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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遼 慶州白塔 천궁 출토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의 조상 연구*

Abstract

요 경주백탑은 장성황태후가 발원한 석가불사리탑이다. 필자는 천궁 출토 봉함주은누금법사리탑에 안치된 누금은경판과 탑신과 대좌의 조상 분석을 통해 당시 불사의 목적과 장성황태후의 염원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또한 조상 표현에 요 황실 고유의 샤머니즘 습속이 반영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당시 불사의 주된 목적은 성종의 도솔천 왕생 기원이었다. 그리하여 법사리탑 내 안치된 누금은경판에 『무구정경』중에서도 근본다라니의 망자 도솔천 왕생 문구만을 새겼다. 또한 탑신에는 경전 중의 인물 외도 겁비라전다를 최초로 조형화하였다. 장성황태후는 다가올 말법 시대에 요나라에 미륵이 하생하고, 자신이 염부제를 다스리는 전륜성왕 양거가 되길 염원했다. 그리하여 장성황태후는 탑신에서 금박산이 표현된 보살관을 쓰고 용화수 가지를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미륵불은 대좌에서 석가의 발우와 기러기 머리가 표현된 장대를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기러기 머리는 요 황실의 샤머니즘 제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종합해보면, 법사리탑 내부에는 미륵 상생 신앙에 기초한 누금은경판을 안치하였으며, 외부에는 미륵불 하생을 염원하는 황실 공양자와 이와 관련 있는 미륵불을 표현하였다.

Abstract

The Qingzhou White Pagoda is a śarīra pagoda of the Buddha Śākyamuni built by the commission of Empress Dowager Zhangsheng in the Liao Dynasty. This paper illuminates the aim of the Buddhist services undertaken at the Heavenly Palace of the Qingzhou White Pagoda and the Empress Dowager’s religious aspirations and wishes by examining the “gilt silver sutra plate” enshrined in the (Gilt Silver) Dharma Relics Pagoda and the engraved images and a statue on the Pagoda’s body and pedestal. Through the latter analysis, the paper also brings to light how the Pagoda conveys the shamanistic tradition of the Liao imperial court.
At the time, the Buddhist services had been mainly intended for Emperor Shengzong’s rebirth in the Tuṣita Heaven. For this reason, the “gilt silver sutra plate” is inscribed with an excerpt only relating to a rebirth in Tuṣita from the “Root Dharani” of the Great Dharani Sutra of Immaculate and Pure Light. Moreover, the images on the Pagoda’s body are engraved with the unprecedented inclusion of Jiebiluozhancha, a Brahman who also notably appears in the Sutra. The Empress Dowager wished Maitreya would descend to the earth, and she aspired to become a Chakravarti (King Saṅkha) destined to rule over Jambudvîpa in the Final Dharma Age. On the Pagoda’s body, the Empress Dowager is depicted wearing a crown of a bodhisattva with a golden grand mountain ornament(Jinboshan) and holding a branch of the naga-puspa tree. Meanwhile, Maitreya is shown on the pedestal of the Pagoda with Śākyamuni’s alms bowl in one hand and the other hand carrying a staff adorned with the head of a wild goose. The wild goose's head, in particular, is an image closely associated with the shamanistic rituals of the Liao imperial family. In sum, the inner space of the Dharma Relics Pagoda is a “gilt silver sutra plate,” which manifests the faith of Maitreya and rebirth in his Tuṣita Heaven, and its outer surface are the images displaying the aspiration of the royal donor for Maitreya’s descent and the corresponding portrayal of Maitreya Buddha.

Ⅰ. 머리말

요 거란족은 본래 샤머니즘을 신앙하였으나, 요 초기 황실에서 불교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장려하였다. 요 황실의 호불적인 태도는 요의 존속 기간 내내 이루어졌으며, 당시 동아시아 국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눈부신 수준의 불교문화를 이룩하였다. 이를 입증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重熙16-18年(1047~1049)에 현재 內蒙古 巴林右旗 慶州城에 세워진 慶州白塔이다(Fig. 1). 경주백탑은 요의 불교문화가 절정기에 달한 시점에 건립된 불탑으로, 興宗(1016~1055)의 생모 章聖皇太后(?~1058)가 발원하였다. 불탑의 형식은 7층 팔각 누각식 전탑으로, 요대 정식 명칭은 ‘釋迦佛舍利塔’이었다. 불탑 탑신에는 2명의 역사, 팔대영탑, 9명의 호인, 16나한, 56존 신장, 76좌 경당 등의 대형 부조상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부조상은 모두 백색 석회로 마감되어 순백의 아름다움과 종교적 장엄미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명실상부 요나라 최고의 불탑이다.
주목되는 것은 불탑 외부 뿐 아니라 내부에도 이에 못지 않는 진귀한 물품들이 안치되었다는 점이다. 불탑 건립 과정에서 여러 차례 대형 불사가 거행되었으며, 지궁, 탑심실, 천궁에 다량의 사리장엄구와 공양물이 안치되었다. 1988년에서 1992년에 진행된 보수 공사에서 천궁에 안치되었던 요대 문물들이 대다수 출토되었다.1 필자는 그중에서도 복발의 중심 즉 천궁 중실에서 출토된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이하 금법사리탑)에 주목하였다(Fig. 2). 이는 천궁에서 출토된 108좌의 법사리탑 중에서 유일하게 금속제이다. 금법사리탑은 단층 육각탑 형식으로, 실제 불탑을 방불할 만큼 사실적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탑찰 부분은 화려하면서도, 세세한 부분까지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다.2 금법사리탑은 그야말로 요 황실의 수준 높은 안목과 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도록과 문장에서 경주백탑에서 출된 주요 문물의 하나로 소개되었다. 법사리탑 자체는 물론 그 내부에 봉안된 鎏金銀經版과 경판에 새겨진 다라니까지 자세히 소개되었다.3 뿐 아니라 경판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당시 거행된 대불사의 성격도 일부 확인되었다.4
무엇보다 학계의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금법사리탑 탑신 정문 양쪽에 새겨진 두 인물 형상이다. 일찍이 학계에서 두 인물을 각각 경주백탑의 발원자인 장성황태후와 아들 흥종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5 아쉬운 점은 학계의 관심은 단순히 황태후와 황제라는 신분 확인에만 머물렀을 뿐 조형적 특징과 의미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탑신과 대좌에 함께 표현된 나머지 4구의 조상도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현재 금법사리탑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한 편도 없다. 이는 비록 천궁에서 다량의 문물이 출토되었지만, 봉안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동기와 목적이 직접적으로 기술된 결정적 기록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경주백탑 찰좌에서 출토된 「螭首造像建塔碑」(이하 「조상비」, Fig. 3) 6와 금법사리탑에 안치된 유금은경판에는 불사의 성격을 암시하는 기록이 일부 포함되었다(Fig. 6).7 그러나 직접적인 동기와 목적을 파악하기에는 정보량이 여전히 부족하다. 설상가상으로 이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지궁과 탑심실 출토 유물 역시 부족한 상태이다. 현재 경주백탑 지궁은 아직 미발굴 상태이며, 탑심실에 안치된 문물들은 대부분 일찍이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금법사리탑은 이제껏 장성황태후가 聖宗(972~1031)의 추복을 빌기 위해 안치를 명한 여러 법사리탑 중의 하나로만 여겨져 왔다.
필자는 금법사리탑이야말로 요 거란 민족 특유의 습속과 발원자 장성황태후의 종교적 염원이 고도로 압축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금법사리탑에는 적지 않은 조상이 표현되었으며, 불탑 내 발견된 그 어떤 기록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금법사리탑에 표현된 여러 조상 분석을 통해 금법사리탑 봉안의 의미와 황실의 종교적 염원을 구체적으로 밝혀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금법사리탑의 봉안 및 출토 정황 그리고 내부에 안치된 유금은경판의 내용을 간략하게 고찰하였다. 뒤이어 탑신과 대좌에 표현된 조상을 황실 공양자와 경전 속 존상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신분과 존명 그리고 조형 특징 및 의미를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조상 조합이 표현된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경주백탑 발원의 주요 동기와 이유를 고찰하였으며, 이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Ⅱ.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의 안치와 출토 정황

1. 천궁 오실의 유물 출토 정황

1988년에서 1992년까지 경주백탑 탑찰의 해체 및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찰좌와 복발에서 다량의 문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찰좌에서 발견된 「조상비」에는 “南閻浮提大契丹國, 章聖皇太后建, 釋迦佛舍利塔”8라 하여 경주백탑 발원자가 명확하게 언급되었으며, 건립 과정과 참여자도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Fig. 3) <table 1>. 이에 따르면, 경주백탑은 장성황태후가 발원한 ‘석가불사리탑’이었다. 중희 16년 2월 15일에 시공되었으며, 4월 18일에 지궁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중희18년 6월 15일에 7층까지 완공하였으며, 7월 15일에 천궁에 금법사리, 99본의 棖竿陀羅尼 그리고 제 공양구를 안치하였다. 당시 불사에는 玄寧軍節度使 張維保와 慶州僧錄 宣演大師 蘊珪 등의 다수의 관원과 고승이 참여하였다. 이들의 이름은 5층 탑신 내부에 새겨진 磚石碑에도 발견되며,9 이를 통해 동일 구성원이 여러 차례 대불사를 함께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table 2>. 구체적인 정황과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경주백탑의 복발은 구형으로, 외부는 상·중·하 삼단의 금속판으로 감싸져 있다. 또한 동·서·남·북에는 각각 오방으로 배치된 동경이 고정되었다(Fig. 4). 복발 내부에는 오방 구조의 천궁 오실이 설치되었으며(Fig. 5),12 장방형의 중실 정중간에 찰간이 관통하고 있다. 찰간의 좌‧우측에 형성된 두 공간에 각각 금법사리탑과 七佛法舍利大塔 1좌가 대칭적으로 안치되었다. 중실의 4면에는 정방형의 4실이 외접하고 있으며, 4실에는 사리탑 1좌, 법사리탑 106좌 그리고 다수의 공양물이 분산되어 안치되었다. 남실에 안치된 原木素旋舍利塔 1좌가 유일하게 사리탑이며, 나머지는 모두 법사리탑이다.13 이 중에서 2좌를 제외하고 나머지 104좌는 모두 칠불이 새겨진 칠불법사리탑이다.14 천궁 오실을 위에서 내려다 보면, 천궁 4실의 사리탑 1좌와 법사리탑 106좌가 중실에 안치된 두 법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중실의 두 법사리탑이 나머지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법사리탑임을 알려준다.

