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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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과 청의 미술문화 교류를 다룬 연구는 일찍이 학계의 주목을 받아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어 왔다. 대표연구는 다음과 같다.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장남원, 「물질문화 관점으로 본 조선후기 玩物 陶瓷」, 『美術史學報』 39 (2012, 12), pp. 132-163; 장진성, 「조선 후기 고동서화(古董書畵) 수집열기의 성격: 김홍도의 〈포의풍류도〉와 〈사인초상〉에 대한 검토」, 『미술사와 시각문화』 3 (2004, 10), pp. 154-203 등.
2) 19세기 조선백자에 보이는 일본 도자의 영향에 관한 연구로 다음을 참조 ; 최경화, 「18·19세기 日本 磁器의 유입과 전개양상」, 『美術史論壇』 29 (2009, 12), pp. 197-222 ; 장효진, 「조선 말 청화백자에 장식된 외국산 직물 문양의 연원과 유입과정」, 『한국학』 41-2 (2018, 6), pp. 99-130.
3) 본 고에서는 일반적인 채색백자의 범주에서 다루어지는 철화백자와 동화백자, 청화백자와 구분하기 위하여 ‘다채백자’와 ‘단색백자’로 명명하고자 하며, 이를 별도로 ‘新채색백자’의 영역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4) 과거 채색백자에 관한 연구는 주로 청화·철화·동화 등 안료를 기준으로 나누어 논의되었다. 다채백자나 단색백자 또한 사용된 각각의 안료 범주 아래, ‘화백자’의 명칭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최근 채색백자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더해지면서 ‘채색백자’를 독립된 부류로 보고자 하는 시도도 감지되고 있는 만큼, 채색백자 연구의 새로운 모색이 진행중에 있다. 채색백자에 관한 대표적 연구로 다음을 참조. 윤효정,「朝鮮 15·16세기 靑畵白磁의 製作과 使用」, 『美術史學硏究』 250·251 (2006, 9), pp. 315-360; 田勝昌, 「18~19세기 동화·동채백자 연구」, 『시각문화의 전통과 해석-정재 김리나교수 정년퇴임기념 미술사논문집』(예경, 2007), pp. 349-350; 송인희, 「조선 17-18세기 철화백자의 특징과 성격-가마터 출토품을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67 (2010, 6), pp. 77-110; 이보름, 「조선후기 채색(彩色)백자 연구」,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8.
6) 『經國大典註解』,明宗10年(1555), 「刑典·秋官·司寇」, 「禁制條」, “白磁器 御膳用白磁器, 東宮用靑器, 禮賓用彩文器。 『經國大典』 大小員人用紅·灰·白色表衣·白笠·紅䩞者, 酒器外金·銀·靑畫白磁器者…用朱漆器者…私占柴草場者, 竝杖八十。”
7) 『成宗實錄』 77卷, 成宗8年(1477) 閏2月10日, “…永濡曰: “今豪富之家, 兢用靑畫器, 唐物非能自來, 必有輸來之者。其弊不貲, 請痛禁。” 上曰: “勿貿唐物, 曾已立法。 其申明之。”
10) 탄벌동 요지와 학동리 요지의 운영시기는 일반적으로 요지에서 수습된 간지명 백자를 기준으로 탄벌동이 1606~1612년, 학동리가 1613~1617년으로 상정되었으나, 최근 학동리 10호 출토 ‘戊申(1608)’이 ‘戊午(1618)’으로 밝혀지고, 학동리 9호 출토 ‘庚十十二(1610)’의 명문이 새롭게 확인됨에 따라 두 요장의 운영시기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김경중, 「17~18세기 전반 조선 관요 유적의 운영시기 재검토-가마터 출토품을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101 (2022, 1). pp. 203-204.
11) 池圭植, 『荷齋日記』, 丁酉年(1897) 10月18日, “甲戌 晴, 崔貴福貸去文六兩來 柴木二兩八戔 元心自京下來 茶洞河加德有書 祭器與靑彩器見督…(하략). ” 그 외 다수의 날짜에서 ‘청채기’의 표현이 등장한다.
