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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8;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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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향로에 관한 대표적인 선행연구로는 李溶振, 「朝鮮後期 鼎形香爐 硏究」, 『東岳美術史學』 3 (2002. 12); 司空英愛, 「朝鮮 王室 古銅器形 香爐 硏究」, 『미술사연구』 28 (2014. 12); 전나나, 「19~20세기 궁궐 정전의 용향로에 관한 고찰」, 『古宮文化』 13 (2020. 1) 등이 있다.
8) 고려시대부터 향안(香案)은 의례 내 참여자들의 자리 배치 및 동선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의물이었다. 이는 의례에서 향의 사용이 중요하게 인식된 탓으로 여겨진다. 한혜선, 「고려전기 의례에 사용된 안(案)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 현실』 119 (2021. 3), pp. 153-154.
11) 『高麗史』 卷56, 地理一 王京 開城府 積城縣. 향축을 국왕이 직접 하사하는 의식은 고려시대부터 행해졌다. 이는 단순히 제향에 쓰일 의물을 전하는 것 이상으로 제례를 관장하는 왕의 직접적인 권력을 상징하였다.
12) 국왕이 직접 향축을 하사한 제향은 대사의 사직·종묘·영녕전과 중사의 풍운뇌우·선농·선잠·우사·문선왕이다. 전향축 의식은 국왕이 익선관, 곤룡표를 갖추고 관원이 올리는 축판에 직접 서명하거나, 향축을 초헌관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16) 조선 전기에는 지방의 제향을 위해 향축을 전달하는 전향사,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의례 절차 내 향로와 향합을 받드는 사향(司香)이라는 임시관리직이 있었고, 또한 경공장에 향장을 두어 향을 제조하게 하였으며, 이 외 임 시직책인 봉향차비, 사향차비, 향로차비, 향꽂이 차비, 향안차비, 향합차비 등도 존재하였다. 신혜경, 앞의 논문, p. 22 참조.
20) 신혜경, 앞의 논문, pp. 24-27 참조; 김종임, 「朝鮮王室 金屬祭器 硏究 -宗廟祭器를 中心으로-」, 『美術史學硏究』 277 (2013. 3), p. 135; 『世宗實錄』「五禮」(1454)의 제기도설을 살펴보면 『釋奠儀』의 문묘제기의 도설을 대부분 참용였고, 『禮書』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 것으로 밝혀졌다. 구혜인, 「조선시대 왕실 제기(祭器)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p. 48.
23) 구혜인, 앞의 논문, p. 52; 왕실의 예기제도를 골조로 둔 관요의 설립과 기명체계의 확립에 관한 연구로는 윤효정, 「조선전기 官窯白磁의 器皿體系와 성격」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을 참조.
24) 조선 왕실 제사의 제수에 관한 이념에 관한 연구로는 이욱, 「조선시대 왕실 제사와 제물의 상징:혈식(血食)·소식(素食)·상식(常食)의 이념」, 『종교문화비평』 20 (2011. 1)를 참조.
25) 제례에서 사용되는 제기는 제수의 종류에 따라 변화한다. 이는 의례의 성격을 나타내는 지침이 제수 뿐 만이 아니라 제기를 통해서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기명류의 차이가 아닌 사상적, 정치적 이념적인 배경들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구혜인, 앞의 논문, p. 199.
31) 고려말부터 지속된 금은의 부족상황 또한 조선 전기 백자제작에 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이다. 세종대까지 금은기의 대한 억제 정책은 계속되었고, 이를 대체할 사기, 칠기 등으로 금은기의 수요를 대신하였다. 15세기를 기점으로 관요를 통해 체계적인 자기생산이 가능하게 되자 관요 백자는 왕실 국용기의 중심으로써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윤효정, 앞의 논문, pp. 29-34 참조; 따라서 길례, 흉례 내 수요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회적 정황속에서 금은기를 대체할 기명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금속기를 모방한 제기들도 제작된 상황도 간과할 수 없다.
35)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廣州 牛山里 9號 朝鮮白磁窯址 發掘調査報告書』 (1993), p. 75;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보고서』 (2019a), p. 120.
37) 타 기물에 비하여 제례용 백자향로의 출토수량은 극히 소량이다. 이는 향로는 제례에서 단 1점만이 사용된다는 점, 이에 따라 파손율 및 제작실패율이 낮은 이유를 들 수 있다. 나아가 한정된 계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에 소량만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신혜경, 위의 논문, pp. 65-69; pp. 90-91 참조.
