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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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지영, 「18세기 畵員의 활동과 畵員畵의 변화」, 『한국사론』 32(1994), p. 25 참조. 강관식은 도화서 화원들이 공과 사의 양면에서 중층적·복합적으로 활동하였고, 差備待令畵員을 선발하기 위한 녹취재가 화원들의 작화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논하였다. 강관식, 「정조대(正祖代) 규장각(奎章閣)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녹취재(祿取才)의 인물화(人物畵) 화제(畵題)」, 『간송문화』 57(1999), p. 78 참조.
4) 황정연은 조선시대 서화 수장을 시기에 따라 궁중, 종친, 사족, 중인층 등 수장의 주체별로 구분하여 논하였다. 황정연, 『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 (신구문화사, 2012). 박효은은 회화 주문에 부응했던 직업화가들로 최북, 김응환, 김홍도, 신한평, 이재관, 허련, 장승업 등을 언급하며 조선후기 회화 후원의 영향과 의의를 논하였다. 박효은, 「《石農畵苑》과 17∼18세기 한국화단의 後援 문제」, 『숭실사학』 34(2015), pp. 97-152 참조.
5) 장진성은 정선이 밀려드는 주문에 응대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그려낸 그림들을 수응화의 범주에서 해석하였다. 장진성, 「정선과 수응화」,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사회평론, 2006), pp. 264-288. 정선이 특정 주문자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작품들은 수응화와는 구별되는 注文畵의 성격을 지닌다는 논의는 김가희, 「鄭敾과 李春躋家門의 繪畵 酬應 硏究: 《西園帖》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1), pp. 1-6. 대만의 石守謙은 明代 吳派의 문인화가 沈周(1427∼1509)가 교우들을 위해 그려준 그림을 통칭해 應酬畵라 규정했다. 그는 문인화가와 직업화가에 따라 응수화의 성격이 달라지는데, 직업화가의 응수화는 일반 수요층을 위해 매매용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구분 지었다. 石守謙, 「沈周的應酬畵及觀衆」, 『從風格到畵意: 反思中国美術史』 (臺北: 石頭出版, 2010), pp. 227-230 참조.
6) 이 연구에서는 주문자의 주문과 그에 응한 화가의 제작 활동에 걸친 일련의 과정을 주문제작이라는 개념으로 포괄하여 파악해보고자 한다. 주문제작 회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연주, 앞의 논문, pp. 63-67 참조.
7) 조선후기 주문자는 화가에게 금전 이외에도 숙식 및 비단과 같은 사치품, 음식, 생필품 등 다양한 현물로 그림에 대한 경제적 비용을 지급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장진성,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의 경제적 여건과 사적 활동」, 『화원: 조선화원대전』 (삼성미술관 Leeum, 2011), pp. 296-307 참조.
8) 徐居正 編, 『東文選』, “李仁老 二相歸休圖贊序曰……爰請畵局朴子雲 作二相歸休圖 爲朝家之盛事.” 吳世昌, 『국역 근역서화징』(상) (시공사, 1998), pp. 95-96 참조.
9)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先是 嘗使畵家名手韓某 摸白衣觀音像 其傍所立雙竹 則不令其人畵之 乃就丁學士而安 固乞掃焉 盖丁公墨竹 妙絶一時故爾.” 吳世昌, 앞의 책(상), pp. 113-114 참조.
11) 이신흠은 조선 중기의 문인 李好閔(1553∼1634), 李景嚴(1579∼1652) 父子의 別墅인 斜川庄의 경관을 묘사한 〈斜川庄八景圖〉 (1617 이전)를 그렸다. 삼성미술관 Leeum 학예연구실 편, 임재완 역주,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고서화 제발 해설집(Ⅲ)』 (삼성미술관 Leeum, 2009), pp. 18-21 참조. 이징은 鄭汝昌(1450∼1504)의 별서도 주문에 기용되어 〈花開縣舊庄圖〉 (1643)를 그린 것으로 전한다. 조규희, 「朝鮮時代 別墅圖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pp. 172-173 참조. 조세걸이 안동 김씨 金壽增(1624∼1701)의 주문으로 《谷雲九曲圖帖》 (1682)을 제작하고, 宋時烈(1607~1689)과 김수증의 주문을 받고 〈聚星圖〉를 제작한 것도 권세가의 세거지를 이상화하고 정치적 규합을 도모하는 그림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반영한다. 조규희, 「《谷雲九曲圖帖》의 多層的 의미」, 『미술사논단』 23(2006. 12), p. 256. 강신애, 「조선 후기 〈聚星圖〉의 제작과 그 의미」, 『미술사학연구』 309(2021), pp. 41-77 참조.
