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은 수나라 쌍탑가람인가?
Ⅲ. 수나라 쌍탑가람의 등장배경은 무엇인가?
“독고황후는 항상 황제와 정사를 이야기하며 뜻을 같이하였기 때문에 궁중에서는 두 명의 성인이라고 칭한다[后每與上言及政事, 往往意合, 宮中稱爲二聖]”38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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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황후는 항상 황제와 정사를 이야기하며 뜻을 같이하였기 때문에 궁중에서는 두 명의 성인이라고 칭한다[后每與上言及政事, 往往意合, 宮中稱爲二聖]”38라는 내용이다.
3 김상태·박언곤, 「7·8세기 동아시아 2탑식 가람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12(2003) pp. 7-26; 김상태, 「감은사 사리장엄에 의한 2탑구성원리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16(2007), pp. 137-152.
4 신용철, 「통일신라 경주지역의 불탑 배치에 관한 고찰」, 『미술사논단』 31(2010), pp. 44-47; 한정호, 「신라 쌍탑 가람의 출현과 신앙적 배경」, 『석당논총』 46(2010), pp. 179-208.
5 장충식, 「신라 사천왕사 사지 壇席의 고찰」, 『불교학보』 39(2002), pp. 7-23; 김상태, 「사천왕사 초석의 장식에 관한 연구」, 『한국 실내디자인학회』 16-1(2007), pp. 3-10; 임영애, 「사천왕사지 소조상의 존명」, 『미술사논단』 27(2008), pp. 7-32.
6 박윤배, 「雙塔式伽藍配置의 기원을 통한 新羅와 隋의 관계」, 『CHINA연구』 14(2013), pp. 41-88; 양은경, 「신라의 사원」, 『신라고고학개론』 상(진인진, 2014), pp. 256-271; 임남수, 「불교가람의 중국화에 관한 문제」, 『미술사연구』 28(2014), pp. 204-208.
7 영묘사지로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쌍탑 유구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쌍탑 유구는 창건가람(635년)이 아닌 재건되는 과정에서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통일신라 후기로 비정되고 있다(신창수, 「흥륜사의 발굴성과 검토」, 『신라문화』 20(2002), pp. 290-295)
8 宿白, 「東漢魏晉南北朝佛寺布局初探」, 『慶祝鄧廣銘敎授九十華誕論文集』(河北敎育出版社, 1997), pp. 37-38; 宿白, 「隋代佛寺布局」, 『考古與文物』 2(1997), pp. 29-31; 현승욱, 「중국 초기 불교사원 배치에 관한 연구−후한부터 남북조까지의 문헌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22(2013), pp. 37-38.
9 “王廙, 字世將, 上品上 瑯琊臨沂人. 善屬詞工書畫. 過江後爲晉代書畫第一. 音律衆妙畢綜. 元帝時爲左衛將軍, 封武康侯. 時鎮軍謝尚於武昌昌樂寺造東塔, 戴若思造西塔, 並請廙畫. 王敦用廙爲平南將軍, 荊州刺史, 護南蠻校尉. 贈侍中. 年四十七”(『歷代名畵記』 권5).
10 “釋慧達. 姓劉. 本名薩河.…… 先是簡文皇帝於長干寺造三層塔. 塔成之後每夕放光. 達上越城顧望見, 此剎杪獨有異色. 便往拜敬晨夕懇到. 夜見剎下時有光出. 乃告人共掘, 掘入丈許得三石碑. 中央碑覆中有一鐵函. 函中又有銀函. 銀函裏金函. 金函裏有三舍利. 又有一爪甲及一髮. 髮申長數尺. 卷則成螺. 光色炫燿. 乃周敬王時阿育王起八萬四千塔. 此其一也. 既道俗歎異. 乃於舊塔之西更竪一剎. 施安舍利. 晉太元十六年. 孝武更加爲三層”(『高僧傳』 卷13, T50, No. 2059).
11 “三年八月, 高祖改造阿育王寺塔, 出舊塔下舍利及佛爪髮,…… 至四年九月十五日, 高祖又至寺設無碍大會, 竪二剎, 各以金罌次玉罌重盛舍利及爪髮, 內七寶塔中. 又以石函盛寶塔, 分入兩剎下”(『梁書』 권54).
14 이 비석은 488년 제작되며, 1971년 서안 비림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전시실에 진열되어 있다. 비석의 높이는 294cm이고 폭은 90cm이다(曹剛, 『西安碑林博物館』(陝西人民出版社, 2000), p. 33).
17 중국 오악은 중원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큰 산으로 동악 태산, 서악 화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 중악 숭산이 바로 그것이다(이주해, 「오악과 중국 고대산문」, 『인문과학』 88(2008), p. 61).
