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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6;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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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禎祥嘉瑞, 兆自由來. 未有刺縷圖眞, 援空範狀.” 『辯正論』 권4, 『大正新修大藏經』 52冊, No. 2110, p. 512c (이하 『大正新修大藏經』은 T로 약칭하며, 冊은 생략한다).
2) 본문에서는 제목의 ‘수불’ 대신 ‘수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불교 수상’ 가운데는 부처 뿐 아니라 보살상 등 다양한 불교 존상을 표현한 경우가 많고, 문맥 속에서 ‘자수로 표현된 불교 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문헌 자료에서 ‘수상’이 ‘직성상’과 함께 병치되어 사용된 경우가 많아 당대인들의 수상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데도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3) 직성상은 經絲와 緯絲를 직조해 만든 것이다. 실을 사용하는 2차원 형상이라는 점에서 수상과 매우 유사하여, 옛 문헌이나 문자 기록에서는 수성과 직성상을 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고에서는 필요한 경우 수상과 직성상을 함께 논의한다.
5) 増記 隆介, 「第一章 正倉院から蓮華王院寶藏へ: 古代天皇をめぐる繪畫世界」, 増記 隆介·皿井 舞·佐々木 守俊, 『天皇の美術史1: 古代国家と仏教美術―奈良·平安時代』 (吉川弘文館, 2018), p. 51.
6) 마에 견을 겹친 바탕에 배경은 그대로 두고 도상에만 사슬수를 놓았다. 바늘 굵기는 대략 8-10mm 정도이다 [奈良国立博物館, 『糸のみほとけ: 国宝 綴織當麻曼荼羅と繍仏 修理完成記念特別展』 (2018), p. 259 圖版解說]. 이 수불의 도상에 대해서는 <霊鷲山釋迦如來說法圖> [Roderick Whitfield, 『西域美術: 大英博物館 スタイン·コレクシヨンⅢ』 (講談社, 1982), pp. 277-280] 및 凉州瑞像 등 두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肥田路美, 『初唐佛敎美術の硏究』 (中央公論美術出版, 2011), pp. 298-321: 「凉州番禾縣瑞像の說話と造形」, 『仏教藝術』 217 (1994)].
7) 흰색 견 바탕에 중앙의 의좌불을 비롯해 55구의 인물이 묘사된 수불의 일본 국보 지정 명칭은 <석가여래설법도>이다. 그러나 그 도상에 대해 도솔천의 석가여래설법도, 영취산의 석가설법도, 미륵설법도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大西磨希子, 「奈良国立博物館所蔵 刺繍釈迦如来説法図の主題-則天武后期の仏教美術-」, 『仏教史学研究』 57卷2號(2015), pp. 1-31]. 본고에서는 존명을 생략하고 <여래설법도>로 부른다. 이 수상은 당시 일본에서는 매우 드문 사슬수로 정교하게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7세기 말~8세기 당대 작품으로 추정하여 왔다. 최근 일본 제작설이 제기되었지만(內藤 榮, 「日本の繡佛と織成像」, 奈良国立博物館, 앞의 책, p. 10), 본고는 기존 견해를 따랐다.
8) 神田喜一郞, 「支那繍仏雑記」, 『支那仏教史学』 4권1호(法藏館, 1940), pp. 39-41; 肥田路美, 「繡佛硏究-7·8世紀の2つの作品を中心に」, 『鹿島美術硏究』 年報11別冊(1993), pp. 30-36; 伊藤信二, 『日本の美術 No.470 繡仏』 (至文堂, 2005); 肥田路美, 「第三部第三章 奈良国立博物館所蔵刺繍釈迦如来説法図」, 『初唐佛敎美術の硏究』 (中央公論美術出版, 2011), pp. 401-436; 稻本泰生, 「優塡王像東傳考-中國初唐期を中心に」, 『東方學報』 69(1997), pp. 357-509; 大西磨希子, 앞의 논문, pp. 1-31; 大西磨希子, 「第二部第一章 綴織當麻曼茶羅と唐王朝-敦煌發現の宮中寫經と諸州官寺制」, 『唐代佛敎美術史論攷-佛敎文化の傳播と日唐交流』 (法藏館, 2017), pp. 167-204; 內藤 榮, 앞의 논문, pp. 6-16.
10) “若人爲佛故, 建立諸形像, 刻雕成眾相, 皆已成佛道. 或以七寶成, 鍮石·赤白銅·白鑞及鉛錫, 鐵木及與泥, 或以膠漆布, 嚴飾作佛像. 如是諸人等, 皆已成佛道. 彩畫作佛像, 百福莊嚴相, 自作若使人, 皆已成佛道. 乃至童子戲, 若草木及筆, 或以指爪甲, 而畫作佛像. 如是諸人等, 漸漸積功德, 具足大悲心, 皆已成佛道.” 『妙法蓮華經』권2, T9, No. 262, pp. 8c-9a.
