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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1694년 <二十功臣會盟軸>의 제작 과정과 공예사적 의미 : 『保社功臣復勳都監儀軌』의 분석을 중심으로

Abstract

본고는 『保社復勳都監儀軌』에 수록된 재료와 도구 및 장인 등을 분석하여, <二十功臣會盟軸> 유물의 공예사적 의미를 밝혀보았다. 이 두루마리는 숙종대 정치적인 변혁기에 충성을 다짐하는 맹세문과 공신 등 489명의 명단이 기록된, 국내에서 가장 긴 24m의 길이에 품격 있게 장식된 어람용 유물이다. 이것을 제작하고자 도감을 설치하였고 濟用監을 비롯한 여러 관청에서 재료와 도구를 수급하였으며 각종 장인들을 동원되었다. 특히 긴 직물은 練絲匠, 筬匠, 綃匠 등이 전통 기술로 짰고, 배접은 慶德宮 내 兵曹의 넓은 마루에서 판재를 대나무로 팽팽하게 잡아 당겨 완성했다. 상하좌우에는 화려한 비단을 둘렀고, 평안도 玉匠이 만든 玉으로 막았고, 多繪匠이 짠 끈을 매달았다. 畫員이 인찰선을 그었고, 寫字官이 해서체 글씨를 썼다. 따라서 본 유물은 제작 과정마다 최고급 재료와 우수한 기술을 지닌 전문 장인들이 분업적 협업으로 특별히 제작된 왕실공예품의 백미로서, 이것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숙종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Abstract

This paper studies the materials, tools, and artisans recorded in the Posagongshin bok'undogam ŭigwe to understand the significance of Iship kongshin hoemaengch’u in the history of crafts in Korea. Iship kongshin hoemaengch’u is an elegantly decorated twenty-four-meter-long scroll made for King Sukjong, containing oaths of allegiance to the king in a time of political upheaval and reforms, and the names of 489 meritorious subjects. In making this scroll, a special directorate was set up and several government offices, including the Directorate of Fabrics, provided materials and tools, and artisans of various fields were assigned. The long fabric was made in the traditional way by cooperation of yŏnsajang(thread artisan), badijang(badi for loom artisan) and ch’ojang(silk artisan). The attaching layers were made by pulling the wooden frame tight with bamboo trees in the spacious floor of the Ministry of War building at Gyeongdeokgung Palace. The scroll was bordered with brilliant silk, and was fitted with jade caps made by okjang(jade artisan) from Pyeongando Province and a cord made by tahoejang(threaded cord artisan) was attached. Court painters drew guidelines for writings and official scribes wrote the oaths and names in regular script. Conclusively, Iship kongshin hoemaengch’u shows the best of court craftsmanship made in cooperation between skilled artisans of specialized fields, using the materials of highest quality to manifest King Sukjong’s will to assert his authority.

Ⅰ. 서론

조선은 반란이나 역모 등의 위기 때마다 여러 인물의 도움을 받아 극복했으며,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인물은 功臣으로 錄勳하여 치하하였다. 특히 숙종 연간에는 정치적인 변혁이 발생하여 1680년(숙종 6) 역모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6명을 保社功臣들을 녹훈하였으나 1689년(숙종 15) 罷勳되었다가 1694년(숙종 20)에 復勳되었다.1 본고는 1694년 보사공신들을 복훈할 당시 제작되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御覽用 <二十功臣會盟軸>(이하 <어람회맹축>으로 약칭함)(Fig. 1) 유물과 이것의 제작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保社功臣復勳都監儀軌』(이하 복훈도감의궤로 약칭함)(Fig. 2)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양자를 함께 비교 분석하여,2 공예사적 의미를 밝히려는 데 목적이 있다.3
그동안 보사공신과 관련한 연구는 한국사학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곧 숙종대 경신·기사·갑술환국을 통해 남인계를 축출하고 서인계를 등용하여 保社功臣으로 錄勳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지위나 사회적 관계망을 분석하거나, 이후 기사환국을 통해 그들을 罷勳하였다가 갑술환국을 통해 復勳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 권력이 개편되었다는 정치사적 의미를 연구한 성과가 다수 있다.4 한편 어람회맹축 유물에 대해서는 서지학계나 보존과학계에서 형태적 특징이나 장황을 주목한 적도 있다.5 하지만 해당 유물을 의궤 기록과 비교 분석하여 궁궐 내 특정 공간에 공방을 설치하고 필요한 재료의 수급이나 장인의 동원 및 그 제작과정을 분석하는 공예 기술사적인 연구는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다.
따라서 본고는 기존 연구성과의 토대 위에 1694년 제작되어 현존하는 <어람회맹축> 유물의 제작 과정을 밝히기 위해 그 전말을 기록한 『복훈도감의궤』(1695년 간행)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아 재료와 도구 및 장인의 제작기술을 밝혀 보려 한다. 이를 위해 『복훈도감의궤』를 통해 복훈도감의 설치배경과 관리조직을 살펴보고, 1방 직조색겸교서색의 기록을 통해 어람회맹축의 바탕 직물의 직조과정과 그것을 배접한 다음, 비단 직물로 회장하고 장식하는 과정 및 인찰선과 서사의 단계로 구분하여 각 단계마다 재료와 도구의 수급과정이나 장인과 화원 및 서사관 등을 동원하여 제작하는 실태를 알아내고자 한다. 다만 완성된 회맹축을 어람용으로 올리기 위한 封裹 물목 등은 다루지 않겠다.

Ⅱ. 保社復勳都監의 설치와 관리 조직

1680년 복선군 李柟(1647~1680)과 許堅(?~1680)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告變으로 庚申換局이 일어났고, 당시 숙종은 역모 관련자들을 推鞫하고 6명을 보사공신으로 녹훈하였다.6 당시 국왕 숙종과 왕세자 경종 및 왕실 인사와 생존해 있는 공신 당사자 및 죽은 공신의 적장자손들은 회맹제를 거행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숙종에게는 필사본의 <어람회맹축>을, 공신들에게는 인쇄한 <회맹록>과 <화상축>을 그려주었다. 그러나 당시 역적으로 몰린 남인이 1689년 己巳換局으로 집권하면서 경신환국을 誣獄이라고 주장하여 보사공신은 削勳되면서 회맹축과 회맹록 및 화상축들은 모두 불에 태웠다.7
1694년 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숙종은 파훈시켰던 공신을 복훈하였으며,8 인조 24년(1646)에 만들었던 <寧國功臣御覽會盟軸>을 견양으로 삼았다.9 윤5월 6일 충훈부에서 주관하여 복훈도감을 설치하였고,10 10월 12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어람본을 진상하는 의례를 거행하였다.11
복훈도감의 책임자는 제조였다.12 윤5월 7일 이조에서 예조판서 申琓(1646~1707)을 제조로 정하였다. 그러나 업무가 많아 같은 달 25일 도승지 金鎭龜(1651~1704)를 추가로 차출하였다.13
도감에서는 회맹축 등을 제작하기 위해 제작처인 각방을 구분하여 별설하였다. 1방 직조색겸교서색, 2방 화상색, 3방 인출색 및 별공작을 별설하였다.14 각방을 관리할 낭청 4원과 감조관 4원을 동원하였다. 낭청 4명은 弘文館修撰 李徵明, 前府使 任元耉, 掌隸院司議 李翊周, 前都事 李羽成(1634~1704)이었고, 감조관 4원은 內侍敎官 朴泰殷, 前參奉 李德齡, 前奉事 鄭道徵, 繕工監假監役 李允濟였다.15 낭청 중 각방을 통할한 都廳은 弘文館修撰 李徵明 (1648~1699)이었다. 1방 낭청은 李羽成였으나 병으로 인해 前都事 沈棱으로 교체하였다.16 2방 낭청 李翊周은 장례원의 업무가 바빠 겸임하기 어렵다며 한가한 관원으로 교체를 요구하였다.17 3방 낭청 任元耉는 병세가 나빠져 前縣監 趙泰彙로 교체하였다.18 감조관 4인 중 별공작의 감조관인 李允濟의 경우 태릉 정자각의 감역관의 일을 하던 중이어서 겸찰이 어려워 개차하고 그 대신 繕工監副奉事 金澥로 교체하였다.19 그밖에 실무를 담당한 녹사 1, 의원 1, 서사 2, 서리 10, 고직 4, 창준 5, 수장제원 7, 보좌관 1, 사령 15였다. 서리나 사환들을 충훈부에서 동원하였다.
도감 내 각방 중 어람회맹축을 주로 담당한 공방은 1방 직조색겸교서색이지만, 재료나 도구는 공조나 장흥고 등 상설아문에서 납입했고, 장인들은 여러 관청에서 징발하였다. 의궤를 통해 두루마리 형식의 회맹축은 그 세부 명칭이 (Fig. 3)과 같이 확인되며, 세부를 제작하는 순서는 여덟 단계의 순서로 구분된다. 첫째 회맹축의 바탕면에 해당되는 白綃를 직조하였고, 둘째 書面으로 만들기 위해 백초의 뒷면을 배접하였으며, 셋째 배접된 서면의 상하좌우에 회장을 둘렀고, 넷째 축의 전체 뒷면에 종이를 배접하였고, 다섯째 상하에 횡목을 대고 옥막이를 부착했으며, 여섯째 축초의를 붙이고 다회를 장식하였으며, 일곱째 화원이 인찰선을 그었고, 여덟째 서사관이 회맹문을 써서 완성하였다.

