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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2; 2021 > Article
조선 후기 선원전의 祭物과 祭器, 儀仗, 그리고 봉안 어진의 성격과 기능

Abstract

본고는 제물과 제기, 전내 감실 의장, 그리고 봉안 어진에 반영된 조선 후기 선원전의 성격과 기능을 고찰하였다. 조선 후기 선원전은 궐내 왕실 가족 중심의 제향 공간으로 비유교적 전통의 탄신 다례가 대표적 의례로 확립되었다. 왕실 여성들의 참례와 제향 준비에 대한 적극적 참여는 남성 신료들이 공적 임무를 맡아 수행한 국가 제향과 대비되었다. 중박계· 산자 등 유밀과 중심의 제물을 바치고 유제 제기를 주로 사용한 영희전 등 공식 진전과 달리 선왕이 생전 즐긴 육류와 전복 등의 진미, 옥·금·은으로 된 제기 등 최고급 제물과 제기를 바치고 선왕이 생시 사용한 기명을 해당 실의 제기로 전용하기도 했다. 선원전 탄신 다례의 제물과 제기는 국왕 생전 생일 등 특별한 날 행해진 왕실 진찬, 그 중에서도 가장 성대한 내진찬과 유사하였다. 선원전 제향과 제물·제기의 특성은 유교적 제향을 지내면서도 생시처럼 선왕을 모신 혼전에서 왕실이 사적으로 행한 탄신다례 등의 의례를 계승하고 있었다.
선원전은 18세기 전반부터 어탑과 당가, 삼면 오봉산병풍 및 북벽의 모란병풍으로 殿內 감실 의장을 구성했는데 일제강점기 조성된 신선원전도 이 같은 감실 의장의 기본 구성을 잇고 있었다. 선원전 감실 의장은 속제에 편입된 태조진전과 영희전이 일면 오봉산병풍을 세우고 모란병풍은 사용하지 않은 것과 구별되며, 왕실 제향 공간 중 혼전 의장과 높은 유사성을 보였다. 제향과 제물·제기, 그리고 감실 의장의 특징은 선원전이 부묘 이후 폐지된 혼전을 계승해 현왕과 대비 등 왕실 가족이 궐내에서 선왕을 생시처럼 모실 수 있는 상설화된 제향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19세기 이후 선원전은 북벽의 모란병풍 외에 동·서벽에 매화장자, 殿內 해반도병풍 등을 추가적으로 배설하며 내부 공간을 대형의 그림 병풍과 장자로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조선 왕조의 다른 제향 공간에서 찾기 어려운 특징적 면모이다.
선원전의 성격은 봉안 어진의 선정과 기능에도 영향을 미쳤다. 法服의 면복 또는 원류관복 전신상 어진을 주로 봉안한 영희전과 달리, 선원전은 일상의 사무를 볼 때 입은 익선관·곤룡포본을 주로 봉안하고 군복본 어진과 반신상인 소본도 봉안했다. 선원전에 전봉 또는 봉안할 어진 선정 시 국가 제향 공간인 영희전에 비해 격식과 형식적 요건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으며, 국왕과 대비의 선왕에 대한 기억과 추모의 감정을 충족시키는 여부가 전봉 또는 봉안 어진의 선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Abstract

Sŏnwŏnjŏn (璿源殿, Hall of Jade Source) stands out from other royal portrait halls within the late Chosŏn period on account of its unofficiality. This comes through in its rites, ritual foods and vessels, interior setting, and the enshrined portraits.
Sŏnwŏnjŏn was an informal sacred hall where royal family members could personally present offerings and worship before portraits of late Chosŏn kings in the inner court. Birthday tea rituals (誕辰茶禮), which drew on non-Confucian traditions, were established as the representative rite of this hall. Unlike many other ritual halls at the time, these tea rituals often featured the active participation of royal women including queen dowagers and royal consorts. From the preparation of rituals to acts of veneration, they played an active role. This stands in stark contrast to the rites of Yŏnghŭijŏn (永禧殿, Hall of Eternal Happiness), the representative official portrait hall of late Chosŏn, which were always performed by male officials.
Yŏnghŭijŏn primarily used oil-and-honey pastries (油蜜菓) and brass vessels for the offering tables. Conversely, Sŏnwŏnjŏn presented vessels made from the most luxurious materials of the time, such as silver, gold, and even jade. The vessels included delicacies comprised of various kinds of meat and fish dishes for the tea rituals. Objects originally produced for the king’s use in life were also incorporated into Sŏnwŏnjŏn rites. In sum, the ritual foods and vessels for tea rituals echoed the table setting for a king in the inner banquet (內進饌) to commemorate his birthday. The rites as well as the ritual foods and vessels of Sŏnwŏnjŏn seem to have followed the tea rituals of a spirit hall, in which a deceased king’s spirit tablet was enshrined for about two years and royal family members could serve as if the late king was alive.
The physical environment of a chamber at Sŏnwŏnjŏn mimicked the interior setting of a spirit hall, and consisted of a baldachin, a three-sided Five Peak screen, a royal bed, and a set of four-panel peony paintings. This interior differs from one of official portrait halls, wherein there was a one-sided Five Peak screen and a royal bed without the use of Peony screens. Indeed, Sŏnwŏnjŏn functioned as a substitute for a spirit hall. In the 19th century, the hall was distinguished from a sprit hall by the more lavish decoration of its inner space with paintings rich in symbolism, additionally including Plum screens and Sea-and-Peaches of Immortality screens. The subject matter of the paintings expressed the royal family’s hope for the eternal life of their ancestors.
Portraits selected for worship in Sŏnwŏnjŏn matched the intimate and informal character of this late Chosŏn portrait hall. Unlike Yŏnghŭijŏn in which full-length portraits of late Chosŏn kings in official attire were displayed, a majority of the displayed or enshrined portraits at Sŏnwŏnjŏn presented kings in ordinary attire. Moreover, half-length portraits were enshrined therein. Kings and also the queen dowagers were primarily responsible for deciding what went into it. While ritual requirements were important to these decisions, human feelings for the portrait subjects also influenced the selection.

I. 머리말

조선 왕조는 국초부터 太祖와 世祖 眞殿을 國家 祭享 장소로 공식화하며 진전 제도를 발전시켰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붕괴된 진전 제도를 재정비하면서 한양의 永禧殿, 外方의 長寧殿·萬寧殿·華寧殿, 창덕궁 내 璿源殿과 같은 진전을 새로이 설립했다.1 조선 시대 진전은 국왕의 초상인 御眞을 제향의 대상으로 삼는 공간이란 중요성과 정치적 성격으로 제도의 확립 과정과 운영, 임진왜란 이후의 변화, 진전 의례를 통해 본 어진의 기능 등 다양한 주제와 관점으로 다수의 연구가 진행되었다.2 조인수의 언급처럼 조선 시대 진전 제도의 독특한 점은 동시대 중국의 명·청과 달리 도성과 외방 여러 곳에 군왕의 초상을 모신 진전을 운영하고 國家祀典에 俗祭로 분류해 포함한 데 있다.3 그런데 조선 후기 선원전만은 제향 儀註가 국가사전에 편입되지 않은 채 운영된 유일한 진전이었다.4
궁궐에서 멀지 않은 영희전이 숙종에서 영조 대에 걸쳐 국왕이 親享을 행하는 列聖眞殿으로 국가사전에서 높은 위상을 확보한 점을 고려할 때, 궐내에 선원전을 세우고 비공식적 제향을 지속한 이유 및 국가사전에 포함된 다른 진전들과 선원전의 구체적 차별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5 선원전에 대한 선행 연구는 건축, 어진, 의례, 제기 등 분야별로 다루어졌다.6 리처드 비노그라드의 中國 祖宗畵 연구에 대한 지적처럼 어진 주위의 공간 구성, 儀物, 그리고 行禮 과정 전반에 대한 고찰은 선원전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7 한편, 서구의 중국미술사 연구에서는 특정 계층과 집단이 소유하거나 향유 혹은 사용한 물건(物), 공예품의 문양 등이 사회적 지위와 위상, 역할, 정체성, 군주 권력 등의 표상으로 기능함을 조명한 바 있다.8 유교적 예제의 기준에 맞춰 정비된 조선의 국가의례는 의례별 위계와 위상, 참여자의 신분적 지위 등에 따라 의례의 진행 절차와 내용 그리고 壇廟·祭物·祭器·服飾 등 행례를 위한 제반 제도적 규례를 엄격히 규정했다.9 따라서, 국가사전에 편입되지 못한 “왕실 내부” 제향 장소란 선원전의 성격이 제향 의식뿐 아니라 관련 제물과 제기, 殿內 儀仗에도 반영되고 공식 진전과 차별화됐음을 전제할 수 있다 하겠다.10
본고는 제향 의식, 제물과 제기, 전내 어진 봉안 관련 주요 儀仗을 중심으로 좀 더 통합적인 시각에서 조선 후기로 한정해 선원전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제사 의식은 신에게 바치는 祭需와 이를 담는 祭器에서 개별 제사의 위상과 성격이 뚜렷하게 구분되기에 먼저 조선 후기 선원전 제향 및 관련 제물과 제기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11 이어 殿內 어진 봉안 龕室을 구성하는 주요 의물인 당가, 용상, 오봉산 병풍 그리고 북벽을 장식한 모란 병풍 등을 중심으로 儀仗을 살펴볼 것이다.12 또한, 선원전에 봉안되고 제향의 대상으로 展奉된 어진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선원전 봉안 어진의 특성과 기능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Ⅱ. 조선 후기 선원전 제향 및 제물·제기의 성격과 기능

1695년 숙종은 비공개적으로 자신의 어진 두 본을 제작해 한 본은 강화도 長寧殿에 봉안하고, 다른 한 본은 창덕궁 春暉殿에 봉안한 후 殿號를 선원전으로 고쳤다.13 이후 1713년에 都監을 설치해 공식적으로 제작한 絳紗袍本과 袞龍袍本의 어진을 각각 長寧殿과 선원전에 기존 어진을 대체해 봉안하면서 두 전각은 숙종 어진의 공식 봉안처가 되었다.14 같은 해 숙종은 「계사년 여름에 영정 도사가 완성되어 마침내 절구 한수를 지어 나의 뜻을 보이다」란 시의 두 번째 구절에 “장녕전에서 절사를 올리니 선원전에선 분향만 해도 안 될 것은 없다(不害長寧行節祀, 璿源殿裏只焚香)”라고 어진 도사 및 장녕전·선원전 봉안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명시했다.15 ‘節祀’는 정월 초하루[正朝]·한식·단오·추석·동지 등 俗節에 행하는 제향이다. 따라서 해당 구절은 숙종의 1713년 어진 도사 추진이 그의 사후 강화도 장녕전은 태조 외방 진전 및 영녕전과 같이 俗節 제향을 지내는 國家祀典의 俗祭 공간으로 확립하고 선원전은 대내의 분향 공간으로 염두에 두고 이뤄졌음을 알려준다.16 영조가 직접 지은 「璿源殿重修記幷銘」에 따르면 숙종은 생전 선원전 봉안 어진에 대해 다음과 같은 遺敎도 내렸다.
  • “선원전 어진[影子]은 후일에 편안히 모셔야 하니 안에서 朔望에 焚香만 할 따름이다. 따라서 參奉을 내지 말고 萬壽殿의 內官으로 하여금 守直만 하게하고 … 분향은 품계가 높고 오래 番을 섰던 내관을 시켜서 하고 향은 內需司에서 가져다가 써라.”17

