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美人圖를 바라보는 조선 후기의 시선: 《石農畵苑》의 〈采女摘阮圖〉 고찰

The Perspective of the Late Chŏson Period about Japanese Painting of Beauty: Court Lady Playing a String Instrument from the Sŏngnong hwawŏn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3;318():71-102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3 June 30
doi : https://doi.org/10.31065/kjah.318.202306.003
*PhD Student at the Archaeology&Art History in the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김진주*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 과정
Received 2023 April 11; Revised 2023 April 12; Accepted 2023 May 20.

Abstract

〈采女摘阮圖〉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화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인 石農 金光國(1727~1797)이 만든 화첩 《石農畵苑》에 수록되었던 일본 미인도이다. 이 우키요에(浮世繪) 미인도는 그림에 묘사된 미인형이나 복식, 머리 모양 등으로 미루어 우키요에 발전 초기 단계인 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대일무역과 서화 매매를 통해 수장가 김광국의 수중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광국이 수장 또는 감상했던 일본화 가운데 현재 실물이 확인되는 유일한 작례이며 조선시대에 유입된 우키요에의 유일한 현전작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자료이다.본 연구는 조선 지식인에 의해 수집, 감상된 ‘일본 미인도’라는 이 작품의 특수성에 주목하여 이를 바라보는 수장가 김광국의 시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읽어내고자 했다. 김광국은 〈채녀적완도〉를 ‘천하에 이름난 倭人의 기교가 전혀 미치지 못한’ 일본화라고 평가하며 遊女의 자태를 묘사한 이 미인도에 ‘阮을 연주하는 采女’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여기에는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문화적 우월감과, 사녀도를 정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감상태도가 투영되어 있다. 〈채녀적완도〉에 얽혀 있는 이와 같은 김광국의 시선은 곧 일본화와 미인도를 바라보는 당대 지식인 계급의 시선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Trans Abstract

The Court Lady Playing a String Instrument (采女摘阮圖) is the Japanese painting of beauty that Kim Kwangguk (金光國, 1727–1797), a prominent aficionado of painting and calligraphy of the late Chosŏn period, collected and compiled in his album, Sŏngnong hwawŏn (石農畵苑, Album of Paintings Collected by Kim Kwangguk). Based on the facial features, garment, and hair style of the figures, this ukiyo-e (浮世繪) beauty painting is dated to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when the ukiyo-e genre was still in the early stage of its development. It is likely that the painting came into Kim’s possession through the merchants specialized in painting and calligraphy, who were integral to the thriving trade network between Chŏson dynasty and Tokugawa shogunate at the time. The significance of this Court Lady Playing a String Instrument lies in the fact that not only is it the sole surviving Japanese painting from Kim’s collection, but also the single extant example of the ukiyo-e works that circulated in the Chosŏn period.

In light of this uniqueness of the Japanese painting of beauty collected by a Chosŏn literatus, this study seeks to understand the way Kim appreciated the painting as its collector. He appraised it as a Japanese painting that did “not manifest any hint of excellence for which Japanese artists were known in the world.” And he assigned the title “court lady playing a string instrument” to the painting that was in fact a depiction of the postures of courtesans. It was a projection of both his deep-seated sense of cultural superiority over Japan and his passionate emotion toward the painting of beauty. Kim’s complex perspective on the <u>Court Lady Playing a String Instrument like this represents the late Chŏson literati’s perception of the Japanese painting and the painting of beauty.

Ⅰ. 머리말

〈采女摘阮圖〉는 18세기의 저명한 서화 수장가 石農 金光國(1727~1797)이 자신의 소장품으로 만든 화첩인 《石農畵苑》에 수록되었던 우키요에(浮世繪) 미인도이다(Fig. 1). 이 그림은 이동주(1917~1997)에 의해 홍성하(1898~1978) 소장품으로 소개되어 일찍부터 그 존재가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2003년에 이르러서야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1 2015년에는 목록집 『석농화원』의 등장에 따라 기존에 ‘우키요에 미인도’로 지칭되었던 이 작품의 원래 명칭이 ‘채녀적완도’라는 것도 밝혀졌다.

Fig. 1.

作家未詳, 〈采女摘阮圖〉 Unidentified A rtist, Court Lady Playing a String Instrument,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31.0× 45.5cm (illustration), 28.2×21.8cm (inscription), Private Collection (Yu, Hongjun, and T’aeho I, eds. Yuhi sammae: sŏnbi ŭi yesul kwa sŏnbi ch’wimi, p. 91)

근대 이전 한국에 유입된 우키요에의 유일한 현전작으로 생각되는 〈채녀적완도〉의 실물이 공개된 이래 이 일본 미인도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특히 김광국의 수집활동, 조선 후기 한일 교섭, 그리고 미인도 등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이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2 그런데 지금까지 〈채녀적완도〉는 이러한 주제 내에서 여러 작례의 일부로서 단편적으로 언급되는 데 그치고 있다. 이는 〈채녀적완도〉와 마찬가지로 《석농화원》에 포함된 외국그림으로서 동시기에 최초 공개된 동판화 ‘술타니에(Sultanie) 풍경’에 대해 상세한 분석이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3 畵中에 화가의 서명과 작품명이 있어 제작자와 제작 연대를 특정할 수 있었던 ‘술타니에 풍경’과 달리 〈채녀적완도〉는 작품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단서가 극히 적은 점이 연구의 큰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목록집 『석농화원』과 《석농화원》 잔편의 新出을 통해 《석농화원》과 김광국의 수집 활동을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 지금, 〈채녀적완도〉에 대해서도 좀 더 종합적인 고찰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일본 미인도인 〈채녀적완도〉를 日本畵와 美人圖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바라보는 수장가 김광국의 시선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채녀적완도〉가 일본화로서 조선에 유입된 경로를 추정하고 〈채녀적완도〉의 양식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 미인화풍과 제작 시기를 규명할 것이다. 그리고 《석농화원》의 여타 일본화와 미인도 작품 및 제발을 분석함으로써 〈채녀적완도〉에 얽혀 있는 김광국의 시선을 읽어내고자 한다.

Ⅱ. 《石農畵苑》과 〈采女摘阮圖〉의 전래

〈채녀적완도〉는 현재 잔편으로 전하고 있지만 원래는 화첩 《석농화원》의 일부였다. 《석농화원》에는 조선화 외에도 중국, 서양 등 외국으로부터 유입된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화 〈채녀적완도〉 또한 그 가운데 하나였다.

1. 《石農畵苑》의 성첩과 현황

《석농화원》은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화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인 김광국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작품들을 한데 모은 화첩이다. 중인 신분이었던 김광국은 부유하고 명망 있는 의관 가문 출신이라는 배경과 예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서화 수백 점을 수집하고 이를 《석농화원》이라는 이름의 화첩으로 구성하였다.4 《석농화원》은 김광국이 사망한 이후에도 한동안은 원형 그대로 집안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이나 어느샌가 낙질된 상태로 시중에 산일되었다.5 《석농화원》의 일부인 《畵苑別集》이 李王家博物館에 입수된 것이 1909년이므로 이때에는 《석농화원》이 이미 파첩되었음이 확실하다.6 현재까지 《석농화원》의 잔편으로 알려진 작품은 《화원별집》까지 포함하면 대략 151건 223점 가량이다.7 이 가운데 《화원별집》을 제외한 대다수는 전형필(1906~1962)과 홍성하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현전하는 작품만으로도 상당한 규모가 엿보이지만 화첩의 일부만이 전하는 현재 《석농화원》의 전모를 짐작케 하는 것은 목록집 『석농화원』(이하 목록집으로 약칭)의 존재이다. 《석농화원》의 總目과 題評을 망라한 목록집의 등장에 따라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확인되었던 《석농화원》의 전모, 나아가서는 김광국의 수집 활동 전반을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8 이 목록집에 의하면 《석농화원》은 1784년까지 성첩된 소위 原帖 4권을 비롯해 續(1787), 拾遺(1792), 補遺 2권(1795), 別集, 附錄(1796) 등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듯하다. 《석농화원》의 잔편을 목록집과 대조해 보면 전형필 수집본은 대부분 원첩 권3과 습유에서 나온 작품들이며 홍성하 수집본은 원첩 권4와 속집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화원별집》이 《석농화원》의 별집이라는 점도 명확해졌다.

