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Korean J Art Hist > Volume 318; 2023 > Article |
|
1) 황수영, 「통일신라시대의 철불」, 『미술사학연구』 154·155 (1982), p. 24; 최성은, 『철불』 (대원사, 1995), pp. 29-30; 최인선, 「한국철불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p. 38; 동저, 「한국의 철불」, 『박물관기요』 22 (2007), pp. 42-44; 최완수,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3』 (대원사, 2007), p. 156.
2) 최완수, 위의 책, p. 156; 이인영, 「고려시대 철불상의 고찰」, 『미술사학보』 2 (1989), pp. 63-64; 문명대, 「신라철불 조성문제와 실상사 철아미타불좌상 연구」, 『불교학보』 37 (2000), p. 101.
3) 강우방, 「통일신라 철불과 고려철불의 편년시론-충남 서산군 운산면의 철불과 운산면 보원사지 장륙철불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41 (1998), p. 21; 문명대, 위의 논문, p. 101; 최성은, 「장보고 선단과 신라하대 불교조각」, 『선사와 고대』 32 (2010), p. 13; 강건우, 「실상사 철불 연구」, 『불교미술사학』 15 (2013), pp. 76-78; 동저,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재고」, 『한국고대사탐구』 27 (2017), pp. 109-113; 정동락, 「신라 하대 선종 사원과 철불」, 『한국고대사탐구』 2 (2017), pp. 92-93.
4) 최인선, 「신라하대 철조불상의 연구」 (단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1), pp. 17-18; 동저, 앞의 논문 (1998), p. 38; 동저, 앞의 논문 (2007), pp. 42-44; 최성은, 앞의 책, pp. 29-30.
7)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有甲騎爲前騶之異乃錫挺樵溪而歷相 焉且見山屛四迾則獄鳥翅掀雲水帶百圍則虬 腰偃石旣愕且唶曰獲是地也庸非天乎不爲靑衲之居其作黃巾之窟 遂率先於衆防後爲基起瓦▨3四注以壓之鑄鐵像二軀以衛之至.”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8) 『滄溪集』 第一卷 詩 「聖住洞」 “瓦礫何年寺. 空山鐵佛愁. 孤雲碑欲缺. 白月塔猶浮. 峽水尋源到. 崦村問舍留. 前林見光氣. 採玉過東丘.”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참조.
9) 윤창화,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민족사, 2017), pp. 21-24, 56-57. 백장회해의 청규의 원형은 산실되어 알 수 없으나, 『宋高僧傳』과 『景德傳燈錄』에서 『古淸規』라고 할 수 있는 문헌을 통해 당시 청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여기에 불전을 세우지 않고 법당을 설립한다는 내용이 있다(허훈, 「『선원청규』의 직제변화에 대한 고찰」, 『보조사상』 36 (2011), p. 199). 그러나 실제 중국의 선종사원에는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불립불전”의 원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한지만, 「중국 당대 선종사원 성립에 관한 문헌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31-11 (2015), p. 151).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능은 ‘수행하고자 하면 집에서도 할 수 있고 반드시 사원이 아니어도 된다’고 한 바 있어(『南宗頓教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六祖惠能大師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 一卷 “若欲修行, 在家亦得, 不由在寺”(T.48, No. 2007, p. 0341c11)) 선종의 성격이 타 종파에 비해 불상이나 사원에 구애받지 않는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3) 보림사 철조여래좌상 명문에 명시되어 있으며, 명문은 다음과 같다. “當成佛時, 釋迦如來入滅後一千八百八年耳. 時情王卽位第三年也. 大中十二年戊寅七月十七日, 武州長沙副官金遂宗聞奏情王, 情王八月廿二日, 勅下躬辨, 不覺勞困也.” 상기 명문은 최연식, 「신라 하대 철불 명문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28 (2002), p. 99 참조.
14) “國, 八云踈勒, 又靑丘, 時云新, [釋]迦佛末法三百余年成佛. 時国王願由, 決盡敎華嚴業決言大大[德][由], 伯士 釋氏乘[焒], 發心旦越, 釋氏聽默氏僧道初朩上首, 十方旦越, 同心同願.(중략)” 최연식, 위의 논문, p. 114 참조.
