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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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전적 정의로 博古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예는 중국 漢代 張衡(78-139)이 저술한 『西京賦』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張衡, 『西京賦』, “有憑虛公子者, 心奓體忲,雅好博古,學乎舊史氏.” 박고의 개념이 이전까지는 古事, 古學 등의 의미로만 이해된 것에서 『선화박고도』 이후 박고의 함의는 『선화박고도』의 고동기, 고기물까지 포함되어 미술사적 범위로 확장되기 이른다. 「博古」의 항목으로 도해가 실린 明末 『十竹齋箋譜』(1644)를 통해 보아도 시각작품에서 박고의 의미는 특히 골동과 같은 옛 기물 즉, 고기물에 한정되는 경향을 알 수 있다. 박고의 개념과 박고문의 정의와 관련해서는 신주혜, 「17~19세기 명·청대 박고문(博古紋)자기의 유행과 동아시아로의 영향」, 『東洋美術史學』 14(2022), pp. 35-37을 참조.
3) 劉文勝, 「淸康熙瓷繪博古紋興盛原因與內涵探究」, 『中國陶瓷』 48(景德鎭: 中國輕工業陶瓷硏究所, 2012), pp. 33-34; 張心瞳, 「清代瓷繪博古紋考察」(景德鎭: 景德鎭陶瓷大學碩士學位論文, 2019), pp. 5-52.
4) 이 침몰선은 대략 청 강희 중기인 1690-1700년경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중 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수된 유물은 17,000여 점의 자기 중 10,000여 점 이상이 경덕진 민요 청화백자이다. 실제 적재되었을 수량은 적어도 50,000여 점 이상이었을 것으로 본다. 문양장식으로는 山水, 人物, 花鳥, 博古, 吉祥文字 등 크게 5종류로 구별된다. 碗礁一號水下考古隊 編, 『(東海平潭) 碗礁一號出水瓷器』(北京: 科學出版社, 2006), pp. 1-227.
5) 최근 중국에서 청대 박고소재 자기와 17-18세기 일본 이마리 자기와의 비교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해당 논문에서 이마리 청화, 색회자기뿐 아니라 델프트, 마이센, 영국 도자(Chelses)에서 보이는 박고소재를 소개하고 있으나, 유럽 수출자기로서 박고문자기를 심도 있게 다루진 않았으며, 주로 17세기 후반 만력연간의 크락양식 자기와 일본 이마리 자기를 비교대상으로 삼았다. 박고문자기를 교류사적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한 연구성과이다. 方安豪, 「17-18世紀日本伊萬裏樣式瓷器中的博古圖像研究」(景德鎭: 景德鎮陶瓷大學碩士學位論文, 2021), pp. 1-41.
6) 현재까지 중국 박고문자기를 유럽 수출자기의 특수성에 주목하여 단독으로 살펴본 연구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미권에서 박고문은 ‘Hundred antiques’, ‘Auspicious Objects’, ‘Scholar’s Objects‘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미국에서는 주로 ‘Hundred antiques’로 통일하여 명명하고 있다. 1911년 일종의 중국자기 카달로그에서 강희연간의 청화자기 중 ‘Hundred antiques’라는 용어가 처음 확인되며, 이후 출간된 수출자기 도록에서도 계속해서 ‘Hundred antiques’로 언급된다. Garrett Chatfield Pier, Catalogue of the Collection of Pottery, Porcelain and Faïence(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11), p. 34. Clare Le Corbeiller, China Trade Porcelain: Patterns of Exchange(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74), p. 18. 2006년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개최된 청대 박고소재의 직물자수전시 《The “Hundred Antiques” in Chinese Textiles》에서도 ‘Hundred antiques’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7) Madeleine Jarry, chinoiserie: Chinese Influence on European Decorative Art, 17th and 18th Centuries(New York: The Vendome Press, 1981), p. 66.
