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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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관요 설치는 하나의 시점으로 설정되기보다 1467년(세조 13)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pp. 28-33. 최근 이루어진 관요에 대한 종합연구는 김귀한, 「15~17세기 조선 관요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0).
3) 일본 교토(京都) 지역 출토 사례를 포함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남, 제주 등 전국 20여 개 유적에서 조선 전기 관요 명문백자가 출토되었다. 단위 유적별 출토량은 매우 적은 편이며, 유적은 소수의 분묘 및 1개소의 가마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관청지에 해당한다. 관련 내용은 박정민, 앞의 논문, pp. 182-190.
4) 현재까지 한양도성 이외 지역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대부분 분묘에서 확인된 지석(誌石)이다. 분묘 이 외 건물지에서 그릇으로 제작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된 사례는 서울 수서동 유적의 <백자청화운룡문항아리편>과 <백자청화포도문동체부편>이 대표적이다. 그 외 충청남도 홍성군 자경리 유적의 Ⅱ-B지점 조선시대 4호 토광묘에서도 <백자청화국화당초문쌍이잔>이 출토되었다. 백제문화재연구원, 『홍성 신경리 자경동 유적 발굴조사보고서』 (2012), p. 97;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 수서동 유적』 (2015), pp. 185-187. 추가 유물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많은 발굴 사례를 파악하고 있다.
5) 최근 한국도자사 분야에서 조선 전기 관요 관련 연구는 상대적으로 다수의 성과를 이루었다. 해당 분야의 연구 특징에 대해서는 김윤정, 「21세기 도자사 연구의 확장과 다변화」, 『미술사학』 44 (2022. 8), pp. 280-281. 이러한 흐름을 강화하는 과정에 한양도성의 발굴조사 성과도 적극 활용되는 추세다.
6) 선행연구들은 주로 한양도성 출토 조전 전기 청화백자의 수량을 파악하여 연구에 활용했다. 윤효정,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장식특징」, 『조선백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15), p. 249, 표 1; 김혜정, 「조선 전기 청화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p. 105, 표 5.
7) 필자는 이 글의 작성을 위해 1985년에서 2023년 5월 사이에 발간된 한양도성 내 발굴조사 보고서 508권의 내용과 효제동 175-3 유적, 공평 15·16지구 유적, 덕수궁 월대지 유적 등 3개 유적에 대한 약식보고서를 점검했다. 1990년대 이전에 발간된 보고서 가운데 일부 확보하지 못한 사례가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궁궐 권역에서 이루어진 문화재 정비를 위한 시굴 조사이다. 궁궐 유적들은 이미 (Fig. 1)의 지도에 표시되었으므로 현재 파악된 내용만으로도 한양도성 내 ‘天·地·玄·黃’명 백자와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출토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작성을 위해 분석한 발굴조사 보고서들은 지면의 한계로 일일이 제시하지 못했고, 본문의 논지 전개에 직접 활용한 발굴조사 보고서만을 각주와 참고문헌으로 제시한다. 고찰 대상에 포함한 약식보고서는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효제동(175-3번지 일원)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1); 동저,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나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가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시공문화재연구원, 「서울 덕수궁 월대 재현공사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22) 등이다. 이번 연구에 도움을 준 수도문물연구원과 한울문화재연구원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8) 조선시대 백자의 변천을 시기별로 고찰한 선행연구에도 백자의 활발한 사용은 세종 말년에 이르러 가능했음이 강조되어 있다. 윤용이, 『한국도자사연구』 (문예출판사, 1993), p. 328.