15)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言咸通五年」冬端儀長翁主未亡人爲稱當來佛是歸敬謂下生厚資上供以邑司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乃告其徒曰山號賢溪地殊愚谷寺名安樂僧盍住持從之徙焉居則化矣使樂山者益靜擇地者愼思行」藏之是一焉他日告門人曰故韓粲金公嶷勳度我爲僧報公以佛乃鑄丈六玄金像傅之以銑爰用鎭仁宇導冥路使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22) 『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 色服 “平人. 幞頭只用絹·布. 表衣·袴只用布. 内衣只用絹·布. 帶只用銅·鐡. 靴禁烏麖皺文紫皮. 靴帶只用鐡·銅. 履用麻已下. 布用十二升已下.”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
23) 『册府元龜』 卷九百九十九 外臣部 四十四 互市 “開成元年六月, 淄靑節度使奏, 新羅渤海將到熟銅 請不禁斷. 是月, 京兆府奏, 准建中元年十月六日勑, 諸錦罽綾羅縠繡織成細紬絲布氂牛尾眞珠銀 銅鐵奴婢等, 竝不得與諸蕃互市. 又准令式, 中國人不合私與外國人交通買賣, 婚娶來往. 又擧取蕃客錢, 以産業, 奴婢爲質者, 重請禁之.” 中国哲学书电子化计划 www.ctext.org/zhs 참조.
29) 사쿠라기 신이치, 「신안선 출토 동전의 용도와 성격」, 『신안선의 금속공예』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007), p. 207.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대불의 원료로 송전을 녹여 만든 것을 正說로 본다. 新井 宏, 「金屬を通して歷史を觀る. 鎌倉の大仏と宋錢」, 『バウンダリー』 16(4) (コンパス社, 2000), p. 59.
30) 헤이안시대 후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에서는 말법사상의 영향으로 경통을 다수 만든다. 경통의 재료를 분석하였을 때 헤이안시대 말기인 1100년부터 1140년경까지는 일본산 구리가 이용되었다. 1140년경부터 1150년경이 되면 일본산 재료의 경통은 감소하고, 1150년경 이후에는 중국 재료가 이용되었다. 일본산 구리의 원료 광석이 없으므로 구리를 생산하기 어려워지자 중국의 재료를 수입한 것이다. 平尾良光, 「日本における銅·鉛生産の歷史的變遷」, 『保存科学硏究集會』 (奈良文化財研究所, 2018), pp. 8-9.
33) 통일신라 화형접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본관13562-4, 5, 6, 7, 8이며, 고려 동종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원 1797과 1915가 분석 대상 유물이었다(강형태·안주영·허일권,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금속유물의 납동위원소비 데이터베이스 구축(Ⅰ)」, 『박물관보존과학』 8 (2007), pp. 82-86). 본관13562-9, 10, 11, 12, 13, 14, 15, 16, 17, 18의 10개의 화형접시 역시 중국 남부지역권에 포함되어 있다(강형태·안주영·전효수,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청동유물의 납동위원소비 데이터베이스 구축(Ⅱ)」, 『박물관보존과학』 9 (2008), pp. 109-112).
34) 이은우·김소진·한우림·한민수·황진주, 「납동위원소비 분석을 활용한 인용사지 출토 청동기의 원료 산지 연구」, 『보존과학회지』 30 (2014), p. 350. 이 논문에서는 각 유물 사진 및 소장처 등을 제시하지 않고 과학적인 분석 결과만 제시하였다.
35) 김소진·한우림·황진주·전영중·한민수, 「출토 지역과 시대에 따른 한국 청동기의 납동위원소비 분류 특성」, 『보존 과학연구』 36 (2015), pp. 6-7. 이 논문에서도 결과 데이터만 제시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유물의 납동위원소비는 대다수 Zone 3에 해당하는데, 동아시아 방연석 분포도에 적용하는 경우 Zone 3은 중국 남부 지역에 해당하며, 한국 분포도에 적용하는 경우 옥천대 및 영남육괴 지역으로 가장 넓다. Zone 2는 우리나라 고유의 납동위원소비 특징이지만 Zone 3은 중국과 구분이 안되며(김소진 외 4인, 위의 논문 (2015), p. 6), 원료물질이 혼합된 청동기의 납동위원 소비가 위치하는 구역이기도 하다(이은우 외 4인, 앞의 논문 (2014), p. 349). 납동위원소비 분석은 아직 한계가 있으나, 통일신라 유물의 납동위원소비 분포도가 중국 남부지역일 수도 있는 점과 원료 물질이 혼합된 구역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38) 전호석 외 3인, 「국내 희유금속광 부존 현황 및 개발기술」, 『한국자원공학회지』 55-1 (2018), pp. 74-75. 주석광의 매장량은 약 480만 톤으로 추정하며, 중국(23%), 인도네시아(17%), 브라질(15%), 호주(10%), 볼리비아(8%)에 주로 매장되어 있다. 생산은 중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볼리비아 등에서 이루어진다.
39) 『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 屋舍 “六頭品. 室長廣不過二十一尺, 不覆唐瓦, 不施飛簷·重栿·栱牙·懸魚, 不餙以金·銀·鍮石·白鑞·五彩. 不置巾校勘階及二重階, 階石不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밑줄 필자).