18 숭양사 비석은 원래 숭양사에 소재하고 있었으나 당대 고종이 중악 숭산에 奉天宮을 건립하고자 하였기에 비석은 664년 會善寺로 옮겨졌다. 2003년 이 비석은 다시 현재의 숭양서원으로 이전되어 보관중이다.
19 “有大德沙门生禅师…太和八年(484년)歲次甲子, 建造伽藍, 築立塔殿, 布置僧房…禪師乃構千善靈塔一十五層, 始就七級, 緣差中止…禅师大弟子沙门统伦, 豔(艳)二法师…以師遺功, 成玆洪業, 分稟□磚, 更寧兩塔, 幷各七層”(비문은 王景筌, 「崇陽寺造像碑硏究」, 『中原文物』 6(2016), pp. 90-91).
23 宿白, 앞의 논문, 1997, pp. 30-33; Youn-mi Kim, “Reliquaries from the Twin Pagodas of the Kamŭnsa Monastery: Intercommunication of this World and the Otherworld; Miracles of relics and jewels”(Harvard University, Qualifying Paper, 2006), pp. 7-11; 양은경, 앞의 책, pp. 256-271; 임남수, 앞의 논문, pp. 204-208.
26 광명사의 법경스님은 585년 大興殿에서 수 문제에게 보살계를 주었으며(開皇五年爰請大德經法師, 受菩薩戒. 因放獄囚, 仍下詔曰, 朕夙膺多祉嗣恭寶命, 方欲歸依種覺敦崇勝果. 以今月二十三日, 請經法師於大興善殿受菩薩戒, 然菩薩之教, 以解脫為先”(『辨正論』 권3, T52, No. 2110), 같은 해 대흥선사에서 진행된 역경작업에 참여한 10大德沙門 중 한 명일 정도로 유명한 스님이었다 (“至開皇五年. 大興善寺沙門曇延等三十餘人…忽於大興善更召婆羅門僧達摩笈多. 并勅居士高天奴高和仁兄弟等, 同傳梵語. 又置十大德沙門僧休法粲法經慧藏洪遵慧遠法”(『續高僧傳』 권2 隋西京大興善寺北賢豆沙門闍那崛多傳, T50, No. 2060)).
28 “東南隅, 大雲經寺, 本名光明寺 隋開皇四年, 文帝爲沙門法經所立, 時有延興寺僧曇延, 因隋文賜以蠟燭自然發焰, 隋文奇之, 將改所住寺爲光明寺, 曇延請更立寺, 以廣其教, 時此寺未制名, 因以名焉, 武太后初, 此寺沙門宣政進大雲經, 經中有女主之符, 因改爲大雲經寺, 遂令天下每州置一大雲經寺, 此寺當中寶閣崇百尺時人謂之七寶臺. 寺内有浮圖東西相値, 東浮圖北佛塔名三絶塔, 隋文帝所立, 塔内有鄭法輪田僧亮楊契丹畵迹及巧工韓伯通塑作佛像, 故以三絶爲名”(『長安志』 권10. 辛德勇, 郞潔 點校, 『長安志』(三秦出版社, 2013), pp. 337-338) “皇帝皇后於京師法界尼寺. 造連基浮圖以報舊願. 其下安置舍利. 開皇十五年季秋之夜有神光. 自基而上右繞露槃. 赫若冶鑪之焱. 一旬內四如之”(『廣弘明集』 권17, 舍利感應記, T52, No. 2103) “(豊樂坊法界尼寺)隋文帝獻皇后爲尼華暉令客所立, 有雙浮圖各崇一百三十尺”(『唐兩京城坊考』 권4. 李健超增訂 『唐兩京城坊考』(三秦出版社, 1996), pp. 162-163).
30 모토야쿠시지의 발굴성과에 대해서는 花谷 浩, 「本藥師寺の發掘調査」, 『佛敎藝術』 235(1997), pp. 57-77;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한중일 고대사지 비교연구(1)−목탑지편』(2009), pp. 190-193 참고.
31 신라 승려 지인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저를 참고함. 김상현, 「신라 法相宗의 성립과 順璟」, 『신라의 사상과 문화』(일지사, 1999), pp. 305-306; 권덕영, 「당 장안의 신라승과 일본승, 그 과거와 현재」, 『사학연구』 110(2013), p. 53.
