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07; 2020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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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嚞煥, 『象山三昧』[이철환, 이대형 역, 『상산삼매-18세기 내포가야산 유람기-』(대한불교조계종 내포가야산보원사, 2017), p. 109.], “…其陰卽古大叢林普願之墟 普願者一曰講堂 舊以宏麗甲湖右 今獨有佛殿…”.
2) 주로 다음의 논고를 참조했다.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文化財大觀 上』(韓國文化印刷株式會社, 1968), p. 368; 천득염, 『백제계석탑 연구』(전남대학교 출판부, 2000), pp. 100-101; 鄭永鎬, 「普願寺址 5層石塔의 考察」, 『百濟文化』 34(公州大學校 百濟文化硏究所, 2005), p. 53; 박경식, 『한국의 석탑』(학연문화사, 2008), p. 422; 陳政煥, 「高麗前期 佛敎石造美術 硏究」(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pp. 79-80; 신용철, 「軍威 持寶寺 三層石塔에 대한 考察」, 『東岳美術史學』 16(東岳美術史學會, 2014), pp. 65-70; 金成旭, 「10世紀 石塔 硏究」(단국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14), pp. 66-70; 엄기표, 「고려시대 編年 石塔의 전개와 미술사적 의의」, 『普照思想』 49(普照思想硏究院, 2017), pp. 101, 109-110; 정병삼, 「고려초 탄문의 불교계 활동과 보원사」, 『史學硏究』 132(韓國史學會, 2018), pp. 336-338.
3) 천득염, 앞의 논문(2000), p. 101; 鄭永鎬, 앞의 논문(2005), pp. 52-53. 백제계 석탑은 백제 석탑을 모방하는 등 관련 영향이 농후한 고려 석탑의 양식 유형을 이른다. 이를 다양한 용어로 일컫지만, 이 글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백제계 석탑으로 지칭하였다. 다만, 전지혜는 〈보원사 석탑〉을 이러한 범주로 분류하면서도 건립 시기는 9세 기에 가깝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지혜, 「백제양식석탑에 관한 연구」(부경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9), p. 149.
4) 韓載沅, 「統一新羅 石塔浮彫 八部衆像 硏究」(홍익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3), p. 70; 同著, 「統一新羅 石塔浮彫八部衆 圖像과 配置 硏究」, 『미술사연구』 20(미술사연구회, 2006), p. 223; 同著, 「한국 고대 신중상 연구」(홍익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8), pp. 179-182; 강희정, 「보원사지 오층석탑 사리함의 연기법송(緣起法頌)과 해상실 크로드」, 『미술사와 시각문화』 13(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4), pp. 40-41; 水野さや, 「보원사지 오층석탑의 의의」, 『서산 보원사지 보물문화재 국보 승격을 위한 학술세미나 자료집』(서산시·내포가야산보원사·佛敎文化財硏究所, 2017a), pp. 42-46; 同著, 『八部衆像の成立と展開』(中央公論美術出版, 2017b), pp. 230-234.
5) 강희정, 「서산 보원사 사리기와 신라 하대의 해상 교류」, 『新羅史學報』 46(新羅史學會, 2019), pp. 162-163.
6) 나말여초는 연구자에 따라 설정하는 기간이 조금씩 다르다. 이 글에서는 석탑의 양식 변화가 가장 뚜렷하다고 생각하는 기년작을 기준으로 기간을 정했다. 〈長興 寶林寺 南·北 三層石塔〉(870)부터 〈安城 長命寺 五層石塔〉 (997) 사이인 약 130여 년의 기간이 바로 그렇다. 고려 기년작 석탑 목록은 엄기표, 앞의 논문(2017), p. 100, 표-1 참조.
