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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4; 2022 > Article
사명 유정 진영의 도상 연구*

Abstract

이 논문은 조선후기 사명 유정 진영의 도상적 특징과 변천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사명 유정은 청허 휴정의 2세손이며, 임진왜란시기 의승장으로 참전하여 다양한 전과를 세워 왕실에서는 충신으로, 불교계에서는 종파의 대표자로 후대에 이르기까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18세기 초, 왕실은 이러한 유정의 충의를 표창·장려하기 위해 태허 남붕을 지원하여 유정을 향사하기 위한 사액서원 표충사를 중건토록 하였으며, 또한 신유한이 출간한 『松雲大師奮忠紓難錄』을 각지에 배포하였다. 표충사에는 유정의 제향에 필요한 진영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후대의 여러 사찰에 유정 진영이 폭발적으로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사명 유정 진영은 그가 수염을 길렀다는 기록을 토대로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1기에는 나한도과 유사한 수염을 기른 수행자 혹은 선승의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천왕·시왕형 수염과 미간 주름을 통해 의승장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2기에는 천왕·시왕형 수염을 묘사한 의승장의 모습이 주류가 되며, 화제에 유정이 제수된 직위를 표기하거나 이를 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승장 유정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3기에도 지속되나, 20세기 이후로는 관우·산신 등 민간신앙의 도상과 유사한 수염이 등장하며, 다양한 민화적 도상과 극도로 과장된 화기와 찬문을 통해서 민간인식에 영향을 받은 신격화된 유정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Abstract

This thesis is a study on the lconic features and changing process of portraits of Samyeong Yujeo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Samyeong Yujeong is the best disciple of Cheonghe Huejeong,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participated in various activities. He is a loyalist in Joseon royal family and a representative of Buddhist society in the late Joseon, and has received positive reviews from future generations. In the early 18th century, Joseon royal family supported Taeheo Nambung to rebuild Miryang Pyochoongsa shrine, a Confucian shrine given its name by the king and the place for Confucian rite to enshrine Yujeong, and distributed Shin, Yu-han’s publication 『Bunchungseonanrok』 to various places. In Miryang Pyochoongsa shrine, a portrait necessary for Yujeong’s Confucian rites was painted, which served as an opportunity for the explosive creation of Yujeong’s portraits in various temples in later generations.</br> The portraits of Samyeong Yujeong were depicted in various forms based on the records that he grew beards and moustaches In the early days, various attempts were made, such as being described as practitioner with the beards and moustaches influenced by traditional Nahando, or appearing as monk general through the beards and moustaches of heavenly kings or ten kings of hell, and wrinkles between the eyes. in the mid-term, the method of describing the beards and moustaches like heavenly kings or ten kings of hell became the mainstream, and actively emphasized the appearance of the monk general Yujeong, such as recording or exaggerating Yujeong’s position at that time in painting inscriptions. this trend continued in the late 19th century, but after the 20th century, the beards and moustaches similar to folk beliefs such as Guan-Yu or mountain gods. this aspect expressed Yujeong like a god along with various elements of folk painting, and extremely exaggerated painting inscriptions influenced by the perception of people in late Joseon Dynasty.

