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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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이 사용하는 ‘넓은굽’은 굽의 접지면이 넓다는 현상을 강조한 용어다. 관요 발굴을 주로 수행해 온 경기도자박물관은 넓은굽을 “굽의 접지면이 1.0~1.5cm 정도로 넓으며 높이는 1.0cm 미만이다. 발과 잔에서 나타난다.”라고 정의했다.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6차 발굴조사보고서』(2020), p. 45. ‘넓은굽’은 현재 학계에서 17세기 조선 관요에서 만든 접지면이 넓은 굽을 지칭하는 용어로 어느 정도 정착되어 있다.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특정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라면 ‘넓은’과 ‘굽’을 사이에 띄어쓰기 없이 하나의 단어로 활용 가능하다는 조언을 얻었다. 중국에서 만든 넓은 굽의 자기 또한 해당 유물을 지칭하는 중국 명칭을 제시한 후 본문의 논지가 보다 선명하게 연계될 수 있도록 조선 유물과 동일하게 넓은굽 자기로 설명했음을 밝혀둔다.
2) 넓은굽을 언급한 중요 선행연구는 명말 넓은굽 백자의 굽을 해무리굽으로 지칭했으며, 1620년대에서 1640년대 경덕진 민요에서 유행한 넓은굽이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조선 관요에서는 주로 1640년대에서 1660년대에 넓은굽 백자를 제작했음도 명문 자료를 통해 제시했다. 또한 명말 중국의 넓은굽 청화백자는 일본에서도 출토되며 17세기 전반 일본도 넓은굽의 그릇을 제작했음을 지적했다. 이후에 이루어진 다른 선행연구는 최근 발굴 자료들을 통해 조선 관요에서 1620년대 넓은굽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조형은 서울 시내에서 출토된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론했다. 방병선, 「17∼18세기 동아시아 도자교류사 연구」, 『미술사학연구』 232(2001), pp. 134-135; 이슬찬, 「조선 중기 관요 운영체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17), pp. 89-92.
4) 명나라 말기에 유행한 넓은굽 백자의 등장 시기 및 제작 가마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한 발굴 성과나 개별 논문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접하기 어렵다. 대신 赤壁賦圖가 장식된 17세기 중국 청화백자를 다룬 연구에 넓은굽 자기의 등장 배경과 제작 시기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謝明良, 앞의 논문, pp. 78-93.
5) 선행연구는 중국 경덕진의 민요인 湖田窯에서 내저면에 ‘永樂年製’라는 관지를 써넣은 넓은굽 백자편이 수습된 바를 간략히 언급했을 뿐이다. 선행연구가 제시한 호전요 수습 유물은 그보다 앞서 이루어진 다른 연구의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謝明良, 앞의 논문, p. 83. 註 3은 三杉隆敏, 『世界の染付』6 陶磁片(京都: 同朋社, 1982), 圖43, 圖 244재인용.
6) 17세기 중국에서 만든 적벽부도가 장식된 청화백자를 다룬 선행연구 역시 외면에 적벽부도와 적벽부 내용이 장식된 그릇 내저면에 ‘永樂年製’라는 관지가 추가되는 것을 16세기 후반 중국 내 적벽부의 유행과 영락 압수배를 모방한 그릇에 대한 선호 취향이 맞물려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謝明良, 앞의 논문, pp. 89-91.
7) 『遵生八牋』 卷14 「論饒器新窯古窯」. “若我永樂年造壓手杯 坦口折腰 沙足滑底. 中心畫有雙獅 滚毬 毬內篆書永樂年制四字 細若粒米 為上品. 鴛鴦心者次之 花心者又其次也. 杯外青花深翠 式樣精妙 傳用可久 價亦甚高. 若近時仿效 規制蠢厚 火底火足 畧得形似 殊無可觀.” 원문은 『欽定四庫全書』 子部十 雜家類四(절강대학도서관 소장본)에 수록된 내용을 인용했다.
8) 『준생팔전』에는 영락 압수배만 아니라 다양한 앞선 시기 이름난 가마의 명품들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특히 文房과 飮茶에 두루 쓰인 哥窯에 대한 내용은 『遵生八牋』 卷14 「論官哥窰器」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명말 경덕진 민요에서는 가요의 특징인 빙렬이 가득한 그릇을 제작해 판매했고 그중 일부는 한양도성에서도 사용됐다. 서울 시내에서 출토된 명말 倣가요 자기에 대한 내용은 박정민, 「한양도성 내 조선 시대 유적 출토 백자의 특징과 양상」, 『동아시아의 도자문화 백자』(한성백제박물관, 2020), pp. 143-144.