7) 이중 기단의 양식 변화는 朴慶植, 「新羅 九世紀 石塔의 樣式에 關한 硏究」, 『考古美術』 173(韓國美術史學會, 1987), pp. 17-31; 同著, 앞의 책(2008), pp. 250-346; 申龍澈, 「統一新羅 石塔 硏究」(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6), pp. 162-175; 同著, 「統一新羅 二重基壇石塔의 樣式과 特徵」, 『東岳美術史學』 9(東岳美術史學會, 2008), pp. 214-223; 김지현, 「통일신라 典型樣式 석탑의 기단부 유형과 8세기 석탑의 편년 검토」, 『新羅文化』 45(東國大學校 新羅文化硏究所, 2015), pp. 213-217 참조.
8) 박경식, 앞의 책(2008), p. 446; 全敏淑, 「高麗前期 石塔 硏究」(동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1), pp. 70-72; 洪大韓, 「高麗 石塔 硏究」(단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2), pp. 309-311; 신용철, 「신라 단층기단 석탑의 편년과 특징」, 『한국민족문화』 47(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 pp. 145-146; 엄기표, 앞의 논문(2017), p. 108.
9) 전지혜, 「백제양식석탑의 양식과 건립연대에 관한 검토」, 『불교미술사학』 12(佛敎美術史學會, 2011), p. 114; 洪大韓, 앞의 논문(2012), p. 223; 엄기표, 앞의 논문(2017), p. 108.
11) Table 1의 석탑 수치는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상북도의 석탑Ⅳ』(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p. 16; 同著, 『전라남도의 석탑Ⅱ』(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pp. 23, 29; 同著, 『경상남도의 석탑Ⅱ』(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p. 228; 서산시,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정밀실측조사 보고서』(서산시, 2016), pp. 164, 223 의 방위별 실측 수치를 평균값으로 계산하였다.
13) 세 석탑은 東面 ‘龍-緊那羅’, 西面 ‘迦樓羅-阿修羅’, 南面 ‘乾達婆-夜叉’, 北面 ‘摩喉羅伽-天’을 짝지어 배치했다. 이는 〈진전사 석탑〉 등 다수의 석탑 팔부중상 배치와는 다르다. 韓載沅, 앞의 논문(2006), pp. 217-223; 신용철, 「新羅 八部衆 圖像 전개에 있어 雙塔의 역할」, 『정신문화연구』 33-1(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pp. 141-146.
14) 〈진전사 석탑〉의 건립 시기를 8세기 후반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鄭永鎬, 「襄陽 陳田寺址 遺蹟 調査-石塔과 浮屠의 復原을 契機로-」, 『歷史敎育』 11·12(歷史敎育硏究會, 1969), pp. 324-329; 水野さや, 앞의 책(2017b), pp. 211-214. 그러나 대부분은 건립 시기를 9세기 전반으로 추정한다. 蘇在龜, 「禪林院址 三層石塔의 조형적 특징과 의의」, 『講座 美術史』 18(韓國佛敎美術史學會·韓國美術史硏究所, 2002), p. 44; 申龍澈, 앞의 논문 (2006), pp. 172-175; 金志昡, 「新羅 石塔의 構造와 造營 硏究」(동아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pp. 203, 208-210; 한재원, 앞의 논문(2018), pp. 170-171 참조.
15) 〈보원사 석탑〉과 동일 계열 석탑 팔부중상의 세부 양식 비교는 지면 및 도판 매수의 제약으로 일부만 수록하였다. 자세한 비교는 金東昱, 앞의 논문(2019), pp. 64-89 참조.
16) 신용철 역시 〈보원사 석탑〉 사자상이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의 사자상보다 앞선 양식임을 지적했다. 다만 〈보원사 석탑〉의 건립 시기는 10세기 초중반으로 추정했다. 신용철, 앞의 논문(2014), p. 69.
17) 박경식, 『통일신라 석조미술 연구』(학연문화사, 1994), pp. 119-122; 洪大韓, 「高麗初 石塔의 塔身받침 造形特性에 관한 硏究-塔身받침의 起源과 變化를 중심으로-」, 『文化史學』 27(韓國文化史學會, 2007), pp. 614-615; 이순영 (이서현), 「新羅 石塔에서 別石 塔身받침의 形式과 特徵」, 『新羅史學報』 32(新羅史學會, 2014), pp. 413-414.