12) 『承政院日記』 1746冊, 正祖19年(1795), 6月18日, “上詣延禧堂. 慈宮周甲誕辰進饌入侍時, 行都承旨黃昇源……乃命鄕唐交奏, 進午饌訖, 宣饌于進饌堂郞進饌時, 慈宮饌案八十二器…彩花銅砂器有前大圓盆眞苽一器高一尺, 彩花銅沙器有前中圓盆生梨一器高九寸, 畫唐中楪松柏子一器高六寸…….”
14) 『日省錄』, 正祖10年(1786), 2月28日, “通官來言, 皇上以爲, 緞匹則每年例有所送, 在該國未必爲奇, 故將以文房器玩, 別有所送, 係是特恩, 而當自軍機房, 親授於臣等云, 午後, 臣等入山高水長閣, 通官引臣等詣軍機朝房, 禮部侍郞 達春出立, 以黃盤盛玉如意一柄, 玉器二件, 磁器四件,玻璃器四件, 硯二方, 絹箋大小各二卷, 筆二匣, 墨二匣, 洋磁珐瑯盒四件, 雕漆盤四件, 授臣等曰, 此是皇上自內親揀, 特送於國王云, 故臣等祗受, 仍入班次, 諸般燈戲, 擧皆整待, 適因風勢大作, 有旨停戲.”
15) 李德懋, 『靑莊館全書』 67卷, 「入燕記」[下], 正祖2年(1778), 5月21日, “二十一日庚辰, 熱, 留館. …又買假花四盆, 菊二, 月桂二, 盆則洋磁, 圍以琉璃, 冬日見之, 鮮鮮如活花…”; 『日省錄』, 正祖11年(1787), 正月23日, “…十二月初四日, 歲幣方物, 無弊呈納, 十九日臣等詣午門前, 依例領賞, 照例折賞, …(중략)…磁器四件, 玻璃器四件, 硯二方, 絹箋四十張, 筆二匣, 墨二匣, 洋磁珐瑯盒四件, 雕漆器四件…”.
16) 18~19세기 조선에 유입된 법랑채자의 사례와 용례에 관한 연구로 다음을 참조; 김은경, 「朝鮮의 淸 琺瑯瓷器 유입경로와 수용태도 연구」, 『美術史學』 37 (2019, 2), pp. 115-140.
18) 李宜顯, 『東槎日記-坤』 「國書」, “差倭九船來泊近浦候風。 朝送酒魚存問。 夕間倭人都船主呈五花糖, 新田草, 畫磁杯, 五寸鏡等物。 大差倭呈六寸鏡, 翦刀刀子, 倭燈, 琉璃甁等物。”.
19) 『增正交隣志』 5권, 純祖2年(1802), “一行回受私禮單, 兩使臣 關白所送銀子一千枚。 雪綿子六百把。 …(중략)… 摸金革匳鏡二面。 彩磁累合二備。 漆蓋笠鍋二匣。 …”; 金綺秀, 『日東記游』 4권, 高宗 13年(1876), “附日本國回禮單目錄, … 一。 薩摩陶花甁一對。 …”.
21) 「登槃諸器」 중 조선, 청, 일본의 그릇들이 등장하는데, 서유구는 실학자답게 비교적 그 형상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가령 둥글고(鵝卵器) 면이 열 개인 자기(十面器)라던지, 그림을 그린 자기(畵器), 순백에 금으로 아가리 둘레를 장식하고 금으로 壽 혹은 福자를 써넣었다든지(純白而金飾口緣, 或金作壽, 福字于中) 등의 표현이다. 따라서 ‘색’ 자체가 강조된 문구를 고려할 때, 그린 것보다 채색을 한 기명의 가능성도 염두에 둬볼 만하다. 徐有榘, 『林園經濟志』, 「贍用志」 卷2, 「登槃諸器」.
22) 黃釉는 唐代에 저온으로 처음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는 발색이 불안정하여 주로 민간에서 사용되는 등 그 가치가 높지 않았다. 발색이 뛰어난 황유는 明 永樂年間(1403~1424) 처음 생산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역시 저온으로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 유물로 영락제가 西藏의 달라이 라마에게 하사한〈黃釉暗刻纏枝花紋高足杯〉가 전하고 있다. 劉偉, 『皇帝與宮廷瓷器-上』(紫禁城出版社, 2012), p. 137.