8) 방병선, 「17-18세기 이태리 파엔자(Faenza) 도자에 보이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 양식 연구」, 『한국학연구』 69(2019), p. 143; 신상철, 「미술 시장과 새로운 취향의 형성 관계: 18세기 로코코 미술에 나타난 쉬느와즈리(Chinoiserie) 양식」, 『美術史學』 25(2011), p. 157.
9) 시누아즈리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에서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칠병풍을 포함한 칠가구를 해체하여 벽장식으로 활용하는 라커룸(Lacquer room)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궁전이나 상류층으로 퍼져 나갔다. 라커룸은 차이니즈 룸(Chinese room)으로 불리며 궁정이나 상류층 사이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도자나 칠가구와 같은 동양물품들을 전시하고 이국적 취미를 드러내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가장 이른 시기의 라커룸은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처음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수경, 「17-18세기 코로만델 칠병풍의 제작과 소비 양상」, 『美術史學硏究』 312(2021), pp. 93-94.
10) 네덜란드 레이우아르던(Leeuwarden)의 라커룸은 1885년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Rijksmuseum)으로 이전되었으며, 칠병풍의 재료 분석에 대한 연구 및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2014년에 다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에 설치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Gabriela Krist and Elfriede Iby, Investigation and Conservation of East Asian Cabinets in Imperial Residences(1700-1900)(Vienna: Böhlau Verlag Wien, 2015), p. 251.
11) 도자기에 금속 마운트를 추가하여 장식하는 관행은 고급품을 판매하거나 마케팅을 전문적으로 하는 ‘마르샹-메르시에(Marchands Merciers)’로 알려진 프랑스 상인이 제공하는 것 중 일부로 상품화된 것이다. 프랑스 상인은 은세공 장인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수입품목을 고급 장식기법에 맞게 조정함으로써 인테리어 장식으로 활용하며 그 상품 가치를 높였다. Rose Kerr, Chinese Export Ceramics(New York: Harry N. Abrams, 2011), pp. 81-87.
13) David Beevers, Chinese whispers: chinoiserie in Britain, 1650-1930(Brighton: Royal Pavilion & Museums, 2008), pp. 55-56.
14) 해처선은 마이클 해처(Michael Hatcher) 선장에 의해 인양되어 그 이름을 따 명명한 것이다. 그는 남중국해 해저 약 40m 지점에서 난파선 잔해를 우연히 발견하였고, 난파선에는 약 23,000여 점의 중국자기가 실려 있었다. 그중 일부는 198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크리스티 경매에 소개된 바 있다. 해처선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있었던 자바섬의 바타비아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며 난파선의 시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1643년에 해당하는 날짜가 새겨진 타원형 항아리 두 점에 있었다. 출수 자기 양상을 살펴보면, 크락자기도 소량 있었으나 명말청초의 과도기 양식의 자기가 다수 확인된다. 명이 1644년에 멸망하므로 해처선 출수품은 명말·청초의 혼란기 무역 도자를 조망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방병선, 「명말청초(明末淸初) 중국(中國) 청화백자(靑花白瓷) 연구」, 『강좌미술사』 30(2008), p. 208.
15) 박고문자기에 보이는 명대 병화 도상의 출현 배경, 특징에 대해서는 성고운, 「조선후기 청화백자 병화(瓶花)도상으로 본 명대의 영향」, 『美術史學硏究』 308(2020), pp. 75-81.
16) 서양에서는 중국 명말·청초에 해당하는 1620년에서 1688년의 한정된 기간을 ‘과도기(Transitional period)’라고 부른다. 이 시기 수출자기 양식에 대해 1923년 독일의 치머만(Zimmermann)이 ‘명 후기의 수출자기(Export-ware)’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일본에서는 ‘부용수(芙蓉手)’라 칭하는 크락양식의 청화자기를 이 시기의 대표적 유물로 보았다. 또한 R.L. 홉슨(Hobson)은 명말·청초 청화자기의 한 종류를 ‘Transitional Ware’이라고 명명하였다. 西田宏子, 「明·淸移行期の諸相」, 『東西交流の陶磁史』(東京: 中央公論美術, 2008), p. 225, 註1) 재인용. E. Zimmermann, Chinese Porzellan, Leipzig, 1923, pl. 67, 68; R.L Hobson, The Wares of the Ming Dynasty, London, 1923, p. 149, pl. 38, 44.