수직을 맡은 내관이 속한 만수전은 孝宗이 1656년 莊烈王后(1624~1688)를 봉양하기 위해 창덕궁 인정전 북쪽에 조성한 대비전으로 춘휘전과 함께 건립되었는데 1687년 화재로 소실되고 춘휘전만 남았다.18 숙종은 화재를 피한 기존 대왕대비의 별전을 어진 봉안처로 삼고 대비전 소속 내관에게 수직을 맡긴 것이다. 수직과 분향을 내관이 담당하고 향 등의 품목은 왕실 사유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쓰도록 한 명은 숙종이 선원전을 국가의 공식 의례 장소가 아닌 왕실의 사적이고 비공식적 의례 장소로 의도했음을 시사한다. 숙종의 어제시와 유교는 선원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옮겨 다른 열성 어진과 함께 봉안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논의를 무력화하고 대내의 선원전을 존속토록 한 주요 근거로 기능했다.19
숙종 사후 卒哭이 지난 시점인 1720년 11월 20일 새벽[卯時] 장녕전 어진이 벽상에 展奉되었으며 儀物과 享祀 절차를 도성 내 열성 진전인 永禧殿의 예에 따라 거행하기로 했다.20 장녕전 어진 전봉에 맞춰 선원전 어진도 전봉을 행했는데, 이때 경종이 “大內의 주관하에 행하는 일[自內行之之事]”로 승정원에 알리고 있어 주목된다.21 이렇듯 숙종 어진의 전봉과 함께 장녕전은 俗節에 국가 공식 제향을 행하는 공간으로, 선원전은 왕실 차원의 사적 의례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英祖(재위 1724~1776)는 즉위 직후 선원전 중수를 추진하고 재위 기간 동안 선원전에서 정조, 삭망, 숙종의 忌日과 誕辰日 등에 의례를 행했다.22 1736년 7월 창덕궁에 있을 때 선원전 삭망 분향을 빠뜨린 적 없었는데 동년 4월 말 慶德宮으로 옮긴 뒤 예를 행하지 못해 情理에 서운하다는 영조의 언급은 숙종이 유교로 남긴 선원전 어진에 대한 삭망 분향을 친히 행했음을 알려준다.23 『일성록』 「범례」에 따르면, “閣監의 直所에서 ‘분향을 친히 행하셨다’라고 기록해 오면 ‘展拜하였다’라고 적고 전배는 대내에서 주관해 禮를 행하였다[自內行禮也].”24 이에 따라 『실록』, 『일성록』 등의 기록에 나타나는 국왕의 삭망 전배는 “대내의 주관하에” 친히 분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숙종의 기일과 탄신일에는 酌獻禮를 올리거나 전배, 茶禮를 행했는데 모두 대내의 주관하에 이뤄졌다.25
영조 재위 후반기 왕세손으로 영조를 隨駕해 다양한 선원전 의례에 참여하거나 攝行한 正祖(재위 1776~1800)는 즉위 후 영조 어진 봉안을 위해 선원전을 증건하고 선례를 이어 정조와 삭망, 탄신일 등에 정기적으로 의례를 행했다.26 선왕의 기일제는 정조 재위 초기를 제외하면 더이상 행해지지 않았으며, 탄신일의 경우 작헌례 또는 다례를 행하다가 정조 재위 후반기로 가면서 다례의 비중이 높아지고 순조 대 이후 다례로 정례화 되었다.27 기존 숙종·영조·정조의 어진에 이어 헌종(재위 1834~1849)과 철종(재위 1849~1863) 대에 봉안된 순조와 익종, 헌종의 어진까지 여섯 선왕의 탄신일에 대한 국왕의 다례 거행이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면서 탄신 다례는 조선 후기 선원전의 대표적 의례로 자리 잡았다.28
선원전 다례는 영희전·경기전 등 속제에 포함된 국가 진전 제향과 달리 飮福, 축문을 읽는 讀祝, 그리고 축문을 묻거나 태우는 望瘞/望燎의 절차를 모두 생략한 채 국왕이 연이어 세 차례 잔을 올리는 連獻三盞만 행하는 왕실 제향 중 가장 간단한 절차의 의례였다.29 다례는 국가 風俗과 人情에서 유래한 제도로 조선 전기 貞熹王后(1418~1483) 주도로 세조의 혼전인 永昌殿과 진전인 奉先殿에서 거행한 것이 선례가 되었다.30 조선 후기 선원전에서 다례를 처음 행한 인물이 숙종의 두 번째 계비 仁元王后(1687~1757)이며 영조가 이를 이어 다례를 행하고 정조도 이전의 규례를 따라 선왕의 탄신일에 늘 다례를 행했다는 貞純王后(1745~1805)의 언급은 왕실 내부 의례로서 선원전 다례의 기원과 성립 과정을 알려준다.31 또한, 정순왕후는 “선원전은 대내에서 정성을 펼치는 곳으로 … 내외 자손의 다례 행사는 참으로 이른바 집안사람의 예인 것이다(此殿, 卽自內展誠之所 … 內外子孫之茶禮行事, 眞所謂家人禮也)”라며 선원전과 가인례인 다례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32 선원전에서 다례는 봉안 열성조의 탄신일에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그런데 생신 제사(生辰祭) 또한 『朱子家禮』 등 유교의 禮書에 없는 俗禮에 기반한 비유교적 전통이다.33 조선 후기 私家의 기록에서 생신제는 한자로 生日之祭·生辰祭·生日茶祀·生辰茶禮로, 한글로는 생일다례·생일차례 등으로 칭해졌으며 차는 올리지 않았으나 떡·국수·꿀·과일·찜·수육·적·포 등 생시 즐겨 먹는 음식을 바친 간소한 형식의 제사였다.34 “예가 아닌 예”로 고인을 생시처럼 모시는 상례 기간 주로 시행한 생신 제사를 조선 후기 왕실은 탈상 후에도 선원전에서 지속한 것이다.35 이렇듯 선원전에서 世俗을 따른 가인례인 誕辰茶禮가 대표적 의례로 확립된 사실은 왕실의 사적 제향 장소란 선원전의 성격을 대변해 준다.36
대비와 왕비 등 왕실 여성은 선원전 제향의 준비와 행례 전반에 걸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725년 선원전 수리 시 인원왕후는 內帑을 내려 공사 경비를 지원했으며 인원왕후의 선원전 다례 설행을 선례로 정순왕후 등 왕실 여성의 다례 거행이 지속되었다.37 왕실 여성의 선원전 전배는 건축 구성에도 반영되어 1778년(정조 2)에는 선원전 뒤뜰에 東翼閣을 세워 별도 展拜處所를 조성했다(Fig. 1).38 왕실 여성은 제향을 위한 祭物·祭器의 준비와 진열 과정에도 직접 관여했다. 영조가 친히 行狀을 지어 왕비인 貞聖王后(1692~1757)가 선원전 전배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칭송한 이후 조선 후기 대비와 왕비의 행장에는 선원전 제향 시 제물의 준비와 참여가 이들의 효성스러움과 덕을 나타내는 주요한 예로 거론되었다.39
어진 移還安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선원전 제물과 제기는 기본적으로 대내에서 직접 준비하고 진설했다.40 1778년 영조를 위한 제2실을 조성하면서 정조는 선원전 제물을 대내에서 준비해 제기 수와 크기가 일정치 않고 많게는 100기에 이르기도 한 점을 지적하며, 제기 수를 46기로 줄이고 金盞과 玉杯 등을 제외한 대다수 제기의 재질을 은으로 바꾸어 새롭게 만들었다.41 이때, 홍국영이 선원전 제기의 모양과 크기를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해 대내에서 見樣을 내려 조성했으며 제2실 제기 중 銀匙箸는 대내에 있는 것을 이용했다.42 이처럼 선원전 제기는 정조 대에 대내의 器皿에 토대해 대부분 은기로 제작했으며 옥배와 금잔 등도 사용했다.
1846년 작성된 선원전 제4실(순조)·제5실(익종) 기명 목록 및 1851년의 제6실(헌종) 기명 목록에 따르면 옥·금 재질의 술잔과 鍮西果盤·磁茶器 외에 제상에 올라간 祭需 관련 제기는 모두 은으로 만들었다.43 국왕이 생시에 사용한 기명이 국왕 사후 선원전 제기로 전환되기도 했다. 1846년 기명 목록에서 銀匙楪·銀匙箸·銀召兒는 순조와 익종이 常時 쓰던 것이었다(Fig. 2).44 또, 1851년의 기명 목록은 金鍍金鳳甁과 한 쌍의 銀尖을 嘉禮時件으로 기록했는데 실제 『헌종·효현왕후 가례도감의궤』(1837)에서 동일 기명이 확인된다(Fig. 3).45 이들 기명 목록은 선원전 제물로 탕·과일·脯·切肉·炙 등의 음식과 차, 술을 올렸음을 알려주는데 영희전을 포함한 俗祭의 대표적 제물인 중박계·산자·다식과 같은 유밀과를 담은 于里가 배설되지 않고 단지 果器에만 우리를 사용해 주목된다.46 한편, 왕과 대비 등은 선왕의 탄신다례를 위한 제수에 생전복 등 선왕이 생시 좋아한 물종 마련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고 진전 다례용으로 별지정해 공납받기도 했다.47 이 같은 선원전 제기와 제물은 국가사전에 편입된 영희전·장녕전에서 유밀과 중심의 素膳의 제물을 올리고 유밀과와 과일을 담는 鑄于里와 鑄種子 등 유제 제기를 주로 사용한 것과 뚜렷이 구별된다.48
선원전 탄신다례는 조선 시대 喪禮 중 魂殿에서 대내의 주관하에 행해진 의례와 상통한다. 시신 매장 후 신주를 종묘 부묘 전까지 모시는 혼전은 선왕을 생시처럼 모신 殯殿에서 공식 조상신으로 모시는 宗廟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상례의 단계를 보이는 의례 공간이었다.49 과도기적 성격은 혼전에서 虞祭·卒哭·四時·臘·祥·禫祭 등 전례서에 규정된 大祭와 속절·삭망제 외에도 朝夕上食과 晝茶禮를 행했으며, 대제와 속절제 등에 각종 유밀과와 肉膳을 겸용한 찬탁을 올리면서 준소상에는 正祀用 술을 담은 彛·尊·山罍의 제기를 바친 데서도 잘 드러난다.50 전례서에 규정된 우제·속절 등의 공식 혼전 제향은 奉常寺에서 맡고 우제 후 혼전에 올린 조석상식과 주다례는 상의원 소속의 혼전 水刺間이 담당했다.51 기존 혼전 제기 연구에서 주목한 정사용 이·준·산뢰 등의 제기 외에도, 혼전 제향의 중심 제수인 중박계·산자·다식 등을 담는 각종 于里와 實果鍾子를 大祭와 속절·삭망제로 구별해 鑄造하고 혼전 전사청에서 관장했으며, 조석상식과 주다례에 빈전의 銀器를 이관받아 혼전 수라간에서 사용했다.52 더 나아가, 혼전에서는 빈전을 이어 대내의 주관하에 국왕이 상식·주다례 및 탄신다례를 친히 행한 점이 주목된다.53 왕실의 사적 차원에서 행해졌기에 대내가 주관한 혼전 의례의 제물·제기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찾아지지 않으나, 빈·혼전의 주다례에 內殿에서 평일을 본떠 백여 그릇에 이르는 內膳을 바치다 영조 대에 줄인 것이 70그릇 정도였다고 한다.54 이 같은 성대함은 선원전 제물을 대내에서 준비해 제기 수가 100기에 이르기도 했다는 정조의 언급을 상기시키며, 왕실 사적 차원에서 행한 혼 전 탄신다례의 전통이 혼전 폐지 후 선원전으로 이어졌음을 시사한다.
이상과 같이 선원전 다례는 형식상으로는 가장 간단한 절차를 보였지만, 육류·생전복 등의 진미, 옥·금·은으로 된 제기 등 진귀한 재료·재질의 제물과 제기를 바친 화려한 의례였다. 선원전은 대내 기명에 토대해 제기를 마련하고 국왕 생시 소용 기명을 移用했는데, 영희전이 魂殿의 공식 제향을 위해 典祀廳에서 사용한 중박계·산자·다식 소용 于里를 비롯한 각종 유제기를 옮겨 사용한 것과 대비된다.55 왕실 내외자손이 참여하고 최고급 제물과 제기를 사용한 선원전 탄신다례는 국왕의 40세 생일 등 특별한 날 행해진 동시대의 왕실 進饌 중에서도 옥배와 금잔, 다양한 산해진미가 바쳐지며 가장 성대한 면모를 띤 ‘內進饌’과 유사성을 보인다. 한 예로 순조의 보령 40세와 즉위 30주년을 기념한 기축진찬의 경우 내진찬 시 순조를 위한 수주정에 옥병·세 개의 玉杯·만호배 등을 배설하고 46器의 찬품을 內下한 唐畵器와 유접시에 올렸다. 이에 반해 외진찬의 수주정에는 은도금일월병·은도금선지두배를 올리고 20器의 찬품을 공조 및 사옹원 소관 유기와 자기에 담아 내진찬에 비해 간소했다.56 선원전 다례가 대내에서 주관한 혼전의 탄신다례 등을 계승한 점을 고려할 때, 선원전은 상례가 끝나 혼전이 폐지된 이후 탄신일 등 특별한 날 선왕을 살아있을 때처럼 섬긴 왕실의 사적 제향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Ⅲ. 조선 후기 선원전 감실 儀仗의 기원과 성격

