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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한양도성 내 ‘天·地·玄·黃’명 백자와 조선 전기 청화백자 출토 양상*

Abstract

경기도 광주(廣州)의 관요(官窯)는 백자가 조선시대 도자문화의 핵심으로 자리하도록 준수한 품질의 백자를 매년 생산하여 한양도성(漢陽都城)의 궁궐과 각종 관청에 제공했다. 관요 백자는 한양도성의 궁궐과 관청은 물론 매우 다양한 권역에서 소비되었다. 한양도성에 자리하는 87곳의 유적에서 조선 전기 대표적인 관요 백자인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었다. 관요 백자가 출토된 유적은 종로대로 주변 같은 서울 구도심의 핵심부를 필두로 비교적 광범위한 권역에 자리한다. 관요 백자가 한양도성 내 여러 유적들에서 출토되는 것은 관요 백자가 사옹원(司饔院)이 담당했던 다양한 업무에 포괄적으로 사용된 일종의 소모품이었기 때문이다. 관요를 통한 백자의 지속 생산은 한양도성 내 백자의 지속 소비를 가능하게 했고, 조선 전기 백자문화의 성장에 중요한 동력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그에 반하여 조선 전기 관요의 청화백자는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특정 계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한양도성에서 이루어진 500여 건의 발굴조사 가운데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된 유적은 38건에 불과하며, 출토된 유물도 143점으로 매우 소량이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한양도성에서도 청진동과 공평동처럼 종친이나 외척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다수는 전접시와 항아리이며 공사(公私) 간에 주기(酒器)로 적극 활용된 전접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문양이 장식되었으나, 각종 연회에 의례기로 사용되거나, 성균관(成均館) 등 공적 공간을 장식하는데 활용된 항아리에는 주로 세한삼우문(歲寒三友紋)이나 운룡문(雲龍紋) 등 일정한 소재의 문양이 집중적으로 장식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Abstract

The royal kilns in Kwangju, Kyŏnggi-do, produced a large number of white porcelain every year to provided them to the palace and government offices in Hanyang, the capital city of Chosŏn, and white porcelain became the dominant ceramic of the Chosŏn Dynasty. The white porcelain from the royal kilns were used in the palace, government offices, and many different places in Hanyang. In Hanyang area, white porcelain with the inscription ‘天·地·玄·黃,’ which are the most representative of the royal kilns, were excavated from 87 sites. The sites appear all around the city though most are concentrated in the original city center, such as today’s Chongnodaero. White porcelain shards are found in many excavation sites in Hanyang as they were widely used for many duties of Saongwŏn, the Royal Cuisine Office. The continuous production of white porcelain in the royal kilns meant that it was always available in Hanyang, resulting in the development of white porcelain culture in early Chosŏn.
On the other hand, blue and white porcelain made in the royal kilns were only used by the royal family and a select few in early Chosŏn. Of 500 excavation sites in the capital city, only 143 pieces of blue and white porcelain were found in 38 sites. Early Chosŏn blue and white porcelain pieces were mostly discovered in Ch’ŏngjin-dong and Kongp’yŏng-dong where the residences of the king’s or the queen’s family and relatives were located. Majority of the items are rimmed dishes and jars. Rimmed dishes were generally used for alcohol and decorated with a variety of motifs, but as jars were made for official banquets or to decorate public establishments such as Sŏnggyun’gwan, the National Confucian Academy, their decorations were limited to certain designs — such as the motif of the Three Friends of Winter or dragon and cloud design.

Ⅰ. 머리말

조선시대 관요(官窯)에서 생산한 백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의 궁궐과 각종 관청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했던 그릇이자 공예품이었다.1 관요 백자의 최대 소비지는 한양도성이었으며, 도성은 조선시대 백자문화가 형성, 확산한 주무대(主舞臺)였다.2
한양도성에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와 도성 자체를 운영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인원들이 거주했다. 도성은 대소신료, 각종 장인, 상인, 군인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활동 공간을 달리하며 한정적인 범위에 함께 살았던 곳이다. 조선시대 지방 도시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황이 비슷했다. 그러나 한양도성에서 출토되는 백자의 품질과 구성은 외방의 여느 도시에서 확인되는 사례와 큰 차이가 있다. 조선 전기 관요의 명문백자들은 지방에서도 소량 출토되었으나,3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대부분 한양도성에서만 확인된다.4 이러한 한양도성의 관요 백자 소비 집중화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별도의 연구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전기 관요에서 만든 명문백자나 청화백자는 명문의 의미나 개별 유물별 특징을 고찰하는 과정에 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5
조선 전기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성장한 백자문화의 특징과 관요 백자 소비양상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한양도성에서 확인되는 조선 전기 중요 관요 백자의 전체적인 출토 위치와 범위를 실증적으로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6 물론 서울 시내에서는 최근에도 다수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종합적인 결과를 도출하기에 다소 이른 감도 있다. 그러나 지난 이십여 년간 이루어진 발굴조사 성과는 종로대로 주변을 중심으로 한양도성 내 전역(全域)을 포괄한다.7 덕분에 한양도성의 백자문화를 보다 풍성한 자료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기반이 차츰 마련되고 있다.
이번 논문은 조선 전기 한양도성에 집중된 관요 백자의 소비 양상을 보다 가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초석 마련의 성격을 지닌다. 목적의 구체화를 위해 조선 전기 관요에서 제작된 것이 분명한 ‘天·地·玄·黃’명 백자와 청화백자의 출토 위치를 종합하고 그 의의를 추론해 볼 것이다. 동시에 조선 전기 도성 위주로 국한된 소비 범위를 나타내는 청화백자의 기종 및 문양 구성도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조선 전기 백자의 위상 강화와 관요

조선 왕실이나 사대부 사회에서 백자의 위상이 한 단계 성장했던 것은 1440년대의 일로 이해되고 있다.8 특히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1447년(세종 29) 문소전(文昭殿)과 휘덕전(輝德殿)에서 사용되던 은그릇을 백자기(白磁器)로 대신했다.9 이는 당시 조선의 백자문화 성장을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왕실은 1440년대 초반에 이미 전국 단위로 백자 생산지를 마련해서 우수한 품질의 백자를 확보하고자 했다. 1442년(세종 24)부터 1447년(세종 29) 사이 고령현감(高靈縣監)을 지낸 김숙자(金叔滋, 1389~1456)의 행적에도 당시 경기도 광주(廣州), 전라도 남원(南原), 경상도 고령(高靈)이 백자를 진헌(進獻)했던 사실과 제품의 품질이 좋지 않을 때는 각 관리가 힐책 받았음이 기록되어 있다.10
1450년대에는 왕실 핵심 인물의 지석(誌石)이 청화백자로 제작되기도 했다.11 그전까지 명나라 황실의 선물 등으로 청화백자를 확보했던 조선 왕실은 1450년대를 지나며 필요한 쓰임에 맞게 일부 청화백자를 직접 제작했다. 그러나 청화백자는 중국이 수출을 통제하기도 했고,12 제작에 필요한 안료 또한 중국에서 전량 확보해야 하는 귀한 그릇이었으므로 조선 전기 국내에서는 오직 관요에서만 만든 한정된 물품이었다.13 그러므로 조선 전기 관요의 청화백자는 왕실을 중심으로 일부 국한된 계층이 주로 사용했던 귀한 그릇이자 공예품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왕실을 중심으로 백자의 사용은 증가했고, 1466년(세조 12)에는 정부 차원에서 백자를 진상 물목으로 한정하고 생산에 필요한 백토(白土)와 장인에 대한 전국적인 통제를 시행했다.14 이러한 조치를 기반으로 조선 정부는 1467년(세조 13) 무렵 경기도 광주의 자기소(磁器所)를 관요로 삼아 사옹원(司饔院)이 필요한 그릇을 백자 위주로 생산했다.15
관요 백자의 생산과 소비가 확대됨에 따라서 생산품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릇 가운데 일부에 명문이 표시되었다. 관요 백자의 관리를 위해 본격적으로 활용된 명문은 ‘天·地·玄·黃’과 ‘大·中·世·處’로 나뉘었다.16 최근 이루어진 관요 가마터에 대한 발굴조사 성과를 감안하자면 ‘天·地·玄·黃’명이 표시된 백자는 1480년대 이후 1560년대까지 지속 생산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17 관요 성립 이후 사옹원과 내수사(內需司)가 관여했던 자기 생산은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 시절 정책 변화를 맞이했고, 내수사 주도로 제작되던 ‘大·中·世·處’명 백자는 생산이 중단되는 것으로 사료된다.18 이 논문에서는 최근 연구 성과를 감안하여 관요 성립 이후 일정한 기간 동안 한양도성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된 ‘天·地·玄·黃’명 백자의 출토 위치를 통해 당시 관요 백자의 소비가 실제 이루어진 최소 범위를 가늠하겠다.19 또한 조선 전기 관요에서 만든 청화백자의 출토 위치와 함께 기종과 문양을 파악하여 조선 전기 최고급 관요 백자의 한양도성 내 출토 양상을 구체적 자료로 제시하겠다.
조선 정부가 백자를 왕실과 관청용 그릇으로 삼아 매년 일정 규모로 지속 생산하고 또한 적절하게 제공될 수 있도록 통제한 것은 백자문화가 그만큼 조선 사회에 포괄적으로 확산할 수 있는 중요 기반으로 작용했다. 관요의 성립과 안정화는 조선 왕실의 순항(順航)과 결부된 일이며 동시에 조선의 백자문화가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선명하게 확대될 수 있는 실질적 결과로 이어졌다.20

