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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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祭器와 관련된 도자사 연구는 충효동 요지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를 분석한 정소라, 「朝鮮時代 陶磁祭器 硏究-충효동출토 분청제기를 중심으로」, 홍익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1996)와 도자 제기에 주목하여 출현하게 된 원인과 그 종류를 분석한 안성희, 「朝鮮時代 陶瓷祭器 硏究」,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학위논문(2005). 등이 있다. 이들 논문은 분청사기 제기와 도자제기에 전반을 연구하여 본 논문의 주제인 백자 ‘祭’명 접시와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18세기 이후 제기를 포함한 백자 고족접시의 제작배경 및 변천을 연구한 정다혜, 「朝鮮 18~20世紀 白磁 高足楪匙 硏究」,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14)를 많은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혀 둔다.
16) 1560년대에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관음리 10호에서는 ‘玄’·‘黃’명 백자와 함께 ‘右’명가 발견되었다. ((재)한강문화재 연구원, 『광주조선백자요지 보존·정비를 위한 5차 시·발굴조사』 (2019), p. 99; p. 103; p. 108.
18) (재)한울문화재연구원, 『鐘路 淸進8地區遺蹟Ⅱ(유물)』 (2013c), p. 310. 이 외에도 청진 2~3지구에서도 굽 안 바닥에 ‘祭’명이 음각된 백자 저부편이 발견되었다. ((재)한울문화재연구원, 『鐘路 淸進2~3地區遺蹟Ⅱ(유물)』 (2013a), p.80.)
19) 고창 용산리 유적에서는 도장으로 ‘祭’을 새긴 백자 제기도 발견된 바 있다. ((재)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龍山里窯址』 (2004), p. 116.). 유적의 운영시기는 15세기 중반~16세기 초로 보고 있다.
20) 김경중, 「17世紀 銘文白磁를 통해 본 官窯의 運營時期-生産·消費遺蹟 出土品을 중심으로」, 『한국고고학보』 77집 (한국고고학회, 2010. 12), pp. 165-190.
21) 본 논문에서 언급된 관요의 운영시기는 김경중, 「16세기 중·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가마터 출토 명문백자를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15집 (2012. 12), pp. 243-265; 김경중, 앞의 논문 (2010. 12), pp. 165-190; 김경중, 「17~18세기 전반 조선 관요 유적의 운영시기 재검토-가마터 출토품을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101집 (2022. 1), pp. 191-231.에서 설정한 시기를 따랐다.
25) 경기도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상기 선생 유물 가운데 궁평리 관요에서 수습된 것 중에 철화안료로 쓴 ‘祭’명발 저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경기도자박물관,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광주 분원 가마터 수집품』 (2021), p. 121.) 관음리에서 출토된 ‘祭’명 접시와 비교했을 때 접시의 저부편으로 추정된다.
31) 학동리 10호에서는 모래빚음, 신대리 31호에서 굵은모래를 받쳐 여러 점을 포개서 번조한 접시의 내면에 철화안료로 쓴 ‘祭’가 출토된 바 있다.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 (2019b), p. 387; (재)한국문화유산연구원, 『廣州 新垈里 21·31號 窯址』 (2017), p. 111.
32) 기존에 관음리와 금사리 관요의 운영시기와 관련해서, 정양모 선생은 『承政院日記』와 『備邊司謄錄』의 이설기사, 17세기 후반에 운영된 관요 출토품과의 비교, 그리고 관음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另’·‘口’·‘二’ 등의 명문백자와 모래받침의 차이 등을 근거로 관음리 관요는 오향리 관요(1717~20년) 이전인 1717년 이전에 운영되고, 금사리 관요는 1721~51년으로 설정하였다(정양모, 「京畿道 廣州分院 窯址에 대한 編年的 考察」, 『韓國白磁陶窯地』(1986), pp.24-35). 반면 윤용이 선생은 1721년에 관요를 이설하였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1980년대 광주 일대의 요지 조사와 『承政院日記』 등의 문헌자료를 토대로 금사리 관요의 운영시기를 1726~51년으로 설정하고, 관음리 관요는 오향리와 금사리 관요 사이인 1721~1725년으로 설정하였다.(윤용이, 「朝鮮陶磁의 變遷」, 『朝鮮時代陶磁名品圖錄』 (1992), p145.)
