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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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문양 연구에서 칠보문의 종류로 은정, 금정, 서각, 방승, 화축, 나뭇잎, 거울, 경(磬) 등을 꼽고 있으나 칠보문의 소재와 구성은 알려진 것보다 더 다양하다. 칠보문은 단독연구보다는 조선시대 문양에 관한 개론서에서 간략하게 설명되어 왔으며, 이와 관련한 대표 저술은 다음과 같다. 임영주, 『傳統紋樣資料集』 (미진사, 1986), pp. 13-14; 同著, 『한국전통문양 1』 (예원, 1998), pp. 135-136; 국립문화재연구소, 『우리나라 전통무늬2 도자기』 (2008), pp. 430-431 등
2) 고려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밀양 표충사 소장의 <청동은입사향완> 저부에 하늘을 나는 용이 시문되었는데, 그 배경에 칠보문 소재의 하나인 금정이 있다. 이외에도 고려시대에 그려진 사경변상화나 불상 내에 납입된 복장 직물 가운데서도 칠보문이 확인된다. 고려~조선시대 칠보문 소재의 수용에 관해서는 이다란, 「조선 후기 공예품의 칠보문(七寶紋)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21), pp. 37-59 참조.
3) 칠보문은 조선후기 왕실 의례에 사용된 은병, 향로 등의 장식문양으로 선택되었다. 구혜인은 제사의 성격별로 제기의 문양에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규명했는데, 이 가운에 칠보문은 왕실의 속제용(俗祭用) 기물에 한정적으로 시문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구혜인, 「조선시대 왕실 제기(祭器)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9), pp. 308-309 참조.
5) 미술사에서 칠보문의 연원과 시문 양상 등을 검토한 연구는 많지 않다. 그러나 복식사 분야에서 칠보문 또는 보문을 주제로 한 연구가 축적되어 참고된다. 임재영, 「우리나라 七寶紋樣에 關한 硏究: 現存遺物을 中心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직물학과 석사학위논문, 1978); 오하나, 「15세기 이후 한·중 전통직물의 보문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직물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김우경, 「자수기법 칠보수(七寶繡)에 관한 연원문제-칠보(七寶)와 칠보문(七寶紋)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韓服文化』 23(1) (2020. 03) 등. 이 연구들에서는 복식 및 직물에 한정된 칠보문의 양상을 언급했으나, 칠보문의 연원이나 소재 등을 실증적으로 규명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6) 귀중하고 길상적인 의미를 지닌 사물 모티프의 문양을 ‘보문’이라 칭한 대표적인 사례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편찬한 『우리나라 전통 무늬』 1~7(2006~2014) 시리즈이다. 이 저작에서는 생활 주변에서 사용하던 기물 중에 상서롭고 기쁜 일을 가져다줄 것으로 여긴 상징물들을 간단한 부호로 정리하여 무늬로 사용한 것을 보배무늬, 즉 ‘보문(寶紋)’이라고 정의하였다.
7) 일례로 중국의 경우 『강서성대지(江西省大志)』 卷7 「도설(陶說)」이나 『황조예기도식(皇朝禮器圖式)』 등 명~청대 문헌에서 보문을 통틀어 팔보(八寶)라 칭했으며 간혹 잡보(雜寶)라고 명명했음이 확인된다. 일본은 무로마치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보문 소재를 수용했는데, 당시의 기록을 보면 ‘宝尽くし’ 또는 ‘宝’라고 기록하며 보문을 칭하였다. 이다란, 앞의 논문, pp. 7-8; 중국에서는 보문 소재에 대한 언급은 많지만, 명칭·개념·범주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정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일본에서는 관련 연구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8) 현재 문양 관련 저술에서 보문을 칠보, 불교의 보문, 도교의 보문, 잡보 등의 몇 가지 계통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칠보가 아닌 팔보로 문양을 지칭하기도 한다. 허균, 『전통 문양』 (대원사, 2000), pp. 114-117;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도록, p. 431; 국립중앙박물관, 『길상, 중국미술에 담긴 행복의 염원』 (2012), p. 106 등. 이 경우 칠보는 보문 소재 중 일곱 가지를 선택해 성립된 문양으로 이해되며, 구체적으로 원전·서각·방승·화축·나뭇잎·거울·경의 일곱 가지 소재만으로 구성된 문양이라는 점이 전제된다. 후술하겠지만 조선에서는 보문 소재를 통틀어 칠보라 총칭했으며, 그 구성은 일곱 가지 소재에 한정되지 않으므로, 선행 연구의 분류법은 정정될 필요가 있다.