10) 김숙자가 고령현감을 지낸 기간은 다음의 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佔畢齋集』 彝尊錄上 先公紀年第二. “… (전략)正統七年壬戌二月…(중략)…出爲高靈縣監…(중략)…正統十二年丁卯十月…(중략)…復爲成均注簿兼南學敎授官(후략)…” 1440년대 고령을 비롯한 광주, 남원 등 외방의 백자 진헌 고을에 대한 내용은 『佔畢齋集』 彝尊錄下 先公事業第四. “高靈歲貢白砂器 工人用功 甚鹵莽 故器多若窳 官被詰責…(중략)…居廣州南原之右先是每進獻 二邑之工受賞 縣工多得罪. 今縣工得賞 而二邑之工 反受譴 至今賴之.” 『佔畢齋集』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 수록 내용을 활용했다.
11) 현재 국내에서 출토된 최고(最古)의 청화백자는 1456년(세조 2)에 제작된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장모 흥녕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 이씨(1383~1456)의 지석이다.
13)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제작이 다소 한정적이었던 상황은 실제 15세기 후반까지도 일부 장인이 청화 안료를 원숙하게 다루지 못했던 상황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成宗實錄』 95卷, 9年(1478) 8月 11日. “…(전략)知事李克培啓曰 臣觀尙衣院用回回靑 其費甚廣. 以鐵椎碎其靑塊 取其中如粟粒者用之 通事張有誠謂臣曰 中國之人其用之 不如是 吾習而試之 可用. 請招有誠更問其法 令今之赴京畫工傳習. 上曰 可.”
14) 『世祖實錄』 39卷, 12年(1466) 6月 7日. “丙午 工曹啓 白磁器 除進上及已前燔造者外 自今公私 毋得用之. 違者竝工人 以制書有違律 科罪. 且勿定貢物 以防憑公私造之弊. 凡白土産出處 令所在邑 禁盜用 無遺錄簿 藏于本曹及承政院. 從之.”
16) 해당 명문들이 의미하는 바와 두 가지 명문이 관요 백자에 표시되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박정민, 「‘處’명백자를 통해 본 조선 전기 내수사(內需司)의 왕실용 백자제작」, 『야외고고학』 22 (2015. 3), pp. 53-74; 동저, 「조선 전기 관요 백자의 명문이 갖는 이원적 성격」, 『미술사학연구』 290·291 (2016. 9), pp. 67-93. 이번 글의 중요한 목적은 한양도성 내 관요 백자의 출토 범위를 가시화하기 위함이다. 내수사 주도로 제작된 ‘大·中·世·處’명 백자는 출토 수량이 적고 출토 지역 또한 사옹원의 ‘天·地·玄·黃’명 백자 출토 범위 내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 글 본문에 제시된 관요 백자라는 개념은 사옹원은 물론 내수사 사기장이 제작한 백자를 모두 포괄하지만, 실제 출토 양상은 보다 포괄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天·地·玄·黃’명 백자를 통해 파악했음을 밝혀둔다.
17) 필자는 2014년 박사학위 논문 작성 과정에서 관요 백자에 ‘天·地·玄·黃’명이 표기되는 시점을 1470년대로 설정하였으나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했었다. 이후 경기도 광주 우산리 4호와 우산리 14호 등 여러 관요 가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김미소는 조사 내용을 통해 ‘天·地·玄·黃’명 백자가 148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구자는 1460~1470년대 운영된 것으로 파악된 우산리 4호 가마터에서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지 않았으나, 운영 시기를 1480년대로 구분한 우산리 14호 가마터에서 ‘天·地·玄·黃’명 백자가 확인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김경중이 작성한 해당 유적의 발굴조사 보고서에도 동일한 내용이 제시되었다. 필자 역시 현재까지 이루어진 발굴 성과를 토대로 주장한 내용의 타당성을 인정하므로 이 글에서는 해당 연구의 편년안을 따른다.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p. 130; 김미소, 「조선 초기 관요 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9), pp. 91-92; 김경중, 「가마의 운영 시기」,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보고서』 (2019), p. 460.