12) 姜世晃, 『豹菴遺稿』, 「送金察訪弘道金察訪應煥序」, “凡人之欲傳神寫照者, 禮邀良工, 若能極其傳摹, 無一髮不似, 則方得快意喜樂.” 강세황 저, 김종진·변영섭·정은진·조송식 옮김, 『표암유고』 (지식산업사, 2010), pp. 349-350 참조.
13) 당시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강관의 「癸秋記事」 (1783)에 대해서는 이태호, 「조선 후기 초상화의 제작공정과 비용이명기 〈강세황 71세 초상〉에 대한 「계추기사」를 중심으로」,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조선후기 초상화와 카메라 옵스큐라』 (생각의 나무, 2006), pp. 157-161 원문과 해석 참조.
14) 중국 明代 궁정 화가들이 관료 후원층과 면밀한 관계망을 형성하며 私的 주문자를 확보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지적은 Richard M. Barnhart, “The Return of the Academy”, Possessing the Past: Treasures from the National Palaces Museum, Taipei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and the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1996), pp. 335-337 참조.
15) 馬聖麟, 『安和堂私集』 下冊(筆寫本), 「平生憂樂總錄」, “丁酉五十一歲……金別提弘道 申萬戶漢枰 金主簿應煥 李主簿寅文 韓主簿宗一 李主簿宗賢 等名畵師會于中部洞 姜牧官熙彦家 而公私酬應. 多有可觀者 余素有愛畫之癖, 自春至冬, 往來探玩或書畫題.” 林榮澤 編, 『李朝後期閭巷文學叢書』6 (驪江出版社, 1991), p. 205. 해석은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 p. 26 참조. ‘공사간의 수응에 응했다’는 주문에 응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酬應의 語義에 대해서는 단국대학교부설 동양학연구소 편, 『漢韓大辭典』 14(1999), p. 35 참조.
16) 李玄煥, 『蟾窩雜著』, 「崔北畵說」, “四方之人 來請畵者 足相躡於其門 王公貴人 甚或使之以畵師 七七終厭之.”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휴머니스트, 2007), pp. 122-123, p. 414 참조. 「崔北畵說」의 전체 원문과 해석은 국립전주박물관, 『호생관 최북』 (2012), pp. 155-157 참조.
17) 趙熙龍, 『壺山外記』, “一日, 有人售一梅, 甚奇, 無金可易. 適有餽錢三千者, 要畵之贄也.” 趙熙龍, 實是學舍 古典文學硏究會 譯註, 『壺山外記』 (한길아트, 1999), pp. 74-77.
18) “辛丑九月十一日 余以御用圖寫監董官 赴奎章閣 使畵師韓宗裕 圖余小眞於便面上 頗得彷佛 與庶孫彝大.” 변영섭, 『표암 강세황 회화 연구(개정판)』 (사회평론, 2016), p. 70 원문과 해석 재인용. 1781년 正祖의 어진 제작에 강세황이 副摠管으로 임명되고 한종유를 비롯하여 申漢枰(1726~?)과 김홍도가 畵師로 활동했던 사실은 『承政院日記』, 1781년 8월 기사 참조.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검색 사이트 http://sjw.history.go.kr/main.do)
19) 申光洙, 『石北文集』卷6, 「驪江錄」下, 「崔北雪江圖歌」, “崔北賣畵長安中, 生涯草屋四壁空. 閉門終日畵山水, 琉璃眼鏡木筆筩. 朝賣一幅得朝飯, 暮賣一幅得暮飯. 天寒坐客破氈上. 門前小橋雪三寸.” 홍선표, 「崔北의 生涯와 意識世界」, 『미술사연구』 5(1991), p. 6 원문과 해석 참조.
22) 鄭克淳, 『庶尹公遺稿』, 「卞氏畵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刊年未詳), pp. 16-17, “委巷之人卞氏子弱冠以善畵貓名動亰師 踵門邀者日百數……丙寅冬 余力而致之留二日得所爲猫.” 이종묵, 「정극순의 연뇌유고-서양화, 변상벽, 매합에 대한 이야기를 겸하여」, 『문헌과 해석』 36(2006), pp. 92-93. 손병기, 「和齋 卞相壁의 繪畵 硏究」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3), pp. 4-5 참조.
