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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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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에서는 어린아이의 형상을 나타낸 문양에 대해 어린아이 영(嬰), 놀이 희(戲)자를 써서 영희문(嬰戲文)이라 칭한다. 일본에서는 ‘당나라 아이’라는 의미로 당자문(唐子文)이라 하며, 국내에서는 동자문(童子文)이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어린아이[童子]’라는 본연의 의미를 잘 드러내며 가장 포괄적인 ‘동자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2) 가타야마 마비(片山まび)는 <청자 상감 동자 씨름문 접시>에 관한 논고에서 씨름 도상을 동자문의 일종으로 보았고 영희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고려의 실제 씨름 모습을 담은 독자적 도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 외에 동자문 청자는 어린이를 주제로 한 전시 관련 논고에서 아동상의 하나의 예로서 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가타야마 마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청자상감동자씨름문접시」,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2권 : 한국 및 동양의 미술』 (사회평론, 2006);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동심 : 한국미술에 나타난 순수의 마음』 (2008); 호암미술관, 『동자, 순수와 행복의 얼굴』 (2013); 국립청주박물관, 『어린이 미래의 희망을 보다』 (2015).
3) 고려 1085년에 세워진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의 상층 기단 면석의 오른쪽에 사리기를 봉송하고 있는 2명의 동자가 표현되어 있다. 임영애, 「한국 조각의 동자 이미지」, 『동심 : 한국미술에 나타난 순수의 마음』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2008), p. 119.
8) 민족문화유산연구원, 『강진 사당리 43호 고려 청자요지 : 발굴조사 보고서』 (2015), pl. 45; 고려청자박물관 소장(S-23M-0305, S-23M-0085, S-42-0005, https://www.celadon.go.kr ).
10) 국립중앙박물관, 『강진 사당리 도요지 발굴조사 보고서』 (2015), p. 378, pl. 854; 국립중앙박물관, 『부안 유천리 도요지 발굴조사 보고서』 (2011), p. 35, pl. 27. 민족문화유산연구원, 『강진 사당리 도요지 발굴조사 보고서』 (2021), p. 244, pl. 27.
14) A-연화, 포도 유형의 동자문이 시문된 압출양각 발의 기형은 고려 중기 주요 품종으로 새롭게 생산된 기형이 대부분인 것으로 파악된다. 관련 내용은 최혜주, 앞의 논문, pp. 65-72 참조. 압출양각 청자에 대해서는 장남원, 「高麗中期壓出陽刻 靑瓷의 性格」, 『美術史學硏究』 242·243(2004), pp. 109-115 참조.
16) 고려청자박물관, 『강진 사당리 고려청자 특별전』 (2016), p. 25; 전북문화재연구원, 『부안 유천리 3구역 청자요지군 발굴조사 보고서Ⅰ』 (2018), pp. 89, 81; 전북문화재연구원, 『부안 유천리 3구역 청자요지군 발굴조사 보고서Ⅱ』 (2020), p. 267, pl. 173 외 다수.
17)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마도해역 : 시굴조사보고서』 (2017), p. 56, pl. 12;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 : 수중발굴조사보고서2』 (2018), p. 189, pl. 98.
18) 국립중앙박물관, 앞의 책 (2008), p. 54, pl. 54;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 고려궁성』 (2009), p. 78;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울주 연자도 유적』 (2012), p. 535, pl. 430;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실상사Ⅱ 발굴조사보고서』 (2006), p. 574, pl. 556; 국방문화재연구원, 『강화 월곳리·옥림리 유적』 (2016), p. 520; 中原文化財硏究院, 『江華 玉林里 遺蹟』 (2012), p. 173, 224; 鎌倉市敎育委員會, 『鎌倉市埋藏文化財 緊急調査報告書 6』 (神奈川縣鎌倉市敎育委員會, 1990). 한성욱, 「日本 鎌倉出土 高麗靑瓷의 硏究」, 『동아문화』 1 (2005), p. 6에서 재인용.
19) 강도시기(1232~1270)는 고려왕실이 강화도에 머무른 시기로 고려궁성 운영기간의 공백기가 된다. 한나래, 「개성 고려궁성 출토 자기의 성격」, 『개성 고려궁성』 (2009), p. 164. 혜음원의 운영 시기는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파주 혜음원지 발굴조사 보고서 : 1차~4차』 (2006), pp. 365-367 참조.
20) 강화 옥림리 건물지의 경우 중성과 같은 시기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월곳리 건물지에 대해서는 태묘(1255년 이후), 최항(또는 설신)의 저택(1262년 이전), 이궁(1264년 이후 또는 1292년 경)일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중원문화재 연구원, 『江華 玉林里 遺蹟』 (2012), p. 368; 국방문화재연구원, 앞의 책 (2016), pp. 453-455.