Ⅲ. 白綃의 織造와 書面의 褙接

현존 <어람회맹축> 유물은 세로 88.8cm×가로 2,414cm의 긴 두루마리이다. 회맹축의 세부 명칭은 의궤에 의해 확인된다(Fig. 3).
바탕은 회맹문과 회맹록이 써 있는 ‘書面’이며, 백초를 바탕으로 사용하며 폭[나비]은 66.6cm, 가로[길이]는 2,286.5cm이다. 이것의 체제나 규모를 참고한 견양은 <영국공신어람회맹축>이었다.20 이러한 서면이 되는 바탕직물과 배접지의 종류와 장인은 다양한데(Table.1), 이것의 제작 과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1. 백초의 직조

현존하는 <어람회맹축> 유물은 나비 1자 6치(실측치, 세로 66.6cm), 길이 50자(실측치, 가로 2,286.5cm)이다.21 유물을 실견한 결과 중간에서 백초를 연결하거나 잇댄 부위가 없어 66.6cm 광폭으로 50자 1필 전체를 잇댄 곳 없이 온전하게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필 이상의 긴 길이의 백초는 시중에서 구입할 수 없는 특수 직물이어서 조선시대 어람회맹축에 사용한 백초는 임시로 도감을 설치하여 특별히 직조하였다. 일례로 1506년 靖國功臣은 1등 8명, 2등 13명, 3등 30명, 4등 54명으로 총105명이었고, 1507년 李顆의 역모를 평정한 靖難功臣은 1등 5명, 2등 5명, 3등 12명으로 총22명이었다. 두 공신을 합하면 총127명이어서 어람회맹축 뿐 아니라 공신에게 반사할 화상축까지 제작하려면 백초 3,810자가 필요하였다. 당시 백초 1,000여 자를 짜려면 1년 여의 시간이 걸리는데 3,800여 자를 짜려면 3-4년이 걸리므로, 비용과 기간을 줄이기 위해 어람용 백초는 직조하되 공신용은 종이로 만들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22
1694년 당시 도감에서는 어람회맹축의 서면과 함께 1, 2, 3등 보사공신 5명에게 반사할 화상축의 화면에 사용할 백초를 직조하는 것은 국가적 과제였다. 복훈도감에서는 자비문 밖에 1방 직조색겸교서색을 별설하여 가가 1칸을 세우고, 각 관청에서 백사를 비롯한 각종 도구를 납입하여 각색 장인을 동원하여 백초를 짰다.23
당시 동원된 장인의 종별은 練絲匠과 바디장[筬匠] 및 綃匠이었다. 이를 통해 통해 백초를 직조하는 과정은 전통적으로 날실과 씨실이 1:1로 교차하는 명주를 짜는 과정과 마찬가지이다. 첫째 연사장이 날실을 날고(精鍊), 둘째 바디장이 만든 바디에 날실을 꿰고, 셋째 씨실을 북에 넣고, 넷째 초장이 베틀에 올린 날실을 잉아에 걸어 백초를 짜는 것이다. 직조가 끝나면 장인들에게는 料布를, 직조를 수직한 織造直에게는 價布를 병조에서 주었다.24 백초 직조의 세부 과정을 장인의 역할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바디장[筬匠]의 바디 제작

어람회맹축에 사용된 백초의 폭은 1자 6치[66.6cm]이다. 이것을 현재 장인들이 사용하는 바디와 비교하면 넓은 폭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곧 국가무형문화재 바디장이 제작하는 바디의 폭은 38cm 내외이고,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베틀장이 만드는 바디집의 폭은 대개 40cm 내외이다.25 전통 직물은 포백척으로 1자 38cm 전후의 폭인 것과 비교할 때 어람회맹축용 백초는 그보다 廣幅이다. 넓은 폭의 직물을 짜려면 폭만큼 넓은 바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1694년 어람회맹축에 사용할 넓은 폭의 바디는 平連 등 2명의 바디장이 5월 18일부터 부역하였다.26 바디장의 활동기간은 확인되지 않지만, 1680년의 경우 6월 9일부터 10일간 작업한 것으로 미루어 1694년에도 비슷한 기간동안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27
바디를 만들 재료는 선공감에 소장되어 있던 큰 대나무 2개였다. 1680년이나 1694년 도감에서는 필요한 땔나무를 마련했고, 바디장은 댓살을 끓는 물에 넣고 불렸다.28 건조된 댓살을 자르고 쪼개고 가른 바딧살의 표면은 연일숫돌 1괴를 마련하여 매끈하게 다듬었다. 바딧살이 준비되면 바디장은 바디틀[筬機] 위에 올려 엮어 바디를 만들었다. 완성된 바디의 가장자리에는 땔나무 5단 위에 도관 1개를 올리고 평시서 소장 어교 1장을 중탕한 풀로 종이를 붙여 마감했다.29

2) 練絲匠의 날실 날기[整經]

현존 유물을 보면 백초는 성근 변화평직이다. 이로 미루어 연사장이 백사로 날실을 날은 다음, 바디에 꿸 때 바딧살 1칸 건너 1칸씩 잉아올 1올과 사올 1올 총2올씩 꿴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명주를 비롯한 전통직물이 바디 1칸마다 잉아올 1올과 사올 1올 총2올씩 빈틈없이 꿰어 평직으로 짠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날실의 재료는 가늘고 섬세한 白絲 7근 1냥을 도감에서 市廛의 것을 미리 선택하여 사용하고 이후 호조에게 그 값을 지불하는 구조였다.30 연사장 2명은 5월 20일에 시역을 했고,31 16일간 작업하였다. 씨실을 담을 북[梭] 2개는 교서관에서 보낸 황장목 2조를 길이 1자로 만든다.32
연사장 2명이 날실을 정련할 때 사용하는 날틀은 해장죽 15개이다. 선공감에서 소장하고 있는 익은삼 밧줄 1거리, 목척 3돈이고, 마미체 3자루에 탄 2석을 사용하여 뒤섞이지 않도록 실에 뿌려준다.33 실을 자아 날실을 거는 연사장 2명은 얼레[旕乃] 30개와 실틀[絲機] 8개와 날틀[刃機] 1개, 바꽂이틀 2개, 연질흙 8개(합 무게 20냥), 작은 칼[刀子] 1개, 송곳 1개, 동곶 1개, 4치정 4개를 준비하였다.34
당시 연사장은 張繼男 등 2명이었다. 이중 장계남은 이미 1644년 녹훈도감 때부터 연사장으로 활동한 바 있어,35 1694년까지 50년간 활동한 장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綃匠의 백초 직조하기

회맹축이나 공신화상축에 사용하는 백초는 포백척으로 1자[46cm] 이상으로 나비[폭]가 넓은 직물이다. 이러한 광폭의 직물을 짜려면 바디의 길이가 길어 베틀의 가로 길이가 긴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큰 베틀은 여염집처럼 좁은 곳에 설치하기 어렵기 때문에, 6월 19일 직조공방으로 쓰기 위해 별공작으로 하여금 가가 1칸을 세우게 하였다.36
윤5월에 백초 길이 50자, 나비 1자 6치를 직조하기 위해 들였던 것은 덮는 감으로 기름종이 11장, 바람막이용 초둔 4부, 땔나무 10단, 휘장 2부, 양모필 2자루 및 직조용 베틀제구였다. 이중 베틀 등은 사용 후 되돌려 주었다.37
직조용 가가는 5월 19일 설치하고, 19일까지 바디를 다 만들고 연사장들이 바디에 날실을 꿰면 직조치들이 베틀 위에 잉아를 걸고,38 5월 20일부터 綃匠 鄭善 등 5명을 징발하여 백포건을 머리에 쓰고 치마를 입고 짜기 시작하여 작업하였다.39 직포 위에 아교를 칠할 때 사용하는 면사 수건 등의 물건도 사용 후 돌려주었다.40 1방의 초장 5명은 5월 20일부터 6월 24일까지 직조하였다.41 초장이 직조한 이후 수직군사 2명을 병조 위장소에서 불러와 지키도록 하였으며 그들의 활동기간은 초장과 마찬가지였다.42 1694년 초장의 작업 기간은 34일이며, 1680년에는 6월 9일부터 7월 10일까지 32일간 직조한 것과 비슷하다.43 가가 안에는 장인들이 사용하는 물품을 정리해서 보관해 두었는데, 큰 궤짝 1개, 중간 궤짝 1개, 백사 등의 무게를 다는 저울[칭자] 1개, 부자 1좌, 표주박 1개이다.