19) 한양도성에서 내수사 주도로 제작된 ‘大·中·世·處’명 백자가 출토되는 유적은 주로 경복궁과 창덕궁 주변에 자리한다. 해당 유물들은 제작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된 유적에서 대체로 함께 확인되어 별도의 출토 위치는 제시하지 않았다. 1560년대 이후 등장하는 ‘左·右’ 혹은 ‘別’명의 관요 백자가 출토된 유적 또한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된 유적의 위치와 대체로 겹친다. 물론 일부 유적에서는 ‘天·地·玄·黃’명 백자가 보고되었지만 ‘左·右·別’명 백자는 확인되지 않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16세기 후반 이후 도성 내 관요 백자의 사용범위가 축소 혹은 확대된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번 논문에서는 ‘天·地·玄·黃’명 백자와 ‘左·右·別’명 백자의 출토 양상을 비교하는 접근 대신에 ‘天·地·玄·黃’명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 관요 백자의 출토 권역을 가늠해 보았다. 간지명이 부가되지 않는 ‘左·右’명 백자의 제작 기간과 해당 유물이 출토되는 가마터들에 대해서는 김경중, 「16세기 중·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가마터 출토 명문백자를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15 (2012. 11), pp. 243-265. ‘大·中·世·處’명 백자의 도성 내 출토 위치 및 특징은 박정민, 위의 논문, p. 149.
20) 최근 관요 설치와 백자의 생산 수준의 발전을 정치사적으로 해석한 연구가 제기되었다. 연구자는 1467년(세조 13) 관요 설치가 세조 시절 군신(君臣) 간의 구분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주장했다. 김귀한, 「조선 세조~성종대 관요의 설치와 정비」, 『석당논총』 82 (2022. 3), pp. 277-304.
21) 관요 성립 이전 경기도 광주와 이외 지방에서 제작된 명문백자들에 대한 특징을 정리한 글은 박정민, 앞의 논문, pp. 44-79; 정담, 「15세기 후반 광주(廣州) 관영사기소의 자기 제작과 운영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8), pp. 78-102.
23) 최근 조사된 공평 15·16지구 유적에서도 다수의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었으며, 동일한 건물지에서 4개의 자호가 각기 표시된 백자가 모두 출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특징은 인근에 자리하는 청진동 일대의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출토 양상을 통해 보자면 ‘天·地·玄·黃’명의 의미가 사용처 구분과는 관계없음을 알 수 있다. 공평 15·16 지구 유적의 ‘天·地·玄·黃’명 백자 세부 출토 위치는 박정민, 「서울 공평 15·16지구 내 유적 ‘나’지역 출토 도자기의 면모와 특징」, 『2021 인사동 발굴 그 성과와 나아갈 길』 (국립고궁박물관·수도문물연구원, 2022), p. 47.
24) 한양도성 내 별궁과 중요 궁가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4대문안 문화유적 보존방안 연구』 2 (2011), p. 540; 최종규, 「서울 한양도성 안 별궁과 안국동별궁」, 『서울공예박물관 건립부지 내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 안동별궁』 (울산문화재연구원, 2019), pp. 152-154.
25) 이 글에서 사용한 양질 백자라는 단어는 관요에서 갑번(匣燔)으로 제작한 제품과 함께 갑발 없이 한 점씩 포개어 번조한 백자들을 포괄한다. 내저면에 포개구이한 흔적이 없고, 그릇의 백색도가 상대적으로 양호한 경우 양질 백자의 범주로 구분하였다.
26) 조선 전기 청진동에는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 평원대군(平原大君, 1427~1445)을 비롯하여 중종의 적장녀(嫡長女)인 효혜공주(孝惠公主, 1511~1531) 등 다수의 왕족이 거주했다. 청진 12~16지구 유적에 자리하는 박석길의 설치를 주변에 자리하는 궁가 및 어공각사(御供各司)와 연결시킨 연구로는 정정남, 「조선시대 壽進宮의 기능과 주변 박석[磚石]길의 의미해석」,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한국건축역사학회, 2011), pp. 175-180.