32 『長安志』, 『唐兩京城坊考』등 문헌기록을 통해 판단하면, 2곳의 선정사는 당나라에 접어들면 大莊嚴寺, 大摠持寺로 개명되었으며(杜斗城·吳通, 「隋代獨孤皇后與佛敎關係論述」, 『新疆師範大學學報』 35(2014), p. 57), 광 명사는 측천무후시기 이후부터는 大雲經寺로 개명되었으나 사찰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었다.
37 “東南隅, 大雲經寺, 本名光明寺 隋開皇四年, 文帝爲沙門法經所立…寺内有浮圖東西相値”(『長安志』 권10. 辛德勇, 郞潔 點校, 『長安志』(三秦出版社, 2013), pp. 337-338); “皇帝皇后於京師法界尼寺. 造連基浮圖以報舊願”(『廣弘明集』 권17, 舍利感應記, T52, No. 2103); “(豊樂坊法界尼寺)隋文帝獻皇后爲尼華暉令客所立, 有雙浮圖各崇一百三十尺”(『唐兩京城坊考』 권4. 李健超增訂, 『唐兩京城坊考』(三秦出版社, 1996), pp. 162-163)
43 “遇性巧, 强於部分. 北都方山靈泉道俗居宇及文明太后陵廟, 洛京東郊馬射壇殿, 修太廣文昭太后 陵園, 太極殿及 東西兩堂, 內外諸門制度, 皆遇監作”(『魏書』 卷94 「列傳」 82 閹官 王遇傳: (中華書局, 1995), p. 2024); 王元林, 「十六國北朝時期關中東北部軍鎭李潤(堡)鎭考」, 『中國歷史地理論叢』 33(2018), p. 26.
49 사천왕사의 창건가람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을 참고함. 김동하, 「신라 사천왕사 창건가람과 유물 검토-발굴 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탐구』 23(2016), pp. 209-243.
55 今西龍, 「新羅文武王陵碑に就きて」, 『新羅史硏究』(國書刊行會, 1933), p. 413; 주보돈, 「통일신라의 (陵)墓碑에 대한 몇 가지 논의」, 『목간과 문자』 9(2012), pp. 46∼56.
56 洪思俊, 「新羅 文武王陵 斷碑-追記」, 『考古美術』 3-9호(1962): 최장미, 「사천왕사 출토 비편의 형태학적 검토」, 『역사와 경계』 85(2011), pp. 161-186; 최장미, 「사천왕사지 발굴조사 성과와 추정 사적비편」, 『목간과 문자』 8(2011), pp. 171-184.
57 사천왕사 입구에 비석 2기가 나란히 세워진 건축 축조방식은 흥미롭게도 중국에서 신라인을 위한 사찰에서도 엿보인다. 金州(섬서성 安康市)에는 636년 자장과 함께 당으로 간 僧實이 거주한 곳으로 유명하며, 639년 금주자사는 新羅寺를 건립하였다. 최근 이 사찰은 조사와 더불어 2기의 비석이 사찰 입구에서 조사되었는데, 이러한 사찰 축조방식은 신라 사찰의 특징이라고까지 해석되고 있다(李啓良, 「唐代金州新羅寺」, 『考古與文物』 6(2003), pp. 72-74).
59 최연식, 「8세기 신라 불교의 동향과 동아시아 불교계」, 『불교학연구』 12(2005), pp. 241-273; 김연민, 「신라 문무왕대 명랑의 밀교사상과 의미」, 『한국학논총』 30(2008), pp. 19-28; 한정호, 앞의 논문, pp. 192-193; Youn-mi Kim, “(Dis)assembling the NationalCanon: Seventh-Century “Esoteric” Buddhist Ritual, the Samguk Yusa, and Sach’onwang-sa,” New Perspectives on Early Korean Art:From Silla to Koryŏ, (Cambridge, MA: Korea Institute, Harvard University, 2013): pp. 123-191.
60 박태화, 「신라시대 밀교전래고」, 『조명기 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1965), p. 73; 김상현, 「사천왕사의 창건과 의의」, 『신라와 낭산』(신라문화제학술회의논문집 17, 1996), p. 138; 장익, 「명랑의 문두루법과 진호국가밀교」, 『밀교학보』 16(2015), pp. 21-32.
66 “제31대 신문대왕…돌아가신 선왕께서 이제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십니다. 또 김유신 공도 본래 33천 중 한 사람의 한 아드님인데 이제 이 땅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해 성을 지킬 보물을 내리려고 하시니…”(일연 지음, 이가원·허경진 옮김, 앞의 책, pp. 144-145).
67 김춘추는 당 태종으로부터 허락받은 당의 章服制를 귀국한 이듬해에 시행하였고, 곧이어 당의 연호까지도 채용하였다(권덕영, 『古代韓中外交史』(일조각, 1997), pp. 27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