17) 본고에서 명말·청초 유럽 수출 청화백자를 구분하는 양식 명칭과 기준은 방병선, 「17세기 중국 무역도자 연구 - 유럽과 동남아를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33(2009), pp. 203-214; 방병선, 『중국도자사 연구』(경인문화사, 2012), pp. 455-464에 제시된 양식 기준에 따랐다.
18) 강희 22년(1683) 중앙정부에서 감독관을 파견한 것으로 어요창이 다시 부활하게 된다. [淸] 藍浦, 『景德鎭陶錄』 卷2, 「國朝御窯廠恭紀」, “十九年九月, 始奉燒造御器……二十二年二月, 差工部虞衡司郞中臧應選, 筆帖式車爾德來廠, 代督器日完善.”
20) 이 시기에 보이는 박고문은 가장 다양한 종류의 소재로 결합되며 복잡한 구도를 보인다, 영미권에서 흔히 지칭하는 ‘Hundred antiques’, ‘Auspicious objects’ 등은 이와 같이 다양한 소재로 조합된 박고문자기를 말한다.
21) Hon Cau 침몰선은 강희 29년(1690)에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중 베트남 해역에서 난파된 것으로, 庚午年 (1690)에 제작된 먹, 중국 동전인 <萬曆通寶>와 <康熙通寶> 등을 통해 그 시기를 대략 169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Hon Cau 침몰선에서 출수된 박고문자기는 청화 주자(Teapot)로, 편년 추정이 가능한 침몰선 자료 가운데 팔보 소재가 조합된 박고문의 양상을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예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대항해 시대 바닷길에서 만난 아시아 도자기』(2017), p. 150.
23) Monteith는 1680년대 영국의 은기로 다수 제작되었던 기형으로 상류층 사이에서 와인을 마실 때 안에 얼음을 넣고 테두리에 와인 잔을 걸어 두어 식히는 용도이다. 자기에서는 소량으로 확인되며 주로 18세기 이후 영국의 수요층을 겨냥하여 제작한 것이 많이 남아 있다. 경덕진에서 이와 같은 기형의 제작은 1710년 이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며, 그 모본은 영국 은기를 본 따 제작된 1684년作의 델프트 도기 <Monteith>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Thomas V. Litzenburg and Ann T. Bailey, Chinese export porcelain in the Reeves Center collection at Washington and Lee University(London: Third Millennium Pub., 2003), p. 217.
24) 유럽에서 오채자기는 1700년경인 18세기 초로 접어들면서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17-18세기 유럽사회에서는 바로크, 로코코 문화의 영향으로 유럽의 미감이 변화하여 이전 청화자기 뿐 아니라 화려한 색채의 상회자기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방병선, 앞의 논문(2009), pp. 202-203; 西田宏子, 앞의 논문, pp. 245-271.
25) 바타비안 품종은 주로 수출용으로 제작된 자기로 병, 주자, 찻잔세트 등 다양한 기종과 기형에서 확인된다. 유럽으로 향하던 강희연간의 붕타우(Vung Tau), 복건성 碗礁 1호, 옹정연간의 까마우(Ca Mau) 침몰선에서는 주로 병이나 찻잔세트의 바타비안 자기가 출수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럽으로 수출된 바타비안 자기는 특히 네덜란드인들의 취향에 부합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陳聞娃, 「16-19世紀的中國貿易瓷」, 『文物鑒定與鑒賞』 6期(合肥: 時代出版傳媒股份有限公司, 2019), p. 45.
26)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록에 의하면, 바탕이 흑색계열의 파미유 누아르 품종의 자기는 18세기에 흔한 유럽 수출자기였다고 전해진다. Rose Kerr, Chinese Ceramics: Porcelain of the Qing Dynasty 1644-1911(London: V&A, 1998), p. 27.
