감의식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도자무역에도 영향을 미쳐, 종전의 청화안료 수급이 어려워져 대신 철화백자를 생산한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英祖年間(1725~1776)에 이르면 비록 사치를 금하는 명분으로 唐物의 사용이 제한되었지만,27 앞서 살펴본 정선의 〈독서여가도〉처럼 청대의 수입자기가 사대부들 사이에서 소비되었다. 실제로 강희~옹정년간 조선의 청 자기 사용 기록 및 출토유물 역시 수적으로 희소하여, 이후 18세기 후반의 상황과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주목되는 점은 왕실일가 분묘 출토품으로 다색 자기가 출토된 사실이다. 의소세손(1750~1752), 화협옹주(1733~1752), 화유옹주(1741~1777), 원빈홍씨(?~1779), 문효세자(1782~1786)묘에서 모두 공통으로 중국산 청화백자가 출토되었으며, 문효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분묘에서는 일본 에도시대의 아리타에서 제작된 히젠자기와 청대 경덕진 분채자기가 동반 출토되었다(Fig. 6). 당시 조선 왕실의 喪葬儀禮에 따라 簠, 簋 등 분원에서 만든 백자 제기가 아니면,28 화려한 다채백자는 明器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왕실 분묘에서 공통으로 일본 히젠의 색회자기가 출토된 점은 왕실 상례품으로 일괄 지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예조 소속 관서인 典客司가 편찬한 『通信使謄錄』에 일본 자기 유입의 기록이 기재되었는데, 이는 조선 왕실에서 소용된 일본 자기의 공식적 유입과정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 들여온 일본산 자기를 포함한 각종 일본상품은 먼저 왜관에서 증답식을 거쳐 서울의 禮曺로 보내지거나 부산의 관리에게 분배되었다.29 예조는 왕실 상례를 담당했던 기구였으므로, 예조로 들어온 일본 자기가 왕실 일가의 상례에 지급되는 물품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청대의 분채는 두 옹주묘에서만 발견되고 있어, 공주 개인물품의 가능성이 높다.30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에 유입된 외래 채색자기는 더욱 증가하게 된다. 익히 알려진 대로 운현궁과 왕실 등 왕실 일가가 사용한 청과 일본의 채색자기가 다수 전하고 있다. 개항 직후, 대한제국 황실의 채색자기 사용은 주요 생활용품이자 陳設器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는 청과 일본뿐만 아니라 西歐의 채색자기까지 조선에 공식 유입되어 외교적 수단으로 각종 황실 연회에 소용되면서 조선이 근대국가임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즉 개항 이후 대한제국에서의 채색백자는 군자로서 더는 지양해야 하는 사치품이 아니라, 격변하는 시대의 혼란함을 극복한 自强한 근대국가로서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세련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이런 경향은 경복궁과 덕수궁, 그리고 관청유적과 시전 유적에서 골고루 출토되는 청과 일본의 채색백자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31 조선 말기 채색백자에 대한 수용과 소비 문제는 단순히 취향과 미감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례 없는 변화와 도전의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되야 할 것이다.
Ⅲ. 新채색백자의 생산과 소비
1. 新채색백자에 보이는 외래적 요소
조·청교류가 적극 전개되던 18세기 후반경 광주 분원에서는 폭넓은 백자 수요층의 요구에 상응하는 다양한 장식기법의 백자들이 생산되고 있었다. 그중 匣燔한 다채백자는 기존의 검박하고 진중한 조선백자와 구별된다. 조선시대 채색백자에는 일찍이 15세기 명으로부터 수입된 코발트 안료를 이용한 청화백자가 있었고, 이후 철화백자와 동화백자가 각각 생산되었다.32 이 세 품종에 사용된 코발트·산화철·산화동 안료는 壬丙兩亂 전후까지만 해도 단독으로 사용되어 문양을 시문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17세기 전반 숙신공주묘 출토품의 예처럼 명말 채색자기의 접촉을 시작으로 18세기 중반 단색백자와 법랑채자까지 다양한 종류의 채색자기를 접하면서 조선백자에도 다양한 채색방식이 도입되었다. 두 가지 색 이상이 사용되거나, 안료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채색을 하여 마치 명·청시기 단색유를 연상케 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18세기 후반 이후 증가하는 새로운 유형의 채색백자는 외부적 자극에 의한 산물이다. 그렇다면 그 원류는 무엇이며, 또 이를 원활하게 생산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조선에서 다채백자가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8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간송미술관 소장 〈白磁靑畵鐵彩銅彩草蟲文甁〉은 조선 다채백자에서 보기 드물게 3가지 안료를 모두 사용하여 장식한 사례이다(Fig. 7). 청 乾隆年間(1736~1795) 유행한 색색의 洋菊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국화와 줄기를 도드라지게 표현한 후, 코발트, 산화철, 산화동으로 장식하여 당시 조선의 기술로 구현할 수 있는 모든 색이 표현된 수작이다. 다만 양각된 국화에 색색의 안료를 입힌 예는 18세기 전반 청대 수출도자에서도 기형만 다를 뿐 거의 동일한 양식이 보여,33 이 역시 청과의 교류에 의해 유입된 새로운 미감의 創新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Fig. 8). 조선백자에서 세 가지 안료가 모두 사용된 사례는 극히 드문데, 이는 세 안료의 성질이 각각 달라 소성온도와 가마 분위기에 따라 최종 결과물이 달라지기 때문에 상당한 기술이 요구되는 어려움 때문으로 여겨진다.34 대신 두 가지 색이 결합된 예가 많이 확인되는데, 붉은 색조의 표현을 위해 산화철을 사용하는 예가 있지만 대부분 청화와 동채가 결합되는 경우가 많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 청화안료는 매우 귀하여 왕실과 지배계층이 사용하는 백자의 장식으로 선호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말 조선말기까지 이어져 조선의 마지막 관요였던 분원리에서 다량의 청화백자가 수습된 바 있다. 그에 비해 동화의 주원료인 산화동은 17세기 후반들어 묘지석에 쓰이곤 하였는데, 이내 18세기 이후 분원은 물론 지방에서도 폭넓게 제작되었다.35 그 배경에는 청화와 달리 산화동은 조선에서도 채취가 가능한 원료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용이한 안료의 수급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문양을 시문하는 채회 방식 외에 器面을 채색하는 방식이 주류 장식기법의 하나가 되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채회가 색을 이용해 문양을 강조하는 방식이라면, 채색은 문양보다 ‘색’을 중시한 점이 특징이다. 특히 기면을 채색하여 색을 강조한 방식은 분원리 요지에서 수습된 청채 및 철채편을 통해 19세기 중반경 이후 왕실과 지배계층 사이에서 유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Fig. 9). 