9) 칠보문의 구성과 범주를 추정하기 위해 현전하는 금속제, 목제, 도자제 공예품에 장식된 칠보문 종류를 유물 실견 및 이미지 조사를 통해 최대한 수합하였다. 그 결과 적어도 조선후기 공예품에 장식된 칠보문은 최소 35가지에 이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 종류를 열거하면 거울·구슬·징·여의(如意)·연방(蓮房)·책·추(椎)·구름·꽃봉오리·반장(盤長)·병(甁)·비파(琵琶)·산(傘)·쌍어(雙魚)·연꽃·개(蓋)·경(磬)·나뭇잎·만자(卍字)·바퀴·생황(笙簧)·소라·원전(圓錢)·화축(畵軸)·파초선(芭蕉扇)·금정(金錠)·방승(方勝)·부채·서각(犀角)·연환(連環)·은정(銀錠)·호리병·담뱃대·복주머니·거문고 등이다. 이다란, 앞의 논문, pp. 141-143.
11) 호병, 견면, 상아, 서각 등은 서역의 상인들에 의해 수입되던 물목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귀중하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沙琛喬, 위의 논문, pp. 396-398; 당대 공예에 나타난 호풍의 영향에 관해서는 김은경, 「唐代 長沙窯의 胡風 형성과 그 배경」, 『美術史學』 41 (2021. 02), pp. 73-82 참조.
12) 세상이 평온하여 길에 떨어진 보배도 탐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佛說彌勒下生經』에서 확인된다. 내용을 보면 금·은·차거(車璩)·마노(馬瑙)·진주(眞珠)·호박(虎珀) 등 값진 보배가 땅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 탐하는 자가 없다고 하여 보배의 종류를 정확하게 열거하고 있다. 『佛說彌勒下生經』 卷1 T14 421b9-14, “爾時 閻浮地內自然生粳米 亦無皮裹 極為香美 食無患苦 所謂金銀珍寶車璩馬瑙真珠虎珀 各散在地 無人省錄 是時 人民手執此寶 自相謂言昔者之人由此寶故更相傷害 繫閉在獄受無數苦惱 如今此寶與瓦石同流 無人守護”
14) 해당 유물은 영국의 스타인 원정대가 중앙아시아 카라호토에서 수집한 6~8세기 납힐 직물로 알려져 있다. 관련 정보는 심연옥, 『한국직물문양 이천년』 (고대직물연구소 출판부, 2006), p. 148을 참고.
15) 郭學雷, 「南宋吉州窯瓷裝飾與世俗文化」, 『收藏』 2012(21) (2012. 11), pp. 58-61; 북송~금대 도시문화의 성행 속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에 관해서는 지민경, 「중국 근세 시각문화에서의 이미지 생산과 소비 - 磁州窯系 瓷枕을 중심으로 -」, 『한국도자학연구』 23 (2016. 04)을 참조.
16) 송대 이후 보문의 인식과 활용의 확장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오늘날 중국의 산서성과 하남성 일대에 분포한 북송~금대 장식고분이 있다. 해당 고분에는 재화의 상징 또는 배경 장식으로 보문이 그려져 문양을 향유하는 계층과 공간적 범위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송~금대 장식고분의 성격과 벽화에 그려진 보문에 관해서는 아래의 논고를 참조. 지민경, 「北宋·金代 裝飾古墳의 소개와 기초 분석」, 『美術史論壇』 33 (2011. 12); 이다란, 앞의 논문, pp. 190-191.
17) 중국 하북성 한단시 자현 일대에 위치한 자주요와 중국 강서성 길안시 영화진에 위치한 길주요는 모두 송~원대에 걸쳐 운영된 대표적인 민요로 주로 서민들이 사용한 생활용품이 제작되었다. 두 요장에 관한 정보는 아래를 참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국도자』 (2007), p. 156; 한성백제박물관, 『흑자의 멋, 차와 만나다』 (2018), p. 76.