23) 일명 ‘淡黄釉’ 혹은 ‘蛋黄釉’으로도 불리며, 雍正年間(1723-1735) 개발된 고온단색유 신품종이다. 서양에서 수입된 안료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陶成紀事碑記』에 西洋黃으로 기록되었다. 이 황유는 청궁 내에서 황제의 색이라 하여 한정 수량만 생산될 정도로 엄격히 관리된 품종이었다. 내외 모두 황색이 시유된 자기는 黃器 혹은 殿器라 하여 황제, 태후, 황후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며, 외벽만 황색인 자기는 황귀비에 한해 사용되었다. 그 외 신분은 황유자기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신분에 따라 황유자기의 사용 수량도 정해지는 등 엄격히 관리되었다. 趙聰月,「試論清宮舊藏的黃釉瓷器」, 『外銷瓷器與顏色釉瓷器研究』(紫禁城出版社, 2012), pp. 412-413.
24) 연구성과에 따르면, 그림의 묘사와 구도, 준법의 특징으로 보건대 약 1797년(上限)에서 1830년 이전(下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수미, 「國立中央博物館 所藏〈太平城市圖〉 屛風 硏究」(서울대학교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 p. 162.
25) 김은경, 「책거리에 등장하는 중국 도자의 함의-장한종, 이형록의 책거리를 중심으로」, 『조선 선비의 서재에서 현대인의 서재로』(경기도박물관, 2012), pp. 193-194.
26) 정세함이 덜하여 경덕진 민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여겨지나, 한편으로 관요의 생산 일부를 민요에 위탁생산하는 방식이었던 官塔民燒가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민요에서 생산된 官器의 가능성도 있다.
27) 『英祖實錄』, 英祖9年(1733), 3月22日, “藥房入診. 都提調徐命均曰: “書狀官狀啓末端語, 誠然矣. 以十數萬兩之銀, 貿得唐物, 爲費不貲, 而侈風漸盛, 閭閻尤甚. 衣服飮食, 恥不若人, 嚴禁此風則好矣, 而此專在在上者之導率. 聖上服御之儉, 無以加勉, 而宮中服飾, 恐不無侈靡之習, 別爲申飭, 以爲化下之本焉. 上可之.”
30) 옹주묘 출토품은 왕실 상례를 따른 여타 왕실 인물 무덤의 출토품보다 수량도 많고 화려한 기물 일색으로 구성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영조대 기존 왕실 상례의식에서 두 차례에 걸쳐 평소 검약을 강조하는 정치 철학이 내재된 상례로 개편되면서, 왕실 상장례 의식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던 私家人인 옹주의 신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현진, 「영조대 왕실 喪葬禮의 정비와 『國朝喪禮補編』」, 『韓國思想史學』 37 (2011, 12), pp. 142-146.
31) 『서울의 도요지와 도자기』(서울역사박물관, 2006);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부지 발굴조사-동대문운동장유적: Ⅰ본문』(중원문화재연구원, 2011);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청진 12-16지구유적-발굴조사보고서: Ⅰ본문』(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무악2구역 유적』(한울문화재연구원, 2018)
32) 철화백자의 생산은 일반적으로 17세기 청화안료의 수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대체재로 본격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468년 편년으로 알려진 〈白磁鐵畵 ‘尙膳監太監鄭善’ 銘墓誌石〉을 통해 조선관요 설립 전후에 이미 백자에 산화철을 덧입혀 소조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후 16세기 들어 선명한 발색이 가능했던 산화철이 적극 사용되며, 기록을 주목적으로 한 철화백자 묘지석이 활발히 제작되었다. 우민아, 「조선시대 관요 철화백자의 성격 변화」, 『미술사연구』 25(2011, 12), p. 247.