동채, 철채, 청채 모두 다 등장하며, 단색인 경우와 두 가지 색이 동시에 채색되는 예 모두 폭넓게 제작된다. 이는 당시 ‘색’이 무늬보다 중요한 장식기법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경향은 18세기 중반 〈독서여가도〉의 예처럼 청대 단색유가 조선에 소개된 점을 상기한다면, 필경 외래 자극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청대에는 기존 저온단색유에서 고온 단색유로 기술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조선은 유약 대신 안료를 직접 칠하여 유약 효과를 낸 점이 다르다. 서양의 수입 안료를 이용해 다양한 색을 구현할 수 있었던 청에 비해, 조선은 3가지의 광물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산화염을 적절히 구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산화동으로 초록색을 내거나 산화철로 붉은색을 내는 경우이다. 또 음각으로 문양을 시문한 후 채색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찍이 청대 관·민요에서 상용되던 단색유의 장식기법이다(Fig. 10)(Fig. 11). 음각 외에 주문양을 양각기법으로도 제작하는데, 이조차 색으로 덮어 색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白磁靑畫銅彩陽刻長生紋甁〉의 경우, 19세기 유행했던 십장생문을 양각으로 장식한 후 문양은 청화를 채색하고 바탕면은 동채하여 기명 전체가 색으로 덮여있다(Fig. 12). 색을 강조하는 방식은 節儉을 숭상하는 국정철학의 기조 아래 백자가 선호되던 예전과 전혀 다른 도자 취향의 면모를 보여준다.
〈白磁靑畫銅彩壽福紋甁〉은 단색백자의 또 다른 방식으로 주문양인 청화 壽福紋을 화창 안에 배치하여 백색의 여백을 둔 후, 바탕면을 동채한 방식 또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요소이다(Fig. 13). 기명의 외벽이나 내벽만 갈유로 시유하고 주문양은 백자청화 기법으로 남겨둔 조합은 일찍이 명 말기의 대표적 수출자기였던 바타비아 자기(Batavia ware)의 특징이다(Fig. 14). 일명 바타비아 자기는 경덕진에서 생산된 紫金釉靑花瓷의 일종이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사가 위치했던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 집산하여 유럽으로 수출되었던 자기로 18세기 전 중반 크게 유행하였다. 바타비아 자기의 주무대는 유럽이었지만, 오사카 조카마치(城下町)와 나가사키 네덜란드 상관 유적에서도 18세기 전반경의 바타비아 자기가 출토되어 동아시아로의 진출이 있었음이 확인된다.36 게다가 18세기 중반 에도시기 아리타에서도 바타비아풍의 ‘銹釉染付窓絵’ 자기가 생산되었다(Fig. 15). 비록 조선시대 유적에서 外産 바타비아 양식의 자기가 확인된 바 없지만, 19세기에 제작된 책가도를 비롯하여 조선백자에서도 유사한 유형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양식은 경덕진 혹은 아리타의 영향 아래 생산된 것으로 판단된다.37
다만 홍채나 갈채가 언제나 바타비아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고도 할 수 없다. 19세기 말 이후에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白磁銅彩靑畫菊花紋注子〉 역시 동체부에 청화기법으로 시문된 작은 국화문을 제외하면, 동채로 바탕면을 전부 채색하여 마치 바타비아 양식을 연상하게 한다(Fig. 16). 주자의 수출구가 자형으로 세 번 굽어져 있으며, 손잡이는 두 줄기의 나뭇가지가 꼬여 있는 형상이다. 자형의 출수구는 三彎嘴라고도 하는데, 자사호의 수출구 종류 중 하나이다. 나뭇가지가 꼬인 형상의 손잡이 역시 청 건륭년간 의흥요에서 죽절형 자사요를 잘 만들었던 名匠 陳蔭千(?~?)의 작품과 유사하다(Fig. 17). 의흥 자사요는 청궁 茶會에서 사용된 귀한 물건이었으며, 진음천과 같은 명장들의 작품이 청궁에서 소비되었다. 자사요 역시 유럽은 물론 일본으로도 상당량 수출되었고, 유럽과 일본의 현지에서 모방품이 제작되기도 할 정도로 동서양차 문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38 특히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와 류큐에서 17세기 후반~19세기에 걸쳐 청대 자사호가 다수 출토되었고,39 모방제작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물론 현재로서는 이 동채백자주전자의 모본이 청인지 일본인지 명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붉은 안료가 기면에 전면 시유된 배경에는 자사요의 붉은 태토를 모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8~19세기 수출도자로 각광받았던 자사요는 유독 조선 사회에서 그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뚜렷한 출토유물이나 전세품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청과 일본의 다양한 자기가 조선에 유입되었고, 자사요가 청의 최대 수출 품목 중 하나였기 때문에 조선도 분명 그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40 이처럼 외관상 동채백자주전자가 자사요를 모본으로 했다는 점은 조선 역시 국제적인 도자교류에 적극 관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2. 다채백자와 단색백자의 소비배경과 문화
조·청교류를 통한 청 문물의 유입과 인식의 전환은 18세기 후반 이후로 상정된다.41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의 채색백자 소비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이는 유가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절검숭상의 국가 기조에 기인한다. 색은 절제되었으며, 청화백자조차 조선 전기부터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사용이 제재된 상황에서42 화려한 채색자기의 소비와 생산은 배척되었다. 실제로 한성부내 출토품 중 경덕진과 복건성 일대 요장에서 제작된 명말청초 시기의 채색백자가 확인되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채색백자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고조된 시기는 反淸意識이 점차 해소되기 시작한 영조연간(1725~1776) 이후로, 이때부터 주창되어온 北學論과 이를 따르는 조선 지식인들에 의해 청 문물이 적극적으로 평가되며 그 도입이 모색되고 있었다.43 북학론 특징은 청 지배의 안정성과 문물의 성과를 적극 평가하고, 역사적 사실을 교정하거나 선입견에 안주한 조선 지식인의 반성을 요구하였다.44
본래 조선에서의 色은 중국의 영향 아래 위계질서의 표시 수단과 禮를 나타내는 상징에 국한되었다. 가령 음양오행에 기반한 五方正色과 間色의 사용은 조선시대 服制를 비롯하여 단청과 실내 장식에 사용되었다.45 즉 색을 절제하고 尊卑等威를 정하여 색을 사용하는 것은 성리학적 위계질서가 반영된 것으로 색의 선택권은 지배계층에 있었다. 하지만 색채의 사용은 청문물의 적극적 도입과 함께 18세기 들어 변화를 맞으며 점차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다. 예컨대 조선후기 색의 확산은 그간 사대부가 주도했던 색이 절제된 문인화풍에서 풍속화와 민화 등의 채색화 발전으로 이어졌다.