18) 불교 공양물의 시원적인 이미지는 당송시기 둔황 벽화 등에서 확인된다. 당시 밀교의 영향으로 만다라의 네 끝을 장식하나, 이미지의 종류와 배치 순서는 고정적이지 않다. 楊鴻姣, 「明代藏傳佛教八吉祥紋樣在漢地的傳播及其風格演變」, 『西藏藝術研究』 2008(01) (2008. 03), pp. 69-70.
19) 원 황실의 티벳 불교 신봉 이후 불교의 공양물 이미지가 확산되어 도자, 금속, 비단 등 공예품의 장식 문양으로 도입되었다. 원 황실의 티벳 불교 수용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티모시 메이 저·권용철 역, 『칭기스의 교환』 (사계절, 2020), pp. 279-286을 참조.
21) 馬世長, 「大隨求陀羅尼曼茶羅圖像的初步考察」, 『唐硏究』 10 (2004), p. 547, pp. 557-559; Paul Copp, The body incantatory: spells and the ritual imagination in medieval Chinese Buddh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 pp. 95-98.
23) 명대 영락연간(永樂年間, 1402-1424) 생산된 자기에서부터 ‘바퀴·소라·개·산·연꽃·쌍어·병·반장’의 순서를 갖춘 팔길상 도안이 확인된다. 이러한 조합은 가정연간(嘉靖年間, 1521-1566)까지 이어져 명초부터 후기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명말~청초에 이르면 쌍어와 병의 순서가 바뀌는 예도 등장한다. 朱仁星, 위의 논문, p. 32.
25) 명말 삽화 발전의 흐름에 관해서는 오키 야스시 저, 고인덕 역, 『중국 명말의 미디어 혁명-서민이 책을 읽다 -』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 pp. 56-86를 참조.
26) 명대 미술에서 삽화의 역할과 기능에 관해서는 Wright, Suzanne E, “Luoxuan Biangu Jianpu and Shizhuzhai Jianpu: Two Late-Ming Catalogues of Letter Paper Designs.”, Artibus Asiae 63, no. 1 (2003); J.P. Park, “Instrument as Device - Social Consumption of the Qin Zither in Late Ming China (1550-1644)”, Music in Art 33, no. 1/2 (2008) 등을 참조.
29) 본문 각주 7 참조; 『皇朝禮器圖式』 중 황태후 의물인 <皇太后儀駕盥盆> 테두리에 반장·바퀴·연꽃·蓋·傘·물고기·병·여의·그림·서각·구슬·금강저가 그려졌다. 부기된 설명에는 ‘邊鈒花文八寶’라고 하여 그려진 보문을 통틀어 팔보라 칭했음을 알 수 있다.
30) 조선시대 칠보문과 전륜성왕 칠보의 연관설은 인물과 동물 그리고 몇 종류의 사물로 구성된 전륜성왕의 칠보[윤보(輪寶)·상보(象寶)·마보(馬寶)·주보(珠寶)·여보(女寶)·거사보(居士寶)·장군보(將軍寶)]가 어느 순간 간략화되어 칠보문의 형태로 변했다는 주장이다. 繡林苑 編, 『李朝의 刺繡』 (昌震社, 1974), pp. 102-104;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朝鮮時代 피륙의 무늬』 (2002), pp. 206-207; 김우경, 앞의 논문, p. 75 등. 그러나 당대에 귀중한 물건의 상징인 보문과 전륜성왕의 동물 및 인물상은 동시기에 등장하고 있기에 도상의 간략화라는 전제는 성립되기 어렵다. 필자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조선의 칠보문과 전륜성왕의 칠보를 연결한 최초의 언급은 『李朝의 刺繡』이나 해당 부분에는 부가 설명과 출처 표기를 위한 각주가 남겨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특별한 검토 없이 반복적으로 인용되어왔고, 그 결과 전륜성왕의 칠보와 조선시대 칠보문을 연결 짓는 오류가 꾸준히 생산된 것이라 생각된다.