9) 16세기 명나라의 경제적 성장은 다양한 분야에 걸친 소비 확대와 사치품의 수요증가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릇과 공예품에도 크게 반영되었다. 명말 사치풍조 만연에 따른 물질문화의 변화에 대해서는 巫仁恕 저, 김의정 등 역, 『사치의 제국』(글항아리, 2019).
10) 중국 문인 李漁(1611~1680)는 1671년(강희 10)에 지은 『閑情偶寄』를 통해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문자를 깨지기 쉬운 자기 그릇에 써넣는 행위를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이어가 기록을 남긴 17세기 후반에도 소동파의 문장이나 ‘成化年造’ 등의 관지가 장식된 자기 그릇들이 유행했음을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명나라 말기에 등장한 문양 소재가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만큼 넓은굽 자기의 생산과 소비 역시 청나라 후반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李漁 저, 김의정 역, 『쾌락의 정원』(글항아리, 2018), pp. 267-270, 641-642.
13) 『경덕진도록』을 역주한 임상렬 선생 또한 ‘활저’를 태골이 드러나는 상태이고, ‘사족’이란 노태 상태 즉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이며, ‘만심원족’은 옥벽저 같은 굽일 것이라 추정했다. 藍浦 원저·鄭廷桂 보집, 임상렬 역주, 『역주 경덕진도록』(일지사, 2004), p. 311.
14) 선행연구가 언급한 홍콩 개인 소장의 넓은굽 청화백자 역시 동체에 남아있는 ‘皇明天啓年丙寅歲吉旦’명을 통해 1626년(천계 6)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선행연구에 해당 유물의 도판이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이 유물 역시 천계제 시절에 만든 다른 넓은굽 청화백자들과 유사한 문양이 장식되었을 것이다. 謝明良, 앞의 논문, p. 90.
15) Sten Sjostrand, Sharipah Lok Lok bt. Syed Idrus, THE WANLI SHIPWRECK AND ITS CERAMIC CARGO(Kuala Lumpur: Dept. of Museums Malaysia, 2007).
16) 조선 전기 미술 분야에서 이루어진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교류 양상에 대해서는 안휘준·한정희·박은경·문명대·이강근·김영원·주경미, 『朝鮮 前半期 美術의 對外交涉』(예경, 2006).
18) 『宣祖實錄』 133卷, 34年(1601) 1月 6日 乙巳. “…卽者買賣人等五十餘名 投狀曰 初因軍前買賣接濟之令 辛苦出來今者遽令撤回. 俺等到日甚淺 貨物未發 極爲悶迫 照恕寬限 不致絶本云云.”
19) 조선은 1594년(선조 27)부터 압록강 하구 中江에 시장을 마련하여 중국, 특히 遼東의 곡물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中江開市의 설치 배경 및 주요 거래 품목에 대한 자세한 접근은 김문기,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2012), pp. 327-334.
20) 명나라 장수 吳惟忠(?~?)이 자신을 도운 尙州의 양반 李景南에게 건넨 선물 중에도 그릇이 포함되어 있다. 오유충은 浙江省 義烏 사람으로 遊擊의 신분으로 조선에 참전해 副摠兵의 지위에 올랐다. 이경남이 오유충에게 선물로 받은 ‘成化萬曆盃’와 ‘宣德爐’를 자기로 단정할 수 없으나 그릇에 구체적인 연호를 붙여 이름한 것을 보면 그릇에 款識가 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력년간 경덕진 민요에서 만든 청화백자 중에는 당대와 선대의 관지가 쓰인 그릇이 많다. 이경남 집안에서 대대로 보관했다는 잔과 향로 역시 만력년간 만든 청화백자일 가능성이 있다. 이경남이 오윤충에게 받은 선물과 이후 이경남이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은 이경남의 10대손인 李在成이 1881년(고종 18)에 기록한 「東海寺事實記」에 담겨있다. “…吾先祖壺翁公 當皇明屋社之日 以魯仲連不願帝奏之義 戴蔽陽 着周衣 抱吳遊擊所賞成化萬曆盃 宣德爐 走隱於此寺 寺名東海故也. 構蹈海亭於寺傍 作蹈海八詠以見志. 又築焚香壇於擎天臺日月岩前 每丁三皇帝諱辰 則以明水貯盃 丹香注爐 奠于壇上 九節哭 四哭拜 享年九十 終身靡懈. 子姓相承 香壇拜哭之節 至于十世而勿替 盃爐硯作爲家傳之世珍焉.” 尙州産業大學校附設尙州文化硏究所·尙州市, 『古代沙伐國關聯 文化遺蹟 地表調査 報告書』(1996), pp. 348-350; 유사한 내용이 19세기 문인 관료인 韓章錫(1832~1894)이 지은 『眉山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眉山集』 1卷 「辭賦」 擎天臺辭. “李壺翁景南 當崇禎運訖 悲神州陸沉 皇靈不祀 獨上商山擎天臺 焚香慟哭. 胤子枝元遵父遺志 墠于臺 以高皇帝顯皇帝烈皇帝諱辰 用家藏遊擊將軍吳惟忠所贈成化萬曆二尊 崇玄酒以奠之. 子孫世守是禮.” 이경남의 행적을 비롯하여 오유충에게 받은 선물의 행방과 자세한 내역은 현재 조사 중이며, 파악한 내용을 학계에 소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1) 서울 시내 조선 후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중국 청화백자에 대한 언급은 박정민, 「출토유물로 본 조선 후기 한양도성 유입 외국 자기의 면모와 특징」, 『동양미술사학』 13(2021), pp. 186-194.