〈채녀적완도〉는 “洪性夏 先生 소장의 《石農畵帖》 殘頁 중에 베니스파의 풍경 판화 한 장이 일본의 우끼요에 한 장과 더불어 수록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는 이동주의 언급에 따라 홍성하 수집본임이 일찍이 알려져 있었다.9 이후 오랫동안 ‘우키요에 미인도’로 지칭되어 온 이 작품은 목록집의 출현으로 ‘采女摘阮圖’라는 원래의 제목을 찾게 되었다. 또한 홍성하가 소장하고 있을 당시에도 화첩에 같이 수록되어 있던 ‘베니스파 풍경 판화’와 〈채녀적완도〉가 애초에 《석농화원》의 원첩 권4에 앞뒤 순서로 첩부되어 있었던 것도 밝혀졌다.

2. 〈采女摘阮圖〉의 조선 유입

일본화인 〈채녀적완도〉는 어떤 경로를 통해 조선에 유입되어 《석농화원》에 수록될 수 있었을까. 당시 조선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국교를 체결한 관계였고 이들 사이에는 외교 사절과 무역상의 왕래에 따른 활발한 물자 이동이 있었다. 외교 사절은 조선에서 에도막부(江戶幕府)로 파견하는 조선통신사와 쓰시마번(對馬島藩)으로 파견하는 問慰行, 그리고 쓰시마에서 조선으로 파견하는 差倭에 의해 이루어졌고, 무역은 年例八送使에 의한 공무역과 민간 상단에 의한 사무역, 그리고 허가받지 않은 밀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공식적인 외교 사절인 통신사와 문위행, 차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서와 예물을 교환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그 예물 또한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은 당연하다. 화적과 화사를 요청한 에도막부의 요구에 응해 조선에서는 왕실 수장의 서화와 도화서 화원을 보냈으며, 에도막부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회례로써 가노파(狩野派)나 스미요시파(住吉派) 등 御用畵師가 그린 金屛風을 보내왔다. 이 병풍들은 모두 왕실로 유입되었고 궁정 내에서 실제로 사용되었으며 도화서 화원에 의한 이모본이 제작되기도 했다.10 그러나 금병풍들은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궁정 내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민간에는 그 존재 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11 이는 왕실로 들어간 여타 일본 화적들, 요컨대 彩畵扇 등도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김광국이 수집한 〈채녀적완도〉는 이러한 경로로 유입된 일본화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애초에 당시로서는 서민 취향의 값싼 대중매체에 불과했던 우키요에를 에도막부가 구태여 예물로 조선에 보냈을 리도 없다.

그런데 사절단은 공식적인 예물 외에도 사적인 용도의 개인 예물을 지참했고 사행원들은 상대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자리에서 이를 주고받았다. 에도시대의 조선화 열기는 익히 알려진 바인데 그와는 반대로 통신사행을 떠난 조선인들이 일본화에 관심을 가졌던 양상 역시 확인된다.12 또한 1719년 己亥使行의 일원이었던 姜栢(1690~1777)이 나고야(名古屋)에서 서화를 구매하고자 했다는 기록 등은 사행원들이 개인적인 교류뿐만 아니라 민간으로부터의 구입을 통해서도 일본화를 입수했음을 시사한다. 쓰시마에서 에도에 이르는 사행길에는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나고야 등 대도시가 즐비했고 당시 일본의 도시에서는 서화 매매가 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행원들이 이들 도시에서 서화류를 구입했을 가능성도 있다.13 다만 〈채녀적완도〉가 이러한 경로로 조선에 유입되었다면 김광국이 이처럼 특기할 만한 사항을 제발문 등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한편 조선 후기의 조일무역은 동래부 倭館과 쓰시마라는 특정한 지역 내에서 이루어졌으며 공무역은 연례팔송사로 제한되었다. 공무역을 통해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수입한 품목은 銅鏡이나 도자기와 같은 일부 공예품을 제외하면 대개는 약재나 금속, 염료 등이었고 보다 다양한 물품들은 공무역이 아닌 사무역이나 밀무역을 통해 유입되었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동래, 기장, 김해 등지에서 일본 양산, 접선, 벼루, 풍경, 화로, 분재, 종이, 비단 등 다양한 물품을 일상적으로 사용해 조선 거리에서 일본의 문물과 습속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던 듯하다.14 이렇게 들어온 일본 문물은 왜관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는 물론 함경도 일대까지 파급되었으므로 수도 한양에도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5

김광국이 주로 구입의 방식으로 그림을 수집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16 〈채녀적완도〉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다만 전술했듯이 특정 소장자에게서 그림의 내력이 명확한 상태로 구입했다면 이와 관련된 진술이 김광국 자신이나 혹은 그 주변에서라도 나올 법한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림의 원 소장자가 아닌 제3자에 의해 시중에 나온 것을 김광국이 구입했음을 시사한다고 생각된다. 당시 한양에서는 서화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왜관을 통해 유입된 倭物은 경상도에서 함경도까지 확산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일본화 〈채녀적완도〉는 사 무역 또는 밀무역을 통해 일본에서 조선의 시정으로 흘러들어온 후 매매의 방식으로 수장가 김광국에게 도달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사료된다.

Ⅲ. 〈采女摘阮圖〉의 양식과 제작 시기

〈채녀적완도〉는 종이 바탕에 진채로 그린 미인도이다(Fig. 1). 약간의 곰팡이 흔적과 일부 안료 박락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열화나 퇴색, 충식, 파열 등이 없어 화면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화면에는 두 사람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좌측의 여인은 옆으로 몸을 틀어 앉아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우측의 여인은 무릎에 얹은 책을 고개 숙여 읽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를 가지런히 묶어 올렸으며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배경 덕분에 그 고운 자태가 더욱 돋보인다. 좌측 여인이 쥐고 있는 악기는 가죽이 씌워진 각진 동체부(胴)와 긴 목(棹)에 걸린 세 줄의 弦, 은행잎 형태의 발목(撥) 등으로 보아 일본의 전통 현악기인 샤미센(三味線)인 것을 알 수 있다. 화면 좌측 하단에는 대나무 무늬로 장식된 어떤 기물이 있는데 담뱃대가 걸쳐져 있는 점이나 손잡이가 달린 바구니 형태 등으로 볼 때 끽연에 필요한 도구 일습을 수납해두는 다바코본(煙草盆)이라 생각된다.17 다바코본 옆에 그려진 종이뭉치는 우측 여인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線裝 형식의 책일 것이다. 여인이 샤미센이나 고토(琴)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책이나 서간 등의 글을 읽는 모습, 혹은 담배를 피거나 단장을 하는 모습 등은 우키요에 미인도의 전형적인 도상이다. 이러한 도상이나 화풍, 판화가 아닌 육필화인 점 등으로 미루어 〈채녀적완도〉는 일본의 근세 미인풍속도, 특히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 미인형

판화 기법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18세기 중반 이전의 초기 우키요에 단계에서 육필미인도를 주로 다루었던 주요 화파로는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18~1694)를 위시한 히시카와파와 가이게츠도 안도(懷月堂安度, 18세기 초 활동)를 중심으로 한 가이게츠도 공방, 미야가와 조슌(宮川長春, 1682~1753) 일문, 그리고 교토에서 활약했던 니시카와 스케노부(西川祐信, 1671~1750) 일파 등이 특기할 만하다.18 〈채녀적완도〉 속 미인들의 생김새를 살펴보면 풍만한 체구와 둥글넓적한 얼굴형, 넓은 미간 등이 가이게츠도파의 미인형과 상통한다(Fig. 2, Fig. 3). 반면 살집이 실팍한 가이게츠도 미인에 비해서는 부피감이 훨씬 적은 체구나 인물들의 다양한 포즈, 비수가 적은 부드러운 필선과 섬세한 설채 등은 가이게츠도파보다는 미야가와파나 니시카 와파의 미인도를 연상시킨다(Fig. 4, Fig. 5). 그런데 아래턱이 덜 발달해 빈약한 하관의 모양새나 미미한 콧방울의 묘사는 니시카와파의 미인형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선묘와 설채 역시 미야가와파나 니시카와파의 미인도와 비교해 정치함이 덜하고 다소 형식화된 양상을 보인다(Fig. 6, Fig. 7).

Fig. 2.