15) “外論曰, …或範土刻檀, 寫獯胡之狀. 鎔金織素, 代夷狄之容. 妙盡丹青, 巧窮剞劂. 一拜一禮, 冀望感通.” 『廣弘明集』 권13, 「辯惑篇」, T52, No. 2103, p. 181a.
17) “彌勒! 若有人以眾雜綵而爲繢飾, 或復鎔鑄金·銀·銅·鐵·鉛·錫等物, 或有雕刻栴檀香等, 或復雜以真珠·螺貝·錦繡·織成, 丹土·白灰. 若泥·若木如是等物, 隨其力分而作佛像, 乃至極小如一指大, 能令見者知是尊容, 其人福報, 我今當說.” 『佛說大乘造像功德經』 권2, T16, No. 694, p. 953b.
18) 비록 실패했지만, 당 현종 천보 2년(743) 鑑眞(688~763)이 두 번째 일본 도항을 시도했을 때 繡師를 동반하였다. 『唐大和上東征傳』, T51 No. 2089, p. 989b.
19) 『全唐文』에서 찬문 제목에 수상이 언급된 것은 17편이다. 그런데 梁肅의 <釋迦牟尼如來像讚>은 내용에서 그림과 자수를 혼용해 석가모니상을 만들었다고 했으므로, 수상으로 볼 수 있다[董誥 等 編, 『全唐文』 권519(中華書局, 1987), p. 5282: 2] 남북조시대 수상 찬문으로는 남제 영명 4년(486) 沈約(441~513)이 쓴 <繡像題贊> 만이 알려져 있다(『廣弘明集』 권16, T52, No. 2103, p. 212b).
20) 대표적인 묘비는 張說(667~731)의 <鄎國長公主神道碑銘>이다. 725년 사망한 공주는 睿宗의 第7女로 몸소 경전을 서사하고 채색의 실로 繡佛 2개를 만들었다(『全唐文』 권230, p. 2330: 2).
22) “教經義緯, 織成行錦於五佛機. 智針行線. 縫飾果繡於三世帳.” 『法華經大意』, 『卍新纂大日本續藏經』 27冊(이하 『卍新纂大日本續藏經』은 X로 표기하며, 冊은 생략한다), No. 583, p. 533a.
24) “言建立諸形像者, 即畵繡土木爲佛像也.” 『法華經玄贊要集』 권20, X34, No. 638, p. 647c. 『법화경현찬요집』은 법상종 제2조인 窺基(632~682)의 『妙法蓮華經玄贊』을 텍스트로 『법화경』을 해설한 것이다.
25) “仲冬勝光寺主僧珍, 奉勅就宮, 迎像於勝光寺供養. 四年(630)獻肇諸寺大德四十九人, 經三七日慶像行道, 日滿設千僧會, 王公竝來行香. 琳又上皇帝繡像頌曰,…爰勅上宮式摹遺景, 奉造釋迦繡像一幀, 并菩薩聖僧, 金剛師子. 備摛仙藻殫諸神變, 六文雜沓五色相宣. 寫滿月於雙針, 託修楊於素手. 妍踰蜀錦麗越燕緹, 紛綸含七映之光. 布護列九華之綵, 日輪吐焰. 藹周客之絲, 蓮目凝輝. 發秦姬之綫. 楊侯百里之珠, 慚斯百福. 子羽千金之璧, 愧彼千輪. 華蓋陸離看疑踊出, 雲衣搖曳望似飛來. 何但思極迴腸, 抑亦巧窮玄妙. 以今歲在庚寅月居太簇, 三元啟候之節, 四始交泰之辰, 乃降綸言於勝光伽藍, 設齋慶像, 四十九僧三七行道.” 『辯正論』 권4, T52, No. 2110, pp. 512c-513a.
30) “爰勅內宮, 式摸遺影造繡像. 一格舉高十有二丈. 驚目駭聽, 絕後光前. 五色相宣, 六文交映. 託修揚於素手, 寫滿月於雙鍼. 麗越燕緹, 絢逾蜀錦. 布護列九華之采, 紛綸含七耀之光. 送在慈恩, 長充供養. 長充供養. 萬機餘暇, 八正爲心, 親紆聖思, 躬操神筆, 製大慈恩寺隆國寺碑文及書. 湛露凝華, 縟緹流韻. 刊乎貞石, 傳之不朽.” T53, No. 2122, p. 1027c.
