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백자 ‘祭’명 접시의 변천: 관요 유적 출토품을 중심으로*

Developments in Chosŏn White Porcelain with 祭 Inscription: focus on excavations at royal kiln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3;319():45-78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3 September 30
doi : https://doi.org/10.31065/kjah.319.202309.002
**Curator, Gyeonggi Ceramic Museum
김경중**
**경기도자박물관 학예연구사
*본 논문은 2023년 4월 29일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조선백자 연구의 현재>의 발표내용을 수정, 보완 한 것이다.
Received 2023 July 31; Revised 2023 August 1; Accepted 2023 August 17.

Abstract

조선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 ‘祭’·‘壽’·‘福’명 접시는 제작되는 시기에 따라 글자를 쓰는 시점과 명문을 쓰는 안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특히 금사리 관요가 운영되는 18세기 2/4분기부터 제작량이 급증하고 양식상의 변화 역시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첫째, 접시에 ‘祭’명을 쓰는 시점은 1560년대 이전까지는 소비처에서 정각·묵서로 용도를 표기하다가 1560년대 이후부터 관요에서 제기접시를 제작할 때 제례용임을 의미하는 ‘祭’명을 표기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壽’·‘福’명은 관요가 설치된 이후부터 관요가 민영화되는 시기까지 접시를 제작할 때 장수와 복을 의미하는 ‘壽’·‘福’명을 표기하는 것으로 확인됨으로서 글자는 쓰는 시점에 차이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둘째, ‘祭’·‘壽’·‘福’명은 사용되는 안료의 종류에 따라 접시에 쓰는 방식이나 위치에 차이가 있다. 특히, 17세기 이후부터는 ‘祭’·‘壽’·‘福’명을 철화와 청화안료로만 표기하였다, 철화안료를 사용한 것은 원권문이 없고 글자만 단독으로 표기하였으며 굽 안 바닥이나 내저면에 위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청화안료를 사용한 것은 원권문 안에 ‘祭’·‘壽’·‘福’명을 표기하였으며 내저면에 위치한다.셋째, ‘祭’·‘壽’·‘福’명 접시의 기형상 변화는 금사리와 분원리 관요에서 가장 두르러지게 나타난다. 금사리 관요의 가장 큰 특징은 굽이 높고, 굽과 동체부까지 각이 진 접시를 제작한 점이다. 그러나 굽의 형태가 각형인 ‘祭’명 접시는 제작하지 않고, 굽과 동체부가 각이 진 ‘福’명 접시는 제작하였다. 반면 분원리 관요는 금사리 관요에서 제작된 동일한 형태의 ‘祭’·‘福’명 접시뿐 아니라 굽의 형태가 원형이고, 굽의 높이가 매우 높은 ‘祭’명 접시도 제작한 것으로 밝혀짐으로서 ‘祭’명 접시의 변화 양상이 일정부분 밝혀졌다. 특히, 금사리와 분원리 관요가 굽과 동체부가 각이 진 ‘壽’명 접시를 제작하지 않은 것이 밝혀진 것도 성과라 할 수 있다.

Trans Abstract

White porcelain with 祭(che, ritual), 壽(su, longevity), or 福(pok, good fortune) inscriptions made in Chosŏn royal kilns vary in when and how the letters were written, according their prouction date. From the second quarter of the eighteenth century, when the royal kilns at Kŭmsa-ri were in production, they increased in number and important changes were made to their styles.

Firstly, before the 1560s, the letter 祭 was written with brush or incised at the office where the plates were used, but after the 1560s, it was inscribed at the kilns to mark their purposes as ritual. In contrast, the letters 壽 and 福, inscribed to wish for longevity and good fortune were always written at the kilns from their early years until the privatization of the kilns, showing that different letters were written at different moments of production.

Secondly, how and where on the plates the letters 祭, 壽, and 福 were written differ according to the underglaze used. From the seventeenth century, the letters were exclusively written in underglaze iron-brown or cobalt blue. Most examples in underglaze iron-brown were written on the underside, inside the foot without a cartouche, or on the inside bottom of a bowl. But those written in underglaze cobalt blue are written on the inside bottom of a bowl with a circle-shaped cartouche. Thirdly, the changes to the shapes of the plates can be seen most clearly in the examples from the royal kilns at Kŭmsa-ri and Punwŏn-ri. Plates with polygonal-shaped high foot and body are characteristic of Kŭmsa-ri kilns, but this style appears only with 福 inscriptions — the plates marked with the letter 祭 have circular foots. However, in the case of Punwŏn-ri kilns, plates with both 祭 and 福 inscriptions were made in the same polygonal style as those of Kŭmsa-ri. There were also 祭 plates with high, circular foots, providing information for its stylistic changes. It is also notable that no royal kilns marked polygonal-shaped plates with the letter 壽.

Ⅰ. 머리말

조선은 1467년경에 왕실과 조정에서 소용되는 그릇을 전담하여 제작하는 사옹원의 분원(이하 관요)을 경기도 광주에 설치하였다. 관요에서 제작되는 백자는 그릇의 수납처나 사용처·용도·제작시기 등을 의미하는 명문을 다양한 방식으로 써서 철저히 관리하였다. 백자 ‘祭’명 접시는 제례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일상용 그릇과 용도를 구분하기 위해 ‘祭’라는 명문을 정각·묵서·음각·청화·철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기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祭’명 백자에 대해서는 그간 몇 가지 연구 성과가 있었다.1 대표적으로 박정민은 조선 전기 소비유적에 주목하고, 수납처를 의미하는 ‘天’·‘地’명과 제례용임을 의미하는 ‘제긔’명을 같이 쓴 접시 등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일반 그릇이 제기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일반 기형의 제기가 제작될 때는 ‘祭’라는 한자로, 소비지에서 해당 그릇이 제기로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낼 때는 주로 ‘제긔’라는 한글로 표시되는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관요에서는 백자의 생산과 운송 및 출납을 책임지는 관리의 기준에서 명문이 한자로 시문되는데 반해, 도성에서는 제기를 실제 다루는 실무자 위주로 명문이 시문되기 때문에 한글이 사용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2

정다혜는 17세기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기명에 ‘祭’자를 시문하여 금속제기를 대체하는 방식이 일시적으로 행해지다가,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18세기부터는 굽이 높은 금속 제기가 백자로 그대로 번안되면서 굽이 높은 접시, 즉 백자 고족접시가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3 또한 백자 고족접시는 제례뿐만 아니라 기타 빈객을 접대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고족접시를 명문과 접시면, 굽의 형태를 토대로 1기(18세기 전반~중후반), 2기(18세기 후반~19세기), 3기로 (19세기 말~20세기 초)로 구분하여 제작 양상 및 특징 등을 살펴보았다.4 이로써 백자 ‘祭’명 접시는 기존의 연구로 용도와 ‘祭’명을 쓴 이유, 그리고 18세기 이후에 ‘祭’명 접시가 확대된 배경과 제작 양상 등이 대략적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관요에서 ‘祭’라는 명문이 언제부터 자기에 쓰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금사리 관요의 경우는 지표조사에서 수습된 유물을 토대로 연구가 이루어져 백자 ‘祭’명 접시의 특징 및 변화 양상을 밝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5

최근에 관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다수의 백자 ‘祭’명 접시가 출토되고, 그 동안 논란이 있었던 금사리 관요 운영시기를 특정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백자 ‘祭’명 접시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

본고에서는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 ‘祭’명 접시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백자 고족접시가 발견되는 금사리 관요 유적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백자 고족접시가 제작되기 이전 시기에 제작된 ‘祭’명 접시의 굽 높이는 일반 접시와 차이가 없지만 ‘祭’명을 쓰는 시점과 방법에, 그리고 백자 고족접시가 제작되던 시기에는 접시의 굽 형태와 높이가 변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Ⅱ장에서는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된 이후부터 18세기 1/분기까지 ‘天’·‘地’·‘玄’·‘黃’명과 ‘左’·‘右’명, 그리고 ‘左’·‘右’+干支(+숫자)명 백자가 제작되는 시기에 따라 ‘祭’명을 쓰는 시점과 방법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Ⅲ장에서는 18세기 2/4분기에 운영된 관요 중에서 최근에 운영시기가 명확히 밝혀진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백자 ‘祭’명 접시의 특징을 밝히고, 18세기 2/4분기 이후에 운영된 분원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백자 ‘祭’명 접시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Ⅳ장에서는 백자 ‘祭’명 접시와 함께 출토되는 백자 ‘壽’·‘福’명 접시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 ‘祭’명 접시의 특징 및 변화 양상을 밝혀보고자 한다.