27) 실제로 같은 청진동에서도 지구별로 ‘天·地·玄·黃’명 백자의 출토량은 상이하다. 중요한 점은 ‘天·地·玄·黃’명 백자의 출토량이 반드시 유적의 면적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면적 2,400m2의 청진 5지구 유적에서는 총 12점의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었으나, 연접한 곳에 자리한 면적 1,921.9m2의 청진 17지구 유적에서는 해당 유물이 단 1점만 보고되었다. 이는 일정 권역 내에서도 관요 백자를 사용할 수 있는 인물들과 그렇지 못한 계층이 공존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번에 확보한 ‘天·地·玄·黃’명 백자의 출토 위치 정보에 각 유적별 출토 수량을 더한다면 ‘天·地·玄·黃’명 백자의 권역벽 소비 집중화 현상에 대한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단계적 접근을 통해 조선 전기 한양도성의 백자 소비 양상의 변화와 방향성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적의 면적은 한울 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1지구 유적』 Ⅰ (2011), p. 26; 불교문화재연구소, 『서울 종로구 공평동 유적: 청진 17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2016), p. 18.
28) 조선 전기 해당 지역에서 거주했던 대표적인 외척인 능성구씨(綾城具氏) 집안과 그들의 거주 위치 비정에 대한 연구는 배우성, 「종로 시전 뒷길의 능성구씨들」, 『서울학연구』 67 (2017. 5), pp. 137-169.
30) 해당 유물에 표기된 명문을 통해 관요 백자가 개인 물품이 된 이후 각자의 일상에서 활용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사대부가에서 실제 그릇을 빌려오고 활용하는 과정은 하인들이 담당했을 것이므로, 최대한 여러 계층의 인물이 명문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자와 함께 한글로 내용을 부가했음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사대부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일기 『瑣尾錄』에는 임진왜란 기간 전쟁을 피해 지방에 거주했던 서울 사대부의 생활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 오희문은 시장에 술을 팔기 위해 이웃인 사과(司果) 벼슬의 정씨댁[鄭司果宅]에서 그릇을 빌렸다. 계집종 향비(香婢)가 실수로 빌린 그릇을 파손하자 오희문은 물건을 사다가 갚았다. 이런 상황은 일상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며, 개인이 소유했던 관요의 양질 백자에 표시된 주인 이름은 반납 과정이나 파손시 배상의 근거로 긴요하게 활용되었을 것이다. 『瑣尾錄』 卷2 癸巳日錄 閏11月 12日. “且昨日場市賣酒事 香婢與鄭司果宅婢墨介 酒八壺戴去 而中道墨介跌足踣地 並與盛缸而墜破 空還可笑. 缸則隣人之物 不得已買償.” 원문은 오희문, 『瑣尾錄』 卷7 교감표점본 1 (국립진주박물관, 2018), p. 294.
31) 조선시대 사대부 관료들에 의한 관요 백자 사번(私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종민, 「朝鮮 官窯에서의 私燔 실태와 영향」, 『역사와 담론』 86 (2018. 4), pp. 347-380. 해당 연구자는 관요 관리직에 의한 사적 침탈행위, 요장(窯場)의 생계형 생산, 하속(下屬)의 반사(班賜) 요구나 늑매(勒買) 등을 사번의 범주로 구분했고, 이러한 사번은 조선시대 관요 운영 시기 내도록 존재했음을 강조했다.
32) (Table. 1)의 수량은 각주 7에 제시된 보고서를 통해 파악한 내용에 한양도성에서 발견 신고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 2점을 추가한 것이다.
33) 기타로 구분된 유물들은 대체로 작은 파편이기 때문에 선명하게 기종을 구분하기 어렵다. 청진 5지구에서 출토된 기타 유물은 향로의 다리편에 해당할 것이지만 잔편이라 기타로 구분했다.