33) 『承政院日記』 773冊 (탈초본 43冊) 英祖 10年 2月 2日. “洪尙賓 以司饔院官員 以都提調·提調意啓曰 因磁器之年年不順成 今年則移設燔於他處事 旣已啓稟蒙允矣 廣州柴場內 退村面金獅谷移去之意 敢啓 傳曰 知道” (김경중, 앞의 논문(2022), p. 214 각주 69 참조.)
35) 백자발의 분석 대상(총145점)은 궁평리 1·2호·3호에서 출토된 49점, 관음리 16호·18호에서 출토된 13점, 금사리 2·3호와 9·10호에서 출토된 82점이다.(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2019b); 앞의 보고서(2020b); 『광주조선백자 요지(사적 제314호) 7차 발굴조사 보고서』(2021); 학술자료 등 포함) 분석 대상에서 굽이 오목굽인 발은 제외하였다. 유물의 대부분이 저부와 동체부 일부만 남아 있어 저경과 굽 높이를 기준으로 분석하였다. 백자 접시의 분석 대상(총 284점)은 궁평리 1·2호·3호에서 출토된 78점과 이상기 선생 기증 유물 1점, 관음리 16호·18호에서 출토된 69점과 경기도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상기 선생 기증 유물 1점, 금사리 2·3호와 9·10호에서 출토된 129점과 경기도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영훈·이상기 선생 기증 유물 4점이다.(경기도자박물관, 앞의 자료집(2016); 앞의 보고서(2019b); 앞의 보고서(2020b); 앞의 보고서(2021); 앞의 자료집(2021); 학술자료 등 포함) 분석 대상에서 굽이 오목굽인 발은 제외하였다. 유물의 대부분이 저부와 동체부 일부만 남아 있어 저경과 굽 높이를 기준으로 분석하였다. 발·접시의 굽 높이는 기종과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어 저경이 큰 접시는 구경이 크고, 굽 높이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본 분석에서는 크기는 별도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36) 금사리 관요에서 반상기의 굽 높이가 높아진 이유는 그릇을 재임하는 방식의 변화했기 때문일 수 있다.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는 여러 점을 포개서 번조한 것이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도침을 놓지 않고 가마 바닥에 백자 발·잔·접시를 놓고 번조한 것이 다수 확인되었다. 만약, 굽의 높이가 조금 낮으면 가마 바닥에 깔았던 모래가 저부에 붙을 가능성이 커 상품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굽의 높이를 약간 높임으로서 가마 바닥에 깔았던 모래가 그릇에 붙는 것을 최소화하여 좀 더 좋은 백자를 생산하기 위해 선택했을 수 있다. 특히. 금사리 관요에서 폐기된 유물 중에 굽의 높이가 조금 높은 발과 접시 중에는 내면 바닥 두께가 2mm 내외로 번조과정에서 찢어지듯이 갈라진 것들이 발견되는데, 굽 안 바닥을 깎는 과정에서 너무 깊게 깎아 두께가 매우 얇아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폐단으로 인해 분원리 관요에 이르러서는 굽이 높이는 다소 낮아지고 안쪽을 깊게 깎는 방식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38)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자박물관에서 발간한 『경기도광주중앙관요』에는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백자 ‘祭’명 접시가 4점 수록되어 있다. 굽의 형태는 원형인 것이 3점, 각형인 것이 1점이고, 각형 접시는 ‘祭’명으로 추정하였다.(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p. 406-426; pp. 448-464 ; 앞의 보고서(2000), pp, 295-309.) 정다혜는 석사학위논문에서 금사리에서 굽이 각이 진 ‘제’명 백자가 3점 확인된다고 하였다.(정다혜, 앞의 논문, pp. 94-110) 하지만, 명문이 명확하지 않고 굽 높이를 알 수 없어 본 논문에서 4점은 제외하였다.