39) 이 외에 참고할 만한 사례로 양주 회암사지 출토 정형향로편이 있다. 회암사지에서 수습된 향로편은 각각 청자와 백자로 제작되었고, 이들의 제작시기는 16세기로 편년되고 있다. 이를 통해 고동기 정(鼎)을 모방한 향로의 양식은 재질을 넘어 공유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혜경, 앞의 논문, pp. 116-118 참조.
40) 곤지암리 1호 요지(1543~1572년 전후)를 기점으로 백자향로 노신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기존 3족의 제족은 원통형과 굽의 중앙부를 도려낸 할굽으로 바뀐 것이다. 신혜경, 앞의 논문, pp. 74-75 참조; 이는 17세기에 접어들어 나타나는 백자제기의 새로운 경향성으로 금속제기의 일부 특성만을 남긴 채 간략화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향로 또한 제기의 일부로써 다음의 경향성에 영향을 받아 양식이 변화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중기 백자제기에 나타난 신경향의 흐름과 배경에 관한 연구로는 안성희, 「16-17세기 朝鮮 白磁祭器의 새로운 경향」, 『美術史學』 22 (2008. 8)를 참조.
41) 백자향로편이 출토된 Ⅳ문화층의 시기폭은 16~17세기, 중심시기는 16세기로 정리되었다. 수습된 유물이 초기 백자향로 양식과 유사므로 이들의 제작시기는 16세기 경으로 보인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 관철동 175번지 유적』 (2015), p. 147.
42) 아전의 사적증여와 공물자기의 유출은 궁궐 내 잡인들의 잦은 출입과 궁궐 소용품을 시전에서 구입하였다는 기록등이 전해져 당시 기물이 관요산 백자로 추정하였다. 더불어 지방의 수령들이 자준(磁樽) 등과 같은 귀한 기물들의 개인적으로 취한 기록도 전해진다. 또한 내탕고, 제기고의 기용들은 주로 궁에서 일하는 종들에 의해 도둑맞은 경우가 빈번하였고, 그 중 관요에서 제작한 백자기명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지현, 「朝鮮前期 市廛出土 白磁와 消費性向 硏究」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pp. 121-138 참조; 조선 전기 백자향로의 소비유적 출토수량은 매우 소량으로 다른 기명에 비해 본격적인 사용이 늦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왕실 및 관청에 국한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사대부를 포함한 민간 내 사용은 제한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윤효정, 앞의 논문, p. 258.
46) 특히 원대부터 종묘제사에서 향로가 본격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원대 용천요(龍泉窯),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제작된 자기제 향로는 명대에 영향을 미쳤고, 관요산 백자향로는 원·명대의 자기향로를 모방한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윤효정, 앞의 논문, pp. 254-255 참조.
47) 중국의 경우 송대 선향(線香)의 출현으로 무개(無蓋) 형태의 소형화 된 향로가 민간보급 되었다. 선향의 경우 뚜껑을 덮은 채 사용하는 방식이 아닌 노신에 재를 채우고 향을 꽂아 분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기물을 사용하는 방식이 조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향방식의 차이와 변화가 향로의 조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혜경, 앞의 논문, p. 201 참조; 张馨予, 「论禅对宋代陶瓷香炉的影响」 (景德镇陶瓷学院 硕士学位论文, 2012), pp.9-11; 雷国强·李震, 「宋代龙泉青瓷香盒, 香瓶鉴赏与研究(上)」(文化瓷苑, 2016), pp. 69-72; 이용진, 「韓國 佛敎香爐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 179 참조.
48) 조선시대 향 제조 방법에 대해서는 이경희, 「조선시대 香문화와 의생활」(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p. 102-113 참조; 비록 분향을 위한 향 제조법은 아니지만 향문화라는 범주 안에서 공통된 사용양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9) 향합에는 향나무의 중심부를 얇게 깎은 향을 보관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흙으로 빚은 조선의 제기』 (2016), p. 66 참조; 아사카와 다쿠미 지음·심우성 옮김,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 (2012), p. 105 참조.
50) 하수민, 「조선 왕실 가례의 부용향(芙蓉香) 연구 -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를 중심으로」, 『문화재』 52-3 (2019. 1), p. 231; 왕실 내 향꽂이[香串之]와 관련된 기록은 『宣祖懿仁王后祔廟都監一房儀軌』(1610)의 반차도에서 확인되며, 『進饌儀軌』(1848)에서 도설로 확인된다. 부용향에 대한 언급은 『燕山君日記』 卷62, 燕山 12年(1506), 4月 12日부터 언급되고 있다.