23) 1637년(인조 15) 淸의 太宗(재위 1626~1643)은 심양에 볼모로 머물게 된 소현세자와 鳳林大君(1619~1659)에게 은그릇과 청화백자를 보냈다. 청 태종은 둘 다 혼인하여 따로 가정을 이룬 세자와 대군 형제에게 각각 짝수로 수량을 갖춘 예물을 보낸 모양이다. 김종수·김남윤·신하령·이남종 역, 『역주 소현심양일기』 1(민속원, 2008), p. 308. “淸皇帝送銀椀四·銀貼匙二·銀盃臺具二·象箸二·畵沙貼匙二十·畵沙椀二·畵沙甫兒六·畵沙種子二·高足床二·食床一·平床一·交椅一·沐浴器一. 世子出庭中跪受. 送于大君亦如之 大君亦跪受.” 심양관에서 조선 조정에 보낸 장계들을 엮은 『심양장계』에도 같은 날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심양장계』에는 청화백자에 대한 기록은 누락 되었으며 목욕 그릇을 沐浴靑瓦盆이라는 단어로 기록해 두었다. 김남윤 역, 『심양장계』(아카넷, 2014), p. 78.
25) 『仁祖實錄』 46卷, 23年(1645) 3月 9日 壬辰. “世子下令 以彩段四百匹 黃金十九兩 歸之戶曹. 世子回轅時 多載北京物貨而來 衆頗失望 至是有是令.” 물론 이 시기에는 청을 배격하는 움직임이 강했으므로, 청의 문물이 조선 사회에 크게 확산할 여지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여러 고급 공예품의 유입과 도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확산 상황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26) 『燕行日記』 4月 27日. “且李信儉等及商人等落後 將還本國 大君奪好馬三十餘匹 使留待 蓋爲回還時用也. 人多怨之 雖諫不聽.” 이 기록은 鄭世規(1583~1661)가 1645년(인조 23)에 정사 인평대군을 따라 부사로 참여했던 사행 관련 사항을 기록한 『연행일기』에 수록된 것이다. 김일환, 「초기 대청 북경사행 기록과 사행 노정 검토」, 『온지논총』 61(2019), p. 151, 각주 101 재인용.
27) 김남윤 역, 앞의 책, p. 293. “…則皇帝使兩大君陞殿 後令范文程問于二大君曰 年歲幾何 大君答曰 今年十九矣. 仍問有子女否 大君以無爲答. 則又大君子女有無爲白去乙 大君答曰 丙子年前生有女息 而來此地後 因疫化去云則皇帝唯唯 行茶而罷爲白齊.” 1640년(인조 18) 2월 25일의 장계에는 청 태종이 인평대군의 肅拜를 받는 자리에 함께한 봉림대군에게 자녀가 있냐고 질문하자 봉림대군이 병자년(1636) 전에 딸을 낳았으나 심양에 온 뒤 역병으로 죽었다고 답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 대화에 등장하는 봉림대군의 딸이 숙신공주일 것이다.
28)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대장에 의하면 현재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에 자리했던 숙신공주의 묘에서 출토된 청화백자 6점, 오채자기 2점, 은제합 2점은 1938년 李王職 禮式課가 취득했다가 이왕직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유물 대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당시 숙신공주 묘에는 무덤을 1650년(순치 7)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담긴 비석도 자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숙신공주묘 출토 백자들을 실견 조사하고 관련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국립중앙박물관 담당자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29) 현재까지 파악한 서울 시내 유적 출토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는 총 14점이다. 14점은 관수동 98-1번지에서 출토된 적벽부로 간주되는 시문이 장식된 동체부편도 포함한 수량이다. 세부 출토 수량은 청진동 일원에서 12점, 청계천 주변에서 2점 등이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5지구 유적』Ⅱ(2012), p. 25, 34;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2~3지구 유적』Ⅱ(2013), p. 180, 376;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8지구 유적』Ⅱ(2013), p. 76, 86, 120; 한울문화재 연구원, 『종로 청진12~16지구 유적』Ⅳ(2013), p. 213, 233, 235, 237;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관수동 98-1번지 유적』 (2020), p. 106; 국방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구 관수동 4·5·6번지 유적』(2021), p. 296.