2. 서면 뒤쪽의 배접

1694년 6월 10일 54자(28m) 이상의 긴 백초를 짰는데, 직조된 백초는 바디에 잉아올과 사올 1쌍을 한 칸씩 건너 꿰어서 얇고 성근 것이 확인된다(Fig. 4)(Fig. 4-1). 이 때문에 그대로 서면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이에 뒤쪽에 종이를 대어 배접을 해서 사용하게 된다.
백초 중 회맹축으로 사용된 길이는 24m에 해당되어 매우 길었다. 백초를 팽팽하게 펴고 풀을 발라 종이를 붙여 건조시키려면 직물 길이만큼 길다란 작업대인 쟁틀[棦機]이 필요하고, 이것을 한꺼번에 쭉 펴놓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요구된다. 이에 1680년의 전례에 따라 경덕궁 내 병조 대청에 배설토록 하였고, 쟁틀을 지킬 사환과 수직군사 3명을 정하였다.44 쟁틀은 별공작에서 만들었다. 천을 펼칠 판재 부분은 송판 96닢으로 54자를 만들었고, 판재와 판재를 연결하는 부분은 청대죽을 사용하여 52자를 조작하여 1방으로 보냈다.45 쟁틀 위에 비단을 올리고, 그 위쪽에 종이를 바른 다음 백반 2냥을 제용감에서 들여 磻水하고, 어교 16장은 군기시에서, 우분자는 내자시에서, 땔나무 3단은 사재감에서 들였다. 회맹축에 풀을 붙일 때에 사용할 아교 가루 2말은 예빈시에서, 비상 3냥과 백반 1냥은 제용감에서, 황밀 4냥은 의영고에서, 소주 1대야는 내섬시에서, 청밀 6홉은 내자시에서, 땔나무 5단은 사재감에서 들였다.46
모든 재료가 준비되면 백초를 쟁틀 위에 올리고, 그 뒤쪽에 毛邊紙와 楮注紙를 순서대로 발랐다. 推造軍 4명이 하루 동안 경덕궁에서 白蜜을 밀어서 광을 냈다.47

Ⅳ. 書面의 回粧과 玉莫只의 제작

회맹축은 가로가 긴 두루마리 형식이며 1646년 인조대 영국공신의 어람회맹축과 동일한 구조와 형식을 견양으로 삼아 제작하였다. 구조적으로 보면 앞면과 뒷면으로 구분되며, 세부 명칭은 『보사공신녹훈도감의궤』나 『보사공신복훈도감의궤』에서 공통된다.
앞면의 중앙 부분은 의궤에서 명칭을 찾을 수 없는데 회맹문이 써 있어 ‘書本’으로 지칭하려 한다. 회장은 두루마리 중앙에 위치한 서본에 쓴 글의 주변을 빙 둘러 장식한다는 뜻이다. 서본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쪽빛 상하회장으로 마감하는데, 그 명칭은 서본의 상하는 ‘邊兒’, 좌우는 ‘중앙 左右回粧’, 양쪽 끝은 ‘上下回粧’으로 구분된다. 뒷면은 종이로 배접한 후 가장 앞쪽 표지에 해당되는 軸初衣 부분을 비단으로 붙인다.48 축의 양쪽 끝에는 ‘上下橫木’이 위치하며, 축초의에 감아넣은 ‘상횡목’은 반달모양 나무이며, 축의 말미에 있는 ‘하횡목’은 상하의 ‘막이(莫只)’를 옥으로 마감한다. ‘상횡목’의 중앙 부분에는 창구멍을 내고 ‘多繪纓子’를 꿰매어 붙이고 그 끝에는 상아제 ‘비녀[簪]’를 매달아 두루마리를 말아서 보관하게 되어 있다.49 상하 회장감은 남대단이고 길이 4자로 전체 나비이다. 이러한 회장의 세부를 위해 필요한 재료는 정해진 크기만큼 제용감이나 호조 등에서 마련하였다<Table 2>.
당시 동원된 장인은 5종이다. 9월 20일 영자장 강걸 등 4명, 다회장 이막남 등 2명, 연사장 황귀동 등 2명, 침선비 이향 등 3명, 배첩장 석동 등 2명이다.50

1. 서면 앞쪽 사방의 비단 회장

1) 邊兒와 중앙 좌우의 회장하기

回粧은 두루마리 중앙에 쓴 글이나 그린 그림의 주변을 빙 둘러 장식한다는 뜻이며, 앞쪽은 서본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쪽빛 상하회장으로 마감하고, 뒤쪽은 비대칭으로 뒷면 전체 중 오른쪽 축초의 부분에만 붉은색 비단으로 마감하고 다회영자를 둘러 마감하는 것이다.
어람회맹축의 회장에 사용할 비단은 제용감에서 필요한 크기만큼 납입하여 사용한다. 바탕면의 상하에 있는 변아는 白綾 30자는 전체 나비를 사용하였다. 현재 회맹축의 상하 너비는 위쪽 변아 9.5cm, 아래쪽은 9.5cm이지만 그 길이는 2,287cm로 매우 긴 편이다. 중앙 좌우의 회장 또한 백화문대릉 2자이고, 양 끝의 상하회장은 藍大緞 4자씩이다. 이것은 인조 때에 사용하던 藍彭段이 당시에는 없기 때문에 대신 사용한 것이다. 축초의는 大紅有紋大段 2자씩이다.
변아용의 백릉 30자 전폭이나,51 바탕면의 상하에 있는 변아는 중앙 좌우의 회장 또한 백화문대릉 또한 제용감에서 들였다. 현재 중앙 좌우회장은 9.4-9.6cm×88.8cm이다. 중앙 좌우회장과 변아는 문헌에는 백릉이나 백화문대릉으로 약간 다르지만, 둘다 아(亞)자형을 바탕 전체에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모란문과 난초문을 브릭형으로 배치한 것이다. 문양이 반복되는 단위의 크기는 세로 7.3cm, 가로 4.3cm이다. 변아는 백초로 만든 바탕부분만큼 길이가 길어서인지 중간에 연결해서 사용하기도 한다(Fig. 5).

2) 상하 회장하기

현재 오른쪽의 상회장은 가로 54.7cm, 하회장은 53.8cm이다. 상하회장의 남대단은 운보문은 卍字形 구름 문양이 상하로 연결되면서 그 사이에 팔보문이 배치되는데, 반복되는 단위 문양의 크기는 세로 19.0cm, 가로 11.2cm이다(Fig. 6).
이러한 운보문단은 조선후기 외규장각 의궤의 책표지와 마찬가지인데, 1699년(숙종 24)에 간행된 『단종장릉봉릉도감의궤』(외규079)의 것과 유사하다(Fig. 7). 구름의 문양이 상하로 꼬리가 이어지고 좌우는 꼬리가 뾰족한 卍자형인 점, 보문에 있어 구름 좌우로 금정, 방승, 보주, 산호, 애엽, 전보, 특경, 화보의 8개가 분포되어 17세기 八寶文이 배치된 점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어람회맹축의 회장에 사용된 팔보문은 방승이나 전보, 서보 및 서각 등이 쌍으로 배치되어 이 시기에 유행한 운보문단 직물의 문양과 양식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2. 軸初衣와 뒤쪽 전체의 배접