23)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 1 附錄 下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戊申年 4월 초1일, “于斯時也, 若非檀園畵蕉, 畵菊, 畵梅竹, 畵壽星, 安能餙此喜哉. 安能餙此喜哉. 酒三行. 或展軸成字. 或傾盃畵醉. 或狂叫亂呼. 或傞傞屢舞. 豪絲急管. 又侑之. 此皆靑莊之所樂. 而諸賓之爲丈丈壽也.” (한국고전종합 DB, http://db.itkc.or.kr/) 이 내용은 진준현, 앞의 책, p. 46에 소개된 바 있다.
24) 『頤齋亂藁』 第3冊, 卷18, 英祖 47年 辛卯(1771), 四月十七日丁亥, 665쪽, “是日, 尹上舍在德, 又自泮齋來, 約以明日送餽崔北畵八帖. 因請假帖六丈. 崔北者, 京城閭巷人, 字七七, 以其名北左右從七故也, 自號豪生館, 謂其筆端資生故也.” 강관식, 「조선 후기 지식인의 회화 경험과 인식」,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pp. 498-499, pp. 636-645 참조.
25) “入格種 來時有若干持來者 而其中朱紅粉兩彩 落在其中 無他求得之路 敢以替告 彩六七或朱紅 則唐紅倭紅間一錢 得付此便伏望.” 황정연, 앞의 책, pp. 117-118. 원문과 해석은 경기도박물관, 『초상, 영원을 그리다』 (2008), pp. 141-142 참조.
26) “檀園 棐几 下 雅集靳枉 至今悵恨 日來憂患頓減否 熱益甚 勞念無已 欲得檀園畵 蓮花數柄 一破蕉葉覆之 倩京山篆其首 用華嚴經 身如芭蕉 心似蓮花 一句語 掲之座隅 滌此暍病 委致畵本一張 而不可無贄 謹書陋詩八章 以先之 冀檀園一投揮染 以表同好之意 不備 大中頓首.” 안대회, 「김홍도에게 그림을 부탁하는 편지」, 『문헌과 해석』 53(2010), pp. 253-256 재인용.
28) 김정겸은 김창흡의 5촌 조카로 알려진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간송문화』 66(2004), pp. 105-106 참조. 金昌協(1651~1708)과 김창흡 형제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은 ‘白岳詞壇’으로 불리었으며 이는 백악을 중심으로 거주했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고연희,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연구-鄭敾과 農淵 그룹을 중심으로-』 (일지사, 2001), p. 15 참조.
29) 『東國輿地勝覽』 卷之三, ‘漢城府’條, “北岳後聳 官展增輝.” 李文奎, 「조선후기 서울 市井人의 생활상과 새로운 志向 意識」, 『조선후기 서울의 사회와 생활』 (서울시립대학교부설 서울학연구소, 1988), p. 145 참조.
30) 李光文, 《海山圖帖》, 「又題海山圖帖」, “余之遊楓嶽也, 內閣供奉金君夏鍾從焉. 盖善畵, 而工於山水者, 其志尙, 適與余合.” 朴銀順 著, 『金剛山圖 연구』 (일지사, 1997), p. 101의 해석과 p. 410의 원문 참조.
32) 〈금강전도〉에는 “金剛全圖 歲乙亥 毫生館寫贈 觀生庵主人 金章升”이라는 제문이 쓰여 있다. 변혜원, 「毫生館 崔北(1712~1786년경)의 生涯와 繪畵世界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p. 140 참조.
33) 김응환이 방한 〈금강전도〉가 정선의 금강산 그림인 것으로 추측하고, 이를 통해 조선 후기에 정선의 영향을 받은 금강전도가 어떻게 전래되어 갔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지적은 朴銀順 著, 앞의 책, p. 195 참조.
34) 최인우는 31세에 진사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안산에 은거하며 학문을 추구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최북과 안산 문인들과의 교유는 권혜은, 「崔北의 花鳥翎毛畵를 통해 본 安山文人들과의 交遊」, 『미술사연구』 26(2012), pp. 139-159. 국립전주박물관, 앞의 책, pp. 106-107 참조.
