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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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면체의 유래는 흔히 볼 수 있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등 ‘정다면체’ 5가지를 정리한 플라톤에서 시작된다. 그 뒤를 이어 아르키메데스는 정다면체를 변형하여 32개면으로 이루어진 더 복잡한 13가지의 ‘준정다면체’를 발견했다.
4) 1980년대 이집트의 닥하레 오아시스(Dakhleh Oasis)에서 발견된 예는 20개의 면에 이집트 신의 이름이 데모틱(Demotic, 후기 이집트 문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점술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Christine Alexander. “Accessions of Greek and Roman Antiquities.”, Bulletin of the Metropolian Museum of Art, Vol.32, No.7, N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37, p. 176; Martina Minas-Nerpel, “A Demotic Inscribed Icosahedron from Dakhleh Oasis.”, In Journal of Egyptian Archaeology, Vol. 93, London: Egypt Exploration Society, 2007, pp. 137-148.
5) Damm, Inciser Gürçay, “Huns and Goths: Jewelry from the Ukraine and Southern Russia”, From Attila to Charlemagne: Arts of the Early Medieval Period 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0. pp. 107-109.
6) 14면의 정사각형에는 각각 “臣信上疏”, “臣信上章”, “臣信上表”, “臣信啓事”, “大司馬印”, “大都督印”, “刺史之印”, “柱國之印”, “耶敕”, “信啓事”, “信白箋(箋)”, “密”, “令”, “獨孤信白書”의 인문이 새겨져 있어, 공문이나 서신을 쓰는 상황에 따라 쓰인 인장으로 보인다. 張沛, 「旬陽出土的獨孤信多面體煤精組印」, 『文博』 第2期(西安市: 陝西省文物局, 1985), pp. 95-96.
7) 이슬람 세계에서 ‘향’은 ‘천국의 향기’로 강조되어 종교행사나 모임을 하기 전 향을 피우고, 장미에서 추출한 정유(精油)와 증류수를 섞어서 여과시켜 만든 장미수를 뿌리는 것이 일종의 의식으로 여겨졌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기도를 위해 모스크에 참석하기 전에 자주 향을 피우고 향을 뿌렸다는 기록을 보아 7세기에 이미 장미수 병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Kalay, Hacer Arslan, “A Heritage Reflecting The Elegant Culture of The Ottoman Empire; Censer and Rosewater Sprinkler Specimens in Bitlis Ethnography Museum”, Journal of History Culture and Art Research, Vol. 8 Issue 2, Karabuk/Turkey: Karabuk University, 2019, p. 155.
9) 余佩瑾,「多面體造型及相關問題-以乾隆朝玻璃胎畫琺瑯黃地福壽八楞瓶為例」,『國立臺灣大學美術史研究集刊』46期(臺北: 國立臺灣大學藝術史研究所, 2019), p. 66; 하지만 호레즘 제국이 오고타이 칸(窩闊台 汗, 재위 1229-1241)이 이끄는 몽골제국에 의해 1230년 멸망하면서 일 칸국(Il khanate, 1256-1335)이 들어섰고, 그 영향으로 동서교류가 활발히 진행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양자 간의 관계는 향후 깊은 고찰이 요구된다.
10) 포제(匏制)란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 박에 틀을 씌어 그 형태대로 자라게 하는 공예로 본래 민간에서 유행하였다. 기록상 명 만력년간(萬曆年間, 1573-1615)에 이미 포제공예가 민간에서 성행하였으며, 청 강희년간에 황실 공예로 승격되었다. 王世襄, 「談匏器」, 『故宮博物院院刊』 第1期(北京: 故宮博物院, 1979), p. 86; 周曉晶, 「木雕奇葩核雕與範匏器」, 『東南文化』 第12期(南京: 南京博物院, 2003), p. 68.
16) 李夏坤, 『頭陀草』 冊三, “……七十老翁身姓朴, 就中稱爲善手匠, 蟾蜍硯滴最奇品八面唐壺眞好㨾.”; 徐有榘, 『林園經濟志』, 「贍用志」 卷2. “廣州官窯 裝匣鉢燒造者爲上 正圓者呼爲鵞卵器 十角者呼爲十面器 不裝匣鉢而燒造者次之 但能爲圓不能作十角八角也.”