懷月堂安度, 〈風前美人圖〉 Kaigetsudō A ndo, Beauty in front of Wind,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94.8×42.7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3.

長陽堂安知, 〈遊女立姿圖〉 Chōyōdō A nchi, Standing Courtesan,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94.0×39.6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4.

宮川長春, 〈遊女聞香圖〉 Miyagawa Chōshūn, Courtesan Burning Incense,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Silk, 86.4×36.6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5.

西川祐信, 〈美人に子猫圖〉 Nishikawa Sukenobu, Beauty with a Kitten,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Silk, 33.4×52.8cm, The Metropolitan Museum (The Metropolitan Museum, https://www.metmuseum.org)

Fig. 6.

宮川長龜, 〈遊女閑談圖〉 Miyagawa Chōki, Courtesans Having a Chat,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33.4×55.3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7.

西川祐信, 〈三美人圖〉 Nishikawa Sukenobu, Three Beauties,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36.2×53.3cm, The Metropolitan Museum (The Metropolitan Museum, https://www.metmuseum.org)

〈채녀적완도〉의 인물형에서 보이는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은 이 그림이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동시에 이 시대의 유명 화가에 의해 제작된 優品은 아닐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채녀적완도〉가 가이게츠도파나 미야가와파, 니시카와파와 같은 유명 화파의 미인화풍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화풍이 각 유파의 정체성이 반영된 유파 고유의 양식인 동시에 당대 육필 우키요에 미인도를 관통하는 시대 양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7세기 초의 이른바 近世初期風俗畵에서 이어지는 우키요에는 모로노부 시대까지 여전히 遊樂風俗圖가 중심이었다(Fig. 8). 우키요에의 양대 장르인 미인화와 야쿠샤에(役者繪)의 분화는 모로노부 사후 가이게츠도파와 도리이파(鳥居派)에 의해 이루어졌다.19 따라서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는 실질적으로 가이게츠도 안도와 미야가와 조슌의 등장 이후에 발전했다고 할 수 있으며 큰 인기를 끌었던 이들의 화풍은 곧 화단 전반에 공유되었다. 이 무렵에 활동한 많은 群小 우키요에 화가들이 남긴 육필미인도가 화가마다의 개성과 기량의 차이는 있으나 유사한 미인 화풍을 보이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Fig. 9, Fig. 10). 〈채녀적완도〉의 미인형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Fig. 8.

菱川師宣, 〈歌舞伎圖屛風〉 Hishikawa Moronobu, Scenes in and around the Kabuki Theater, Late 17th century, Edo Period, Pair of Six-panel Folding Screen, Color and Gold Leaf on Paper, 170.0×397.6cm (each),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9.

山崎女龍, 〈文を讀む美人圖〉 Yamazaki Joryū, Beauty Reading a Letter, 1720 s, Edo Period, Color on Paper, 75.5× 31.0 cm, The British Museum (The British Museum, https://www.britishmuseum.org)

Fig. 10.

川又常正, 〈浴室脇の男女圖〉 K awamata Tsunemasa, Couple Beside the Bathroom,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41.0×56.5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이러한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의 화풍은 다색판화(多色摺)의 등장에 따라 판본 우키요에의 제작이 확산되는 1750년대 무렵을 기점으로 일변한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1724~1770)의 미인형은 지극히 섬약하고 몽환적이며, 이는 초기 우키요에 시대의 약간 투박하기는 해도 경쾌하고 풍윤한 미인화풍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Fig. 11). 따라서 안도와 조슌에 의해 확립된 미인화풍을 따르고 있는 〈채녀적완도〉는 우키요에 미인도에 그러한 전환점이 도래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Fig. 11.

鈴木春信, 〈かぎやお仙〉 Suzuki Harunobu, Osen of the Kagiya Teahouse, 1750s-60s, Edo Period, Multi-coloured Woodblock Print, 26.8×19.6 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2. 복식

화면 속 여인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옷은 소매(袖)의 폭이 짧고 소맷부리(袖口)가 소매의 절반가량에 불과한 고소데(小袖)이다. 두 여인의 앉은 자세로 인해 고소데의 전체적인 형태를 파악하기는 곤란하지만 오비(帶)의 길이가 허리를 한 바퀴 감고도 남을 정도로 긴 것은 알 수 있으며 복부를 완전히 덮은 것으로 보아 폭 역시 15cm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오비는 17세기 초까지 폭 1-2寸 가량의 좁은 띠에 불과했으며 이처럼 폭과 길이가 모두 늘어나 장식성이 증대되기 시작하는 것은 겐로쿠(元祿, 1688~1704) 연간 전후이다.20

고소데의 문양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댓잎과 매화 등 자잘한 초화문이 회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염직에서 유젠조메(友禪染)가 유행한 시기의 특징이다(Fig. 12).21 유젠조메의 유행은 사치스러운 자수 기법이 금지된 덴나(天和) 3년(1683) 이후부터 사회 전반에 검약을 강조한 간세이(寬政, 1789~1801) 연간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에서 이와 같은 유젠조메는 흔히 발견된다(Fig. 4, Fig. 6, Fig. 9). 모로노부나 안도의 미인도에는 여전히 덴나 연간 이전에 유행한 간분고소데(寬文小袖)의 여운이 일부 잔존하지만 조슌 이후의 미인도에 그려진 고소데는 대개 유젠조메의 양식이다.

Fig. 12.

<小袖染分紗綾地雪輪山吹模樣> Kosode with Snow Circle Pattern and Japanese Kerria Design, 18th century, Edo Period, Yūzen Dyeing and Embroidered on Plain We ave Damask, H. 152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한편 그림 속의 두 고소데 모두 붉은 바탕에 흰 점무늬가 들어가 있는데 이는 가노코시보리(鹿の子絞り)에 의한 문양일 것이다. 가노코시보리는 바탕천에 실을 감아 묶고 염색하여 작은 흰색 반점을 만들어내는 기법으로 에도시대 내내 애호되었다.22 가노코시보리 역시 유젠조메와 마찬가지로 동시기 우키요에 미인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Fig. 2, Fig. 5, Fig. 7).

3. 머리 모양과 머리장식

〈채녀적완도〉의 여인들은 가지런히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는 근세 일본에서 정립된 니혼가미(日本髮)의 일종이다.23 화면 속 두 사람과 같이 뒷머리인 다보(髱)를 목덜미 뒤로 길게 빼서 늘어뜨린 것을 가모메타보(鷗髱)라 하는데 이는 겐로쿠 무렵에 등장하여 안에이(安永, 1772~1781) 연간 직전까지 유행하였다. 일종의 상투인 마게(髷)의 형태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데 우측 여인은 효고마게(兵庫髷), 좌측 여인은 시마다마게(島田髷)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Fig. 13, Fig. 14). 두 마게 모두 겐로쿠 연간 전후에 등장하여 메이와(明和, 1764~1772) 연간까지 유행했던 양식으로 후술할 머리장식들과 함께 같은 시기의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에서 흔히 발견된다(Fig. 2, Fig. 5).

Fig. 13.

<兵庫髷> Hyōgomage Hairstyle (Kawamura, Chōkan. Nihon no kamigata, p. 68)

Fig. 14.

<島田髷> Shimadamage Hairstyle (Kawamura, Chōkan. Nihon no kamigata, p. 83)

근세에 이르러 머리를 묶는 방법이 다양해짐에 따라 머리장식(髮飾り) 역시 극도로 발달했다. 〈채녀적완도〉의 여인들은 빗인 구시(櫛)와 마게를 틀어 올리는 비녀인 고가이(笄)를 공통적으로 사용했는데 특히 최고급 사치품으로 당시에 선망되었던 벳코구시(鱉甲櫛)가 눈에 띈다. 玳瑁甲으로 만든 벳코구시는 덴나 연간(1681~1684)부터 크게 각광받기 시작해 쇼토쿠(正德, 1711~1716) 연간에 가장 유행하였다(Fig. 15).24 자세히 살펴보면 화면 우측 여인은 구시를 두 개나 꽂고 있는데 이러한 니마이구시(二枚櫛)는 교호(享保, 1716~1736) 연간에 교토의 유녀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여 에도까지 확산된 것이다(Fig. 7).25

Fig. 15.