2. 鎏金銀經板의 봉안과 내용

금법사리탑 탑신에 장성황태후와 흥종 등의 황실 인물이 새겨졌으며, 내부에는 이들의 염원이 압축된 유금은경판이 안치되었다(Fig. 6).15 유금은경판은 길이 113센티, 폭 9센티로, 서두에는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라고 새겨졌다. 뒤이어 경전에 출처를 둔 총 6개 다라니가 차례대로 새겨졌으며, 법사리 진언과 회향문으로 마무리되었다. 잘 알다시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이후 『무구정경』)은 704년 미타산이 한역한 경전으로, 부처가 제개장보살의 청에 응하여 중생을 위해 설한 ‘無垢清淨光明大壇場法’이 소개되었다. 경판에는 대단장법을 구성하는 6개 다라니가 새겨졌으며, 각각은 根本陀羅尼, 相輪橖中陀羅尼, 修造佛塔陀羅尼, 自心印陀羅尼, 大功德聚陀羅尼, 六波羅蜜陀羅尼이다. 경판에 새겨진 다라니 내용과 순서는 경전과 완전히 일치하여, 그야말로 『무구정경』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근본다라니와 시방불다라니의 후미와 육바라밀다라니 서두에는 특정 공덕과 작법 관련 경전 문구가 새겨졌다<table 3>. 이를 통해 당시 불사의 중심 내용이 간접적으로 확인되며, 각각의 공덕과 작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금은경판에 가장 먼저 새겨진 다라니는 근본다라니이다. 경전에서 부처는 근본다라니가 수명연장, 업장 소멸, 극락왕생, 치병, 국가 수호 등 다방면의 공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주술로도 파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하다고 설한다. 또한 77본의 근본다라니 혹은 근본다라니를 안치한 77개의 소탑을 불탑에 봉안한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고 설한다. 또한 이를 안치한 불탑은 신묘한 효력이 있어, 탑 그림자 속에 들어가거나 몸만 스치는 생명체의 모든 죄업을 소멸시키며, 나라가 위험에 처하면 불탑에서 군대가 나타나 나라와 백성을 지킨다고 한다.16 이외에도 병자를 위해 77번 다라니를 염송하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 또한 망자를 위해 77번 염송하면 천상이나 도솔천에 태어나 보리를 이루게 된다고 한다.17 유금은 경판에는 상술한 여러 공덕 중에서도 망자 추복에 해당하는 부분만 새겨져 있으며, 그중에는 도솔천 왕생이 포함되어 있다<table 3>. 실제 불사에 沙門 守恆이 塔主 講法華經上生經精修大德으로 참여하였고,18 복발 내벽에서 2권의 『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을 봉안하였다.19 이것으로 보아, 필자는 당시 불사에서 『무구정경』에 의거한 작법을 주요하게 시행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상생 신앙’에 기초하여 永慶陵에 안치된 성종의 도솔천 왕생을 염원한 것이 아닌가 한다.20
둘째, 그 다음은 상륜당중다라니이다. 부처는 99벌의 상륜당 다라니를 불탑의 상륜에 안치하면, 이는 9만9천의 상륜당, 부처사리탑, 팔대보탑, 보리장탑을 세운 것과 같다고 한다. 또한 이 탑을 예배 공양하거나, 탑의 그림자 안에 있거나 혹은 탑의 풍경소리, 이름만 들어도 모든 죄업과 업장이 소멸된다고 한다.21 「조상비」에 의하면, 중희16년 7월 15일에 복발 내 천궁 4실에 99본의 장간다라니를 안치하였다. 실제 천궁 4실에서 총106좌의 법사리탑이 출토되었으며, 내부에 안치된 장간다라니에는 모두 「梵字相輪樘中陀羅尼呪」가 포함되어 있다.22 즉, 기록과 출토 수량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경전 상에 기술된 99개의 상륜당중다라니 안치 규정을 충족하고 있는 셈이다.23
셋째, 수조불탑다라니이다. 부처는 불탑을 조성하거나 중수할 때 1008번 다라니를 외우면, 다라니의 신력으로 불탑의 규모와 상관없이 수명연장, 극락왕생 등의 선근과 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24 또한 주문을 써서 이를 불탑이나 불탑의 상륜당에 안치해도 엄청난 선근과 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넷째, 자심인다라니이다. 자심인다라니는 제개장보살이 부처를 본받아 중생들을 위해 설한 다라니이다. 자심인다라니를 99번 써서 탑에 안치하고 예배 공양하면, 모든 업장이 소멸하고 원하는 바를 다 이룬다고 한다.25 또한 8, 13, 14, 15일에 깨끗이 목욕재계하고 공복 혹은 세 가지 흰 음식(우유, 타락, 멥쌀)을 먹은 상태에서 불탑을 오른쪽으로 돌면서 자심인다라니를 외우면 염송 횟수가 많을수록 다양한 더 큰 공덕을 얻게 된다고 한다.26
다섯째, 대공덕취다라니이다.27 부처는 불탑 앞에는 방형 공양단을 설치하고, 상륜당과 탑의 네 귀에는 근본다라니, 상륜당중다라니, 수조불탑다라니, 자심인다라니 즉 四大陀羅尼를 안치하고 염송하라 설한다. 특히 28번 외우면, 팔대보살과 호법신장과 제천신들이 탑과 상륜당을 호지하며, 99억 백천 나유타 항아사의 부처님들이 탑을 가지하고 부처님 사리를 모신다고 한다.28 또한 이 작법을 행한 자는 수명이 연장되고 모든 병고와 재앙이 소멸된다고 한다. 뿐 아니라 이 탑을 보는 이, 탑의 풍경 소리를 들은 자는 오역죄와 악업이 소멸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한다고 한다. 특히 탑의 이름을 들은 자는 불퇴전의 지위에 이르며, 탑의 이름을 들은 새와 짐승들은 축생의 갈래에서 벗어나 광대한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유금은경판에는 상술한 사대다라니가 안치된 불탑을 보거나 들어서 얻게 되는 효력만 새겨졌다<table 3>.
여섯번째는 육바라밀다라니이다. 부처는 육바라밀을 성취하려거든 상술한 사대다라니를 안치한 소탑 99좌를 상륜당에 안치하고, 방형 공양단을 설치하고 7번 돌면서 염송하라고 설한다. 이는 99억 백천 나유타의 칠보탑을 세우고, 99억 백천 나유타의 여래에게 공양하는 것과 같아 엄청난 선근과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한다. 육바라밀다라니 역시 작법시 염송하는 다라니이지만, 자체적인 공덕도 가지고 있다. 이 다라니를 별도로 쓰거나 염송하면, 공양자는 물론 공양자와 접촉하는 이 모두 업장과 죄업이 소멸되며, 원수와 나쁜 무리들도 해를 끼치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이 다라니를 불탑에 안치하면, 탑을 지나가는 중생은 물론 새와 짐승 그리고 곤충들까지도 천궁에 태어나 불퇴전하지 않는다고 한다.29 유금은경판에는 육바라밀다라니의 서두에 공앙단을 설치하고 7번 염송하는 작법 방법만 새겨졌다<table 3>.

Ⅲ. 황실 공양자의 신분과 조형 특징

1. 황실 공양자의 신분

금법사리탑 정문 양쪽에는 총 4명의 공양자가 새겨졌다(Fig. 7). 이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사리탑 정문 왼쪽의 여성 공양자이다. 두부에는 화려한 보관을 착용하고 있으며, 양 손을 위아래로 하여 긴 가지를 들고 있다. 여성 공양자는 양 볼이 축 처진 긴 얼굴에 코 끝이 내려간 매부리코를 하고 있다. 긴 소매의 장포를 착용하였으며, 옷깃을 左衽式으로 여미고 있다. 정문 오른쪽의 남성 공양자는 둥근 얼굴에 코 끝이 뭉툭하게 표현된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두부에는 半球 형태의 고관을 쓰고 있으며, 소맷자락이 발목까지 늘어진 장포를 입고 있다. 또한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하고 있으며, 손가락이 유난히 가늘고 길게 표현되었다. 생김새로 보면, 여성 공양자가 남성 공양자보다 더 연배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여성 공양자는 특유의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4명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학계에서 두 남녀 공양자를 각각 장성황태후와 흥종을 표현한 것으로 확신했다.30
양자의 뒤쪽에는 각각 한 명의 여성 공양자가 표현되었다. 모두 머리를 양 갈래로 올려 묶고 있으며, 공양물이 담긴 쟁반 혹은 보병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 모두 순종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 으레 시중을 드는 시녀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 역시 황실 인물을 표현한 것이며, 옷자락 표현을 통해서 명확히 입증된다. 보병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여성 공양자의 소매 사이로 끝이 뾰족한 끈자락이 살짝 드러나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朝陽北塔 천궁에서 출토된 중희12년 은편 <彌勒下生說法圖>에서 발견된다(Fig. 8).31 중앙에 주존인 미륵이 표현되었으며, 그 앞쪽에 무릎을 꿇은 두 황실 공양자가 표현되었다. 남성 공양자는 두부에 `‘王’ 자가 새겨진 면류관을 쓰고 있으며, 두 손에 笏을 쥐고 있다. 여성 공양자는 나비형 헤어 스타일을 하고 두 손 모아 합장한 모습이다. 필자는 두 공양자는 조양북탑 대중수를 지원하였던 흥종과 仁懿皇后를 각각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32 특히, 흥종의 면류관에 ‘王’자가 새겨진 것은 흥종을 미륵 하생시 염부제를 다스리는 전륜성왕 ‘蠰佉’에 이입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33 양자의 다리 사이에는 원형 장식이 달린 끈자락이 표현되었으며, 이는 상술한 보병을 든 여성 공양자의 끈자락과 완전히 일치한다(Fig. 7, Fig. 8). 이것으로 보병과 공양물을 든 두 여성 공양자 역시 황실 인물을 표현한 것임이 확인된다.

2. 章聖皇太后의 이중 고관, 좌임식 착의 그리고 용화수 가지

금법사리탑에서 장성황태후는 화려한 고관을 착용하고, 위엄과 절도 있는 자태를 지닌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황태후는 요 성종의 차비이자, 요 흥종의 생모였다. 황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권력 지향적이면서 냉혹한 인물이었다. 성종 사후, 정비인 齊天皇后와 그 일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34 이에 그치지 않고, 아우 蕭孝先과 함께 아들 흥종도 폐위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알려져, 도리어 경주 七括宮에 5년간 유폐되고 만다.35 중희8년 흥종이 모후를 다시 궁으로 모셨으며, 회궁한 장성황태후는 이전과 달리 불사에만 전념한다.36 당해에는 흥종과 함께 궁에 초청된 고승의 법문을 들었으며, 중희11년 宣獻皇后의 기일에 延壽寺, 憫忠寺, 三學寺에서 飯僧을 하였다.37 또한 중희16년에는 경주백탑의 건립을 발원하였으며, 중희18년에는 雲岡石窟도 중수하였다.38 현재 장성황태후가 유폐되기 이전의 불사 활동 기록이 없기 때문에, 태후가 본래부터 독실한 불자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회궁 이후 불사에 적극적이었음은 틀림없다. 또한 도종이 친히 작성한 清寧四年(1058) 哀冊文에는 “勤求實際,普全六行之餘, 洞達三乘之義,動必協於人心,靜必從於佛意”라 하여,39 태후를 매우 독실한 불자로 묘사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금법사리탑에는 장성황태후의 초기 권력지향적 성향과 후기의 독실한 불자의 모습이 동시에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바로 황태후가 두부에 착용한 고관이다. 고관의 형태는 원통형의 보관 정면에 다시 삼각형 형태의 고관을 중첩시킨 이중 고관이다(Fig. 9). 역대 작품 중에서 예불하는 황제와 황후의 모습이 표현된 예가 적지 않다. 이중 고관을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된 예는 금법사리탑에 표현된 장성황태후가 유일하다. 이러한 특수한 표현에 장성황태후의 권력 의지와 종교적 염원이 함께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장성황태후의 종교적 염원은 이중 고관의 형태에서 일차적으로 확인된다. 고관의 전체적인 형태는 중희7년 華嚴寺 薄伽教藏殿내 보살상이 착용한 두 종류의 보살관과 매우 유사하다.40 현재 전각 내에는 총 31구의 소상이 안치되었으며, 그중 18구가 보살상이다. 보살상은 당말·오대의 조형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고관, 雲肩 등 요 특유의 특징도 현저하다. 특히 두부에 착용한 고관은 보살상의 가장 두드러진 외형 특징이다. 총 14구의 보살상이 고관을 착용하였으며, 그 형태는 크게 변형된 삼각형 고관 혹은 원통형 고관으로 구분된다.41 전자는 삼각형 형태로, 중심부에는 마치 깃털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 여러 개의 직선 문양이 위로 우뚝 솟아 있다(Fig. 10). 후자는 모두 원통형 고관으로, 보관 표면은 상·중·하단부로 불균등하게 구분되었다(Fig. 11). 장성황태후의 이중 고관 중 앞쪽의 고관 중심부에도 여러 개의 직선문이 표현되었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화엄사 박가교장전 보살상의 삼각형 고관과 일치한다. 뒷쪽 고관은 대부분 가려져 있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상술한 박가교장전 보살상의 원통형 고관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고관 표면이 상·중·하단으로 구분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장성황태후가 보살관 형태의 고관을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독실한 불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둘째, 이중 고관에서 장성황태후의 권력 지향적 성향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바로 중심부 정면의 오각형 ‘金博山’이다. 금박산은 고대 중국 황제의 通天冠에 쓰이던 장식이다. 이에 관해서는 『後漢書』卷30 「輿服志」 下에 “通天冠, 高九寸, 正豎, 頂少邪卻, 乃直下為鐵卷梁, 前有山, 展筩為述”라고 기술되어 있다.42 이러한 내용은 『晉書』, 『南齊書』, 『舊唐書』 그리고 『新唐書』 등에서도 발견된다<table 4>. 실제 작품에서 금박산 표현은 晉代부터 나타나며, 唐代 금박산에 매미를 붙이거나 혹은 王자를 새긴 예도 발견된다. 대표적인 작품은 바로 閻立本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歷代帝王圖>(Fig. 12)이다. 총 13명의 황제가 그려졌으며, 그중 6명의 통천관에 오각형 금박산이 표현되었다(Fig. 13). 각각은 漢나라 光武帝 劉秀, 魏나라 文帝 曹丕字, 吳나라 孫權, 蜀나라 劉備, 晉나라 武帝 司馬炎, 北周의 武帝 字文邕, 隋文帝 楊堅이다. 요나라 역시 이러한 제도를 계승하였으며, 『요사』에는 “皇帝通天冠, 諸祭還及冬至, 朔日受朝, 臨軒拜王公, 元會, 冬會服之.冠加金博山, 附蝉十二, 首施珠翠.黑介帻, 髮缨翠, 玉若犀簪导”47라고 기술되었다. 종합해보면, 장성황태후의 고관 표현에는 독실한 불자로서의 모습 외에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정치 권력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도 고스란히 표출되었다 하겠다.
이외에도 장성황태후의 착의법과 두 손에 든 지물은 상술한 내용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시각적 증거이다. 먼저 장성황태후는 장포를 좌임식으로 착용하였다. 좌임식은 한족이 아닌 북방 이민족의 착의 방식으로, 거란의 착의 방식이기도 하다. 요묘 벽화에서 좌임식 착용을 한 거란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는 한족과 거란족을 각각의 습속에 따라 통치하는 南北面의 이원제를 시행하였으며, 복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48 『요사』 권55 「禮儀志一」에는 “遼國自太宗入晉之後, 皇帝與南班漢官用漢服, 太后與北班契丹臣僚用國服, 其漢服即五代晉之遺制也”라 하였다.49 즉, 황제는 南班의 한족 관리와 함께 漢服을 입고, 태후는 北班의 거란 관원과 함께 國服 즉, 거란 고유의 복식을 입었다. 이러한 제도와 습속이 장성황태후의 모습에도 엄격하게 반영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기록과 표현의 일치는 장성황태후가 상술한 이중 고관도 실제 착용했을 가능성도 높여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도록과 연구 논문에는 장성황태후가 연화가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는 연화가지가 아니라 용화수 가지를 표현한 것이다. 가지의 끝에는 긴 타원형의 것이 여러 방향으로 포개져 있는데, 이는 하나의 가지에 달린 여러 장의 용화수 나뭇잎의 실제 모습과도 매우 흡사하다(Fig. 14).50 『佛說彌勒下生經』51, 『佛說彌勒下生成佛經』52과 『佛說彌勒大成佛經』53 등의 경전에 따르면, 미륵은 56억 7천만년 후에 도솔천에서 염부제 翅頭末城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고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한다. 이는 후술할 대좌 앞에 고정된 하생하는 모습의 미륵불과 연결되며, 장성황태후가 금박산이 장식된 이중 고관을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된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즉, 장성황태후는 다가올 말법시대 요나라에 미륵이 하생하기를 염원하였으며, 미륵 하생시 자신이 염부제를 다스리는 전륜성왕 ‘양거’로 화현되기를 바랬던 것이다.54 이는 동시에 장성황태후가 중희 연간 초 권력 장악을 진행하던 중 칠괄궁에 유폐되어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지 못한 절대 권력에 대한 종교적 승화라 하겠다.

