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Korean J Art Hist > Volume 317; 2023 > Article |
|
1) 남북조시기 미륵의 도상 전개에 관해서는 이하의 선행연구가 참조된다. 大村西崖, 『支那美術史彫塑篇』 (仏書刊行会図像部, 1915); 水野清一·長廣敏雄, 「雲岡図像学」, 『雲岡石窟 第8·9巻』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1953); 上野照夫, 『弥勒像の図像学的考察』 (塚本博士頌寿記念仏教史学論集, 1961); 東山健吾, 「敦煌莫高窟北朝期尊象の図像的考察」, 『東洋学術研究』 24-1 (1985); 石松日奈子, 「中国交脚菩薩像考」, 『佛敎藝術』 178 (1988), pp. 55-83; 同著, 「弥勒像坐勢研究-施無畏印·倚坐の菩薩像を中心に」, 『Museum』 502 (東京国立博物館, 1993), pp. 4-26 (이후 『北魏仏教造像史の研究』, ブリュッケ, 2005에 수록); 宿白, 「南朝龕像遺迹初探」, 『考古学報』 1989-4 (『中国石窟寺研究』 수록, 文物出版社, 1996); 강희정, 『관음과 미륵의 도상학』 (학연문화사, 2006), pp. 165-255; 徐男英, 「河北藁城出土の北斉河清元年銘白玉二仏坐像について-「弥勒破坐」銘の解釈を中心に」, 『美術史』 60 (日本美術史學會編, 2011), pp. 313-330; 李玉珉, 「南北朝弥勒図像與信仰」, 『故宮学術季刊』 30-2 (2012); 齋藤理恵子, 「弥勒菩薩の諸相」, 『仏教美術の研究』 (里文出版, 2014); 石松日奈子, 서남영 역, 「중국 북조기 미륵상의 재검토-하생신앙과 미륵상」, 『동양미술사학』 9 (2016), pp. 5-100; 肥田路美,「弥勒仏の信仰と倚坐形如来像―五世紀から則天武后期以前まで―」, 『中央アジア仏教美術の研究-釈迦·弥勒·阿弥陀信仰の美術の生成を中心にー科学研究費補助金基盤研究(B)研究報告書』 (龍谷大学, 2018), pp. 47-63.
2) ‘聖衆’은 불교에서 예배대상이 되는 聲聞, 緣覺, 菩薩, 佛의 집단을 가리키는데, 보통은 정토교에서 왕생자를 구하기 위해서 내영하는 불, 보살, 비구중이나 그를 따르는 모두를 가리킨다. 그동안 도솔천상의 미륵설법도에서 미륵보살 주변의 등장인물상에 관해서는 청중, 권속, 성중 등으로 인용하고 있지만, 그 해석에 관한 논고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이 중 ‘聽衆’은 ‘듣고 있는 무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실제 도솔천 설법도에서 등장하는 무리들의 경우, 듣는 행위로만 한정할 수 없기 때문에 미륵보살주변의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성중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徐男英, 「龍門石窟古陽洞半跏思惟像試論-左右対称配置と制作時期検討を中心に」, 『京都美学美術史学』 7 (2008), pp. 97-129에서 반가사유상을 비롯해 미륵보살상 주위의 군상에 관해 ‘聖衆像’이라고 비정한 바 있다. 이외에 ‘聖衆像’이라고 부른 예로는 宮治昭의 『涅槃と弥勒の図像学』(吉川弘文館, 1992, p. 331)에서 “간다라 부조 중에 転法輪印을 결하고 蓮華座 위에 結跏趺坐하는 부처상이 예배상과 같이 크게 표현되었고, 그 주위에는 불, 보살, 공양자 등 많은 聖衆을 배치한 일종의 대신변도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존격에 한정하지 않고 등장인물을 지칭하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龍谷大学編纂, 『仏教大辭彙』 第二巻(1992), p. 2207에 의하면, 聖衆은 眷属聖衆의 菩薩로도 말할 수 있으며, 浄土門에서는 주존에 부수적으로 등장하는 많은 聖者를 말하고 있다.
3) 도솔천 설법도에 관한 최신 연구로는 이하가 참조된다. 泉武夫, 「兜率天弥勒と兜率天宮図の系譜」, 『兜率天往生の思想とそのかたち』 (平成19(2007)年度-平成22(2010)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 (基盤研究(B))研究成果報告書, 2011); 同著, 「印度·中国·日本的弥勒信仰与美術-兜率天的菩薩像及其源流」, 『中国美術研究』 29 (東北大学, 2019); 田辺勝美·前田耕作責任編集,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15巻 中央アジア』 (小学館, 1999), p.296.