〈鱉甲櫛〉 Back Comb Made of Tortoiseshell, Edo Period, W. 15.5cm, Japan Jewelry Craft School (Tsuyuki, Hiroshi, ed. Nihon sōshingushi, p. 84)

한편 화면 좌측의 여인은 간자시(簪)와 모토유이(元結)까지 패용하고 있어 머리장식이 더욱 화려하다. 마게나 모토도리(髻)를 묶는 데 사용하는 머리끈인 모토유이는 고대부터 존재했는데 원래는 양 끝단이 평평한 히라모토유이(平元結)가 기본형이며, 그림에 그려진 것과 같이 끝단이 위로 반전된 하네모토유이(反元結)는 엔포(延寶, 1673~1681) 연간 이후에 등장했다(Fig. 7).26 장식용 비녀인 간자시는 기능이 고가이와 거의 같았기 때문에 머리장식 중 가장 늦게 발전했는데,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다리가 두 가닥으로 나뉘고 머리 끝단에 귀이개가 부착됨으로써 고가이와 완전히 구별되는 것은 쇼토쿠-교호 연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27 그림 속 간자시는 머리 부분에 평평하고 얇은 판형의 장식 하나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히라우치간자시(平打ち簪)인 듯하다(Fig. 3, Fig. 4, Fig. 6).

4. 제작 시기

앞서 그림 속 인물들의 안모 표현과 복식, 머리 모양과 머리장식 등을 살펴봄으로써 〈채녀적완도〉가 초기 우키요에 시대에 제작된 육필미인도이며 안도와 조슌, 스케노부 등장 이후의 미인화풍을 따르고 있고 등장인물의 복식과 머리 모양 및 머리장식 등도 같은 시대의 양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채녀적완도〉에 보이는 초기 우키요에 시대의 미인화풍은 모로노부가 사망하는 겐로쿠 연간부터 하루노부 미인이 등장하는 메이와 연간 이전까지 유행했다. 그림 속 여인들이 두르고 있는 폭이 넓고 길이가 긴 오비 또한 겐로쿠 연간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했고, 유젠조메 고소데는 자수 기법이 금지된 덴나 연간 이후부터 대대적인 검약령이 내려지는 간세이 연간 이전까지 주로 제작됐다. 여인들이 하고 있는 효고마게와 시마다마게, 그리고 가모메타보는 겐로쿠 연간 전후에 등장하여 메이와 연간까지 유행했던 머리 모양이다. 벳코구시와 니마이구시, 하네모토유이, 고가이, 간자시 등의 머리장식 역시 약간의 선후 관계는 있으나 모두 쇼토쿠 연간 전후에 등장하고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들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채녀적완도〉의 제작 시기는 겐로쿠부터 메이와까지의 1700년대 전반기이며 그 하한 연대는 메이와 연간인 1760년대 무렵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는 〈채녀적완도〉가 수록된 《석농화원》 원첩이 1784년에 성첩된 것과도 시기적으로 부합한다.

Ⅳ. 〈采女摘阮圖〉를 바라보는 김광국의 시선

일본에서 제작되어 조선으로 전해진 우키요에 〈채녀적완도〉는 일본화이자 미인도였다. 《석농화원》의 그림과 제발을 살펴보면 이 작품을 바라보는 김광국의 시선에도 일본화와 미인도라는 두 가지 관점이 교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日本畵 〈采女摘阮圖〉

현재 〈채녀적완도〉에는 《석농화원》 성첩 당시의 畵評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Fig. 1). 문장 끝에 ‘元賓’ 朱文方印이 찍혀 있고 좌측 상단에는 ‘姜彛天書’라는 제첨이 붙어 있으며 목록집에도 “金光國題 姜彛天書”라 적혀 있어 이것이 김광국이 짓고 姜彛天(1768~1801)이 쓴 제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김광국은 “왜인의 기교는 천하에 이름이 났는데 서화에 이르러서는 재주가 전혀 미치지 못하니, 본래의 재주가 통하지 않아 그런 것인가 좋은 작품이 있는데 아직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라는 다소 가혹한 평을 남기고 있다.28

현전하는 작품은 〈채녀적완도〉가 유일하지만 목록집을 살펴보면 《석농화원》에는 또 한 점의 일본화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속집에 수록된 〈風雨驅牛圖〉가 그것이다.

일본 대마주 희헌이 그린 〈풍우구우도〉는 내 수집품 속의 물건이었다. …… 일찍이 《석농화원》

원첩에 있던 일본 그림에 대해 내가 이러저러한 평을 남겼다. 지금 이 첩을 보건대 필력이 굳세고 힘차며 배치가 고상하고 깨끗하여 거의 중국의 고수와 대등하니, 기이하고 기이하다. 어떤 물건이든 널리 보지 않고서 성급하게 비평을 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짓이니, 어찌 그림만 그렇겠는가. 드디어 화폭 끝에 써서 입조심의 경계로 삼는다.29

對馬州, 즉 쓰시마의 화가 喜憲이 그렸다는 이 그림은 ‘風雨驅牛’라는 제목으로 보아 비바람을 헤치고 소를 모는 인물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었던 듯하다. 제발에서 화면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묘사하지 않았고 ‘희헌’이라는 화가가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의 장면이나 화풍을 구체적으로 추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필력이 굳세고 힘차며 배치가 고상하고 깨끗하여 거의 중국의 고수와 대등’하다고 평한 것으로 보아 김광국이 상당히 만족했음은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어떤 물건이든 널리 보지 않고서 성급하게 비평을 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짓’이니 ‘입조심의 경계로 삼는다’며 자신이 ‘원첩에 있던 일본 그림’, 즉 〈채녀적완도〉에 남긴 평이 지나쳤다고 반성하기까지 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 실제로 〈채녀적완도〉는 이름난 화가의 뛰어난 작품이라 하기는 힘든 그림이다. 따라서 ‘좋은 작품이 있는데 아직 보지 못해서’라는 김광국의 말이 ‘모두 망령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름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지방화가가 그린 〈풍우구우도〉가 얼마나 훌륭한 그림이었을지 역시 미지수이다. ‘어떤 물건이든 널리 보지 않고서 성급하게 비평을 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짓’이라고 스스로 말했지만 김광국은 일본화를 많이 보지 못했고 일본화에 대한 식견도 그다지 높지 못했을 것이다.

목록집에 근거하는 한 《석농화원》에 수록된 일본화는 단 두 점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다른 중국화나 조선화의 경우와는 달리 그림 자체에 대한 상세한 제발을 남기지 않았다. 〈채녀적완도〉에 대한 혹독한 평가도 일정 부분은 일본화에 대한 김광국의 과문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광국은 일본화에 대해 미묘하게 경시하는 듯한 냉담한 태도로 일관한다. 목록집에 의하면 琉球國, 즉 류큐의 그림에 대한 김광국의 화평이 〈풍우구우도〉와 같은 화첩 속집에 수록되어 있었던 듯하다.30 김광국은 이 류큐의 〈花鳥圖〉에 대해 “그 필법이 평범했지만 일본 그림보다는 매우 높았다(其筆法雖平常 勝倭畵則遠矣).”고 하며 또다시 일본화에 대한 인색한 평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석농화원》의 성첩 체제에서도 드러난다. 목록집을 살펴보면 김광국은 화첩을 구성할 때 명 또는 그 이전 시대의 중국 그림을 가장 앞에 두고 그 다음에 조선 그림을 두었으며 같은 중국임에도 불구하고 청대 회화는 조선의 뒤에 두었다. 명칭 또한 명은 ‘皇明’으로 높여 썼지만 청은 처음에 ‘滿洲’로 표기했다가 ‘中國’으로 고쳐 썼다. 이는 청을 명과는 다른 만주족 오랑캐로 보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화는 청대 회화의 다음에 수록되어 있어 김광국이 일본을 소위 만주족보다도 아래 혹은 차순위로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1

일본화와 일본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김광국이 갖고 있던 문인 의식, 나아가서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했던 小中華主義에서 기인한다고 생각된다.32 일본화에 대한 조선의 부정적인 인식은 일본에서 보낸 貼金屛風이 해괴하다고 보고한 광해군일기의 기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17세기에 이미 존재했다.33 임진왜란으로 인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청 건국 이후 확산된 소중화주의는 조선이 일본을 그저 한낱 오랑캐로 인식하게 했던 것이다. 직접 일본에 가 에도막부의 번영한 대도시와 사치스러운 생활상을 목도한 통신사행원들 조차도 문화적 우월감을 버리지 못했다.