3. 흥종의 半球形 두관

금법사리탑에 표현된 흥종은 장성황태후와 달리 소박한 형태의 관모를 착용하고 있다(Fig. 15). 관모는 전체적으로 반구 형태이며, 그 위쪽에는 약간의 주름 장식이 모호하게 표현되었다. 정면 중앙에는 절개선이 있으며, 양 하단 우측에는 두 개의 짧은 脚이 달려 있다. 관모 위쪽의 주름과 중앙의 절개선 표현은 요 거란 귀족 묘장에서 출토된 남녀 鎏金冠과 유사한 면이 있다.55 주름 표현은 귀족 남성 유금관 상부 금속편의 굴곡 있는 테두리 표현과 유사하며, 절개선 표현은 귀족 여성 유금관 정면의 금속편 이음새와 유사하다. 대표적인 사례인 陳國公主와 부마 蕭紹矩 합장묘에서 출토된 高翅鎏金銀冠과 卷雲鎏金銀冠을 통해서 보다 명확하게 확인된다(Fig. 16, Fig. 17).56 그러나 양자 모두 표면에 화려한 문양이 투각되었다는 점이 흥종의 반구형 두관과 결정적으로 다르다.57 이것으로 보아 흥종의 두관 표현은 요 황실 고유의 표현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표현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에 앞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흥종의 두관이 장성황태후의 이중 고관에 비해 매우 소박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조적인 표현은 흥종을 의도적으로 제2인자의 모습으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실제 흥종은 제2인자가 아니었다. 장성황태후는 성종 사후 즉시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중희3년 흥종에 의해 유폐되고 만다.58 특히 중희 6년을 전후하여 蕭孝先과 秦國夫人을 비롯한 장성황태후의 최측근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다.59 그 후 중희8년 장성황태후는 흥종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회궁하게 되지만, 예전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60 황태후는 이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거의 잃은 상태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자주 병환으로 앓아눕게 된다.61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흥종의 두관은 요 황실 실제 관식의 전면적 반영이라기보다 종래 미술 표현 상의 관습을 일부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 요 이전에 제작된 불교 혹은 도교 작품 중에서 이와 유사한 두관 표현이 쉽게 발견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당말·오대의 <地藏十王圖>와 도교 회화 <朝元仙仗图>와 <八十七神仙卷>등이 있으며,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장시왕도>는 당말·오대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졌으며, 『地藏十王經』, 『佛說預修十王生七經』, 『道明和尚還魂記』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62 冥府의 판관 시왕은 遠遊冠 혹은 각이 달린 반구 형태의 관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작품으로 돈황석굴 제8굴 주실 남벽의 지장시왕도,63 오대 시기의 지장시왕도(Stein painting9) 64와 지장시왕도 (Stein painting23) 65 등이 있다. 특히 山西省 臨猗縣의 송대 불탑 지궁에서 출토된 불화는 금법사리탑과 좋은 비교 대상이 된다.66 양자 모두 불탑에서 발견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다. 불화는 삼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상단의 중심에는 妙觀察智印을 한 아미타불좌상이 표현되었다. 중단 양쪽에는 각각 석장을 들고 두건을 쓴 지장보살과 보주를 여래형의 존상이 표현되었다.67 그 아래에는 방형 제단이 설치되었으며, 단의 양쪽에 遠遊冠 혹은 각이 달린 둥근 형태의 관모를 쓴 시왕이 표현되었다(Fig. 18).
둘째, 도교 회화 <조원선장도권>(Fig. 19, Fig. 20)와 <팔십칠신선권>이다. 전자는 北宋 武宗元의 원본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자는 이를 임모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두 작품에는 도교 최고의 신인 元始天尊을 배알하는 도교 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서 扶桑大帝가 흥종과 같은 각이 달린 반구형의 관을 착용하고 있다(Fig. 20). 그 앞쪽에 東華天帝과 南極天帝이 모두 면류관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모두 부상대제보다 계위가 높다. 동화대제군은 천지간의 최고의 남성 신선이며, 남극대제군은 원시천존의 아들이다. 이것으로 보아 계위와 연동된 관모 표현이 금법사리탑의 황실 공양자 표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 아닌가 한다.
주목되는 것은 清寧二年(1056)에 건립된 應縣木塔에서 출토된 경권에서도 이러한 독특한 두관 표현과 설정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응현목탑 역시 황실 지원하에 건립된 불탑이다.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학계에서는 應州 출신의 仁懿 皇后와 그 집안이 불탑 건립을 지원한 것으로 잠정적으로 추정하고 있다.68 경권은 1974년 응현목탑 4층의 주존 석가불좌상의 내부에서 총 47점이 출토되었다.69 그중 12점은 契丹大藏經이며, 나머지 35점은 요대 민간에서 조판된 경전이다. 양자를 통틀어 총 13개 경전 서두에 경전의 내용을 압축한 卷首画가 포함되었으며, 현재 6점이 공개되었다.70 그중 3점은 각각 『묘법연화경』권3, 권4, 권8에 수록된 것으로, 청중 가운데 모두 각이 달린 반구형의 두관을 쓴 인물이 발견된다. 권3과 권4에는 석가의 좌측에서 설법을 듣는 각국의 제왕들 중의 한 명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권8에서는 주존 석가의 좌측에 배치되었으며, 우측의 면류관을 쓴 인물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Fig. 21).71 이는 역대 <법화경변상도>에서도 보기 드문 요대 특유의 인물 배치 및 표현법으로, 상술한 흥종의 두관 표현과 의미가 황실 내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72