Ⅱ. 관요 설치 이후~18세기 1/4분기 백자 ‘祭’명 접시

현재 알려진 백자 ‘祭’명 접시는 모두 제례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례용기로 사용된 백자 ‘祭’명 접시가 언제부터 제작되었는지 현재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관요 유적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음각명 백자를 통해 운영시기가 밝혀짐에 따라 백자 ‘祭’명 접시의 제작시기 및 변화 양상을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접시의 굽 안 바닥에 유면을 긁어서 쓰는 명문이 변화되는 시기에 따라 ‘祭’명을 쓰는 시점과 방법·위치 등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관요 설치 이후~17세기 이전

관요는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이후부터 1560년까지 굽 안 바닥의 유면을 긁어 ‘天’·‘地’·‘玄’·‘黃’명을 쓴 백자를 생산하였다. 이 명문은 사옹원이 백자를 출납을 관리하기 위한 구분 표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대표적인 유적은 우산리 14호와 도마리 1호, 번천리 5·9호, 관음리 10호가 있다.7 현재, 이들 유적에서 ‘祭’명을 쓴 백자가 발견된 사례는 없지만, 이것이 백자 제기가 제작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광주 도마리 1호에서는 백자 향로가,8 번천리 9호에서는 백자 향로와 백자상감 爵이 발견되었다.9 또한 번천리 8호에서는 굽의 높이가 3.6cm의 제기로 추정되는 접시가 출토되었는데, ‘祭’명은 쓰여 있지 않다.10 이처럼 제례용기 중에서도 특수기종에 속하는 향로와 작뿐 아니라 제기접시도 제작되었지만 제례용임을 의미하는 ‘祭’명은 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어영청지 등 소비유적에서는 백자 접시의 굽 안 바닥에 유면을 긁어【음각】 ‘天’·’地‘명을 쓴 것과 날카로운 도구로 쪼아【정각】 ‘제긔’명을 같이 쓴 것,11 그리고 ‘슌’·‘귀비’·‘제긔’명을 정각해서 같이 쓴 것이 발견되었다.12 이들 명문백자는 한 점씩, 또는 갑발에 넣어서 번조된 것들이다. 또한, 먹으로【묵서】 ‘제기경신오月’·‘祭器’명을 쓴 것 등이 발견되었는데,13 이들은 여러 점을 포개서 번조하였다. 굽의 주변은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 정각과 묵서는 소비처에서 명문을 쓸 때 사용하는 기법이다. 따라서 1560년대 이전에 운영된 관요는 제례용으로 사용하는 그릇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소비처에서 제기로 사용할 경우에 용도를 별도로 표기하여 구분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파악된다.14 이 시기에 제작된 ‘天’·‘地’·‘玄’·‘黃’명 접시의 굽 높이는 1.0~1.5cm로, 크기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다.

관요는 1560년대부터 그릇의 굽 안 바닥에 ‘左’·‘右’명을 음각하기 시작한다. 이 명문은 백자의 생산과 격납의 담당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대표적인 유적은 관음리 10호,16 곤지암리 1호·3호, 무갑리 10호가 있다. 이 시기부터는 소비처에서 그릇의 용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지, 즉 관요에서 그릇의 용도를 정하여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여주는 예가 1580년대에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무갑리 10호에서 발견된 백자 ‘祭’명 접시이다.7 ‘祭’명은 굽안 바닥의 유면을 긁어서 썼는데,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祭’명을 쓴 접시가 서울 청진 8지구에서 출토되었다.18 또한 무갑리 10호 주변에 위치한 23호에서 내면 바닥에 청화안료로 ‘祭’명을 쓴 백자 발도 수습된 바 있다.

이는 적어도 무갑리 10호 관요가 운영되던 1580년대부터 관요에서 제작하는 발·접시 등의 반상기에 청화안료를 사용하거나 음각하는 방식으로 ‘祭’명을 쓰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19 그러나 곤지암리 1호에서는 백자 작이 발견되었는데, ‘祭’명이 없다. 따라서 제례용기 중에 특수 기종은 ‘祭’명을 쓰지 않았으며, 17세기 이후에 운영된 관요 유적에서도 특수기종에 ‘祭’명을 쓴 것은 발견된 바 없다. 이는 일상기종과 구별되고 용도가 명확하기 때문에 ‘祭’명을 써서 구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2. 17세기 이후~18세기 1/4분기

관요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左’·‘右’명 백자뿐 아니라 함께 제작년월일을 의미하는 干支와 숫자를 쓴 백자도 생산하기 시작한다.20 간지는 관요 유적의 운영시기를 알려주는 자료로, 간지를 통해 17세기 이후에 운영된 관요 유적의 위치와 이설 경로 등이 밝혀졌다. 대표적인 유적은 탄벌동 1호, 학동리 10호, 상림리 3호, 선동리 2호, 송정동 5호, 신대리 12호, 궁평리 1호, 관음리 16호가 있다. 17세기 이후에 운영된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백자 ‘祭’명 접시를 정리하면 <Table 1>과 같다.

관요 유적 출토 백자 ‘祭’명 접시 Excavated at the Chosŏn Kiln Site White Porcelain Dishes with the Inscription “je” 祭

<Table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철화안료로 ‘祭’명을 쓴 접시는 대부분의 유적에서 출토된 반면 청화안료로 쓴 ‘祭’명 접시는 선동리·송정동·궁평리·관음리 관요 유적에서만 출토되었다.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양상으로 보아 청화안료로 ‘祭’명 백자는 극히 적은 수만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선동리와 송정동 관요 유적에서 철화안료로 ‘壽進宮祭’명과 ‘祭器’명을 쓴 접시편이 발견되었으며,26 이를 통해 생산처에서 사용처와 용도를 명확히 정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료에 따라 ‘祭’명의 위치 및 쓰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철화안료로 쓴 ‘祭’명은 접시의 내면 중앙이나 굽 안 바닥에 원권문 없이 써 넣었다(Fig 1·2). 반면, 청화안료로 쓴 ‘祭’명은272829접시의 내면 중앙에 1줄의 원권문 안에 쓰여 있다(Fig 3).30 이들 ‘祭’명 접시는 대부분 역삼각형굽(수직굽)에 가는모래를 받쳐 한 점씩, 또는 갑발에 넣어서 번조되었다.31 굽의 높이는 1.0~1.4cm 내외로, 반상기와 비슷하다<Table 3 참조>.

Fig. 1.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Sindae-ri Kiln site no. 8·28, Kyŏnggi Province, 1664-1676, Chŏson, H.5.5cm, D. 11.8 cm (mouth), D. 4.4cm (foot), H. 1.0cm27 (heel)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2.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Sindae-ri Kiln site no. 20, Kyŏnggi Province, 1664-1676, Chŏson, H .7.2 cm, H. 3.6cm, H. 1.0cm (heel)28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3.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Kwangpyŏng-ri kiln site no. 1·2, Kyŏnggi Province, 1684-1702, Chŏson, H. 3.5cm, D. 17.2 cm (mouth), D. 7.6 cm (foot), H. 1.4cm29 (heel) (Photograph by the author)

〈궁평리·관음리·금사리 관요 유적 출토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 je” 祭 Excavated at the Kungpyŏng-ri, Kwanŭm-ri and Kŭmsa-ri sites

이를 종합해 보면, 백자 ‘祭’명 접시는 관요가 설치된 이후부터 1560년대까지는 관요에서 별도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소비처에서 반상기용 접시를 제기로 사용하기 위해 그릇의 내·외면에 정각이나 묵서로 ‘제긔’·‘祭器’명을 써 넣었다. 그러나 1560년대 이후부터는 접시에 ‘祭’명을 쓰는 시점과 방법에 변화가 생기는데, ‘祭’명은 관요에서 접시를 제작할 때 표기하였다. 접시에 ‘祭’명을 음각할 때는 굽의 안 바닥에, ‘祭’명을 청화안료로 쓸 때는 내면 중앙에 원권문 없이 써 넣었다. 17세기 이후부터는 관요에서 ‘祭’명 접시를 제작할 때 안료만을 사용해서 ‘祭’·’祭器’명을 써 넣었는데, 안료의 종류에 따라 쓰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청화안료로 쓸 때는 내면 중앙에 시문한 원권문 안에 ‘祭’명을 쓴 반면, 철화안료로 쓸 때는 굽 안 바닥에 원권문 없이 표기하였다. 특히 접시의 내면 중앙에 ‘壽進宮祭’명을 써 용도와 사용처를 보다 명확히 한 예도 있다. 백자 ‘祭’명 접시는 반상기용 접시의 기형과 굽 높이 등이 동일하며, 가는모래를 받쳐 한 점씩, 또는 갑발에 넣어서 번조한 것이 대부분이다.

Ⅲ. 18세기 2/4분기~19세기 말 백자 ‘祭’명 접시

1. 18세기 2/4분기 백자 ‘祭’명 접시

18세기 2/4분기에 운영된 관요 유적은 경기도 광주 관음리와 금사리 일원에 분포해 있다. 금사리 관요는 달항아리와 더불어 설백(雪白)색의 조선 최고 백자를 제작한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금사리 관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시행되지 않아 운영시기와 출토품에 대한 실체는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는데,32 고고학적 조사가 2017년부터 이루어짐에 따라 금사리 관요와 그 출토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또한 『承政院日記』에서 영조 10년(1734) 관요 운영이 쉽지 않아 금사리(금사곡)로 이설하였다는 기사가 새롭게 확인되었다.