Ⅰ. 서론

‘진영(眞影)’은 승려의 초상화로 영정(影幀), 진(眞), 영(影) 등으로 불리며 스승의 입적 이후 제자들이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증표로서 스승의 모습을 담은 상(像) 혹은 그림을 제작하고 제(祭)를 올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진영은 사람을 주제로 한 인물화지만, 분향 예배를 올리는 불화로서의 개념 또한 담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1990년 문화재청과 불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진영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진영이 1,000여점 이상의 많은 수량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1 대부분의 진영이 조선 후기, 특히나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되고 있어 이 시기의 불교미술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러 승려들 중에서도 사명 유정(四溟 惟政, 1544-1610)은 그의 스승인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과 함께 임진왜란 시기, 의승장(義僧將)으로 참전하여 조선 후기 불교부흥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또한 다수의 진영이 현전하고 있어 진영연구에 있어서 중요하다. 특히나 사명 유정 진영은 동일한 인물을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영 속에 묘사된 도상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어있어 매우 특징적이다.
진영과 관련된 최초의 학술적 논의는 1980년 한국의 초상화를 포괄적으로 다룬 조선미의 박사학위논문이며, 조선시대 전체 초상화에서 승려 진영이 차지하는 입지를 파악하고 구도, 화법 등에서 조선 후기 진영의 양식적 특징을 논하였다.2 1990년 김형우는 진영의 용어, 봉안, 양식 등을 정리한 『고승 진영』을 출판하였으며, 2000년 직지성보박물관의 『깨달음의 길을 간 얼굴들-한국고승진영전』 특별전 이후, 진영에 대한 관심은 보다 높아져 다양한 연구성과가 발표되었다.3
사명 유정 진영에 대한 연구로 주요한 것은 이은희의 「조선 임진왜란 승병 삼화상의 진영 연구-청허, 사명, 기허 진영을 중심으로」, 김동하의 「대구 동화사 소장 <사명당 진영>의 제작자와 제작연대」, 이용윤의 「麻谷寺 眞影 奉安 殿閣과 19세기 후반 眞影 造成 佛事의 의미」 등이다. 이은희는 삼화상 진영을 전통양식, 전통양식과 새로운양식, 새로운양식 등 세 종류로 나눴는데, 이는 조성시기와 배경을 고려한 것이기보다는 도상의 형태적 유사성과 음영, 바림기법 등 세부적인 표현법에 의한 계통의 분류에 가까웠다.4
김동하는 동화사 사명당 진영이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정 진영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5 동화사본은 비록 화기에 조성시기가 가경원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6 의자 위에 결가부좌를 취한 자세로 일본 고산사(高山寺) 소장의 15세기 진영과 동일한 형태이며, 동심원 문양과 의자 옆면과 족좌대의 목리문, 유정의 얼굴형태가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에 활동하였던 의균(義均)의 화풍과 유사하여 고식(古式)이라고 할 수 있다.7
이용윤은 마곡사 임난 삼화상 진영의 조성시기인 정묘년(丁卯)이 1927년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며, 화승 춘담 봉은(春潭 奉恩)의 활동시기를 통해 1867년임을 밝혔다. 또한 임난 삼화상 진영이 사실성보다는 대상의 성품과 외형적 특징을 바탕으로 개념화된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되었으며, 특히나 유정의 경우 풍성하고 긴 수염과 건장한 체구로 승병장의 강인한 인상, 기개를 나타내었음을 연구하였다.8
본고에서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사명 유정 진영의 다음과 같은 부분을 연구하고자 한다. 먼저 유정에 관한 다양한 사료와 기록을 통해 생애와 인식을 정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유정을 향사하였던 사액서원 밀양 표충사의 자료를 검토하여 조성과정, 유정 진영과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기가 남아있거나, 동반 봉안된 진영을 통해 조성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진영을 선별하여 이를 1기, 2기, 3기의 3시기로 나누어 진영 속에 묘사된 유정의 도상, 화제, 화기를 통해 진영의 시기별 변화양상을 분석할 것이다.

Ⅱ. 사명 유정의 생애와 인식

사명 유정은 살생을 금기시하는 승려였지만, 임진왜란시기 의승장으로 활동하며 왜적토벌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사회각층에서 끊임없이 화두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17세에 직지사 신묵대사(信默大師)의 아래에서 출가한 후 봉은사 선과(禪科)에 합격하며 본격적인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9 1575년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묘향산 보현사에 주석하던 청허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하였다. 1578년 청허의 문하를 떠나 각지를 순력(巡歷)하며 숭선사·부석사·영은사·월정사 등 다수의 사찰중창에 관여하여 불교계에서의 입지를 다졌다.10
그러나 1952년, 유점사에서 머물던 유정은 일본의 침탈이 끊이지 않자 그 해 8월 참전을 결심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과 도총섭(都摠攝) 청허 휴정 휘하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임명받았다.
의승장 유정의 공은 크게 4가지로 압축되는데, 평양성·수락산·노원평 등 직접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점, 가토 기요마사[加藤 淸正, 1562-1611]와의 회담을 이용해 적진을 정탐한 점, 사이쇼 죠타이[西笑 承兌, 1548-1608] 등 일본 승려들과 친분을 쌓으며 외교를 진행, 여우길(呂祐吉, 1567-1632) 일행과 함께 포로를 송환한 점, 오대산 사고(史庫)·궁궐 공사 및 팔공산성·금오산성·부산성 수축, 통도사 금강계단, 용연사 중창 등 전후 수습에 앞장 선 점 등이다.
이러한 눈부신 활약을 통해 유정은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 등 승직을 넘어, 승려의 신분으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당상관(堂上官)직에 제수되었으며,11 1594년 정3품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12 1602년 종2품 하계 가선대부(嘉善大夫) 및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1605년 종2품 상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게 되었다.13
  • 유정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이 사람은 비록 중이기는 하나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다. 유정은 영남 사람이니 영남으로 내려 보내어 원수의 절제를 받게 하는 한편, 승군을 거느리고 한쪽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14

  • 사문의 뛰어난 안목, 그 빛이 온 세상을 비추네

  • 우뚝함은 칼을 쥔 왕과 같고 빈 모습은 경대의 거울 같구나

  • 구름 밖의 용을 잡으러 가고 허공에서 봉황을 잡아오기도 하네

  • 도에 통달하여 살활이 자유로우니 온 천지가 또한 티끌이로다.15

  • 하늘이 낸 종남산의 용맹스러운 사자

  • 염부제의 악마를 밟아 죽이기 그 몇이던가.