Ⅲ. 도성 출토 ‘天·地·玄·黃’명 백자

한양도성의 여러 발굴조사에서는 관요가 마련되기 이전에 제작된 백자들도 출토되고 있다. 관요 성립 이전에 제작된 명문백자 가운데 지명(地名)이나 관사명(官司名)이 표시된 사례들은 여러 지방에서 분청자들과 함께 공납된 자기였다. 이와 함께 관요 설치 이전 경기도 광주에서 제작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 명문백자들도 소량 출토되었다.21 관요 성립 이전에 만들어진 명문백자들은 대체로 경복궁(景福宮) 인근이나 청진동과 세종로 일원에 해당하는 육조거리 주변 등 한정된 권역에서 일부 출토되었다. 해당 지역은 국초에 여러 관청이나 왕족과 사대부 관료들의 주거지가 밀집했던 곳이다. 반면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된 유적은 총 87곳에 달하며, 경복궁과 청진동 일대는 물론 도성 내 여러 권역에 분포한다(Fig. 1).22 같은 유적에서 4개의 자호(字號)가 각기 표시된 백자들이 모두 출토하는 것도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출토 양상이다(Fig. 2).23
‘天·地·玄·黃’명 백자는 주로 청계천 이북 지역에서 다수 확인된다. 특히 육조 거리 좌우에 해당하는 청진동 및 공평동과 세종로 지역을 중심으로 신문로 일대와 종묘(宗廟) 및 창덕궁(昌德宮) 동쪽에서 ‘天·地·玄·黃’명 백자가 여러 점 출토되었다. 청계천 이남에서는 장교 지역을 중심으로 영희전(永禧殿)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해당 유물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된 지역 가운데 일부는 조선시대 별궁(別宮)과 궁가(宮家)들이 자리했던 곳으로 파악되고 있다.24
한양도성에서 ‘天·地·玄·黃’명 백자가 보고된 유적은 대부분 조선 전기 그 자리에 거주했던 인물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관요 설치 이전에 제작된 명문백자 출토 지역에 비하여 휠씬 광범위한 지역에서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天·地·玄·黃’명 백자가 제작되던 1480년대에서 1560년대 사이에는 조선 정부가 공급한 백자의 사용 범위가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일 것이다. (Fig. 1)을 통해 당시 소비된 관요 백자의 양적 증가 정도를 일정 기간별로 파악할 수는 없으나, 관요 성립 이전에 비해 확산된 명문백자의 소비 범위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관요 설치 이후 매년 일정한 수량의 백자들이 궁궐과 관청에 공급되었다는 것은 궁궐과 관청이 자리하는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백자의 소비가 점차 확산된 직접적인 배경이었다. ‘天·地·玄·黃’명 백자와 외관상 별 차이가 없지만 명문이 없는 관요산 양질 백자들 역시 서울 시내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다.25 그러므로 지도에 표시된 관요 백자의 사용범위는 당시 이루어졌던 실제 관요 백자 소비 범위의 최소인 것이다.
한양도성에서 출토된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된 유적은 경복궁 및 주변 지역과 시전행랑(市廛行廊)의 북쪽에 위치하는 청진동과 공평동 인근에 집중되어 있다. 청진동과 공평동 지역에는 종친(宗親)이나 척신(戚臣)의 저택들이 다수 입지 했었고, 실제 다음 장에서 살펴볼 조선 전기 청화백자들 또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해당 지역의 유구 및 유물 출토 양상은 한양도성 내 다른 지역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청진 12~16지구 유적의 중앙부 북쪽에서는 박석(薄石)이 포장된 동서 방향의 도로가 확인되었다(Fig. 3). 한양도성 내 이면도로 가운데 돌로 포장된 길은 매우 드물다. 이처럼 특별한 도로가 마련된 이유는 물론 우기(雨期) 등에 도로가 진흙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하지만 한양도성 내 대부분의 길이 비가 오면 질척여 통행이 불편한 비포장임을 고려하자면, 주로 궁이나능에 설치했던 박석을 청진동과 공평동을 연결하는 이면도로에 깔아 통행을 원활하게 했던 것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지위를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26 조선 시대 도성의 왕족들이 거주하는 궁가와 일부 사대부 거족(巨族)의 저택은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의 연계를 바탕으로 하인 등 여러 권속들의 집까지 더해진 일정한 세거지(世居地)의 중심으로 자리했다.27 이러한 혈연 위주의 공동체가 다수 들어섰던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청진동과 공평동이다.28
조선 전기를 지나면서 도성 내 ‘天·地·玄·黃’명 백자의 소비 권역은 청계천 이남까지 확대했다. 이러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도성의 남단부에 자리하는 중구 장충로 2가 202번지 유적이다. 현재 신라호텔 부지 내에 자리하는 유적에서는 여러 점의 ‘天·地·玄·黃’명 백자와 함께 굽 외측면에 한자 ‘金司僕宅’명과 한글 ‘김사복댁’명이 함께 점각된 <백자병편>이 출토되었다(Fig. 4, 5).29 <백자병편>의 조형 및 번조 특징 등을 고려할 때, 해당 유물 역시 ‘天·地·玄·黃’명 백자들과 함께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유물이 확인된 유적은 사복(司僕) 벼슬의 사대부 김씨의 집이거나 김사복 집안과 음식이나 그릇을 왕래한 또 다른 사대부의 주택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 확보한 고고학 자료만으로는 해당 유물의 소유자를 특정할 수 없어도, 적어도 중구 장충로 2가 202번지 유적의 유물 출토 사례를 통해 관요 백자들이 사대부 관리의 거처에서도 포괄적으로 활용되고 있었음은 파악할 수 있다.30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된 유적의 위치를 살펴보면 궁궐이나 관청 이외 여러 권역에서 ‘天·地·玄·黃’명 백자가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궁궐이나 육조거리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유적에서도 관요의 명문 백자가 출토된다는 것은 관요 백자가 공공의 영역을 넘어 일부 도성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적극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옹원은 궁궐에서 이루어지는 음식 사무를 총괄했으므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국가에서 음식이나 그릇을 제공받은 사대부 관료들 위주로 사옹원의 백자를 개인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대부 관리들이 사옹원에서 받은 음식을 담았던 식기를 정부에 꼭 반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관요는 사옹원 업무에 필요한 백자를 일종의 소모품으로서 매년 생산했던 것이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조선 전기 도성 내 양질 백자의 소비를 촉진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양질의 관요 백자에 대한 당대의 수요 확대는 일부 관요 백자의 사취(私取)나 사번(私燔)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비공식적인 경로로 한양도성에 유입된 관요 백자의 확보 또한 주로 사대부 관료층을 위주로 행해졌을 것이고, 민간까지 확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측면 역시 조선 전기 도성 내 관요 백자 출토량과 지역의 확대를 야기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31