조선 후기 창덕궁 선원전 초기 단계의 내부 모습은 1754년 영조가 친히 쓴 「선원전중수기」에서 추측할 수 있다.
  • “갑술년(1754) 춘정월 갑인일에 구들의 연기가 새어 들어와 곧 수리를 해야 했으며 그중에는 또 즉시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있어 慈聖에게 여쭙고 어탑[榻] 뒤의 板壁을 뜯어내고 벽 안쪽에 모란 병풍으로 들창[牗]을 만들고 좌우의 병풍 그림은 틀을 뜯어버리고 벽에다 붙였다.”57

윗글에 따르면 1754년 수리 전 선원전 어탑 뒤 북쪽 판벽에는 모란 병풍 3坐가 세워져 있었다. 영조는 구들의 연기가 새어 들어오는 것을 수리하면서 어탑 뒤 판벽을 모란 병풍으로 대신하되 병풍으로 들창을 만들고 좌우의 모란 병풍은 틀을 뜯고 그림만을 벽에 붙였다. 한편, 1788년 영조 어진 봉안을 위해 선원전의 동편을 제2실로 조성하면서 정조는 친히 唐家, 龍床, 五峯山屛風[五峯屛], 牡丹屛風의 제작을 감독하고 제1실의 것과 양식을 동일하게 할 것을 강조했다.58 이 같은 기록은 창덕궁 선원전이 초기 단계부터 당가와 용상, 오봉산병풍을 배설하고 그 뒷벽에 모란병풍을 장식했음을 알려준다. 감실 증설을 위해 행해진 수차례의 증건으로 세부적인 설치 방법에 변화는 있었으나 용상과 당가, 오봉산병풍, 그리고 主壁의 모란병풍이 선원전 감실을 구성하는 주요 의장으로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신선원전은 일제가 고종 장례 기간 중 慶運宮(현 덕수궁) 선원전을 훼철해 창덕궁으로 옮기는 변화 과정 속에서 경운궁 선원전의 부재 등을 활용해 1921년 조성한 것이다.59 그런데 1900년에 소실된 경운궁 선원전 재건에 대한 기록인 『眞殿重建都監儀軌』(1901)에 따르면, 당시 공사가 진행 중이던 永禧殿 營建都監과 경복궁·창덕궁 선원전의 제1실 증건을 위한 增建都監 소용 목재 부재 및 기존 건물에서 뜯어낸 나무가 경운궁 선원전 重建에 사용되었다.60 7실의 경운궁 선원전 감실 조성을 위해 경복궁 선원전의 唐家·오봉병·下平床을 옮겨와 수리하고 하평상 위에 올리는 용상과 답장 및 모란병풍 28폭과 동서벽의 매화장자 2좌는 新造했으며 각실 당가의 浮鳳 장식은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浮龍으로 바꾸었다.61 경복궁 선원전의 경우 1900년 조성된 제1실 감실을 제외한 나머지 6실의 감실은 경복궁 중건과 함께 1867년 완공됐으므로, 수리해 사용한 당가·오봉병·下平床 다수는 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선원전은 12실로 이뤄졌기에 경운궁 선원전 감실의 이전만으로는 모두 채울 수 없어 창덕궁 구선원전의 감실 의장도 옮겨온 것으로 생각된다.62 따라서 신선원전 감실에는 19세기 중엽의 창덕궁 선원전, 1860년대 말 경복궁 선원전, 1900년 增建한 경복궁·창덕궁 선원전 제1실의 의장과 1901년 경운궁 선원전 重建 시 신조된 의장 등이 혼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가, 오봉병, 천장 반자의 운룡 조각 등의 세부적 형태와 양식이 감실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점은 이 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Fig. 4).63
신선원전의 감실 구성은 『增建都監儀軌』(1900) 및 『影幀摹寫都監儀軌』(1901) 「圖說」의 기록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각 감실의 前面은 좌우 內柱 사이로 流音風穴과 風牧丹交窓을 설치해 장식성과 함께 공간 구획의 시각적 효과를 살렸다(Fig. 5). 下平床 위로 三面으로 이뤄진 오봉병[오봉장자]을 唐家에 연결해 설치하고 천정에는 부룡을 장식해 어진 봉안을 위한 기본 구조를 형성했다.64 삼면의 오봉병은 정면과 좌우의 內·外挾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에는 오봉산과 일월을 그리고 내협에는 정면에서 이어지는 산의 나머지 부분과 산기슭 위로 솟은 소나무 두 그루를 묘사했다(Fig. 6). 내협에 잇대어 있는 외협은 일월을 제외한 오봉산도의 모습을 좁은 화면에 압축하였다.65 西上制를 따라 서쪽부터 차례로 배치된 당가 뒤 북벽은 매 칸마다 벽체의 높이와 너비에 맞춘 4폭 모란병풍[障子] 1좌씩 총12좌 48폭의 모란 그림으로 벽면 전체를 가득 채워 장식적이고 압도적인 시각적 효과를 자아낸다(Fig. 7). 각 폭마다 수직의 중심축을 따라 커다란 오색 모란꽃을 좌우로 번갈아 배치한 형식의 모란 병풍은 가례·책례·상장례 등 조선왕실의 각종 의례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66 그럼에도 왕실 의례에서 대형 모란병풍이 선원전처럼 오봉산병풍과 함께 펼쳐져 사용된 예는 드물다.
태조진전인 경기전의 경우 정전 중앙에 별도로 석재로 만든 탑을 세우고 당가를 달아 감실을 조성했는데 당가 내 북벽 중앙에 4첩 오봉산병풍을 세우고 동서 양면은 문으로 닫고 앞면은 초록 비단휘장과 주렴을 늘어뜨렸다(Fig. 8).67 조선 후기 영희전에서는 감실 내 온돌 위로 사면에 雲足이 달린 龍平床을 두고 그 뒤쪽에 4첩 오봉산병풍 일좌만을 배설해 감실 기본 구성을 갖췄다.68 영희전 각 감실의 좌우로는 백능화지를 바른 격장자를 세워 공간을 구분하고 감실 전면의 內柱 사이에 종묘 감실과 같이 단순한 형태의 流音만을 설치해 간소한 감실 장식의 특징을 보였다.69 국가사전에 포함된 태조진전과 영희전 모두 전내에 모란병풍을 배설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에서 오봉산병풍과 모란병풍을 함께 사용한 예는 왕 또는 왕비의 시신을 왕릉에 매장한 후 神主를 宗廟에 祔廟하기 전까지 모시는 건물인 혼전에서 찾아진다. 혼전 正殿에는 어탑과 당가, 오봉산병풍을 설치하고 어탑 위로 神榻과 神座交椅를 두었으며 북벽의 칸수에 맞춰 牧丹屛을 배설했다.70 신탑과 신좌교의의 배설은 신주를 제향 대상으로 하는 正祀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어탑과 당가, 오봉산병풍은 왕이 생시 자리한 궁궐 정전 내 당가 구성을 하고 있어 과도기적 제향 단계의 특성을 드러낸다. 현전하는 기록에 토대할 때 17세기 초 이래 혼전에는 어탑과 당가, 오봉산병풍을 배설하고 건물 북벽의 칸수에 맞춰 3~4좌의 모란병풍을 장식했다.71 숙종의 혼전으로 쓰인 창경궁 문정전도 북쪽 3칸 벽에 모란병풍 3좌를 설치했으며, 어탑의 당가 안에 오봉산병풍을 펼치고 일월경을 걸었다.72 18세기 후반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의 당가 도설은 혼전 당가의 구조 및 당가 내 오봉산병풍의 구성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다.73
  • “당가는 柏子板을 쓴다. 3면《동·서·남쪽》에 단청을 그린다. 아래층에는 蓮峯을 설치하고 風牧丹을 새긴다. 위층에는 箭尾를 설치하고 그 위에 아래위 처마를 설치하고 起畫한다. 네 모퉁이에는 기둥을 세운다. 《좌탑을 세울 수 있게 한다》 안에는 斑子를 설치하고 金鳳을 새겨서 붙인다. 3면의 《동·서·북쪽》 障子에는 綃를 바르고 五峯山을 그리며, 《북면에는 오봉을 그리고, 좌우에는 餘麓을 그린다.》 日月鏡을 건다. 《만약 새로 만들 것 같으면 泥金銀을 써서 그린다. 小喪에는 모란만 그리고 日月은 없다.》”