18세기 후반 제기되었던 북학의 성과는 19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고증학의 수용은 그동안 성리학과 양명학이 다루었던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현실에 바탕을 두어 변증하고자 하였고, 색의 사용은 바로 대상에 대한 객관적 정보와 사실성을 중시하고자 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다채색으로 표현된 간송미술관 소장 〈白磁靑畵鐵彩銅彩草蟲文甁〉의 洋菊 표현은 바로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탐구한 결과일 것이다. 지방 각지에서 생산된 다채백자의 문양, 즉 화훼나 동식물 또한 그 대상이 지닌 여러 색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또한 색상의 사용과 표현도 적극적으로 바뀌는데, 그중 붉은색은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색으로 鮮紅色을 귀히 여겨 조선 왕실에서 직접 제재했던 색상이었다.46 과거 붉은색을 쓴다는 것은 군신관계의 도리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사치로 간주하였으므로, 붉은색으로 장식된 기명의 사용은 사회적 통념상 쉽지 않았을 것이다.47 그러나 18세기 들어 관·민에서 동화백자가 본격 생산되기 시작하였고,48 19세기에는 붉은색이 그려지고 채색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되었다. 붉은색 장식의 자기는 지방에서도 활발히 생산되어 평민 계층 또한 색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49 그 배경 역시 조선후기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로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동요되어 종래의 성리학적 신분 관념에 따른 예속 관계가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한 당시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붉은색의 활발한 사용은 과거 신분에 따른 색의 제한이 크게 작동되지 못한 결과로 생각된다. 더불어 상술한 바와 같이 銅의 용이한 수급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동의 산지에 銅店을 설치하여 국가가 직접 관리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50 특히 영조 5년(1729)에 이르면 그간 倭館을 통해 수입한 동을 조선에서도 채취할 수 있으므로 수입 중단을 논의하였고,51 영조 17년(1741) 현 강원도 영월과 황해북도 수안군 등지에서 銅脈이 발견된 사실이 언급된다.52 이처럼 동의 원활한 수급은 18세기 후반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는 동화백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역시 청화안료와 결합되는 다채백자의 부흥을 이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북학에 의한 청나라의 문물·제도 수용은 때로 과도한 경도로 이어졌는데, 이는 甲器의 사용과 채화자기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던 정책이 오히려 부유층으로 하여금 중국과 일본 자기에 더욱 심취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53 외래 채색자기에 대한 호감은 이를 대체할만한 조선백자의 실질적인 제작으로 이어졌고, 조선 전기에 비해 청화안료의 구득이 용이한 것도 채색자기 증가의 주요 배경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청화안료는 조선이 수입한 대표적 안료로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19세기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서 각각 청화안료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蘇渤泥靑54 혹은 (回)回靑55, 無名異56 등으로 불린 중국산 청화안료는 대게 비쌌지만,57 일본에서 수입된 倭靑은 중국산에 비해 1/3 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했다.58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청화안료 수급은 그간 고가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청화백자뿐만 아니라, 다채백자와 청채단색백자 등 다양한 품종이 생산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증가한 다채백자와 단색백자는 생 활기명 외에 향로나 화준 등 禮器로도 제작되어 사회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감로도에는 다양한 종류의 단색백자들이 등장한다. 망자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의식을 베풀어 영혼을 천도하는 내용을 도해한 감로도는 크게 3단으로 구성된다. 하단에는 육도중생의 다양한 患亂과 죽음의 세계가 표현되었다면, 중단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의식재단이 묘사되었으며, 상단에는 하단의 孤魂들이 중단의 施食 의례를 통해 상단 여래의 가호 아래 극락왕생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그중 중단은 실제 거행되는 천도재를 묘사한 것으로 시기마다 다르지만 각기 다른 공양물들이 묘사되는데,59 공양물을 올리는 그릇이나 재단 양측을 장식하는 화준이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경우가 왕왕 확인된다. 고종 5년(1868)에 제작된 수락산 흥국사 〈甘露王圖〉 중단의 의식재단 양측에 청채와 철채로 장식된 대형 화준이 확인된다(Fig. 3). 동체부의 상단부터 차례대로 연판문, 용문, 산수문 혹은 파수문으로 추정되는 도상이 음각문으로 시문되었으며, 항아리색과 보색인 붉은색과 파란색의 천으로 상단을 둘러맸다. 이런 항아리의 출현은 19세기 후반 청채 및 철채의 단색유 생산이 증가한 당시 시대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단 중 평범한 중생의 삶을 묘사한 부분 역시 붉고 파란 자기를 늘어놓고 오락이나 술을 즐기는 모습은 당대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시기상 19세기 후반 왕실 후원의 佛事가 매우 증가한 상황에서 함께 고려할 점은 재단에 바쳐지는 대형 채색백자 항아리의 출현이다. 비록 오늘날 전하는 예가 없어 확인하기 어려우나, 크기나 그 용도의 특징으로 봤을 때 분원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왕실의 지원 아래, 사찰에서 진행되는 의례에서 분원 생산의 단색백자가 사용된 것이 도상으로 다시금 등장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만하다. 당대 사회의 반영은 비단 채색백자가 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고종21년(1884)에 제작된 진관사 〈甘十六羅漢圖〉중에는 청대 자기가 등장하여, 19세기 청대 자기의 유입 정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Fig. 18).60 감로도의 도상이 당시 사회상과 화단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음은 일찍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진 만큼,61 단색백자의 사용범위가 일상생활을 넘어 예기에서도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오늘날 전하는 다수의 단색백자 향로의 용례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여겨진다(Fig. 19).