Ⅳ. 도성 출토 조선 전기 청화백자

‘天·地·玄·黃’명 백자와 함께 한양도성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관요 백자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청화백자이다. 전국적으로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되는 유적은 대부분 한양도성 내부에 국한되며,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는 유적에 비해 훨씬 한정된 권역에 자리한다(Fig. 6). 현재까지 파악한 한양도성 출토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총 38개 유적에서 확인된 143개체이다(Table. 1).32 그 가운데 잔편 13점은 기종을 파악하기 어려워 ‘기타’로 분류했으며,33 나머지 130점은 11가지 기종으로 구분했다.34
한양도성 내 유적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한 것은 전접시로 총 47점이 출토되었고, 다음으로 항아리가 45점 보고되었다. 한양도성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 가운데 92점이 전접시와 크고 작은 항아리에 해당하며, 이는 전체 출토량의 약 64%에 이르는 숫자이다.73 항아리로 구분한 45점은 주로 입호(立壺)이며, 작은 항아리[小壺]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전접시와 항아리 다음으로 많은 수량이 출토된 기종은 뚜껑과 잔이다. 뚜껑은 대부분 항아리와 짝을 이루었을 것이다. 잔으로 구분한 유물은 쌍이잔(雙耳盞)으로 추정되나 이(耳)의 부착 여부를 파악할 수 없는 사례도 포함하고 있다. 쌍이잔이나 잔, 고족배, 화형잔 등 술잔에 해당하는 그릇은 총 17점이 확인되었다. 잔받침으로 활용되었을 전접시의 출토량이 잔류의 2.5배가 넘는 47점인 것은 주목되는 현상이다.74 술잔보다 잔받침이 월등하게 많이 출토된 원인은 한양도성의 유적에서 금속이나 옥 등으로 만든 술잔도 함께 출토되는 상황과 조심스럽게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75 한양도성에서 확인되는 조선 전기 청화백자 가운데 주기(酒器)로 구분 가능한 전접시와 여러 가지 잔의 출토량은 총 64점으로 전체 출토량의 약 45%에 해당한다.76 전체 출토량의 근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각종 잔들과 전접시가 다수 출토된 것은 술그릇의 경우는 관원(官員)들도 청화백자를 사용할 수 있었던 법적 조치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고 사료된다.77
한양도성에서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된 유적은 경복궁과 그 주변 지역을 비롯하여 시전행랑의 북쪽에 위치하는 청진동 및 공평동 인근과 청계천 이남의 장교 지역을 중심으로 영희전 부근까지 집중되어 있다. 청진동과 공평동 등지의 일부 유적을 제외하면 그 외 유적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수량은 극히 적다.78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국한된 소비처인 한양도성에서도 일부 한정된 권역에서만 집중적으로 소비되었던 것이다. 다수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청진동과 공평동 일원에는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족과 척신의 저택이 다수 자리했었고, 실제 매우 다양한 조선 전기 청화백자들이 출토되었다(Fig. 7, 8).
이러한 지역의 소비 양상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개별 필지에서 출토되는 특정 유물의 특징을 부각하는 것보다 권역별로 확인되는 유물의 특징을 거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79 이 두 지역에서는 총 96점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되었으며, 이 수량은 한양도성에서 확인된 전체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약 67%에 해당하는 높은 수치이다. 청진동과 공평동 거주자들의 인적 구성은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었으며, 이는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한정된 계층에서 사용했던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해당 지역에서 다수 출토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출토 양상이 특정 지역 위주로 편중된 것은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소비 집중화 현상에 따른 결과이며, 이 역시 당시 한양도성 백자문화의 특징에 해당한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되는 유적의 분포는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는 유적에 비해서도 보다 한정되고, 빈도수 역시 크게 낮다. 반면,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되는 유적에서는 대부분 ‘天·地·玄·黃’명 백자를 비롯한 다량의 관요산 순백자가 출토된다(Fig. 9). 경기도 광주에 자리하는 조선 전기 여러 관요 가마터에서 보고된 청화백자의 수량 역시 순백자의 생산량을 감안하자면 미미한 수준이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天·地·玄·黃’명 백자처럼 일정 수량이 지속적으로 생산된 물품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조선 전기 관요에서 제작한 청화백자는 생산 수량 자체가 적었으므로, 왕실 등 상대적으로 국한된 계층 위주로 소비되었을 것이다.80 서울 시내에서 출토된 청화백자들 역시 대부분은 해당 유물이 출토된 바로 그 필지에 거주했던 인물의 소유물이라기보다 해당 권역을 점유했던 궁가 및 일부 사대부 집안의 핵심 인물들이 주로 사용했던 그릇이나 공예품으로 구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81
전국에 걸친 유물 출토 양상을 고려할 때,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소비는 한양도성에 집중되며 그 가운데서도 일부 권역에 치우친 현상이었다. 이처럼 분명한 소비 집중화의 결과물인 조선 전기 청화백자에 장식된 대표적인 문양은 세한삼우(歲寒三友) 계통의 매죽문(梅竹紋)이나 화당초문(花唐草紋)이며, 운룡문(雲龍紋), 어조문(魚藻紋), 시문(詩紋) 또한 출토 비율이 높은 편이다.82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왕실을 중심으로 분명한 소비 권역을 드러내는 유물인 만큼 해당 유물에 장식된 문양 역시 당시 조선 왕실을 필두로 일부 상층 사대부들이 선호했던 소재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 속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시적인 접근이 요망된다. 이를 위해 한양도성 출토 조선 전기 청화백자 가운데 약 64%를 차지하는 전접시와 항아리 두 기종의 문양을 각각 파악해 보았다(Table 2, 3).
전접시의 문양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시문이다. 전접시에 시구(詩句)가 장식된 사례는 10점으로 전체 출토량의 약 21%를 차지하며, 어조문, 매화문, 화당초문이 장식된 전접시는 각 7점으로 각각 전체 출토량의 약 15%에 해당한다. 한양도성 출토 조선 전기 청화백자 전접시의 문양 가운데 약 66%가 시문, 어조문, 매화문, 화당초문인 것이다. 그 밖에도 화문(花紋), 화조문(花鳥紋), 인물문(人物紋), 파도문(波濤紋), 용문(龍紋), 포도문(葡萄紋), 명문(銘文) 등이 소량 출토되었다. 이후에 살펴볼 항아리에 비해 전접시는 그릇에 장식된 문양 소재가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이는 전접시가 술잔 받침으로 활용된 용도와 연계된 특징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공사(公私) 간의 여러 연회에 주기로 활용된 전접시의 문양은 다양한 환경에서 포괄적으로 사용된 그릇의 쓰임에 비례하여 술을 예찬하는 시(詩)부터 화훼와 과일, 화조와 인물은 물론 용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반면에 한양도성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 항아리를 장식한 문양 종류는 전접시에 비해 단조로운 편이다. 항아리의 문양 가운데 매화, 대나무, 매화와 새 등의 매죽문 계통으로 구분 가능한 경우는 총 16점이다.83 원래는 송죽문(松竹紋)이나 송하인문물(松下人物紋)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송문(松紋) 6점까지 합하면 총 22점의 유물이 세한삼우(歲寒三友) 계통의 문양으로 구분된다. 해당 문양은 전체 출토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다.84 송죽매(松竹梅) 세한삼우는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가 선호했던 대표적인 회화 소재였으며, 조선 전기 청화백자에도 적극 활용된 문양이었다.85 조선 전기 사대부들이 선호했던 그림의 소재가 당대 제작된 청화 백자 가운데 특히 항아리에 다수 장식된 것은 조선 전기 일부 청화백자 항아리가 감상의 대상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성종실록』의 기록처럼 일부 청화백자 항아리는 ‘상설관미(常設觀美)’를 위한 공예품으로 기능했다.86 장식용 항아리의 문양으로 당시 지배층이 선호했던 세한삼우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음으로 많은 수량이 확인된 문양은 운룡문으로 9점이 출토되었고, 주로 보상화로 구분 가능한 꽃과 넝쿨로 이루어진 화당 초문은 6점이 보고되었다. 그 외 연화문(蓮花紋)이 2점, 송하인물문과 어조문이 각 1점씩 확인되었다. 기타로 구분한 4점은 파도문이 장식된 항아리 저부편 3점과 외면에 운문(雲紋)이 장식된 구연부 1점에 해당한다.87 조선 전기 청화백자 항아리의 중요 문양은 세한삼우 계통의 문양과 운룡문, 화당초문 등이다. 이상 3종의 문양이 장식된 항아리는 37점으로 전체 출토량의 약 82%에 이르는 높은 출토량을 보인다.
한양도성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 항아리의 문양을 종류별로 나누어보면, 운룡문, 세한삼우 계통, 화당초문, 어조문 등 크게 네 가지 정도에 그친다. 송하인물문을 세한삼우문 계통에 포함하지 않고 별도의 문양으로 구분하더라도 전체 문양은 다섯 종류로 다소 제한적이며, 세한삼우문이나 운룡문 등 특정 문양의 점유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반면 전접시에 장식된 문양은 12종으로 항아리를 장식한 문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하며, 주류는 이루는 문양의 종류도 시문, 어조문 등으로 항아리를 장식된 중요 문양과 선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양 기종 사이의 차이점은 그릇이 실제 사용된 환경이나 용도에서도 일정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 항아리가 왕실의 여러 의례는 물론 순수 감상 목적의 장식용 공예품으로도 사용된 것에 비해, 전접시는 보다 개인적인 환경에서 사용이 가능한 술그릇이었기 때문에 두 기종 사이에 장식되는 문양의 종류와 빈도에서 차이가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88 요컨대 술잔 받침으로 사용된 전접시의 다양한 문양은 술자리의 여흥을 더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기종 간에 나타나는 중요 문양의 차별화는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소비상황을 이해하는 과정에 부각될 필요가 있는 특징이다.89