18) 10세기 전반에 탄문은 보원사에 있을 때 聖住院의 승려와 얽힌 神異를 증험하였다. 비록 이 내용이 두 사원의 교류를 증명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원문은 이 글 각주 59 참조.
19) 高裕燮, 『朝鮮塔婆의 硏究 上』(悅話堂, 2010), pp. 311-312; 洪大韓, 앞의 논문(2007), p. 618.
22) 〈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옥개석 양식이 백제 석탑에서 영향을 받았을 여지를 제시한 박경식의 견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朴慶植, 「百濟系石塔의 建立 背景에 關한 考察」, 『文化史學』 24(韓國文化史學會, 2005), p. 70, 각주 42 참조. 또한, 백제 석탑 양식 전개의 공백기를 메우는 과정과 이를 증명하는 석탑 사례를 다수 제시한 연구도 있다. 전지혜, 앞의 논문(2019), pp. 73, 194-197.
24)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과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의 건립 시기는 陳政煥, 「後百濟 佛敎美術의 特徵과 性格」, 『東岳美術史學』 11(東岳美術史學會, 2010), pp. 168-169; 전민숙, 「무량사 오층석탑의 구조분석과 원형(原形) 추정」, 『불교미술사학』 24(佛敎美術史學會, 2017), pp. 114-115, 124-128 참조.
25) 당시 석탑에서 수습한 사리장엄구는 〈金銅方形外函〉, 〈金銅楕圓形內函〉, 〈綠琉璃甁〉 각 1점과, 〈蠟石製 小塔〉 12기 등이다. 國立博物館, 「考古美術 뉴스」, 『美術資料』 12(國立博物館, 1968), p. 40.
26) 秦弘燮, 「高麗時代의 舍利莊嚴具」, 『考古美術』 180(韓國美術史學會, 1988), pp. 75-76; 姜友邦, 「佛舍利莊嚴論-佛經·佛塔·佛像의 相關關係-」, 『佛舍利莊嚴』(國立中央博物館, 1991), p. 178; 전경미, 「사리장엄구를 통해서 본 고려 금속공예」, 『文化財』 26(文化財硏究所, 1993), p. 3; 申明熙, 「高麗時代 舍利莊嚴具 硏究」, 『東岳美術史學』 5 (東岳美術史學會, 2004), p. 60; 임지윤, 「고려시대 魚子文 금속공예품 연구」, 『美術史學硏究』 271·272(한국미술사학회, 2011), pp. 18-19; 국립부여박물관, 『개태사, 태평성대 고려를 열다』(국립부여박물관, 2018), p. 132 참조.
28) 이 장면을 『三國遺事』의 慈藏定律條를 근거로 문수보살이 慈藏(590-658)에게 梵偈를 주는 장면으로 해석한 의견이 있다. 얀 폰테인, 趙容重 譯, 「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에서 發見된 舍利盒」, 『美術資料』 47(國立中央博物館, 1991), p. 98. 강희정은 해당 도상이 『佛說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神呪經』에 의거한 중국의 진언 護符 도상과 유사하고, 『불설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신주경』과 賢首 法藏(643-712)과의 연관을 崔致遠(857-?)이 찬술했으며, 최치원이 서산 일대와 연관이 있던 사실이 모두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강희정, 앞의 논문(2019), p. 161.
30) 〈보원사 외함〉 이외에 연기법송 글귀를 새긴 사례는 慶州 錫杖寺址 출토 <塔像紋塼> 8점, 그리고 慶州 皇龍寺址에서 발견했다고 전하는 <銀板> 2점만이 전한다. 해당 유물의 현황과 제작 시기는 김지현, 「慶州 錫杖寺址塼佛 硏究」, 『美術史學硏究』 266(한국미술사학회, 2010), pp. 50-52; 周炅美, 「韓國 佛舍利莊嚴에 있어서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意義」, 『불교미술사학』 2(통도사성보박물관 불교미술사학회, 2004), p. 173; 한정호, 「황룡사구층탑 창건기 사리장엄구와 경문왕대의 공정」, 『불교미술사학』 28(佛敎美術史學會, 2019), pp. 667-671 참조.