34) “顯慶元年春正月…冊代王弘爲皇太子. 戊子, 就大慈恩寺, 爲皇太子設五千僧齋. 人施帛三段, 勅遣朝臣行香.”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권8, T50, No. 2053, p. 266a.
35) 善導 撰, 『轉經行道願往生淨土法事讚』 권上, T47, No. 1979, p. 427c. 구체적으로는 법장의 사례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697년 거란 정벌을 앞두고 법장은 무측천의 명을 받아 십일면관음도량을 열어 십일면관음상을 중심으로 행도했다(崔致遠, 『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尚傳』, T50, No. 2054, p. 283c).
36) “景雲中, 睿宗使道士葉善信(616~722)將繡像幡花來修法事. 仍於壇西置洞靈觀, 度女道士七人.” 顏眞卿, <晉紫虛元君領上真司命南嶽夫人魏夫人仙壇碑銘>, 『全唐文』 권340, p. 3454: 1.
37) “先是內出繡畫等像二百餘軀,金銀像兩軀,金縷綾羅幡五百口,宿於弘福寺,并法師西國所將經像舍利等,爰自弘福引出,安置於帳座及諸車上,處中而進. 又於像前兩邊各嚴大車,車上竪長竿懸幡,幡後即有師子神王等爲前引儀。 又莊寶車五十乘坐諸大德,次京城僧眾執持香花,唄讚隨後,次文武百官各將侍衛部列陪從,大常九部樂挾兩邊,二縣音聲繼其後,而幢幡鐘鼓訇磕繽紛,眩日浮空,震曜都邑,望之極目不知其前後.…帝將皇太子後宮等, 於安福門樓, 手執香爐, 目而送之, 甚悅. 衢路觀者, 數億萬人.”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권7, T50, No. 2053, p. 259bc.
38) 654년 고종의 御書碑가 장안성 북문인 芳林門에서 안복문을 거쳐 자은사까지 이동한 거리는 30리다(『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권9, T50, No. 2053, p. 269a). 홍복사는 방림문 바로 옆 서쪽에 위치한 修德坊에 있다. 645년의 행렬은 홍복사를 출발, 안복문을 거쳐 자은사로 향했으므로 이동 거리는 654년과 마찬가지로 30리가 된다.
39) “顯慶三年六月十二日, 西明寺成. 道俗雲合, 幢蓋嚴華. 明晨良日, 將欲入寺. 簫鼓振地, 香華亂空. 自北城. 之達南寺, 十餘里十街衢闐. 至十三日清旦, 帝御安福門上, 郡公僚佐備列于下. 內出繡像長旛, 高廣驚於視聽, 從於大街㳂路南往. 並皆御覽事訖, 方還.” 『集古今佛道論衡』 권4, T52, No. 2104, p. 388c.
41) 행상 관련 기록은 『洛陽伽藍記』 권3의 ‘景明寺’조가 가장 자세하며, ‘景興尼寺’ ‘長秋寺’ ‘昭儀尼寺’ ‘宗聖寺’조 등에도 있다. 행상에 대해서는 『洛陽伽藍記』 관련 조항 및 蘇鉉淑, 「皇權과 佛敎儀禮: 北魏 行像과 梁의 無遮大會」, 『中國古中世史硏究』 29(2013), pp. 123-161을 참조.
48) 하북성 正定縣 廣惠寺 玉佛의 대좌 명문에 의하면, 선대 황제와 황후 등을 위한 9차례의 국기일 행향을 위해 개원 16년(728) 恒州 龍興寺에서 옥불상 1구를 제작했다 [聶順新, 「河北正定廣惠寺唐代玉石佛座銘文考釋-兼議唐代國忌行香和佛教官寺制度」, 『陝西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제44권 제2기(2015), pp. 73-78; 郭玲娣·樊瑞平, 「正定廣惠寺華塔內的二尊唐開元年白石佛造像」, 『文物』 제5기(2004), pp. 78-79]
51) 『國清百錄』 권3, T46, No. 1934, p. 814c. 大西磨希子는 수 문제의 궁정에서 만들어진 수상·직성상·화상 등이 궁정 안에서만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여러 州에 두어진 관사에 배포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으나[大西磨希子, 앞의 논문(2017), pp. 185-186], 화상 이외에 수상과 직성상의 반포 사례는 찾기 어렵다.
53) “咸亨二年七月廿七日, 薨於鄭州之傅舍. 春秋六十有三.…中宮爲造繡像二鋪.” <大唐故越國太妃燕氏墓誌銘幷序>, 吳鋼 主編, 『全唐文補遺』 제2집(三秦出版社, 1995), p. 241.