【사료 Ⅲ-1】

홍상빈이 사옹원 관원이 전하는 도제조와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자기(磁器)가 해마다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금년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 설치하여 굽는 일을 이미 계품(啓稟)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광주(廣州) 시장(柴場) 안의 퇴촌면(退村面) 금사곡(金獅谷)으로 옮겨 가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33

위의 기사는 영조 10년(1734)에 관요를 ‘退村面 金獅谷’으로 이설할 것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으로, 이를 통해 금사리 관요의 운영시기가 1734~51년으로 명확해졌다.34

금사리 관요 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다수의 백자 발·잔·접시가 출토되었는데,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굽의 높이가 이전 시기보다 약간 높다는 점이다. 궁평리·관음리 관요에서 출토된 발은 굽의 높이가 1.0~1.5cm, 접시는 0.5~1.0cm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1.5cm 이상은 거의 없다. 하지만 금사리 관요에서는 굽의 높이가 1.5cm 이상인 발·접시도 많이 제작되었다<Table 2>.35 금사리 관요에서 백자 발·접시의 굽 높이가 높아지는 경향을 띠는 이유는 재임법 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관련된 연구는 추후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36

궁평리·관 음리·금사리 관요 유적 출토 백자 발·접시 White Porcelain Bowls and Dishes Excavated at the Kungpyŏng-ri, Kwanŭm-ri, and Kŭmsa-ri sites

그리고 금사리 관요에서는 굽과 동체부의 외면을 깎아 기면이 각이 진 것을 제작했다는 점이다. 각형백자가 제작되는 시점은 송정동 관요에서 백자각형연적편이 출토되어 17세기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37 반상기까지 적용되는 시기는 금사리 관요 이후부터이다.

현재,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지가 명확하게 밝혀진 백자 ‘祭’명 접시는 13점이다.38 ‘祭’명 접시는 내저면이 넓은 반면 원각이 없고 구연이 외반·직립(내만)하며 동체 하단부에서 꺾임이 없는 접시에서 확인된다. ‘祭’명은 모두 내면 중앙에 청화안료로 1줄의 원권문 안에 표기하였다(Fig. 4).39

Fig. 4.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① H. 2.8cm, D. 8.2cm (foot), H. 1.7cm (heel), ② H. 4.9cm, D. 16.6 cm (mouth), D. 8.2cm (foot), H. 2.2cm (heel), ③ H. 4.8cm, D.14.0 cm (mouth), D.7.2 cm (foot), H. 2.6cm (heel) (Photograph by the author)

금사리 관요에서 출토된 백자 ‘祭’명 접시는 굽의 형태가 모두 원형이고, 굽의 높이는 1.5~3.4cm 내외로 궁평리 관요와 관음리 관요에서 출토된 ‘祭’명 접시보다 높다. 궁평리 관요(1684~1702년경)에서는 2점이 출토되었는데, 굽의 높이는 1.1·1.5cm이다. 관음리 관요(1709년경~1716년, 1721~1733년)에서는 4점이 출토되었는데, 굽의 높이는 1.2~1.5cm이다. 현재 금사리 관요에서 굽의 높이가 1.2cm내외인 접시는 발견되지 않았다<Table 3>.40 이들 백자 ‘祭’명 접시는 굽의 접지면에 가는모래가, 내면에 가마 천정에서 떨어진 가마 벽체가 붙어 있는 점으로 보아 한 점씩 번조하였다.

이처럼 금사리 관요부터 백자 ‘祭’명 접시의 굽 높이가 점차 높아지는 이유는 금속제기 접시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직후의 혼란으로 인한 금속 수급의 부족과 함께 당시 『朱子家禮』가 조선시대 사회에 수용되면서 일상기형 기명이 금속제기를 대체하게 되었는데, 청진 1지구와 청진 12~16지구에서 구경이 14.0~1.7.6cm 내외이고 굽 높이가 1.6~1.9cm·3.5~3.7cm, 구경이 19.5~21.8cm이고 굽 높이가 3.0~4.4cm가 출토된 바 있다.41 임진왜란 이전에도 금속제기접시는 제작되었는데, 구경 15.1~17.5cm, 굽 높이 2.0~3.3cm이다.42 이는 조선전기부터 18세기 초까지 금속제기접시의 굽 높이는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백자 ‘祭’명 접시의 경우, 신대리 관요(1664~76년)에서 출토된 ‘祭’명 접시의 굽 높이는 1.0cm·궁평리 관요 1.1~1.5cm·관음리 관요 1.2~1.5cm로, 굽의 높이가 1.5cm 이상인 ‘祭’명 접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금사리 관요에서는 굽 높이가 1.5cm인 것도 제작되었지만, 굽 높이가 2.2cm 이상인 ‘祭’명 접시가 많이 제작되었다. 특히 굽 높이가 3.4cm인 접시도 제작되었는데, 금속제기접시의 굽 높이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금사리 관요부터 백자 ‘祭’명 접시가 금속제기접시를 번안하는 과정에서 굽이 점차 높아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43

그리고 금사리 관요에서 백자 ‘祭’명 접시의 굽과 동체부를 깎지 않은 점은 당대의 유행하는 새로운 양식을 바로 수용하여 변화하는 것보다 금속제기접시가 가지고 있었던 기형을 고수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는 Ⅳ장에서 다룰 백자 ‘壽’·‘福’명 접시와 큰 차이점이다.

2. 18세기 3/4분기~19세기 말 백자 ‘祭’명 접시

이 시기에 운영된 관요는 광주 분원리에 위치한다. 분원리에 위치한 관요는 1752년부터 1883년까지 약 130년간에 한 곳에서 그릇을 제작하였기 때문에 ‘마지막 관요’라고 불리기도 한다.44 분원리 관요 유적은 조선 후기 왕실 백자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2001~02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분원리 관요 유적에 대한 조사 결과, 가마와 가마폐기물퇴적, 공방지와 함께 백자 ‘祭’명 접시가 출토되었다.45 백자 ‘祭’명 접시는 굽의 형태나 높이 등에서 이전에 제작된 백자 ‘祭’명 접시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분원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백자 접시 중에서 ‘祭’명을 쓴 접시는 구연이 외반하거나 직립·내만한다. 내면은 편평한 편이고, 祭’명은 내저면 중앙에 청화안료로 원권문 안에 써 넣었다. 그리고 굽의 접지면에 가는 모래가 남아 있고, 내면에 가마 천정에서 떨어진 벽체편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점씩 구운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구연의 형태와 ‘祭’명을 쓴 방식과 번조 방법은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백자 ‘祭’명 접시와 동일하다. 하지만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祭’명 접시와 굽의 형태나 높이 등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굽의 형태가 원형인 백자 ‘祭’명 접시는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굽의 높이는 1.9cm로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것도 있지만(Fig 5-①), 굽의 높이가 약 5.0cm로 금사리 관요에서 제일 높은 것(3.4cm)보다 훨씬 더 높은 것도 있다. 이처럼 분원리 관요는 점차 굽이 매우 높은 백자제기접시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금속제기접시를 그대로 번안하였기 때문이다. 분원리 관요 시기는 왕실에서 賜饌을 통해 궁중 음식과 함께 백자 고족접시가 사대부가에 유출되며, 신분제의 동요와 양반층의 증가에 따라 제례가 증가하였다.47 특히 신분제의 동요로 인하여,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습득한 예학이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더욱이 양반의 수가 증가하면서 『주자가례』에 대한 열성적 도입으로 제사가 증가하면서 백자 고족접시의 사용도 증가하였다.48

Fig. 5.

46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Punwŏn-ri kiln site no.1, Kyŏnggi Province, 1752-1883, Chŏson, ① H. 4.1cm , D. 13.2cm (mouth), D. 7.4 cm (foot) H. 1.9cm (heel) ② H. 4.4cm, D. 13.4cm (mouth), D. 6.6cm (foot), H. 2.2cm (heel), ③ H. 7.0 cm D. 13.4cm (mouth), D. 6.6cm (foot), H. 3.8cm (heel) (Photograph by the author)