회맹축을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한 비단마다 총 3차에 걸쳐 배접을 한다. 1차는 서본, 변아, 중앙좌우 회장, 상하회장 및 축초의 등의 후면마다 각각 모변지를 배접하는 것이다. 2차는 1차 배접을 마친 서본, 변아, 중앙좌우 회장, 상하회장을 순서대로 1) 서본, 2) 상하 변아, 3) 중앙 좌우 회장, 4) 상하회장을 순서대로 붙여 두루마리의 형태로 이어 붙이는 것이다. 3차는 하회장부터 중앙좌회장, 서본과 변아, 중앙우회장까지 순서대로 뒷면에 저주지를 배접지로 붙인 다음 그 끝 부분에 축초의를 붙여 마감을 하는 것이다.
후배는 모변지 50장, 저주지 3권, 축초의 감은 다홍유문대단 길이 2자가 전체 나비이다. 회맹축의 백초나 앞쪽의 상하 회장을 비롯한 각종 필단의 초배지는 毛邊紙이고, 축초의 뒤쪽 배접지는 모변지 15장이다. 이것을 배첩장 朴茂善(1659~1696년 활동) 등 2명이 붙여서 이것들을 두루마리로 장황하고 난 뒷면에는 楮注紙 5권을 배접한다. 그 뒤쪽을 推造軍 4명이 白蜜로 밀어서 종이 표면에 광을 내는데, 이것은 靑綾花紙를 제작하는 것은 전통 제작방식이다.
朴茂善은 1659년 효종의 빈전도감부터 1696년 세자 경종과 세자빈 단의왕후의 가례도감 때까지 37년간 12곳의 도감에서 활동한 장인이었다. 그는 국역을 지는 동안 하나의 장색으로 불리지 않고, 제작할 물품의 종별이나 역할에 따라 屛風匠이나 回粧匠, 褙貼匠, 敎命匠 등 다양하게 불린 것이 특징이다. 그는 1659년 효종의 빈전도감에서는 병풍을 제작할 때 동원되어 병풍장으로 불렸다.52 이후 박무선은 회장장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국역을 졌다. 1661년 명성왕후를 중궁전으로 책봉할 때나, 1667년 현종을 왕세자로 책봉할 때, 1671년 왕세자 숙종이 인경왕후와 국혼을 치를 때, 1681년 숙종과 인현왕후의 가례 때, 1690년 장희빈[玉山大嬪]을 왕비로 책봉할 때와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할 때, 1694년 인현왕후를 왕비로 책봉할 때, 1696년 세자 경종과 단의빈의 가례 때 교명을 장황하는 회장장으로 활동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1667년 현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2방에서는 다시 병풍을 제작하였기 때문에 병풍장으로 불렸다. 이를 통해 배첩장은 제작하는 물품의 중요도나 특성에 따라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장색을 달리하여 부르는 명칭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1670년 영정을 수보할 때에는 영정 뒷면에 종이를 바르는 배첩장이었으나, 1688년 영정을 모사하는 도감에서는 족자의 가장자리에 회장을 두르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회장장으로서 1등상을 받았다.
축초의는 두루마리의 표지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다홍색 운보문 비단[大紅有紋大段]이며 가로 88.8cm이다. 다홍색 운보문은 앞면에 배치된 크기가 큰 만자형 구름 문양 사이에 크기가 작은 八寶文을 배치한 운보문단과 같은 것이지만,53 다홍색으로 염색하여 청홍색으로 차이를 보인다. 다만 보문이 반복되는 단위 문양의 크기는 앞쪽의 남대단보다 크기가 커서 21.4cm, 가로 11.8cm이다(Fig. 8)(Fig. 8-1).
3차 배접까지 끝나면 비단과 종이를 접착한 것이고, 이제 상하횡목과 축초의 부분을 붙여 장황의 마감에 해당된다. 먼저 하횡목에는 옥막이를 끼운다. 3차 배접까지 완료된 하회장 부분을 단단하게 하횡목에 붙여서 고정시킨다. 이제 배접된 축초의를 중앙우회장보다 약간 안쪽의 서본 부분부터 붙인 다음 상횡목의 둥근 부분을 감싸 직선 부분에서 마감한다. 미리 준비한 다회영자의 나비에 맞춰 붉은 비단에 칼집을 내고 끼운 후 다회영자를 붙인다. 마지막으로 상회장에 해당되는 파란 비단을 상횡목의 직선 끝 부분에서 깔끔하게 잘라 붙이면 마감된다.

3. 상하 橫木과 옥막이 제작

어람회맹축의 뒷면 양쪽 끝에는 ‘上下橫木’이 위치한다. 상횡목은 반달 형태로서 陰을 상징하고, 하횡목은 둥근 원형으로서 陽을 상징하여 음양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 오른쪽 시작 부분인 ‘上橫木’은 자작나무[椴木]이고, 폭 3.0cm×높이 1.5cm이고 반달 모양이다. 아래쪽은 둥글고, 위쪽은 편평하게 되어 있다. 상횡목은 하나의 나무로 상하 끝부분이 돌출되지 않게 단면을 축초의를 배접한 붉은색 비단으로 싸고(Fig. 9), 그곳에 상회장에 사용한 배접된 파란 비단을 한 번 덧씌워 마감한다. 왼쪽 끝의 下橫木은 가래나무[楸木]이고 폭 4.3cm로 만든다. ‘하횡목’의 위아래 부분은 횡목과 유사한 나무로 만들고 상하의 양 끝‘막이[莫只]’는 두루마리 두께만큼 크고 둥근 옥으로 마감한다(Fig. 10).
하횡목의 끝부분에 해당되는 상하 막이로 사용할 옥은 평안도의 성천부에서 채취한 白玉이다. 이때 옥막이는 실제 사용할 것 2개와 예비 2개 총4개를 만든다. 지름 14.0cm이고, 두께 4.0cm, 폭 4.3cm로 만들어서 진상한다. 옥막이를 사용하는 것은 어람용에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제작하는 사례이다. 5월 16일 감결질을 보면, 평안감사에게 진상회맹축의 옥막이에 실제 쓸 것과 예비용으로 4개를 도내 성천부에서 이 달 안에 긴급하게 올려보내도록 하였다.54 옥막이 4개는 평안감사에게 성천부로부터 조작해서 상납토록 하였다.55

4. 多繪匠의 多會 제작

다회영자는 회맹축 표지에 해당되는 軸初衣의 중앙에 붙인 긴 끈이며 두루마리를 묶는데 사용한다. 다회는 호조에 있는 홍진사 2냥을 들여서 만든다. 직조겸교서색에서는 多繪匠 李吉과 李莫男을 징발하였다.56 그들은 1694년 6월 20일에 시작하여 19일간 작업을 했다. 6월 19일 금위영 소속의 牙兵인 강걸은 영자장으로서 도감에서 사역토록 하였다.57
회맹축의 다회영자는 길이 6자, 나비 1치 5푼이고, 紅繡絲는 중량 각 2냥이다.58 회맹축의 다회를 직조할 때 소용되는 것은 박곶감 백사 3근, 면사 4냥, 다회 박곶감 면사 8냥, 황밀 6냥이다. 다회장 2명은 6월 22일부터 부역을 시작한다.59 다회틀은 별공작에서 만들었고 이것으로 다회장들은 동곶이 1개 등을 이용해서 다회끈 길이 6자, 너비 1치 5푼으로 짠다. 상회장(남대단)의 오른쪽 중앙 부분에 창구멍을 내고 꿰매어 다회영자를 붙인다. 다회영자의 끝에는 비녀를 붙이고, 이것을 꿰매어 마감하는 것은 침선비가 하였다.
이렇게 다회영자에 상아제 비녀[簪]를 사용하는 것은 사대부들이 사슴뿔[鹿角] 잠을 사용하는 것과 비교하여 고급 재료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다회영자는 다회틀 위에서 경사가 위로 두드러지는 폭 7.9cm, 길이 276.5cm로 짠 직물(warp-faced woven fabric)이다. 이것은 앞쪽 상회장의 남대단 중간 부분에 7.9cm 폭만큼 창구멍을 내고 바느질로 꿰매어 고정시켰다(Fig. 11). 이 부분은 회장을 마친 회맹축을 감싼 축초의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Fig. 12)
다회 영자의 끝 부분은 약간 접고 뾰족한 상아제 비녀[簪]를 달아맨다. 이것은 簮匠 安二男이 만들었는데,60 현재는 유실된 상태이다.

Ⅴ. 畫員의 印札과 書寫官의 書寫

1694년 어람회맹축을 위한 서본의 백초 제작과 뒷면 배접 및 상하좌우의 장황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도화서 화원을 선정하여 붉은 선을 긋도록 하였고, 출초를 위해 사자관을 선발하였다. 인찰의 경우 1680년 어람회맹축의 인찰화원은 張忠明이었는데,61 1694년 인찰화원은 韓後邦이 선택되어 윤5월 10일부터 시역하였다. 1주일이 지난 윤5월 17일 회맹문을 출초한 사자관은 李翊臣(1631~1711)이 정해졌다.