39) 본 유물은 경기도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①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2020b), p. 525(번호 055); ② p. 524(번호 058); ③ p. 523(번호 056). 유물 도면은 보고서를 인용하였음.
42) 서울 종로 관수동에서 제작시기가 15~16세기인 청동제기접시가 출토되었다.(국방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구 관수동 4·5·6번지 유적』 (2021) p. 70; pp. 314-315.)
43) 정다혜는 백자 고족접시가 17세기의 과도기를 거쳐 금사리 관요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정다혜, 앞의 논문. pp. 35-40.) 하지만 신대리 관요부터 관음리 관요까지 ‘祭’명 접시의 굽 높이가 1.5cm 이내이고, 금사리 관요부터 1.5cm 이상인 ‘祭’명 접시가 제작되는 점으로 보아 금사리 관요부터 과도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5)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마지막 官窯 廣州 分院里 白磁窯址』 (2006).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분원초등학교 출입 외부계단 조성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2020a).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9차 발굴조사 보고서』 (2022b). (재)한라문화재연구원, 『광주 분원리 유적』 (2021).
46) 본 유물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 (①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앞의 보고서(2006). p. 258; ② p. 255; ③ p. 257.) 유물 도면은 보고서를 인용하였음.
49) 지표조사에서 2점, 발굴조사에서 4점이 발견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 435; p. 471; 앞의 보고서 (2000), p. 312;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앞의 보고서(2006). p. 174; pp. 255-258; (재)한라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 (2021), pp. 85-86)
50)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앞의 보고서(2006). pp. 255-258. 필자가 분원리 관요에서 출토된 유물 전체를 실견한 것이 아니라 도면이나 설명을 토대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수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55) 국립중앙박물관에 굽의 형태가 각형이고, 굽의 높이가 비교적 높은 백자 ‘祭’명 접시가 소장되어 있다. 굽 안 바닥에 청화안료로 쓴 ‘명동’명을 바탕으로 제작시기는 19세기 중후반으로 보고 있는데, 19세기에 소비처의 요구에 따라 극소수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6)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Ⅰ본문)』 (2011), p. 358.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Ⅱ유물도판)』 (2011), p. 200.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 군기시터 유적(본문)』 (2011), p. 174. 한울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2013b), p. 145.
58) 『承政院日記』 1,105冊, 英祖 30年(1754) 4月 29日. “鳳漢曰 數十年前常沙器 士夫從宦家食床 此爲上器矣 今則下至吏胥 皆用分院之器, 而必有回回靑壽福字矣. <후략>” (이 기사는 박성희가 제공해 주었다)
60) 지표조사에서 굽의 형태가 각형인 ‘壽’명 접시의 저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 295; 앞의 보고서(2000), p. 410.) 하지만 저부의 형태가 ‘壽’명 발과 유사하다.
61) 금사리 관요 유적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경기도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2020b), p. 508(번호 011); p. 509(번호 015); p. 510(번호 017).
62)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자박물관에서 발간한 『경기도광주중앙관요』에는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백자 ‘福’명 접시가 6점(원형 4점, 각형 2점, 발 1점 제외)이 발견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p. 406-426; pp. 448-464 ; 앞의 보고서(2000), pp. 295-309.)
63) 금사리 관요 유적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경기도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2020b), p. 521(번호 051); p. 527(번호 068); p. 528(번호 071)
67) 본 유물은 경기도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앞의 보고서(2006). p. 237; p. 241.) ② 유물은 분원리 1호 일원의 가마 2호 바닥에서 출토되었으며, 제작시기는 굽의 형태가 각형인 ‘祭’명 접시가 출토된 가마 2호 상부퇴적과 마찬가지로 1776년 이후~1790년대 초로 추정하고 있다.(최경화, 앞의 논문(2016), p.108.)
69) 백자 ‘壽’·‘福’명 접시 중에는 청화안료로 ‘毓’·‘延’·‘薺壽’·‘雲峴’명 등을 쓴 예가 있다. 모두 사용처를 의미하며, 그릇을 제작할 때 쓴 것이다. 관련된 내용은 곽희원, 「朝鮮後期 王室磁器의 銘文과 意味」, 홍익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14), pp. 31-7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