위 기록에 따르면, 혼전 내 당가는 닷집[天蓋]과 유사한 형태로 기단부인 坐榻(또는 어탑)과 네 모서리의 기둥으로 연결되었다. 당가와 좌탑 사이는 동·서·북의 삼면에 장자를 설치했는데 장자 위에는 비단을 발라 오봉산을 그렸다. 북면은 오봉을, 동·서면은 여록과 적송을 묘사했으며 오봉산 위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월경을 걸다가 니금과 니은을 써서 일월을 그리는 것으로 바뀌었다.74 당가의 처마 앞면과 좌·우면은 단청을 하고 하단에 풍모란 조각과 연봉을 배설했으며, 천장 반자에는 한 쌍의 금봉황 조각을 달았다. 한편, 1649년 『인조빈전도감의궤』는 혼전용 오봉산병풍[장자]이 금박 도투락을 붙인 草綠大緞으로 장황되었다란 장황 방식을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75 이러한 혼전 내 의장 구성과 세부 장식은 明成皇后(1851-1895)의 혼전인 景孝殿까지 이어졌다. 1895년에서 1897년 사이에 조성된 경운궁 경효전 당가는 금박도투락을 장식한 초록광적으로 장황된 삼면 오봉장자를 설치하고 반자에 浮鳳 조각을 달았으며 정전 북벽 세 칸에 사첩 모란 병풍을 세웠다.76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중건한 경효전 내부도 대한제국기 황제국의 위상을 반영해 부봉을 浮龍 조각으로 바꾼 것 외에 이전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Fig. 9).77
현전하는 신선원전 감실을 다시 살펴보면, 당가와 하평상 사이에 동·서·북 삼면의 오봉산병풍을 세웠으며, 당가 처마 하단은 풍모란 조각과 연봉을 배설한 유음 장식을 하고 천정은 도금한 부룡 조각을 단 반자를 설치하고 있다(Fig. 10). 당가 내 오봉산병풍의 장황도 금박 도투락 장식을 한 초록 비단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선원전과 혼전 의장 구성의 유사성은 조선 후기 선원전 제향·제물·제기가 혼전에서 대내가 주관한 탄신다례 등 왕실의 사적 의례의 전통을 이은 것처럼, 선원전 내 어진 봉안을 위한 감실 의장 구성 당시 혼전 내 의장의 사례를 참조했음을 시사한다. 혼전은 상례 과정에 포함된 국가 의례 공간이자 2년 남짓 기간만 존속한 임시 시설이나, 선원전은 궐내에 상설화된 왕실의 사적 제향 공간이었다. 이 같은 차별성으로 선원전은 혼전보다 더욱 장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00년 창덕궁·경복궁 선원전 제1실 증건 시 두 궐의 선원전에 前排한 병풍·장자가 오래돼 상함에 따라 修補하거나 新造했는데, 그 대상에 창덕궁 內閤 동·서벽의 梅花障子, 창덕궁 海蟠桃障子, 경복궁 殿內에 所排한 모란도병풍이 포함되었다.78 해당 기록은 늦어도 철종 대인 1851년 증건된 창덕궁 선원전에서 북벽의 모란병풍 외에 동·서벽에 매화장자를 배설해 감실을 에워싼 벽면 전체를 모란과 매화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음을 알려준다.79 일부 훼손되었으나 신선원전의 감실 서벽에 매화장자가 남아 있어 조선 후기 선원전 매화장자의 예를 유추해 볼 수 있다(Fig. 11).80 또한, 1900년 선원전 제1실을 증수하면서 主壁 (북벽)의 모란장자와 별도로 전내 배설된 모란병을 수보하고 1901년 경운궁 선원전 중수 시 해반도병풍 2좌를 신조한 후 1좌를 탁지부에 還下한 기록은 19세기 이후 감실이 자리한 내합 영역 앞 殿內 行禮 공간에 의례 시 별도의 모란병풍과 해반도병풍[장자]을 배설했음을 알려준다.81
이처럼, 19세기 이후 선원전은 모란과 매화란 상징성 강한 꽃 그림으로 감실의 동·서·북 삼면을 둘러싸고 의례 시 행례 공간에도 모란병풍과 해반도병풍을 펼쳤다. 모란은 당·송 이래 동아시아 문학과 미술에서 花中王과 富貴花로 칭해지며 왕족과 부귀를 상징했기에 모란병풍은 조선 왕실의 다양한 의례에 폭넓게 사용되었다.82 매화는 추위나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절개를 표상해 사군자 중 하나로 널리 알려졌으나, 봄의 전령사로 한겨울에 꽃을 다시 피워내는 생태적 특성에서 再生 혹은 更新, 장수를 상징했으며, 활짝 핀 다섯 장의 꽃잎은 五福도 의미했다.83 제향 공간의 벽면을 장식한 그림이란 점에서 매화장자는 후자의 재생과 갱신, 오복 등의 길상적 의미와 더 연관될 것이다. 조선후기 매화장자와 화풍상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신선원전 서벽의 매화는 창공과 연못을 향해 길게 내리 뻗은 매화 가지에 다섯 장의 꽃잎을 활짝 펼친 흰 매화꽃과 꽃봉오리를 가득 묘사하고 있어 이 같은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해반도란 명칭처럼 현전하는 <해반도도>는 모두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산 위에서 바다를 향해 가지를 길게 뻗고 있는 蟠桃樹를 묘사하고 있다(Fig. 12). 긴 가지에 탐스럽게 익은 큼직한 복숭아를 주렁주렁 달고 아래로 영지 또는 대나무가 함께 표현된 해반도도는 황제 시기 귀신을 다스린 두 형제가 거주한 滄海 가운데 度朔山 (또는 度索山)의 반도수 가지가 삼천리나 뻗어 있다는 『산해경』의 내용과 삼천년에 한번 열리는 서왕모의 仙桃 고사를 결합한 형상이다.84 신선 고사에 유래를 둔 해반도 병풍(장자)은 전내에 펼쳐져 해당 공간을 仙界로 치환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 후기 선원전은 혼전과 같이 당가와 하단의 어탑[좌탑] 사이에 삼면 오봉산병풍을 설치하고 주벽[북벽]에 모란병풍을 세워 전내 감실을 구성하였다. 19세기에는 북벽의 모란병풍에 더해 동·서벽의 매화장자로 감실 공간의 삼면을 그림으로 에워싸고, 前面의 행례 공간에도 모란병풍과 해반도병풍을 배설해 내부 공간을 대형의 그림 병풍과 장자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다양한 제재의 그림 병풍[장자]로 제향 장소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점은 혼전과도 구별되며, 다른 조선 왕조의 제향 공간에서 찾기 어려운 선원전의 특징이다.85 왕의 신분·지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병풍 외에 재생·장수·오복이란 길상과 선계를 상징하는 다양한 제재의 그림 병풍의 사용은 제향의 주관자인 왕실 내외 자손의 염원을 드러낸다 하겠다. 이는 전례서의 규정을 준용하고 보수적 성격을 지닌 국가 제향 공간과 달리 선원전은 왕실의 요구를 보다 쉽게 반영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Ⅳ. 조선 후기 선원전 봉안 어진의 특성과 기능

실제 모습과 가장 닮은 1773년 영조 80세 어진에 대한 이모를 추진하면서 정조는 선원전에 봉안된 영정은 본래 外廷 신료가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동 어진을 이모해 영희전에 봉안한다면 상하 군신 모두 우러러보게 될 것이라고 한 바 있다.86 이 같은 정조의 언급은 도성 내 열성 진전으로 국가 제향 장소인 영희전은 외정의 신료가 봉안 어진을 瞻望하는 것이 가능한 공개성을 지닌 반면, 선원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신료에게는 제한된 비공개적 장소임을 확인시켜 준다.87 국가 제향 장소로 관리된 영희전은 조선 후기의 전례서 및 소속 관원들이 편찬한 官署志 등에 연혁과 운영, 제향뿐 아니라 봉안 어진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전한다(Table 1).88 반면, 선원전은 비공식·비공개적 성격으로 관련 기록이 문헌 사료에 단편적·산발적으로 전함에 따라 1900년 경운궁 선원전 화재로 모두 소실된 봉안 어진의 전모가 소개되지 못했다. 본고는 『璿源譜略修正儀軌』, 『日省錄』 등 왕실 계보 작업 관련 기록과 왕실 일기류 등을 토대로 조선 후기 선원전 봉안 어진의 내용을 <Table 2>와 같이 복원하였다.89
영희전과 선원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국왕의 어진 목록은 제향 공간의 공식/비공식적 성격과 봉안 어진의 공개/비공개성이 영희전과 선원전에 제향의 대상으로 전봉된 어진의 선정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Table 1, 2). 영희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국왕의 어진은 1713년 제작된 선원전 봉안본을 모사해 봉안한 숙종 어진을 제외하면 영조와 순조 모두 法服에 해당하는 冕服本과 遠遊冠本(또는 絳紗袍本)이었다.90 면복은 국왕이 종묘·사직 등 大祀의 친행과 가례 시, 그리고 正朝·冬至 朝會 등에 착용한 大禮服이며, 원유관복은 朔望· 進表·詔降·朝見 등에 착용한 국왕의 朝服에 해당하는 복식이다.91 영희전에서는 국왕 사후 생전 제작한 어진 가운데 가장 격식 높은 복식을 한 全身坐像의 어진을 선정해 해당 실에 펼쳐 봉안한 것이다.92 반면, 선원전에 봉안된 어진의 다수는 익선관·곤룡포 차림의 常服本 어진으로 왕이 일상적으로 사무를 볼 때 입는 옷인 視務服이다.93 영희전과 선원전 봉안 어진에 나타난 복식의 격식 차이는 영희전 친향 시 국왕이 종묘 친향과 같이 가장 격식이 높은 면복을 착용한 반면 선원전 다례 친행 시에는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고 의례를 행한 점과도 상통한다.94 한편, 전신상만을 봉안한 영희전과 달리 선원전에는 전신상뿐 아니라 반신상인 小本의 어진이 봉안된 점도 주목된다. 이렇듯 선원전 봉안 어진은 의복의 격식이나 전신 대본 등 형식적 요건에 크게 구애받지 않은 경향을 보인다. 국가 제향 공간으로 관리들이 제향 의례를 정기적·공식적으로 수행한 영희전과 달리, 궐내 왕실 가족 중심의 의례 장소란 선원전의 성격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선원전에는 후대 왕과 혈연으로 연결된 국왕 또는 생존 대비의 夫王의 어진을 모셨기에, 후손인 국왕 및 대비 등의 사적 감정을 충족시키는 여부도 선원전 내 제향의 대상으로 전봉된 어진 선정 시에 영향을 미쳤다.95 1802년 대왕대비 정순왕후(1745~1805)는 선원전 제2실에 모신 영조 어진 원유관본(1763)을 대신해 “천안의 색택과 7분 비슷한(天顔色澤, 七分肖似)” 익선관본(1773)으로 바꾸어 전봉토록 했다.96 이에 앞서 정조 또한 영조실에 원유관본(1763)을 대신해 익선관본(1773)으로 전봉하고자 했는데 “더욱 실제 모습과 닮은 점(尤得其眞)”을 그 이유로 설명한 바 있다.97 조선 후기 선원전 봉안 어진이 1900년 화재로 모두 소실된 상황이라 실제 어진과의 비교 고찰은 불가능하나, 이러한 문헌 기록은 선원전 제향의 주관자인 국왕과 대비 등에게 어진의 “得眞” 즉 사실성이 제향의 대상으로 전봉되는 어진 선정 시에 격식과 형식 보다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했음을 알려준다. 선왕과 더욱 닮은 어진은 초상 속 선왕의 실재함을 강조해 주며 혈연 또는 혼인이란 밀접한 유대 관계를 지닌 왕실 가족에게 강한 정서적·감정적 반응을 유도해 선왕에 대한 기억과 추모의 감정을 극대화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98
국왕의 사적 추모의 감정이 선원전 봉안 어진의 선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834년 선원전을 더 이상 증축하지 않기로 한 순원왕후(1789-1857)의 결정에도 親政을 시작한 헌종은 1846년 선원전을 증축하고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모시며 “天理와 人情에 따른 것”으로 정당화했다.99 경우궁 성일헌에 봉안된 순조와 익종 어진 중 순조 익선관소본(1830), 익종의 익선관소본(1830)과 군복본(1826)을 선원전 제4실과 제5실로 각각 옮겨 봉안했다.100 경우 궁 성일헌에는 순조의 익선관대본(1808)도 소장되어 있었으나 반신상인 익선관소본(1830)을 선택했으며, 익종어진의 경우도 경모궁 망묘루에 면복본(1826)이 봉안돼 있음에도 익선관소본(1830)과 군복본(1826)을 선택했다.101 형식과 격식적 요건에 얽매이지 않은 이 같은 결정은 당시 대비인 순원왕후와 헌종 등 왕실 가족 구성원들의 선왕에 대한 추모의 마음에 부합하는지 여부가 더 중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울러 1826년과 1830년에 제작된 두 본의 익종 어진을 선원전에 옮겨 봉안한 것은 부왕을 기억하지 못해 슬퍼하는 헌종의 사모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였다.102 선원전 이안 후 헌종은 방에 들어와 자리에 계신 것을 보듯 祖父인 순조와 父인 익종의 초상을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고 의지하였다.103 해당 기록은 왕실 가족의 사적 제향 공간이란 선원전, 그리고 이곳에 봉안된 어진의 기능을 잘 드러내 준다 하겠다.

V. 맺음말

본고는 왕실의 사적 제향 장소란 조선 후기 선원전의 성격이 제향을 위한 제물과 제기, 전내 감실 의장, 그리고 봉안 어진 등에 반영된 양상을 다각적으로 살펴보았다. 선원전은 궐내 왕실 가족 중심의 제향 공간으로 비유교적 전통의 탄신 다례가 대표적 의례로 확립되었으며, 참례와 제향 준비에 왕실 여성들의 적극적 참여는 공적 임무를 맡은 남성 신료들에 의해 수행된 국가 제향과 대비되었다. 영희전 등 국가 제향 진전에서 유밀과 중심의 제물을 바치고 유제 제기를 주로 사용한 것과 달리, 선원전 제향에는 국왕이 평상시 즐긴 육류·생전복 등의 제물을 옥·금·은 등의 귀한 재질의 제기에 담아 올렸으며 국왕이 생시 사용한 기명을 해당 실의 제기로 전용하기도 했다. 선원전 제향과 제물·제기의 특성은 유교적 제향을 지내면서도 생시처럼 선왕을 모시는 과도기적 상례의 단계를 보인 혼전에서 왕실이 사적으로 행한 탄신다례 등의 의례를 계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진귀한 제물과 제기를 사용한 선원전 탄신 다례는 국왕 생전 생일 등 특별한 날 행해진 왕실 진찬, 그중에서도 옥배·금잔 및 산해진미가 바쳐진 조선 후기 왕실의 내진찬과 유사성을 보였다.
선원전은 18세기 전반부터 어탑과 당가, 삼면 오봉산병풍 및 북벽의 모란병풍으로 殿內 감실 의장을 구성했다. 이러한 감실 의장은 속제에 편입된 태조진전과 영희전이 4첩 오봉산병풍 1좌만을 뒤에 세우고 모란병풍을 사용하지 않은 것과 구별되었으며 왕실 제향 공간 중 혼전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따라서 선원전 조성 시 문헌상 17세기 이래 지속돼 온 혼전 정전의 의장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게 제기되었다. 이처럼 선원전은 부묘 이후 폐지되는 혼전을 계승해 현왕과 왕실 여성이 궐내에서 평시뿐 아니라 탄신일 등에 선왕을 살아 있을 때처럼 모실 수 있는 상설화된 제향 공간으로 기능했다. 19세기 이후 선원전은 북벽의 모란병풍 외에 동서벽에 매화장자, 전내 해반도병풍 등을 추가적으로 배설하며 조선 왕조의 다른 제향 공간에서 찾기 어려운 화려한 장식으로 특징적 면모를 보였다.
선원전의 성격은 봉안 어진의 선정과 기능에도 영향을 미쳤다. 法服의 면복 또는 원류 관복 전신상 어진을 주로 봉안한 영희전과 달리, 선원전은 일상의 사무를 볼 때 입은 익선관·곤룡포본을 다수 봉안하고 군복본 어진과 반신상인 소본도 봉안했다. 선원전에 전봉 또는 봉안할 어진 선정 시 국가 제향 공간인 영희전에 비해 격식과 형식적 요건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으며, 국왕과 대비 등 선왕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지닌 왕실 가족의 기억과 추모의 감정을 충족시키는 여부가 전봉과 봉안 어진의 선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선포, 선원전 소실, 1908년 향사이정에 따른 영희전의 폐지 등으로 대한제국기 선원전은 성격과 기능, 위상에 있어 변화가 일어났다. 1921년 고종 부묘와 함께 당대 전하는 모든 어진을 모시기 위해 조성된 신선원전은 또 다른 양상을 띤다. 이러한 대한제국기 이후 선원전의 변화상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남겨 두고자 한다.