34) 보고서에 여러 점의 청화백자가 수록되었더라도 한 개체의 유물에 해당할 경우는 한 건으로 구분했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대체로 잔편이므로 기종 구분에 제시된 호는 크기와 형태에 따른 세분 없이 항아리 전체를 포괄했다. 한양도성 내 유적에서 출토된 일부 지석은 청화백자이지만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년(紀年) 근거가 없어 고찰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또한 명문이나 부호가 청화로 표기된 일부 유물도 고찰에 포함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를 주제로 이루어진 선행연구에서도 한양도성 출토 88점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양상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글은 선행 연구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 조사된 유물을 추가하고, 한 개체의 유물로 구분한 수량을 반영했으므로 선행연구와 유물 규모에 차이가 있다. 선행연구에 제시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기종 및 문양별 수량은 김혜정, 앞의 논문, p. 105.
42) 서울역사박물관, 『종묘광장 발굴조사보고서』 (2012), p. 283, 305, 349; 한백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묘광장 어도복원구간 내 유적』 (2015), p. 55.
44)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2·4지구 유적』 Ⅰ (2017), p. 253;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 1·2·4지구 유적』 Ⅱ (2017), p. 96, 233, 285, 409.
45)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나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2022), p. 118, 121, 124, 125, 126, 129, 141, 146, 147, 169, 170;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가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p. 175, 191, 198, 209, 211.
53)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 Ⅰ (2011), p. 218, 355, 358, 361, 410;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Ⅱ(2011), p. 26, 28, 181, 200, 225, 285.
56)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 유적 Ⅱ: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3-1구역 시굴·발굴조사 보고서』 1권 (2021), p. 272, 273, 573, 594;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 유적 Ⅱ: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3-1구역 시굴·발굴조사 보고서』 2권 (2021), p. 917, 1294.
57)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 유적Ⅳ: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3-4, 5구역 시·발굴조사 보고서』 1권 (2022), p. 399, 400;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 유적Ⅳ: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3-4, 5구역 시·발굴조사 보고서』 2권 (2022), p. 990.
67)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2~3지구 유적』 Ⅱ (2013), p. 43, 51, 52, 54, 80, 84, 96, 119, 167, 175, 292, 361, 406, 407, 416.
68)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5지구 유적』 Ⅱ (2012), p. 107, 153, 182, 230, 233, 234, 244, 250, 293, 294, 295, 300, 304, 410, 459, 499.
70)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 Ⅲ (2013), p. 246, 251, 322, 326, 351, 380, 420, 427, 439, 454, 455, 473, 474, 478, 554, 574, 587, 594, 624, 627, 635, 668, 689, 695, 703;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 Ⅳ (2013), p. 57, 61, 80, 146, 154.
73) 선행연구는 전세유물을 비롯하여 생산지와 소비지 출토품을 포괄하여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기종 특징을 파악하였다. 선행연구 역시 조선 전기 청화백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한 것은 전접시이며 다음은 항아리라는 점을 지적했다. 윤효정, 앞의 논문, p. 249, 표 1.
74) 잔받침으로 사용된 전접시의 용도와 시기별 기형 변화 및 문양 특징을 고찰한 선행연구는 전승창, 「朝鮮前期의 白磁전접시 考察」, 『湖巖美術館 硏究論文集』 2 (1997), p. 127; 동저, 「15~16世紀 朝鮮時代 京畿道 廣州 官窯硏究」(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pp. 168-170; 윤효정, 「朝鮮 15, 16세기 靑畵白磁의 製作과 使用: 문헌자료와 요지출토품을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 250·251 (2006. 9), pp. 336-339; 김윤정, 「朝鮮初 酒器의 조형 변화와 원인」, 『강좌미술사』 37 (2011. 12), pp. 134-140; 송호진, 「조선 초기 청화백자전접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pp. 50-55; 김혜정, 앞의 논문, pp. 120-122.