31) 리송재, 「〈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의 서체와 서예사적 의의」, 『정밀 학술 조사보고서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3), p. 177; 안귀숙, 「〈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 秘藏과 出現의 神異-금속공예사적 意義를 중심으로- 」, 『정밀 학술 조사보고서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3), pp. 150-156.
32) 강희정은 〈보원사 석탑〉에 봉안한 사리장엄구 일괄이 처음부터 사리장엄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며, 이전에 있던 사리기와 다른 용도의 전세품 등을 수습해 다시 납입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강희정, 앞의 논문 (2019), p. 160.
33) 周炅美, 「新羅 舍利莊嚴方式의 형성과 변천」, 『新羅文化』 43(東國大學校 新羅文化硏究所, 2014), pp. 198-199.
34) 통일신라 사천왕상의 다양한 지물 사례는 權江美, 「統一新羅 四天王像 硏究」, 『文物硏究』 7(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2003), pp. 61-65; 송우솔, 「統一新羅 四天王 浮彫 石塔 硏究」(동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9), pp. 51-52 참조.
35) 통일신라 사리병 현황은 金玟宋, 「統一新羅 8-9世紀 舍利莊嚴具 硏究」(동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8), pp. 59-65 참조.
36) 한정호, 「통일신라시대 蠟石製舍利壺의 발생과 전개에 대한 고찰」, 『古文化』 77(한국대학박물관협회, 2011), p. 63.
37) 통일신라 납석제 소탑의 특징은 문상련(정각), 「納塔經典의 시대적 變遷考」, 『佛敎學報』 62(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院, 2012), pp. 353-354; 김영옥, 「통일신라기의 쌍탑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조탑 영향 연구」(경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4), p. 154 참조.
39) 韓基汶, 「新羅末·高麗初의 戒壇寺院과 그 機能」, 『역사교육연구』 12(한국역사교육학회, 1988), pp. 51-52; 정병삼, 앞의 논문(2018), pp. 334-335 등 참조.
40) 한기문, 앞의 논문(1988), p. 53; 여성구, 「신라승의 수계와 승적」, 『新羅史學報』 31(新羅史學會, 2014), p. 65.
41) 화엄십찰에서 계단을 설치한 곳은 보원사 이외에 華嚴寺가 있고, 眞空 忠湛(869-940)이 수계를 받은 靈神寺를 國神寺로 보더라도 3곳이 전부다. 정병삼, 앞의 논문(2018), p. 335.
42) 官壇을 운영하며 교계의 운영과 통제를 담당한 웅주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 보원사를 주목한 견해도 있다. 張日圭, 「신라 하대 서남해 지역 禪僧과 후백제」, 『韓國古代史硏究』 74(한국고대사학회, 2014), p. 120.
43) 『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憲德王 14年 春3月(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sg_010_0050_0540.),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反叛…”.
44) 「崇巖山聖住寺事蹟」[黃壽永, 「崇巖山聖住寺事蹟」, 『考古美術』 9-9(韓國美術史學會, 1968), p. 450.], “…文聖大王頻降神筆曰 熊州是海隅邊塞 人性凶傲 朕篤畏不服…”.
45) 890년대 중반까지 당은포 주변 지역에 신라 왕실의 지배가 강화되었다는 추론도 있다. 그 예로 웅주의 경우 최치원과 金峻이 富城郡과 橻城郡 태수를 역임한 사실을 들었다. 張日圭, 「나말여초 서해 항로와 평택」, 『新羅史學報』 34(新羅史學會, 2015b), pp. 98-100.