5) 서역북로상의 쿠차에 개착된 키질석굴은 현재 총 236굴까지 편호되어 있으며 이 중 벽화가 남아있는 것은 약 70여 굴이다. 키질석굴의 개착 시기에 관해서는 諸說이 있지만, 대체로 300년 전후에 시작되어 8세기 중반 경에 쇠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중 도솔천 설법도상은 300~500년대의 주로 중심주굴의 석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키질석굴에 관한 자료 중 본고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이하의 자료를 참조했다. 新疆ウイグル自治区文物管理委員会, 拝城県キジル千仏洞文物保管所編, 『中國石窟 キジル石窟』 1, 2, 3 (平凡社·文物出版社共編, 1983-1985); 강민정, 『키질석굴의 <도솔천 미륵설법도>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0); 宮治昭, 肥田路美, 板倉聖哲 監修, 『アジア仏教美術論集 中央アジア1 ガンダーラ〜東西トルキスタン』 (中央公論美術出版, 2017) 등.
6) 미륵경전에는 통상 이하의 경전을 미륵육부경이라고 한다. ①『佛說彌勒來時經』 譯者不明 (T.14, No.457), ②『佛說彌勒下生經』 (일명 『下生經』) 西晋 竺法護 譯 (303年)(?) (T.14, No.453), ③『佛說彌勒下生成仏經』 後秦 鳩摩羅什 譯 (402年)(?) (T.14, No.454), ④『佛說彌勒大成佛經』 後秦 鳩摩羅什 譯(402年) (T.14, No.456), ⑤『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일명 『上生經』) 北涼 沮渠京声 譯(455年)(?) (T.14, No.452), ⑥『佛說彌勒下生成佛經』 唐 義浄 譯(701年) (T.14, No.455) 이 중 ②④⑤를 彌勒三部經이라고 부르고, 상생신앙은 ⑤『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에 기술되어 있다.
7) 『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上生經』)은 455년 北涼王 沮渠蒙遜의 從弟에 해당하는 沮渠京聲이 한역한 것으로 투르판 부근에서 성립되었거나 편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립시기에 관해서는 상생경에서 “도솔타천에 있으면서 낮밤으로 항상 이 법을 설하여 여러 천자들을 제도하고 염부제의 歲數로는 56억만 년을 지낸 뒤에라야 다시 염부제에 下生하리니, 彌勒下生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고 이미 『下生經』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上生經』이 하생경보다 후대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생경』에서 부처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왕생해 성불할 것이란 수기를 내린 뒤 도솔천에서 중생을 어떻게 구제하는가에 관해 설법하고 있는데,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천인들과 더불어 세속의 시간으로 56억 7천만동안 설법 한 후 사바세계에 내려온다고 전한다. 다만 『상생경』 성립이전에 간다라나 중국에서는 이미 미륵 상생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梁 慧皎 撰 『高僧傳』이나 梁 僧祐 撰 『出三藏記集』에 간다라 지방에서 배운 인도 승려나 중국의 승려 등이 미륵 신자로 깊은 선정에 들어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을 친견한다는 이야기나 사후에 도솔천 왕생을 바라는 이야기 등이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 최초의 미륵신앙자로 알려져 있는 釋道安(314~385)이 제자들과 도솔천 왕생을 바라고 있는 점에서 일찍이 상생 신앙을 확인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미륵의 주요 경전에 관해 이하의 자료를 참조했다. 松本文三郎, 『弥勒浄土論』 (丙午出版社, 1911); 同著, 『弥勒浄土論 極樂淨土論』 (松本文三郎博士主要著書, 平凡社, 2006); 이기영, 「彌勒信仰의 再定立」, 『東國思想』 18 (1985); 石上善應·양은용 역, 「6-7세기 동아세아에 있어서 미륵보살신앙의 동향 -그 배경을 이루는 미륵경전의 원류-」, 『마한백제문화』 16 (2004); 김석근, 「전륜성왕(轉輪聖王), 미륵(彌勒), 그리고 메시아-미륵신앙의 정치적 기능과 함의에 대한 시론적 접근」, 『동양청치사상사』 9 (2010), pp. 5-22; 박민현, 「미륵사상의 발생과 중심사상」, 『정토학연구』 24 (2015). pp. 9-41; 이수창, 「미륵사상의 기원과 전개-초기 경전과 미륵경전을 중심으로」, 『정토학연구』 37 (2022), pp. 45-77.