75) 서울 시내에서 가장 많은 청화백자 전접시가 출토된 곳은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이다. 해당 유적에서는 <석제화형잔> (해당 보고서 유물번호: 1540)을 비롯하여 <동제잔> (해당 보고서 유물번호: 3344, 3345) 등 자기 외 다른 재질의 잔들이 출토된 바 있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12~16지구 유적』 Ⅲ (2013), p. 564; 동저,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 Ⅳ (2013), p. 581.
76) 물론 장군이나 항아리도 술을 담는 용도의 주기로 구분할 수 있겠으나, 저장기에 담기는 내용물을 술로만 한정할 근거는 불분명한 편이다. 이 글에 언급된 주기는 실제 술을 담고 술잔을 받치는 용도의 각종 잔과 전접시를 의미한다.
77) 『經國大典』 卷5, 刑典. “大小員人用…(중략)…酒器外金銀靑畵白磁器者[庶人男女則幷禁…(중략)…金銀靑畵酒器]…(중략)…杖八十.” 『경국대전』의 원문은 윤국일 역, 『新編 經國大典』 (신서원, 2005), pp. 432-435.
78) (Table. 1)에 제시된 38개 유적 가운데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1점 출토된 곳은 총 23개소로 전체의 약 61%이며, 2점이 출토된 유적은 5개소로 전체의 13% 정도이다. 74% 정도의 유적에서는 청화백자가 두 점 이하로 출토된 것이다. 3점 이상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된 26%의 유적은 대부분 청진동과 공평동에 자리한다.
79) 같은 청진동과 공평동 권역이라고 해도 세부 유적에 따라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출토량은 큰 차이를 보인다. 공평 제1·2·4지구 유적은 조사 면적 약 6,736m2에서 5점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했다. 반면 공평구역 제15·16지구에서는 조사 면적 11,023m2에서 21점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보고되었다. 두 유적의 면적 차이는 2배이지만, 출토 유물은 4배 정도의 차이가 있다. 같은 공평동에 자리하는 유적이지만 청화백자의 출토 양상이 현저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부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해당 유적에 거주했던 인물들의 신분이나 위상 차이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전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조선 청화백자는 문헌 근거로 확인하기 어려운 유적별 거주인들의 신분 고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단초로도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조사지역 면적은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2·4지구 유적』 Ⅰ (2017), p. 34; 동저,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가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p. 3;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 정비사업부지(나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p. 1.
80) 조선 전기 관요에서 제작한 청화백자는 안료 수급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왕실 의례용 그릇을 우선 생산하는 등 생산 수준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대신 도성 위주로 성장한 청화백자의 수요는 명나라에서 들여온 그릇을 통해서도 충족되었을 것이다. 실제 한양도성 내 여러 유적의 조선 전기 문화층에서는 조선 청화백자보다 훨씬 많은 수량의 명나라 청화백자가 출토되었다. 한양도성 내 명대 청화백자의 출토 양상에 대해서는 박정민, 「한양도성 내 조선 시대 유적의 시기별 중국 자기 출토 양상과 변화」, 『인문과학연구논총』 43-4 (2022. 11), pp. 265-271. 선행연구에 제시된 한양도성 출토 명나라 청화백자는 398점이며, 여기에 명나라 말기 청화백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명말청초 청화백자 147점을 합하면 총 545점에 달한다. 이는 조선 전기 조선산 청화백자 출토량의 3.5배가 넘는 수량이다.