일본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이러한 인식도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마침내 서서히 변화한다. 통신사행원들이 전하는 사행록의 내용과 무역을 통해 유입된 물품들로 일본의 발전상이 충분히 설명되었고 북학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34 19세기 최고의 감식안인 金正喜(1786~1856)가 마쓰무라 게이분(松村景文, 1779~1843)과 다니 분초(谷文晁, 1763~1841)의 그림을 높이 평가한 것은 일본화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시각이 변화하고 있음을 방증한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한 조선의 인식 저변에는 華夷思想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는 19세기 후반에 조선이 개항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채녀적완도〉와 〈풍우구우도〉에 대한 김광국의 상반된 평가는 그때까지 견지하고 있던 소중화주의와 직접 목도한 일본의 발전상이 충돌하면서 빚어낸 조선 후기 지식인의 모순된 인지와 양가감정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2. 美人圖 〈采女摘阮圖〉

김광국은 〈채녀적완도〉의 제발문에서 미인도로서의 이 작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화로서의 이 작품의 畵格에 대해 논했을 뿐이다. 그러나 목록집을 통해 드러난 이 작품의 제목 ‘채녀적완도’는 미인도로서의 〈채녀적완도〉를 바라보는 김광국의 시선을 엿보게 한다.

‘采女摘阮’은 ‘채녀가 완을 뜯는다’는 의미이므로 화면 좌측의 여성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데서 유래한 제목일 것이다. 채녀는 본래 중국 한나라 때 등장한 女官의 직명이다. 이 관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주변국들로 확산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우네메(采女)’라는 명칭으로 헤이안시대 초기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36 물론 김광국이 이러한 제도적 문제를 상세히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므로 여기에서 채녀는 단순히 궁정여인을 지칭할 것이다. 다시 말해 ‘채녀적완’이라는 제목은 김광국이 이 그림을 일종의 仕女圖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채녀적완도〉에 그려진 여인들은 실제로는 채녀, 즉 궁정여인이 아니다. 우키요에 미인도의 주인공은 대개가 遊女이기 때문이다. 우키요에 미인도의 모태가 되는 간분미인도(寬文美人圖)부터가 간에이풍속화(寬永風俗畵)에서 유곽과 유녀의 모습만을 강조하여 독립시킨 것이고, 우키요에의 양대 장르인 미인화와 야쿠샤에는 각각 요시와라(吉原) 유곽과 가부키 극장(芝居)을 소재로 하여 성립했다.37 특히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는 거의 모두라 해도 좋을 만큼 유녀를 대상으로 하며, 또한 악기를 연주하거나 글을 읽는 모습 역시 우키요에 미인도에서 유녀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도상이었다.38 따라서 〈채녀적완도〉에 그려진 두 여인들은 채녀가 아니라 유녀로 간주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곽의 유녀를 그린 이 그림을 김광국은 왜 궁정여인을 그린 그림인 채녀도라 지칭했을까. 이를 추정하는 데 단서가 되는 것은 《석농화원》에 수록된 또 하나의 미인도이다. 목록집에 따르자면 《석농화원》에는 〈채녀적완도〉와 申漢枰(1726?~1809 이후)이 그린 〈挾瑟采女圖〉, 단 두 점의 미인도만이 포함되어 있었던 듯하다. 〈협슬채녀도〉는 커다란 괴석이 있는 정원의 탁자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을 그린 것으로 여인은 글을 쓰려는 참이었는지 오른손에 붓을 쥐고 있는데 무릎에는 비파가 올려져 있다(Fig. 16). ‘비파를 끼고 있는 채녀’라는 제목은 〈채녀적완도〉와 마찬가지로 그림 속 여인의 이러한 모습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괴석과 난간이 있는 정원, 기물이 놓인 탁자, 여인이 착용하고 있는 의복과 장신구 등에 중국풍이 확연하다.

Fig. 16.

申漢枰, 〈挾瑟采女圖〉 Sin Hanp’yŏng, Court Lady Holding a String Instrument, Late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Paper, 28.5×21.0 cm (illustration), 28.5×21.0 cm (inscription), Sun Moon University Museum (ⓒSun Moon University Museum)

이러한 중국풍 사녀도는 중국에서 유입된 사녀도를 참고로 하여 조선 전기부터 다수 제작, 감상되었던 듯하다. 1481년 정월에 成宗(재위 1469~1494)이 〈綵女圖〉를 歲畵로 하사했다는 成俔(1439~1504)의 기록이나 李上佐의 아들 李興孝(1537~1593)와 손자 李楨(1578~1607)이 彩女를 잘 그렸다는 朴瀰(1592~1645)의 증언 등은 이를 뒷받침한다.39 특히 조선 중기 이래로는 仇英(1494~1552)풍 사녀도가 대량으로 유입되어 중국식 여성 표현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고 모방되었다. 구영의 사녀화풍이 조선에 확산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蘇州片과 소설 삽도 등이었는데 〈협슬채녀도〉 역시 명대 〈千秋絶艶圖卷〉의 羅惜惜과 도상이 완전히 동일하여 그러한 작품을 모본으로 삼아 구영풍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40

현전하는 조선시대의 중국풍 단독 사녀도인 尹斗緖(1668~1715)의 〈美人讀書圖〉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사인물도〉(소장품번호 덕수1890)에 포함된 9점의 사녀도 등을 살펴보면 이들 모두 난간이 둘러진 정원에서 괴석을 배경으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책을 읽는, 혹은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글을 쓰는 여인을 소재로 삼고 있음이 확인된다(Fig. 17, Fig. 18, Fig. 19). 이는 다시 말해 당시 조선에서 이것이 중국풍 사녀도의 전형적인 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김광국이 에도 시정의 유녀를 그린 우키요에에 ‘채녀적완도’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림 속 여인들은 ‘阮을 뜯는 采女’가 아니라 ‘三味線을 연주하는 遊女’였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김광국에게 악기를 연주하고 책을 읽는 고풍스러운 異國의 미인들은 곧 사녀의 표상일 뿐이었다.

Fig. 17.

尹斗緖, 〈美人讀書圖〉 Yun Tusŏ, Beauty Reading a Book, Late 17th - Early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61.0× 40.7cm, Private Collection (Ch ’a, Miae. Kongjae Yun tusŏ ilga ŭi hoehwa: saeroun sidae chŏngsin ŭl hwap’ok e tamda, p. 448)

Fig. 18.

作家未詳, 〈故事人物圖〉 Unidentified A rtist, Narrative Figure Painting, 17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approx. 20.6×21.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Fig. 19.

作家未詳, 〈故事人物圖〉 Unidentified A rtist, Narrative Figure Painting, 17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approx. 20.6×21.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이처럼 김광국이 〈채녀적완도〉를 미인도로서 감상하고 있었음은 분명한데 〈협슬채녀도〉에 부친 제발은 미인도에 대한 김광국의 감상태도를 좀 더 명료하게 보여 준다.

명중 신한평 군은 인물, 산수, 화조, 초충을 그려 자못 그 깊은 뜻을 얻었는데 초상은 더욱 잘하였다. 내가 일찍이 미녀도를 그려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풍만한 살결과 아리따운 자태가 기이할 정도로 핍진하여 오래도록 펼쳐놓을 수가 없었다. 오래 보았다가는 밤잠을 설칠까 두렵기 때문이다.41

김광국은 신한평에게 미인도를 직접 주문했는데 그 그림이 너무도 생생하여 밤잠을 설칠까 두려워 차마 오래도록 펼쳐놓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평했다. 그런데 미인도에 대한 조선시대의 제발문 가운데 이와 유사한 내용을 가진 것이 있어 주목된다.