마지막으로 19세기 후반 회화작품에는 당대의 시대상이 반영된 듯 각양각색의 채색자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 단색백자 위주이며, 다채백자는 책가도에 등장하는 청대 분채류로 한정된다. 하지만 외래 채색백자 중 전세 및 출토유물의 다수는 오채 및 법랑채자로, 청대의 단색유 자기는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다. 물론 기록에 따르면 ‘몸통 전부가 자색, 황색, 혹은 벽록색 등 여러 색으로 된 그릇’이 조선 말기 연경에서 수입된 정황은 확인된다.62 19 세기 말기를 전후하여 분원이나 민간에서 단색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한 상황이나 이에 대한 사회적 선호가 있었던 조선의 도자문화를 상기하면, 출토 사례가 적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봤던 불화나 조선말기 제작된 『箕山風俗圖帖』, 〈野宴〉등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화려한 단색자기의 그릇은 누가 만들었을까(Fig. 20). 선명한 색으로 표현되어 으레 수입 자기로 여겨지거나 실제 그 가능성 또한 높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늘날 분원이나 민간에서 생산된 청채, 녹채, 홍채, 갈채의 단색백자도 다수 전하고 있다. 또 서유구는 연경에서 수입해오는 단색백자가 대부분 병이나 호·잔·합 등이며 완이나 접시류는 거의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63 이는 청으로부터 수입된 단색백자가 대부분 식기보다는 저장기 혹은 陳設類임을 의미한다. 더불어 19세기 청대는 이미 관·민 모두 법랑채자의 생산이 대세로 접어든 상태로 단색유의 생산은 18세기 康·雍·乾 시기가 절정기였던 만큼 수요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민간에서 생산된 것은 礬紅彩와 같은 명대식의 低溫釉이며, 기종은 祭器 혹은 진설 용도였다.64 반면 19세기 후반경 조선 풍속화에 등장하는 단색유 자기의 예를 보면 서유구의 말처럼 연경에서 사들여 왔을 법한 주병이나 술잔이 간혹 보이지만, 대부분은 ‘완’과 ‘접시’ 등 반상기가 주를 이룬다. 즉 19세기 후반 회화작품에 보이는 단색백자 다수가 조선에서 생산된 것이 맞는다면, 서유구의 증언이나 조선 유적에서 수입 단색유 자기가 거의 확인되지 않은 이유에 어느 정도 부합된다. 이처럼 조선 말기에 이르면 ‘색’은 더 이상 상류층만의 향유 대상이 아니었다. 마침내 오랜 시간 제한되었던 색의 복권이 이루어진 것이다.
Ⅳ. 맺음말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은 단일 안료로 문양을 장식했던 전통적인 청화·철화·동화백자와 다른 새로운 양식의 채색백자가 출현하였다. 여러 색을 조합한 다채백자와 유약의 효과를 보여주는 단색백자는 초기 외래 채색백자의 영향 아래 생산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를 수용하는 조선의 태도 역시 청 문물을 적극 평가하며 그 도입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성리학적 위계질서 하에 尊卑等威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색의 개방이 전격 이루어졌다. 또한 조선후기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로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신분에 따른 색의 제한이 작동되지 못한 상황은 색의 자유로운 표현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만물의 색을 관찰하고 구현하였으며, 일상생활에서 밀접하게 사용되는 그릇에 색을 입힘으로써 색을 향유하였다.
조선의 채색백자에 대한 호감과 이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보다 다양하고 선명한 색을 얻기 위한 기술 개발로 자연히 이어졌다. 19세기 전반 북경에서 직접 채색법을 배우려는 시도가 있었고,65 고종21년(1884) 청국人 湯輔臣을 경덕진에 특별 파견시켜 현지에서 도공을 고용하고 입국시키려 했던 정황도 확인된다.66 그리고 이는 실현되어 대한제국 시기 광무2년(1898) 경덕진 도공을 초청하여 청국의 것을 모방한 도자기 공장을 세울 계획도 있었다.67 하지만 다 실패하고, 결국 조선에서 유상채 자기의 제작이 본격화된 시기는 1901년으로 분원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2년 11월 일본인 도공의 협조하에 본격적으로 실험과 생산이 이루어졌다.68 이처럼 19세기 초반부터 부단히도 자기에 다양한 색을 구현하려는 노력은 청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 멀지 않은 시점부터 태동하였다. 비록 색의 구현은 이보다 늦은 시기에 비로소 완성되지만, 대신 조선만의 다양한 방식과 미감으로 채색백자를 생산하여 전 계층이 색을 향유하게 된 점은 조선 도자문화가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중요한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Notes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과 청의 미술문화 교류를 다룬 연구는 일찍이 학계의 주목을 받아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어 왔다. 대표연구는 다음과 같다.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장남원, 「물질문화 관점으로 본 조선후기 玩物 陶瓷」, 『美術史學報』 39 (2012, 12), pp. 132-163; 장진성, 「조선 후기 고동서화(古董書畵) 수집열기의 성격: 김홍도의 〈포의풍류도〉와 〈사인초상〉에 대한 검토」, 『미술사와 시각문화』 3 (2004, 10), pp. 154-203 등.