56) 고종기의 제주관사제에 대한 논의는 蘇鉉淑, 「唐 高宗의 阿育王像 複製와 流布-道宣의 역할 및 諸州官寺制의 기능을 중심으로-」, 『東洋史學硏究』 157(2021), pp. 90-98.
57) 제주관사제를 통한 통일 도상의 유포를 지적한 것은 肥田路美와 大西磨希子다. 특히 후자의 경우, 敦煌에 현존하는 당대 궁정사경의 존재 및 일본에 현존하는 <綴織當麻曼荼羅> 연구를 통해 자수나 철직의 불교미술품이 표준작으로서 궁정 공방에서 제작되고 제주관사제를 통해 전국에 반포되었을 가능성을 정교하게 논증했다[大西磨希子, 「敦煌發現の宮廷寫經について」, 『敦煌寫本硏究年報』 6(2012), pp. 41-66; 大西磨希子, 앞의 논문(2015), pp. 1-31; 大西磨希子, 앞의 논문(2017), pp. 167-204]. 필자도 그의 견해에 동의하나, 아쉽게도 그의 논증은 대부분 무측천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필자는 과거 <明徵君碑文>의 분석을 통해 통일 도상의 전국 유포가 제주관사제가 처음 실시된 고종대부터 이미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蘇鉉淑, 앞의 논문(2021b), pp. 94-98].
58) “今故於彼度人, 常滿七七. 各兼衣鉢錢二百貫, 絹二百匹, 蘇參拾斛, 繡像織成像, 新舊翻譯一切經一藏, 并幡華等物.” 高宗, <攝山栖霞寺明徵君碑銘>, 『全唐文』 권15, p. 183: 2. 이 명문의 해석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蘇鉉淑, 앞의 논문(2021b), p. 95의 주78을 참조.
61) 고종 때 관사는 대부분 景星寺로 불렸다 [蘇鉉淑, 앞의 논문(2021b), pp. 92-93]. 容州 경성사는 천수 연간(690~691)에는 대운사로, 신룡 연간(705~706)에는 용흥사로 사명을 바꾸었으며(盧藏用, <景星寺碑銘>, 『全唐文』 권238, pp. 2407: 2-2408: 1), 靑州 용흥사는 대운사에서 용흥사로 이름을 바꾸며 관사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밖의 사례는 塚本善隆, 『国分寺と隋唐の仏教政策並びに官寺』, 『塚本善隆著作集』 第6卷 日中仏教交涉史研究』(大東出版社,1974), pp. 31-36 참조.
64) “(貞觀)9년, 唐溫州內道場供奉德圓座主, 付務州人詹景全向國之便. 贈則天皇后縫繡四百副之內, 極樂淨土變1鋪(長2丈4尺廣1丈5尺), 縫繪靈山淨土變1鋪(長1丈5尺廣1丈). 付法像, 上自釋迦迦葉下至唐慧能之影像二幀子(各廣4丈)” 『天台宗延曆寺座主圓珍傳』, 『大日本佛敎全書』 28(肥田路美, 앞의 책, p.416에서 재인용. 괄호는 小注임).
67) “妍踰蜀錦, 麗越燕緹.…楊[隋]侯百里之珠, 慚斯百福. 子羽千金之璧, 愧彼千輪.” 『辯正論』 권4(T52, No. 2110, p. 513a)에서는 “楊侯百里之珠”로 썼으나 『全唐文』에서는 “隋侯百里之珠”로 썼다(권903, <皇帝繡像頌>, p. 9418: 2). 隋侯珠는 전국시대 이래 和氏璧과 함께 천하 영웅들이 갖고자 했던 보물로, 『淮南子』나 『搜神記』에 자세한 서술이 있다. 반면, 楊侯珠 고사는 어디에도 출현하지 않아 본고에서는 『全唐文』을 따라 隋侯珠로 풀었다. 子羽璧은 동진 張華(232~300)의 『博物志』 권7에 나오는 이야기로 자우의 옥벽을 탐낸 황하의 하백신이 두 마리 용을 보내 이를 빼앗고자 했으나 실패하였으며, 자우는 자신이 탐욕스런 사람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강을 건넌 후 이 벽을 깨뜨려 버렸다는 ‘斬蛟破璧’에서 유래한다.
68) 呂溫(771~811), <藥師如來繡像讚并序>, 『全唐文』 권629, p. 6349: 2; 白居易(772~846), <繡觀音菩薩讚并序>, 『全唐文』 권677, p. 6918: 1; 圓仁, 『入唐求法巡禮行記』 권3, ‘開成5年’조, 『大藏經補編』18冊, No. 95, p. 127.
78) Francesca Bray, Technology and Gender: Fabrics of Power in Late Imperial Chin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pp. 175-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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