8)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하생하기 전까지 설법하는 곳으로, 투시타(Tuṣita)의 음역이다. 의역하면 知足天 즉 ‘만족했다’의 의미로 여기서의 만족이란 주로 五欲의 쾌락에 대한 만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打本和音, 「兜率天とその役割」, 『印度學佛教學研究』 69 (日本印度学仏教学会, 2020), pp. 467-462 참조.
9) “이미 이 서원을 냄에 따라 이마 위에 저절로 5백억 보배 구슬이 나오는가 하면, 유리·파리 등 일체 빛깔을 다 구족함으로써 붉고 검푸른 마니가 안팎으로 환히 비침과 같은 이러한 마니의 광명이 공중을 빙빙 돌면서 49겹의 미묘한 보배 궁전을 변화로 만드는데, 그 낱낱 난간이 만억의 깨끗한 마니 보배로 합성되어 있고, 낱낱 난간 사이에는 9억의 천자와 5백억의 천녀가 저절로 화생하며, 낱낱 천자의 손 안에는 한량없는 억만의 7보 연꽃이 화생하고, 낱낱 연꽃 위에는 한량없는 억 광명이 있느니라. 旣發願已,額上自然出五百億寶珠、 琉璃、 頗梨,一切衆色無不具足,如紫紺摩尼表裏映徹。 此摩尼光迴旋空中,化爲四十九重微妙寶宮,一一欄楯萬億梵摩尼寶所共合成。 諸欄楯閒自然化生九億天子、 五百億天女,一一天子手中化生無量億萬七寶蓮華,一一蓮華上有無量億光” 劉宋 沮渠京声 譯, 『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T.14 No.452), p. 419a
10) 키질석굴에서 中心柱窟은 主室이 정방형 혹은 장방형에 궁륭형 천장을 이루는데, 後室의 경우, 불감이 있는 中心柱를 만들고 그것을 따라 左廊, 後廊, 右廊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구조는 중심주가 석굴의 붕괴를 막기 위한 기능도 하지만, 중심주 정벽 감실에 불상을 안치해서 예배를 드리는 기능적인 면에서도 적합한 구조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1) 키질석굴 제38굴 이외에도 베를린 국립프로이센 문화유산 박물관(인도미술관)에서도 한 쌍의 반가사유상 단편이 확인된다. 이 반가사유상은 원래 키질석굴 123굴 주실 정벽 좌우 입구 상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현재 정확한 위치 확인이나 123굴의 전반적인 벽화 상태에 관해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한 쌍의 반가사유상이 123굴에 제작된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아마 38굴과 유사한 구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織田得能著, 『仏敎大辭典』 (大倉書店, 1920), p. 1377에 의하면, 『上生經』에서 ‘念’은 기억해서 잊지 않는 것을 뜻하지만, 『唯識論三』(‘云何爲念. 於会習境. 令心明記不妄’), 『法界次第』(‘念者. 内心存意之異名也’) 혹은 『大乘義章十二』에서는 ‘念’의 의미에 관해 ‘깊이 무엇에 대해 생각에 잠기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상생경의 ‘念’은 생각한다는 ‘思惟’와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다고 추정된다.
13) “佛告優波離:“諦聽諦聽,善思念之。 如來、 應、 正遍知,今於此衆,說彌勒菩薩摩訶薩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 중략…若有比丘及一切大眾。 不厭生死樂生天者。 愛敬無上菩提心者。 欲為弥勒作弟子者。 當作是観。 作是観者応持五戒八斉具足戒身心精進不求断結修十善法一一思惟兜率陀天上上妙快樂。 作是観者名為正観。 若他観者名為邪観…중략…応当繋念念仏形像称弥勒名。 如是等輩若一念頃受八戒斉。 修諸浄業発弘誓願 念終之後。 臂如壮士屈申臂頃即得往生兜率陀天…중략…佛告優波離:“佛滅度後,四部弟子、 天、 龍、 鬼神,若有欲生兜率陁天者,當作是觀繫念思惟,念兜率陁天,持佛禁戒,一日至七日,思念十善行十善道” 北涼 沮渠京声 譯, 『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上生經』)T.14, No.452, pp. 418c-420b 참조.