Ⅴ. 맺음말

이 연구는 조선 전기 대표적인 관요 백자인 ‘天·地·玄·黃’명 백자와 청화백자의 한양도성 내 실제 출토 상황 전체를 점검한 최초의 시도이다. 연구를 통해 궁궐 및 관청 이외에도 여러 궁가들이 자리한 권역을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유적들에서 ‘天·地·玄·黃’명 백자를 비롯한 다량의 관요 백자가 출토되었음을 확인했다. 이처럼 관요 백자가 여러 유적들에서 출토된 것은 조선시대 관요에서 매년 일정한 제품을 만들어 도성에 지속적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관요를 통한 백자의 지속 생산은 한양도성 내 백자의 지속 소비를 가능하게 했고, 조선 전기 한양도성의 일상에서 백자의 비중이 점차 확대될 수 있었던 실질적인 토대가 되었다. 한양 도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자의 소비 흐름은 조선 전기를 지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관요에서 만든 백자들 역시 도성을 넘어 지방에서도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도성에서도 청진동과 공평동 등 특정 권역을 중심으로 한정된 권역 위주로 소비되었던 것을 출토 양상을 통해 파악했다. 조선 전기 백자 소비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관요에서 만든 청화백자의 소비는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일부 계층에 국한되어 이루어졌으며, 이는 안료 수급의 한계와 법적 규제 등으로 조선산 청화백자는 주로 왕실 의례품이나 관료 계층의 술그릇 위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연구는 ‘天·地·玄·黃’명 백자가 도성 내에서 유통되는 과정을 단계별, 지역별로 고찰하지 못했다. 또한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세부 기종별 문양 특징 파악이나, 개별 청화백자 출토품의 제작 시기 구분을 통한 시기별 기종 및 문양 구성의 변화상도 구현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신 다소 막연하게만 접근해왔던 조선 전기 한양도성의 관요 백자 출토 상황을 구체적인 수치와 출토 범위 확보를 통해 가시적으로 가늠했다는 점에 이 글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이번에 확보된 정보들이 차후 조선 전기 관요 백자 연구에 있어서 구체적인 논거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Notes

1) 조선시대 관요 설치는 하나의 시점으로 설정되기보다 1467년(세조 13)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pp. 28-33. 최근 이루어진 관요에 대한 종합연구는 김귀한, 「15~17세기 조선 관요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0).

2) 이 글에서 사용한 ‘한양도성’은 약 18.6km의 성곽 구간 내부를 의미한다.

3) 일본 교토(京都) 지역 출토 사례를 포함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남, 제주 등 전국 20여 개 유적에서 조선 전기 관요 명문백자가 출토되었다. 단위 유적별 출토량은 매우 적은 편이며, 유적은 소수의 분묘 및 1개소의 가마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관청지에 해당한다. 관련 내용은 박정민, 앞의 논문, pp. 182-190.

4) 현재까지 한양도성 이외 지역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대부분 분묘에서 확인된 지석(誌石)이다. 분묘 이 외 건물지에서 그릇으로 제작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된 사례는 서울 수서동 유적의 <백자청화운룡문항아리편>과 <백자청화포도문동체부편>이 대표적이다. 그 외 충청남도 홍성군 자경리 유적의 Ⅱ-B지점 조선시대 4호 토광묘에서도 <백자청화국화당초문쌍이잔>이 출토되었다. 백제문화재연구원, 『홍성 신경리 자경동 유적 발굴조사보고서』 (2012), p. 97;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 수서동 유적』 (2015), pp. 185-187. 추가 유물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많은 발굴 사례를 파악하고 있다.

5) 최근 한국도자사 분야에서 조선 전기 관요 관련 연구는 상대적으로 다수의 성과를 이루었다. 해당 분야의 연구 특징에 대해서는 김윤정, 「21세기 도자사 연구의 확장과 다변화」, 『미술사학』 44 (2022. 8), pp. 280-281. 이러한 흐름을 강화하는 과정에 한양도성의 발굴조사 성과도 적극 활용되는 추세다.

6) 선행연구들은 주로 한양도성 출토 조전 전기 청화백자의 수량을 파악하여 연구에 활용했다. 윤효정,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장식특징」, 『조선백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15), p. 249, 표 1; 김혜정, 「조선 전기 청화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p. 105, 표 5.

7) 필자는 이 글의 작성을 위해 1985년에서 2023년 5월 사이에 발간된 한양도성 내 발굴조사 보고서 508권의 내용과 효제동 175-3 유적, 공평 15·16지구 유적, 덕수궁 월대지 유적 등 3개 유적에 대한 약식보고서를 점검했다. 1990년대 이전에 발간된 보고서 가운데 일부 확보하지 못한 사례가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궁궐 권역에서 이루어진 문화재 정비를 위한 시굴 조사이다. 궁궐 유적들은 이미 (Fig. 1)의 지도에 표시되었으므로 현재 파악된 내용만으로도 한양도성 내 ‘天·地·玄·黃’명 백자와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출토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작성을 위해 분석한 발굴조사 보고서들은 지면의 한계로 일일이 제시하지 못했고, 본문의 논지 전개에 직접 활용한 발굴조사 보고서만을 각주와 참고문헌으로 제시한다. 고찰 대상에 포함한 약식보고서는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효제동(175-3번지 일원)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1); 동저,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나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가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시공문화재연구원, 「서울 덕수궁 월대 재현공사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22) 등이다. 이번 연구에 도움을 준 수도문물연구원과 한울문화재연구원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8) 조선시대 백자의 변천을 시기별로 고찰한 선행연구에도 백자의 활발한 사용은 세종 말년에 이르러 가능했음이 강조되어 있다. 윤용이, 『한국도자사연구』 (문예출판사, 1993), p. 328.

9) 『世宗實錄』 116卷, 29年(1447) 6月 4日. “傳旨禮曹 文昭輝德殿所用銀器 自今代以白磁器.”

10) 김숙자가 고령현감을 지낸 기간은 다음의 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佔畢齋集』 彝尊錄上 先公紀年第二. “… (전략)正統七年壬戌二月…(중략)…出爲高靈縣監…(중략)…正統十二年丁卯十月…(중략)…復爲成均注簿兼南學敎授官(후략)…” 1440년대 고령을 비롯한 광주, 남원 등 외방의 백자 진헌 고을에 대한 내용은 『佔畢齋集』 彝尊錄下 先公事業第四. “高靈歲貢白砂器 工人用功 甚鹵莽 故器多若窳 官被詰責…(중략)…居廣州南原之右先是每進獻 二邑之工受賞 縣工多得罪. 今縣工得賞 而二邑之工 反受譴 至今賴之.” 『佔畢齋集』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 수록 내용을 활용했다.

11) 현재 국내에서 출토된 최고(最古)의 청화백자는 1456년(세조 2)에 제작된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장모 흥녕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 이씨(1383~1456)의 지석이다.

12) 『世宗實錄』 119卷, 30年(1448) 3月 3日. “傳旨禮曹 聞中朝禁靑花磁器 賣與外國使臣 罪至於死. 今後赴京及遼東之行 貿易磁器 一皆禁斷.”