46) 문성왕은 무염이 성주사에 머물며 일대를 교화함으로써 王化에 도움을 주었다고 치하했는데, 당시 왕실에서 지방에 주석한 승려에게 바라는 기대 효과를 잘 드러낸다. 崔致遠, 「聖住寺 朗慧和尙塔碑文」[許興植 編著, 『韓國金石全文 古代』(亞細亞文化社, 1984a), p. 217], “…文聖大王 聆其運爲 莫非裨王化 甚㤎之 飛手敎 優勞且多…”, 또한 眞聖王(재위 887-897)은 무염이 입적하자 최치원에게 비문 찬술을 하명하는데, 무염과 신라 왕실의 결연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이해한다. 張日圭, 「신라 말 서해 항로와 崔致遠의 지방관 활동」, 『韓國古代史探究』 19(韓國古代史探究學會, 2015a), pp. 33-34.
47) 景文王(재위 861-875)이 주도한 崇福寺 중창과 황룡사 목탑 중수가 대표적이다. 또한, 886년 定康王(재위 886-887)이 후원하고 賢俊이 주관한 『화엄경』 사경 모임도 화엄을 내세우고자 한 의도로 파악한다. 정병삼, 「9세기 신라 화엄의 추이」, 『佛敎學報』 69(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院, 2014), pp. 137-140.
48) 孫紹, 「大安寺 廣慈大師塔碑文」[許興植 編著, 『韓國金石全文 中世上』(亞細亞文化社, 1984b), p. 353.], “…伽耶岬新藪 受具後…”, 윤다가 구족계를 받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출가한 때가 871년임을 염두에 둔다면 9세기를 넘지는 않을 것이다.
49) 정병삼은 이러한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827년 普照 體澄(804-880)이 수계한 관단이 이미 보원사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사원의 확대 중창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고 언급하였다. 정병삼, 앞의 논문(2018), p. 334. 하지만 중창은 계단 설치와 별개로 사세 변화에 따라 충분히 시행할 수 있다고 본다.
50) 앞서 살핀 윤다를 제외하면 체징은 827년, 眞空 □雲(855-937)은 874년, 眞澈 利嚴(870-936)은 888년, 法鏡 玄暉 (879-941)는 898년에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해당 원문은 金東昱, 앞의 논문(2019), p. 8, <표 1> 참조.
51) 崔致遠, 「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 『孤雲集』 卷1(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P_0002A_0040_060_0010_2017_001_XML.), “…賲興三於勝墍 年僅百於和居 而顧結界嶔崟權輿齷齪 議諧改作 律許開張 遂於乾寧四載之秋 宴坐九旬之杪 爰謀拓土 竚俟布金…”.
52) 『三國史記』 卷50, 列傳 弓裔(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sg_050_0020_0350.), “…公州将軍弘竒 來降…”.
53) 『高麗史』 卷1, 世家 太祖 元年 8月(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kr_001_0020_0030_0070.), “…癸亥 以熊運等十餘州縣 叛附百濟…”.
54) 『高麗史』 卷1, 世家 太祖 10年 3月(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kr_001_0110_0020_0020.), “…辛酉 王入運州 敗其城主兢俊於城下…”.
56) 『三國史記』 卷50, 列傳 甄萱(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sg_050_0030_0380.), “…清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渾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57) 이 〈철조여래좌상〉(본관 5191)을 949년에 즉위한 광종을 위해 탄문이 발원한 석가삼존의 金像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姜友邦, 「統一新羅鐵佛과 高麗鐵佛의 編年試論-忠南 瑞山郡 雲山面의 鐵佛坐像과 雲山面 普願寺址 丈六鐵佛坐像을 中心으로-」, 『美術資料』 41(國立中央博物館, 1988), pp. 26-29; 김혜완, 「普願寺鐵佛의 조상-고려 초 原州鐵佛과 관련하여-」, 『史林』 14(首善史學會, 2000), pp. 22-23; 정병삼, 앞의 논문(2018), pp. 336-338; 하정민, 「충주지역 고려 초기 철불과 그 의의」, 『인문과학연구논총』 40-2(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9), pp. 319-327 등 참조.