81) 출토품 가운데는 의정부지(議政府址)에서 확인된 <백자청화어문동체부편>(해당 보고서 유물번호: 60)처럼 특정 관청에서 확인된 유물도 있다. 해당 유물은 개인 소장 <백자청화군어문항아리>(보물)과 동일한 외형을 지닌 항아리의 파편이다. 의정부지에서 출토된 <백자청화어문동체부편>에 대해서는 박정민, 「의정부 유적 출토 자기(瓷器)의 특징과 출토 양상 검토」, 『의정부지 발굴조사보고서』 (서울역사박물관, 2020), pp. 509-511. 항아리에 장식된 어조문의 의미와 특징에 대해서는 윤효정, 「조선 전기 청화백자에 그려진 어조문(魚藻文)의 특징과 함의」, 『미술사논단』 51 (2020. 12), pp. 45-68. 선행연구가 강조한 것처럼 어조문이 군신동락(君臣同樂)을 강조한 문양이라면 의정부야말로 해당 청화백자의 문양 의미가 십분 강조될 수 있는 곳이었다.
82)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을 통계화한 선행연구들은 공통적으로 매죽문과 화당초문이 장식된 청화백자가 다수임을 강조했다. 윤효정,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장식특징」, 『조선백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15), p. 251, 표 2; 김혜정, 앞의 논문, p. 105, 표 5. 특히 윤효정의 선행연구는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 비중을 매화문 위주의 세한 삼우문 계통, 보상당초문과 화당초문, 시문, 운룡문과 어조문 등의 순서로 파악했다. 한양도성 출토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을 기종 구분 없이 나열하자면 선행연구가 제시한 특징과 부합한다.
83)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 가운데 매화문의 비중이 높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이다. 특히 항아리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 중에 소나무 계통의 문양보다 매죽문 등 매화 계통의 문양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주장은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윤효정, 앞의 논문, pp. 250-252.
84) 물론 일부 매화문은 새와 결부되어 매조문(梅鳥紋)을 이루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문양 역시 현재 남아있는 문양을 기준으로 구분하였으므로 매조문을 별도로 제시하지 않았다.
86) 『成宗實錄』 230卷, 20年(1489) 7月 22日. “禮曹啓 屬者特賜畫樽二于成均館 斯文之會常設之 以爲觀美. 今不謹藏守 墜破其一 請推鞫科罪. 傳曰 古人有碎(碼琉盤)〔碼瑙盤〕 亦不之責 破樽特過誤耳 安用治罪 其復賜樽.”
88) 최근 세한삼우문과 매죽문을 다룬 연구는 송죽매가 세한삼우로 의인화된 과정을 송나라와 원나라의 문화 양상 속에서 파악하고, 조선 전기 사회에서 매화와 대나무가 사대부 관리들의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발현시킬 가시적 산물로 자리 잡은 상황을 고찰했다. 이 연구는 조선 전기 매죽문 청화백자의 제작 배경 역시 군신 사이에 요구되던 정치적 도덕성의 강조로 해석했다. 고연희, 「식물 이미지의 정치성(政治性), ‘세한삼우(歲寒三友)’와 ‘매죽(梅竹)’」, 『미술사학보』 55 (2020. 12), pp. 101-124. 세한삼우문이나 매죽문은 문양이 갖는 의미를 고려할 때, 관요에서 한정된 계층을 위해 제작된 장식용 청화백자 항아리의 문양으로 매우 적절한 소재였을 것이다.