…… 내가 이징으로 하여금 작은 첩에 다양한 것을 그리게 하였는데 마지막의 아이 씻기는 두 여인을 두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정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곧 풍만한 살 결과 아리따운 웃음으로 그 요염한 자태를 뽐낸다. 아아, 기이할 정도로 핍진하니 역시 묘품이다. 오래도록 펼쳐놓고 싶지가 않으니 오래 보았다가는 밤잠을 설칠까 두렵기 때문이다.42

이것은 許筠(1569~1618)이 李澄(1581~?)의 화첩 뒤에 붙인 제발이다. 허균은 이징에게 화첩을 주문했는데 그 또한 이 화첩의 마지막에 실린 ‘아이를 씻기는 두 여인’ 그림이 妙品이었기 때문에 밤잠을 설칠까 두려워 오래 펼쳐 놓고 싶지가 않다고 했다. 1세기 이상의 시간적 차이가 있는 김광국과 허균의 제발문은 몇 글자가 다른 것을 제외하면 내용이 거의 동일한 것이다. 이는 이러한 표현이 조선시대에 뛰어난 미인도를 상찬하는 상투적인 표현이었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미인도에 대한 당대 지식인 계층의 감상태도가 투영되어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1441년 世宗(재위 1419~1450)이 ‘明皇誡鑑’에 대한 교시를 내린 이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미인도에 대해 기본적으로 聲色鑑戒의 태도를 고수해왔다. 그러나 唐寅(1470~1523), 구영 등의 새로운 명대 미인화풍이 유입되고 양란 이후 사회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태도도 변화한다. 미인도의 제작과 감상은 더욱 일반화되었고 감상자들은 그림 속 여인의 아름다움과 그에 대한 정념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였다. 이흥효의 미인도 속 얇은 여름 옷을 걸친 여인의 섬섬옥수에 주목한 李恒福(1556~1618)의 찬문이나 가벼운 허리로 춤추는 그림 속 미인의 교태로운 보조개에 절로 정이 넘친다고 읊은 任相元(1638~1697)의 시문 등은 이를 잘 보여준다.43 미인도가 핍진하여 밤잠을 설칠까 두렵다는 허균과 김광국의 서술 역시 미인도에 대한 조선 후기 지식인 계급의 이처럼 변화한 시각과 감상태도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19세기가 되면 신한평의 아들 申潤福(1758~1814?)이 만들어낸 미인도가 조선 미인화의 하나의 전형이 되어 확산되는 한편 재덕을 겸비한 미인상이 문인들의 이상형으로 부상하여 미인독서도와 같은 유형으로 소비되기 시작한다(Fig. 20).44 이는 당인, 구영풍의 사녀도를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본 17~18세기의 미인도 향유와는 명확히 구별되는 새로운 현상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책을 읽는 이국의 여인을 사녀로 인식하고 이를 오래 감상하면 밤잠을 설칠까 우려하는 김광국의 태도는 미인도를 바라보는 18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의 시선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Fig. 20.

李在寬, 〈美人寫書圖〉 I Chaeg wan, Beauty Writing a Letter, Early 19th century, Chosŏn, Color on Paper, approx. 139.4×66.7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Ⅴ. 맺음말

〈채녀적완도〉는 김광국이 성첩한 《석농화원》에 수록되었던 일본 미인도이다. 18세기 중반 대일무역과 서화매매를 통해 김광국의 수장품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일본화는 김광국 사후 19세기 중반 무렵에 《석농화원》이 팔려나가면서 원래의 화첩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에는 《석농화원》 잔편의 주요 소장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홍성하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으며 2000년대 초 전시를 통해 실물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2010년대에 목록집 『석농화원』이 등장함에 따라 성첩 당시에는 ‘채녀적완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도 밝혀졌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에 유입된 우키요에로서는 유일한 현전작으로 생각되는데 판화가 아닌 육필화인 점이나 그 화풍 등으로 보아 우키요에 발전 초기 단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소 모호한 화풍과 형식화된 표현 등은 이 그림이 유명 화가의 작품은 아닐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가이게츠도 안도 이후부터 스즈키 하루노부 이전까지의 시대 양식을 따른 미인형은 이것이 초기 우키요에 시대에 제작된 미인도임을 보여 준다. 그림 속 여인들이 착용하고 있는 유젠조메의 고소데와 다양한 머리장식, 그리고 효고마게 및 시마다마게의 머리 모양 또한 같은 시대의 양식을 공유한다. 따라서 〈채녀적완도〉는 겐로쿠 연간부터 메이와 연간까지인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일본 미인도인 〈채녀적완도〉를 바라보는 김광국의 시선에도 일본화와 미인도라는 두 가지 관점이 교차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목록집에 수록된 일본화와 관련된 제발문이나 화첩의 성첩 체제를 통해 김광국이 일본화에 대한 식견이 그다지 높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일본화에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광국의 이러한 태도는 소중화주의에 입각해 한낱 오랑캐로 치부해 온 일본의 발전과 번영을 정면으로 마주한 조선 후기 지식인의 일본에 대한 모순된 인지와 양가감정을 대변한다. 한편 《석농화원》에 수록되어 있던 또 한 점의 미인도인 〈협슬채녀도〉의 존재는 김광국이 악기를 연주하고 책을 읽는 고풍스러운 이국의 미인을 사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사녀도 때문에 밤잠을 설칠까 두려워한 김광국의 태도에는 미인도를 정념의 대상으로 바라본 조선 후기 지식인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다.

18세기 전반 일본에서 제작된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인 〈채녀적완도〉는 조선시대에 유입된 일본화로서 현전하는 희소한 작례이며 특히 근대 이전 한국에 유입된 우키요에로는 유일하여 중요도가 높은 자료이다. 또한 그 존재 자체로 수장가 김광국의 폭넓은 서화수집 활동을 입증하며 일본화와 미인도를 바라보는 당대 지식인 계급의 시선을 읽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Notes

1)

이동주, 〈金 檀園이라는 화원〉, 월간《亞細亞》(1969. 3)에서 처음으로 이 작품의 존재가 언급되었다. 이동주, 『우리나라의 옛 그림』 (학고재, 1995), pp. 94-163에 재수록. 그 실물은 학고재에서 열린 <遊戲三昧–선비의 예술과 선비 취미>展 (2003)에서 최초로 공개되었고 전시 도록에 도판이 게재되었다. 유홍준·이태호 편, 『遊戲三昧-선비의 예술과 선비취미』 (학고재, 2003), 도 67.

2)

김광국의 수집 활동과 관련하여 〈채녀적완도〉를 다룬 선행 연구로는 박효은, 「김광국의 《석농화원》과 18세기 후반 조선 화단」, 유홍준·이태호 편, 앞의 책, pp. 125-157 참조. 조선 후기 한일 교섭의 측면에서 〈채녀적완도〉를 다룬 선행 연구로는 홍선표, 「一七·一八世紀의 韓·日間 繪畵交涉」, 『미술사학연구』 143·144 (1979), pp. 22-46; 同著, 「조선후기 韓日間 畵蹟의 교류」, 『미술사연구』 11 (1997), pp. 3-22; 박은순, 「繪畵를 통한 疏通: 朝鮮에 전해진 日本繪畵」, 『미술자료』 91 (2017), pp. 15-44가 있다. 미인도로서의 〈채녀적완도〉에 대한 선행 연구로는 임미현, 「조선후기 미인도와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우키요에 미인화와의 관계성 고찰」, 『역사와 담론』 88 (2018), pp. 269-305 참조.

3)

이태호, 「석농 김광국 구장 유럽의 동판화를 통해 본 18세기 지식인들의 이국취미」, 유홍준·이태호 편, 위의 책, pp. 113-124.

4)

김광국과 《석농화원》에 대한 가장 집중적인 연구는 박효은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효은, 「홍성하 소장본 金光國의 『石農畵苑』에 관한 고찰」, 『온지논총』 5 (1999), pp. 235-288; 同著, 「18세기 朝鮮 文人들의 繪畵蒐集活動과 畵壇」, 『미술사학연구』 233·234 (2002), pp. 139-185; 同著, 「《石農畵苑》을 통해 본 韓·中 繪畵後援 硏究」(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同著, 「《石農畵苑》과 17-18세기 한국화단의 後援 문제」, 『숭실사학』 34 (2015), pp. 97-152; 同著, 「개인의 취향: 조선 후기 미술후원과 김광국의 회화비평」, 『한국문화연구』 29 (2015), pp. 61-103. 이 외에 이원복, 「『畵苑別集』考」, 『미술사학연구』 215 (1997), pp. 57-79; 황정연, 「石農 金光國(1727-1797)의 생애와 書畵收藏 활동」, 『미술사학연구』 235 (2002), pp. 61-85; 同著, 『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 (신구문화사, 2012); 同著, 「조선시대 수장(收藏)과 수장가(收藏家): 미술사적 의미와 전개양상을 중심으로, 『미술이론과 현장』 33 (2022), pp. 5-35 등도 참조.