1. 화원의 邊欄과 界線 긋기

1694년의 인찰화원 韓後邦(1674~1720년 활동)은 46년간 15곳의 도감에서 활동하였다.62 그가 처음으로 도감역을 지기 시작한 때는 1674년 현종의 국장 때 뽕나무로 신주를 만드는 虞主所부터였다.63 곧 1676년 인조와 장렬왕후, 현종과 명성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도감에서 국역을 지는 등 등장하면서 꾸준히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677년에는 한 해에 총4곳의 도감에서 도감역을 지면서 성장하였다. 현종의 사후 3년상이 끝나 현종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는 도감을 비롯하여, 숙종비 인경왕후를 중궁전으로 책봉할 때 책례도감을 비롯하여 인조비 장렬왕후의 삼존호와 현종비 명성왕후에게 존호를 올리거나 명성왕후를 존숭하는 도감에서도 국역을 졌다.
한편 남별전을 중건할 때에는 3소에서 17명의 화원과 함께 단청 작업을 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681년에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가례 때 2방에서 도감역을 졌고 3등상을 받았다. 1684년에는 선원보략을 교정하여 간행할 때와 현종비 명성왕후의 국장 때에 참여하였다. 1686년 현종비 명성왕후의 사후 삼년상이 지나 종묘에 신주를 부묘할 때에는 도화서 화원으로서 7명의 화원들과 함께 도감역을 졌다. 1690년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거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할 때에도 화원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때부터 그가 화원 중에 우두머리에 위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화원으로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한후방은 1694년 어람회맹축을 제작할 때 인찰화원으로 선정되어 장황이 모든 끝나고 윤5월 10일에 회맹문을 쓸 수 있도록 인찰선을 긋게 되었다. 의궤 기록에 의하면 변란의 길이는 1자 3치 5푼, 나비 8푼, 매 1행에는 37자를 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을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 확인한 결과 회맹축의 실제 길이는 2,287cm이고, 1칸의 넓이 4.1cm이었다. 당시 인찰을 위해 제용감에서는 朱紅 1냥을 도감으로 보냈으며, 이를 통해 한후방은 스스로 丈尺을 만들어 대고 긋는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하였다.64
한후방이 선을 긋는 순서는 먼저 상하좌우 가장자리에 해당되는 邊欄을 굵은 선으로 긋고, 상하를 내리긋는 界線을 다시 그은 것이 확인된다. 변란을 그릴 때 상하 변아로부터 시작하여 위쪽은 1.5cm, 아래쪽은 1.4cm의 여백을 두고 굵게 진하게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그었다. 화원이 상하로 가늘게 내리그은 계선의 간격은 너비 4.1cm이었고, 좌우 계선은 총557행이었다(Fig. 13)(Fig. 13-1).
화원 한후방은 1694년 어람회맹축에 인찰을 한 이후 1702년 인현왕후의 국장 때 참여하여 도감역을 졌으며, 3등상을 받았다. 이렇게 등장한 이후 28년간 도감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한후방은 16년간 국역에 참여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1718년 세자 경종빈 단의빈의 사후 예장도감에 참여하여 3등상을 받았다. 그가 활동한 마지막 기록은 1721년 숙종의 사후 혼전도감의 3방에서 단청 화원으로 참여한 경우였다. 당시 혼전으로 사용된 창덕궁 선정전에 단청을 그리는 데 20명의 화원들이 동원되었는데, 그중 한후방이 가장 앞 자리에 위치하여 화원 중 우두머리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65

2. 서사관의 會盟文 서사

인찰 화원이 윤6월 10일부터 시역을 하여 인찰선을 모두 긋고 나면, 承文院 소속의 사자관을 동원하여 그 위에 글씨를 쓰게 된다. 1694년 회맹문을 出草하기 위한 서사관을 承文院에서 1명을 보내도록 하여 윤5월 17일부터 시역하였다.66 1680년 보사공신을 녹훈할 당시 어람회맹축의 서사관은 李翊周였는데, 1694년 서사관은 李翊臣(1659~1702년 활동)을 선발하여 보냈다.67
이익신이 사자관으로서 최초로 도감역을 진 것은 1659년 효종의 국장도감부터였다.68 하지만 이후 실력을 기르는 기간이 필요했던지 그가 다시 국역을 지기 위해 등장하는 것은 14년이 지난 1673년 효종의 영릉을 천릉하는 도감에서였다. 1674년에는 효종비 인선왕후의 국장도감에, 1681년 숙종비 인경왕후 국장도감에도 사자관으로 동원되었다. 1702년(숙종 28) 이익신은 『선원보략』(선원계보기략의 약칭)을 수정하여 교정하는 교정청에서 서사하는 작업을 하고 아마 1필을 사급받았다.69 이처럼 이익신은 1659년부터 1702년까지 43년간 5곳의 도감에서 국역을 진 숙종대를 대표하는 사자관이어서, 숙종 또한 이미 그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곧 숙종이 1687년(숙종 13) 12월에 열성어제를 판각하기로 할 때 글씨를 착오 없이 정확히 쓰는 사자관으로서 이익신을 선발하였고, 그가 1689년부터 1692년까지 열성어제를 출초할 때 글씨를 잘 쓰고 정확하게 쓴다고 하여 동원되었다.70 당시 이익신은 원종의 어필을 모사하여 활자를 만들어 간행한 『맹자언해』에서 원종의 어필이 없는 글자는 숙종이 직접 쓴 글자를 활자로 만들었다.71 결국 1691년 7월 『열성어제』를 책판으로 새기기 위해 사자관 이익신은 7월 8일부터 시역하여 11월 16일까지 正書를 서사하였고, 이것을 목판에 뒤집어 붙이는 付板 과정으로 작업하였다.72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당시 숙종이 그에게 종6품에 해당되는 守令을 제수하자, 며칠 동안 대간들이 “글을 쓰는 미미한 노력(書役微勞也)”으로 수령에 제수하는 것은 불가하니 환수하라며 시끄러웠다.73 이에 숙종이 그 뜻을 받아들여 수령첩은 환수하고 특별히 加資하도록 하였다.74
숙종 당시 이익신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자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일례로 1691년(숙종 17) 청나라 사신들이 우리나라의 글 잘 쓰는 사람을 만나기를 원한 적이 있었다. 이에 사자관 이익신과 김이석을 선발하여 그가 청 사신을 만나게 하였다.75 그로부터 8년 뒤인 1698년에도 청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시를 구하였는데, 이때 3인의 서사관을 선발하여 제술한 시를 쓰기도 할 정도였다.76 이듬해 1692년 이익신은 가선대부 行龍驤衛 부사과의 위치에 올라 서법이 당시 사자관 중 가장 뛰어나 『열성어제』 刊本의 서사관으로 참여하였다.77
1694년 당시 서사관으로서 최고로 평가받던 이익신이 어람회맹축에 서사하게 되었다. 사자관은 비단으로 배접한 회맹축에 바로 쓰는 것이 아니라 출초와 중초를 통해 두 차례 미리 쓰는 연습을 해 본 다음 정본에 쓴 것이 확인된다. 이를 위해 도감에서는 6월에 서사관이 사용할 지필묵을 여러 관청에서 받아서 궤짝에 넣어 두었다. 먼저 출초와 중초에 사용할 종이는 원래는 楮注紙 3권이었지만, 막상 출초 때는 草注紙를 풍저창에서 진배하였고, 중초 때에만 저주지 3권을 장흥고에서 들였다. 서사관이 사용할 붓과 먹과 벼루 또한 연습 때와 정본을 쓸 때 각각 차등을 두어 마련했다. 출초와 중초 때에 사용할 황필 4자루와 참먹 3정은 공조에서 들였는데, 정본에 사용할 황필 13자루와 참먹 5정은 공조에서 들였으며 紫硯 1면은 상의원에서 들였다.78 서사관의 지필묵은 길이 3자 3치, 높이 7치 5푼, 너비 7자 5치의 크기에 주홍칠을 한 궤짝[樻子]에 넣어두었고, 궤짝 안에는 4자 9치의 多紅大緞으로 도배해서 사용하였다.79
이처럼 서사관은 백초로 만든 정본 어람본에 서사관이 글씨를 쓰기 전에 풍저창에서 도감으로 들여온 저주지에 出草를 회맹문과 회맹록을 1차로 써 보았고, 장흥고에서 들인 저주지에 中草를 2차로 써보았다. 이렇게 2번의 연습을 통해 비단을 짜고 종이를 배접하고 회장까지 마친 어람회맹축 정본 위에 쓸 정확한 인원수를 알고 있었다. 화원이 그은 총 557행 중 아래쪽 21행의 여백을 남기고, 이익신은 536행에 흐트러짐 없이 해서체로 정갈하게 회맹문과 회맹록을 썼다.(Fig. 14)
이처럼 이익신은 1659년부터 1702년까지 43년간 현종대부터 숙종대까지 사자관으로서 국역을 졌다.80 이러한 그의 글씨는 영정조 대에 이르러 좋은 평가를 받았음이 확인된다. 영조가 목릉의 大字 현판을 모사할 때 이익신이 썼던 것을 언급하거나,81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는 열성어제의 글을 모은 誠正閣의 동벽에 이익신이 쓴 현판을 걸도록 했다.82 영정조 당시 활동한 실학자 李肯翊(1736~1806)이 쓴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익신은 한호나 김의신과 마찬가지로 글씨를 잘 쓰는 인물로 올라 있었다.83 이로 미루어 그는 한호 이후 사자관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실용적인 문서에 사용된 해서체에 능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84
서사가 끝나면 국왕의 휘를 가리기 위해[諱付籤] 付標를 한다. 이때 사용하는 비단은 무늬가 있는 얇고 투명한 有文紅紗를 호조나 제용감에서 들여 길이 5치와 나비 2치를 준비하며 붙인다(Fig. 15)(Fig. 15-1). 1694년 10월 10일 완성된 어람회맹축의 제작일시를 쓴 마지막 부분에 국새인 시명지보를 제작 일시가 새겨진 위쪽에 찍는다(Fig. 16). 도장을 찍고 보자기로 싸고, 泥金으로 용을 그린 朱紅函 1부에 담은 후 紅紬 보자기 1건으로 싼 다음 숙종에게 진상하였다.85 10월 12일 숙종인 곤룡포에 익선관을 쓰고 창덕궁 인정전 북벽에 남향하여 어좌를 놓고 그 앞에 寶案을 놓고 행사를 거행하였다.86