19세기 조선백자에 보이는 일본 도자의 영향에 관한 연구로 다음을 참조 ; 최경화, 「18·19세기 日本 磁器의 유입과 전개양상」, 『美術史論壇』 29 (2009, 12), pp. 197-222 ; 장효진, 「조선 말 청화백자에 장식된 외국산 직물 문양의 연원과 유입과정」, 『한국학』 41-2 (2018, 6), pp. 99-130.
본 고에서는 일반적인 채색백자의 범주에서 다루어지는 철화백자와 동화백자, 청화백자와 구분하기 위하여 ‘다채백자’와 ‘단색백자’로 명명하고자 하며, 이를 별도로 ‘新채색백자’의 영역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과거 채색백자에 관한 연구는 주로 청화·철화·동화 등 안료를 기준으로 나누어 논의되었다. 다채백자나 단색백자 또한 사용된 각각의 안료 범주 아래, ‘화백자’의 명칭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최근 채색백자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더해지면서 ‘채색백자’를 독립된 부류로 보고자 하는 시도도 감지되고 있는 만큼, 채색백자 연구의 새로운 모색이 진행중에 있다. 채색백자에 관한 대표적 연구로 다음을 참조. 윤효정,「朝鮮 15·16세기 靑畵白磁의 製作과 使用」, 『美術史學硏究』 250·251 (2006, 9), pp. 315-360; 田勝昌, 「18~19세기 동화·동채백자 연구」, 『시각문화의 전통과 해석-정재 김리나교수 정년퇴임기념 미술사논문집』(예경, 2007), pp. 349-350; 송인희, 「조선 17-18세기 철화백자의 특징과 성격-가마터 출토품을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67 (2010, 6), pp. 77-110; 이보름, 「조선후기 채색(彩色)백자 연구」,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8.
『世祖實錄』 1卷, 世祖1年(1455), 閏6月19日, “工曹請造中宮酒房金盞, 命以畫磁器代之, 東宮亦用磁器。”
『經國大典註解』,明宗10年(1555), 「刑典·秋官·司寇」, 「禁制條」, “白磁器 御膳用白磁器, 東宮用靑器, 禮賓用彩文器。 『經國大典』 大小員人用紅·灰·白色表衣·白笠·紅䩞者, 酒器外金·銀·靑畫白磁器者…用朱漆器者…私占柴草場者, 竝杖八十。”
『成宗實錄』 77卷, 成宗8年(1477) 閏2月10日, “…永濡曰: “今豪富之家, 兢用靑畫器, 唐物非能自來, 必有輸來之者。其弊不貲, 請痛禁。” 上曰: “勿貿唐物, 曾已立法。 其申明之。”
池圭植, 『荷齋日記』, 壬寅年(1902) 10月29日, “癸丑 晴, 磁器畵彩爲始 申時入窯擧火 至子時出火.”
『光海君日記』, 光海君8年(1616), 4月23日, “至於司饔院沙器, 大殿則用白磁器, 東宮則用靑磁器, 如內資、 內贍、 禮賓寺所用, 則竝依舊例, 用靑紅阿里。”
탄벌동 요지와 학동리 요지의 운영시기는 일반적으로 요지에서 수습된 간지명 백자를 기준으로 탄벌동이 1606~1612년, 학동리가 1613~1617년으로 상정되었으나, 최근 학동리 10호 출토 ‘戊申(1608)’이 ‘戊午(1618)’으로 밝혀지고, 학동리 9호 출토 ‘庚十十二(1610)’의 명문이 새롭게 확인됨에 따라 두 요장의 운영시기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김경중, 「17~18세기 전반 조선 관요 유적의 운영시기 재검토-가마터 출토품을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101 (2022, 1). pp. 203-204.
池圭植, 『荷齋日記』, 丁酉年(1897) 10月18日, “甲戌 晴, 崔貴福貸去文六兩來 柴木二兩八戔 元心自京下來 茶洞河加德有書 祭器與靑彩器見督…(하략). ” 그 외 다수의 날짜에서 ‘청채기’의 표현이 등장한다.
『承政院日記』 1746冊, 正祖19年(1795), 6月18日, “上詣延禧堂. 慈宮周甲誕辰進饌入侍時, 行都承旨黃昇源……乃命鄕唐交奏, 進午饌訖, 宣饌于進饌堂郞進饌時, 慈宮饌案八十二器…彩花銅砂器有前大圓盆眞苽一器高一尺, 彩花銅沙器有前中圓盆生梨一器高九寸, 畫唐中楪松柏子一器高六寸…….”
洪大容, 『湛軒書』外集10卷,「燕記」, 器用, “日用專尙磁器, …(중략)…其西洋磁器, 內爲銅器, 外塗以磁, 華而牢, 磁之巧品也.”
『日省錄』, 正祖10年(1786), 2月28日, “通官來言, 皇上以爲, 緞匹則每年例有所送, 在該國未必爲奇, 故將以文房器玩, 別有所送, 係是特恩, 而當自軍機房, 親授於臣等云, 午後, 臣等入山高水長閣, 通官引臣等詣軍機朝房, 禮部侍郞 達春出立, 以黃盤盛玉如意一柄, 玉器二件, 磁器四件,玻璃器四件, 硯二方, 絹箋大小各二卷, 筆二匣, 墨二匣, 洋磁珐瑯盒四件, 雕漆盤四件, 授臣等曰, 此是皇上自內親揀, 特送於國王云, 故臣等祗受, 仍入班次, 諸般燈戲, 擧皆整待, 適因風勢大作, 有旨停戲.”