Ⅳ. 경전 관련 조상의 존명과 조형 특징

1. 外道 劫比羅戰茶

금법사리탑 정문의 정반대 쪽에는 단신의 노인상이 새겨졌다(Fig. 22). 함께 선각된 황실 인물에 비하면, 노인의 행색은 매우 초라하고 볼품없다. 노인은 맨발에 넝마를 걸쳤으며, 등이 굽은 자세에 찡그린 표정을 하고 서 있다. 양쪽으로 툭 튀어나온 광대뼈는 푹 꺼진 팔자 주름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정수리에 묶어 올린 머리는 한올 한올 세세하게 표현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어지럽게 흐트러져 볼품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행색은 초라하나, 가슴 앞쪽에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호리병 형태의 보병을 공손히 받쳐 들고 있다. 또한 양팔에는 긴 천의 자락을 걸친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어, 그 정체가 매우 주목된다.
이 노인은 누구를 표현한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불교 미술에 표현된 볼품없는 행색의 노인이 주로 外道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경전에는 많은 외도가 기술되었으며, 대표적인 예로는 六師外道, 梵志, 婆藪仙, 勞度差 등이 있다. 이들은 석가 혹은 사리불과 법을 겨루며, 일부는 석가의 감화를 받아 불법에 귀의한다. <涅槃經變相>, <窂度叉變相>, <報恩經變> 등의 작품에 조연으로 등장하고 있다.73 이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北魏 시대 운강석굴 9굴 전실 북벽의 범지가 있다(Fig. 23). 금법사리탑에 표현된 노인은 『무구정경』 중의 외도 劫比羅戰茶이다.74 경전에 따르면, 겁비라전다는 본래 불교를 믿지 않는 바라문이었다.75 7일 후에 죽을 것이라는 관상가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다 석가를 찾아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석가는 그에게 탑을 수리하거나 상륜당을 만들고 다라니를 안치하면, 수명이 연장되고, 수명이 다하면 極樂世界, 妙喜世界, 兜率天에 순차적으로 태어나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알려준다.
경전과 실제 작법 내용을 살펴보면, 겁비라전다는 무구정광대다라니 신앙의 출발점이자, 경주백탑 건립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경전 속의 인물이었다. 겁비라전다가 요 황실 공양자와 함께 표현된 이유는 건립 불사에서 요 황실이 『무구정경』에 의거한 다수의 작법을 시행했으며, 그중에서도 근본다라니가 가진 두 가지 특수 공덕 ‘도솔천 왕생’과 ‘호국’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76 실제 천궁에 안치된 다른 105좌의 칠불법사리탑에서 3종 다라니선집으로 구성된 장간다라니가 출토되었으며,77 그중 2종이 『무구정경』의 작법을 따르고 있다. 각각은 범자로 새겨진 「범자상륜당중다라니주」와 『무구정경』 중의 사대다라니가 새겨진 「사대다라니주」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조상비」에는 99본의 장간다라니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경전 내용과 수량을 살펴보면, 전자는 상륜당중다라니 작법에 의거한 것이며, 후자는 자심인다라니 작법에 의거한 것이다.78 이외에도 경주백탑 2층에서 7층까지의 탑신에는 76개의 경당 부조가 배치되었으며, 당신 3면에는 근본다라니, 수조불탑다라니, 자심인다라니가 새겨졌다.79 또한 찰좌 남면에 배치된 소탑에도 상술한 3개의 다라니가 새겨졌다. 77좌의 수량은 근본다라니 작법에 의거한 것이며, 근본다라니는 유일하게 ‘망자 추복’과 ‘국가 수호’라는 두 개의 공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80
의문이 드는 것은 왜 갑자기 겁비라전다가 형상화되었는가이다. 역대 작품에서 『무구정경』에 의거하여 작법을 실행한 예는 다수지만, 겁비라전다가 표현된 작품은 없다. 금법사리탑의 노인은 겁비라전다를 조형화한 최초이자, 유일한 작품이다. 필자는 이러한 조형 표현에는 경전 외적인 요소도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이는 요 황실 고유의 제의 ‘柴冊儀’와 ‘再生儀’가 아닌가 한다. 양자 모두 제의 과정에 노인이 비중 있게 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책의는 황제 즉의 예례로, 태종 때부터 행해졌다.81 제의를 거행하기 전에 길일을 택하고, 柴冊殿과 壇을 만든다. 단은 나무를 쌓은 3층으로, 그 위에 백 척의 담요와 용 문양의 방형 방석을 펴놓는다. 뒤이어 모후의 재생을 위한 搜索室도 설치한다. 재생의를 끝낸 황제는 八部 노인들의 인도와 부축을 받아 시책전의 동북쪽 모퉁이로 간다. 황제는 拜日儀를 마치고, 말을 탈 때 外戚 노인이 말을 몰게 한다. 황제가 언덕에 도착하면 대신과 제 부족의 장수들이 의장을 갖추고 절을 한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신하들의 충성과 맹세를 확인한다. 그리고 선제의 어용을 배알하고,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다음날 황제는 다시 단에 오르며, 七廟의 신주를 받들어 네모난 방석 위에 놓는다. 그러면 군신들은 담요의 가장자리를 들고 讚祝를 올린다. 이를 마치면, 樞密使가 玉冊과 玉寶를 들고 나간다. 有司가 책을 읽은 뒤에 추밀사가 존호를 칭하여 올리면, 군사들은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모두 다시 절을 한다. 각부의 장수들이 紫羊과 白羊을 각각 한 무리씩 진상한다. 황제는 옷을 갈아입고, 여러 선제의 어용을 배알하고, 군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차등 있게 물품을 하사한다.
둘째, 재생의는 어머니의 노고를 일깨우는 의식으로, 12년마다 거행한다.82 구체적으로 황제의 본명년 1년 전 12월 길일에 행한다. 궁문 북쪽에 땅으로 고르고, 재생실과 모후실을 만들어 先帝 神主與를 배치한다. 뒤이어 재생실 동남쪽에 三岐木을 거꾸로 세운다. 당일 동자와 산파는 실내에, 부인 1명은 술을 들고 노인은 失䈲을 들고 실외에 있는다. 선제의 위패 수래 앞에서 치전을 올리고, 침전에서 재생실로 들어가면, 군신들이 재배를 올린다. 황제는 침전에서 옷과 버선을 벗고, 동자를 따라 심기목의 아래를 3번 지나간다. 매번 지나갈 때마다 산파가 치사를 하며 황제의 몸을 쓸어내린다. 동자는 기목을 7번 지나고, 황제가 기목 곁에 누워 있으면, 노인이 䈲을 치며, 사내를 낳았다고 한다. 太巫가 황제의 머리를 덮어주고, 일어나면 군신들이 하례를 올리고 재배를 한다. 산파가 술을 든 부인에게 술을 받아서 올리면, 태무가 강보와 채결 등의 물품을 받아서 축하를 한다. 미리 일곱 노인을 선별하여, 각각 어명을 지어 비단을 묶어서 무릎을 꿇린다. 황제는 그 중에서 좋은 이름을 받아서 선물을 하사한다. 황제는 선제의 여러 어용에 절을 올리고, 군사들에게 잔치를 벌여준다. 원칙상은 12년마다 거행이나, 실제 부정기적으로 거행된 적지 않은 사례도 있다. 실제 경주백탑 건립 중인 중희 18년 6월에도 재생의가 거행되었다.83 이는 경주백탑 천궁에 공양물을 안치하는 불사가 거행되기 전이며, 동시에 요-서하 간의 제2차 전쟁에 참여하기 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84 또한 겁비라전다의 조형화에 요 황실 고유의 습속도 일정 정도 반영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2. 미륵불

1) 발해풍의 조상

금법사리탑의 대좌 앞쪽에는 4등신 비율의 입상 한 구가 별도로 고정되어 있다(Fig. 23). 입상은 장방형의 넓적한 얼굴에 길고 높은 코 그리고 입을 지긋이 다문 모습이다. 넓은 하관은 전체적으로 후덕한 느낌을 주며, 부릅뜬 반달형 눈은 이러한 느낌을 다소 상쇄하고 있다. 두부는 나발이 생략되었으며, 정수리에 돌출된 육계는 공형이다. 대의는 통견식으로 걸쳤으며, 그 안에 내의를 입었다. 주먹 쥔 오른손 사이에 기러기 머리가 표현된 장대가 꽂혀 있으며, 왼손바닥 위에는 발우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다. 비록 요 흥종 연간에 제작되었지만, 공형 육계, 장방형 얼굴, 4등신 비율 등의 표현이 발해의 상경 용천부 즉 지금의 黑龍江省 寧安縣 渤海 西地村에서 출토된 발해 여래입상과 매우 유사하다(Fig. 24).85 이러한 현상은 요 초기 상경 지역에 강제 유입된 다수의 발해 유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은 요 皇城에서 12킬로 되는 곳에 발해 小古城을 지어 거주하였다.86 912년에는 崇文을 비롯한 50명의 발해 승려가 天雄寺를 건립하고, 발해인이 真寂寺石窟 개착 공사에 참여하는 등 요 초기 상경 지역 불교 문화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87 또한 요 초기 상경 지역에서 발해풍의 나한상이 유행하였으며, 이는 요 후기까지 지속되었다.88 금법사리탑 대좌의 입상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 상에 있다 하겠다.

2) 발우

금법사리탑 탑신에서 장성황태후가 용화수 가지를 든 모습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대좌의 입상은 도솔천에서 염부제로 하생하는 미륵불을 표현한 것이다.89 이와 연동하여 미륵불의 왼손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은 최종적으로 미륵에게 전해지는 석가의 발우를 표현한 것이다. 西晉의 竺法護가 한역한 『普曜經』, 수대 闍那堀多가 한역한 『佛本行集經』, 당나라 초기 地婆何羅가 한역한 『大方廣大莊嚴』, 그리고 義淨이 한역한 『根本說一切毘奈破僧經』등 경전에는 석가가 사용한 여러 종류의 발우가 언급되어 있다.90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사천왕이 부처님께 바친 발우이며, 간다라 지역에서 이러한 내용의 작품이 다수 확인된다.91 또한 간다라 페샤와르 지역에는 사천왕이 바친 4개의 발우를 합친 것으로 믿어진 실물 발우가 있었고, 이는 당시 석가의 성불로 숭배되었다. 5-6세기 많은 중국 승려들이 이곳을 순례하였으며, 이러한 신앙은 중국에도 직접적으로 전해졌다. 『高僧法顯傳』에도 법현이 인도 승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발우는 인연에 따라 여러 나라를 유전하다가 중국에 도착하여 다시 중천국에 돌아간다. 다시 도솔천과 용궁으로 유전하며, 마지막에 미륵보살이 성도할 때 발우는 4개로 쪼개지고, 사천왕은 석가 때와 마찬가지로 발우를 공양한다고 한다.92
동일한 내용이 수대 開皇四年(584) 那連提黎耶舍가 한역한 『蓮華面經』下卷에도 서술되어 있다.93 이는 간다라 지역의 발우 숭배 신앙이 중국에서도 직접적으로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경전적 근거이다. 또한 『연화면경』은 요 天慶五年(1115)에 석경으로 제작되었으며, 천경8년에 壓經塔 아래 지궁에 안치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Fig. 26).94 이것으로 이 경전이 요대에도 널리 신앙되고 유통되었음이 확인된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곧 열반에 들어야 하는 석가는 아난에게 미래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석가 열반 후 계빈국 외도 富蘭那의 제자 연화면이 아라한에게 공양을 올린다. 연화면은 공양을 올릴 때마다 미래에 법을 파괴할 것이라고 맹세한다. 후에 연화면은 ‘寐吱曷羅俱邏王’으로 태어나 석가의 발우를 깨뜨리고 阿鼻大地獄에 떨어진다. 석가의 발우가 깨어진 이후 불제자들은 점점 계율을 지키지 않고, 마지막에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두 멸도하게 된다. 그러자 석가의 발우는 北方波羅鉢多國, 四天王國, 兜率天國, 化樂天 등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중생의 공양을 받고, 점점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발우와 사리가 널리 다니며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가장 마지막에 염부제의 미륵불 처소에 머문다.95 미륵불은 중생들에게 석가의 발우와 사리가 이곳에 오게 된 연유를 설법하고, 4기의 보배탑 안에 안치하여 자신은 물론 제 천인들이 공경하고 예배하게 된다.
종합해보면, 금법사리탑에서 미륵불이 왼손에 든 석가의 발우는 불법의 연속을 상징하며, 이는 상술한 경전 내용과도 완전히 부합한다. 주목되는 것은 미륵불의 발우는 요 황실의 경전을 초월한 종교적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장성황태후는 금법사리탑이 안치된 경주백탑의 소재지, 慶州城이 미래에 미륵불이 하생하는 염부제의 ‘翅头末城’이 되기를 염원한 것이다.96 발우를 사용하여 요 황실의 이러한 염원이 표현된 작품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조양북탑 천궁에서 출토된 은편에는 석가의 열반 장면이 새겨졌으며, 열반상의 위쪽에는 날아가는 발우를 잡기 위해 몸을 날리는 석가의 제자가 표현되었다(Fig. 27). 열반 관련 작품에서 이러한 발우가 표현된 예는 매우 드물며, 이 역시 금법사리탑의 예와 마찬가지로 요 흥종 연간 황실 내에 성행한 말법 신앙이 반영된 표현이 아닌가 한다.

3) 기러기 머리가 달린 장대

미륵불은 오른손에 기러기 머리가 표현된 긴 장대를 쥐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불교 미술의 도상과 동떨어진 매우 이질적 표현이며, 역대 작품 중에서 이러한 장대를 든 미륵불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이러한 독특한 미륵불의 갑작스러운 탄생에는 이에 상응하는 특수한 배경이 수반되었다고 생각된다.
『요사』 「本紀」와 「營衛志」 기록을 살펴보면, 요 거란인에게 있어 기러기는 사냥의 대상이자 동시에 제사에 바치는 제물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매년 정월 상순 요 황제는 신하를 거느리고 長春州의 鸭子河濼으로 가서 60일 가량 고기잡이와 기러기 사냥을 하며 冬捺缽하였다.97 이와 별도로 天讚3年(924) 8월에는 烏孤山에 이르러 기러기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98 應力十八年(968)에도 기러기를 잡아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99 비록 『요사』에는 그 기록이 소략되어 있지만, 실제 기러기를 잡아 제사를 지냈던 횟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주목되는 점은 거란족 무속인이 이러한 제사를 주재했다는 것이다. 『요사』에는 대제사에서 무속인의 역활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먼저, 祭山儀에서 太巫는 흰 수건과 백의를 착용하고, 술을 땅에 붓고 제사를 지냈다.100 기우를 염원하는 瑟瑟儀에서는 동남쪽에 심은 버드나무에 주례를 올린다.101 孟冬朔拜陵儀에서는 축문을 읽고 고기와 시복을 올리고 술을 땅에 뿌리고 제물을 올렸다.102 喪葬儀에도 참여하여 拔除 의식을 하였다.103 歲除儀에서는 순차대로 火神을 찬송하고 축하하였다.104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미륵불이 기러기 머리가 표현된 장대를 들고 있는 것은 샤머니즘 습속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요 초기 황실에 불교가 유입되어 적극적으로 신앙되었지만, 거란 본연의 신앙은 여전히 샤머니즘이었다. 요 태종이 백의관음을 황실의 가신으로 모셨으며,105 국가적인 제산의에서 백의관음을 샤머니즘의 신들과 함께 예배하였다.106 요 성종 연간을 기점으로 요대 불교는 매우 성행하였지만, 요 성종은 여전히 무속인을 파견하여 전역의 명산에 제를 올리게 하였다.107 이후 요 흥종대에는 제산의에서 가장 먼저 백의관음에 예를 지내게 하는 등 명확하게 불교에 경도되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요 황실에서는 여전히 각종 샤머니즘 제사가 거행되었다.108 특히 흥종이 자신이 유폐한 황태후를 다시 궁으로 모실 때, 사전에 무속인에게 점을 쳐서 기일을 정하게 하였다.109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금법사리탑에서 미륵불이 기러기 머리가 표현된 장대를 쥔 것은 황실에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샤머니즘적인 제사 습속이 표출된 것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요 흥종 조에 백의관음과 마찬가지로 미륵불을 샤만 신의 하나로 이해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110 이외에 清寧四年(1057) 韓知白과 輔國大師 思孝의 주도하에 진행된 獨樂寺白塔 지궁 공양불사에서도 동일한 기러기 모양의 장식품이 안치되었다(Fig. 28).111 한지백은 계주 지역 출신이자, 요 世宗(918~951), 穆宗(931~969), 景宗(948~982)연간 중임을 맡았던 韓匡嗣(917~982)의 후손이다.112 실제 요 경종연간 한광사의 요청으로 독락사 觀音閣이 중수된 바 있다. 사효는 흥종과 도종 두 황제의 두터운 신임과 숭앙을 받았던 고승으로, 覺華島에 거주하면서 여러 불서를 저술하였다.113 또한 여러 차레 황궁에 초청 받아 법문을 설하였으며, 황족 출신 志智가 그의 법문을 들고 출가하였다.114 흥종은 그를 스승이라 하였으며, 여러 차례 서신으로 장기간 문안을 주고 받았다.115 이렇듯 양자와 황실 간의 특수한 관계로 볼 때, 요 황실에 만연한 샤머니즘 습속과 분위기가 일부 민간에도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향후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논의해보고자 한다.