22)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동심, 한국미술에 나타난 순수의 마음』 (2008), pl. 38. 역상감 기법에 대한 내용은 김세진, 「高麗 13世紀 靑瓷 硏究」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pp. 68-69 참조.
24) 이 유형의 운문은 양식 변화의 흐름상 14세기 제작품에 나타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혜경, 「高麗時代靑瓷 雲鶴文 硏究」 (충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pp. 73-74.
25)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청자 상감 동자 포도 당초문 표형병>에 보이는 문양 양식과 같이 동자의 인체 비례가 맞지 않거나 쌍계가 경계 없이 표현되는 등 13세기의 양식과 구별되는 특징을 보이는 전세품들이 여러 점 존재하여 14세기까지 제작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혜주, 앞의 논문, p. 86 참조.
26) <Table 2>는 현재까지 국내외 국공립 및 사립 기관에서 공개한 동자문 청자 자료를 수집하여 제시한 것이다. 공개되지 않은 자료 및 필자가 발견하지 못한 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수치가 될 수는 없겠으나 대략의 제작 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 생각하여 제시하였음을 일러둔다.
28) 『東國李相國集』 卷12 古律詩 「乾聖寺帝釋殿主謙師所居樓…」; 『東文選』 卷11 五言排律 「鄭相國暉蒲萄軒次韻」; 『牧隱詩藁』 卷16 詩 「架松簷移葡萄架」; 『牧隱詩藁』 卷18 詩 「水精葡萄」 등의 내용 참조.
29) 청자는 지배 계층의 문사적 성향과 문인 문화의 형성으로 인해 완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련 내용은 장남원, 「물질문화 관점으로 본 고려청자」, 『미술사와 시각문화』 18(2016) 참조.
30) 『東文選』 卷11 五言排律 「鄭相國暉蒲萄軒次韻」. “架上蒲萄密…味珍殊可貴 酒力豈云微 試問爲州樂 何如一醉歸”; 『陶隱集』 卷3 詩 「題神孝寺息師蒲萄軒」. “…樓外蒲萄一架秋 最好滿盤堆馬乳 何須作酒博涼州.”
31) 『牧隱詩藁』 卷11 詩 「塗遇韓平齋 賞花花園…」. “…高吟薔薇亭 痛飮葡萄酒…”; 『牧隱詩藁』 卷16 詩 「詠杏」. “…華筵日日葡萄酒…”; 『牧隱詩藁』 卷31 詩 「閏月廿又四日…」. “…君王賜酒中官來 葡萄灩瀲黃金杯…”; 『謹齋集』 卷1 詩 「葡萄酒和州隱者持以勸余」의 내용 참조.
32) 『牧隱詩藁』 卷8 詩 「觀擊毬」. “…所以宮壺鴨頭綠…”; 『牧隱詩藁』 卷3 詩 「六月十五日 憶鄕里游燕」. “紫霞洞裏携壺去…玉杯瀲灎蒲萄綠…”; 『牧隱詩藁』 卷3 詩 「紀事」. “…値此太平朝 樽酒蒲萄凸….”
33) 『고려도경』에서 설명하는 탕호(湯壺)는 다탕용 주자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추정된 바 있다. ‘탕(湯)’은 기능에 따라 붙여진 용어이므로 주자 기종은 호(壺)라는 용어로 통용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宣和奉使高麗圖經』 卷31 器皿2 「湯壺」. “湯壺之形 如花壺而差匾 上蓋下座 不使泄氣 亦古溫器之屬也 麗人烹茶 多設此壺”; 장남원,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기명류(器皿類) 연구」, 『역사와 담론』 70(2014), p. 180. 호는 목이 길고 배가 불룩한 형태이자 준(樽), 동이[罍], 단지[甕], 항아리[甀]보다는 작은 기종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호는 현재 병기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東國李相國集』 卷19 銘 「漆壺銘」의 내용 참조.
35) 『고려도경』 기록에 의하면 Fig. 2와 같은 기종의 주 용도는 다기로 추정되나(각주33), 포도주를 담는 기물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4세기 몽골의 영향 아래 있었던 이란의 그림에는 Fig. 2와 같은 주자와 승반 세트가 등장하는데, 주자 옆에 놓인 잔에 붉은색의 액체가 담겨 있어 포도주의 주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림에 표현된 승반의 내부도 붉은색으로 묘사되어 있어 잔의 내용물이 포도주를 나타낸 것인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Diez Album』 fol. 72, S. 29. 베를린국립도서관 자료 검색 페이지 참조(https://digital.staatsbibliothek-berlin.de/). 그림 속 붉은 액체가 담긴 고족배의 표현을 포도주를 담은 것으로 추정하여 논지를 전개한 연구로 김윤정, 「고려시대 왕실 연례 문화와 청자 주기(酒器): 왕권과 주기」, 『다기와 주기를 통해 본 고려시대 차와 술 문화』 (고려음, 청자에 담긴 차와 술 문화 연계 학술대회 자료집, 2022)가 있다.