李德懋, 『靑莊館全書』 67卷, 「入燕記」[下], 正祖2年(1778), 5月21日, “二十一日庚辰, 熱, 留館. …又買假花四盆, 菊二, 月桂二, 盆則洋磁, 圍以琉璃, 冬日見之, 鮮鮮如活花…”; 『日省錄』, 正祖11年(1787), 正月23日, “…十二月初四日, 歲幣方物, 無弊呈納, 十九日臣等詣午門前, 依例領賞, 照例折賞, …(중략)…磁器四件, 玻璃器四件, 硯二方, 絹箋四十張, 筆二匣, 墨二匣, 洋磁珐瑯盒四件, 雕漆器四件…”.
18~19세기 조선에 유입된 법랑채자의 사례와 용례에 관한 연구로 다음을 참조; 김은경, 「朝鮮의 淸 琺瑯瓷器 유입경로와 수용태도 연구」, 『美術史學』 37 (2019, 2), pp. 115-140.
권주영, 「조선 후기 왜물의 유입과 인식-『通信使謄錄』을 중심으로」, 『美術史硏究』 31 (2016, 12), p. 100.
李宜顯, 『東槎日記-坤』 「國書」, “差倭九船來泊近浦候風。 朝送酒魚存問。 夕間倭人都船主呈五花糖, 新田草, 畫磁杯, 五寸鏡等物。 大差倭呈六寸鏡, 翦刀刀子, 倭燈, 琉璃甁等物。”.
『增正交隣志』 5권, 純祖2年(1802), “一行回受私禮單, 兩使臣 關白所送銀子一千枚。 雪綿子六百把。 …(중략)… 摸金革匳鏡二面。 彩磁累合二備。 漆蓋笠鍋二匣。 …”; 金綺秀, 『日東記游』 4권, 高宗 13年(1876), “附日本國回禮單目錄, … 一。 薩摩陶花甁一對。 …”.
徐有榘, 『林園經濟志』, 「贍用志」 卷2, 「登槃諸器」, “瓷器, ……近閒有作茶褐色, 淡紫色者, (案 茶褐色, 淡紫色竝以絳礬濃淡, 畫出作顔色) 未知用何料也…”
「登槃諸器」 중 조선, 청, 일본의 그릇들이 등장하는데, 서유구는 실학자답게 비교적 그 형상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가령 둥글고(鵝卵器) 면이 열 개인 자기(十面器)라던지, 그림을 그린 자기(畵器), 순백에 금으로 아가리 둘레를 장식하고 금으로 壽 혹은 福자를 써넣었다든지(純白而金飾口緣, 或金作壽, 福字于中) 등의 표현이다. 따라서 ‘색’ 자체가 강조된 문구를 고려할 때, 그린 것보다 채색을 한 기명의 가능성도 염두에 둬볼 만하다. 徐有榘, 『林園經濟志』, 「贍用志」 卷2, 「登槃諸器」.
黃釉는 唐代에 저온으로 처음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는 발색이 불안정하여 주로 민간에서 사용되는 등 그 가치가 높지 않았다. 발색이 뛰어난 황유는 明 永樂年間(1403~1424) 처음 생산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역시 저온으로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 유물로 영락제가 西藏의 달라이 라마에게 하사한〈黃釉暗刻纏枝花紋高足杯〉가 전하고 있다. 劉偉, 『皇帝與宮廷瓷器-上』(紫禁城出版社, 2012), p. 137.
일명 ‘淡黄釉’ 혹은 ‘蛋黄釉’으로도 불리며, 雍正年間(1723-1735) 개발된 고온단색유 신품종이다. 서양에서 수입된 안료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陶成紀事碑記』에 西洋黃으로 기록되었다. 이 황유는 청궁 내에서 황제의 색이라 하여 한정 수량만 생산될 정도로 엄격히 관리된 품종이었다. 내외 모두 황색이 시유된 자기는 黃器 혹은 殿器라 하여 황제, 태후, 황후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며, 외벽만 황색인 자기는 황귀비에 한해 사용되었다. 그 외 신분은 황유자기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신분에 따라 황유자기의 사용 수량도 정해지는 등 엄격히 관리되었다. 趙聰月,「試論清宮舊藏的黃釉瓷器」, 『外銷瓷器與顏色釉瓷器研究』(紫禁城出版社, 2012), pp. 412-413.
연구성과에 따르면, 그림의 묘사와 구도, 준법의 특징으로 보건대 약 1797년(上限)에서 1830년 이전(下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수미, 「國立中央博物館 所藏〈太平城市圖〉 屛風 硏究」(서울대학교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 p. 162.
김은경, 「책거리에 등장하는 중국 도자의 함의–장한종, 이형록의 책거리를 중심으로」, 『조선 선비의 서재에서 현대인의 서재로』(경기도박물관, 2012), pp. 193-194.
정세함이 덜하여 경덕진 민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여겨지나, 한편으로 관요의 생산 일부를 민요에 위탁생산하는 방식이었던 官塔民燒가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민요에서 생산된 官器의 가능성도 있다.
『英祖實錄』, 英祖9年(1733), 3月22日, “藥房入診. 都提調徐命均曰: “書狀官狀啓末端語, 誠然矣. 以十數萬兩之銀, 貿得唐物, 爲費不貲, 而侈風漸盛, 閭閻尤甚. 衣服飮食, 恥不若人, 嚴禁此風則好矣, 而此專在在上者之導率. 聖上服御之儉, 無以加勉, 而宮中服飾, 恐不無侈靡之習, 別爲申飭, 以爲化下之本焉. 上可之.”
『國朝喪禮補編』 2卷, 「發引儀」, “簠一, 簋一竝用磁。 以上司饔院.”
권주영, 앞의 논문, p. 89.
옹주묘 출토품은 왕실 상례를 따른 여타 왕실 인물 무덤의 출토품보다 수량도 많고 화려한 기물 일색으로 구성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영조대 기존 왕실 상례의식에서 두 차례에 걸쳐 평소 검약을 강조하는 정치 철학이 내재된 상례로 개편되면서, 왕실 상장례 의식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던 私家人인 옹주의 신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현진, 「영조대 왕실 喪葬禮의 정비와 『國朝喪禮補編』」, 『韓國思想史學』 37 (2011, 12), pp. 142-146.