35) 〈수간모옥도〉에는 “몇 채의 오막살이가 절로 마을을 이루었네. 고송유수관도인이 단원(김홍도)의 책상에서 그려 백하신동에게 준다(數間茅屋自成村 古松流水舘道人 寫于檀園榻 贈白下申童)”는 제문이 전한다. 김소영, 「古松流水館道人 李寅文 硏究」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5), p. 161 참조. 〈소림모정도〉에는 “찬하관에 비가 갠 뒤, 청류관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써서 평호거사께 바친다(粲霞館霽後 淸流觀寫呈萍湖居士)”는 제문이 전한다. 겸재정선기념관, 『겸재정선기념관 소장유물도록』(2011), 도 13, p. 40 참조.
36) 朴齊家, 『貞蕤閣集』詩集 2, 「金應煥畫 二首」, “誰向南宗傳妙訣 數柯秋樹一茅亭.” 박제가, 정민·이승수·박수밀 외 옮김, 『정유각집』상 (돌베개, 2010), p. 466.
37) 제임스 케힐은 1982년 江蘇省 淮安에서 발견된 15세기 후반경 무덤에서 나온 화원화가들의 그림에서 率略한 화풍이 보이는 점은 그들도 寫意畵 방식으로 작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지적했다. 또한 그는 사의화가 語義 그대로 ‘생각을 스케치한 그림’으로 그려지기보다 단순하면서도 매우 빠르게 그릴 수 있어 작은 선물용으로 다량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제임스 케힐, 장진성 옮김, 『화가의 일상: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사회평론아카데미, 2019), pp. 64-65 참조.
38) “李命基畵面, 金弘道畵體, 兩人名於畵者, 而不能畵一片靈臺惜乎, 何不修道於林下, 浪費心力於名山雜記槪論其平生, 不俗也貴. 丙辰夏日, 十友軒 六十二歲翁 自評.” 문화재청 편, 『한국의 초상화-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눌와, 2007), p. 230 참조.
39) 김홍도의 《서원아집도병풍》과 강세황의 화평은 진준현, 앞의 책, pp. 511-512 참조. 이상 언급한 작품과 도판은 이연주, 앞의 논문, pp. 156-159, pp. 294-295 참조.
43) 장수와 복록을 상징하는 신선도가 궁중에서 세화로 진상되던 상황에 대해서는 유미나, 「채색 선인도(彩色仙人圖), 복·록·수를 기원하는 세화(歲畵)」, 『강좌미술사』 53(2019), p. 172 참조.
44) 〈남극노인도〉에는 “기미 12월 낙서 산포가 그려 최형 영숙의 회갑에 대한 우의로 바친다(乙未復月 駱西散逋寫 奉以 寓庵崔兄永叔回甲)”는 제문이 있다. 차미애,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 (사회평론, 2014), p. 157 참조.
45) 이 병풍의 <仙鹿圖>에는 역관 이민식으로 밝혀진 李君 用訥에게 그려준다는 제문이 남아있다. 김홍도의 《神仙圖八帖屛風》에 대해서는 진준현, 앞의 책, pp. 103-104, 도 97-1~8 참조.
47) 〈慕堂洪履祥平生圖〉 (1781)는 慕堂 洪履祥(1549~1615)의 일생을 묘사한 것으로 이 병풍의 마지막인 회혼식 장면의 윗부분에는 ‘辛丑九月士能畵于瓦署直中’이라고 적혀 있어 김홍도가 제작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朝鮮時代 風俗畵』 (2002), pp. 90-93, pp. 297-298 참조. 김홍도의 〈仕女圖〉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신축(1781)년 4월 사능이 연파관주인을 위하여 그렸다(辛丑四月士能爲煙波觀主人作)”는 제문이 남아있다. 진준현, 앞의 책, p. 28 참조.
48) 〈매하쌍치도〉에는 “정미년 음력 7월에 삼기재 칠칠이 그려 김씨 성을 가진 친구와 이씨 성을 가진 친구에게 준다(丁未年歲 辛未梧月 三奇齋 七七寫 贈金友 次贈李友而貫)”는 제문이 전한다. 국립전주박물관, 앞의 책, p. 162 참조. 조선시대 영모화의 흐름에 대해서는 洪善杓, 「韓國의 花鳥畵」, 『韓國의 美』 18-花鳥四君子(중앙일보, 1985). 최북의 화조영모화에 대해서는 권혜은, 「호생관 최북의 화조영모화」, 국립전주박물관, 앞의 책, pp. 144-150 참조.