Jar (+Small jar) | Rice bale- shaped bottle | Bowl | Cup (+Cup with two handles) | Flower-shaped cup | Stem cup | Dish with flat rim | Lid | Lidded bowl | Flowerpot | Play tools (Korean chessmen, dice) | others (Unknown) | Subtotal (cases) | ||
---|---|---|---|---|---|---|---|---|---|---|---|---|---|---|
1 | Kyŏnbok Palace35 | 1 | - | - | - | - | 1 | - | - | - | - | - | - | 2 |
2 | Kun’gishi site36 | - | - | - | 1 | - | 1 | 1 | - | - | - | 1 | - | 4 |
3 | Tŏksu Palace Taehanmun wŏltae site37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4 | Andongbyŏl Palace (Seoul Museum of Craft Art)38 | - | - | - | 1 | - | - | - | - | - | - | - | - | 1 |
5 | Ŏyŏngch’ŏngji site39 | - | - | - | - | - | - | 1 | - | - | - | - | - | 1 |
6 | Wŏn’gaksaji site40 | - | - | - | - | - | - | 2 | - | - | - | - | - | 2 |
7 | Ŭijŏngbuji site41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8 | Chongmyo Plaza + Out-section42 | 2 | - | - | - | - | - | 2 | - | - | - | - | - | 4 |
9 | Chongch’inbut'ŏ site43 | - | - | - | - | - | - | 1 | - | - | - | - | - | 1 |
10 | Kongp’yŏng 1·2·4 district44 | 3 | - | - | - | - | - | 2 | - | - | - | - | - | 5 |
11 | Kongp’yŏng 15·16 district45 | 7 | - | 1 | 1 | - | - | 9 | - | - | 1 | - | 2 | 21 |
12 | Kwansu-dong 4·5·646 | - | - | - | - | - | - | - | 1 | - | - | - | - | 1 |
13 | Kwansu-dong 98-147 | - | - | - | - | - | - | - | 1 | - | - | - | - | 1 |
14 | Kwanch’ŏl-dong 14-348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15 | Kwanch’ŏl-dong 19-2249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16 | Nagwŏn-dong 108-150 | - | - | - | 1 | - | - | - | - | - | - | - | - | 1 |
17 | Tonŭi-dong 41-151 | - | - | - | - | - | 1 | - | - | - | - | - | - | 1 |
18 | Tonŭi-dong 17052 | - | 1 | - | - | - | - | - | - | - | - | - | - | 1 |
19 | Tongdaemun Stadium53 | 3 | - | - | 1 | - | - | 1 | 1 | - | - | - | 1 | 7 |
20 | Pukch’ang-dong 18-954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21 | Sŏrin-dong55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22 | Seun 3-1 district56 | - | - | - | - | - | - | 1 | 1 | - | - | - | - | 2 |
23 | Seun 3-4, 5 districts57 | - | - | - | - | - | - | 1 | - | - | - | - | - | 1 |
24 | Seun 6-2-8 district58 | - | - | - | - | 1 | - | - | - | - | - | - | - | 1 |
25 | Sejong-ro 2 district9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26 | Sinmun-ro 2-ga 91-460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27 | Waryong-dong 13161 | - | - | - | - | - | - | - | - | - | - | - | 1 | 1 |
28 | Changgyo 4 district62 | - | - | 1 | - | - | - | - | - | - | - | - | - | 1 |
29 | Changgyo-dong 45-1163 | - | - | - | - | 1 | - | - | - | - | - | - | - | 1 |
30 | Changch’ung- dong 2-ga 20264 | - | - | - | - | - | - | 1 | - | - | - | - | - | 1 |
31 | Ch’angsin-dong 693-365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32 | Ch’ŏngjin 1 district66 | 1 | - | - | - | - | - | 1 | - | - | - | - | - | 2 |
33 | Ch’ŏngjin 2~3 districts67 | 4 | - | - | - | - | 1 | 7 | 2 | 1 | - | - | 1 | 16 |
34 | Ch’ŏngjin 5 district68 | 2 | - | - | 1 | - | - | 1 | 2 | - | - | - | 1 | 7 |
35 | Ch’ŏngjin 8 district69 | 1 | - | - | 1 | - | - | 3 | 1 | - | - | - | 3 | 9 |
36 | Ch’ŏngjin 12~16 district70 | 11 | - | 1 | 2 | 1 | 1 | 12 | - | 1 | 2 | 1 | 4 | 36 |
37 | T’ongŭi-dong 35-3271 | - | - | - | - | - | - | 1 | 1 | - | - | - | - | 2 |
38 | Hyoje-dong 175-372 | 1 | - | - | - | - | - | - | - | - | - | - | - | 1 |
Subtotal | 45 | 1 | 3 | 9 | 3 | 5 | 47 | 10 | 2 | 3 | 2 | 13 | 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