20) 『日省錄』, 正祖11年(1787), 正月23日, “…十二月初四日, 歲幣方物, 無弊呈納, 十九日臣等詣午門前, 依例領賞, 照例折賞, 玲瓏鞍具爲一匹, 貂皮一百張, 各色縀紬五十四疋, 謹爲領受, 又於二十六日, 自軍機所, 奉上諭加賞, 如意一柄, 玉器三件, 磁器四件, 玻璃器四件, 硯二方, 絹箋四十張, 筆二匣, 墨二匣, 洋磁珐瑯盒四件, 雕漆器四件, 亦爲祗受, 當日加賞臣等, 八絲縀各一疋, 絹箋各二卷, 筆墨各一匣, 本年正月初一日…”. 조선의 문헌기록 중 청궁에서 사용된 ‘玻璃胎畫琺瑯’이란 구체적인 명칭은 보이지 않지만, 청궁 하사품 품목 중 玻璃器는 물론 琺瑯甁라는 명칭이 새롭게 등장한다. 주로 품종(혹은 품목) 위주로 간결하게 명칭을 쓰는 조선시대 기록물의 특징을 고려할 때, 유리태화법랑은 ‘유리’ 혹은 ‘법랑’의 명칭으로 간소화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1) 다각병의 제작은 먼저 형태를 만들고 겉면은 면 깎기로 모양을 잡은 후, 속파기를 하여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각병보다 면수가 많고 구의 조형을 갖춘 다면체병의 제작은 두 가지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는 굽을 먼저 제작한 후 그 위에 분할하여 접합한 몸통을 붙이는 방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다면체의 특성상 성형과정 중 쉽게 무너질 수 있고, 또 면끼리의 접착면이 번조 중에 갈라질 수 있는 위험이 크기 때문에 면 깎기와 속파기를 거쳐 굽은 따로 붙였을 가능성이다. 방병선, 앞의 책, p. 329; 유제욱, 앞의 논문, p. 51; 경기도자박물관, 『분원백자전І - 조선후기 청화백자』(경기도자박물관, 2009), p. 66.
23) 다각형 기물은 15세기 후반 조선 전기 전남 광주 충효동 요지, 경기도 도마리 요지 등에서 다각잔편 등이 확인되어 일찍부터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후 18세기 초에 운영된 경기도 남종면 금사리 관요요지를 비롯해서 18세기 후반 분원리 요지에서 다각형의 백자가 다수 확인되고, 또 전세유물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그 유행시점을 대략 18세기 초 이후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京畿道廣州中央官窯: 窯址地表調査報告書』 圖版篇(2000), pp.406-426; 방병선, 앞의 책, p. 239; 유제욱, 앞의 논문, p. 26.
24) 현전(現傳)하는 청 황실의 다면체 조형 공예품 중 선덕관요의 청화절방병은 동시기 금속은 물론 후대의 청까지 모방·제작되는 것으로 보아 가장 대중적인 기형으로 보인다. 비록 본고에서 다루는 육팔면체 혹은 깎은 정이십면체 동체를 가진 병은 〈玻璃胎畫琺瑯福壽八楞瓶〉 1점만 전하고 있지만, 최근 연구에서 청 내무부 조판처의 문건 『內務府造辦處各作成做活計清檔』 중 등장하는 ‘吉利瓶’과 ‘蒺藜瓶’의 어원 및 용례를 추적한 결과, 이 역시 다면체 조형의 기물일 가능성이 높아 당시 더 많은 다면체형 공예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余佩瑾, 앞의 논문, pp. 59-64.
26) 『日省錄』 正祖10年(1786), 1月22日, “…且臣聞之. 成大事者. 不避小嫌. 狐疑顧膽. 何事可辦. 今欲斲萬金之璞. 以求工於鄰國. 則曰恐其謀已也. 其可乎. 臣聞中國欽天監造曆西人等. 皆明於幾何. 精通利用厚生之方. 國家誠能授之. 而觀象之一監之費. 聘其人而處之. 使國中之子第. 學其天文躔次鍾律儀器之度數. 農蠶醫藥旱澇燥溼之宜. 與夫造瓴甓. 築宮室城郭橋梁. 掘抗銅取卯玉. 燔燒琉璃. 設守禦火礟. 灌漑水法. 行車裝船. 伐木運石. 轉重致遠之工. 不數年. 蔚然爲經世適用之材矣…”
28) Eugene A. Katz, 金必耀, 「富勒烯、多面體和中國守門獅」, 『數學文化』 第9卷第3期(北京: 清華大學科學史系, 2018), p. 65; 余佩瑾,앞의 논문, p. 77.