따라서 금속제기접시를 번안한 백자고족제기접시가 분원리 관요에서 많은 수가 제작되었다. 이에 비해 ‘祭’명이 쓰여 있는 접시는 6점으로,49 금사리 관요에 비해 적은 수가 발견되었다. ‘祭’명이 적게 발견되었다고 해서 ‘祭’명 접시가 적게 제작된 것이 아니라 많은 양을 제작하면서 ‘祭’명을 점차 쓰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굽의 형태가 각형인 백자 ‘祭’명 접시는 분원리 관요 유적에서만 출토되었는데, 현재까지 3점에 불과하다.50 굽의 높이는 2.2~3.8cm정도로, 굽의 형태가 원형인 것보다 높은 편이지만, 굽의 높이가 약 5.0cm인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Fig 5-②·③). 굽의 외면은 각이 져 있는 반면 동체부는 각이 지지 않았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굽의 외면과 동체부까지 각이 진 백자 ‘祭’명 접시가 소장되어 있다.(소장번호 : 건희 2558, Fig. 6) 굽의 높이는 약 1.6cm로,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백자 ‘祭’명 접시에 비해 낮은 편이다. 특히 굽의 외면에 보관처로 추정되는 ‘쥬방’명이 정각되어 있다. 그리고 내저면에 원권을 두르지 않고 ‘祭’명을 쓴 예도 있다(소장번호 : 접수 1999, Fig. 7).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이러한 형태의 ‘祭’명 접시가 출토된 바 없기 때문에 분원리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Fig. 6.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Late 18th Century, Chosŏn, H. 5.2cm, D. 18.2 cm (mouth), D. 9.2cm (foot),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7.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Late 18th Century, Chosŏn, H. 5.2cm, D. 18.2 cm (mouth), D. 9.2cm (foot),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그렇다면, 분원리 관요에서 굽의 형태가 각형인 백자 ‘祭’명 접시를 언제부터 제작되었는지 하는 문제이다. 2001~02년에 실시한 분원리 관요 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1776~1790년대 초로 추정되는 가마2호 상부퇴적에서 굽의 형태가 원형이고, 굽의 높이 1.9cm인 백자 ‘祭’명 접시(Fig. 5-①)와 굽의 형태가 각형이고, 굽의 높이가 2.2cm와 3.8cm인 백자 ‘祭’명 접시(Fig. 5-②·③)가 출토되었다.51 또한 분원리 1호에서는 굽의 형태가 각형이고 내저면 중앙에 청화안료로 원권문과 ‘祭’자를 써 넣은 백자 발이 발견된 바 있다.52 이 ‘祭’명 발은 외면에 ‘혜빙바(밧?)…’명이 정각되어 있는데, ‘혜빙’은 사도세자의 嬪인 ‘惠嬪宮’을 뜻하는 것으로, 1763년 1월 이후부터 혜경궁으로 호칭되는 1776년 3월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53 그리고 서울 종로 청진 8지구에서 청화안료로 ‘戊子’명을 쓴 백자편과 굽의 형태가 각형이고 굽의 높이가 약 3.0cm이면서 내저면에 철화안료로 ‘祭’명이 같은 층에서 발견되었다. ‘戊子’는 1768년으로 보고 있다.54 이를 종합해 보면 굽의 형태가 각형인 백자 ‘祭’명 접시는 적어도 1768년경부터는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분원리 관요에서 ‘祭’명 접시를 제작하기 시작한 이유는 당시의 유행하던 각진 형태의 그릇을 선호하는 사대부 혹은 일반 계층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금속제기를 번안하는 것에서 벗어나 굽과 동체부를 깎은 제기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분원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굽의 형태가 각형인 백자 ‘祭’명 접시의 제작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55

이를 종합해 보면, 분원리 관요는 초기는 굽의 높이가 1.9cm 내외이고, 굽의 형태가 원형인 것과 굽과 동체부가 각이 진 ‘祭’명 접시를 제작하였으며, 일시적으로 굽이 약간 높고, 각이 진 ‘祭’명 접시를 제작하였다. 이후, 금속제기접시의 굽이 매우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백자 ‘祭’명 접시도 금속제기접시를 번안하면서 굽의 높이는 높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굽의 형태가 각형인 ‘祭’명 접시는 이 시기부터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Ⅳ. 백자 ‘壽’·‘福’명 접시와의 관계

관요는 ‘祭’명 접시뿐 아니라 ‘壽’·‘福’명 자기도 제작하였는데, ‘壽’·‘福’명은 장수와 부귀·복을 의미하는 길상문이라는 점에서 제례용기임을 의미하는 ‘祭’명과는 차이가 있다. ‘壽’·‘福’명 자기는 1460년대~1480년대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우산리 4호에서 ‘壽’명이 상감된 편병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505년 전후한 시기에 운영된 도마리 1호에서는 내저면에 청화안료로 ‘壽’·‘福’명 쓴 백자 잔이, 1649~1654년에 운영된 송정동 1호 굽 안 바닥에 철화안료로 ‘福’을 쓴 백자 접시 등이 출토되었다. 관요 유적 출토된 ‘壽’·‘福’명 자기를 정리하면 <Table. 4>와 같다.

관요 유적 출토 ‘壽’·‘福’명 자기 Excavated at the Chosŏn Kiln Sites White Porcelain Dishes with Inscriptions “su” 壽 and “pok” 福

이 외에도 ‘壽’·‘福’명은 백자는 서울 종로 청진 12~16지구, 서울시청사 부지(군기시터)나 동대문운동장 부지(훈련도감터) 등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56

‘壽’·‘福’명은 자기는 적어도 관요가 설치된 이후부터 그릇을 제작할 때 상감·청화·철화·음각 등의 방법으로 글자를 생산처 즉, 관요에서 쓴 반면, ‘祭’명 백자는 1560년대 이전까지는 소비처에서 반상기와 구별하기 위해 정각·묵서 등의 방법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현재, 길상의 의미가 있는 ‘壽’·‘福’명이 정각 또는 묵서 등의 방법으로 쓴 백자가 발견된 예는 없다. 이는 ‘祭’명은 제례용기를 의미하는 반면, ‘壽’·‘福’은 길상문으로 장식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써 넣은 것이기 때문이다.

1560년대 이후에 제작된 ‘壽’·‘福’명 백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잔57과 송정동 관요에서 출토된 ‘福’명 접시가 있으며, 모두 철화안료로 써 넣었다. 송정동 관요 유적 이후에 운영된 유사리 관요 유적(1655~1664)부터 관음리 관요 유적까지 ‘壽’·‘福’명 백자가 발견된 예가 없는 점으로 보아 제작량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기종에서도 차이가 보이는데, ‘祭’명은 대부분 접시에서 확인되는 반면 원권문이 없는 ‘壽’·‘福’명은 잔 또는 양이잔에서 대부분 확인된다. ‘壽’·‘福’명 백자도 ‘祭’명 백자와 마찬가지로 명문이 없는 백자와 기형 등에서 차이가 없다.

‘壽’·‘福’명 백자는 1734년에 운영된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이전 시기에 비해 많이 출토되며, 특히 분원리 관요 유적에서 청화안료로 ‘壽’·‘福’명을 쓴 접시가 다수 발견되었다. ‘祭’명 백자는 제례용으로 사용되어 수요가 제한적이지만, ‘壽’·‘福’명을 쓴 백자는 반상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수요가 많았으며, 이는 【사료 1】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사료 1】

홍봉한이 아뢰기를 “수 십년 전에는 상사기를 사대부·벼슬아치 반상기에서 상기로 여겼습니다. 지금을 말단 관리와 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분원 그릇을 쓰는데, (그릇에) 반드시 회회청으로 ‘수’(壽)·‘복’(福)자가 있습니다.” 하였다. … 58

이처럼 백자 ‘壽’·‘福’명 접시는 분원리 관요 시기에 많이 제작되었는데,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福’명 접시와 분원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백자 ‘壽’·‘福’명 접시가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祭’명 접시와 굽의 형태 및 높이 등에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동일 유적에서 수습된 ‘壽’·‘福’명 백자도 기종 및 굽의 높이 등에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먼저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발견된 ‘壽’·‘福’명 백자는 25점이다.59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금사리 관요에서 굽의 형태가 원형이거나 각형인 ‘壽’명 발은 발견되었지만 ‘壽’명 접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60 금사리 관요 유적에 대한 전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금사리 2·3호와 9·10호 일원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에서 발견된 바 없기 때문에 ‘壽’명 접시가 제작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굽의 형태가 원형인 것과 각형인 것 ‘壽’명 발은 확인되는데, 각형인 발은 동체부까지 각이 져 있다. 이러한 형식은 ‘福’명이 있는 발에서도 확인된다(Fig. 8-10).61

Fig. 8.

<백자 ‘壽’명 발>, White Porcelain Bowl with the Inscription “su” 壽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H. 8.3cm, D. 15.1cm (mouth), D. 8.0cm (foot), H. 2.0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Fig. 9.

<백자 ‘壽’명 발>, White Porcelain Bowl with the Inscription “su” 壽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H. 5.5cm, D. 10.1cm (foot), H. 1.8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Fig. 10.

<백자 ‘福’명 발>, White Porcelain Bowl with the Inscription “pok ” 福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H. 6.3cm, D. 7.8 cm (foot), H. 2.0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그러나 ‘福’명 접시는 현재까지 18점이 발견되었으며, 굽의 형태가 원형인 것과 각형 모두 확인된다.62 굽의 형태가 원형인 것은 7점이고 굽의 높이는 0.8~3.2cm이다. 그리고 굽의 형태가 각형인 것은 11점이고 높이는 1.0~3.2cm이다. 굽의 높이가 1.8cm 이내인 10점은 동체부까지 각이 져 있지만, 3.2cm인 것은 동체부는 각이 지지 않았다(Fig. 11).63 ‘福’명 접시 중에는 원권문이 없는 것도 확인된다.

Fig. 11.

<백자 ‘福’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pok ” 福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① H.3.5cm, D. 13.0cm (mouth), H. 1.2cm (heel), ② H.3.6cm, D. 14.0 cm (mouth), D. 6.0cm (foot), H. 1.0cm (heel) ③ H. 5.6cm, D. 20.0cm (mouth), D. 8.4cm (foot), H. 3.2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이를 종합해 보면, 금사리 관요에서는 ‘壽’명 접시는 제작하지 않은 반면에 ‘福’명 접시는 굽의 형태가 원형인 것과 각형인 것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굽의 높이가 3.2cm인 원형굽과 각형굽을 모두 제작하였다. 이들 접시가 시기차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祭’명 접시와는 차이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祭’명 접시는 굽의 형태가 원형인 것만 발견되었으며, 굽의 높이도 대부분 2.0cm이상이다<Table 5>.