『서울의 도요지와 도자기』(서울역사박물관, 2006);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부지 발굴조사-동대문운동장유적: Ⅰ본문』(중원문화재연구원, 2011);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청진 12-16지구유적-발굴조사보고서: Ⅰ본문』(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무악2구역 유적』(한울문화재연구원, 2018)
철화백자의 생산은 일반적으로 17세기 청화안료의 수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대체재로 본격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468년 편년으로 알려진 〈白磁鐵畵 ‘尙膳監太監鄭善’ 銘墓誌石〉을 통해 조선관요 설립 전후에 이미 백자에 산화철을 덧입혀 소조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후 16세기 들어 선명한 발색이 가능했던 산화철이 적극 사용되며, 기록을 주목적으로 한 철화백자 묘지석이 활발히 제작되었다. 우민아, 「조선시대 관요 철화백자의 성격 변화」, 『미술사연구』 25(2011, 12), p. 247.
김은경, 「조선후기 백자 花卉紋에 보이는 청대 자기의 영향과 변용」, 『인문과학연구논총』 43-2 (2022, 9), p. 112.
『澗松文化』(간송미술문화재단, 2014), p. 87.
동화백자는 17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생산된 후, 18~19세기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비록 전세유물 자체도 많지 않지만, 동화백자묘지의 경우 철화와 청화에 비해 더욱 소수만 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崇禎甲子(1684)의 편년을 지닌 〈박증구와 아내 이씨 부부 묘지[朴曾求·全義李氏墓誌銘墓誌]〉가 국립중앙박물관 및 오사카시립동양도자 미술관에 각각 전한다.
王淑津, 「巴達維亞瓷的風格故事」, 『故宮文物月刊』 第328期 (2010, 7), p. 40.
김은경, 앞의 논문(2012), p. 202. 그 밖에 조선후기 백자에 보이는 바타비아 양식에 대해 이보름은 중국의 갈유가 조선에서는 철채와 동채로 교체되어 표현되고 있는 만큼, 이 특징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명칭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품종을 일명 ‘바타비안 양식 채색백자’로 명명하여 별도로 분류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만큼 이 양식이 조선후기 채색백자의 대표적인 외래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보름, 앞의 논문, pp. 115-120.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차문화와 자사요의 유럽 전파에 관한 연구로 다음을 참조; 이정민, 「중국 宜興 紫沙壺와 영국 붉은 석기 주자(Red Stoneware)-조지안 시대 풍속화에 보이는 다기세트를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97 (2018, 3), pp. 205-233; 施靜菲, 「歐洲的紫砂意象-訂製、 模仿與創新」, 『紫砂漫遊.聚焦臺灣』(鶯歌陶瓷博物館, 2019), pp. 10-19; 陳國棟, 「歐洲貿易、 茶文化與紫砂壺」, 同書, pp. 20-33.
王亮鈞, 「日本出土的紫砂器及其相關問題」, 『故宮學術季刊』 35卷4期 (2018, 7), pp. 123-135.
이희경은 일찍이 중국을 다녀오면서 ‘사기물을 입히지 않고 홍색, 녹색, 청색, 황색으로 채색한 도자기’를 보고 어떻게 하면 채색이 벗겨지지 않는지 그 기술을 알 수 없어 답답함을 토로한 바 있다. 유약을 시유하지도 않았는데 여러 색이 채색되었다는 표현은 채색된 자사호, 즉 의흥태법랑을 연상시킨다. 외관상 유약이 시유되지 않았는데 채색된 도자기라면, 그리고 18세기 중후반 내수 및 수출 도자로 자사호가 크게 유행했던 정황을 고려하면, 이희경이 묘사한 예는 자사요의 가능성도 있다. 李喜經, 『雪岫外史』, “余見中國土器皆不燔兒成, 多畫五彩, 而紅綠青黃之色, 如鍍磁水, 此之本質, 微起而凸, 此可異也。 鍍磁不燔而能不脫, 則何難施彩乎?此必有至易之法, 而終不覺悟, 尤可歎也。 若金與墨之施磁, 則一如渲之於紙, 而亦猶不脫。 此則不能鍍之, 而抑別有他法也。”
김은경, 「朝鮮後期 淸 陶瓷의 受容과 認識 變化」, 『한국학연구』 66 (2018, 6), pp. 63-71.
『成宗實錄』 77卷, 成宗8年(1477), 閏 2月10日, “…永濡曰: “今豪富之家, 兢用靑畫器, 唐物非能自來, 必有輸來之者。 其弊不貲, 請痛禁。” 上曰: “勿貿唐物, 曾已立法。 其申明之。”” ; 『燕山君日記』29卷, 燕山4年(1498), 6月15日, 命議禮曹所啓禁制奢侈節目。 ……(중략)…第十六條油蜜果、 金銀靑畫白磁器、 行果盤, 《大典》已有禁令, 司憲府申明痛禁。…”
김은경, 앞의 논문(2018), pp. 43-63.
이경구, 「조선 후기 주변 인식의 변화와 소통의 가능성-18세기 연행록과 북학파를 중심으로」, 『개념과 소통』 3 (2009, 6), pp. 99-127.
중국과 조선은 正色(오방색으로 靑, 黃, 赤, 白, 黑을 의미)이 으뜸이며, 그 다음을 間色(두 가지 색 이상이 섞여 나타나는 색)으로 여겼다. 또한 정색과 간색은 신분의 尊卑를 의미하여 복장색에도 차별을 두었다. 『太祖實錄』太祖 7年(1398), 6月29日, “憲司上言, “先王衣服之制, 尊卑有等, 正間之色, 不可紊亂也。 我國家上下服用, 尙未有章。 願自今進上服用, 皆正色, 凡男女黃色灰色縞素之衣, 一皆禁斷。” 上允之。”.
『英祖實錄』, 英祖33年(1757), 12月16日, “堂下朝官, 舊制用綠袍, 自壬、 丙亂後變爲紅袍, 華人以君臣同服譏之。 俗尙, 又以鮮紅爲貴, 轉加侈費。”
방병선, 『한국도자제작기술사』(아카넷, 2023), p. 618.