36) 원 황제의 포도주 하사 내용은 1285년, 1296년, 1297년, 1298년, 1302년, 1308년 기록에 등장한다. 『高麗史』 卷30 世家 卷第三十 忠烈王 11年 8月 戊辰. “元卿等還自元 帝賜王蒲萄酒”; 『高麗史』 卷31 世家 卷第三十一 忠烈王 22年 3月 己卯. “…太后賜蒲萄酒二器…”; 『高麗史』 卷 31 世家 卷第三十一 忠烈王 23年 3月 戊辰. “王詣闕 帝賜蒲萄酒”; 『高麗史』 卷31 世家 卷第三十一 忠烈王 24年 9月 丙申. “…自公主棄世 王獨處無聊 帝賜王蒲萄酒…”; 『高麗史』 卷32 世家 卷第三十二 忠烈王 28年 2月 庚寅 “帝賜王葡萄酒”; 『高麗史』 卷32 世家 卷第三十二 忠烈王 34年 2月 丁巳. “中贊崔有渰還自元 帝賜王蒲萄酒.”
37) 안축(安軸, 1282~1348)의 『근재집』에는 화주(和州) 지역의 은자가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권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화주는 함경도 영흥부(永興府)의 옛 이름으로 1217년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지역이다. 따라서 포도주의 고려 유입은 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박세욱, 「우리나라 포도와 포도주 전래에 관한 小考」, 『江原人文論叢』 16(2006), p. 255.
38) 고려청자박물관, 앞의 책 (2016), p. 3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수5744, https://www.emuseum.go.kr).
39) 높이와 밑지름이 약 6cm 이하이며 입지름 18~19cm의 제원을 갖는 기측선이 넓게 벌어지는 형태의 발이다. 구연 형태가 화형인 것과 아닌 것이 있으며 외면에 세로 구획선을 그은 경우가 많다(Fig. 3).
41) 국립중앙박물관, 위의 책 (1997), pp. 223, 227; 장남원, 「高麗中期壓出陽刻 靑瓷의 性格」, 『美術史學硏究』 242·243(2004), pp. 105-107.
45) 지릉은 명종이 승하한 1202년에 조성되었으며, 1255년 보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장품은 후장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시기를 13세기 중반으로 보기도 한다. 지릉 출토품에 나타나는 역상감 기법이 곤릉(1239년), 강화 중성(13세기 중반) 출토 청자에 나타나기 때문에 유사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본고에서도 지릉 출토 청자를 13세기 중반 경의 자료로 삼고자 한다. 한성욱, 「고려 후기 청자의 기형 변천」, 『美術史學硏究』 232(2001), p. 66; 김세진, 앞의 논문, p. 68.
48) 문화재청·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마도 2호선 수중발굴조사 보고서』 (2011), pp. 208-211; 임경희, 「마도2호선 목간의 분류와 내용 고찰」, 위의 책, pp. 438-447. 동자문이 시문된 매병에 관한 내용은 최혜주, 앞의 논문, pp. 81-86 참조.
50) 고대 무덤 속에 매납된 조형물의 아동 이미지는 당시의 장례 의식 및 사후세계에서의 역할과 관련되며, 한대 화상석에 나타난 아동은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사회에서 강조하는 가치 및 교훈을 전달하는 매개가 되었다. Ann Barrott Wicks and Ellen B. Avril, “Introduction : Children in Chinese Art,” in Children in Chinese art, ed. Ann Barrott Wicks (Honolulu :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2), pp. 2-4; Wu Hung, “Private Love and Public Duty” in Chinese Views of Childhood, ed. Anne Behnke Kinney (Honolulu :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5), pp. 79-110.
51)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식물 넝쿨 장식은 5세기 이래 북위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의 건축 장식에 나타나기 시작하며 동자문을 비롯하여 여러 문양과 결합한다. James C. Y. Watt, China: Dawn of a Golden Age, 200-750 AD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4), pp. 18-19; 북위의 수도 대동(大同) 지역에서 발견된 금속제 잔에는 포도 넝쿨과 어우러진 동자문이 장식되어 있다. Jessica Rawson, Chinese ornament : the lotus and the dragon (New York : Holmes & Meier, 1984), p. 40. Wicks and Avril, 위의 책, pp. 6-8.
54) Richard Barnhart and Catherine Barnhart, “Image of Children in Song Painting and Poerty,” in Children in Chinese art, ed. Ann Barrott Wicks (Honolulu :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2), p. 55.