〈금사리 관요 유적 출토 ‘祭’·‘福’명 접시〉 The White Porcelain Dishes with the Inscription “ je” 祭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1734-1751

이처럼 ‘壽’·‘福’명 백자가 ‘祭’명 백자보다 빨리 굽이나 동체부의 외면을 각지게 제작된 이유는 ‘祭’명은 졔례용임을 의미하는 글자로, 제례에 사용되었지만 ‘福’명은 길상의 의미로 쓰여 져 접대나 반상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壽’·‘福’명 백자는 당대의 유행하는 새로운 양식을 바로 수용하여 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祭’명 백자는 제례용기였기에 18년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본래 금속제기가 가지고 있었던 기형을 고수하고자 한 것이다.

반면, 분원리 관요 유적은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壽’·‘福’명 백자가 나타나는 동시에 그릇의 외면에 ‘壽’와 ‘福’명을 여러 번 시문하거나 여러 글자와 함께 양각한 것이 출토되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초화·매화·모란문과 함께 쓰여 있거나, ‘壽’명이 도안화되어 마치 문양같이 쓴 것도 있다. 분원리 관요에서 길상문자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壽’·‘福’명은 19세기에 들어서는 ‘壽’자와 함께 복을 뜻하는 박쥐를 시문하거나 아니면 장수를 뜻하는 천도와 함께 박쥐를 시문하기도 하여 동일한 상징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다.64

이 가운데 청화안료로 ‘壽’·‘福’명을 접시에 대해 살펴보면, 굽의 형태가 원형이고, 굽의 높이가 1.0cm 내외인 접시는 확인되는 반면 굽의 형태가 각형인 ‘壽’명 접시는 분원리 관요 유적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소비유적에서 출토된 예가 없다.65 물론 접시의 동체부가 각이 진 화형접시나, 굽의 외면과 동체부가 12각인 ‘壽’명 접시처럼 각이 진 접시가 제작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66 하지만, 이들 접시는 굽이 원형이고, 내면에 횡으로 홈이 있거나, 내면까지 각이 져 있어 굽의 형태가 각형인 ‘福’명 접시와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분원리 관요에서도 금사리 관요와 마찬가지로 굽의 형태가 각형인 ‘壽’명 접시는 제작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福’명 접시는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형태의 접시가 출토되었다(Fig. 12-①·②).67 그리고 굽의 형태가 각형이고, 굽이 비교적 높은 ‘福’명 접시도 수습되었는데, 철화안료로 시문한 원권문 안에 ‘福’자를 써 넣었다.68 이처럼 분원리 관요는 금사리 관요처럼 동일한 형태의 ‘福’명 접시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Fig. 12.

<백자 ‘福’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pok ” 福 Excavated at the Punwŏn-ri kiln site no.1, Kyŏnggi Provience, 1752-1883, Chosŏn, ① H.3.2cm, D. 11.5 cm (mouth), D. 6.4cm (foot), H. 0.8cm (heel) ② H. 3.3cm, D. 12.8cm (mouth), D. 6.3cm (foot), H. 1.0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특히, 19세기 이후에 분원리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 ‘壽’·‘福’명 백자 중에는 길례나 가례 등의 행사 등에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는데, 굽의 안 바닥이나 동체 하단부에 간지(사용시기)+행사+사용처+크기+수량 등을 정각되어 있기 때문이다.69 대표적인 유물로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백자 ‘뎌동궁길례시슉셜소이뉴일듁’명 접시와 백자 ‘뎡유가례시큰뎐고간이뉴일듁팔’명 발이 있다. ‘뎌동궁길례시…’는 정유년 8월에 순조의 삼녀 덕온공주의 궁가인 저동궁(苧洞宮)에서 길례 때 사용된 것이고, ‘뎡유가례시…’는 정유년인 1837년 헌종과 효현왕후의 가례 때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70 ‘뎌동궁길례시…’에는 내면에 청화안료로 원권문과, 그 안에 ‘壽’명을 써 넣었다. ‘뎡유가례시…’는 ‘壽’·‘福’명이 반복적으로 쓰여 있어 화려하다. 길례는 제사와 관련된 의례로, 이 접시는 제사 때 사용된 것이다. 단, 이 접시는 제사상에 올리는 기물이기보다는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접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뎡유가례시…’도 접대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분원리 관요 유적에서는 굽의 형태가 원형이고, 굽의 높이가 매우 높은 ‘壽’·‘福’명 접시는 출토되지 않았다. ‘壽’·‘福’명이 없다고 해서 연향용으로 사용된 ‘壽’·‘福’명 접시가 제작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의 풍속도 등에 혼례나 잔치에서 굽이 높은 접시가 사용된 것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71

이상으로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백자 ‘祭’·‘壽’·‘福’명 접시의 시기별 특징 및 변화 양상에 살펴보았는데, 이를 글자를 쓰는 시점과 방법, 안료에 따른 글자의 위치, 그리고 금사리 관요를 중심으로 굽의 형태와 높이의 변화 양상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접시에 ‘祭’명을 쓰는 시점은 1560년대 이전까지는 소비처에서 정각·묵서로 용도를 표기하다가 1560년대 이후부터 관요에서 제기접시를 제작할 때 제례용임을 의미하는 ‘祭’명을 표기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壽’·‘福’명은 관요가 설치된 이후부터 관요가 민영화되는 시기까지 접시를 제작할 때 장수와 복을 의미하는 ‘壽’·‘福’명을 표기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글자는 쓰는 시점에 차이가 있다.

둘째, ‘祭’·‘壽’·‘福’명은 사용되는 안료의 종류에 따라 접시에 쓰는 방식이나 위치에 차이가 있다. 특히, 17세기 이후부터는 ‘祭’·‘壽’·‘福’명을 철화와 청화안료로만 표기하였다, 철화안료를 사용한 것은 원권문이 없고 글자만 단독으로 표기하였으며 굽 안 바닥이나 내저면에 위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청화안료를 사용한 것은 원권문 안에 ‘祭’·‘壽’·‘福’명을 표기하였으며 내저면에 위치하여, 안료의 종류에 따라 쓰는 방식과 위치의 차이를 확인하였다.

셋째,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祭’·‘壽’·‘福’명 접시를 통해 이들 명문 접시가 제작 시기에 따라 기형의 변천이 이루어졌다. ‘祭’·‘壽’·‘福’명 접시는 금사리 관요 이전까지는 일상용 그릇과 형태가 동일하다. 하지만 금사리와 분원리 관요 시기를 거치면서 기형이 크게 변화하였다. 금사리 관요의 가장 큰 특징은 굽이 높고, 굽과 동체부까지 각이 진 일상용 그릇을 제작한 점이다. 그러나 ‘祭’명 접시는 굽의 형태가 각형인 것은 제작되지 않은 반면, 굽의 형태가 원형이고, 굽의 높이가 일상용 그릇보다 비교적 높은 것이 제작되었다<Table 6>.

〈궁평리·관음리·금사리 관요 유적 출토 ‘祭’·‘福’ 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es with the Inscriptions “ je” 祭 and “pok ” 福 Excavated at the Kungpyŏng-ri, Kwanŭm-ri, and Kŭmsa-ri Kiln Sites

그렇지만 분원리 관요의 경우, ‘祭’명 접시는 굽의 형태가 원형이고, 굽의 높이가 5.0cm 이상으로 매우 높은 것과 굽의 형태가 각형이고, 굽의 높이가 2.2~3.8cm정도인 것도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금사리 관요에는 ‘祭’명 접시의 굽 형태가 원형이었으나, 분원리 관요부터는 굽이 매우 높은 원형과 각형으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굽이 형태가 각형인 접시는 적어도 1768년경에는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福’명 접시는 금사리 관요와 분원리 관요에서 굽의 형태와 높이가 동일한 것이 제작되었으며, 분원리 관요에서는 굽의 형태가 원형이고, 높이가 1.0cm인 ‘壽’명 접시가 다량으로 제작되었다. 단, 분원리 관요에서는 굽의 형태가 원형이고, 높이가 약 5.0cm인 ‘祭’명 접시가 제작된 반면 ‘福’명 접시는 제작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Ⅴ. 맺음말

최근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祭’명 접시와 소비유적에서 출토된 ‘祭명 접시를 통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된 ’祭‘명 접시의 변화를 고찰하였다.

‘天’·‘地’·‘玄’·‘黃’명 백자가 제작되던 시기에는 소비처에서 제례용임을 의미하는 명문을 썼으며, 그 이후부터는 생산지 즉 관요에서 ‘祭’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간지명 백자가 제작되던 17세기 이후부터는 ‘祭’·‘壽’·‘福’명은 철화와 청화안료로만 표기하였는데, 명문의 위치에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특히 최근에 운영시기가 명확히 밝혀진 금사리 관요를 기점으로 굽의 형태와 높이에 변화가 시작되었으며, ‘壽’·‘福’명 접시와의 비교를 통해 제작 시기 및 기형 변화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Table 7>.