14) 浅井和春, 「半跏思惟像 觀松院」, 『國華』 1116 (朝日新聞社, 1988), p. 24에 의하면, 키질석굴 제38굴의 반가사유상의 표현은 도솔천에 이르는 전제로의 수행자의 사유를 상징적으로 도상화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유의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동아시아에 있어서 사유상의 특징과 의미고찰」 『미학예술학연구』 42 (2014), pp. 154-156에서도 불전을 통해 초보적인 검토를 하였다. 당시 논고에서는 반가사유상에 초점을 맞추어 단편적으로 검토하는데 그쳐 중앙아시아 이후의 전개과정에 관해서는 고찰하지 못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관점을 간다라부터 용문석굴에 이르기까지 확인되는 도솔천 설법도에 맞추어 각 지역에 따른 성중상의 표현 변화와 역할을 살펴보고 특히 중국에서 지역벽로 도솔천 설법도의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점이 다르다.
15) 돈황석굴 제275굴의 경우, 서벽의 대형 교각보살상 이외에도 남, 북벽에 총 4구의 교각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교각상은 보관과 장식을 걸치고 반가사유상과 규모가 비슷하게 소형으로 제작되어 상단의 소감안에 배치되었는데, 전체 구성에서 본다면 반가사유상-소형 교각상 2구-대형 교각미륵보살상-소형 교각상 2구-반가사유상의 7존 구성이 된다. 이 중 소감의 교각상의 성격에 관해서는 서벽 주존인 교각보살상과의 규모의 차이와 구성을 고려해 볼 때. 키질석굴에서 확인되는 도솔천 설법도에서 중앙의 미륵보살 좌우에 배치되어 미륵보살의 설법에 찬탄하는 성중상의 성격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미륵보살로 본다면, 당시 중국에서는 미륵보살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7존 구성을 확인하기 어렵고 미륵 상생신앙과 도상이 중국에 전래되었을 초기에는 교각상을 미륵보살상과 성중상의 두 도상과 혹은 두 성격을 혼용해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교각상은 5~6세기 미륵보살로 정립되어 가지만, 돈황석굴을 비롯한 감숙지역의 초기 석굴에서는 일부 과도기적 현상도 확인되기 때문에 제275굴의 전체 구성에서 소형의 교각상에 대해서는 추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6) 敦煌硏究所編, 『敦煌石窟 全集 第1卷 莫高窟 第266~275窟 考古報告』 第1分冊 (文物出版社, 2011), pp. 151-238 참조. 그동안 몇 차례 보수가 있기는 했지만 바닥에는 등잔을 놓았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따라서 제275굴이 돈황석굴 제272굴과 같이 개착 초기에 예배굴로서 당시 『상생경』을 바탕에 둔 도솔천에 대한 신앙을 조형화 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등잔대가 놓인 위치에서 좌우를 보면 바로 반가사유상과 시선이 마주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등잔대 옆에 자리하고 있었던 예배자는 자연스럽게 도솔천상에서 정면의 교각미륵보살이 설법을 경청하고 사유하는 수행자와 동일시되는 것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275굴의 성격을 본고와 같이 도솔천을 시각화 했다는 의견이 있어 참조된다. 주수완,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의 도상학적 재고」, 『한국불교학』 80 (2016), pp. 288-292.
17) 徐男英, 앞의 논문(2008), p. 115, <表1>운강석굴에 있어서 교각상의 좌우 반가사유상 배치에 의하면 운강석굴의 초기부터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개착된 석굴에서도 한쌍의 반가사유상이 교각상과 삼존상을 이룬 구성을 다수 제작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 운강석굴 중에서도 7굴과 8굴의 주실 상부 불감에는 이례적으로 의좌상과 교각상을 동반한 5존상의 양 끝에 반가사유상이 배치되는 형식이 등장하기도 한다. 오존상의 해석에 관해서는 현재 曾布川寛, 『雲岡石窟再考』 『東方學報』 83(2008), pp. 1-155를 비롯해서 諸說이 있다. 북위 전반기 미륵보살이 출현하는 도솔천 설법도를 중심으로 검토한다면, 이는 미륵도상의 예외적인 흐름에서 해석해야 될 것이다. 그 외 운강석굴의 전반적인 도상이나 내용에 관해서는 水野淸一·長広敏雄 共著, 『雲岡石窟―西暦五世紀における中国北部仏教窟院の考古学的調査報告』, 全十六卷三二冊 (京都大学人文科学硏究所, 1951~1956)참조.