Notes

1) 본고에서 진전은 어진을 모신 제향의 장소로 한정해 정의한다. 조선시대 전례서는 제향이 행해지는 장소만을 진전으로 분류하고 있다(『國朝五禮序例』 권1(1474), 「吉禮」, ‘眞殿’ 및 『春官通考』 권24·권25(1788), 「吉禮」, ‘眞殿’). 이와 관련, 태조 사후 殿號가 이미 있었던 ‘濬源殿’을 제외한 전주·경주·평양의 ‘御容殿’을 ‘太祖眞殿’으로 고쳐 부르게 한 기사도 주목된다(『태종실록』 권24, 태종 12년 11월 15일 丙申).

2) 조선 시대 진전과 어진에 대한 연구사는 유재빈의 논문에 상세히 잘 정리되어 있다. 유재빈, 「조선 후기 어진 관계 의례 연구: 의례를 통해 본 어진의 기능」, 『미술사와 시각문화』 11(2011), 주1, p. 89.

3) 조인수, 「조선 후반기 어진의 제작과 봉안」에 대한 질의 및 답변」, 『다시 보는 우리 초상의 세계』(국립문화재 연구소, 2007), p. 36. 해당 심포지엄의 토론에서 조인수는 도읍과 외방 여러 곳에 국가 전례에 포함된 진전의 운영이 중국 송나라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元代에는 신어전 및 진전 사원이 운영되었는데 국가 전례 포함 여부에 대한 부분은 단언할 수 없어 본고에서는 명·청대로 한정하겠다. 원대 황제 초상과 진전은 Marsha Weidner(Haufler), “Painting and Patronage at the Mongol Court of China”(PhD dis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82), pp. 53-69. 명·청대 황제 초상화에 대한 국가 제향이 제도화되지 않고 황실 가족 중심으로 제향이 행해진 내용은 Cheng-hua Wang, “Material Culture and Emperorship: The Shaping of Imperial Roles at the Court of Xuanzong(r. 1426-1435),” (Ph.D. diss., Yale University, 1998), pp. 131-147; Jan Stuart and Evelyn Sakakida Rawski, Worshipingthe Ancestors: Chinese Commemorative Portraits (Washington, DC; Freer Gallery of Art and Arthur M. Sackler Gallery, 2001), pp. 44-46.

4) 조선 후기 선원전이 국가 제사 체제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점은 조인수, 앞의 논문, p. 29. 유재빈은 의례 분석을 통해 선원전이 국가전례에 편입되지 못한 왕실 내부 기관의 성격을 띤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재빈, 앞의 논문, pp. 81-82; 이욱도 선원전이 왕실가의 사당으로 역할했다고 주장했다, 이욱,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 정제와 속제의 변용』(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pp. 314-327.

5) 조선 후기 영희전의 위상과 중요성은 유재빈, 앞의 논문, pp. 76-80.

6) 선원전은 진전 제도와 어진 관계 의례, 오봉병에 대한 연구 등에서 부분적으로 고찰되었으며, 선원전만을 주제로 한 연구는 건축사와 공예사 분야에서 행해졌다. 이강근, 「덕수궁 璿源殿 복원의 제문제」, 『한국건축역사학회』 14(2005); 이강근, 「조선후기 선원전의 기능과 변천에 관한 연구」, 『강좌미술사』 35(2010); 장필구, 「고종 장례 기간 신선원전의 조성과 덕수궁·창덕궁 궁역의 변화」, 『대한건축학회 논문집-계획계』 29(2013.12.); 구혜인, 「대한제국기 경운궁 선원전 禮器의 구성과 함의」, 『미술사학연구』 288(2015); 동저, 「조선후기·대한제국기 선원전 다례와 다기」, 『한국학』 43(2)(2020. 6). 현전하는 신선원전에 대한 조사 보고서는 『창덕궁 신선원전 수리보고서』(문화재청, 2002); 『최후의 진전-창덕궁 신선원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7) Richard Vinograd, Boundaries of the Self: Chinese Portraits A.D. 1600-1900 (Cambridge, England and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 5.

8) 크레이그 클루나스는 명대 후기 ‘물건(物, things)’을 지식층의 사회적 위상과 차별적 취향의 표현으로 조명했으며, 청화 왕은 明 宣德帝(재위 1425-1435) 황실을 둘러싼 물질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선덕제 재위기간 동안 ‘황권(emperorship)’에 대한 개념의 재구성을 시도했다. 한편, 마틴 파워즈는 고대 중국 공예품의 장식 도안을 중심으로 한 연구에서 공예품이 독특한 소유물로서 가치 척도와 지시체를 지닌 문양인 ‘그래픽 패러다임(graphic paradigm)’을 통해 지위, 사회질서, 사회적 역할, 정체성 등을 형성한 방식을 밝혔다. Craig Clunas, Superfluous Things: Material Culture and Social Status (Oxford: Polity Press in association with Basil Blackwell, 1991); Cheng-hua Wang, op.cit.; Martin J. Powers, Pattern and Person: Ornament, Society, and Self in Classical China (Cambridge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6).

9) 김혜영, 「조선 초기 예제 연구와 국조오례의 편찬」, 『조선시대사학보』 55(2010), pp. 44-45.

10) 선원전의 성격에 대한 기존 연구는 주 4 참조.

11) 조선의 국가사전은 大·中·小祀로 편제된 正祀와 俗祭로 크게 구분된다. 정사는 희생의 사용 등 유교적 원리에 따른 제수와 제기를, 속제는 유밀과를 주요 구성 요소로 하며 일상의 飯物을 올렸다. 정사에서도 대·중·소사란 분류에 따라 바치는 제물·제기의 수와 종류를 달리했다. 제향 장소의 성격과 위상에 따른 제물의 차이에 주목한 연구는 이욱, 「조선시대 왕실 제사와 제물의 상징」, 『종교문화비평』 20(2011), pp. 221-260; 강제훈, 「조선 초기 속제 제사상의 구성과 그 특징」, 『한국사학보』 60(2015.8.), pp. 209-241.

12) 선원전 내에는 이외에도 地衣, 용상 위에 까는 3겹의 褥席[화문석-요(褥)-화문석], 紅綃帳, 주렴, 蓋와 扇, 제상 등이 진설되었다. 선과 개는 국왕의 신분과 위상을 반영하고 지의·욕석·홍초장 등은 제향 공간 구성을 위한 부수적 의물로서, 신주와 초상화란 봉안 대상의 차이로 규격과 배치 등은 다를 수 있지만 종묘 등 왕실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에 공통적으로 배설된다(박대남, 「종묘 감실 내부의 장엄」, 『종묘』(국립고궁박물관, 2014), pp. 112-116). 반면, 제향 대상이 안치되는 종묘의 神榻·神椅, 선원전의 당가·용상·오봉산 병풍으로 구성된 감실은 殿內 의장에서 신주와 초상화란 제향 대상과 성격의 차이를 시각적·상징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주요 의물이다.

13) 『승정원일기』 1102책, 영조 30년 1월 11일 신유; 璿源殿重修記幷銘, ‘선원전,’ 「창덕궁지」, 『궁궐지』 I, 서울학번역총서 I(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1994), p. 103. 조선 전기 역대 왕과 왕후의 초상을 모신 전각인 옛 선원전의 전호를 따른 것이나 전기의 선원전은 제향이 행해지지 않은 단순 봉안처였다(『春官通考』 권25, 「吉禮」, ‘眞殿’).

14) 『御眞圖寫都監儀軌』(1713), 「啓辭秩」, 癸巳 五月 十八日; 김지영, 「1713년 어진도사와 어용도사도감의궤」,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 2(2004), p. 535.

15) 『列聖御製』 권12, 「癸巳夏影子圖寫訖遂題一絶用示予意」. 해당 시의 두 번째 구절은 ‘璿源殿重修記幷銘’에도 인용되었다. 『궁궐지』 I, p. 103.

16) 『國朝五禮序例』, 「吉禮」, 文昭殿懿廟四時俗節.

17) 『궁궐지』 I, p. 103.

18) 춘휘전은 1655년 8월 15일 開基를 시작해 1656년 9월에 만수전과 함께 定礎와 상량이 행해졌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1657), 「계사」, 丙申九月初八日; 「二所」, ‘手本帙’). 『궁궐지』 ‘만수전’조에는 춘휘전에 대한 상이한 기록이 두 개 실려 있다. 당대 기록된 동 의궤에 토대할 때 “경복궁 春輝殿”이란 原記가 오류이고 增補된 春暉殿 기록이 정확함을 확인할 수 있다(『궁궐지』 I, 「창덕궁」, 만수전, p. 97).

19) 『승정원일기』 577책, 영조 즉위년 10월 30일 경자.

20) 『승정원일기』 528책, 경종 즉위년 11월 20일 계미; 523책 숙종 46년 6월 21일 병진; 『경종실록』 권1, 경종 즉위년 6월 21일 병진.

21) 『승정원일기』 528책, 경종 즉위년 11월 20일 계미. 선원전 의례 관련 기록에 ‘自內行禮’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자내’는 “大內의 주관하”에란 의미이고, 대내는 장소 또는 주체를 나타낸다. 장소로 쓰일 때는 협의로 왕의 편전을, 광의로는 왕의편전·왕비와 후궁의 처소·기타 왕과 직접 관련이 있는 燕朝 권역과 함께 후원의 왕실 도서관과 대비전이 포함되기도 한다. 또 주체로 쓰일 때는 장소를 소유하는 사람(임금)을 의미한다. 김종태, 「궁궐 공간 표현 용어의 가변성: 왕의 史的 공간, 大內·自內를 중심으로」, 『고궁문화』 8(2015), pp. 8-38.

22) 『승정원일기』 590책, 영조 1년 4월 13일 경진; 『궁궐지』, p. 103.

23) 『승정원일기』 829책, 영조 12년 7월 2일. 영조의 경덕궁 이어는 『승정원일기』 영조12년 4월 22일(병술).

24) 詣璿源殿展拜。【自閣監直所錄來“親行焚香”, 書以“展拜”。】 ㅇ 自內行禮也. 『日省錄』, 「日省錄凡例」, ‘臨御召見類.’