관요 유적 출토 백자 ‘祭’·‘壽’·‘福’명 접시 시기별 출토 현황 Excavated at the Chosŏn Kiln Sites White Porcelain Dishes with Inscriptions “je” 祭, “su” 壽, “pok” 福

이번 논문은 소비유적에서 출토되는 조선 후기 백자의 제작시기 편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금사리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의 양식을 흔히 ‘금사리 양식’이라 불리는 이유는 굽이나 동체부가 각이 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祭’명 접시는 ‘금사리 양식’이라 불릴 수 없는데, 분원리 관요부터 굽이 각이 진 ‘祭’명 접시가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유적에서 출토된 ‘祭’명 접시의 굽 형태에 따라 유구의 조성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祭’명 접시와 공반되는 유물의 제작시기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금사리 관요부터 분원리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는 대부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분원리 관요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도 미비하여 이들 백자의 제작시기 등을 밝히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서울지역 소비유적에서 ‘祭’명 접시와 공반되는 유물의 제작시기를 통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 백자의 제작시기도 조금 더 명확해 질 수 있다.

물론, 관요 유적에 출토된 백자 ‘祭’·‘壽’·‘福’명 접시만 한정해 다루었다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관요 유적과 ‘祭’·‘壽’·‘福’명 접시가 발견되는 군포 산본동 유적, 양구 칠전리, 음성 육룡리, 연기 달전리, 장성 수옥리, 무안 피서리 유적과의 관련성을 살피지 못한 부분도 있다. 현재 경기도 광주 전역에 분포하고 있는 관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유적의 운영시기가 상당부분 밝혀졌으며, 조사 과정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관요 백자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 관요 백자의 실체가 밝혀지길 기대한다.

Notes

1)

祭器와 관련된 도자사 연구는 충효동 요지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를 분석한 정소라, 「朝鮮時代 陶磁祭器 硏究-충효동출토 분청제기를 중심으로」, 홍익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1996)와 도자 제기에 주목하여 출현하게 된 원인과 그 종류를 분석한 안성희, 「朝鮮時代 陶瓷祭器 硏究」,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학위논문(2005). 등이 있다. 이들 논문은 분청사기 제기와 도자제기에 전반을 연구하여 본 논문의 주제인 백자 ‘祭’명 접시와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18세기 이후 제기를 포함한 백자 고족접시의 제작배경 및 변천을 연구한 정다혜, 「朝鮮 18~20世紀 白磁 高足楪匙 硏究」,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14)를 많은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혀 둔다.

2)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pp. 207-210.

3)

정다혜는 편평한 접시면에 약 1.5cm 이상의 높은 굽이 달린 접시를 ‘祭器’로 인식하던 것을 ‘고족접시’로 명명하였다. (정다혜, 앞의 논문, p. 113.)

4)

정다혜, 앞의 논문, p. 10; pp. 94-110.

5)

윤효진, 「18세기 전반 경기도 광주 금사리 백자 연구」,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7).

6)

박정민, 앞의 논문, p.118.

7)

유적명에 호수가 있는 경우, ‘관요 유적’이라는 단어가 중복되기 때문에 생략하고자 함(예 : 우산리 10호 관요 유적→우산리 10호)

8)

국립중앙박물관, 『廣州郡 道馬里 白磁窯址 發掘調査 報告書-道馬里 1號 窯址-』(1995), p. 76.

9)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廣州 樊川里 9號 朝鮮白磁窯址 발굴조사보고서』(2007), p. 47; p. 168.

10)

경기도자박물관, 『시적 제314호 광주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 보고서-번천리 8호 선동리 2호 일원』 (2013). p. 71 (번호 032).

11)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어영청지 유적』 (2011), p. 165; p. 211.

12)

한울문화재연구원, 『鐘路 12~16地區遺蹟Ⅲ(유물)』 (2013b), p. 358.

13)

한울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 (2013b), p. 426. 한울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 (2011), p. 286.

14)

박정민, 앞의 논문, p. 210.

15)

박정민, 앞의 논문, p. 156.

16)

1560년대에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관음리 10호에서는 ‘玄’·‘黃’명 백자와 함께 ‘右’명가 발견되었다. ((재)한강문화재 연구원, 『광주조선백자요지 보존·정비를 위한 5차 시·발굴조사』 (2019), p. 99; p. 103; p. 108.

17)

(재)서경문화재연구원, 『광주 무갑리 10호 도요지 내 유적』 (2015), pp. 48-49.

18)

(재)한울문화재연구원, 『鐘路 淸進8地區遺蹟Ⅱ(유물)』 (2013c), p. 310. 이 외에도 청진 2~3지구에서도 굽 안 바닥에 ‘祭’명이 음각된 백자 저부편이 발견되었다. ((재)한울문화재연구원, 『鐘路 淸進2~3地區遺蹟Ⅱ(유물)』 (2013a), p.80.)

19)

고창 용산리 유적에서는 도장으로 ‘祭’을 새긴 백자 제기도 발견된 바 있다. ((재)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龍山里窯址』 (2004), p. 116.). 유적의 운영시기는 15세기 중반~16세기 초로 보고 있다.

20)

김경중, 「17世紀 銘文白磁를 통해 본 官窯의 運營時期-生産·消費遺蹟 出土品을 중심으로」, 『한국고고학보』 77집 (한국고고학회, 2010. 12), pp. 165-190.

21)

본 논문에서 언급된 관요의 운영시기는 김경중, 「16세기 중·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가마터 출토 명문백자를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15집 (2012. 12), pp. 243-265; 김경중, 앞의 논문 (2010. 12), pp. 165-190; 김경중, 「17~18세기 전반 조선 관요 유적의 운영시기 재검토-가마터 출토품을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101집 (2022. 1), pp. 191-231.에서 설정한 시기를 따랐다.

22)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 보고서』 (2019b), p. 393.

23)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京畿道廣州中央官窯-窯址地表調査報告書(圖板篇)』 (1998), p. 279.

24)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중부고속도로건설예정지역 광주조선백자요지 발굴보고서–번천리5호·선동리2, 3호-』 (1986). p.180.

25)

경기도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상기 선생 유물 가운데 궁평리 관요에서 수습된 것 중에 철화안료로 쓴 ‘祭’명발 저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경기도자박물관,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광주 분원 가마터 수집품』 (2021), p. 121.) 관음리에서 출토된 ‘祭’명 접시와 비교했을 때 접시의 저부편으로 추정된다.

26)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앞의 보고서 (1986). pp. 268-269.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자료집 (2021), p. 100.

27)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 (2019b), p. 295 (번호 080).

28)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주변지역 3차 발굴조사 보고서』 (2022c), p. 102 (번호 033).

29)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6차 발굴조사 보고서』 (2020b), p. 426 (번호 107).

30)

관음리 관요에 원권을 두르지 않고 청화안료로 ‘祭’명을 쓴 접시가 수습된 바 있다.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자료집(2021), p. 133.

31)

학동리 10호에서는 모래빚음, 신대리 31호에서 굵은모래를 받쳐 여러 점을 포개서 번조한 접시의 내면에 철화안료로 쓴 ‘祭’가 출토된 바 있다.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 (2019b), p. 387; (재)한국문화유산연구원, 『廣州 新垈里 21·31號 窯址』 (2017), p. 111.

32)

기존에 관음리와 금사리 관요의 운영시기와 관련해서, 정양모 선생은 『承政院日記』와 『備邊司謄錄』의 이설기사, 17세기 후반에 운영된 관요 출토품과의 비교, 그리고 관음리 관요 유적에서 출토된 ‘另’·‘口’·‘二’ 등의 명문백자와 모래받침의 차이 등을 근거로 관음리 관요는 오향리 관요(1717~20년) 이전인 1717년 이전에 운영되고, 금사리 관요는 1721~51년으로 설정하였다(정양모, 「京畿道 廣州分院 窯址에 대한 編年的 考察」, 『韓國白磁陶窯地』(1986), pp.24-35). 반면 윤용이 선생은 1721년에 관요를 이설하였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1980년대 광주 일대의 요지 조사와 『承政院日記』 등의 문헌자료를 토대로 금사리 관요의 운영시기를 1726~51년으로 설정하고, 관음리 관요는 오향리와 금사리 관요 사이인 1721~1725년으로 설정하였다.(윤용이, 「朝鮮陶磁의 變遷」, 『朝鮮時代陶磁名品圖錄』 (1992), p145.)

33)

『承政院日記』 773冊 (탈초본 43冊) 英祖 10年 2月 2日. “洪尙賓 以司饔院官員 以都提調·提調意啓曰 因磁器之年年不順成 今年則移設燔於他處事 旣已啓稟蒙允矣 廣州柴場內 退村面金獅谷移去之意 敢啓 傳曰 知道” (김경중, 앞의 논문(2022), p. 214 각주 69 참조.)

34)

김경중, 앞의 논문(2022. 1.), pp.212-215.