Ⅴ. 맺음말

이상 금법사리탑의 출토 현황, 누금은경판의 내용과 탑신과 대좌에 표현된 조상의 신분과 조형 특징 및 의미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누금은경판과 조상 간의 관계를 분석하여, 불사의 목적과 염원을 재확인하고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
먼저, 누금은경판에는 『무구정경』의 근본다라니 공덕 중에서도 망자의 도솔천 왕생이 새겨졌다.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주처하는 4번째 욕계이며, 망자는 바로 성종이다. 장성황태후가 경주백탑을 건립한 주요 동기는 바로 성종의 도솔천 왕생이었으며, 이는 ‘미륵 상생’ 신앙에 기초한 것이다. 『무구정경』에 의거한 유금은경판의 봉안은 이러한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 중의 하나였으며, 경전 중의 외도 겁비라전다도 역대 최초로 조형화되었다.
뒤이어, 미륵불은 장성황태후와 흥종 등의 황실 공양자보다 한층 아래 대좌에 배치되어, 미륵 하생의 의미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륵불은 요 초기 상경 지역에 유행했던 발해 양식 으로, 기러기 머리가 표현된 ‘장대’와 불법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석가의 발우’를 들고 있다. 장성황태후는 금박산이 표현된 이중 고관과 좌임식 장포를 착용하고, 두 손에 용화수 가지를 든 모습이다. 화엄사 박가교장전의 보살관과 유사한 이중 고관이 독실한 불자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면, 고관 정면에 새겨진 황제의 관식 금박산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권력 의지가 종교적으로 승화된 것이다. 두 손에 든 용화수 가지와 상술한 미륵불을 연결지어 해석하면, 장성황태후는 경주성이 바로 말법시대 미륵불이 하생하는 시두말성이라고 믿었다. 미륵의 용화수 설법을 듣고 자신을 비롯한 요나라의 중생들이 구제받기를 염원하였으며, 미륵 하생시 자신이 시두말성을 다스리는 ‘양거’와 같은 전륜성왕이 되고자 하였다. 이에 반해 흥종은 반구형의 두관을 쓴 매우 검소한 모습의 이인자로 표현되었으나, 실제 실권을 쥔 제왕이자 독실한 불자였다. 비록 현재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지만, 반구형 두관의 의미와 형식이 요 도종 연간에서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종합해보면, 금법사리탑 내부에는 성종의 도솔천 왕생을 기원하는 유금은경판이 안치되었으며, 외부에는 장성황태후의 미륵 하생의 염원과 함께 전륜성왕이 되고자 하는 개인적 소망이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즉, 유금은경판에 미륵 상생 신앙에 기초한 당장의 염원이 반영되었다면, 장성황태후와 대좌에 고정된 미륵불 형상에는 미륵 하생 신앙을 바탕으로 한 먼 미래의 염원과 소망이 표현된 것이다. 이외에도 장성황태후의 좌임식 장포, 노인 형상의 외도 겁비라전다, 미륵불이 들고 있는 기러기 머리가 달린 장대에는 요 황실 고유의 습속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미륵불이 든 장대 상부의 기러기 머리는 요 불교 성행 중에서도 황실 내에서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샤머니즘의 영향력을 확인해주며, 이 역시 응당 발원자 장성황태후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Notes

1) 경주백탑 천궁 출토 문물은 현재 정식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으며, 관련 자료는 출토 당시의 상황을 정리한 간략보고서와 발굴 참여자가 출판한 소책자 그리고 간략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기초 연구가 있다. 德新·張漢君·韓仁信, 「內蒙古巴林右旗慶州白塔發現遼代佛教文物」, 『文物』 (1994, 12), pp. 4-33; 張漢君, 「遼代慶州白塔建塔碑銘考」, 『中國建築學會建築史學分會會議論文集』 (1994), pp. 41-49; 邱瑞中, 「遼慶州白塔佛教文物安置規矩與建塔緣起考」, 『內蒙古社會科學』 (1996, 4), pp. 35-40; 清格勒, 「遼慶州白塔塔身嵌飾的兩件紀年銘文銅鏡」, 『文物』 (1998, 9), pp. 67-68; 趙豐, 「遼慶州白塔所出絲綢的織染繡技藝」, 『文物』 (2000, 4), pp. 70-81; 劉志安, 「遼代釋迦佛舍利塔內出土的“無垢淨光大陀羅尼經”鎏金銀板」, 『北方文物』 (2002, 1), pp. 52-53; 韓仁信, 「遼慶州白塔文物志略與紀聞」 (中國戲劇出版社, 2005), pp. 1-255; 古松崇志, 「慶州白塔建立谜をさくる—11世纪契丹皇太后か奉纳した佛教文物」, 『遼文化·遼宁省調查報告書』 (京都大學大學院文科研究科, 2006), pp. 133-175; 王珊·李曉岑·陶建英·郭勇, 「遼代慶州白塔佛經用紙與印刷的初步研究」, 『文物』 (2019, 2), pp. 76-93과 96; 성서영, 「요 경주백탑 천궁 출토 칠불법사리탑의 유형과 봉안 의미」, 『선문화연구』 32(2022), pp. 331-384.

2) 봉함주은유금법사리탑의 탑찰은 복발, 3개의 보주, 풍탁이 달린 2개의 산개로 구성되었으며, 사리장엄구로는 보기 드물게 탑찰의 정점에 진주 장식을 문 봉황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특징과 내부에 안치된 경판은 간략보고서에서 이를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라 명명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디자인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십자형의 진주 장식이 景教의 십자가가 아니라 마노석의 절리가 문양화되어 발전한 瑪瑙花紋을 표현한 것임을 밝혀냈다. 이는 成敘永, 「遼代瑪瑙花紋的實例與特征」, 『清華大學藝術博物館官刊』 1期(2021), pp. 46-59.

3) 유금은경판은 劉志安, 위의 논문, pp. 52-53.

4) 古松崇志, 앞의 논문, p. 157.

5) 위의 논문, p. 156.

6) 경주백탑 찰좌 내부에서 두 개의 건탑비가 출토되었다. 간략보고서에는 碑首의 특징에 따라 「螭首造像建塔碑」와 「圓首建塔碑」로 구분하였다.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p. 9, 22-23, 그리고 33. 필자는 동일한 기조를 유지하여, 각각을 「조상비」와 「원수비」로 약칭하였다.

7) 古松崇志는 유금은경판에 근본다라니 공덕 중에서 망자의 추복 관련 내용만 새겨졌고, 음력 7월 15일 우란분절에 불사가 거행된 사실을 근거로 당시 건탑 불사가 성종의 추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위의 논문, pp. 153-157.

8)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 33.

9) 위의 논문, p. 33.

10) 「조상비」의 내용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였으며, 원문은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 33.

11) 성서영, 「경주백탑 초층 탑신 鬼箭을 든 신장상 연구」, 『몽골학』 67(2021), pp. 237-243.

12) 「조상비」에는 “…相肚中安置金法舍利並四面安九十九本…”라 하였다. 여기에서 相肚는 상륜부의 복발을 말하며, 필자는 경주백탑 복발 내부의 오실을 ‘천궁 오실’이라 칭하였다. 필자와 달리 간략보고서에는 이를 ‘상륜당 오실’이라고 칭하고 있다. 相輪樘은 탑찰부 전체를 이르는 말이며, 경주백탑 탑찰부 복발과 찰좌에는 상술한 오실 외에도 여러 봉안 공간이 있어, 이에 대한 혼동을 막기 위해 복발 내 천궁 오실이라 하였다.

13) 천궁 오실 출토 사리탑과 법사리탑은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 29 표2.

14) 천궁 오실 출토 칠불법사리탑 유형과 봉안 의미는 성서영, 앞의 논문, pp. 331-384.

15) 劉志安, 앞의 논문, pp. 52-53; 古松崇志, 앞의 논문, pp. 151-157.

16) 『大正藏』第19冊, p. 718b.

17) 『大正藏』第19冊, p. 713c.

18)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 33.

19) 위의 논문, p. 25.

20) 요 황실에서 미륵 상생 신앙에 의거하여 법사리 및 공양물 안치한 사례는 경주백탑 건립 이전에 거행된 조양북탑 천궁 불사에서도 발견되며, 이에 관해서는 다른 논고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21) 『大正藏』第19冊, p. 719a.

22) 「조상비」에서 장간다라니라고 지칭한 것은 경권을 기둥과 같은 형태로 둥글게 말았기 때문이다. 장간다라니는 「梵字相輪樘中陀羅尼呪」, 「佛形象中安置法舍利記」, 「四大陀羅尼呪」의 3종류로 구성되었다. 「범자상륜당중다라니주」만 紫铜板로 제작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마종이 인쇄본이다. 즉, 자동판 상륜당중다라니주를 축으로 나머지 종이본 다라니주를 둥글게 말았으며, 이를 다시 명주로 싼 다음 법사리탑에 봉안하였다. 장간다라니 형식과 구성은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20; 성서영(2022), p.335 주7.

23) 천궁 오실 내 법사리 안치에 관해서는 성서영, 앞의 논문, pp. 335-343.

24) 『大正藏』 第19冊, p. 719b.

25) 위의 책, p. 720a.

26) 위의 책, p. 720b와 성서영, 「망자의 추복과 국가 수호-요 경주백탑 77좌 ‘무구정광소탑’과 根本陀羅尼-」, 『동아시아불교문화』 48(2021), p. 322.

27) 경전에서 대공덕취다라니와 육바라밀다라니는 제개장보살이 부처를 모방하여 설하는 다라니로, 다라니 용도와 공덕만을 서술되었을 뿐, 구체적인 다라니 명칭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기존 연구에서는 다라니 공덕에 의거하여 각각을 ‘대공덕취다라니’와 ‘육바라밀다라니’라 지칭하고 있다.

28) 『大正藏』 第19冊, p. 720c.

29) 위의 책, p. 721a.

30) 古松崇志, 앞의 논문, p. 144.