32) 이와 유사한 사례로 십장생문이 있다. 십장생문 역시 명칭에 포함된 ‘십(十)’으로 인하여 열 가지 장생물로 구성된 문양이라 이해되었으나 관련 기록을 검토한 결과 조선후기에는 총 13가지의 소재가 십장생으로 인식되었으며 백자에 시문될 때에도 소재가 10개로 지켜지지 않고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최경화, 「조선후기 십장생문 백자 연구」, 『美術史學硏究』 295 (2017. 09) 참조.
33) 고대부터 칠보는 여러 가지 보물, 보석 등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고려 문헌에서 七寶器, 七寶帶와 같이 갖은 보석으로 장식한 기명과 띠가 언급되었다. 『高麗史』 卷33 「世家」 忠宣王 卽位 8월; 『高麗史』 卷123 「列傳」 최충헌.
34) 조선시대 문헌에도 역시 갖은 보석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용례로 족두리, 비녀 등 여성의 머리 장신구를 꾸미는 소재를 언급할 때 ‘칠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正祖實錄』 卷26, 12年(1788) 10月 7日 辛卯條, “如七寶之類 如前飾用 則有改制之名 無昭儉之實也 凡係首飾金玉珠貝及眞珠唐紒眞珠套心之屬, 一幷禁斷一於由味 巨頭味 係是命婦常時所着 人家讌婚所用 勿爲禁斷…”
35) 『燕山君日記』 卷54 10年(1504) 6月 14日 癸酉條, “命入白細花七寶紋紗五匹 柳靑花紋紗四匹 大紅雲紋紗三匹 花紋白紗五匹”; 『燕山君日記』 卷54 10年(1504) 7月 13日 辛丑條, “傳曰 藍匹段滿金線 以七寶細花紋織入” 이상 기록은 연산군이 작은 꽃[細花]과 칠보(七寶) 무늬로 비단을 짜 올리라고 명령한 내용이다. 조선전기 유물 중 <연안 김씨 묘 출토 저고리>를 통해 작고 은은한 느낌의 꽃과 칠보가 어우러진 비단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우리나라 전통무늬1 직물』 (2006), p. 161.
36) 『孝宗寧陵山陵都監儀軌』(1673) “健元陵以下各陵所排石物中屛風隅石外面則刻七寶屛風面石外面則刻人像…” 건원릉 이하 각능 소배석 중 병풍우석 외면에는 칠보가, 병풍면석의 외면에는 인물상이 조각되었다는 내용이다. 건원릉은 태조의 능으로 병풍우석에 새겨진 문양은 영저(鈴杵)와 영탁(鈴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석물조각사 2』 (2017), p. 426.
37) 조선전기 전접시의 칠보문은 일찍이 다수의 연구에서 언급되었다. 이 가운데 칠보문의 양식적 연원을 명대 청화 백자에서 찾거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티베트 미술과 연결 지은 사례가 있다. 관련된 연구로는 아래를 참조. 윤효정, 「朝鮮 15·16世紀 靑畵白磁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pp. 97-98; 전승창, 「조선 초기 명나라 청화백자의 유입과 수용 고찰」, 『美術史學硏究』 264 (2009. 12), p. 50; 이현정, 「15-16세기 朝鮮 白磁에 보이는 明代 磁器의 影響」, 『美術史學硏究』 270 (2011. 06), p. 143; 김윤정, 「朝鮮初 酒器의 조형 변화와 원인」, 『강좌미술사』 37 (2011. 12), pp. 138-139.
38) 전세품 가운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백자청화 칠보초화문 팔각연적>은 연적의 몸체에는 초화문을 윗면에는 칠보문을 단정하게 시문한 수작(秀作)이다. 17세기 유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시기 청화백자 생산이 원활하지 못했던 사실에 반해, 유물의 유색·기형·시문 품질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점에서 편년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해당 유물을 중기의 작례로 확정하지 않고, 각주로 간략히 전한다. 관련 정보는 아래를 참조. “백자청화 칠보초화문 팔각연적”, 삼성미술관 리움, 접근 2022년 2월 27일, https://www.leeum.org/collect/collect01_detail.asp?seq=620.