5)

김광국의 증손자인 金憲章(1820~1860) 대에 이르러 가계가 기울면서 화첩이 팔려나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유홍준, 「석농화원의 해제와 회화사적 의의」, 유홍준·김채식, 『김광국의 석농화원』 (눌와, 2015), pp. 65-66.

6)

《畵苑別集》은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스즈키 게지로(鈴木銈次郞)에게서 일괄 구입하였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7)

유복렬, 『한국회화대관』 (문교원, 1973), pp. 509, 527;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서화유물도록 제6집』 (1996); 유현재, 『幽玄齋選 韓國古書畵圖錄』 (1996), 도 141, 518, 519; 선문대학교박물관, 『鮮文大學校博物館 名品圖錄Ⅱ 繪畵篇』 (2000), pp. 227-248; 유홍준·이태호 편, 앞의 책, pp. 87-91; 황정연, 앞의 책, 표 28; 박효은, 앞의 논문(2013), 附錄Ⅰ과 附錄Ⅱ; 同著, 「《石農畵苑》과 17-18세기 한국화단의 後援 문제」, 표 2; 유홍준·김채식, 위의 책; 간송미술 문화재단, 『보화수보(寶華修補)-간송 문화재의 수리와 보존』(2022), pp. 12-49 등을 참고하여 확인하였다. 연구자 마다 작품 목록이 다르고 작품을 세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수량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본고에서는 그림과 제발문 외에 서문과 표지, 표제, 목차도 각 1건으로 포함시켰고 그림과 발문이 함께 남아있는 것은 1건 2점으로 계산하였다.

8)

목록집 『석농화원』은 2013년 12월 화봉갤러리 경매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고 2015년에 영인번역본이 발간되었다. 유홍준·김채식, 위의 책. 반면 이 목록집에 대한 더욱 신중한 접근과 면밀한 검토의 필요성을 제안한 연구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효은, 「『석농화원』목록집의 정선 회화를 통해 본 목록집의 문제점」, 『숭실사학』 48 (2022), pp. 175-212 참조.

9)

이동주, 앞의 책, p. 104. 밑줄은 필자가 표기한 것이다.

10)

조선 왕실에 유입된 일본 금병풍과 그 현전작 및 이모본에 대해서는 홍선표, 앞의 논문(1997), pp. 12-17; 권주영, 「조선 후기 왜물의 유입과 인식: 『通信使謄錄』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31 (2016), pp. 94-98; 박은순, 앞의 논문, pp. 20-32를 참조.

11)

仁興君(1604~1651)이나 麟坪大君(1623~1658)이 일본 병풍을 소장했던 정황이 있어 일본 화적이 왕실 바깥으로 나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박은순, 위의 논문, p. 34. 그러나 인흥군과 인평대군은 종친이므로 이들에게 하사된 것을 민간으로의 유출과 동일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12)

홍선표, 앞의 논문(1997), pp. 18-20; 박은순, 앞의 논문, pp. 34-38.

13)

일본에서는 근세 초 모모야마시대(桃山時代)의 기록에서 회화 및 공예 전반에 관련된 다양한 기성품을 판매하는 에야(繪屋)라는 직종의 존재가 이미 확인된다. 에야 자체는 에도시대 초기에 이르러 소멸했던 것으로 보이나 각종 출판물이나 서화의 매매는 도시를 중심으로 더욱 활성화되었다. 村重寧, 「桃山時代の町繪と琳派樣式の形成」, 『美術史硏究』 5 (1967), pp. 97-102 참조.

14)

김동철, 「조선 후기 동래지역의 유통기구와 상품」, 『역사와경계』 97 (2015), pp. 226-231; 이현주, 「조선후기 동래지역 화원 활동과 회화적 특성」, 『역사와경계』 83 (2012), p. 62.

15)

김성진, 「부산 인근지역의 생활에 미친 부산왜관의 영향」, 『동양한문학연구』 12 (1998), pp. 57-74.

16)

박효은, 「《石農畵園》과 17-18세기 한국화단의 後援 문제」, pp. 115-118 참조.

17)

다바코본의 다양한 형태와 종류에 대해서는 小松大秀·岩崎均史, 『日本の美術 412 喫煙具』 (東京: 至文堂, 2000), pp. 40-53 참조.

18)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에 대해서는 菊地貞夫, 『出光美術館選書 9 肉筆浮世繪』 (東京: 出光美術館, 1976), pp. 17-36; 小林忠, 「浮世繪の成立」, 『日本美術全集 22 風俗畵と浮世繪』 (東京: 學習硏究社, 1979), pp. 131-138; 樽崎宗重, 『日本の美術 248 肉筆浮世繪Ⅰ』 (東京: 至文堂, 1987), pp. 24-61, 71-80; 東京國立博物館, 『東京國立博物館所藏 肉筆浮世繪』 (1993), pp. 6-12 등을 참조.

19)

小林忠, 『日本の美術 363 師宣と初期浮世繪』 (東京: 至文堂, 1996), p. 46.

20)

〈채녀적완도〉의 좌측 고소데와 같이 오비를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의 문양이 각기 다른 것을 上下模樣이라 하고, 우측 고소데와 같이 상반신은 거의 무문으로 두고 하반신에만 문양을 넣은 것은 腰模樣이라 한다. 이처럼 고소데에서 오비를 기준으 로 상하의 문양이 달라지는 것 또한 오비의 폭이 증대되는 겐로쿠~교호 연간부터 등장하는 경향이다. 長崎巖, 『日本の美術 514 帶』 (東京: 至文堂, 2009), pp. 38-46.

21)

유젠조메는 염색으로 문양을 시문하는 기법인 모요조메(模樣染)의 일종으로, 문양의 윤곽에 풀을 먹여 물들지 않게 하고 그 내부를 刷毛로 칠해 물들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회화적인 문양을 만들어내기에 용이했다. 小山弓弦葉, 『小袖ー江戶デザインの粹』 (東京: 東京國立博物館, 2019), p. 23.

22)

덴나 3년의 禁令에 따라 고소데 제작에서 누이하쿠(縫箔), 金紗의 사용과 더불어 옷감 전체를 가노코시보리로 장식하는 이른바 소카노코(總鹿の子)가 금지되었지만 가노코시보리 자체는 제재를 받지 않았다. 小山弓弦葉, 「きものー日本人が着る物」, 『きもの』 (東京: 東京國立博物館, 2020), pp. 11-12.

23)

니혼가미의 발전에 대해서는 橋本澄子, 「江戶時代女子の結髮ー兵庫まげから燈籠びんまでー」, 『MUSEUM』 160 (1964), pp. 25-26; 이미림, 「에도시대 미인풍속화 속 여성의 머리형태에 대하여」, 『일본연구』 52 (2020), pp. 225-228 참조.

24)

橋本澄子, 『日本の美術 23 結髮と髮飾』 (東京: 至文堂, 1968), pp. 94-95; 露木宏, 『日本裝身具史』 (東京: 美術出版社, 2008), p. 82.

25)

露木宏, 위의 책, p. 85.

26)

위의 책, p. 94.

27)

같은 시기에 고가이 역시 형태가 변화하였으므로 이 무렵 고가이와 간자시가 기능상, 형태상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생각된다. 長崎巖, 앞의 책, p. 69.

28)

“倭人之技巧名天下 至於書畵萬不相及才 固不相通而然耶 抑有佳者未得見之耶”

29)

“日本對馬州喜憲所作風雨驅牛圖 余畵廚中物也 …… 曾於畵苑原帖中倭畵 吾評云云 今觀此帖 筆力遒勁 排鋪雅潔 幾與華人高手相埒 奇絶奇絶 凡物不博觀而肆加雌黃者皆妄 豈特畵也 遂書幅端以爲藏舌之戒” 원문의 띄어쓰기 및 번역문은 목록집 영인번역본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다. 유홍준·김채식, 앞의 책, p. 240.

30)

목록집의 총목에 “첩 안에 넣지 않았다. 시랑 유의양의 집에 있다(不載帖中 在柳侍郞義養家).”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그림을 감상한 김광국의 화평만이 화첩에 수록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1)

목록집에는 〈채녀적완도〉와 〈풍우구우도〉 뒤에 각각 〈俄羅斯畵〉, 〈泰西 樓閣圖〉 및 〈유구 화조도〉가 있지만 이들은 《석농화원》에 그림이 수록되지 않고 김광국이 화평만 남긴 작품들이다. 즉 화첩에 수록된 그림 순서상으로는 일본화가 모두 마지막에 위치한다.