13)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제작이 다소 한정적이었던 상황은 실제 15세기 후반까지도 일부 장인이 청화 안료를 원숙하게 다루지 못했던 상황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成宗實錄』 95卷, 9年(1478) 8月 11日. “…(전략)知事李克培啓曰 臣觀尙衣院用回回靑 其費甚廣. 以鐵椎碎其靑塊 取其中如粟粒者用之 通事張有誠謂臣曰 中國之人其用之 不如是 吾習而試之 可用. 請招有誠更問其法 令今之赴京畫工傳習. 上曰 可.”

14) 『世祖實錄』 39卷, 12年(1466) 6月 7日. “丙午 工曹啓 白磁器 除進上及已前燔造者外 自今公私 毋得用之. 違者竝工人 以制書有違律 科罪. 且勿定貢物 以防憑公私造之弊. 凡白土産出處 令所在邑 禁盜用 無遺錄簿 藏于本曹及承政院. 從之.”

15) 관요 성립 시점에 대한 종합 정리는 김귀한, 앞의 논문, p. 1, 각주 2.

16) 해당 명문들이 의미하는 바와 두 가지 명문이 관요 백자에 표시되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박정민, 「‘處’명백자를 통해 본 조선 전기 내수사(內需司)의 왕실용 백자제작」, 『야외고고학』 22 (2015. 3), pp. 53-74; 동저, 「조선 전기 관요 백자의 명문이 갖는 이원적 성격」, 『미술사학연구』 290·291 (2016. 9), pp. 67-93. 이번 글의 중요한 목적은 한양도성 내 관요 백자의 출토 범위를 가시화하기 위함이다. 내수사 주도로 제작된 ‘大·中·世·處’명 백자는 출토 수량이 적고 출토 지역 또한 사옹원의 ‘天·地·玄·黃’명 백자 출토 범위 내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 글 본문에 제시된 관요 백자라는 개념은 사옹원은 물론 내수사 사기장이 제작한 백자를 모두 포괄하지만, 실제 출토 양상은 보다 포괄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天·地·玄·黃’명 백자를 통해 파악했음을 밝혀둔다.

17) 필자는 2014년 박사학위 논문 작성 과정에서 관요 백자에 ‘天·地·玄·黃’명이 표기되는 시점을 1470년대로 설정하였으나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했었다. 이후 경기도 광주 우산리 4호와 우산리 14호 등 여러 관요 가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김미소는 조사 내용을 통해 ‘天·地·玄·黃’명 백자가 148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구자는 1460~1470년대 운영된 것으로 파악된 우산리 4호 가마터에서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지 않았으나, 운영 시기를 1480년대로 구분한 우산리 14호 가마터에서 ‘天·地·玄·黃’명 백자가 확인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김경중이 작성한 해당 유적의 발굴조사 보고서에도 동일한 내용이 제시되었다. 필자 역시 현재까지 이루어진 발굴 성과를 토대로 주장한 내용의 타당성을 인정하므로 이 글에서는 해당 연구의 편년안을 따른다.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p. 130; 김미소, 「조선 초기 관요 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9), pp. 91-92; 김경중, 「가마의 운영 시기」,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보고서』 (2019), p. 460.

18) 관련 내용은 김귀한, 「조선 15~16세기 內需司의 왕실 관련 銘文磁器 생산과 한계」, 『중앙고고연구』 35 (2021. 6), pp. 83-106.

19) 한양도성에서 내수사 주도로 제작된 ‘大·中·世·處’명 백자가 출토되는 유적은 주로 경복궁과 창덕궁 주변에 자리한다. 해당 유물들은 제작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된 유적에서 대체로 함께 확인되어 별도의 출토 위치는 제시하지 않았다. 1560년대 이후 등장하는 ‘左·右’ 혹은 ‘別’명의 관요 백자가 출토된 유적 또한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된 유적의 위치와 대체로 겹친다. 물론 일부 유적에서는 ‘天·地·玄·黃’명 백자가 보고되었지만 ‘左·右·別’명 백자는 확인되지 않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16세기 후반 이후 도성 내 관요 백자의 사용범위가 축소 혹은 확대된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번 논문에서는 ‘天·地·玄·黃’명 백자와 ‘左·右·別’명 백자의 출토 양상을 비교하는 접근 대신에 ‘天·地·玄·黃’명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 관요 백자의 출토 권역을 가늠해 보았다. 간지명이 부가되지 않는 ‘左·右’명 백자의 제작 기간과 해당 유물이 출토되는 가마터들에 대해서는 김경중, 「16세기 중·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가마터 출토 명문백자를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15 (2012. 11), pp. 243-265. ‘大·中·世·處’명 백자의 도성 내 출토 위치 및 특징은 박정민, 위의 논문, p. 149.

20) 최근 관요 설치와 백자의 생산 수준의 발전을 정치사적으로 해석한 연구가 제기되었다. 연구자는 1467년(세조 13) 관요 설치가 세조 시절 군신(君臣) 간의 구분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주장했다. 김귀한, 「조선 세조~성종대 관요의 설치와 정비」, 『석당논총』 82 (2022. 3), pp. 277-304.

21) 관요 성립 이전 경기도 광주와 이외 지방에서 제작된 명문백자들에 대한 특징을 정리한 글은 박정민, 앞의 논문, pp. 44-79; 정담, 「15세기 후반 광주(廣州) 관영사기소의 자기 제작과 운영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8), pp. 78-102.

22) 지도에 표시된 유적들은 각주 7에 제시된 보고서들을 통해 파악한 것이다.

23) 최근 조사된 공평 15·16지구 유적에서도 다수의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었으며, 동일한 건물지에서 4개의 자호가 각기 표시된 백자가 모두 출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특징은 인근에 자리하는 청진동 일대의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출토 양상을 통해 보자면 ‘天·地·玄·黃’명의 의미가 사용처 구분과는 관계없음을 알 수 있다. 공평 15·16 지구 유적의 ‘天·地·玄·黃’명 백자 세부 출토 위치는 박정민, 「서울 공평 15·16지구 내 유적 ‘나’지역 출토 도자기의 면모와 특징」, 『2021 인사동 발굴 그 성과와 나아갈 길』 (국립고궁박물관·수도문물연구원, 2022), p. 47.

24) 한양도성 내 별궁과 중요 궁가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4대문안 문화유적 보존방안 연구』 2 (2011), p. 540; 최종규, 「서울 한양도성 안 별궁과 안국동별궁」, 『서울공예박물관 건립부지 내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 안동별궁』 (울산문화재연구원, 2019), pp. 152-154.

25) 이 글에서 사용한 양질 백자라는 단어는 관요에서 갑번(匣燔)으로 제작한 제품과 함께 갑발 없이 한 점씩 포개어 번조한 백자들을 포괄한다. 내저면에 포개구이한 흔적이 없고, 그릇의 백색도가 상대적으로 양호한 경우 양질 백자의 범주로 구분하였다.

26) 조선 전기 청진동에는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 평원대군(平原大君, 1427~1445)을 비롯하여 중종의 적장녀(嫡長女)인 효혜공주(孝惠公主, 1511~1531) 등 다수의 왕족이 거주했다. 청진 12~16지구 유적에 자리하는 박석길의 설치를 주변에 자리하는 궁가 및 어공각사(御供各司)와 연결시킨 연구로는 정정남, 「조선시대 壽進宮의 기능과 주변 박석[磚石]길의 의미해석」,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한국건축역사학회, 2011), pp. 175-180.

27) 실제로 같은 청진동에서도 지구별로 ‘天·地·玄·黃’명 백자의 출토량은 상이하다. 중요한 점은 ‘天·地·玄·黃’명 백자의 출토량이 반드시 유적의 면적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면적 2,400m2의 청진 5지구 유적에서는 총 12점의 ‘天·地·玄·黃’명 백자가 출토되었으나, 연접한 곳에 자리한 면적 1,921.9m2의 청진 17지구 유적에서는 해당 유물이 단 1점만 보고되었다. 이는 일정 권역 내에서도 관요 백자를 사용할 수 있는 인물들과 그렇지 못한 계층이 공존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번에 확보한 ‘天·地·玄·黃’명 백자의 출토 위치 정보에 각 유적별 출토 수량을 더한다면 ‘天·地·玄·黃’명 백자의 권역벽 소비 집중화 현상에 대한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단계적 접근을 통해 조선 전기 한양도성의 백자 소비 양상의 변화와 방향성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적의 면적은 한울 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1지구 유적』 Ⅰ (2011), p. 26; 불교문화재연구소, 『서울 종로구 공평동 유적: 청진 17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2016), p. 18.