27) 일명 파우더 블루 품종은 제작기법상 코발트 블루 산화물을 파이프에 넣고 불어 넣어 바탕을 남색으로 표현한 자기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바탕색에 중점을 두어 藍釉 혹은 藍地자기라고 부르기도 하며 푸른 하늘색과 같다고 하여 ‘天藍釉’, ‘天靑釉’라고도 칭한다. 葉喆民, 『中國陶瓷史』(北京: 三聯書店, 2011), pp. 592-593; 17세기 말부터 바타비안 품종의 브라운 계열의 유색으로 대체된 1725년 이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Jörg C. J. A., Famille verte: Chinese porcelain in green enamels(Schote: Groninger Museum, 2011), p. 103.
29) 조개형접시는 조개형태를 본 따 일본에서 명명한 것으로, 유럽에서 실제 조개류나 생선류를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아 사용했던 전형적인 유럽식기류이다. 西田宏子, 앞의 논문, p. 194; C. J. A. Jörg, 앞의 책(2011), p. 154.
30) 大橋康二, 鈴田由紀夫, 古橋千明編, 『柿右衛門樣式磁器調査報告書-歐州篇』(九州産業大学柿右衛門様式陶芸研究センター柿右衛門様式磁器調査委員会, 2009), p. 247, pl. 433.
33) 까마우 침몰선은 18세기경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중 난파된 것으로, 베트남 최남단인 Ca Mau 성에서 167km 떨어진 해역에서 발견되었다. 수중 발굴조사는 1998-1999년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과 까마우박물관, 비잘 사(Visal Company)가 공동으로 실시하였다. 출수 유물 가운데 옹정연간의 명문이 새겨진 청화백자가 포함되어 있고, ‘강희통보(康熙通寶)’가 동반 출수되어 그 제작 시기를 대략 청대 옹정연간인 18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선적된 중국 자기는 경덕진요 청화백자와 오채자기, 복건성 덕화요 백자, 광동성 민요자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약 5만 점이 유럽 수출을 위한 수출자기로 확인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p. 180.
34) 분채라는 명칭은 清末 光緖年間(1874-1908)에 편찬된 『匋雅』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저자인 寂園叟는 분채를 ‘康熙彩硬,雍正彩軟, 軟彩者, 粉彩也.’라 하여 ‘軟彩는 粉彩’라고 정의하고 있다. 현재까지 분채에 대한 시각은 복잡한 성격을 보이지만, 지금까지 연구 성과를 토대로 본다면 분채는 民窯에서 제작된 법랑자기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다. 분채기법 그 자체는 강희 중엽부터 있었다고 하여도 그 완성은 역시 옹정연간, 빨라도 강희 말엽으로 생각되며, 분채자기의 해외수출은 옹정 중기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분채의 정의 및 성격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김은경, 「朝鮮後期 淸代 琺瑯瓷器 受容 硏究」(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8), pp. 71-73을 참고; 분채자기의 수출과 관련해서는 蔡毅, 「淸代粉彩與外銷」, 『中國古陶瓷硏究』(北京: 紫禁城出版社, 2008), pp. 369-378을 참고.
38) 18세기 후반 유럽 내 중국 인식에 대한 변화 양상은 최경현, 「18세기 유럽인의 중국 인식과 시각이미지의 변화」, 『美術史學硏究』 305(2020), pp. 207-211; 18세기 이후 중국과의 무역에 선두에 있었던 영국의 경우, 1840년대 이르면 18세기까지 환상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중국 및 동양에 대한 인식이 친숙함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Richard Hayman, Chinoiseire(Oxford: Shire Publications, 2021), p. 9.
40) 상대적으로 영국은 유럽 안에서 시누아즈리 양식의 채용 단계도 매우 늦은 편이었다. 영국은 18-19세기의 산업화로 인해 사회과 변화되고, 공장제가 실시되면서 대량생산 체제로 전환되었다. 산업도자의 경우, 1740년대 후반 런던의 보우(Bow), 첼시(Chelsea)에서 연질자기 생산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도자산업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방병선, 앞의 논문(2019), p. 144.