49) 김씨와 이씨 친구가 실제 최북의 친구였다면 이와 같이 모호한 호칭을 쓰기보다 친구의 이름이나 호를 구체적으로 명시했을 것이다. 아마도 주문 대응 과정에서 주문자를 친근하게 대하기 위한 의도에서 친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50) 〈어약영일도〉에는 “정해년(1767) 2월 삼현을 위해 장난삼아 그렸다(丁亥春仲爲三玄戲艸)”는 제문이 남아 있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간송문화』 79(2010), pp. 162-163. 『한양가』에는 “다락벽 鷄犬獅虎, 장지문 魚躍龍門”이라는 구절이 있어 집안의 벽면에 붙이기 위한 벽사용, 길상용 영모화가 광통교에서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金智勇 번역 주석, 『삼도부와 한양가 그리고 한양오백년가』 (명문당, 2011), p. 159 참조.
51) 김홍도가 이의수에게 그려준 게 그림에는 “1784년 여름, 갑진년 6월 단원이 임청각 주인을 위해 그렸다(甲辰流夏 檀園爲臨淸閣主人寫)”는 제문이 있다. 이태호, 「김홍도의 안기찰방 시절 신자료新資料-임청각 주인에게 그려준 단원화첩과 성대중의 편지를 중심으로」, 『朝鮮後期 花鳥畵展』(동산방, 2013), pp. 139-151. 김홍도의 〈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씨 노인의 행차에 찬수(반찬)로 그려준다(爲柳老贐行饌需 寫贈)”고 쓰여 있다. 진준현, 앞의 책, p. 607 참조.
52) 〈유봉전도〉에는 “숭정기원 후 다섯 번째 을유년(1885) 5월 하순에 희원 이한철이 경승재에서 그렸다(崇禎紀元後五乙酉五月下澣 希園 李漢喆寫 於敬勝齋)”는 제문이 쓰여 있다. 〈유봉전도〉와 이 작품이 수록된 《影堂紀蹟》에 대해서는 문화재청 편, 앞의 책, pp. 306-307, pp. 476-487 참조.
54) 도화서의 폐지에 따른 화원들의 소속 및 업무의 변화는 박정혜, 「대한제국기 화원畵院 제도의 변모와 화원의 운용」, 『근대미술연구』 (2004), pp. 88-118. 대한 제국기 도화서 화원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강민기, 「제국의 황실화가들, 화가에서 ‘시대인’으로」, 『왕의 화가들』 (돌베개, 2012), pp. 222-226 참조.
55) 『每日新報』, 1916년 5월 24일자 1면, 崇陽山人 張志淵이 연재한 松齋漫筆의 逸士遺事. 박준영, 「朝鮮 末期 畵員琳塘 白殷培의 生涯와 繪畵」, 『미술사연구』 25(2011), p. 401 참조.
57) 최완수, 「芸楣實紀」, 『간송문화』 37(1989. 10), pp. 46-47. 金相燁, 「小癡 許鍊의 교유관계」, 『동양고전연구』 16(2002. 06), pp. 66-76 참조.
59) 〈名賢簡牘〉 十一, 「田琦의 書簡」, “懇者 尊庄藥料 曾知入用於擔局 而聞其局今已下簾云 或能移用於敝舖否.…… 曾托諸畵中 許小癡三幅 月前已來到 從當滙鑒也. 不次上 弟 田琦 再拜 上.” 국립광주박물관,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 200년』 (2008), p. 122의 원문과 해석, 도판 57 참조. 전기의 중개 활동에 대해서는 任昌淳, 「解題《杜堂尺素》」, 『서지학보』 3(1990), pp. 167-176. 성혜영, 「19세기의 중인문화와 고람 전기(1825~1854)의 작품세계」, 『미술사연구』 14(2000. 12), pp. 137-174. 전기의 서화 중개를 직업적 행위로 평가한 연구는 황은영, 「古藍 田琦의 繪畵仲介活動」, 『강원사학』 21(2006), p. 121 참조.
62) 광통교의 서화 유통에 대해서는 윤진영, 「조선 말기 궁중양식 장식화의 유통과 확산」, 『조선 궁궐의 그림』 (돌베개, 2012), pp. 338-342, p. 401 참조.
Western Collection of Folk Painting from the Late Joseon Period2018 December;300(0)
A Study on Paintings of Han Palace in the Late Joseon Period2018 September;2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