25) 영조 대부터 숙종의 기일(六月八日)과 탄신일(八月十五日) 전후로 선원전 재실에 거둥하거나 선원전에서 예를 행한 기록이 찾아진다(『영조실록』 권77 영조 28년 6월 7일 병신; 권 88 영조 32년 6월 7일 계묘; 권102 영조 39년 6월 6일 임진; 권103 영조 40년 6월 8일 무자; 권105 영조 41년 6월 7일 신해; 권109, 영조 43년 6월 7일 기해 및 8월 15일 무오; 권 110 영조 44년 6월 7일 계해; 권111 영조 44년 8월 15일 경오 등 다수). 한편, 『일성록』은 전배 외에도 작헌례와 다례도 지속해서 “대내가 주관하는 예(自內行禮)”로 명시하고 있다(『일성록』 정조 원년 7월 30일 계사; 정조 2년 1월 1일 임술; 정조 2년 1월 25일 병술; 정조 2년 2월 17일 무술; 정조 2년 5월 15일 갑술; 정조 2년 9월 11일 정유; 정조 4년 8월 15일 신유 등 다수; 정조 4년 9월 12일 정해 등 다수).

26) 선원전 제2실 조성을 위한 증축은 『일성록』 정조 2년 1월 15일; 2월 10일 등. 『일성록』 내 정조~고종 대 선원전 의례 관련 기록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문자료(http://kjg.snu.ac.kr/) 참조. 영조 대 선원전에서 행해진 기일 의례는 정조 재위 초 이후로는 거행된 기록이 찾아지지 않는다. 정조 대 기신에 선원전 작헌례를 행한 기사는 『정조실록』 권3, 정조 1년 5월 29일 계사; 『일성록』 정조 4년 6월 7일 갑인.

27) 『일성록』 및 『정조실록』에 토대한 정조 대 선원전 탄신일 의례 현황은 다음과 같다. 숙종 탄신일(8월 15일)의 경우 다례는 1776년, 1779년, 1780년, 1784년, 1792년, 1793년, 1797년, 1799년에 행해졌으며 작헌례는 1777년, 1786년, 1788년, 1789년, 1790년, 1798년에 행해졌다. 영조 탄신일(9월 13일)의 경우 다례는 1778년, 1787년, 1788년, 1792년, 1793년, 1794년, 1795년, 1797년, 1798년 행해졌으며, 작헌례는 1779년, 1780년, 1784년, 1785년, 1786년, 1789년, 1790년, 1799년에 행해졌다.

28) 순조 대 이후 고종 대까지 국왕이 친림한 각종 제향 관련 기록인 『전알급친림일기』에 기록된 ‘眞殿茶禮親行’ 대부분이 봉안 임금의 탄신일에 행해졌다(『展謁及親臨日記』).

29) 俗祭에 포함된 조선 전기와 후기 진전의 제향 절차는 『國朝五禮儀』 권1, 「吉禮」, ‘俗節享眞殿儀’ 및 『國朝續五禮儀』 권1, 「吉禮」, ‘親享永禧殿儀’ 참조. 선원전 다례 절차에 대해서는 『승정원일기』 헌종 12년 9월 22일 갑진; 헌종 13년 6월 18일 을축 등.

30) 다례가 국가 풍속에서 유래했음은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10월 30일 경자. 세조 혼전과 진전에서 정희왕후 주도로 다례가 거행된 점은 손명희, 「세조 어진의 두 봉안처: 영창전과 봉선전의 성격과 제향의 의미」, 『한국문화』 93(2021.3.), pp. 288-300. 조선 초기 조선왕실 제사 다례의 정립과 배경 등은 정영선, 「조선 왕실 祭祀茶禮의 禮制 성립과 그 배경에 관한 고찰」, 『유교사상문화연구』 25(2006), pp. 55-93.

31) 『일성록』 순조 2년 2월 29일 경오.

32) 『순조실록』 권4, 순조 2년 7월 26일 갑오. ‘대내’의 정의는 주 25 참조.

33) 김경숙, 「16세기 사대부 집안의 제사 설행과 그 성격-이문건의 묵제일기를 중심으로」, 『한국학보』 98(일지사, 2000), pp. 23-24; 최배영, 「조선후기 生辰茶禮에 관한 연구-『병자일기』와 『무오읍혈록』을 중심으로」, 『차문화·산업학』 33(2016), pp. 1-43.

34) 최배영은 조선후기 생신다례와 생신제사가 동일한 개념의 용어로 수용됐으며, 사가에서 생신제가 喪期內의 경우 왕실 빈·혼전의 주다례와 같이 午時에 설행된 사례와 喪期 이후 선원전 탄신다례처럼 四更 혹은 卯時와 같은 새벽이나 아침에 행해졌음을 논했다(최배영, 앞의 논문, pp. 21-38). 문헌상 용어는 해당 논문의 주 55·57·58·59·60 및 표2 참조. 한편 홍대용은 ‘家廟茶禮式’에 삭일, 정조, 백종, 추석, 정월보름, 한식, 동지 등에 행하는 제사를 설명하고 있어 조선 후기 다례와 제사가 동일한 개념으로 혼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湛軒書』, 「內集」 권1, 家廟茶禮式).

35) 최배영, 위의 논문, pp. 22-25.

36) 1768년 영조가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선원전에서 예를 행하고 특교를 내려 領相·國舅(장인)·都尉(사위)·承史에게 명해 숙종어용을 들어와 보게 한 바 있다(『영조실록』 권111. 영조 44년 8월 15일 경오). 정조 또한 영조 대의 선례를 들며 특교를 내려 숙종과 영조의 탄신일에 大臣, 閣臣, 도위 등이 선원전 다례에 참석하도록 명했다(『일성록』 정조 2년 9월 11일 정유; 9월 13일 기해). 入參한 신하들을 살펴보면 장인과 사위 및 영의정 등의 대신과 같은 국왕의 최측근 세력이다. 영·정조의 선례를 이어 순조 이후 二品 이상을 入參케 한 사례가 있으나 이 경우도 ‘無儀節擧行’ 또는 ‘無儀節’로 명시됐다(『전알급친림일기』). 따라서 입참은 국행 의례의 특징인 신료들의 정기적·공식적 의례 수행과는 거리가 있다.

37) 『궁궐지』 I, p. 104; 『영조실록』 권81, 영조 30년 1월 5일 을묘; 『일성록』 순조 2년 2월 29일 경오.

38) 『승정원일기』 정조 2년 1월 10일 신미; 1월 15일 병자.; 『일성록』, 정조 2년 1월 15일 병자. 이강근, 「조선후기 선원전의 기능과 변천에 관한 연구」, pp. 244-245. 동익각의 내전 전배처소는 19세기 행해진 수차례의 증건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대한제국기 경운궁 선원전의 경우도 방위는 변했으나 뒤뜰에 익각 형태로 內齋室을 두었다. 「東闕圖形」(1907); 『진전중건도감의궤』(1901), 「선원전도」.

39) 정성왕후, 純元王后(1789-1857), 神貞王后(1808-1890), 孝定王后(1831-1904)의 행장 내용은 각각 다음의 실록 기사에 실려 있다. 『영조실록』 권89, 영조 33년 3월 12일; 『철종실록』 권9, 철종 8년 12월 17일; 『고종실록』 권27, 고종 27년 8월 30일; 『고종실록』 권44, 고종 41년 3월 15일 양력.

40) 어진 이환안 등 특별한 행사를 위한 공식 작헌례 시에는 영희전 제향의 물종을 따랐다(『일성록』 정조16년 12월 28일 임진; 『展謁及親臨日記』, 兩朝御眞陪進入奉 璿源殿仍行酌獻禮 丙午八月初六日). 선원전 제물은 大內에서 備設하고 奉常寺에 단지 祭酒만을 대령한다는 내용은 영조 대 기록에 처음 보이며 고종대 『太常志』에 명시되었다(『일성록』 영조 52년 12월 20일; 『太常志』 권2(1873), 「祀典」).

41) 『일성록』, 정조 2년 1월 18일 기묘; 1월 20일 신사; 2월 13일 갑진. 정조는 선원전 증축 과정의 제반도 친히 감독했다. 『일성록』, 정조 2년 1월 15일; 2월 10일.

42) 『일성록』, 정조 2년 1월 23일 갑신; 1월 25일 병술; 2월 15일 병오.

43) 銀匙楪一坐, 銀匙箸一件, 銀召兒一箇, 銀周鉢三坐, 銀大楪三坐, 銀湯器三坐, [銀水正果器一坐], 銀篆字盒三坐, 銀果器五坐(于里), 銀大中小楪匙十三坐, [銀脯器一坐] <銀切肉器一坐>, 銀炙器二坐, 銀鍾子三坐(蓋具), 銀眞苽盤一坐, 銀尖一雙, 眞玉盃[眞玉鑷玉杯]一坐(眞玉臺具), 眞玉盃一坐(鍍金蓋·眞玉臺), 銀鍍金盃[純金杯]一坐[一雙](蓋臺具[純金臺具]), 銀日月甁[銀鍍金鳳甁]一坐, 銀酒炒兒一坐(蓋具), 銀茶炒兒一坐(蓋具), 銀茶葉瓢一坐(蓋·鍮錚盤具), 銀香盒[純金香盒]一坐, 磁茶器一坐(漆臺具), 銅鍍金香爐一坐(花利臺具), 銅鍍金香盒一坐. 鍮西果盤一坐. 豆錫中燭臺一雙, 豆錫小燭臺一雙, 花梨香匙筒一坐(火箸·火匙具), 火于里燈一坐, 朱漆樻二坐, 龍丹漆樻二坐, 朱漆茶器圅一坐, 倭漆香盒圅一部. 「眞殿第四室器皿·眞殿第五室器皿」(1846); 「眞殿第六室器皿」(1851). [__] 표시된 부분은 1851년 목록에서 재질 혹은 용어가 달라지거나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__>은 빠진 제기다.

44) 「眞殿第四室器皿·眞殿第五室器皿」(1846).

45) 「眞殿第六室器皿」(1851); 『憲宗·孝顯王后 嘉禮都監儀軌』 권2(1837), 「三房所掌」.

46) 기명 목록은 주43 참조. 조선 전기부터 원묘·진전·왕릉이 편입된 俗祭의 제상에 유밀과가 주요 제수였음은 강제훈, 앞의 논문, pp. 223-228; 이욱, 「조선시대 亡者를 위한 음식: 國喪을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29(2016), p. 234; 한편, 대한제국기 이후의 기록인 『一室各節祭品各冊』은 정월초하루 및 태조부터 헌종까지 봉안 열성조의 탄신다례 제물을 한글로 적었는데, 술과 차와 함께 탕, 면, 떡, 꿀, 만두, 절육, 편육, 전복초, 적, 생선, 과일, 수정과 등의 음식을 시기별로 달리해 올렸으며 중박계는 없고 다식이 바쳐졌으나 제상의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지 않았다(『一室各節祭品各冊』(1900년경)).

47) 『일성록』 순조 2년 2월 29일 경오.

48) 영희전이 소선의 제물을 올린 점은 『춘관통고』 권24, 續儀永禧殿俗節. 영희전 제물로는 中朴桂四器, 紅散子二器, 白散子三器, 煎茶食三器, 白茶食二器, 各色實果六器, 各色餠六器, 素湯二器, 糆一器, 匙楪一, 茶一器, 香醖三盞이, 제기로는 銀匙貼一(蓋具), 銀盞三, 銀筯一, 中桂于里四坐(臺具), 散子于里五坐(臺具), 茶食于里五坐(臺具), 實果種子六坐(臺具), 鍮匙卓㺵(병 6기와 진선 3기의 받침), 沙餠排大貼6, 沙磁椀3(면1·탕2) 沙茶鍾 1개가 있다(『永禧殿志』(1751) 권1, 「祭享饌品」; 권2, 「儀物祭器」 및 「永禧殿儀仗祭器謄錄」(1774)). 于里와 種子류의 제기 앞에 ‘鍮’ 또는 ‘鑄’라는 표기가 없지만 유제 제기다. 임진왜란 후 파괴된 제기를 복원한 기록인 『제기도감의궤』는 진전과 함께 俗祭로 분류된 왕릉 제기인 中朴桂于里·散子于里·茶食于里·實果于里(鍾子)가 주조[鑄]된 것임을 명시했다(『제기도감의궤』(1611), 「圖說」). 한편, 1797년 정조의 특교로 서용보가 만든 《태상향의도병》에 근거해 순조 말에서 헌종 초 봉상제조였던 이지연이 제작한 《태상향의도병》(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祭器圖說」도 영희전과 왕릉 등 속제용 제기인 중계·소계·산자·다식의 油果于里와 과일을 담는 果于里 모두 구리로 만듦을 명시했으며 해당 내용은 고종대의 『태상지』에도 실렸다(손명희, 「《태상향의도병》 연구」, 『고궁문화』 7(2014), pp. 60-146; 『태상지』 권1(1873)). 영조 대 영희전에서는 은시접과 은저, 은잔을 제외하면 유제와 사기 제기를 주로 사용하다가 19세기 들어서면 병기 등의 사기를 유기로, 다종은 은기로 바꿨다(『南殿續志』(1859), 「儀物祭器」). 장녕전 제향은 영희전과 동일한 제물과 제기가 바쳐졌다(『춘관통고』 권25, 長寧殿). 영희전·장녕전 제기에 대한 상세 내용은 Myenghee Son, Chapter 2-3. Ritual Foods and Vessels for Official Portrait Halls, op.cit. pp. 81-88 참조.