28) 조선 전기 해당 지역에서 거주했던 대표적인 외척인 능성구씨(綾城具氏) 집안과 그들의 거주 위치 비정에 대한 연구는 배우성, 「종로 시전 뒷길의 능성구씨들」, 『서울학연구』 67 (2017. 5), pp. 137-169.

29) 해당 유적에서 출토된 ‘天·地·玄·黃’명 백자와 점각명 백자에 대한 고찰은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장충동2가 202번지 유적』 (2023), pp. 638-639.

30) 해당 유물에 표기된 명문을 통해 관요 백자가 개인 물품이 된 이후 각자의 일상에서 활용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사대부가에서 실제 그릇을 빌려오고 활용하는 과정은 하인들이 담당했을 것이므로, 최대한 여러 계층의 인물이 명문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자와 함께 한글로 내용을 부가했음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사대부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일기 『瑣尾錄』에는 임진왜란 기간 전쟁을 피해 지방에 거주했던 서울 사대부의 생활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 오희문은 시장에 술을 팔기 위해 이웃인 사과(司果) 벼슬의 정씨댁[鄭司果宅]에서 그릇을 빌렸다. 계집종 향비(香婢)가 실수로 빌린 그릇을 파손하자 오희문은 물건을 사다가 갚았다. 이런 상황은 일상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며, 개인이 소유했던 관요의 양질 백자에 표시된 주인 이름은 반납 과정이나 파손시 배상의 근거로 긴요하게 활용되었을 것이다. 『瑣尾錄』 卷2 癸巳日錄 閏11月 12日. “且昨日場市賣酒事 香婢與鄭司果宅婢墨介 酒八壺戴去 而中道墨介跌足踣地 並與盛缸而墜破 空還可笑. 缸則隣人之物 不得已買償.” 원문은 오희문, 『瑣尾錄』 卷7 교감표점본 1 (국립진주박물관, 2018), p. 294.

31) 조선시대 사대부 관료들에 의한 관요 백자 사번(私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종민, 「朝鮮 官窯에서의 私燔 실태와 영향」, 『역사와 담론』 86 (2018. 4), pp. 347-380. 해당 연구자는 관요 관리직에 의한 사적 침탈행위, 요장(窯場)의 생계형 생산, 하속(下屬)의 반사(班賜) 요구나 늑매(勒買) 등을 사번의 범주로 구분했고, 이러한 사번은 조선시대 관요 운영 시기 내도록 존재했음을 강조했다.

32) (Table. 1)의 수량은 각주 7에 제시된 보고서를 통해 파악한 내용에 한양도성에서 발견 신고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 2점을 추가한 것이다.

33) 기타로 구분된 유물들은 대체로 작은 파편이기 때문에 선명하게 기종을 구분하기 어렵다. 청진 5지구에서 출토된 기타 유물은 향로의 다리편에 해당할 것이지만 잔편이라 기타로 구분했다.

34) 보고서에 여러 점의 청화백자가 수록되었더라도 한 개체의 유물에 해당할 경우는 한 건으로 구분했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대체로 잔편이므로 기종 구분에 제시된 호는 크기와 형태에 따른 세분 없이 항아리 전체를 포괄했다. 한양도성 내 유적에서 출토된 일부 지석은 청화백자이지만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년(紀年) 근거가 없어 고찰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또한 명문이나 부호가 청화로 표기된 일부 유물도 고찰에 포함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를 주제로 이루어진 선행연구에서도 한양도성 출토 88점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양상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글은 선행 연구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 조사된 유물을 추가하고, 한 개체의 유물로 구분한 수량을 반영했으므로 선행연구와 유물 규모에 차이가 있다. 선행연구에 제시된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기종 및 문양별 수량은 김혜정, 앞의 논문, p. 105.

35) 국립문화재연구소, 『경복궁 발굴조사 보고서 協生門址, 營軍直所址·哨官處所址』 (2011), p. 94, 133.

36)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 군기시터 유적』 본문 (2011), p. 174, 175, 219, 220, 317, 322, 351, 352.

37) 시공문화재연구원, 「서울 덕수궁 월대 재현공사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22), p. 30, 80.

38) 울산문화재연구원, 『서울공예박물관건립부지 내 유적 안동별궁』 (2019), p. 128, 129.

39)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어영청지 유적』 (2011), p. 157, 175, 193.

40)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탑골공원 원각사지 시굴조사 보고서』 (2002), p. 61, 63, 75, 77, 138, 141.

41) 서울역사박물관, 『의정부지 발굴조사보고서』 (2020), p. 123, 127.

42) 서울역사박물관, 『종묘광장 발굴조사보고서』 (2012), p. 283, 305, 349; 한백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묘광장 어도복원구간 내 유적』 (2015), p. 55.

43) 한강문화재연구원, 『종친부터 유적』 (2013), p. 138, 139, 324.

44)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2·4지구 유적』 Ⅰ (2017), p. 253;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 1·2·4지구 유적』 Ⅱ (2017), p. 96, 233, 285, 409.

45)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나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2022), p. 118, 121, 124, 125, 126, 129, 141, 146, 147, 169, 170;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가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p. 175, 191, 198, 209, 211.

46) 국방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구 관수동 4·5·6번지 유적』 (2021), pp. 295-296.

47)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관수동 98-1번지 유적』 (2020), p. 229.

48) 1976년 해당 번지에서 발견된 <백자청화매죽문항아리편> (신수 3225)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9)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관철동 19-22번지 유적』 (2023), p. 86.

50)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낙원동 108-1번지 유적』 (2016), p. 86.

51)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돈의동 41-1번지 유적』 (2019), p. 176.

52)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 돈의동 170번지 유적』 (2014), p. 127.

53)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 Ⅰ (2011), p. 218, 355, 358, 361, 410;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Ⅱ(2011), p. 26, 28, 181, 200, 225, 285.

54)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중구 북창동 18-9번지 유적』(2017), p. 94.

55)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 서린동 유적』 (2012), p. 87, 88.

56)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 유적 Ⅱ: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3-1구역 시굴·발굴조사 보고서』 1권 (2021), p. 272, 273, 573, 594;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 유적 Ⅱ: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3-1구역 시굴·발굴조사 보고서』 2권 (2021), p. 917, 1294.

57)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 유적Ⅳ: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3-4, 5구역 시·발굴조사 보고서』 1권 (2022), p. 399, 400;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 유적Ⅳ: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3-4, 5구역 시·발굴조사 보고서』 2권 (2022), p. 990.

58)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세운 재정비촉진지구(6-2-8구역) 유적』 (2020), p. 73.

59)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세종로 구역 2지구 유적』 (2013), p. 246.

60) 고려문화재연구원, 『서울 신문로 유적: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구역 제5지구 문화재 발굴조사』 (2010), p. 57, 58, 75.

61) 백두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구 와룡동 131번지 내 문화재 발굴(시굴)조사』 (2017), p. 37, 38.

62)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중구 장교 4지구 유적』 (2015), p. 341.

63) 1976년 해당 번지에서 발견된 <백자청화‘太和盃’명화형잔>(신수 3306)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64)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장충동2가 202번지 유적』 (2023), p. 519.

65)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창신동 693-3번지 유적』 (2017), p. 77.

66)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1지구 유적』 Ⅱ (2011), p. 73, 187.

67)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2~3지구 유적』 Ⅱ (2013), p. 43, 51, 52, 54, 80, 84, 96, 119, 167, 175, 292, 361, 406, 407, 416.

68)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5지구 유적』 Ⅱ (2012), p. 107, 153, 182, 230, 233, 234, 244, 250, 293, 294, 295, 300, 304, 410, 459, 499.

69)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8지구 유적』 Ⅱ (2013), p. 171, 186, 197, 213, 219, 221, 224, 228, 283.

70)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 Ⅲ (2013), p. 246, 251, 322, 326, 351, 380, 420, 427, 439, 454, 455, 473, 474, 478, 554, 574, 587, 594, 624, 627, 635, 668, 689, 695, 703;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 Ⅳ (2013), p. 57, 61, 80, 146, 154.