58) 金廷彦, 「普願寺 法印國師塔碑文」[許興植 編著, 앞의 책(1984b), pp. 414-415.], “…光宗御宇四年春 大師得佛舍利三粒 以瑠璃甖盛 安置法宇…補天練石之龕 所以延帝齡扶聖化也…”. 이를 〈보원사 석탑〉으로 추정한 의견은 陳政煥, 앞의 논문(2013), pp. 79-80; 정병삼, 앞의 논문(2018), pp. 336-338 참조.
59) 金廷彦, 「普願寺 法印國師塔碑文」[許興植 編著, 앞의 책(1984b), p. 416.], “…大師乃言之 昔吾在普願寺 奉持三本華嚴經 每以中夜 經行像殿 不絶數年 忽一夜 三寶前 有一僧 問曰 僧來奚自 乃曰 聖住院住持五百僧 隨緣赴感 經過此地 遣僧起居 乃往三寶 洗脚訖 向吾房而去…”.
60) 金廷彦, 「普願寺 法印國師塔碑文」(위의 책, pp. 416-418.), “…開寶八年春正月 大師以適當衰皃 請歸故山…行至迦耶山寺 其僧徒等 如迎佛具仙樂…開寶八年 龍集乙亥春三月十九日 大師將化往 盥浴訖 房前命衆 迺遺訓曰… 言畢入房 儼然跌坐 示滅于當寺法堂 俗年七十六 僧盥六十一…”.
63) 金廷彦, 「普願寺 法印國師塔碑文」[許興植 編著, 앞의 책(1984b), p. 414.], “…惠宗嗣位…永締芳緣 附大師 送納於九龍山寺…定宗踐阼 遂於九龍山寺 置譚筵 大師爲法主…”.
64) 탄문은 926년에 太祖(재위 918-943)의 청으로 神明王后 劉氏의 순산을 기도했는데, 이때 탄생한 이가 광종이다. 이를 통해 두 인물이 서로 특별한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金廷彦, 「普願寺 法印國師塔碑文」(위의 책, p. 413.), “…同光紀㦄 丙戌司年冬十月 太祖以劉王后 因有娠得殊夢…遂請大師 祈法力 於是 香金鑪 經開玉軸願維熊之吉夢 叶如羍之誕生…有以見端居鶴禁 嗣守鴻圖 是大成王也…”.
65) 구룡산사는 開京 扶蘇山에 있었으며 태조의 5대조인 國祖聖骨將軍 虎景의 사당을 설치해 고려 왕실의 근간을 추모하던 곳으로 추정한다. 金龍善, 「光宗의 改革과 歸法寺」, 『高麗光宗硏究』(一潮閣, 1981), p. 107; 김혜완, 앞의 논문(2000), p. 19; 정병삼, 앞의 논문(2018), p. 322.
66) 탄문이 보원사에서 『화엄경』을 익힌 정확한 연대는 남아있지 않지만 太大德 神郞에게 3本 『화엄경』을 청해 듣던 934년과 가깝다고 짐작한다. 金廷彦, 「普願寺 法印國師塔碑文」[許興植 編著, 앞의 책(1984b), p. 414.], “…淸泰初 聞西伯山 神朗太大德 纂覺賢之餘烈 演方廣之秘宗…大師 遂往西伯 聽雜華三本…”.
67)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瑞山 普願寺址Ⅰ』(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p. 474; 同著, 『瑞山 普願寺址Ⅱ』(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2), p. 533. 현 위치에 지금처럼 사역을 갖춘 것은 조선 明宗(재위 1546-1567) 때 文定王后 尹氏(1501-1565)의 각별한 후원에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金東昱, 앞의 논문(2019), pp. 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