31) 기존 연구에서 이를 모두 <석가설법도>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주존의 형상과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이는 <미륵하생설법도>가 아닌가 한다. 필자는 2012년 12월 25일에 조양북탑 천궁에서 출토된 4편의 은편을 모두 친견 및 조사할 수 있었다. 휴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조사를 허락해주신 조양북탑 박물관의 劉大志 부관장님, 王志华 연구원 그리고 孫唯舜 님께 다시 한번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32) 필자는 <미륵하생설법도> 중에 요 흥종과 그의 정비 인의황후가 출현한 것은 이들에게 미륵 하생시 미륵에 귀의한 전륜성왕 양거와 그의 부인을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표현은 요 흥종 연간 요 황실에 성행했던 말법 신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서영, 「조양북탑 탑부조상의 도상 연구」, 『미술사연구』 27(2013), pp. 195-196; 성서영, 앞의 논문, 369-375 그러나 이와 다른 관점도 있다. 먼저 조양북탑 발굴 조사 보고서에는 주존이 석가불이며, 두 인물은 각각 황제의 모습을 한 梵天과 황후의 모습을 한 帝釋天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朝陽北塔博物館 編, 『朝陽北塔: 考古發掘與維修工程報告』 (文物出版社, 2007), p. 72; 이외에 김연미 역시 주존이 석가불이라고 보았으며, 『요사』 기록을 근거로 면류관을 쓴 인물은 황실 가족을 신격화한 형상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김연미, 「요대 조양북탑 사리공과 진언종 여법존승법의 기원」, 『미술사와 시각문화』 10(2011), p. 189와 p. 209 주104.

33) 竺法護가 한역한 『佛說彌勒下生經』과 鳩摩羅什가 한역한 『佛說彌勒下生成佛經』 경전에는 미륵 하생시 염부제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은 ‘蠰佉’이며, 鳩摩羅什가 한역한 『佛說彌勒大成佛經』에는 ‘穰佉’, 義靜이 한역한 『彌勒下生成佛經』에는 ‘餉佉’라고 한역되었다.

34) (元)脫脫, 『遼史』 (中華書局, 2016), p. 242.

35) 위의 책, p. 1324.

36) 위의 책, p. 250.

37) 위의 책, p. 260.

38) 1947년 宿白이 북경대학교 도서관 필사본 정리 중 『永樂大典·順天府志』에 수록된 『析津志』을 발견하였다. 『析津志』의 편자 熊自得가 至元二十三年(1363)에 운강석굴을 직접 방문하여 필사한 金 皇统七年(1147)에 작성된 「大金西京武州山重修大石窟寺碑」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문에는 “…遼重熙十八年母后再修…”라 기술되었으며, 이를 통해 장성황태후가 운강석굴을 중수하도록 명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최근 운강석굴에서 요대 사원 유적이 발견되었다. 상술한 비문과 요대 사원 유적은 宿白, 「“大金西京武州山重修大石窟寺碑”校注——新发现的大同云岗石窟寺历史材料的初步整理」, 『北京大学学报(人文科学)』 (1956, 1), pp. 79-80; 雲岡石窟文物保管所·文物保護科學技術研究所, 「雲岡石窟建築遺跡的新發現」, 『文物』 (1976, 4), pp. 89-93; 宿白, 「大金西京武州山重修大石窟寺碑的發現與研究——與日本長廣敏雄教授討論有關雲岡石窟的某些問題」, 『北京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1982, 2), p. 31; 谷敏·張慶捷 等, 「雲岡石窟窟頂二區北魏遼金佛教寺院遺址」, 『考古學報』 (2019, 1), pp. 109-163.

39) 태후의 애책문은 田村實造·小林行雄,「慶陵: 東モンゴリアにおける遼代帝王陵とその壁畵に關する考古學的調査報告」(1953), pp. 233. 한역하면, “부지런히 실제를 구하였으며, 널리 육행의 나머지까지 완전히 하였다. 삼승의 뜻을 통달하였으며, 움직임은 반드시 사람의 마음에 화합하고, 정지함은 반드시 부처의 뜻을 따랐다.”

40) 화엄사 박가교장전 전각 내 梁에는 건립 시기 기록한 두 개의 묵서가 남아 있다. 각각은 “維重熙七年歲次, 戊寅九月甲午朔十五日戊申時建”와 “推誠竭節功臣, 大同軍節度使雲, 弘德等州觀察, 處置等使, 榮祿大夫檢校太尉, 同政事門下平章, 使持節雲州 諸軍事, 行雲州刺史, 上柱國, 弘農郡開國公, 食邑四千戶, 食實封四百戶楊又玄”이다. 이에 따르면, 박가교장전은 중희7년(1038)에 대동군 절도사 양우현의 책임 하에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황실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처음 건립 시는 작은 소형 불전에 불과하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전각에 안치된 존상 내용과 특징으로 보아 실질적으로 황실 지원하에 건립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다른 논고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41) 화엄사 박가교장전의 보살상의 고관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그중에서도 ‘원통형 고관’은 일찍이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다른 종류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며, 명칭 역시 보관의 주요 문양에 따라 각기 다르게 명명되고 있다. 필자는 형태에 근거하여, ‘변형 삼각형 고관’이라고 명명하였으며, 고관의 특징과 구체적 의미는 다른 논고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42) (南朝宋) 范晔, 『后漢書』 (中華書局, 1965), p. 3665. 이 부분의 내용은 “通天冠은 높이 9촌이고, 똑바로 세운다. 정수리에서 약간 비스듬하게 줄어들다가 곧게 내려 铁卷梁을 만든다. 앞에 山이 있고, 展筩으로 述을 만들며, 천자(乘輿)의 상복이다”. 乘輿은 고대 천자 혹은 제후가 타던 수레를 말하며, 황제의 별칭이기도 하다. 황제라는 명칭은 秦代 이후로 사용하였으므로, 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43) 황제가 아닌 천자(a son of Heaven)로 번역한 이유는 본고 주 41 참조.

44) 『南齊書』 (中華書局, 1972), p. 341.

45) 劉昫 編, 『舊唐書』 (中華書局, 1975), p. 1937.

46) 歐陽修·宋祁 编, 『新唐書』 (中華書局, 1975), p. 515.

47) (元)脫脫, 앞의 책, p. 1010.

48) 위의 책, pp. 1007-1014.

49) 위의 책, p. 1000.

50) 출처는 https://www.flickr.com/photos/blackdiamondimages/3627796399/in/photostream/

51) 『大正藏』 第14冊, pp. 421a-423b.

52) 위의 책, pp. 423c-425b와 426a-428b.

53) 위의 책, pp. 428b-434b.

54) 혹자는 필자의 이러한 견해를 장성황태후의 환생 바램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 거란족은 죽으면, 그 혼백을 국경 북쪽의 흑산(黑山)의 신이 관장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동짓날 천자는 백색의 양, 말, 기러기를 잡아 흑산을 향해 望祭를 지냈으며, 五京에서는 종이로 人馬 1만개를 만들어 흑산에 제사를 올리고 불에 태웠다. 거란인들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여 제사를 올리지 않으면 흑산에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元) 脫脫, 앞의 책, p. 957. 요 흥종 연간 불교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고, 장성황태후도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황실 내에서 거란족 특유의 샤머니즘적 습속과 믿음도 여전히 굳게 지켜졌다. 장성황태후에 대한 추가적인 기록 및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상태에서 장성황태후가 윤회에 기초한 환생까지 철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현재 명확하게 입증할 수 없다.

55) 요대 다수의 귀족 묘장에서 鎏金冠이 다수 출토되었다. 대다수는 한차례 도굴된 이후 발견되어, 묘주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러나 남녀의 용도 구분이 명확하며, 문양도 조금씩 다르다. 여성 유금관은 양쪽에 긴 날개 모양의 관식이 달려 있어, ‘高翅冠’이라 명명되었다. 남성 유금관은 형태 혹은 장식 문양에 따라, 명칭이 ‘山冠’, ‘卷雲冠’, ‘蓮葉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이외에도 보살관 형태의 보관을 ‘焊腰’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賈璽增, 「遼代金冠」, 『收藏家』 (2011), pp. 96-113; 成敘永, 「遼代白衣觀音造像研究」, 『東亞都城和帝陵考古與契丹遼文化國際學術研討會文集』 (科學出版社, 2016), pp. 439-441.

56) 이는 內蒙古自治區文物考古研究所·哲裡木盟博物館, 『遼陳國公主墓』 (文物出版社, 1993), pp. 65-71.

57) 요대 귀족 유금관의 표면은 여러 문양으로 화려하게 투각되었으며, 이러한 특징은 불·보살상의 보관 표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成敘永, 앞의 논문, pp. 439-441.

58) (元)脫脫, 앞의 책, p. 1324.

59) 陳述, 『全遼文』(中華書局, 1982), pp. 148-149.

60) (元)脫脫, 앞의 책, p. 250.

61) 위의 책, p. 271.

62) 王惠民, 「中唐以後敦煌地藏圖像考察」, 『敦煌研究』 (2007, 1), pp. 24-33, 115-116 그리고 118-120.

63) 郭俊叶, 「敦煌晚唐“地藏十王”圖像補說」, 『華夏考古』 (2011, 4), pp. 116-119와 130.

64) ジャック·ジエス 编, 秋山光和等 譯, 『西域美术Ⅰ: ギメ美术馆ペリオ·コレクション』 (講談社, 1982), 도 23-1.

65) ジャック·ジエス 编, 秋山光和等 譯, 『西域美术Ⅱ: ギメ美术馆ペリオ·コレクション』 (講談社, 1982), 도24-1.

66) 張獻哲, 「山西臨猗發現兩幅五代絹畫」, 『文物』 (1984, 7), pp. 53과 102; 喬正安, 「臨猗縣仁壽寺北宋塔宮清理簡報」, 『文物季刊』 (1995, 1), pp. 19-24; 張總, 「風帽地藏像的由來與演進」, 『世界宗教文化』 (2012, 1), pp. 87-88.

67) 張總은 두 존상이 모두 지장보살을 표현하였으며, 주존 아미타와 함께 双지장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張總, 「風帽地藏像的由來與演進」, 『世界宗教文化』 (2012, 1), pp. 87-88.

68) 張暢耕은 95년 초고에서 응현목탑은 응주 출신인 인의황후와 그의 집안이 발원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수정 보완된 논문이 2001년 『遼金史論壇』6집에 실렸으며, 이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그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張暢耕·寧立新·支配勇, 「契丹仁懿皇后與應州寶宮寺釋迦塔」, 『遼金史論壇』6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1), p. 136.

69) 國家文物局文物保護科學技術研究所·山西省古代建築保護研究所·山西省雁北地區文物工作站·山西省應縣木塔文物保管所, 「山西應縣佛宮寺木塔內發現遼代珍貴文物」, 『文物』 6期 (1982), pp. 1-8; 閻文儒·傅振倫·鄭恩淮, 「山西應縣佛宮寺釋迦塔發現的『契丹藏』和遼代刻經」, 『文物』 6期 (1982), pp. 10-13.

70) 각각은 『妙法蓮華經』 3점, 『大法炬陀羅尼經』 1점, 『大方廣佛華嚴經』 2점이다. 閻文儒·傅振倫·鄭恩淮, 위의 논문, pp. 9-19.

71) 『묘법연화경』은 통상적으로 7권본이지만, 응현목탑 출토 本은 8권이다. 8권은 본래 권7의 「묘음보살품」, 「관세음보살보문품」, 「다라니품」, 「묘장엄왕본사품」, 「보현보살권발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72) 응현목탑 출토 <법화경변상도>의 구성과 반구형 두관을 쓴 인물의 출현과 의미는 다른 논고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73) 외도의 형상은 王惠民, 「婆藪仙與鹿頭梵志」, 『敦煌研究』 2期(2002), pp. 64-70; 王惠民, 「執雀外道非婆藪仙辨」, 『敦煌研究』 1期(2010), pp. 1-7; 呂德廷, 『佛教藝術中的外道形象 ——以敦煌石窟為中心』, (蘭州大學博士學位論文, 2015), pp. 1-196.

74) 成敘永, 앞의 논문, p. 430.

75) 『大正藏』 第19冊, p. 717c.

76) 성서영, 앞의 논문, pp. 301-355.

77)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 20와 본문 주석 17.

78) 성서영, 앞의 논문, pp. 337-343.

79) 성서영, 앞의 논문, pp. 317-322.

80) 『大正藏』 第19冊, pp. 718b-718c.

81) 요대 시책의는 (元)脱脱, 앞의 책, pp. 930-931; 島田正郎, 「契丹の再生礼」, 『遼朝史の研究』 (東京, 1979), pp. 339-348(원문은 『民族學研究』 14권(1949)에 수록), 金渭顯, 『契丹社會文化史論』 (경인문화사, 2004), pp. 87-90(원문은 『거란의 土俗考』, 『明大論集』 15호, 1984).