35) 동화백자는 17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생산된 후, 18~19세기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비록 전세유물 자체도 많지 않지만, 동화백자묘지의 경우 철화와 청화에 비해 더욱 소수만 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崇禎甲子(1684)의 편년을 지닌 〈박증구와 아내 이씨 부부 묘지[朴曾求·全義李氏墓誌銘墓誌]〉가 국립중앙박물관 및 오사카시립동양도자 미술관에 각각 전한다.
37) 김은경, 앞의 논문(2012), p. 202. 그 밖에 조선후기 백자에 보이는 바타비아 양식에 대해 이보름은 중국의 갈유가 조선에서는 철채와 동채로 교체되어 표현되고 있는 만큼, 이 특징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명칭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품종을 일명 ‘바타비안 양식 채색백자’로 명명하여 별도로 분류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만큼 이 양식이 조선후기 채색백자의 대표적인 외래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보름, 앞의 논문, pp. 115-120.
38)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차문화와 자사요의 유럽 전파에 관한 연구로 다음을 참조; 이정민, 「중국 宜興 紫沙壺와 영국 붉은 석기 주자(Red Stoneware)-조지안 시대 풍속화에 보이는 다기세트를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97 (2018, 3), pp. 205-233; 施靜菲, 「歐洲的紫砂意象-訂製、 模仿與創新」, 『紫砂漫遊.聚焦臺灣』(鶯歌陶瓷博物館, 2019), pp. 10-19; 陳國棟, 「歐洲貿易、 茶文化與紫砂壺」, 同書, pp. 20-33.
40) 이희경은 일찍이 중국을 다녀오면서 ‘사기물을 입히지 않고 홍색, 녹색, 청색, 황색으로 채색한 도자기’를 보고 어떻게 하면 채색이 벗겨지지 않는지 그 기술을 알 수 없어 답답함을 토로한 바 있다. 유약을 시유하지도 않았는데 여러 색이 채색되었다는 표현은 채색된 자사호, 즉 의흥태법랑을 연상시킨다. 외관상 유약이 시유되지 않았는데 채색된 도자기라면, 그리고 18세기 중후반 내수 및 수출 도자로 자사호가 크게 유행했던 정황을 고려하면, 이희경이 묘사한 예는 자사요의 가능성도 있다. 李喜經, 『雪岫外史』, “余見中國土器皆不燔兒成, 多畫五彩, 而紅綠青黃之色, 如鍍磁水, 此之本質, 微起而凸, 此可異也。 鍍磁不燔而能不脫, 則何難施彩乎?此必有至易之法, 而終不覺悟, 尤可歎也。 若金與墨之施磁, 則一如渲之於紙, 而亦猶不脫。 此則不能鍍之, 而抑別有他法也。”
42) 『成宗實錄』 77卷, 成宗8年(1477), 閏 2月10日, “…永濡曰: “今豪富之家, 兢用靑畫器, 唐物非能自來, 必有輸來之者。 其弊不貲, 請痛禁。” 上曰: “勿貿唐物, 曾已立法。 其申明之。”” ; 『燕山君日記』29卷, 燕山4年(1498), 6月15日, 命議禮曹所啓禁制奢侈節目。 ……(중략)…第十六條油蜜果、 金銀靑畫白磁器、 行果盤, 《大典》已有禁令, 司憲府申明痛禁。…”
45) 중국과 조선은 正色(오방색으로 靑, 黃, 赤, 白, 黑을 의미)이 으뜸이며, 그 다음을 間色(두 가지 색 이상이 섞여 나타나는 색)으로 여겼다. 또한 정색과 간색은 신분의 尊卑를 의미하여 복장색에도 차별을 두었다. 『太祖實錄』太祖 7年(1398), 6月29日, “憲司上言, “先王衣服之制, 尊卑有等, 正間之色, 不可紊亂也。 我國家上下服用, 尙未有章。 願自今進上服用, 皆正色, 凡男女黃色灰色縞素之衣, 一皆禁斷。” 上允之。”.
48) 동화백자 생산지는 강원도 양구의 몇 도요지를 제외하면,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 등을 토대로 대략 분원을 포함한 중부와 북부 일부지방에 분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화백자 생산지에 대한 검토로 다음 논고를 참고 ; 田勝昌, 앞의 논문, pp. 349-350.