35)

백자발의 분석 대상(총145점)은 궁평리 1·2호·3호에서 출토된 49점, 관음리 16호·18호에서 출토된 13점, 금사리 2·3호와 9·10호에서 출토된 82점이다.(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2019b); 앞의 보고서(2020b); 『광주조선백자 요지(사적 제314호) 7차 발굴조사 보고서』(2021); 학술자료 등 포함) 분석 대상에서 굽이 오목굽인 발은 제외하였다. 유물의 대부분이 저부와 동체부 일부만 남아 있어 저경과 굽 높이를 기준으로 분석하였다. 백자 접시의 분석 대상(총 284점)은 궁평리 1·2호·3호에서 출토된 78점과 이상기 선생 기증 유물 1점, 관음리 16호·18호에서 출토된 69점과 경기도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상기 선생 기증 유물 1점, 금사리 2·3호와 9·10호에서 출토된 129점과 경기도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영훈·이상기 선생 기증 유물 4점이다.(경기도자박물관, 앞의 자료집(2016); 앞의 보고서(2019b); 앞의 보고서(2020b); 앞의 보고서(2021); 앞의 자료집(2021); 학술자료 등 포함) 분석 대상에서 굽이 오목굽인 발은 제외하였다. 유물의 대부분이 저부와 동체부 일부만 남아 있어 저경과 굽 높이를 기준으로 분석하였다. 발·접시의 굽 높이는 기종과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어 저경이 큰 접시는 구경이 크고, 굽 높이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본 분석에서는 크기는 별도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36)

금사리 관요에서 반상기의 굽 높이가 높아진 이유는 그릇을 재임하는 방식의 변화했기 때문일 수 있다.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는 여러 점을 포개서 번조한 것이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도침을 놓지 않고 가마 바닥에 백자 발·잔·접시를 놓고 번조한 것이 다수 확인되었다. 만약, 굽의 높이가 조금 낮으면 가마 바닥에 깔았던 모래가 저부에 붙을 가능성이 커 상품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굽의 높이를 약간 높임으로서 가마 바닥에 깔았던 모래가 그릇에 붙는 것을 최소화하여 좀 더 좋은 백자를 생산하기 위해 선택했을 수 있다. 특히. 금사리 관요에서 폐기된 유물 중에 굽의 높이가 조금 높은 발과 접시 중에는 내면 바닥 두께가 2mm 내외로 번조과정에서 찢어지듯이 갈라진 것들이 발견되는데, 굽 안 바닥을 깎는 과정에서 너무 깊게 깎아 두께가 매우 얇아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폐단으로 인해 분원리 관요에 이르러서는 굽이 높이는 다소 낮아지고 안쪽을 깊게 깎는 방식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37)

유제욱, 「조선후기 각형백자의 연구」, 홍익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12), pp. 24-29.

38)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자박물관에서 발간한 『경기도광주중앙관요』에는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백자 ‘祭’명 접시가 4점 수록되어 있다. 굽의 형태는 원형인 것이 3점, 각형인 것이 1점이고, 각형 접시는 ‘祭’명으로 추정하였다.(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p. 406-426; pp. 448-464 ; 앞의 보고서(2000), pp, 295-309.) 정다혜는 석사학위논문에서 금사리에서 굽이 각이 진 ‘제’명 백자가 3점 확인된다고 하였다.(정다혜, 앞의 논문, pp. 94-110) 하지만, 명문이 명확하지 않고 굽 높이를 알 수 없어 본 논문에서 4점은 제외하였다.

39)

본 유물은 경기도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①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2020b), p. 525(번호 055); ② p. 524(번호 058); ③ p. 523(번호 056). 유물 도면은 보고서를 인용하였음.

40)

현재 금사리 관요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41)

정다혜, 앞의 논문. p. 8-10 한울문화재연구원, 『鐘路 淸進1地區遺蹟Ⅱ(유물)』 (2011b), pp. 147-150.

42)

서울 종로 관수동에서 제작시기가 15~16세기인 청동제기접시가 출토되었다.(국방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구 관수동 4·5·6번지 유적』 (2021) p. 70; pp. 314-315.)

43)

정다혜는 백자 고족접시가 17세기의 과도기를 거쳐 금사리 관요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정다혜, 앞의 논문. pp. 35-40.) 하지만 신대리 관요부터 관음리 관요까지 ‘祭’명 접시의 굽 높이가 1.5cm 이내이고, 금사리 관요부터 1.5cm 이상인 ‘祭’명 접시가 제작되는 점으로 보아 금사리 관요부터 과도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4)

『輿地圖書』 京畿道 楊根 物産條, 『日省錄』 552冊, 正祖 21年 1月 13日; 1月 18日.

45)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마지막 官窯 廣州 分院里 白磁窯址』 (2006).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분원초등학교 출입 외부계단 조성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2020a).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9차 발굴조사 보고서』 (2022b). (재)한라문화재연구원, 『광주 분원리 유적』 (2021).

46)

본 유물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 (①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앞의 보고서(2006). p. 258; ② p. 255; ③ p. 257.) 유물 도면은 보고서를 인용하였음.

47)

정다혜, 앞의 논문, p. 24.

48)

정다혜, 앞의 논문, p. 30.

49)

지표조사에서 2점, 발굴조사에서 4점이 발견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 435; p. 471; 앞의 보고서 (2000), p. 312;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앞의 보고서(2006). p. 174; pp. 255-258; (재)한라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 (2021), pp. 85-86)

50)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앞의 보고서(2006). pp. 255-258. 필자가 분원리 관요에서 출토된 유물 전체를 실견한 것이 아니라 도면이나 설명을 토대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수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51)

최경화, 「분원리 1호요지 가마2호 발굴의 양상 및 의의-상부퇴적 및 바닥내 출토품을 중심으로」, 『陶藝硏究』 제 25호 (2016), p. 105.

52)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 435; p. 471; 앞의 보고서(2000), pp. 312-313.

53)

최경화, 앞의 논문(2014), p. 36.

54)

한울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2013c), pp. 36-47.

55)

국립중앙박물관에 굽의 형태가 각형이고, 굽의 높이가 비교적 높은 백자 ‘祭’명 접시가 소장되어 있다. 굽 안 바닥에 청화안료로 쓴 ‘명동’명을 바탕으로 제작시기는 19세기 중후반으로 보고 있는데, 19세기에 소비처의 요구에 따라 극소수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6)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Ⅰ본문)』 (2011), p. 358.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Ⅱ유물도판)』 (2011), p. 200.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 군기시터 유적(본문)』 (2011), p. 174. 한울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2013b), p. 145.

57)

https://www.emuseum.go.kr(유물번호: 구 3138, 신수 7748)

58)

『承政院日記』 1,105冊, 英祖 30年(1754) 4月 29日. “鳳漢曰 數十年前常沙器 士夫從宦家食床 此爲上器矣 今則下至吏胥 皆用分院之器, 而必有回回靑壽福字矣. <후략>” (이 기사는 박성희가 제공해 주었다)

59)

지표조사에서 수습된 ‘壽’·‘福’명 발·잔·접시 10점은 제외하였음.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앞의 보고서(2000), pp. 295-309.)

60)

지표조사에서 굽의 형태가 각형인 ‘壽’명 접시의 저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 295; 앞의 보고서(2000), p. 410.) 하지만 저부의 형태가 ‘壽’명 발과 유사하다.

61)

금사리 관요 유적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경기도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2020b), p. 508(번호 011); p. 509(번호 015); p. 510(번호 017).

62)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자박물관에서 발간한 『경기도광주중앙관요』에는 금사리 관요 유적에서 백자 ‘福’명 접시가 6점(원형 4점, 각형 2점, 발 1점 제외)이 발견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p. 406-426; pp. 448-464 ; 앞의 보고서(2000), pp. 295-309.)

63)

금사리 관요 유적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경기도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 경기도자박물관, 앞의 보고서(2020b), p. 521(번호 051); p. 527(번호 068); p. 528(번호 071)

64)

최경화, 「조선시대 분원리 시기 관요백자 연구-1752-1895년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학위논문(2014), p. 176.

65)

청진 8지구에서 백자청화‘壽’문팔각접시가 출토된 바 있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2013c), p. 3 9.) 하지만 ‘福’명을 오역한 것이다.

66)

https://www.emuseum.go.kr(유물번호: 건희 2328, 본관 10944)

67)

본 유물은 경기도자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음.(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앞의 보고서(2006). p. 237; p. 241.) ② 유물은 분원리 1호 일원의 가마 2호 바닥에서 출토되었으며, 제작시기는 굽의 형태가 각형인 ‘祭’명 접시가 출토된 가마 2호 상부퇴적과 마찬가지로 1776년 이후~1790년대 초로 추정하고 있다.(최경화, 앞의 논문(2016), p.108.)

68)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앞의 보고서(1998), p. 437; 앞의 보고서(2000), p. 413.

69)

백자 ‘壽’·‘福’명 접시 중에는 청화안료로 ‘毓’·‘延’·‘薺壽’·‘雲峴’명 등을 쓴 예가 있다. 모두 사용처를 의미하며, 그릇을 제작할 때 쓴 것이다. 관련된 내용은 곽희원, 「朝鮮後期 王室磁器의 銘文과 意味」, 홍익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14), pp. 31-75. 참조.