82) 요대 재생의는 (元)脱脱, 위의 책, pp. 930-931; 島田正郎, 위의 책, pp. 321-338(원문은 『民族學研究』14권(1949)에 수록), 金渭顯, 위의 책, pp. 87-90.

83) (元)脱脱, 앞의 책, p. 274.

84) 성서영, 앞의 논문, pp. 329-331.

85) 발해 서지촌 출토 입상은 孫元吉·變萬象, 「渤海故都上京龍泉府發現金佛」, 『北方文物』(1991), p. 17; 최성은, 「발해 상경성의 불상 - 동아시아 불교조각과의 비교연구-」, 『동북아역사논총』 27 (2010), p. 32; 허형욱, 「한국 고대 약사여래 신앙과 도상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2017), pp. 197-203.

86) 渤海小城은 高雅輝·葛華廷, 「遼長泰縣考」, 『遼金歷史與考古』 (2015), pp. 32-40.

87) (元)脱脱, 앞의 책, p. 6.

88) 요 상경 전적사 석굴은 남, 북, 중굴로 구성되었으며, 중굴과 남굴의 내벽 3면에는 발해풍의 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 李逸友, 「內蒙古巴林左旗前後昭廟的遼代石窟」, 『文物』 12期(1961), pp. 38-39. 발해풍의 조상에 관해서는 다른 논고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89) 필자와 달리 요대 미륵불 사상이 그다지 성행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혹은 상술한 존상을 미륵불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藤原崇人, 『契丹仏教史の研究』 (法蔵館, 2015), pp. 191-192; 성서영, 앞의 논문, p. 330 주61.

90) 이주형, 「발우의 유전: 인도 불교미술의 불발 경배」, 『중앙아시아연구』 12(2007), pp. 112-119.

91) 위의 논문, pp. 97-128.

92) 『大正藏』 第51冊, p. 863a.

93) 『大正藏』 第12冊, pp. 1075c-1077b.

94) 요대 운거사 방산석경 사업은 성종 대 시작되어 흥종, 도종 조에도 이어졌다. 도종의 출자는 도중에 중지되었으나, 通理大師 출자 발원으로 각경 사업은 계속될 수 있었다. 그 후 대안10년(1094)년에 출자금이 소진되었으며, 사문 善銳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선사들의 유풍을 따르기로 뜻을 모았으며, 천경7년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천경8년에는 도종과 통리대사의 주도하에 완성된 석경과 비문 총 4260편을 운거사의 서남쪽 지하 석실에 매장하였으며, 그 위에 석탑 1좌를 세웠다. 이것이 바로 운거사 남쪽에 세워진 壓經塔이며, 탑신에 사문 志才가 이상의 내용을 기술한 「涿州 涿鹿山 雲居寺 續密藏石經塔記」가 새겨져 있다. 林元白, 「房山雲居寺塔和石經」, 『文物』 Z1期(1961), p. 67; 陳述, 앞의 책, pp. 328-330; 塚本善隆, 『中国近世仏教史の諸問題』 (大東出版社, 1975), pp. 493-536. 상술한 「연화면경」은 천경5년에 陳國別胥가 시주하였으며, 金吾太师 참여하였고, 志核가 새겼다. 여기서 진국별서는 蕭義의 부인이자, 天祚帝 德妃의 어머니이다. 장녀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각경 사업에 많은 시주를 하였으며, 적지 않은 기록이 「전요문」에 남아 있다. 陳述, 앞의 책, p. 299, 309-313.

95) 『大正藏』 第12冊, p. 1077b.

96) 성서영, 앞의 논문, pp. 330-331

97) (元)脱脱, 앞의 책, pp. 425-426.

98) 위의 책, p. 22.

99) 위의 책, p. 93.

100) 위의 책, pp. 928-929.

101) 위의 책, p. 929.

102) 위의 책, pp. 931-932.

103) 위의 책, p. 933.

104) 위의 책, p. 932.

105) 위의 책, p. 504.

106) 위의 책, p. 929.

107) 위의 책, p. 144.

108) 위의 책, p. 929.

109) (南宋)葉隆禮, 『契丹國志』 (中華書局, 2014), p. 88.(“重熙八年…帝聽講報恩經感悟, 即遣使迎法天皇后, 館置中京門外, 筮日以見, 母子如初…).

110) 요대 백의관음상과 샤머니즘과의 관계는 成敘永, 앞의 논문, pp. 427-461.

111) 天津歷史博物館考古隊·薊縣文物文管所, 「天津薊縣獨樂寺塔」, 『考古學報』 1期(1989), p. 102.

112) 宿白, 「獨樂寺觀音閣與薊州玉田韓家」, 『文物』7期, 1985, pp. 32-48

113) 보국대사 사효에 관해서는 野上俊静, 「契丹高僧の小傳と其の佛の教學の傾向」, 『契丹佛教文化史考』(第一書房, 1982), pp. 98-99; 朱子方, 「遼代佛學著譯考」, 『遼金史論集』 第2輯(1987), pp. 182-184; 野上俊静, 金申 譯, 「遼代高僧思孝」, 『佛教美术丛考续编』 (華齡出版社, 2010), pp. 278-282; 成敘永, 「遼代八大菩薩造像研究」, 『遼金歷史與考古』 1期(2017), pp. 101-102.

114) 陳述, 앞의 책, pp. 300-302.

115) 위의 책, p. 31.

Fig. 1.
<慶州白塔>, Qingzhou White Pagoda, 1047~1049, Liao Dynasty, Bairin Right Banner, Chifeng City, Inner Mogolia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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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 Gilt silver dharma relics pagoda with a phoenix holding a pearl in the mouth, 1047~1049, Liao Dynasty, Balin Youqi Museum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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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螭首造像建塔碑>, Pagoda stele with hornless dragon heads, 1049, Liao Dynasty, Balin Youqi Museum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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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慶州白塔 覆缽>, Inverted bowl of the Qingzhou White Pagoda, 1049, Liao Dynasty, Balin Youqi Museum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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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慶州白塔 天宫 五 室 >, Five chambers of the heavenly palace of the Qingzhou White Pagoda, 1048, Liao Dynasty (Neimenggu Balinyouqi Qingzhoubaita faxian Liaodai Fojiaowenwu, 1994, 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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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鎏金 銀 經 板>, Gilded-silver sutra plate, 1047~1049, Liao Dynasty, Balin Youqi Museum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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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 탑신에 새겨진 조상>, Figures engraved on the body of the Gilt silver dharma relics pagoda with a phoenix holding a pearl in the mouth, 1047~1049, Liao Dynasty, Balin Youqi Museum (Qidan wangchao: Neimenggu Liaodai wenwu jinghua, 2002, pp. 33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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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朝陽北塔 天宫 출토 銀片 <彌勒下生說法圖>>, Silver plate engraved with the descended Maitreya Buddha preaching, excavated from the heavenly palace of the Chaoyang North Pagoda, 1042~1044, Liao Dynasty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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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에 표현된 章聖 皇太后>, Empress Dowager Zhangsheng in Fig2 (detail), 1047~1049, Liao Dynasty, Balin Youqi Museum (Qidan wangchao: Neimenggu Liaodai wenwu jinghua, 2002, pp. 33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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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華嚴寺 薄伽教藏殿의 변형 삼각 형 고관을 쓴 菩薩像>, Bodhisattva with a tall deformed triangular pointed crown in the Bhagavat Sutra Hall of Huayan Te m ple, 1038, Liao Dynsaty, Datong City, Shanxi Province (Photograph and adjustment by Suhyoung Sung,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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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華嚴寺 薄伽教藏殿의 원통형 고 관을 쓴 菩薩像>, Bodhisattva with a tall cylindrical crown in the Bhagavat Sutra Hall of Huayan Temple, 1038, Liao Dynasty, Datong City, Shanxi Province (Photograph and adjustment by Suhyoung Sung,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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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歷 代帝王圖>, Emperors of the Past Dynasties, 650~699, Tang Dynasty, attributed to Yan Liben, Museum of Fine Art Boston (ⓒ Museum of Fine Art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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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隨文帝 楊堅 (세부)>, Emperor Wen of the Sui Dynasty, Detail of Yang Jian in Fig. 12, 650~699, Tang Dynasty, Museum of Fine Art Boston (ⓒMuseum of Fine Art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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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龍華樹>, Naga-puspa tree (ⓒBlack Diamond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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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鳳銜珠銀鎏金法舍利 塔에 표현된 興宗>, Detail of Emperor Xingzong in Fig.2, 1047~1049, Liao Dynasty, Balin Youqi Museum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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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陳國公主與駙馬合葬墓에서 출토 된 駙馬 蕭紹矩의 鎏金银冠>, Xiao Shaoju’s Gilt silver crown, excavated from the tomb of the Princess of Chenguo and her husband Xiao Shaoju, ca. 1018, Liao Dynasty, Inner Mongolia Museum (Caoyuanguibao: Neimengguwenwukaogujingpin, 2000, 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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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陳國公主與駙馬合葬墓 에서 출토된 陳國公主의 鎏金银 冠>, Princess of Chenguo’s Gilt silver crown, excavated from the tomb of the princess of Chenguo and her Husband Xiao Shaoju, ca.1018, Liao Dynasty, Inner Mongolia Museum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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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山西省 臨猗縣의 北宋代 불탑 지궁에서 출토된 불화 세부>, Detail of a silk painting, excavated from the underground palace of Song Pagoda, ca.1056, Northen Song Dynasty, Linyi County, Shanxi province, Shanxi Museum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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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朝元仙仗圖 중의 東華大帝 君>, Detail of Master Donghuada, Procession of Immortals Paying Homage to the Primordial, Private collection (http://gaoqing.3zitie.cn/zt/20154/2015427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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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朝元仙仗圖 중의 扶桑天帝>, Detail of Fusang Heavenly Emperor Procession of Immortals Paying Homage to the Primordial, Private collection (http://gaoqing.3zitie.cn/zt/20152/2015221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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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1.
<應縣木塔 4층 釋迦牟尼佛像 내부 출토된『妙法莲华 经』卷8의 卷首畫 (세부)>, Detail of a frontispiece of Lotus Sutra (vol.8), excavated from the main Buddha statue on the forth floor of the Yingxian Timber pagoda, ca.1056, Liao Dynasty, Yingxian muta Guanhu Zhongxin(Yingxianmuta Liaodai Micang, 1991,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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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2.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 에 새겨진 劫比羅戰茶>, Detail of Jiebiluozhancha in Fig. 2, 1047~1049, Liao Dynasty, Balin Youqi Museum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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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3.
<雲岡石窟 第9 窟 前室 의 梵志>, Brahman Fanzhi on the antechamber of Yunkang Cave 9, after 465, Northern Wei, Datong City, Shanxi Province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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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4.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 대좌 앞에 고정된 彌勒 佛>, Detail of Maitreya Buddha in Fig. 2, 1047~1049, Liao Dynasty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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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5.
<渤海 上京龍泉府 출토 입상>, A standing statue, excavated from the Bohai Shangjing Longquanfu, 755~785, Bohai Dynasty, (Photograph by Suhyoung Sung,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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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6.
<房山石經 중의 『蓮華面經』卷下>, “Lotus face Sutra” (vol. 2) in Fangshan stone Sutra, 1115, Liao Dynasty, Fangshan district, Beijing city (Fangshan Yunjusita he Shijing (vol.13), 2000,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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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7.
<房山石經 중의 『蓮華面經』卷下>, “Lotus face Sutra” (vol. 2) in Fangshan stone Sutra, 1115, Liao Dynasty, Fangshan district, Beijing city (Fangshan Yunjusita he Shijing (vol.13), 2000,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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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8.
<獨樂寺白塔 지궁 출토 鎏金鹤形帐钩>, Gilt Crane-shanped Curtain Hook, excavatd from the underground palace of the Dulesi White Pagoda, 1058, Liao Dynasty (ⓒ Courtesy of Tianjin Musu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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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螭首造像建塔碑>에 새겨진 건축 과정과 공양 내용 The construction and offering activities engraved on the Pagoda stele with hornless dragon heads10
Date Activities
1 重熙十六年 二月 十五日 啟土開掘地宮 Dig up the earth and initiate the excavation of the underground palace
The 15th day of the second month,the 16th year of the Chongxi reign
2 重熙十六年 四月 十七日 下葬舍利 Bury sarira
The 16th day of the fourth month,the 16th year of the Chongxi reign
3 重熙十六年 四月 十七日―重熙十八年 六月 十五日 積功及第七級并随級內葬讫舍利11
From the 17th of the fourth month,the 16th year of the Chongxi reign to the 15th day of the sixth month,the 18th year of the Chongxi reign Accumulate merits up to the seven stories and enshrine sarira in each story until its completion
4 重熙十八年 七月 十五日 於相肚中安置金法舍利並四面安九十九本棖竿陀羅尼及諸供具莫不依法臻至嚴簡潔安置供養金具奉
The 15th day of seventh month,the 18th year of the Chongxi reign Enshrine the gold dharma-sarira in the middle of the inverted bowl; enshrine ninety-nine pillars type dharanis and all the Buddhist ritual and ceremonial utilities in other four rooms. There is nothing that are not enshrined when precisely and concisely following the dharma.