49) 이욱,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민속원, 2017), pp. 214-217 및 강제훈, 앞의 논문, pp. 231-238.

50) 조선 전기 혼전은 속절을 우제·사시 등의 대향과 동일한 제찬 규정을 적용했으나, 후기에는 속절을 우제 등의 대향과 구분하고 삭망제와 함께 분류했으며 속절과 삭망제에서도 正祀의 준소상 소용 제기를 사용했다. 『국조오례서례』 「禮饌酒尊圖說」, 虞祭 및 魂殿朔望祭; 『喪禮補編』 目錄, 「圖說」, 虞祭饌圖 및 魂殿俗節朔望祭饌圖.

51) 『효종국장도감청의궤』(1659), 「도감의궤」, 甘結帙, 九月二十九日; 『정종대왕빈전혼전도감의궤』(1800), 「禮關」, 庚申八月二十一日 등 다수. 상식과 주다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사옹원이 주관하는 素膳의 외상식과 외찬 외에 내전에서 별도로 육선 중심의 내상식과 내찬을 올렸다(이욱, 앞의 논문, pp. 221-230; 『영조실록』 권89, 영조 33년 4월 4일 을축).

52) 혼전 제기에 대한 연구는 준소상 소용 제기만을 대상으로 행해졌다(장경희, 「조선후기 王室祭器 鑄成 鍮器匠 연구」, 『한국공예논총』(2008), pp. 14-19). 혼전 전사청 소용 제기에는 대제 시 소용 중박계·산자·다식 우리와 실과종자, 속절·삭망제 소용 小朴桂·다식·산자우리와 실과종자가 있었는데 工曹 鑄成廳에서 주조했다. 혼전 수라간 소용 은기는 대내에서 내려받거나 상의원이 打造해 빈전에서 사용한 것이다. 혼전 전사청 소용 유제 우리 등의 목록, 혼전 수라간 소용 은기의 혼전 移送, 은기 목록 등은 17세기 전기부터 19세기까지 편찬된 국장도감의궤 및 빈전·혼전도감의궤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선조비인목후국장도감의궤』(1632) 「殯殿器皿」; 『효종빈전도감의궤』(1659), 「魂殿三房」. 魂殿各所掌器皿次; 『현종빈전도감의궤』(1675) 「혼전조성소」, 手本帙; 『숙종혼전도감의궤』(1720), 「魂殿三房」, 魂殿各所掌器皿; 『정종대왕빈전혼전도감의궤』(1800), 「三房義軌」, 稟目; 『순원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1857), 「삼방의궤」, 품목 등.

53) 효명전·휘녕전·연복전 등 혼전에서 탄신다례를 친행한 기록은 『영조실록』 권90, 영조 33년 9월 2일 신묘; 『정조실록』 권3, 정조 1년 2월 22일 무오; 권4, 정조 1년 9월 13일 을해; 『헌종실록』 권2, 헌종 1년 6월 18일 병오; 권3, 헌종 2년 6월 18일 경오; 『승정원일기』 영조 33년 12월 7일 을축; 『일성록』 정조 1년 2월 22일 무오; 12월 6일 무술 등. 효명전 등 혼전에서 상식과 주다례를 自內行禮로 왕이 친행한 사례는 『일성록』의 기록에서 다수 찾을 수 있다. 『일성록』 정조 즉위년 9월 1일 기사; 9월 3일 신미; 9월 5일 계유; 9월 9일 정축; 9월 13일 신사; 9월 15일 계미; 9월 19일 정해; 9월 21일 기축; 9월 24일 기축; 9월 26일 갑오 등 다수. 『일성록』에 근거할 때 정조가 효명전에서 자내행례로 친히 거행한 의례의 다수는 주다례였다. 한편, 빈전의 조석 상식·주다례가 자내행례로 행해진 사실은 『정조국장도감의궤』 권1, 「承傳」, 庚申六月二十九日; 『순조국장도감의궤』, 「傳敎」, 甲午十一月二十日 참조.

54) 『영조실록』 권27, 영조 6년 7월 15일 임오.

55) “鍮香爐蓋具一 鍮香盒蓋具一 中桂亐里臺具四 散子亐里臺具五 茶食亐里臺具五 實果于里臺具六 龍勺二 鍮煮一 … 以上孝明殿徽寧殿前排移用. 『英祖眞宗祔廟都監都監廳儀軌』, 「三房儀軌」, 永禧殿 英宗大王影幀移奉時儀物磨鍊, 各樣 祭器. 혼전 소용 于里가 주조되었음은 주 53 참조.

56) 『기축진찬의궤』 권2(1829), 「饌品」·「器用」. 정조 대 혜경궁의 회갑 진찬 시 壽酒亭에 은병·옥잔·도금은잔을, 순조 대 혜경궁을 위한 진찬에서도 수주정에 玉爵과 金爵 등을 배설했다(『일성록』 정조 19년 6월 17일 병신; 6월 18일 정유; 『기사진표리진찬의궤』, 「진찬」). 한편, 내진찬의 찬품과 기명이 외진찬보다 성대한 모습은 고종 대까지 이어졌다(『진찬의궤』 권3(1892), 「排設」 勤政殿內外排設·內進饌時排設位次).

57) ‘선원전,’ 『궁궐지』, p. 105.

58) 『일성록』 1788년 2월 9일; 2월 10일; 2월 11일; 2월 14일.

59) 장필구, 앞의 논문, pp. 197-208. 이강근, 「창덕궁 의효전에 대한 연구」,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2(사회평론, 2006).

60) 『眞殿重建都監儀軌』(1901), 「實入」, 이러한 사실은 1860년대 중반 및 1890년대 후반이란 신선원전 목부재에 대한 연륜 연대 측정 결과와도 합치한다. 『창덕궁 신선원전 수리보고서』, pp. 98-99.

61) 『影幀摹寫都監儀軌』(1901), 「품목」, 辛丑三月十二日.

62) 이강근 또한 신선원전이 경운궁과 창덕궁 구선원전의 감실을 모두 이전해 사용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이강근, 「조선후기 선원전의 기능과 변천에 관한 연구」, p. 264.

63) 신선원전 감실 내 오봉병과 당가의 부룡, 용상 등이 양식과 형태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는 점은 신선원전 수리 당시 작성된 수리보고서에서 처음 지적되었다. 『창덕궁 신선원전 수리보고서』, pp. 80-85. 신선원전 오봉병과 목가구 등의 양식적 차이에 대한 기초적 분석은 『최후의 진전-창덕궁 신선원전』, p. 105; pp. 134-135; pp. 164-165.

64) 『영정모사도감의궤』(1901), 「품목」, 辛丑三月十二日.

65) 선원전 감실에 정면 오봉병 좌우로 내협·외협이 잇대어 있었음은 이성미, 「朝鮮王朝 御眞關係 都監儀軌」, 『조선시대어진관계도감의궤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pp. 100-101 참조. 정면 畫本은 4폭, 내협과 외협의 화본은 각각 2폭이었다. 『(경복궁창덕궁선원전)증건도감의궤』 권1.

66) 김홍남, 「조선시대 ‘궁목단병’ 연구」, 『미술사논단』 9(1999), pp. 69-73.

67) 이수미, 「경기전 태조어진의 제작과 봉안」, 『왕의 초상』, pp. 236-240; 동저, 「경기전 태조 어진의 조형적 특징과 봉안의 의미」, 『미술사학보』 26(2006), pp. 15-19; 『慶基殿儀』, 「影幀儀」.

68) 17세기 후반 남별전(영희전)에서 용상, 오봉병, 褥席, 紅綃帳과 朱簾을 사용한 내용은 이성미, 앞의 글, pp. 98-99; 영희전 배설 의장에 대한 공식 기록은 『永禧殿志』 권2(1751), 「儀物祭器」; 『永禧殿儀仗祭器物謄錄』 (1774). 용평상과 오봉산병풍에 대한 세부 내용은 『영조진종부묘도감의궤』(1778), 「삼방의궤」, 英宗大王影幀移奉永禧殿時儀物, 乾隆四十三年 五月日一房.

69) 『南別殿重建都監廳儀軌』, 「一本所所掌」; 영희전 전내 구성에 대한 상세 내용은 Myenghee Son, pp. 88-96.

70) 『현종빈전도감의궤』(1675), 「魂殿二房」, 造成所所掌; 『숙종혼전도감의궤』(1720), 「魂殿二房」, 造成所所掌; 『경종혼전도감의궤』(1724), 「魂殿二房」, 造成所所掌 등; 『국조상례보편』(1758), 「圖說」.

71) 혼전에 오봉산병풍과 모란병풍을 함께 배설한 기록은 1632년(인조 10) 『선조비인목후국장도감의궤』에서 확인되어, 조선 전기부터 이어진 관례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신한나, 「조선왕실 凶禮의 儀仗用 屛風의 기능과 의미」(홍익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는 현전하는 빈전·혼전도감의궤를 대부분을 검토해 조선 왕실 흉례 소용 병풍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72) 『[숙종]혼전도감의궤』(1720).

73)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국조상례보편』(민속원, 2008), p. 90.

74) 흉례의식에서 일월경은 영조 연간 정성왕후의 국상에서 사용이 중지된 바 있고 이후 1776년 영조의 대상 이후 본격적으로 중지되었다(명세나, 「조선시대 흉례도감의궤에 나타난 오봉병 연구」, 『미술사논단』 28(2009), pp. 42-44).

75) 『仁祖殯殿都監儀軌』(1649), 「造成所」; 신한나, 앞의 논문, p. 42에서 재인용.

76) 『明成皇后殯殿魂殿都監儀軌』 下(1895-1897), 「造成諸事」.

77) 『경운궁중건도감의궤』 하(1904-1906), 「품목」.

78) 『(景福宮·昌德宮璿源殿)增建都監儀軌』, 「稟目」, 庚子八月二十日 및 庚子閏八月初五日. 의궤 기록에서 장자와 병풍은 종종 혼용된다.

79) 선원전 제2실 조성에 일일이 관여한 정조의 매화장자 등에 대한 언급은 찾아지지 않으며 순조 대 선원전 감실이 昭穆制를 따라 배치된 점에서, 헌종 대 증축 시 西上制로 감실을 일렬로 배치하면서 동·서벽에 매화장자가 배설된 것으로 추정된다(『순조실록』 권4, 순조 2년 8월 15일 계축).

80) 신선원전 내 오봉병·모란병·매화장자를 소개한 선행 연구는 Yi, Sǒng-mi, “Euigwe and the Documentation of Joseon Court Ritual Life,” Archivesof Asian Art 58(2008), pp. 125-126; 대한제국기 선원전에서 모란병, 매화장자, 해반도병의 사용 의궤 기록은 이성미, 앞의 글, p. 58.

81) 주 78 참조. 경운궁 선원전 중수 시 모란병풍과 해반도병풍 각2좌의 신조, 1좌의 해반도병풍과 10좌의 모란병풍에 대한 탁지부 還下 등의 기록은 선원전에서 해반도병풍과 일부 모란병풍이 건축 내부에 고정돼 설치되지 않고 의례 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影幀摹寫都監儀軌』, 「稟目」, 辛丑三月十二日; 「財用」, 用後還下; 「照會」, 辛丑五月十三日). 대한제국기 선원전 行禮 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모란병풍 2좌와 해반도병풍 2좌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한다.