Ⅵ. 결론

이상과 같이 숙종이 1680년 녹훈하였다가 1684년 삭훈했던 보사공신들을 1694년 복훈하면서 제작한 <이십공신회맹축> 유물과 그 전말을 기록한 『복훈도감의궤』를 대상으로 재료나 도구의 수급이나 장인의 동원 방식 및 작업 단계별 제작 과정을 분석하여 숙종대 왕실공예품의 제작실태를 밝혀 보았다. 이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람회맹축을 제작하기 위해 복훈도감을 설치하였고, 당상 2명을 책임자인 제조에 임명하였다. 도감 내 제작처는 3곳의 각방과 별공작을 별설하였고 중간 관리자로는 낭청 4인과 감조관 4인이 운영하였다.
둘째, 어람회맹축의 바탕[書面]에 해당되는 白綃는 1방 직조색겸교서색에서 1자 6치의 광폭에 1필[35자] 이상의 54자로 넓고 길면서 성긴, 매우 특별한 왕실용 직물을 짜서 사용했다. 어람회맹축의 백초는 66.6cm의 광폭에 24m 길이의 白綃를 잇댄 흔적이 없이 全幅을 사용하여 書面을 만든 독특한 왕실공예품이었다. 이러한 白綃를 직조하기 위해 원료와 도구는 호조나 제용감, 내자시나 사재감 등의 상설아문에서 수급하였고, 가가에 별설한 직조공방에 여러 종류의 장인들을 징발하였다. 練絲匠은 25m 이상의 긴 날실을 白絲를 사용하여 精練하고, 바디장[筬匠]은 폭 넓은 바디를 특별히 만들었으며, 綃匠은 가로가 긴 베틀 위에서 성긴 직물을 직조하였다.
셋째, 어람회맹축의 바탕면인 書面의 뒷면을 배접하거나 비단으로 回粧하여 장인의 공예 기술이 발휘되었다. 특히 24m 길이의 성긴 백초의 뒷면에 모변지와 저주지를 이중으로 배접하기 위해 경덕궁의 병조 대청에서 송판 96닢으로 판재와 판재는 청대죽을 연결하여 쟁틀[棦機]을 만들었고, 비단 위에 종이를 바르고 백반으로 磻水하고 어교를 바르는 전통 배첩 기술이 확인되었다. 서면의 상하좌우 회장이나 軸初衣 부분에는 八寶紋 비단으로 軸初衣를 붙였다. 뒷면 전체에는 종이를 발라 붙인 후 상하에는 각각 日月 형태의 橫木을 댔고, 횡목의 상하에는 성천의 玉匠이 만든 옥막이로 마감하였으며, 회장에는 多繪匠이 짠 끈목을 달았다. 이처럼 어람회맹축 유물은 제작단계마다 국왕을 위해 최고 수준의 재료로 우수한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 17세기 말 숙종대 왕실공예품의 백미였다. 특별히 제작된 백초 외에도 회장용이나 표지용으로 당시에 유행한 팔보문이 새겨진 비단이 사용되었으며, 옥의 특산지인 成川에서 특별히 제작한 옥막이를 사용한 것에서 확인된다.
넷째, 어람회맹축 유물에는 17세기를 대표하는 화원과 사자관이 동원되었다. 화원 韓後邦은 46년간 19곳의 도감에서 활동하였는데, 붉은 색으로 변란은 굵게, 계선은 가늘게 총557행의 인찰선을 정교하게 그었다. 이익신의 경우 43년간 국가를 위해 활동하면서 한호 이후 가장 뛰어난 사자관으로서 숙종 말 조선에 온 청 사신들이 글씨를 요구할 때에도 참여할 정도로 유명하였다. 그는 어람용에 글씨를 쓰기 전에 출초와 중초 두 번에 걸쳐 연습한 이후 정확한 해서체의 글씨를 썼다.
이처럼 어람회맹축은 보사공신복훈도감의궤에 의해 제작 전말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24m 길이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한 규모에 최고급 재료로 호화롭고, 당대를 대표하는 화원이나 사자관 및 경공장들이 다수 참여하여 분업적 협업으로 제작한 17세기 숙종대를 대표하는 왕실공예품의 백미였다.

Notes

1) 이상식, 「朝鮮後期 肅宗의 政局運營과 王權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2) 『保社復勳都監儀軌』 (1695, 외규076)는 御覽用으로 제작된 유일본으로서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 약탈되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의궤의 하나이다. 2011년 국내에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 의궤에는 숙종실록 등 다른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람회맹축의 제작 관련 내용이 유일하게 수록되어 있다.

3) 필자는 2020년 6월 17일 문화재청의 의뢰로 보물 제1513호로 지정되어 있던 어람회맹축(2007)을 국보로 승격 지정하기 위한 조사에 참여하여 실견 조사하였고 같은 해 12월 7일 문화재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후 해당 유물은 국보로 승격되었고, 본고는 당시 작성한 보고서의 토대 위에 의궤기록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장인의 제작기술을 보완하였음을 밝힌다.

4) 이상식, 「숙종대 保社功臣의 錄勳 과정과 사회적 關係網 분석」, 『한국사연구』 155(2011. 12). pp. 75-112; 전경목· 박용만, 「<二十功臣會盟軸>의 특징과 가치」, 『장서각』 22(2009); 김덕수, 『조선의 공신』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 pp. 33-34, pp. 58-64, pp. 73-92; 박성호, 『이십공신회맹축, 공신과의 옛 맹약을 지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7); 윤혜민, 「숙종대 保社功臣의 錄勳과 정치적 의미-『保社錄勳都監儀軌』를 중심으로-」, 『朝鮮時代史學報』 99(2021), pp. 41-72; 윤혜민, 「숙종대 保社功臣의 錄勳과 정치적 의미-『保社錄勳都監儀軌』를 중심으로-」, 『朝鮮時代史學報』 99(2021), pp. 41-72; 김우진, 「숙종대 保社功臣의 復勳과 『保社復勳都監儀軌』」, 『朝鮮時代史學報』 99(2021), pp. 75-104.

5) 박지선, 「유물과 기록을 통해 본 조선의 장황」, 『제3회 동아시아 종이문화재보존 심포지엄 발표논문집』 (한국장황연구회, 2008. 9), pp. 112-113; 박용만, 「이십공신회맹축, 조선왕실 장황문화의 정수」, 『장서각에서 옛 기록을 만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1).

6) 이십공신은 開國, 定社, 佐命, 靖難, 佐翼, 敵愾, 翊戴, 佐理, 靖國, 光國, 平難, 扈聖, 宣武, 淸難, 靖社, 振武, 昭武, 寧社, 寧國, 保社功臣이다. 1680년 당시 녹훈된 보사공신 6인은 1등 공신 2명(金錫胄, 金萬基), 2등 공신 1명(李立身), 3등 공신 3명(南斗北, 鄭元老, 朴斌)이었다(『錄勳都監儀軌』, 계사질, 경신(1600) 5월 16일).

7)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윤5월 19일; 감결질, 7월 초7일.

8) 『숙종실록』 권26, 숙종 20년 윤5월 21일 계유; 윤5월 24일 경인.