동화백자 생산지는 강원도 양구의 몇 도요지를 제외하면,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 등을 토대로 대략 분원을 포함한 중부와 북부 일부지방에 분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화백자 생산지에 대한 검토로 다음 논고를 참고 ; 田勝昌, 앞의 논문, pp. 349-350.
현재까지 동화백자의 생산지로 알려진 예는 강원도 양구 송현리 3호와 칠전리 1호가 유일하다. 비록 각 요지에서 출토된 2편의 동화문 백자편만 전하고 있지만, 강원도 일대에서 일정 수준의 동화백자가 생산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두섭, 「楊口地域 白磁硏究」(강원대학교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pp. 56-57.
방병선, 위의 책, p. 619.
『承政院日記』 英祖5年(1729), 12月20日, “….而每每求銅於倭館, 路遠難繼…….銅物皆貿於倭館, 而馱來有弊, 我國所産之物, 豈可求之於他國乎? ”
『承政院日記』 英祖17年(1741), 2月15日, “…向來以寧越·遂安銅脈産出處, 發遣本曹郞廳摘奸事, 陳達蒙允矣。 寧越下去郞廳, 未及還來, 遂安摘奸郞廳, 纔已復命, 而若干銅鐵, 吹鍊以來, 故觀其銅品, 無異熟銅。 ….”
李喜經, 『雪岫外史』, “先祖聖德崇儉, 因禁甲器, 又除繪匝, 豪富之家, 日趨中國日本之器, 競相侈靡.”
池圭植, 『荷齋日記』, 甲辰年(1904) 7月9日, “乙酉 晴, 榮義自京下來 樽缸等屬 歇價放賣 蘇渤泥靑一小匣十二兩重價折六百五十兩貿來 …(하략).”
『成宗實錄』, 成宗19年 (1448) 1月23日, “…畫員李季眞曾受公貿易回回靑價, 黑麻布十二匹, 而卒不買來, 令本府徵其本色, 囚家僮累及數百名。 而季眞不能納者, 以回回靑, 非我國所産, 亦非民間所用, 季眞雖至死, 不能納必矣。 請勿徵本色, 以黑麻布倍徵何如?…”
徐有榘, 『林園經濟志』, 「贍用志」 卷2, 「登槃諸器」, “…今燕貿回青即無名異, 而假名‘回青’…”
徐有榘, 『林園經濟志』, 「贍用志」 卷4, 「工制總纂」, “…今燕貿回青, 皆無名異煅成也. 東人認作西域佛頭青, 每用重價貿來, 今後但當貿來無名異, 如法煅用, 則庶免破費也.”
『荷齋日記』에 따르면 왜청이 120냥쭝에 1,820냥이라면(1898년 11월 14일), 소발니청은 12냥쭝에 650냥으로 중국산이 3배 이상 비쌌다(1904년 7월 9일). 방병선, 「하재일기(荷齋日記)를 통해 본 조선 말기 분원」, 『강좌미술사』 34 (2010, 6), p. 288.
김정희,「감로도 도상의 기원과 전개-연구현황과 쟁점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47(2016, 12), pp. 149-155.
조선후기 불화에 등장하는 기물의 종류와 특징에 관한 연구로 다음을 참조. 許詳浩,「朝鮮後期 佛畵와 佛殿莊嚴具에 表現된 器物 研究」, 『文化史學』 27 (2007, 6), pp. 853-879.
대표적인 관련연구로 다음을 참조. 이경화,「朝鮮時代 甘露幀畵 下段畵의 風俗場面 考察」, 『미술사학연구』 220 (1998, 12), pp. 79-107; 박은경, 「조선 16세기 감로도의 위난 이미지를 통해본 사회상」, 『한국문화』 49 (2010, 3), pp. 25-49; 신은미,「19세기 말∼20세기 초 불화에 보이는 민화적 요소와 수용배경에 대한 고찰: 16나한도를 중심으로」, 『문화재』 37 (2004, 12), pp. 121-150 등.
徐有榘, 『林園經濟志』, 「贍用志」 卷2, 「登槃諸器」, “華造瓷器(倭瓷附件)……今燕貿盂鉢碗楪之屬,大抵多回青(既無名異)…若通身作或紫或黃, 或碧綠諸色者, 多在瓶壺杯盒之類, 而碗楪則不多見也….”
주62) 相同.
王建華 主編, 『故宮博物院藏清代景德鎮民窯瓷器』 卷三 (故宮博物院, 2014), p. 125.
19세기 초에 편찬된 『雪岫外史』 중 이희경은 어떤 이로부터 북경에서 ‘繪磁法’을 배웠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 ‘회자법’이란 당시 조선이 유하채 기법을 충분히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상채기법으로 추정된다. 李喜經, 『雪岫外史』, “往年有人入燕, 得繪磁法來云: “生漆和龍腦, 則漆化為水, 用此入彩而畫之, 即不脫.” 聞者試之, 漆不為水, 因棄之云矣.”
장효진, 「19세기 말~20세기 초 중국 窯業 工匠의 조선 도래」, 『한국문화연구』 32 (2017, 6), pp. 7-38.
『한국근대사자료집성』 13권, 「프랑스외무부문서 : 조선Ⅱ·1889」, “le 12 mai 1889 (1889년 05월 12일), ……On a tenté aussi de créer ici une industrie Céramique à l’imitation de celle de Chine; on a fait venir de Kin- to-tchen (Kiang-si) des ouvriers qui sont encore en Corée, mais qui n’ont jamais été mis en mesure de travailler(또한 이곳에 청국의 것을 모방한 도자기 공장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강서의 경덕진 노동자들을 오게 하여, 아직도 조선에 머물고 있는 그들은 결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웹사이트].(2023. 3. 8.). URL: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k&levelId=hk_013r_0010_0330&types=r)
池圭植의 『荷齋日記』 중 1901年 2月6日, 1902年 10月14日, 16日~20日, 22日, 27日, 28日 기사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