18) 운강석굴 제17굴의 동벽의 惠定 불감의 조상기는 높이 약 28cm의 방형 안에 총 87자가 새겨져 있다. “太代太和十三年歲/在己巳九月壬寅朔/十九日庚申比丘尼惠/定身愚重患發願造/釋迦多寶彌勒像三/區願患消除願現世/安隱戒行猛利道心/日增誓不退轉以此/造像功德逮及七世/父母累劫諸師兂邊/衆生咸同斯慶”, 水野淸一·長広敏雄共著, 앞의 책, 第十二巻:第十七洞および第十八洞(本文), 1954, p. 46 참조. 태화 13년 기사년 9월 19일 경신일 삭망 때 비구니 혜정이 중병에 걸렸는데 그녀는 석가, 다보, 미륵 3구의 불상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건강과 현세의 평화로운 삶을 기원하였다. 혜정은 계율을 준수하고 수행하여 신심이 나날이 깊어졌으며 계속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에 불상 조상 공덕이 7대 조상과 부모에까지 이르기를 원했다. 대대로 모든 스승과 중생들에게도 가은 공덕이 이르기를 기원하였다는 내용이다.
19) 운강석굴에서 이러한 경향은 비단 석굴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제작된 불비상에서도 다수 확인된다. 예를 들어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神龜 3년(520)명 <교각보살비상>의 경우, 불제자 翟蠻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彌勒像’을 발원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외 조상기는 없지만 네즈미술관 소장의 불비상 등 다수의 불비상에 교각미륵보살상과 좌우 반가사유상의 삼존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20) 현재 고양동 북벽의 121감의 경우 교각보살상과 우협시 반가사유상은 파손되어 부분적으로 남아있지만, 大村西崖, 『支那美術史彫塑篇』 (佛書刊行會, 1915) 圖版 474에서 확인된다.
22) 오사카시립미술관 소장의 <여래삼존상>은 높이 163cm의 석회암으로 제작된 삼존상이다. 주존은 결가부좌를 한 여래좌상으로 시무외, 여원인을 결하고 있으며, 좌우 협시는 세장한 보살입상이다. 보살상의 대좌가 우협시의 경우 地神이 연화좌를 받치고 있으며, 좌협시의 경우에는 사자가 연화좌 밑에 표현되어 있다. 본 상은 기년명이 없어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여래좌상과 보살상 및 광배의 천인상 등 전제적인 양식으로 볼 때 낙양천도 이후인 북위말 하남지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23) 불상에 표현된 한족 특유의 전통적인 도상의 제작배경에 관해서는 이하의 논고가 참조된다. 八木春生, 「北魏時代後期の仏(道)教造像に見られる漢民族の伝統図像について」 『佛敎藝術』 245 (1999), pp. 13-47; 八木春生, 『中国仏教美術と漢民族化-北魏時代後期を中心として』 (法藏館, 2004); 강희정, 「南北朝時代 佛敎美術의 漢族 傳統」, 『美術史學硏究』 237·238 (2003), pp. 35-56; 同著, 「북위 불교미술을 통해 본 탁발선비의 문화포용력」, 『中央아시아 硏究』 25 (2020), pp. 29-46.
24) <如来三尊像>의 명문에 관해서는 大阪市立美術館編, 『中国の石仏─荘厳なる祈り』 (大阪市立美術館, 1995), p. 146참조. 명문은 후면 뿐 만 아니라 정면 여래좌상 주위에서도 확인되는데, 주존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大佛光明主王顯宗을 비롯해서 좌우 보살상과 광배의 칠불을 발원한 인명이 새겨져 있다. 후면 명문의 경우, 松原三郎의 『中国仏教彫刻史論』 本文編 (吉川弘文館, 1995), p. 118에서 「開思惟仏光明主申洪景」을 「開思惟仏光明主 景」로 언급하고 있지만, 현지조사에서 인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여래삼존상>에서 교각상과 반가사유상은 성도를 이룬 존격이 아님에도 ‘佛’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북위 명문에서 종종 확인되는 사례이다.
26) 久野美樹, 「造像背景としての生天, 託生西方願望-中国南北朝期を中心として」, 『佛敎藝術』 187 (1989), pp. 25-59; 강희정, 「중국 남북조시대 ‘생천(生天)’ 원망(願望)금동불에 보이는 ‘천(天)’의 개념」, 『미술사와 시각문화』(2003); 김진숙, 「고대 중국 불상 조상기와 정토신앙」 『불교연구』 43 (2015), pp. 137-173 참조.