9)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6월 초5일. 1646년 제작된 <寧國功臣御覽會盟軸> (보물 제1513호)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0)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윤5월 초6일, 윤5월 초7일. 都監應行事目. 『숙종실록』 권26, 숙종 20년 윤5월 25일 신묘; 6월 5일 신축. 실록에서는 庚申復勳都監으로 부르고 있다.

11) 『숙종실록』 권27, 숙종 20년 10월 12일 병오. 실록에서는 교서축을 반포한 기록이 있다.

12)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10월 10일. 도감의 책임자는 제조였는데, 해당 의궤에는 제조와 당상을 혼용하고 있다.

13)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윤5월 초7일; 윤5월 25일; 이것은 1680년 녹훈도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원래 당상은 金錫胄가 혼자 담당하였다가 金萬基가 추가로 임명되었다(『錄勳都監儀軌』, 계사질, 경신 6월 16일; 승정원일기 277책, 숙종 6년 6월 16일 계유).

14)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윤5월 초9일; 10월 14일. 1680년 녹훈도감의 경우 1방은 직조색, 2방은 화상색겸교서색, 3방은 인출색, 별공작이었다.

15)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윤5월 초6일; 윤5월 초9일.

16)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6월 초8일.

17)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6월 초4일. 10월 1일. 이후 교체 사실은 보이지 않고 10월 1일 陞敍하고 있어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18)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6월 29일.

19)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윤5월 14일, 7월 초8일, 10월 14일.

20)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6월 초5일.

21) 이은경, 『韓國과 中國의 布帛尺에 關한 硏究』 (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pp. 88-89. 『經國大典』의 布帛尺은 46.80cm, 대한제국 光武 6년의 布帛尺은 48.48cm, 조선 말기에는 51.51~61.60cm로 연구하였다. 하지만 숙종 당시 어람회맹축의 나비와 길이는 이에 부합되지 않는다.

22) 權橃, 『冲齋先生集』권4, <日記> 중종 4년 25日 정해. “朴元宗啓曰 功臣會盟軸一軸入 綃三十尺 幷計靖國定難兩功臣軸 綃一千餘尺 此非一二年可織 所費亦多 請以紙爲之 從之.”

23) 『復勳都監儀軌』, 1방 품목, 갑술 10월 일;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pp. 222-565. 복훈도감에 참여한 각색 장인들의 활동 기간이나 상황은 현종대부터 숙종대까지의 기록에서 확인하였다.

24) 『復勳都監儀軌』, 감결질, 갑술 윤5월 23일. “兵曹了爲相考事. 綃匠·筬匠·練絲匠等段, 已爲料布, 磨鍊上下事, 移文爲如乎, 其中織造守直軍二名, 假家守直軍二名等價布段置, 依前謄錄磨鍊上下, 輸送都監, 以爲分給之地向事.”

25) 장경희, 『바디장』 (화산문화, 2002), p. 153; 장경희, 『서천베틀장』 (충청남도, 2021), p. 139.

26) 『復勳都監儀軌』, 1방 품목, 갑술 윤5월일.

27) 『保社錄勳都監儀軌』, 1방, 경신 6월 27일.

28) 『保社錄勳都監儀軌』, 1방. “造筬次大竹二箇繕工監 魚膠一張平市署 煎竹次所入 眞油一升 甘醬五升 燒木五.”

29) 『復勳都監儀軌』, 1방 소용, 갑술 윤5월일. “匠人等所用 筬機一 造筬次大竹二箇 魚膠一張 剪竹所入 眞油一升 甘醬五升 燒木五丹.”; 『保社錄勳都監儀軌』, 1방, 1680. “筬匠所用延日礪石一塊 塗灌一 用後還下次”

30) 『保社錄勳都監儀軌』, 1방 품목, 경신 6월 21일. 품목. “會盟軸所入白絲, 不可不極擇精織是乎等以, 白絲二斤段, 還 送該曹市人處, 可合. 白絲, 自都監爲先擇, 用後價本乙良, 令 戶曹上下事分付爲乎旀, ”

31) 『復勳都監儀軌』, 1방 품목, 갑술 윤5월일.

32) 『復勳都監儀軌』, 1방 소용, 갑술 윤5월일. “梭次黃楊木二條各長一尺.”

33) 『復勳都監儀軌』, 1방 소용, 갑술 윤5월일. “鍊絲次 海長竹十五箇 熟麻條所一巨里 木賊三錢 尾箒三柄 炭二石” ; 『保社錄勳都監儀軌』, 1방, “鍊絲次 海長竹十五箇 熟麻條所一巨里 木賊三錢 尾箒三柄 炭二石.”

34) 『復勳都監儀軌』, 1방 소용, 갑술 윤5월일. “織造時所用陶所羅一 沙鉢一 沙貼匙二 旕乃三十箇 絲機八 刃機一筬機一 朴串機二 鉛叱土八箇合重二十兩 刀子一 錐子一 東串一 四寸錠四箇---戶曹 工曹 繕工監 平市署 禮賓寺 長興庫 軍資監 廣興倉 司宰監 刑曹 內資寺 瓦署 司贍寺 軍器寺 別工作 司䆃寺 豊儲倉 義盈庫.”

35) 『復勳都監儀軌』, 1644, 규14946. 織造兼敎書色.

36) 『復勳都監儀軌』, 감결질, 갑술 6월 19일. “本房依幕, 以閭家挾窄是乎等以, 織所難便是置. 令別工作假家一間造作, 以爲織成之地, 何如? 依.”

37) 『復勳都監儀軌』, 1방 소용, 갑술 윤5월일. “織造次 機諸具 多繪機諸具 用後還下次.”

38) 『保社錄勳都監儀軌』, 1방. “織造直二名” 織造直들은 1644년 녹훈도감 등 여러 도감에 등장하며, 1달 이상 백초를 직조하는 동안 직조를 지킨 수직군사였다고 여겨진다. 『錄勳都監儀軌』, 1644, 규14946. 1방 織造兼敎書色.

39) 『保社錄勳都監儀軌』, 1방. 경신 6월 21일. 품목. “綃匠五名 織造時所着白布巾, 乃赤亇三件, 白布手巾三件.”

40) 『復勳都監儀軌』, 1방 품목, 갑술 윤5월일. “本房織造時, 綃匠五名所着, 白布巾乃赤亇三件, 白布手巾三件, 織造膠染所用, 綿紬手巾等物, 用後還下次, 各該司良中, 進排事, 捧甘, 何如? 稟. 依. 戶曹 濟用監.”

41) 『復勳都監儀軌』, 1방 품목, 갑술 윤5월일. “本房綃匠五名, 練絲匠二名, 織造次, 今月二十日, 始役之意, 稟. 依.”

42) 『復勳都監儀軌』, 감결질, 갑술 6월 24일.

43) 『保社錄勳都監儀軌』, 1방.

44)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6월 초10일. “啓曰, 進上會盟軸, 白綃五十尺, 磻水與褙貼大爭機坐排處所, 他無可設, 故庚申年慶德宮內兵曹大廳排設....今番復勳時進上會盟軸, 亦依庚申年例, 慶德宮內兵曹 排設之意, 敢啓.”; “今番復勳時 進上會盟軸, 亦依庚申年例, 慶德宮內兵曹 排設之意, 敢啓. 傳曰, 允.”

45) 『復勳都監儀軌』, 2방 화상색겸교서색. 갑술 윤5월일. “會盟軸綃磻水次白磻二兩濟用監 魚膠十六張軍器寺 牛盆子內資寺 燒木三丹司宰監 大爭機一部 長五十二尺 以靑大竹造作別工作.”

46) 『復勳都監儀軌』, 2방 화상색겸교서색. 갑술 윤5월일. “會盟軸合膠次膠末二斗禮賓寺 砒礵三兩 白磻一兩以上濟用監 黃蜜四兩義盈庫 燒酒一大也內贍寺 淸蜜六合內資寺 燒木五丹司宰監

47) 『復勳都監儀軌』, 2방 화상색겸교서색. 갑술 6월일. “進上會盟軸, 綃五十四尺, 毛邊·楮注等紙後褙後, 以白蜜推光爲如乎, 推造軍四名, 限一日定送於慶德宮事, 戶曹及該署良中, 捧甘, 何如? 稟. 手決, 依. 戶曹 平市署.”

48) 축초의 부분에는 제목에 해당되는 題籤을 붙이게 되어 있지만, 현재 어람회맹축의 제첨은 유실되었고 종이를 붙였던 풀 자국이 남아 있을 뿐이다.

49) 현재 어람회맹축 유물의 경우 다회는 유존하나 그 끝에 매달았던 상아제 簪[비녀]은 유실된 상태이다.

50) 『復勳都監儀軌』, 감결질, 갑술 9월 21일.