31) 徐瀅修, 『明皐全集』 第8券, 「記·幾何室記」, “幾何者. 泰西之書之名也. 泰西之書之名而名朝鮮之人之室. 亦已遠矣. 昔泰西人利瑪竇. 浮海朝宗于中國. 以其幾何之書. 譯傳于太學士徐公光啓. 徐公. 明之賢大夫也. 一見之. 知其爲義和馮保之遺也. 與友李之藻. 講明授受. 以至於梅鼎,九薛,鳳祚之徒出.”
33) 『景慕宮樂器造成廳儀軌』, 正祖元年(1776), 「用還秩」, “…土火爐五坐, 陶罐五介, 常沙鉢九立, 沙大貼二介, 沙甫兒十介, 沙貼匙十七介, 唐沙鉢四立, 唐大貼十介, 紅木五幅甲袱四件, 前排用還…”; 「甘結秩」, “一, 右甘結, 麾·旌·纛, 起畵時, 畵員所用, 畵水筆各四柄, 沙莫子七介, 唐大貼一竹, 沙貼匙一竹半, 文書所用, 白休紙二介,星火進排事., 工曹·盤沙器契·唐沙器契·司贍寺”
35) 『正祖實錄』, 正祖17年(1793), 11月27日, “上問司饔院副提調徐邁修曰: “近聞朝臣日用磁器, 皆用匣燔, 至於輿儓下賤, 亦多效之云, 然否?” 邁修奏誠有此弊. 上曰: “例燔之器, 亦足可用, 何必別造匣器乎? 如甁罌盃鍾之屬, 亦皆務尙奇巧, 多有新製云. 卿其言于都相, 另加禁斷, 使之勿復燔造.”
36) 동시에 이와 함께 고민해 봐야 할 것은 비록 청을 통해 다면체에 대한 시각적 인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실제 이를 여러 재질로 실용화할 수 있는 기술의 있었는지 혹은 의도적으로 제작을 하지 않았는지의 문제이다. 조선은 19세기의 다면체형 자기병만 존재할 뿐, 생활 공예품을 비롯하여 건축, 장난감 등 그 어디에서도 다면체 조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명나라와 청나라는 이미 서양을 통해 다면체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洋式’으로 인지되어 자기, 박, 법랑기 등의 공예품을 비롯하여 손등[手燈], 장난감 교구(敎具) 등으로 실용화되고 있었다. 조선에서 자기 재질 외에 다면체형이 제작되지 않은 원인이 기술적 문제인지 혹은 인식의 문제인지는 향후 심도 있는 연구와 고찰이 필요하다.
37) 관련 연구로 다음을 참고: 노대환, 앞의 논문, pp. 23-51;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對淸認識의 변화와 새로운 中華 관념의 형성」, 『韓國史硏究』 제145호(2009), pp. 67-113.
40) 『承政院日記』 高宗4年(1867), 4月 29日, “….至於文蔭武堂上之鞍馬服飾踰制者, 一依舊典禁條, 嚴立防限. 京外匹庶, 若胥吏屠沽之賤, 冬綿夏葛之外, 紬屬一切痛禁, 無得新製, 如有冒犯者, 隨現重繩之意, 著爲定式, 行會八道, 丕變侈濫之習. ….”
41) 『日省錄』 純祖7年(1807), 10月5日, “臣所謂紀綱之紊亂者何也 臣嘗聞朝廷爲外方之紀綱 官長爲下民之紀綱 兩班爲常漢之紀綱 長老爲少輩之紀綱 才德者爲愚不肖之紀綱 上以臨下卑以承尊秩秩有序井井不亂 卽古今之通誼也 夫何近來下民以頑拒朝令爲能事 少輩以侮辱長老爲能事 常漢以侵凌兩班爲能事 子弟以悖逆父兄爲能事 愚不肖以輕蔑才德爲能事 紀律日紊等級日壞僭越成習紛競滋 甚文章所以表貴賤 而市井駔儈 皆着士夫之衣冠 科宦所以登人才而 關節顔情能啚終南之捷徑 以至傷倫悖義可驚可愕之事難以 悉擧豈非朝廷之上紀綱紊亂 以致習俗之弊至此極也 耶伏願殿下 嚴上下之明尊卑 之序裁抑倖門杜絶私路賞當其功 罰當其罪 以張四維以勵 一世則紀綱 不期振而自振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