27) 곡양 수덕사지 출토상에 관해서는 楊伯達著, 松原三郎訳·解題, 『埋もれた中国石仏の研究 : 河北省曲陽出土の白玉像と編年銘文』 (東京美術, 1985); 馮賀軍, 『曲陽白石造像研究』 (紫禁城出版社, 2005); 胡国強主编, 故宫博物院编, 『曲阳造像-你应该知道的200件』 (紫禁城出版社, 2009); 故宮博物院编, 『河北曲阳修徳寺遗址出土佛教造像』 (紫禁城出版社, 2011); 李靜杰·田軍編著, 『定州白石佛像』 (覺風佛教藝術文化基金會, 2019) 등 참조.
28) 태자사유에 관한 경전상의 근거는 『過去現在因果經』 卷第二 중에 “太子今在閻浮樹下. 時王即便與諸群臣, 往彼樹所, 未至之間, 遙見太子端坐思惟” (T.3, No. 189, p. 629a)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修行本起經』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기술한 경전에서는 “今在閻浮樹下, 一心禪定”(T.3, No. 184, p. 467b) 즉 염부수하에서 선정에 들어간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염부수하에서 태자가 사유하는 도상은 이후 여러 경로에서 반가사유상으로 정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宮治昭, 「半跏思惟像を読み解く―アジア的視点からみた菩薩信仰の一断面―」, 『日本仏教綜合研究』 16 (日本仏教綜合研究学会, 2018), pp. 1-28이 참조된다.
29) 현재 ‘龍樹思惟像’의 명문이 확인되는 예는 東魏 武定5년(547) 豊樂七帝二寺邑義人等造白玉龍樹思惟像(河北定縣民衆敎育館 소장,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考古資料 14-015)과 北齊 天保 10년(559) 백대리석상(東京國立博物館)이 확인된다. 다만 모두 대좌만 남아있기 때문에 주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지만, 명문상 주존은 사유상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 수덕사지에서 출토된 龍樹思惟像은 총 3구로 북제 天保3년(552)명상(李靜杰·田軍編著, 앞의 책, 圖162)과 天保6년(555)명상(李靜杰·田軍編著, 앞의 책, 圖200)의 경우 부분적으로 파손이 되기는 했지만 주존이 반가사유상으로 확인되며, 天保9년명상(李靜杰·田軍編著, 앞의 책, 圖238)은 반가사유상의 하반신과 대좌만 확인된다. 이 외에 ‘龍樹坐像’의 명문도 확인되는데, 이 경우 주존은 교각보살상(天保9년명)이다. 본고에서는 지면상 龍樹思惟에 관해 미륵여부의 해석이나 제작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못했지만, 추후 별고를 통해 논의하고자 한다.
30) 馮賀軍, 앞의 책, p. 83, 표 13참조. 곡양 수덕사지 출토상 중에서 太子思惟의 명문은 동위~수대에 각 1구씩 총 3구이며 龍樹思惟는 북제에서만 3구가 확인된다. 이에 반해 思惟銘은 동위:4, 북제:10, 수:7, 총 21구로 다수 확인된다.
32) 선행연구 중 미륵보살이나 도솔천상의 석가보살의 협시로 등장하는 사유형 보살상이 보살 일반의 존격으로서 주존의 설법을 듣는 청중의 성격을 갖는 보살로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배경에 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제작배경에 관해서는 미제로 남겨두었다. 윤용진, 『중국남북조시대의 사유형 보살상 도상 연구-존명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5), p. 26. 한편 고혜련의 경우에는 반가사유상을 “수행자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석가여래의 일생에서 여래가 되기 이전의 수행하는 태자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자와는 견해를 달리한다. 고혜련, 「북위 사유상 도상」, 『中國史硏究』 72 (2011), p. 33; 同著, 『미륵과 도솔천의 도상학』 (일조각, 2011) 참조. 그리고 하북지방과 가까운 산동지방의 북제 반가사유상에 관한 검토를 통해 명문분석과 제작배경을 고찰한 논고가 참조된다. 산동지역은 한반도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는 지역이므로 향후 한반도에 있어서 반가사유상의 전개를 고려할 때 중요한 자료이다. 양은경, 「中國 山東省 出土 東魏∼北齊代 半跏思惟像에 대한 硏究」, 『강좌미술사』 38 (2012), pp. 285-308.
* 〈Table 1〉 was reorganized by Seo Nam-young to fit the contents of this paper based on p.35 among Kang Min-jung’s master’s papers. As for the Mural style(1~3) by Su, Bai, “Kijirusekkutsu no Keishiki Kubunto sono Nendai.”Chugoku Sekkutsu Kijiru Sekkutsu1, Heibonsha, Bunbutsu shuppansha, 1983, pp. 162-178.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