49) 현재까지 동화백자의 생산지로 알려진 예는 강원도 양구 송현리 3호와 칠전리 1호가 유일하다. 비록 각 요지에서 출토된 2편의 동화문 백자편만 전하고 있지만, 강원도 일대에서 일정 수준의 동화백자가 생산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두섭, 「楊口地域 白磁硏究」(강원대학교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pp. 56-57.
52) 『承政院日記』 英祖17年(1741), 2月15日, “…向來以寧越·遂安銅脈産出處, 發遣本曹郞廳摘奸事, 陳達蒙允矣。 寧越下去郞廳, 未及還來, 遂安摘奸郞廳, 纔已復命, 而若干銅鐵, 吹鍊以來, 故觀其銅品, 無異熟銅。 ….”
55) 『成宗實錄』, 成宗19年 (1448) 1月23日, “…畫員李季眞曾受公貿易回回靑價, 黑麻布十二匹, 而卒不買來, 令本府徵其本色, 囚家僮累及數百名。 而季眞不能納者, 以回回靑, 非我國所産, 亦非民間所用, 季眞雖至死, 不能納必矣。 請勿徵本色, 以黑麻布倍徵何如?…”
58) 『荷齋日記』에 따르면 왜청이 120냥쭝에 1,820냥이라면(1898년 11월 14일), 소발니청은 12냥쭝에 650냥으로 중국산이 3배 이상 비쌌다(1904년 7월 9일). 방병선, 「하재일기(荷齋日記)를 통해 본 조선 말기 분원」, 『강좌미술사』 34 (2010, 6), p. 288.
60) 조선후기 불화에 등장하는 기물의 종류와 특징에 관한 연구로 다음을 참조. 許詳浩,「朝鮮後期 佛畵와 佛殿莊嚴具에 表現된 器物 研究」, 『文化史學』 27 (2007, 6), pp. 853-879.
61) 대표적인 관련연구로 다음을 참조. 이경화,「朝鮮時代 甘露幀畵 下段畵의 風俗場面 考察」, 『미술사학연구』 220 (1998, 12), pp. 79-107; 박은경, 「조선 16세기 감로도의 위난 이미지를 통해본 사회상」, 『한국문화』 49 (2010, 3), pp. 25-49; 신은미,「19세기 말∼20세기 초 불화에 보이는 민화적 요소와 수용배경에 대한 고찰: 16나한도를 중심으로」, 『문화재』 37 (2004, 12), pp. 121-150 등.
62) 徐有榘, 『林園經濟志』, 「贍用志」 卷2, 「登槃諸器」, “華造瓷器(倭瓷附件)……今燕貿盂鉢碗楪之屬,大抵多回青(既無名異)…若通身作或紫或黃, 或碧綠諸色者, 多在瓶壺杯盒之類, 而碗楪則不多見也….”
65) 19세기 초에 편찬된 『雪岫外史』 중 이희경은 어떤 이로부터 북경에서 ‘繪磁法’을 배웠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 ‘회자법’이란 당시 조선이 유하채 기법을 충분히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상채기법으로 추정된다. 李喜經, 『雪岫外史』, “往年有人入燕, 得繪磁法來云: “生漆和龍腦, 則漆化為水, 用此入彩而畫之, 即不脫.” 聞者試之, 漆不為水, 因棄之云矣.”
67) 『한국근대사자료집성』 13권, 「프랑스외무부문서 : 조선Ⅱ·1889」, “le 12 mai 1889 (1889년 05월 12일), ……On a tenté aussi de créer ici une industrie Céramique à l’imitation de celle de Chine; on a fait venir de Kin- to-tchen (Kiang-si) des ouvriers qui sont encore en Corée, mais qui n’ont jamais été mis en mesure de travailler(또한 이곳에 청국의 것을 모방한 도자기 공장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강서의 경덕진 노동자들을 오게 하여, 아직도 조선에 머물고 있는 그들은 결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웹사이트].(2023. 3. 8.). URL: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k&levelId=hk_013r_0010_0330&types=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