71) 서울문화유산연구원, 『서울 통의동 35-32번지 유적』 (2013), p. 62, 113, 114, 197.

72)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효제동(175-3번지 일원)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1), p. 41, 44.

73) 선행연구는 전세유물을 비롯하여 생산지와 소비지 출토품을 포괄하여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기종 특징을 파악하였다. 선행연구 역시 조선 전기 청화백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한 것은 전접시이며 다음은 항아리라는 점을 지적했다. 윤효정, 앞의 논문, p. 249, 표 1.

74) 잔받침으로 사용된 전접시의 용도와 시기별 기형 변화 및 문양 특징을 고찰한 선행연구는 전승창, 「朝鮮前期의 白磁전접시 考察」, 『湖巖美術館 硏究論文集』 2 (1997), p. 127; 동저, 「15~16世紀 朝鮮時代 京畿道 廣州 官窯硏究」(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pp. 168-170; 윤효정, 「朝鮮 15, 16세기 靑畵白磁의 製作과 使用: 문헌자료와 요지출토품을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 250·251 (2006. 9), pp. 336-339; 김윤정, 「朝鮮初 酒器의 조형 변화와 원인」, 『강좌미술사』 37 (2011. 12), pp. 134-140; 송호진, 「조선 초기 청화백자전접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pp. 50-55; 김혜정, 앞의 논문, pp. 120-122.

75) 서울 시내에서 가장 많은 청화백자 전접시가 출토된 곳은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이다. 해당 유적에서는 <석제화형잔> (해당 보고서 유물번호: 1540)을 비롯하여 <동제잔> (해당 보고서 유물번호: 3344, 3345) 등 자기 외 다른 재질의 잔들이 출토된 바 있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12~16지구 유적』 Ⅲ (2013), p. 564; 동저,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 Ⅳ (2013), p. 581.

76) 물론 장군이나 항아리도 술을 담는 용도의 주기로 구분할 수 있겠으나, 저장기에 담기는 내용물을 술로만 한정할 근거는 불분명한 편이다. 이 글에 언급된 주기는 실제 술을 담고 술잔을 받치는 용도의 각종 잔과 전접시를 의미한다.

77) 『經國大典』 卷5, 刑典. “大小員人用…(중략)…酒器外金銀靑畵白磁器者[庶人男女則幷禁…(중략)…金銀靑畵酒器]…(중략)…杖八十.” 『경국대전』의 원문은 윤국일 역, 『新編 經國大典』 (신서원, 2005), pp. 432-435.

78) (Table. 1)에 제시된 38개 유적 가운데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1점 출토된 곳은 총 23개소로 전체의 약 61%이며, 2점이 출토된 유적은 5개소로 전체의 13% 정도이다. 74% 정도의 유적에서는 청화백자가 두 점 이하로 출토된 것이다. 3점 이상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된 26%의 유적은 대부분 청진동과 공평동에 자리한다.

79) 같은 청진동과 공평동 권역이라고 해도 세부 유적에 따라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출토량은 큰 차이를 보인다. 공평 제1·2·4지구 유적은 조사 면적 약 6,736m2에서 5점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출토했다. 반면 공평구역 제15·16지구에서는 조사 면적 11,023m2에서 21점의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보고되었다. 두 유적의 면적 차이는 2배이지만, 출토 유물은 4배 정도의 차이가 있다. 같은 공평동에 자리하는 유적이지만 청화백자의 출토 양상이 현저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부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해당 유적에 거주했던 인물들의 신분이나 위상 차이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전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조선 청화백자는 문헌 근거로 확인하기 어려운 유적별 거주인들의 신분 고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단초로도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조사지역 면적은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2·4지구 유적』 Ⅰ (2017), p. 34; 동저,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가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p. 3;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공평구역 제15·16구역 도시환경 정비사업부지(나지역)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p. 1.

80) 조선 전기 관요에서 제작한 청화백자는 안료 수급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왕실 의례용 그릇을 우선 생산하는 등 생산 수준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대신 도성 위주로 성장한 청화백자의 수요는 명나라에서 들여온 그릇을 통해서도 충족되었을 것이다. 실제 한양도성 내 여러 유적의 조선 전기 문화층에서는 조선 청화백자보다 훨씬 많은 수량의 명나라 청화백자가 출토되었다. 한양도성 내 명대 청화백자의 출토 양상에 대해서는 박정민, 「한양도성 내 조선 시대 유적의 시기별 중국 자기 출토 양상과 변화」, 『인문과학연구논총』 43-4 (2022. 11), pp. 265-271. 선행연구에 제시된 한양도성 출토 명나라 청화백자는 398점이며, 여기에 명나라 말기 청화백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명말청초 청화백자 147점을 합하면 총 545점에 달한다. 이는 조선 전기 조선산 청화백자 출토량의 3.5배가 넘는 수량이다.

81) 출토품 가운데는 의정부지(議政府址)에서 확인된 <백자청화어문동체부편>(해당 보고서 유물번호: 60)처럼 특정 관청에서 확인된 유물도 있다. 해당 유물은 개인 소장 <백자청화군어문항아리>(보물)과 동일한 외형을 지닌 항아리의 파편이다. 의정부지에서 출토된 <백자청화어문동체부편>에 대해서는 박정민, 「의정부 유적 출토 자기(瓷器)의 특징과 출토 양상 검토」, 『의정부지 발굴조사보고서』 (서울역사박물관, 2020), pp. 509-511. 항아리에 장식된 어조문의 의미와 특징에 대해서는 윤효정, 「조선 전기 청화백자에 그려진 어조문(魚藻文)의 특징과 함의」, 『미술사논단』 51 (2020. 12), pp. 45-68. 선행연구가 강조한 것처럼 어조문이 군신동락(君臣同樂)을 강조한 문양이라면 의정부야말로 해당 청화백자의 문양 의미가 십분 강조될 수 있는 곳이었다.

82)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을 통계화한 선행연구들은 공통적으로 매죽문과 화당초문이 장식된 청화백자가 다수임을 강조했다. 윤효정,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장식특징」, 『조선백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15), p. 251, 표 2; 김혜정, 앞의 논문, p. 105, 표 5. 특히 윤효정의 선행연구는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 비중을 매화문 위주의 세한 삼우문 계통, 보상당초문과 화당초문, 시문, 운룡문과 어조문 등의 순서로 파악했다. 한양도성 출토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을 기종 구분 없이 나열하자면 선행연구가 제시한 특징과 부합한다.

83)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 가운데 매화문의 비중이 높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이다. 특히 항아리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문양 중에 소나무 계통의 문양보다 매죽문 등 매화 계통의 문양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주장은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윤효정, 앞의 논문, pp. 250-252.

84) 물론 일부 매화문은 새와 결부되어 매조문(梅鳥紋)을 이루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문양 역시 현재 남아있는 문양을 기준으로 구분하였으므로 매조문을 별도로 제시하지 않았다.

85)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송죽매 문양에 대한 설명은 김혜정, 앞의 논문, pp. 132-147.

86) 『成宗實錄』 230卷, 20年(1489) 7月 22日. “禮曹啓 屬者特賜畫樽二于成均館 斯文之會常設之 以爲觀美. 今不謹藏守 墜破其一 請推鞫科罪. 傳曰 古人有碎(碼琉盤)〔碼瑙盤〕 亦不之責 破樽特過誤耳 安用治罪 其復賜樽.”

87) 남아있는 문양 특징을 감안하자면 기타 유물 가운데 일부는 원래 운룡문 항아리의 저부나 구연부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

88) 최근 세한삼우문과 매죽문을 다룬 연구는 송죽매가 세한삼우로 의인화된 과정을 송나라와 원나라의 문화 양상 속에서 파악하고, 조선 전기 사회에서 매화와 대나무가 사대부 관리들의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발현시킬 가시적 산물로 자리 잡은 상황을 고찰했다. 이 연구는 조선 전기 매죽문 청화백자의 제작 배경 역시 군신 사이에 요구되던 정치적 도덕성의 강조로 해석했다. 고연희, 「식물 이미지의 정치성(政治性), ‘세한삼우(歲寒三友)’와 ‘매죽(梅竹)’」, 『미술사학보』 55 (2020. 12), pp. 101-124. 세한삼우문이나 매죽문은 문양이 갖는 의미를 고려할 때, 관요에서 한정된 계층을 위해 제작된 장식용 청화백자 항아리의 문양으로 매우 적절한 소재였을 것이다.