70)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백자』(2015), pp. 60-61. ‘뎌동궁길례시…’명 발을 1837년(정유년) 8월에 순조의 삼녀 덕온공주의 궁가인 저동궁(苧洞宮)에서 길례 때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최경화, 앞의 논문(2014), p. 84.) 1837년 8월은 덕온공주가 남녕위 윤의선에게 下嫁(『憲宗實錄』 憲宗 3年 8月 13日.)하였기 때문에 1837년에 사용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71)

정다혜, 앞의 논문, p.33

References

1. 『輿地圖書』.
2. 『日省錄』.
3. 『承政院日記』.
4. 『憲宗實錄』.
5. 경기도자박물관, 『시적 제314호 광주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 보고서-번천리 8호 선동리 2호 일원』, 2013.
6.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 보고서』, 2019b.
7.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4차 발굴조사 보고서』, 2019a.
8. ,『광주 분원초등학교 출입 외부계단 조성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2020a.
9.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6차 발굴조사 보고서』, 2020b.
10.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7차 발굴조사 보고서』, 2021.
11.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9차 발굴조사 보고서』, 2022b.
12.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주변지역 3차 발굴조사 보고서』, 202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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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Sindae-ri Kiln site no. 8·28, Kyŏnggi Province, 1664-1676, Chŏson, H.5.5cm, D. 11.8 cm (mouth), D. 4.4cm (foot), H. 1.0cm27 (heel)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2.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Sindae-ri Kiln site no. 20, Kyŏnggi Province, 1664-1676, Chŏson, H .7.2 cm, H. 3.6cm, H. 1.0cm (heel)28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3.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Kwangpyŏng-ri kiln site no. 1·2, Kyŏnggi Province, 1684-1702, Chŏson, H. 3.5cm, D. 17.2 cm (mouth), D. 7.6 cm (foot), H. 1.4cm29 (heel)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4.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① H. 2.8cm, D. 8.2cm (foot), H. 1.7cm (heel), ② H. 4.9cm, D. 16.6 cm (mouth), D. 8.2cm (foot), H. 2.2cm (heel), ③ H. 4.8cm, D.14.0 cm (mouth), D.7.2 cm (foot), H. 2.6cm (heel)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5.

46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Excavated at the Punwŏn-ri kiln site no.1, Kyŏnggi Province, 1752-1883, Chŏson, ① H. 4.1cm , D. 13.2cm (mouth), D. 7.4 cm (foot) H. 1.9cm (heel) ② H. 4.4cm, D. 13.4cm (mouth), D. 6.6cm (foot), H. 2.2cm (heel), ③ H. 7.0 cm D. 13.4cm (mouth), D. 6.6cm (foot), H. 3.8cm (heel)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6.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Late 18th Century, Chosŏn, H. 5.2cm, D. 18.2 cm (mouth), D. 9.2cm (foot),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7.

<백자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je” 祭, Late 18th Century, Chosŏn, H. 5.2cm, D. 18.2 cm (mouth), D. 9.2cm (foot),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8.

<백자 ‘壽’명 발>, White Porcelain Bowl with the Inscription “su” 壽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H. 8.3cm, D. 15.1cm (mouth), D. 8.0cm (foot), H. 2.0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Fig. 9.

<백자 ‘壽’명 발>, White Porcelain Bowl with the Inscription “su” 壽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H. 5.5cm, D. 10.1cm (foot), H. 1.8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Fig. 10.

<백자 ‘福’명 발>, White Porcelain Bowl with the Inscription “pok ” 福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H. 6.3cm, D. 7.8 cm (foot), H. 2.0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Fig. 11.

<백자 ‘福’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pok ” 福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 no. 9·10, Kyŏnggi Province, 1734-1751, Chosŏn, ① H.3.5cm, D. 13.0cm (mouth), H. 1.2cm (heel), ② H.3.6cm, D. 14.0 cm (mouth), D. 6.0cm (foot), H. 1.0cm (heel) ③ H. 5.6cm, D. 20.0cm (mouth), D. 8.4cm (foot), H. 3.2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Fig. 12.

<백자 ‘福’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pok ” 福 Excavated at the Punwŏn-ri kiln site no.1, Kyŏnggi Provience, 1752-1883, Chosŏn, ① H.3.2cm, D. 11.5 cm (mouth), D. 6.4cm (foot), H. 0.8cm (heel) ② H. 3.3cm, D. 12.8cm (mouth), D. 6.3cm (foot), H. 1.0cm (heel)(Photograph by the author)

Table 1.

관요 유적 출토 백자 ‘祭’명 접시 Excavated at the Chosŏn Kiln Site White Porcelain Dishes with the Inscription “je” 祭

Kiln Site Operation Period21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祭’
Iron Brown Cobalt Blue
Haktong-ri22 1610-17
Sangnim-ri23 1618-25, 1628-36
Sŏndong-ri24 1640-48
Songjŏng-dong 1649-54
Shindae-ri 1664-76
Kungpŏng-ri25 c. 1684-1702
Kwanŭm-ri c. 1709-1716 and 1721-1733

Table 2.

궁평리·관 음리·금사리 관요 유적 출토 백자 발·접시 White Porcelain Bowls and Dishes Excavated at the Kungpyŏng-ri, Kwanŭm-ri, and Kŭmsa-ri sites

Table 3.

〈궁평리·관음리·금사리 관요 유적 출토 ‘祭’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 with the Inscription “ je” 祭 Excavated at the Kungpyŏng-ri, Kwanŭm-ri and Kŭmsa-ri sites

Foot notes

Table 4.

관요 유적 출토 ‘壽’·‘福’명 자기 Excavated at the Chosŏn Kiln Sites White Porcelain Dishes with Inscriptions “su” 壽 and “pok” 福

Kiln Site Operation Period Type (Size) Inscription Decorative Technique The Source
Usan-ri, Gwangju-si, Gyeonggi-do 1460s-1480s Flattened Bottle (21.4×18.4cm) Inlay I-Sangki sŏnsaeng kijŭngdop’yŏn charyojip: Kwangju Punwŏn kamat’ŏ sujipp’um, Kyŏnggi Ceramic Museum, p.37.
Toma-ri, Gwangju-si, Gyeonggi-do c. 1505 Cup 壽·福 Cobalt Blue Kwangju-gun Toma-ri paekchayoji palgul chosa pogosŏ: Toma-ri 1ho yoji, National Museum of Korea, pp. 94-95
Usan-ri, Gwangju-si, Gyeonggi-do c. 1542 Dish (6.5cm) Intaglio Kim-Yŏnghun sŏnsaeng kijŭngdop’yŏn charyojip: Koryŏ·Chosŏn sidae tojagi kamat’ŏ sujipp’um, Kyŏnggi Ceramic Museum, p. 96
Pŏnch'ŏn-ri, Gwangju-si, Gyeonggi-do 1552-1558 Bowl and Cup (3.0×6.6cm) Iron Brown Kwangju Pŏnch’ŏn-ri 9 ho Chosŏn paekcha yoji palgul chosa pogosŏ,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p. 51
Songjeong-dong, Gwangju-si, Gyeonggi-do 1649-1654 Dish (1.3×7.0cm) Iron Brown Kwangju Chosŏn paekcha yoji (Sajŏk che 314 ho) 6ch’a palgul chosa pogosŏ, Kyŏnggi Ceramic Museum, p. 268

Table 5.

〈금사리 관요 유적 출토 ‘祭’·‘福’명 접시〉 The White Porcelain Dishes with the Inscription “ je” 祭 Excavated at the Kŭmsa-ri Kiln Site,1734-1751

Table 6.

〈궁평리·관음리·금사리 관요 유적 출토 ‘祭’·‘福’ 명 접시〉 White Porcelain Dishes with the Inscriptions “ je” 祭 and “pok ” 福 Excavated at the Kungpyŏng-ri, Kwanŭm-ri, and Kŭmsa-ri Kiln Sites

Table 7.

관요 유적 출토 백자 ‘祭’·‘壽’·‘福’명 접시 시기별 출토 현황 Excavated at the Chosŏn Kiln Sites White Porcelain Dishes with Inscriptions “je” 祭, “su” 壽, “pok” 福

Inscription Technique Shape of the heel Hight (heel) period
Before the 1560s After the 1560s After the 17th centuty The first quarter of the 18th centuty The second quarter of the 18th centuty After the third quarter of the 18th centuty
Stipple Circle approx. 1.0-1.5cm
Ink Inscription Circle approx. 1.0-1.5cm
Incision Circle approx. 1.0-1.5cm
Iron Brown Circle approx. 0.9-1.3cm
Cobalt Blue Circle approx. 1.0-1.5cm
approx. 1.9-3.4cm
approx. 5.0cm
Cobalt Blue Square approx. 2.2-3.8cm
Cobalt Blue Circle approx. 1.0cm
Incision Circle approx. 1.1cm
Iron Brown Circle approx. 0.4-1.2cm
Square approx. 3.4cm
Cobalt Blue Circle approx. 0.8-1.8cm
approx. 3.2cm
Cobalt Blue Square approx. 1.0-1.8cm
approx. 3.4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