51) 『世宗實錄』 卷49, 世宗 12年(1430), 8月 6日. 주현제(州縣祭)에 사용될 주요 기종들을 임시로 도자로 제작하였다. 당시 제기는 고동기를 충실히 방제한 보(簠)·궤(簋)·작(爵)·변(籩)·두(豆) 등과 같은 일부 기종에 한정되었다. 향로 또한 고동기를 모방하였고 제례의 필수 기물이었기에 위의 기물들과 함께 도자로 번안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성희, 「朝鮮時代 陶瓷祭器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p. 15.
52) 태조~세종대는 기우제의 성격이 강하였고, 세조대는 정치적인 요소가 개입되었다. 조선 전기 제천의식에 관한 연구로는 한형주, 「朝鮮 世祖代의 祭天禮에 대한 硏究 - 太·世宗代 祭天禮와의 비교·검토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81 (1996. 6)를 참조.
57) 세종 5년(1423) 7월 3일에는 공복을 입게 하였으며, 세종 7년(1425) 7월 4일에는 원단 기우제에 쓰일 향축을 전하고, 세종 12년(1430) 2월 19일에는 악장에 대한 재정비를 논하였다. 『世宗實錄』 卷20, 世宗 5年(1423), 7月 3日; 卷29, 世宗 7年(1425), 7月 4日; 卷47, 世宗 12年(1430), 2月 19日.
59) 당시 제기는 상감청자(象嵌靑瓷)로 추정된 바 있다. 상감·박지·조화 등의 기법이 제기의 복잡한 문양을 구현하기 적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유정, 「조선 전기 상감청자(象嵌靑瓷)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 p. 41; 한편 호림박물관 소장 분청사기 향로가 전해지고 있지만 조형적 특징과 제작기법면에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향로로 보기 어려웠다. 향로의 노신은 두(豆)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와 같은 고족형 노신은 향완을 제외하고 확인된 바가 없었다. 뚜껑은 연봉형 손잡이에 세로선을 투각하였는데 이는 번천리 9호 요지(1552~1558년)부터 나타나며, 손잡이를 둘러싼 톱니문 조각은 사천 봉계리 요지(17~18세기)부터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사례와 비교할 만한 유적출토품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어 본 연구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60) 정우진·심우경, 「창덕궁 대보단의 공간구성과 단제 특성에 관한 고찰」, 『문화재』 46-1 (2013), p. 324 참조; 이욱, 「근대 제천의례를 통해 본 민족정체성 연구」, 『국학연구』 11 (2006), pp. 135-136 참조.
64) 흉례관련 의궤기록은 다음과 같다. 『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1600), 『仁穆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1632), 『昭顯世子殯宮都監儀軌』(1645), 『仁祖殯殿都監儀軌』(1649), 『孝宗殯殿都監儀軌』(1659), 『顯宗殯殿都監儀軌』(1675), 『仁敬王后殯殿都監儀軌』(1680), 『明聖王后殯殿都監儀軌』(1683), 『莊烈王后殯殿都監儀軌』(1688), 『仁顯王后殯殿都監儀軌』(1701), 『端懿嬪殯宮都監儀軌』(1718), 『肅宗殯殿都監儀軌』(1720), 『景宗殯殿都監儀軌』(1724), 『宣懿王后殯殿都監儀軌』(1730), 『孝純賢嬪殯宮魂宮兩都監儀軌』(1751), 『懿昭世孫殯宮魂宮兩都監儀軌』(1752), 『思悼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1762), 『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1824), 『純明妃嬪殿魂殿都監都廳儀軌』(1904), 『孝定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1904), 『純獻貴妃殯宮魂宮儀軌』(1911).
67) 국상을 기준하여 흉례의 절차를 시간과 공간, 의식의 목적과 망자의 상태에 따라 총 4단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Table 3>는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喪葬禮 設行공간의 건축특성 :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 27의 표 9, 이욱, 앞의 단행본, p. 40의 표 7, 홍은기·김상태·장헌덕, 「조선시대 혼전(魂殿)공간의 구성에 관한 연구」, 『문화재』 45-4 (2012), p. 85의 그림 12를 참고하여 재구성 하였다. 신혜경, 앞의 논문, p.4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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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troduction of Bat Design in late Chosŏn and its Use by the Royal Court2023 June;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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