10 「조상비」의 내용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였으며, 원문은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 33.

11 성서영, 「경주백탑 초층 탑신 鬼箭을 든 신장상 연구」, 『몽골학』 67(2021), pp. 237-243.

Table 2.
<五層塔室磚石碑>와 <螭首造像建塔碑> 에 새겨진 건립 및 공양 불사 참여자 Participants of the pagoda construction and the offering services engraved on the brick tablet of the five-story chamber and the pagoda stele
五層塔室磚碑 螭首造像建塔碑
Brick tablet of the five-story chamber Pagoda stele with hornless dragon heads
date 重熙十八年 四月二十八日 重熙十八年 七月十五日
The 28th day of the fourth month, the18th year of the Chongxi reign The 15th day of the seventh month, the 18th year of the Chongxi reign
Officials 玄寧軍節度使 檢校太師 守右千牛衛上將軍 玄寧軍節度使 檢校太師 守右千牛衛上將軍 張維保
張維保 威勝軍節度使 檢校太師 勾當 馬墠
威勝軍節度使 檢校太師 勾當 馬墠 威武軍節度使 檢校司徒 同勾當 郭進
威武軍節度使 檢校司徒 勾當 郭進 越州觀察使 檢校司空 提點錢錦 孫素
越州觀察使 檢校司空 勾當錢錦 孫素 閑廄使, 檢校右散騎常侍, 勾當工匠 侯外安
閑廄使, 檢校右散騎常侍 勾當工匠 候外安 右奉宸 雜勾當 李用和
前提轄使 同勾當 錢帛 王懷信
Xuanning Military Governor, Grand Preceptor of Inspection, Top General of Right Imperial Swordsmen Zhang Weibao. Weisheng Military governor, Grand Preceptor of Inspection, Director Ma Shan Weiwu Mlitary governor, Administrator of Inspection, Director Guo Jin Yuezhou Observation Commissioner, Superintendent of Inspection, Director of Money and Brocade Sun Su Commission for the Palace Corrals and Stables, Right Cavalier Attendant-in-Ordinary of Inspection, Director of Artisans Hou Waian. Xuanning Military Governor, Grand Preceptor of Inspection, Top General of Right Imperial Swordsmen Zhang Weibao. Weisheng Military governor, Grand Preceptor of Inspection, Director Ma Shan. Weiwu Mlitary governor, Administrator of Inspection, Director Guo Jin. Yuezhou Observation Commissioner, Superintendent of Inspection, Supervisor of Money and Brocade: Sun Su. Commission for the Palace Corrals and Stables, Right Cavalier Attendant-in-Ordinary of Inspection, Director of Artisans Hou Waian. Right Imperial Guard, Director of Miscellaneous Lee Yonghe Former Administer, Director of Money and Brocade Wang Huaixin
Monks 慶州僧錄 宣演大師 賜紫沙門 蘊珪 慶州僧錄 宣演大師 賜紫 沙門 蘊珪
慶州前僧錄 宣教大師 賜紫沙門 普勤 慶州前僧錄 宣教大師 賜紫 沙門 道清
慶州僧判官 善利大德 沙門 從教 慶州前僧錄 崇教大師 賜紫 沙門 普勤
塔主講生法華上生經修大德 沙門 守恆 慶州僧判官 善利大德 沙門 從教
塔主講經葉論 沙門 巨峰 塔主講生法華上生經修大德 沙門 守恆
塔主講經葉論 沙門 巨峰
Qingzhou Records of Monk, Xuanyan Grand Master, Purple Robe bestowed, Monk, Yungui. Former Qingzhou Records of Monk, Xuanjiao Grand Master, Purple Robe bestowed, Monk, Pujin. Qingzhou Monk Administrative assistant, Shanli Great Virtuous, Monk, Chongjiao. Pagoda Donor, Lecturer of the Lotus Sutra and the Sutra of Maitreya's Ascension, Monk, Shouheng. Pagoda Donor, Lecturer of Sutra, Palm-leaf scriptures, and Treatise, Monk, Jufeng. Qingzhou Records of Monk, Xuanyan Grand Master, Purple Robe bestowed, Monk, Yungui. Former Qingzhou Records of Monk, Xuanjiao Grand Master, Purple Robe bestowed, Monk Daoqing. Former Qingzhou Records of Monk, Chongjiao Grand Master, Purple Robe bestowed, Monk, Pujin. Qingzhou Monk Administrative assistant, Great Virtuous Shanli, Monk, Chongjiao Pagoda Donor, Lecturer of the Lotus Sutra and the Sutra of Maitreya's Ascension, Monk, Shouheng Pagoda Donor, Lecturer of Stura, Palm-leaf scriptures, and Treatise, Monk, Jufeng
Artisans 都作頭 寇守輩 鐫字人 寇文寶 崔從善
副作頭 呂繼鼎
Chief Artisan Kou Shoubei Vice-chief Artisan Lǚ Jiding Text engraver Kou Wenbao, Chui Chongshan
Table 3.
유금은경판에 새겨진 다라니 공덕 Dharani’s Virtue Engraved on the Gilded-silver sutra plate
Dharani Dharani’s Virtue Summary
根本陀羅尼 若復有人為於亡者稱其」名字, 至心誦呪滿七十七遍, 若彼亡人墮惡趣者, 應時即得」離惡道苦, 生天受樂. 或稱彼」名依法書寫此陀羅尼, 置佛塔中如法供養. 亦令亡者得離」惡趣生於天上, 或復得生兜率天」宮, 乃至菩提不墮惡道. Praying for the deceased.
Root Dharani Suppose anyone calls the deceased by name and chants this Dharani with all his heart seventy-seven times, even if those deceased have fallen into evil realms, they will immediately receive it, escape from the suffering in evil destinies, be born in heaven, and experience pleasure. Alternatively, if anyone writes this dharani according to the Dharma, calling the deceased by name, puts it in the Buddhist stupa, and makes offerings to the Buddha, it also enables the deceased to escape from evil realms and be born in heaven or to be reborn in the Tusita heaven until gaining the Bodhi and not to fall into evil realms.
大功德聚陀羅尼 若見此塔者, 滅五逆罪, 聞塔」鈴聲, 消諸一切惡業, 捨身當」生極樂世界. 若有傳聞此塔」名者, 當得阿鞞跋致, 下至」鳥獸, 得聞其聲, 離畜生趣」永不復受, 當得廣大福德之」聚. The effect of the four Great Dharanis enshrined in the Buddhist stupa.
Great merit gathering Dharani Those who sees this Buddhist stupa, can eradicate the five heinous evils. Those who hear the bell sound of this stupa, can eliminate all evil karma and be born in the realm of Ultimate Bliss after sacrificing himself. If one hears the name of this stupa, He can gain non-retrogression. Even birds and animals can hear bell sounds, escape from rebirth as an animal, never to undergo rebirth again, and gain a great gathering of all the blessings.
六波羅蜜陀羅尼 若復有人欲得滿足六波」羅蜜者, 當作方壇以諸香」花供養, 旋遶七遍, 誦此陀羅尼曰」 Making an altar for offerings and chanting method.
Six Perfections Dharani If anyone want to fulfill the six perfections, he needs to make a square altar, make offerings with all the fragrance and flowers, circle the altar seven times, and chant this Dharani that,
Table 4.
通天冠 상의 金博山 관련 기록 The Jinboshan related Record on the Heaven-Connecting Crown
Literatures Historic Records
『後漢書』 卷30 「與服志」 通天冠, 高九寸, 正竖, 頂少邪却, 乃直下为鐵卷梁. 前有山, 展筩为述, 乘輿所常服.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30 of Hou Hanshu(Book of Later Han) The Heaven-connecting crow n is nine cun high and stands upright. It is slightly shrunk and tilted on the top and then straightly descends at its back, forming iron-rolled strings. It has a mountain-shaped decoration in the front and is adorned with Zhantong. It is the ordinary clothes of a son of Heaven.
『晉書』 卷25 「與服志」 通天冠, 本秦制. 高九寸, 正豎, 頂少斜卻, 乃直下, 鐵為卷梁. 前有展筒, 冠前加金博山述, 乘輿所常服也.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25 of Jinshu(Book of Jin) The Heaven-connecting crown was originally from the etiquettes of Qin. It is nine cun high and stands upright. It is slightly shrunk and tilted up on the top and slightly descends at its back, making iron-rolled strings. At the front it has a Zhantong decoration, as well as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added. It is the ordinary clothe of a son of Heaven43.
『南齊書』 卷17 「與服志」44 通天冠, 黑介幘, 金博山顏, 絳纱袍, 皁缘中衣, 乘輿常朝所服.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17 of Nanqishu(Book of Southern Qi) The Heaven-connecting crown has a black head-kerchief and a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attached to the front. (It is usually goes with) the Crimson Gauze Robe, Tunic with black fringes. They are the clothes of the emperors for the daily imperial court.
『舊唐書』 卷45 「與服志」45 通天冠, 加金博山, 附蟬十二首, 施珠翠, 黑介幘, 髮纓翠綏, 玉若犀簪導.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45 of Jiu Tangshu(Old History of the Tang Dynasty) The Heaven-connecting crown is added with a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attached with twelve cicadas and is exerted with pearls and jades. It has a black headkerchief, hair straps, tassels made from kingfisher feathers, and jade-like rhinoceros hairpins.
『新唐書』 卷24 「車服志」46 通天冠者, 冬至受朝賀, 祭還, 燕群臣, 養老之服也. 二十四梁, 附蟬十二首, 施珠翠, 金博山, 黑介幘, 組纓翠緌, 玉犀簪導.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45 of Xin Tangshu(New History of the Tang Dynasty) The Heaven-connecting crown is wore when the Emperors receives congratulatory ceremonies at the winter solstice, returns from the sacrifical rituals, feast the various ministers, and bestow the elderly (family members). It has twenty-four strings, is attached with twelve cicadas, and exerted with pearls and jades, It has a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black head-kerchief, silk straps, tassels made from kingfisher feathers, and jade rhinoceros hairpins.
『遼史』 卷56 「儀衛志」 皇帝通天冠, 諸祭還, 及冬至, 朔日受朝, 臨軒拜王公, 元會, 冬會服之. 冠加金博山, 附蝉十二, 首施珠翠. 黑介帻, 髮缨翠, 玉犀簪導.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56 of Liaoshi(History of Liao) The emperor’s Heaven-connecting crown is wore when they returns from sacrificial rituals, receives congratulatory ceremonies at the winter solstice, on the courts of the first day of a lunar month when they meet the nobilities in the front hall, and on the gatherings of the New Year’s Day and the winter solstice. This crown is added with a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attached with twelve cicadas, and exerted with pearls and jades on the top. It has black head-kerchief, hair straps, and kingfishe feathers, and jade rhinoceros hairpins.

43 황제가 아닌 천자(a son of Heaven)로 번역한 이유는 본고 주 41 참조.

44 『南齊書』 (中華書局, 1972), p. 341.

45 劉昫 編, 『舊唐書』 (中華書局, 1975), p. 1937.

46 歐陽修·宋祁 编, 『新唐書』 (中華書局, 1975), p.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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