45) Frick Collection ed, The Arnhold collection of Meissen porcelain, 1710-50(London: D. Giles, 2008), p. 209.
47) 1730년 3월의 기록에 마이센에 동아시아 도자기를 모방하여 1,500여 점의 병과 접시를 제작하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주문서가 확인된다. Julia Wieber, 「중국 황제에 도전하다-강건왕 아우구스투스와 도자기 컬렉션」, 『王이 사랑한 보물』(국립중앙박물관, 2017), p. 233.
48) 빙매문 청화자기는 이후 19세기 영국에서 17세기 강희연간의 자기에 대한 애호가 급증하면서 매우 가치 있는 중국자기로 알려졌다. 훗날 ‘Hawthorn ginger jar’라고 명명된 빙매문 장식의 항아리는 루이스 휴스(Louis Huth, 1821-1905)가 소유하기도 하였으며, 19세기 런던에서 가장 훌륭한 중국 청화백자로 알려져 있었다. Gerald Reitlmger, The Economics of Taste: The Rise and Fall of the Objets de’Art Market Since 1750(New York: Holt, Rinehartand Winston, 1965), p. 206.
49) W. Pitcairn Knowles, Dutch Pottery and Porcelain(London: B.T. Batsford, 1913), p. 28; pl. ⅩⅩⅡ. 원문은(https://archive.org/details/dutchpotteryporc00know/page/n31/mode/2up) 2021년 11월 23일 검색.
50) (https://www.rct.uk/) 소장품 참고.
54) Michael Archer, Delftware: In the Fitzwilliam Museum(London: Philip Wilson Publisher, 2013), p. 118, pl. B.59.
56) John Stalker and George Parker, A Treatise of Japaning and Varnishing(London: Printed for the Author, 1688). 원문은 스미스소니언도서관(Smithsonian Libraries)에서 제공한 것을 참조하였다.(http://library.si.edu/digital-library/book/treatisejapanin00stal), 2021년 12월 1일 검색.
57) 마이센자기의 제작 초기 단계에는 비교적 시누아즈리 양식으로 재현된 중국, 일본자기 등을 모방하여 시누아즈리 양식으로 제작한 사례가 많다. 17-18세기 마이센 공장에서 시누아즈리 양식의 도자 제작은 헤롤트, 요한 스테들러 등 뛰어난 도화공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시누아즈리 예술에 표현되는 도상에 일종의 새로운 양식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된다. 진영, 「17-18세기 중반 유럽의 中國風 美術 硏究: 시누아즈리 美術에 나타난 中國的 要素의 考察을 중심으로」(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5), p. 25.
59) 유럽 정물화와 청대 박고도, 박고문자기와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서양화법과 구도, 소재 등의 친연성으로 논의가 제기된 바 있다. 聂崇正, 「靜物畫與博古圖」, 『收藏家』 6(北京市文物局, 1995), pp. 60-62; Welsh, Jorge, The vases of the ‘ hundred treasures’(London: Jorge Welsh Books, 2019), pp. 6-70.
60) 프롱크(pronk)는 네덜란드어로 ‘과시’, 장식, 겉치레, 허영의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 17세기 초반 다종다양했던 여러 정물화의 갈래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17-18세기에 이르러 당시 활발한 국제 무역을 통해 들어온 진귀하고 값비싼 여러 악기, 중국제 접시, 식기류, 이국적인 형태의 칼, 음식, 외래산의 다양한 꽃 등을 그려 놓는 프롱크 정물화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어느 정도 모두 프롱크 정물화의 성격을 띠게 된다. 최정은,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정물화』(한길아트, 2000), p. 275; 손수연, 「네덜란드 장르화에 재현된 도자기」, 『미술사와 시각문화』 15(2015), p. 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