32)

김광국이 중인 신분이면서도 스스로를 문인으로 의식하고 명과 청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갖고 있었던 양상에 대해서는 박효은, 앞의 논문(2013), pp. 266-293 참조.

33)

홍선표, 앞의 논문(1997), pp. 15-16.

34)

18세기 말-19세기 초 일본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 변화에 대해서는 강민기, 「近代 轉換期 韓國畵壇의 日本畵 유입과 수용: 187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5), pp. 16-17, 25-27; 권주영, 앞의 논문, pp. 104-105 참조.

35)

박은순, 앞의 논문, pp. 37-38.

36)

이정희, 「古代 日本의 采女制度」, 『일본학보』 44 (2000), pp. 580-584.

37)

근세초기풍속화와 초기 우키요에의 관계에 대해서는 菊地貞夫, 앞의 책, pp. 7-13; 山口桂三郞, 「初期浮世繪について」, 『MUSEUM』 404 (1984), pp. 4-6; 樽崎宗重, 앞의 책, pp. 17-23; 大久保純一, 『日本の美術 482 美人風俗畵』 (東京: 至文堂, 2006), pp. 18-38; 이미림, 「江戶時代 遊女의 肖像: 寬文美人圖를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0 (2006), pp. 99-104 등을 참조.

38)

유곽의 유녀가 아닌 시정의 평범한 일반 여성을 모델로 한 우키요에 미인도가 등장하는 것은 스즈키 하루노부가 활동하는 메이와 연간 무렵부터이다. 小林忠, 「浮世繪の精華」, 小林忠·小松大秀·淺野秀剛 編, 『日本美術全集 20 浮世繪』 (東京: 講談社, 1991), pp. 150-151 참조.

39)

홍선표, 「화용월태의 표상: 한 국 미인화의 신체 이미지」, 『한국문화연구』 6 (2004), pp. 37-38; 문선주, 「조선시대 중국 사녀도(仕女圖)의 수용과 변화」, 『미술사학보』 25 (2005), pp. 73, 87-88; 고연희, 「美人圖의 감상코드」, 『대동문화연구』 58 (2007), pp. 307-314.

40)

이홍주, 「17-18세기 조선의 工筆 彩色人物畵 연구」, 『미술사학연구』 267 (2010), pp. 34-38.

41)

“申君漢枰明仲 畵人物山水花鳥草蟲 頗得其奧 尤善傳神 余嘗倩作美女圖 其豊肌媚姿 咄咄逼眞 展不可久 久則恐損蒲團上工夫也” 밑줄과 띄어쓰기는 필자가 표기한 것이다.

42)

『惺所覆瓿稿』 卷之十三 文部 題跋 「題李澄畵帖後」 “…… 余令澄畵各樣于小帖。 終之洗兒二女。 人曰不及楨。 而細看則豊肌媚笑。 逞其妖嬌態。 咄咄咄逼眞。 亦妙品也。 不欲久展。 久則恐敗蒲團上工夫也。” 원문과 표점은 한국고전종합DB에서 인용하였다. 밑줄은 필자가 표기한 것이다.

43)

이항복의 시는 『白沙集』 권1에 수록된 「題李興孝美人圖」, 임상원의 시는 『恬軒集』 권10에 수록된 「爲子夏題美人圖」이다. 고연희, 앞의 논문, pp. 319-332 참조.

44)

19세기 이후 나타나는 남성 문인들의 재덕을 겸비한 미인상에 대한 애호와 새로운 미인도 유형의 탄생은 고연희, 「19세기 남성문인의 미인도 감상-재덕을 겸비한 미인상 추구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6 (2013), pp. 52-60; 同著, 「尹德熙(1685∼1776)의 〈책 읽는 여인〉에 나타나는 젠더의 특성」, 『대동문화연구』 118 (2022), pp. 94-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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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作家未詳, 〈采女摘阮圖〉 Unidentified A rtist, Court Lady Playing a String Instrument,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31.0× 45.5cm (illustration), 28.2×21.8cm (inscription), Private Collection (Yu, Hongjun, and T’aeho I, eds. Yuhi sammae: sŏnbi ŭi yesul kwa sŏnbi ch’wimi, p. 91)

Fig. 2.

懷月堂安度, 〈風前美人圖〉 Kaigetsudō A ndo, Beauty in front of Wind,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94.8×42.7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3.

長陽堂安知, 〈遊女立姿圖〉 Chōyōdō A nchi, Standing Courtesan,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94.0×39.6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4.

宮川長春, 〈遊女聞香圖〉 Miyagawa Chōshūn, Courtesan Burning Incense,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Silk, 86.4×36.6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5.

西川祐信, 〈美人に子猫圖〉 Nishikawa Sukenobu, Beauty with a Kitten,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Silk, 33.4×52.8cm, The Metropolitan Museum (The Metropolitan Museum, https://www.metmuseum.org)

Fig. 6.

宮川長龜, 〈遊女閑談圖〉 Miyagawa Chōki, Courtesans Having a Chat,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33.4×55.3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7.

西川祐信, 〈三美人圖〉 Nishikawa Sukenobu, Three Beauties,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36.2×53.3cm, The Metropolitan Museum (The Metropolitan Museum, https://www.metmuseum.org)

Fig. 8.

菱川師宣, 〈歌舞伎圖屛風〉 Hishikawa Moronobu, Scenes in and around the Kabuki Theater, Late 17th century, Edo Period, Pair of Six-panel Folding Screen, Color and Gold Leaf on Paper, 170.0×397.6cm (each),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9.

山崎女龍, 〈文を讀む美人圖〉 Yamazaki Joryū, Beauty Reading a Letter, 1720 s, Edo Period, Color on Paper, 75.5× 31.0 cm, The British Museum (The British Museum, https://www.britishmuseum.org)

Fig. 10.

川又常正, 〈浴室脇の男女圖〉 K awamata Tsunemasa, Couple Beside the Bathroom, Early 18th century, Edo Period, Color on Paper, 41.0×56.5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11.

鈴木春信, 〈かぎやお仙〉 Suzuki Harunobu, Osen of the Kagiya Teahouse, 1750s-60s, Edo Period, Multi-coloured Woodblock Print, 26.8×19.6 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12.

<小袖染分紗綾地雪輪山吹模樣> Kosode with Snow Circle Pattern and Japanese Kerria Design, 18th century, Edo Period, Yūzen Dyeing and Embroidered on Plain We ave Damask, H. 152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Fig. 13.

<兵庫髷> Hyōgomage Hairstyle (Kawamura, Chōkan. Nihon no kamigata, p. 68)

Fig. 14.

<島田髷> Shimadamage Hairstyle (Kawamura, Chōkan. Nihon no kamigata, p. 83)

Fig. 15.

〈鱉甲櫛〉 Back Comb Made of Tortoiseshell, Edo Period, W. 15.5cm, Japan Jewelry Craft School (Tsuyuki, Hiroshi, ed. Nihon sōshingushi, p. 84)

Fig. 16.

申漢枰, 〈挾瑟采女圖〉 Sin Hanp’yŏng, Court Lady Holding a String Instrument, Late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Paper, 28.5×21.0 cm (illustration), 28.5×21.0 cm (inscription), Sun Moon University Museum (ⓒSun Moon University Museum)

Fig. 17.

尹斗緖, 〈美人讀書圖〉 Yun Tusŏ, Beauty Reading a Book, Late 17th - Early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61.0× 40.7cm, Private Collection (Ch ’a, Miae. Kongjae Yun tusŏ ilga ŭi hoehwa: saeroun sidae chŏngsin ŭl hwap’ok e tamda, p. 448)

Fig. 18.

作家未詳, 〈故事人物圖〉 Unidentified A rtist, Narrative Figure Painting, 17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approx. 20.6×21.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Fig. 19.

作家未詳, 〈故事人物圖〉 Unidentified A rtist, Narrative Figure Painting, 17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approx. 20.6×21.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Fig. 20.

李在寬, 〈美人寫書圖〉 I Chaeg wan, Beauty Writing a Letter, Early 19th century, Chosŏn, Color on Paper, approx. 139.4×66.7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