40) 『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 屋舍 “五頭品. 室長廣不過十八尺, 不用山楡木, 不覆唐瓦, 不置獸頭, 不施飛簷·重栿·花斗牙·懸魚, 不以金·銀·鍮石·銅鑞·五彩爲餙.”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밑줄 필자).
41) 『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 色服 “六頭品. 幞頭用繐羅·絁·絹·布. 表衣只用綿紬·䌷·布. 内衣只用小文綾·絁·絹·布. 袴只用絁·絹·綿紬·布. 帶只用烏犀校勘·鍮·鐡·銅. 襪只用絁·綿䌷·布. 靴禁烏䴢皺文紫皮. 靴帶用烏犀·鍮·鐡·銅. 履只用皮·麻. 布用十八升已下. 五頭品. 幞頭用羅·絁·絹·布. 表衣只用布. 内衣半臂只用小文綾·絁·絹·布. 袴只用綿紬·布. 腰帶只用鐡. 襪只用綿紬. 靴禁烏麖皺文紫皮. 靴帶只用鍮·鐡·銅. 履用皮·麻.布用十五升已下. 四頭品. 幞頭只用紗·絁·絹·布. 表衣·袴只用布. 内衣·半臂只用絁·絹·綿紬·布. 腰帶只用鐡·銅. 靴禁烏麖皺文紫皮. 靴帶只用鐡·銅. 履用牛皮·麻已下. 布用十三升已下. 平人. 幞頭只用絹·布. 表衣·袴只用布. 内衣只用絹·布. 帶只用銅·鐡. 靴禁烏麖皺文紫皮. 靴帶只用鐡·銅. 履用麻已下. 布用十二升已下.”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밑줄 필자).
42) 상원사 동종 명문에는 鍮 3,300鋌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鍮銅을 鍮라고 표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동은 구리-주석 합금을 말하는 것이다. 鍮를 鍮石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으나, 유석은 구리-아연 합금으로 수입품이며 귀금속이고, 유동은 구리-주석 합금으로 신라가 생산할 수 있는 합금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구리-주석 합금을 표현할 때 鍮를 사용하지 않지만, 신라는 자국의 동합금에 鍮라고 표기하였다(김민수, 「신라의 유석 인식과 그 특징」, 『한국고대사연구』 96 (2019), pp. 314-316).
45) 『宋史』 志 第一百三十三 食貨 下 二 “錢本中國寶貨,今乃與四夷共享,又自廢罷銅禁,民間銷毀無復可辦. 銷熔十錢得精銅一兩,造作器用,獲利五倍. 如此則逐州置爐,每爐增數.” 中国哲学书电子化计划 www.ctext.org/zh 참조. 『송사』는 五代의 周부터 317년간의 史實을 기록한 역사책으로 至正 5年(1345)에 간행하였다.
46) 『續資治通鑑長編』 卷一百十五 “權度支判官李申言,廣南蕃舶多毀錢以鑄銅器,請自今陳告者皆倍給賞錢,公人遷一資. 從之.” 中国哲学书电子化计划 www.ctext.org/zh 참조.
49) 전덕재, 앞의 논문 (2014a), pp. 177-178. 일본의 長登銅山에 대해서 八木 充, 「長登木簡からみた古代銅生産」, 『長登銅山跡』 Ⅱ (日本 山口県 : 美東町敎育委員會, 1993), pp. 234-235 참고.
50) 경주지역에 있는 청동 공방 유적에 관해서는 전덕재, 앞의 논문 (2014a), p. 171; 차순철, 「경주지역의 청동생산 공방 운영에 대한 일고찰」, 『문화재』 38 (2005), pp. 199-206 참고.
55) 보림사 철불 양식은 실상사 철불과는 다른 새로운 불상양식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서지민은 보림사 철불이 唐代 철불과 통일신라 후기 승상의 사실적인 불상양식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또한 헌안왕이 보림사 철불의 후원자이며, 김수종이 불사를 총괄했다고 본다(서지민, 「寶林寺 철조비로자나불상의 後援과 制作工程 연구」, 『동악미술사학』 32 (2022), pp. 146-153).
58) 권보경, 앞의 논문, pp. 86-87. 장흥 보림사 철불의 경우 실상사 철불과 같이 과학적인 조사를 진행한 바 없으므로, 본고에 실린 보림사 철불의 외형틀 분할선 도면은 필자의 육안 조사에 의거하여 작성하였다.