89) 이번 논문에서는 지면의 한계로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기종 간 문양 소재 차이점을 소상하게 분석하지 못했다. 이 논문이 파악한 143점의 개별 유물들 역시 각 유물을 도판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통계의 자료로만 활용했다. 차후 한양도성 출토 조선 전기 청화백자가 지닌 기종과 문양 간의 상관성을 가마터 출토품이나 박물관 및 개인 소장품 등과 비교하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특징과 변화 양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Fig. 1.
〈한양도성 내 ‘天·地·玄·黃’명 백자 출토 유적 위치도〉 Excavation Sites of white porcelains bearing inscriptions ch’ŏn 天, chi 地, hyŏn 玄, and hyang 黃, Hanyang, the capital of Chosŏn (Illustrated map drawn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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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天·地·玄·黃’명 백자 일괄〉 White porcelains with inscriptions ch’ŏn 天, chi 地, hyŏn 玄, and hyang 黃, 1480s to 1560s, Chosŏn, Excavated from Ch’ŏngjin-dong site, Hanul munhwajae yŏn’guwŏn (Photograph from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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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청진 12~16지구 유적 박석길 모습〉 Aerial view of Ch ’ŏngjin district, 12-16 stone paved road of the early Chosŏn period (Hanul munhwajae yŏn’guwŏn, Chongno Ch’ŏngjin 12-16 chigu yujŏk Ⅰ, p.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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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백자병편〉 White porcelain bottle bearing an inscription in Korean, kimsaboktaek 김사복댁, Early Chosŏn, H. 16 cm, Excavated from Changch ’ung-dong 2-ga 202 site, Hanul munhwajae yŏn’guwŏn (Photograph by Hanul munhwajae yŏn’guwŏ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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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백자병편〉 White porcelain bottle bearing an inscription in Chinese character 金司僕宅, Early Chosŏn, H. 16 cm, Excavated from Changch ’ung-dong 2-ga 202 site, Hanul munhwajae yŏn’guwŏn (Photograph by Hanul munhwajae yŏn’guwŏ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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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한양도성 내 조선 전기 청화백자 출토 유적 위치도〉 Excavation sites of blue and white porcelains dated to the first half of the Chosŏn dynasty within the Hanyang (Illustrated map drawn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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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공평 15·16지구 유적 ‘가’지역 출토 조선 전기 청화백자 전접시〉 A batch of blue and white porcelain dish with flat rim, Excavated from the ka 가 area of Kongp’yŏng 15·16 district, Early Chosŏn, Hanul munhwajae yŏn’guwŏn (Photograph by Hanul munhwajae yŏn’guwŏ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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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공평 15·16지구 유적 ‘나’지역 출토 조선 전기 청화백자〉 A batch of blue and white porcelain, Excavated from the na 나 area of Kongp’yŏng 15·16 district, Early Chosŏn, Sudo munmul yŏn’guwŏn (Photograph by Sudo munmul yŏn’guwŏ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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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한양도성 내 ‘天·地·玄·黃’명 백자 및 조선 전 기 청화백자 출토 유적 위치도〉 Excavation Sites of white porcelains bearing inscriptions (ch’ŏn 天, chi 地, hyŏn 玄, and hyang 黃) and blue and white porcelains date to the first half of the Chosŏn dynasty within the Hanyang (Illustrated map drawn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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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Types of Blue and White Porcelain Dated to the first half of the Chosŏn Dynasty (Excavation sites in Hanyang)
Jar (+Small jar) Rice bale- shaped bottle Bowl Cup (+Cup with two handles) Flower-shaped cup Stem cup Dish with flat rim Lid Lidded bowl Flowerpot Play tools (Korean chessmen, dice) others (Unknown) Subtotal (cases)
1 Kyŏnbok Palace35 1 - - - - 1 - - - - - - 2
2 Kun’gishi site36 - - - 1 - 1 1 - - - 1 - 4
3 Tŏksu Palace Taehanmun wŏltae site37 1 - - - - - - - - - - - 1
4 Andongbyŏl Palace (Seoul Museum of Craft Art)38 - - - 1 - - - - - - - - 1
5 Ŏyŏngch’ŏngji site39 - - - - - - 1 - - - - - 1
6 Wŏn’gaksaji site40 - - - - - - 2 - - - - - 2
7 Ŭijŏngbuji site41 1 - - - - - - - - - - - 1
8 Chongmyo Plaza + Out-section42 2 - - - - - 2 - - - - - 4
9 Chongch’inbut'ŏ site43 - - - - - - 1 - - - - - 1
10 Kongp’yŏng 1·2·4 district44 3 - - - - - 2 - - - - - 5
11 Kongp’yŏng 15·16 district45 7 - 1 1 - - 9 - - 1 - 2 21
12 Kwansu-dong 4·5·646 - - - - - - - 1 - - - - 1
13 Kwansu-dong 98-147 - - - - - - - 1 - - - - 1
14 Kwanch’ŏl-dong 14-348 1 - - - - - - - - - - - 1
15 Kwanch’ŏl-dong 19-2249 1 - - - - - - - - - - - 1
16 Nagwŏn-dong 108-150 - - - 1 - - - - - - - - 1
17 Tonŭi-dong 41-151 - - - - - 1 - - - - - - 1
18 Tonŭi-dong 17052 - 1 - - - - - - - - - - 1
19 Tongdaemun Stadium53 3 - - 1 - - 1 1 - - - 1 7
20 Pukch’ang-dong 18-954 1 - - - - - - - - - - - 1
21 Sŏrin-dong55 1 - - - - - - - - - - - 1
22 Seun 3-1 district56 - - - - - - 1 1 - - - - 2
23 Seun 3-4, 5 districts57 - - - - - - 1 - - - - - 1
24 Seun 6-2-8 district58 - - - - 1 - - - - - - - 1
25 Sejong-ro 2 district9 1 - - - - - - - - - - - 1
26 Sinmun-ro 2-ga 91-460 1 - - - - - - - - - - - 1
27 Waryong-dong 13161 - - - - - - - - - - - 1 1
28 Changgyo 4 district62 - - 1 - - - - - - - - - 1
29 Changgyo-dong 45-1163 - - - - 1 - - - - - - - 1
30 Changch’ung- dong 2-ga 20264 - - - - - - 1 - - - - - 1
31 Ch’angsin-dong 693-365 1 - - - - - - - - - - - 1
32 Ch’ŏngjin 1 district66 1 - - - - - 1 - - - - - 2
33 Ch’ŏngjin 2~3 districts67 4 - - - - 1 7 2 1 - - 1 16
34 Ch’ŏngjin 5 district68 2 - - 1 - - 1 2 - - - 1 7
35 Ch’ŏngjin 8 district69 1 - - 1 - - 3 1 - - - 3 9
36 Ch’ŏngjin 12~16 district70 11 - 1 2 1 1 12 - 1 2 1 4 36
37 T’ongŭi-dong 35-3271 - - - - - - 1 1 - - - - 2
38 Hyoje-dong 175-372 1 - - - - - - - - - - - 1
Subtotal 45 1 3 9 3 5 47 10 2 3 2 13 143
Table 2.
Designs on the Blue and White Porcelain Dishes with Flat Rim Dated to the First Half of the Chosŏn Dynasty Excavated from Hanyang (Total 47 pie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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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3.
Designs on the Blue and White Porcelain Jars Dated to the First Half of the Chosŏn Dynasty Excavated from Hanyang (Total 45 pie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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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ŏul Seun yujŏk Ⅱ: Seun chaejŏngbi ch’okchin chigu 3-1kuyŏk sigul·palgul chosa pogosŏ 2. Osan: Ch’ŏnggu kogo yŏn’guwŏn, 2021.

. Sŏul Seun yujŏk Ⅳ: Seun chaejŏngbi ch’okchin chigu 3-4, 5kuyŏk si·palgul chosa pogosŏ 1. Osan: Ch’ŏnggu kogo yŏn’guwŏn, 2022.

. Sŏul Seun yujŏk Ⅳ: Seun chaejŏngbi ch’okchin chigu 3-4, 5 kuyŏk si·palgul chosa pogosŏ 2. Osan: Ch’ŏnggu kogo yŏn’guwŏn,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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