82) 모란의 의미는 Patricia Bjaaland Welch, Chinese Art, A Guide to Motifs and Visual Imagery (North Clarendon, VT: Tuttle Pub., 2008), pp. 34-35. ‘꽃 중의 왕’이란 상징성으로 모란 그림이 궁중에서 각종 의례에 폭넓게 사용되었다는 주장은 박정혜, 「궁중 장식화의 세계」, 『조선 궁궐의 그림』(돌베개, 2012), pp. 41-52.

83) 매화의 여러 상징적 의미는 Maggie Bickford, Ink plum: the Making of a Chiniese Scholar Painting Genre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96), pp. 82-90.

84) 袁珂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중국신화전설』 I(민음사, 1992), p. 293.; 현전하는 해반도도가 불로영생을 상징한다는 견해는 문동수, 「선경 속 불로장생과 축수」, 『한국의 도교문화』(국립중앙박물관, 2013), pp. 264-27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해반도도>는 동고 도 6·9·10 참조.

85) 국가 제향 공간 중 정전 내부 벽 전면에 그림을 장식한 다른 예는 임진왜란 때 명의 요청으로 세우고 이후 국가 제향 장소가 된 관우를 모신 關王廟가 있다. 동관왕묘의 경우에 정전 내부 세 면과 외부 세 면에 모두 紙畵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윤정, 「조선말기 관왕묘의 그림」, 『삼국지연의도』(국립민속박물관, 2016), p. 197.

86) 『일성록』 정조 5년 9월 14일 계축.

87) 주 37 참조.

88) 영희전 제1실에서 제3실까지 당시 현전한 조선 전기 어진인 태조·세조·원종의 어진을, 제4실에서 제6실까지는 숙종·영조·순조의 어진을 차례로 모셨다. 영희전 어진 봉안 내용은 『永禧殿志』(1751) 「影幀位次」; 『南殿贖紙』(1859), 「影幀位次」 참조.

89) 『璿源譜略修正儀軌』(1779), 「移文帙」, 己亥十二月日禮曹了; 『璿源譜略修正儀軌』(1795), 「來關」, 甲寅十二月十二日禮曹了; 『璿源譜略修正儀軌』(1837), 「來關秩」, 丁酉四月日; 『日省錄』 정조 15년 9월 28일 경자; 정조 20년 1월 24일 신미; 『순조실록』 권4, 순조 2년 8월 15일 계축; 『內閣日曆』 헌종 12년 8월 5일 정사; 『承政院日記』 헌종 12년 9월 22일 갑진; 고종 12년 11월 25일 무자 등.

90) 면복본과 원유관복을 법복으로 구분한 기록은 『尙方定例』(1752).

91) 유송옥, 「영종모사도감의궤와 어진도사도감의궤의 복식사적 고찰」, 『조선시대 어진관계 도감의궤 연구』 (1997), pp. 139-149.

92) 영조는 1724년 이래 생전 10년을 주기로 여러 점의 어진을 제작했으며 이 중 격식이 가장 높은 1744년의 면복본 2본이 각각 강화도 만녕전과 영희전에 봉안됐다(『일성록』 정조 5년 9월 14일). 순조는 1808년 익선관 대·소본, 1830년 원유관대본과 익선관소본을 제작했는데, 1830년 원유관본이 영희전에 모셔졌다 (『璿源譜略修正儀軌』, 「來關秩」(1837), 丁酉四月日).

93) 유송옥, 앞의 글, p. 149.

94) 영희전 제향 친행 시 국왕 복식은 『승정원일기』 영조 3년 2월 13일 경오; 영조 6년 2월 9일 무신; 영조 9년 2월 8일 경신 등 다수; 『일성록』, 「日省錄凡例」, ‘儀註謄錄,’ 詣永禧殿行酌獻禮 등 참조. 선원전 다례 친행 시국왕 복식은 『철종실록』 권3, 철종 2년 6월 17일 임신; 『일성록』, 「일성록범례」, ‘儀註謄錄,’ 詣昌德宮行眞殿茶禮 및 『일성록』 정조 8년 8월 15일 무술; 8월 29일 임자 등. 한편, 왕실 여성[內殿]의 진전 참배 시에는 唐古衣를 착용했다. 『고종실록』 권10, 고종 10년 8월 29일 을사.

95) 조선 후기 선원전은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어진을 모셨으나, 철종의 어진은 봉안하지 않았다. 철종은 전대 왕인 헌종, 후대 왕인 고종 모두와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정왕후의 전교로 왕이 된 고종은 익종과 신정왕후의 아들로 입후되었다.

96) 『순조실록』 권4, 순조 2년 7월 22일 경인. 선; 8월 15일 계축.

97) 『일성록』 정조 5년(1781) 9월 3일 임인.

98) 밀접한 유대 관계를 지닌 관자와 초상화 사이의 반응에 대해서는 Richard Brilliant, Portraiture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1), p. 19 참조.

99) 『헌종실록』 권1, 「헌종대왕 행장」.

100) 『내각일력』 헌종 12년 8월 5일. 순조 사후 순조와 익종 어진은 경모궁 망묘루와 경우궁 성일헌에 나눠져 봉안되었다.

101) 선원전 봉안 전, 경모궁 망묘루와 경우궁 성일헌에 나눠 봉안된 순조와 익종 어진 현황은 『선원보략수정의궤』(1837) 참조.

102) 『헌종실록』 권1, 「효유 헌성 왕대비의 선왕에 대한 언교」 및 「헌종대왕 행장」.

103) 「헌종 대왕 행장」.

Fig. 1.
<선원전>, 『동궐도』, Sŏnwŏnjŏn (detail) from the Painting of Eastern Palaces, 1827-1830, Seokdang Museum of Dong-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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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진전제4실기명·진전제5실기명> (세부), Details from the 1846 Lists of Ritual Vessels for the Fourth and Fifth Chambers of Sŏnwŏnjŏn, 1846, manuscript, 34.0×311.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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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Left) <진전제6실기명>(세부), Detail from the 1851 List of Ritual Vessels for the Sixth Chamber, Sŏnwŏnjŏn, manuscript, 35.0 ×126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Right) <은봉병>, Silver Ewer with Phoenix Design, in Uigwe (official records) for the Weddings of King Hŏnjong and Consort Hyohyŏn 2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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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신선원전 제1실(좌) 및 제9실(우)>, The first chamber (Left) and ninth chamber (Right) of New Sŏnwŏnjŏn at Ch'angdŏkkung. After Report on the Repair of Ch'angdŏkkung shin Sŏnwŏnjŏn (Munhwajaech'ŏng, 2002), pp.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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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신선원전 제1실 전경>(좌) 및 <유음풍혈> 『영정모사도감의궤』(우), (Left) The first chamber of New Sŏnwŏnjŏn at Ch’angdŏkkung. After Report on the Repair of Ch'angdŏkkung shin Sŏnwŏnjŏn. (Right) Illustration of wooden panel with floral patterns and transom window with peony patterns, in Uigwe for the Copying of Royal Portrait Paintings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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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오봉병(좌) 및 오봉병협폭(우)>, 『영정모사도감의궤』, Illustrations of a Five Peak Screen (Left) and a Flanking Panel of the Five Peak Screen (Right), in the Uigwe for the Copying of Royal Portrait Paintings (1901),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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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신선원전 주벽 모란병풍(세부)>, Detail of the peony paintings attached to the main wall behind chambers in New Sŏnwŏnjŏn. Photograph commissioned by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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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경기전정전내감실>, Chamber of Portrait Hall of King Taejo in Jeonju (Kyŏnggijŏn). After Jeonju, the Origin of the Joseon Dynasty (Jeonju National Museum, 2010), pp. 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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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경운궁 경효전 당가및오봉병>, Illustrations of Baldachin (Left) and Five Peak Screen (Right) for the Spirit Hall of Empress Myŏngsŏng, in Uigwe for Reconstruction of Kyŏngun’gung 1 (1906),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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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신선원전 감실 당가(세부)>, Detail of Baldachin in the #x0014f;nwŏnjŏn at Ch’angdŏkkung. After Report on the Repair of Ch’angdŏkkung shin Sŏnwŏnjŏn,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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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신선원전 감실 서벽 매화 장자>, Plum Blossom Partition on the West Wall in New Sŏnwŏnjŏn. Photograph commissioned by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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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해반도병풍>, Screens of Sea and Peaches of Immortality, 1901, four-panel folding screens, ink, colors, and gold on silk, 332.8 ×273.8 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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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Portraits of Late Chosŏn Kings Enshrined in Yŏnghŭijŏn
Chamber King Portraits Enshrined in Each Chamber
Fourth Sukchong (r. 1674-1720) • 1748 full-length portrait in ordinary attire 戊辰年翼善冠本(reproduction of 1713 original copy)
Fifth Yŏngjo (r. 1724-1776) • 1744 full-length portrait in ceremonial attire 甲子年冕服本
Sixth Sunjo (r. 1800-1834) • 1830 full-length portrait in court audience attire 甲寅年遠遊冠本
<Table 2>
Portraits of Kings Enshrined in Sŏnwŏnjŏn during the Late Chosŏn Dynasty (1720-1897)
Chamber King Portraits Enshrined in Each Chamber
First Sukchong (r. 1674-1720) • 1748 full-length portrait in ordinary attire 戊辰年翼善冠本 (reproduction of 1713 original copy) * displayed 展奉
• 1713 two copies in ordinary attire (one full-length portrait, one half-length) 癸巳年翼善冠本 * kept in their cases
Second Yŏngjo (r. 1724-1776) • 1763 full-length portrait in court audience attire 癸未年遠遊冠本 * displayed between 1763 and 1802
• 1773 full-length portrait in ordinary attire 癸巳年翼善冠本 * displayed after 1802
• 1733 full-length portraits in ordinary attire 癸丑年翼善冠本 (two copies)
Third Chŏngjo (r. 1776-1800) • 1791 full-length portrait in court audience attire 辛亥年遠遊冠本 * displayed
• 1781 two copies in ordinary attire (one full-length portrait, one half-length) 辛丑年翼善冠本 大·小本
• 1796 half-length portrait in military attire 丙辰年軍服本 小本
Fourth Sunjo (r. 1800-1834) • 1830 half-length portrait in ordinary attire 庚寅年翼善冠 小本
Fifth Ikchong (1809-1830), *Posthumously enthroned • 1830 half-length portrait in ordinary attire 庚寅年翼善冠 小本
• 1826 full-length portrait in military attire 丙戌年軍服本
Sixth Hŏnjong (r. 1834-1849) • 1846 full-length portrait in ceremonial attire 丙午年冕服本
• 1846 full-length portrait in military attire 丙午年軍服本
• 1846 full-length portrait in ordinary attire 丙午年翼善冠本
* moved to Mangmyoru in the shrine of Prince Sado, Kyŏngmogung in 1875

REFERENCES

『慶基殿儀』(1906).

『景福宮璿源殿 昌德宮璿源殿 增建都監儀軌』(1900).

『慶運宮重建都監儀軌』(1906).

『國葬都監儀軌』(1632·1659·1834).

『國朝喪禮補編』(1758).

『國朝續五禮儀補』 권1.

『國朝五禮儀』 권1 (1474).

『國朝五禮序例』(1474).

『南殿續志』(1859).

『內閣日曆』.

『東闕圖形』(1907).

『祔廟都監儀軌』(1778).

『殯殿都監儀軌』(1659·1675).

『殯殿魂殿都監儀軌』(1649·1675·1800·1857·1895~1897).

『璿源譜略修正儀軌』(1779·1795·1837·1846).

『承政院日記』.

『列聖御製』 권12.

『影幀模寫都監儀軌』(1899~1900·1901).

『永禧殿志』(1751).

『永禧殿儀仗祭器物等謄錄』(1774).

『日省錄』.

『一室各節祭品名冊』(1900 이후).

『展謁及親臨日記』(19세기).

『祭祀 附璿源殿茶禮』(1928).

『眞殿第四室器皿·眞殿第五室器皿』(1846).

『眞殿第六室器皿』(1851).

『眞殿重建都監儀軌』(1901).

『朝鮮王朝實錄』.

『進饌儀軌』(1829·1892).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1657).

『春官通考』 권24·25 (1788).

『太常志』 권1·2 (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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