59) 실상사 철불 조성 편년에 대한 연구는 다수 있다. 9세기 초기 930년 무렵을 추정하는 논문은 中吉功, 『新羅·高麗の佛像』 (東京: 二玄社, 1971), p. 140; 황수영, 앞의 논문 (1982), pp. 18-21; 최인선, 앞의 논문 (1998), p. 42; 조범환, 앞의 논문 (2006), pp. 57-58; 정동락, 앞의 논문, p. 81. 828년부터 840년으로 제작시기를 추론하는 논문도 있으며(최성은, 「신라 하대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고찰」, 『한국사학보』 54 (2014), pp. 180-185), 9세기 2/4분기를 제작시기로 보기도 한다(문명대, 앞의 논문, pp. 97-98). 840년 무렵으로 추정하는 논문 가운데 문성왕의 후원으로 수철이 조성했다고 보는 의견(강건우, 앞의 논문 (2017), pp. 111-115; 진정환, 「신라 하대 선종 미술의 모태, 실상산문의 불교미술품」, 『전북사학』 53 (2018), pp. 7-11)과 현욱의 영향으로 조성했다는 의견(배제훈, 「신라 하대 철불의 수용과 후원세력」, 『한국고대사탐구』 27 (2017), pp. 25-27)이 있다.
62) 문성왕의 혜철 후원은 혜철의 武州 지역의 영향력 때문이며(조범환, 「신라 하대 선승과 왕실」, 『신라문화』 26 (2005), p. 14), 무염에 대한 후원 역시 熊川州 지역에 대한 지배권 행사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최인표, 「신라하대 선종교단의 동향과 왕실의 대응」, 『신라문화』 27 (2006), p. 14).
64) 축서사 삼층석탑은 탑에서 나온 납석사리호의 명문에 따라 867년에 따라 조성되었다고 본다.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등간격의 형식적 옷주름, 작은 손, 대좌의 중대 형태와 공양자 상, 중대와 하대 사이의 고임석 등의 양식을 볼 때 삼층석탑과 함께 조성되었으며, 조성연대는 867년이라고 할 수 있다(임영애,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목조광배」, 『이화사학연구』 55 (2017), pp.45-47, 54-59).
72) 권보경, 앞의 논문, pp. 110-111. 예천 한천사 철불좌상은 2002년 수리조사보고서 외에 과학적 조사를 시행한 바 없는데, 이 보고서는 불교조각원, 『보물 제667호 한천사 철조여래좌상 수리조사보고서』 (2002)이다. 보고서에는 외형틀 분할선에 대한 내용은 없으므로, 한천사 철불좌상의 외형틀 분할선 도면 역시 필자의 육안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76)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宣帝十四年仲春副守金彦卿夙陳弟子之禮嘗爲入室之賓減淸俸出私財市鐵二千五百斤鑄廬舍那佛一軀以莊禪師所居梵宇(중략)”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77) 곽승훈, 「신라 경문왕대 法弼의 선 사상과 보현행원사상」, 『사학연구』 126 (2017), pp. 139-141.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咸通▨年贈太師景文大王以在山別赴降趺急從一日八角堂請敎禪同異對曰深宮自有千迷道▨▨終無”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78)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言咸通五年」冬端儀長翁主未亡人爲稱當來佛是歸敬謂下生厚資上供以邑司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乃告其徒曰山號賢溪地殊愚谷寺名安樂僧盍住持從之徙焉居則化矣使樂山者益靜擇地者愼思行」藏之是一焉他日告門人曰故韓粲金公嶷勳度我爲僧報公以佛乃鑄丈六玄金像傅之以銑爰用鎭仁宇導冥路使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80) 임영애, 「신라 하대 경문왕대 불교조각의 재조명」, 『미술사학연구』 278 (2013), pp. 12-13. 『강원도회양부금강산장안사 사적』에 「장안사 비로자나불배석각」이 실려서 조상기를 전하고 있지만, 현재 불상과 광배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81) 비문은 주 7 참조. 도헌의 봉암사 창건은 880년에서 881년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881년에 국가에서 사액하였기 때문이다. 봉암사는 창건 후 국가의 사액을 받았으나 지방 세력 沈忠(?~?)이 희사하여 창건한 것이므로 왕실이 아닌 지방세력이 후원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왕실에서는 선승을 세력 아래 두고자 나중에 사액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860년대와는 달리 880년 이전 시기부터 지방세력이 확대되고 왕실의 지배력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82) 『三國史記』 卷第十一 新羅本紀 第十一 憲康王 六年 “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閒,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甞聞之如此.” 因奏曰, “上即位以來, 隂陽和, 風雨順, 歳有年, 民足食, 邉境謐静, 市井歡娱, 此聖徳之所致也.” 王欣然曰, “此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徳焉.””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