30) 명대 경덕진 민요에서 만든 그릇들의 문양과 기종에 대한 최근 정리는 秦大树·高宪平·翁彦俊, 「落马桥窑址明清遗存发掘的收获及相关问题」, 『文物』 2020-11(2020), pp. 90-95.
33) 현재까지 넓은굽 백자는 왕산리(1626~1627)를 비롯하여 상림리(1618~1636), 선동리(1640~1648), 송정동(1649~1654), 유사리(1655~1664), 신대리(1664~1676) 등 주로 관요 가마터에서 출토되고 있다. 용인 왕산리 백자 가마터는 ‘丙寅’(1626)과 ‘丁卯’(1627) 등의 명문이 새겨진 백자가 출토되어 운영 시기 파악에 도움이 된다. 왕산리 유적에서 확인된 넓은굽 백자는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시대 넓은굽 백자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가장 늦은 시기에 제작된 넓은굽 백자는 1673년(현종 14)부터 1676년(숙종 2)을 중심으로 운영된 신대리 12호 가마터 출토품이다. 1620년대에서 1670년대 사이에 운영된 관요 가마터 출토 넓은굽 백자에 대한 내용을 수록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 『龍仁 旺山里 窯址: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제2기숙사부지 시·발굴조사보고서』(2012);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조선백자 요지(사적 제314호) 6차 발굴조사 보고서』(2020); 경기도자박물관, 『사적 제314호 광주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보고서: 번천리 8호·선동리 2호 요지 일원』(2013);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 보고서』(2019); 조선관요박물관, 『광주 송정동 5·6호 백자가마터』(2008);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신대리 18호 백자가마터』(2008); 한강문화재연구원, 『광주 조선백자 요지: 광주 조선백자 요지 보존·정비를 위한 5차 시·발굴조사 보고서』(2019).
34) 관요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같은 광주지역에 자리한 오포읍 능평리 백자 가마터에서도 넓은굽 백자가 출토된 바 있다. 능평리 백자 가마터는 주로 발, 잔, 접시 등의 반상기를 포개구이로 제작했던 유적이다. 광주 주변의 여러 백자 가마터 가운데서도 능평리 백자 가마터처럼 넓은굽 백자를 만든 사례가 극히 적다는 것은 넓은굽 백자의 생산이 주로 관요에만 국한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당시 관요와 연접한 백자 가마에서는 넓은굽을 관요 백자의 가시적인 조형 특징으로 인식하고 모방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러한 현상은 광주 이외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는 특징이다. 한울문화재연구원, 『광주 오포 능평리 백자가마유적』(2011).
35) 서울 시내에서 조선 관요의 넓은굽 백자가 출토하는 유적은 주로 종로대로 주변 청진동이나 궁궐 주변에 자리한다. 청진동 일대의 유적에서는 조선 관요에서 만든 넓은굽 백자가 중국에서 유입된 넓은굽 청화백자랑 함께 출토되기도 하지만 출토 수량은 중국산을 넘어서는 경향이 뚜렷하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5지구 유적』Ⅱ (2012);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2~3지구 유적』Ⅱ(2013);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8지구 유적』Ⅱ(2013);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12~16지구 유적』 Ⅳ(2013); 불교문화재연구소, 『서울 공평동 유적』(2016);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통의동 70번지 유적』(2020); 국방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구 관수동 4·5·6번지 유적』(2021).
36) 『宣祖實錄』 195卷, 39年(1606) 1月 23日 壬辰. “…前天使時 亦有下敎 深以飮食之臭爲戒 小臣亦聞之矣. 今者器皿之事 曾已磨鍊啓稟 而如匙箸等 則依古爲之 司饔院沙器 如磁器則中原之人必以爲美 若依唐制 精造用之則可矣. 大槪器皿體大 則所盛之物狼藉有臭矣. 上曰 司饔院官員下去時 自內已爲傳敎 使之一依唐器體樣 造之矣.”
37) 『宣祖實錄』 185卷 38年(1605) 3月 3日 丁丑. “…上年命勿造沙器 則本院再三啓辭 有若不造此器 則不能爲國者然 終不聽之 出其軍 移用於他處 不爲無補矣 …(중략)… 若今年又停燔造 專委其軍於竹山 則甚好 參酌事勢回啓 言于兵曹.” 제시한 기록만으로 1605년(선조 38)에 관요가 전혀 운영되지 않았다고 단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1604년(선조 37)에는 관요 백자 생산에 필요한 군사가 시급한 국가 사무에 활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선행연구 역시 1604년과 1605년에는 관요가 운영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했다. 이슬찬, 앞의 논문, p.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