51) 『復勳都監儀軌』, 2방 화상색겸교서색. 갑술 윤5월일.

52)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pp. 231-429. 朴茂善은 의궤에서 朴武善도 기록되어 있으며 위의 책에서 그의 활동한 기간을 적시하였다.

53) 이은주, 「외규장각 의궤 책의 문양을 통한 운보문 편년 설정 방법」, 『문화재』 52(2019), pp. 15-16.

54) 『復勳都監儀軌』, 감결질, 갑술 윤5월 16일. “平安監司了 爲相考事. 今此保社功臣復勳事, 命下矣. 進上會盟軸所入玉莫只, 實預差幷以四箇, 道內成川府良中, 星火知 委, 今月晦日內, 急速堅封, 入盛樻子具鎻鑰, 封表上送, 以爲及時取用之地向事.”

55) 『復勳都監儀軌』, 감결질, 갑술 윤5월 17일. 別工作手本 “右手本爲行下事. 取考謄錄, 則進上會盟軸所入玉莫只, 實預差幷四箇, 移文于平安監司, 則自成川府造作, 上納爲有如乎.”

56) 『錄勳都監儀軌』, 1680. 1방. 1680년의 다회장은 玄得位 등 2명이었다.

57) 『復勳都監儀軌』, 감결질, 갑술 6월 19일.

58) 『復勳都監儀軌』, 1방 소용, 갑술 윤5월일.

59) 『復勳都監儀軌』, 1방 품목, 갑술 6월일.

60) 『錄勳都監儀軌』, 1644, 규14946, 別工作 工匠秩. “簪匠 安二男”; 別單. “簪匠 安二男(三等).” 안이남이 簪匠으로서 동원된 것은 1644년과 1694년 2차례에 발견되어 주목된다.

61) 『錄勳都監儀軌』, 「二房儀軌畫像色」, 辛酉(1681) 2월 초9일.

62)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역대서화가사전』하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pp. 2390-2391. 해당 사전에서는 한후방의 활동시기를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으로 표기하여, 본고에서는 장경희, 앞의 책, pp. 296-541을 참조하여 그의 활동한 기간을 적시하였다. 韓後邦은 여러 의궤에 韓後房, 韓後芳, 韓厚邦, 韓厚芳 등 다양하게 표기된다.

63) 『顯宗國葬都監儀軌』, 1674, 규13539, 三房 虞主所 工匠秩.

64) 『復勳都監儀軌』, 1694, 「二房儀軌畫像色」, 갑술 5월 24일, 6월 23일, 10월 14일; 「二房」 갑술 8월 8일.

65) 『肅宗魂殿都監儀軌』, 1721, 규13550, 3방 各色 匠人秩.

66) 『復勳都監儀軌』, 감결질, 갑술 윤5월 17일.

67)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10월 14일; 오세창, 김보경 외 역, 『槿域書畫徵』하 (시공사, 1998), p. 200.

68) 『孝宗國葬都監儀軌』, 권하, 1659, 규13527, 서계논상.

69) 『璿源譜略校正廳儀軌』 권1, 규14007, 璿源譜略校正廳員役別單, 논상.

70) 『御製草謄錄』 1권, 1689, 규12998, 15면, 기사(1689) 7월 18일.

71) 김덕수, 「숙종조 어필 수집 양상과 숙종의 어제 찬술」, 『장서각』 45(2021), pp. 71-72; 이완우, 「조선후기 列聖御筆의 刊行과 廣布」, 『장서각』 30(2013), pp. 146-193.

72) 『御製草謄錄』 1권, 1691, 규12998, 35면, 신미 7월 18일 甘結. 戶兵曹了.

73) 『御製草謄錄』 1권, 1691, 규12998, 35면, 신미 11월 18일, 19일, 26일.

74) 『葛庵集』 제6권, 1691, 經筵講義, 신미 11월 26일 병자.

75) 『숙종실록』 권23, 1691년 4월 6일 신유.

76) 『謄錄類抄』 6권, 1698, 규15080, 무인 2월 초10일.

77) 『御製草謄錄』 1권, 1692, 규12998, 75면, 임신 3월 11일.

78) 『復勳都監儀軌』, 1방 품목, 갑술 6월일.

79) 『復勳都監儀軌』, 1방 품목, 갑술 7월일. 어람회맹축 정본을 다 쓴 다음에는 버들고리 1부, 4폭을 붙여 만든 홍색 큰 보자기 1건과 장막 2부를 원래의 관청으로 되돌려 보냈다.

80)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pp. 1729-1730; 장경희, 앞의 책, pp. 222-472.

81) 『영조실록』 영조 51년(1775) 12월 25일 무진.

82) 『列聖御製』 권16, 1776, 규1803-v.1-23.

83) 『燃藜室記述』 別集 제14권, 文藝典故, 筆法.

84) 송진충, 「寫字官 雪峯 金義信의 生涯와 書風」, 『美術史學』 34호(2017. 8), pp. 24-25.

85)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10월 초10일.

86) 『復勳都監儀軌』, 계사질, 갑술 10월 12일.

Fig. 1.
<이십공신회맹축>, Twenty Kongshin Hoemaengch’uk, 1694, Chosŏn, Academy of Kore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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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복훈도감의궤』, Bok’undogam ŭigwe, 1694, Chosŏn,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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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어람회맹축의 세부 일러스트>, Detailed illustration of Twenty Kongshin Hoemaengch’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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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백초; 현미경 확대 사진>, Microscope close-up picture of Paekch’o
Fig. 4-1. <백초; 날실과 씨실의 교차 일러스트>, Illustration of Paekch’o; crossed warp threads and the w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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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邊兒 직물 (백릉)>, Paengnung text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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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상회장 직물 (남대단)>, Upper packaging textile Namdae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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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단종장릉봉릉 도감의궤』, Tanjong changnŭng pongnŭng togam ŭigwe, 1699, Chosŏn,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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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軸初衣>, Ch’ukch’oŭi (start side)
Fig. 8-1. <軸初衣>, Ch’ukch’oŭi (start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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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橫木의 막이>, Magi of Sanghoengm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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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下橫木의 옥막이>, Ongmagi of Hahoengm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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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남색 비단에 붙인 多會纓子>, Tahoeyŏngja attatched to the navy blue si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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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축초의 쪽에서 본 다회영자>, Tahoeyŏngja, from the perspective of Ch’ukch’oŭ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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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화원 한후방이 그은 붉은 선>, Red line drawn by Hwawon Han Hupang
Fig. 13-1. <세부>Detail of Fig.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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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서사관 이익신의 글씨>, Writings of the scribe Yi Ik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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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국왕의 이름을 가 린 비단>, Silk covering the name of the king
Fig. 15-1. 세부, Detail of Fig.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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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施命之寶>, Shimyŏngji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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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이십공신회맹축의 재료와 크기 및 장인>, The material, size and master craftsman of Twenty Kongshin Hoemaengch’uk
Division material Government Office Size
Master crafsman
Length Width Type Name
Background of paper Paekch’o Cheyonggam 50 cha 1 cha 6 ch’i Ch’ojang 5 people including Chŏng Sŏn
Paeksa/bamboo Sŏn’gonggam 2 kŭn/15 pieces Yŏnsajang 2 people including Chang Kyenam
Bamboo Sŏn’gonggam 2 pieces Sŏngjang 2 people including P'yŏng Yŏn
Maobian paper Cheyonggam Paekch’o 50 sheets Paech’ŏpchang 2 people including Pak Musŏn
Chŏjuji Changhŭnggo back side, 3 volumes Paech’ŏpchang 2 people including Pak Musŏn
Paekchi Changhŭnggo back side, 1 volume Paech’ŏpchang 2 people including Pak Musŏn
Table 2.
<이십공신회맹축 회장의 재료와 크기>, The material and size of the mounting of Twenty Kongshin Hoemaengch’uk
Division material Government Office Size
Length Width
border Paengnŭng Cheyonggam 30 cha 30 cha
packaging of center, left and right Paek’wamundaerŭng Cheyonggam 2 ch’i
packaging of up and down Namhwamundaedan Cheyonggam 4 cha 4 cha
Ch’ukch’oŭi Tahongyumundaedan Cheyonggam 2 cha 2 cha
Tahoeyŏngja Hongsusa Hojo 6 cha 1 ch’i 5 p’un
Pinyŏ ivory
Hwibuch’ŏm Yumunhongsa Hojo 5 ch’i 2 ch’i
Hoengmok of up and down Manchurian walnut
Ongmagi White jade P’yŏngnam Sŏngch’ŏn 4 pieces (including spare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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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社功臣復勳都監儀軌』, 169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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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신』,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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