55) 당대 그림에는 궁정 여성들이 아이를 보살피는 모습과 대야에 목욕을 시키는 장면이 나타난다. 당시 중국에서는 분만 시 아기를 대야에 받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이미지가 자손 탄생을 상징할 수 있었다. C.A.S. Williams, Outlines of Chinese Symbolism and Art Motives (New York: Dover, 1976), pp. 43-44.
56) Ellen Johnston Laing, “Auspicious Images of Children in China,” Orientations 27, no. 1 (1996), p. 48.
57) 마갈락은 어린 아이를 형상화한 상으로 마후라(摩睺羅), 마합라(魔合羅)라고도 한다. 『東京夢華錄』, 『夢梁錄』, 『武林舊事』 등의 송대 기록에 등장한다. 扬之水, 『從孩兒詩到百子圖』 (人民美術出版社, 2014), pp. 43-52.
65) 정요에서는 북송 중기에 압출양각 기법이 개시되어 금대에 가장 유행하였다. 출토된 기년명 도범에 ‘大定二十四年(1184)’, ‘大定二十九年(1189)’, ‘泰和三年(1203)’, ‘泰和六年(1206)’ 등 금대 연호가 새겨진 것이 많다. 小林仁, 「優雅な白いやきもの-定窯白磁をめぐる諸問題」, 『定窯 : 優雅なる白の世界-窯址発掘成果展』 (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 2013), pp. 230-231.
69)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검색 페이지 참조(http://digitalarchive.npm.gov.tw); 國立故宮博物院, 『嬰戲圖』 (1990), p. 73. 고려의 청동 정병에서도 회화 장면과 같이 그려진 동자문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고토미술관 소장 <청동 은상감포류수금문 정병>에는 버드나무에 설치된 그네를 타거나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노는 활달한 동자의 모습들이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장면은 영희도의 제재이자 고려의 여러 공예품 장식에 회화성이 내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五島美術館學藝部·大東急記念文庫學藝部, 『時代の美 : 五島美術館·大東急記念文庫の精華 第 4部(中国·朝鮮編)』 (五島美術館, 2013), pl. 60.
72) 『林泉高致集』 「畫記」. “有皆作秋雨冬雪二圖 賜岐王…又作秋景烟嵐二賜高麗…”; 『高麗史』 卷14 世家 睿宗 12年 6月 癸亥. “…藏宋帝所賜親製詔書 及御筆書畵”; 『高麗史』 卷14 世家 睿宗 16年 12月 壬辰. ”御淸讌閣 以宋帝所賜書畵等物 宣示宰樞·侍臣.” 휘종이 고려 사신들에게 보여준 그림 목록에 대해서는 『東文選』 卷35 表箋 「謝宣示大平睿覽圖表」 참조.
74) 『宣和奉使高麗圖經』 卷26 「館會」. “…使副延館伴官於所館之樂賓亭 用行庖之人 而果肴器皿 皆御府所給 四筵列寶玩古器法書名畫異香奇茗 瑰瑋萬狀 精采奪目 麗人莫不驚歎 酒闌 隨所好 恣其所欲.”
76) 『高麗史』 卷40 世家 卷第40 恭愍王 13年 4月 辛丑. “燃燈 觀呼旗戱於殿庭 賜布”; 『高麗史』 卷41 世家 卷第41 恭愍王 15年 4月 戊午. “王觀呼旗童戱於殿庭 賜布百匹”; 『高麗史』 卷41 世家 卷第41 恭愍王 14年 6月 辛卯. “王射于佛福藏 觀群童擲草戱.”
77) 『東國李相國後集』 卷8 古律詩 「見兒童弄枳有作」. “柰何兒童 終日弄團圓 不唯弄之耳 齒嚼未遽捐”; 『東國李相國後集』 卷8 古律詩 「三月十四日 大雨雹」. “況此僅同梅子耳 團團但作兒童戲”; 『東國李相國後集』 卷1 古律詩 「草堂卽事」. “嬌娘撲蝶翩翩落 稚子黏蟬軋軋鳴”; 『東國李相國後集』 卷4 古律詩 「家圃六詠」. “兒童吹却當簫笳.”
79) 『東國李相國集』 卷20 雜著 韻語 「驅詩魔文」. “…人始之生 鴻荒樸略 不賁不華 猶花未萼 錮聰塗明 猶竅未鑿…”; 『東國李相國全集』 卷11 古律詩 「明日尹君復見和次韻寄答」. “…嬰兒氣祕三關固 幼婦詞高萬口喧…”;『破閑集』 卷下 「士子徐文遠 與權公惇禮 自小相友愛 俱儒門子弟也」. “…夫鍾天所賦 生而有之 不可以因物而遷…; 『東國李相國後集』 卷8 古律詩 「次韻李侍郞上晉陽公女童詩呈令公」. “…只爲伶才生得耳 不然齕齒慣知何…”; 『東國李相國全集』 卷22 雜文 論 「書司馬溫公擊甕圖後」의 내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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