40) 방병선, 「조선 후기 사기장인 연구」, 『美術史學硏究』 241 (2004. 03), pp. 203-208; 최경화, 「朝鮮後期 分院里 時期官窯白磁 硏究: 1752-1895년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pp. 12-16; 이종민, 「朝鮮 官窯에서의 私燔 실태와 영향」, 『역사와 담론』 86 (2018. 04), pp. 371-374.
41)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京畿道廣州中央官窯: 窯址地表調査報告書』 (2000);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마지막 官窯廣州 分院里 白磁窯址』 (2006);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조선백자요지 6차 발굴조사보고서』 (2020).
42) 칠보문 청화백자는 경복궁·덕수궁 권역, 청진 12~16지구 유적, 동대문 운동장 유적 등 궁궐을 비롯하여 시전, 관청으로 추정되는 유구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칠보문 청화백자 출토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다란, 앞의 논문, pp. 103-109 참조.
44) 칠보문은 조선 후기 백자 기종 전반에서 확인되며 호와 합에 시문된 경우가 많다. 칠보문 청화백자 전세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다란, 앞의 논문, pp. 109-134 참조.
45) <table 2>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원광대학교박물관, 『開校50周年紀念 博物館圖錄』 (1996), p. 92.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백자』 (2015), p. 176. ⒞Fig. 16의 세부 ⒟<백자청화산수문호>,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H. 40.2cm (필자촬영) ⒠Fig. 13의 세부 ⒡경기도자박물관, 『분원백자전Ⅰ 조선후기 청화백자』 (2009), p. 69.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청화, 푸른빛에 물들다』 (2014), p. 137.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미국 뉴어크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2016), p. 109. ⒤백자청화산수문호, 서울역사박물관, H. 32.5cm (https://museum.seoul.go.kr/) ⒥한국국제교류재단, 『일본소장 한국문화재 3』 (1997), p. 79. ⒦국립중앙박물관, 『朴秉來蒐集李朝陶磁』 (1974), pl. 155. ⒧온양민속박물관, 『사진과 해설로 보는 온양민속박물관』 (1996), p. 82.
49) 18세기 4/4분기-19세기 초로 편년되는 분원리 1호요지 가마2호 상부퇴적과 바닥내에서 출토되는 복숭아문[桃紋]은 복숭아열매+나뭇잎, 꽃잎+나뭇잎 등의 문양 조합을 보인다. 이를 근거로 18세기 후반경에는 문양의 패턴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최경화, 앞의 논문, pp. 177-180.
50) 무게중심이 하향한 병은 18세기 말경에는 이미 제작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이후에는 굽도 낮아지고 동체의 형태도 다양화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최경화, 앞의 논문, pp. 219-221.
51) 『影幀摹寫都監儀軌』에는 선원전 제사에 사용된 기물을 사실감 있게 묘사한 도설이 포함되어 있다. 의궤의 제작 배경과 도설의 종류에 관해서는 구혜인, 「대한제국기 경운궁 선원전 禮器의 구성과 함의-『영정모사도감의궤』 (1901) 도설 속 기명을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88 (2015. 12) 참조.
52) 금속 소지에 유리질 유약을 얹고 고온에 녹여 장식하는 기법을 조선에서는 파란(波蘭) 또는 파랑(巴琅)이라 하였다. 정약용의 어휘 연구서인 『아언각비(雅言覺非)』 (1819)에 따르면 “법랑은 잘못 번역되어 파랑(巴琅)이 되었다. 중국음은 본디 ‘ᄫᅡ랑’이다. 譯書에 이르기를 은에 푸른 빛을 칠한 것이라고 했다”라 하여 명칭의 어원과 뜻을 밝혔다. 정약용 저, 정해겸 역, 『아언각비·이담속찬』 (현대실학사, 2005), p. 99; 한편 오늘날에는 이러한 기법이 칠보라 명명되기에 간혹 현재의 용례에 입각해 조선시대 문헌 기록의 칠보를 장식기법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파란이라 불리던 기법이 언제부터 칠보로 칭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칠보가 장식기법을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