  • 활짝 트인 참 모습이 청허의 골수이니

  • 한 송이 붉은 연꽃 불 속에 피었구나16

『宣祖實錄』·『淸虛堂集』·『逍遙堂集』 등 당대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쟁영웅 유정에 대한 평가는 모두 우호적이며, 특히나 『松雲大師奮忠紓難錄』에는 이덕형(李德馨, 1561-1613), 권율(權慄, 1537-1599) 등 사대부들이 일본으로 떠나는 유정에게 보냈던 다수의 송별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유정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승려를 천시하던 당시의 유교계에서도 보편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17
그러나 유정이라는 인물에 대한 인식, 참전사유에 대한 해석은 유교계와 불교계가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왕실과 유교계는 유정을 국난의 시기에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고 전쟁에 나선 유교적 충신으로 인식하였으며, 나아가 그의 공로를 적극적으로 홍보, 장려하고자 하였다.18
반면, 유정의 스승이자 전국의 승병들을 통솔하였던 휴정은 『淸虛堂集』의 시문에서 유정의 활약상과 성정을 칭송함과 동시에, 유정은 왕실존속, 중생구제를 위해 자비심이라는 불교적 깨달음으로 참전을 결단한 사문(沙門), 즉 승려임을 명확히 하였다.19 또한 유정의 동문 소요 태능(逍遙 太能, 1562-1649)은 『逍遙堂集』의 찬문에서 그를 청허의 골수, 즉 종파의 대표자이자 승단을 이끌어 갈 지도자임을 강조하였다.
  • “… 오직 우리 대사께서는 그 중에서도 빼어나시어 현명하고 지혜로워 더욱 우뚝하시며 인자하고도 정의로우셨습니다. … 인으로 사랑을 베푸니 방오한 선비가 한 시대를 구하는 지략과 같고 의로써 임금에게 충성하니 공신이 사직을 편안하게 한 정성에 부끄럽지 않습니다.”20

  • “… 스님의 시는 사림에 영예를 드날렸고, 스님의 공은 또 국가의 재건에 들어 있고, 스님의 도는 이미 범인을 뛰어넘어 여래의 경지에 들어갔습니다.”21

이처럼 유정의 수행자적 면모에 집중하였던 불교계의 시각은 그의 입적 직후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22 유정은 1610년 8월 합천 해인사에서 입적(入寂)하였으며, 1612년 해인사에 영당과 비석을 세우고 문집을 간행하는 등 그의 업적을 정리하고 추숭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유정과 동문이자 함께 참전하였던 청매 인오(靑梅 印悟, 1548-1623)의 제문과 유정과 친분이 두터웠던 유자 허균(許筠, 1569-1618)의 『四溟堂大師集』서문 등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모두 유정의 참전의 공과 충의를 언급하면서도, 이러한 위업 속에서 결국 그가 불교적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보다 강조하였다.
나아가 허균은 유정의 생애를 불교적 의미로 종합하여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바쳤는데, 곧 자비로서 백성과 국가를 구한 고승이라는 뜻이었다. 이 시호는 비록 유자가 지었음에도, 영당 홍제암(弘濟庵)과 비석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慈通弘濟尊者四溟松雲大師石藏碑)> 등 유정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불교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Ⅲ. 밀양 표충사와 사명 유정 진영

유정에 대한 인식은 입적 이후 100여 년이 지나 태허 남붕(太虛 南鵬, ?-1777)이 밀양 표충사(表忠祠)를 중건하고,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松雲大師奮忠紓難錄』을 간행하며 의승장의 면모가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표충사는 유정을 유교적 절차로 향사하기 위해 조성된 사액사우였다. 1715년 밀양부사 김창석(金昌錫)은 밀양이 고향이었던 유정을 위한 영당을 건립하여 ‘표충사’의 현판을 걸었는데, 당시에는 표충암(表忠庵)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1738년 남붕이 훼손되었던 표충암을 중창하며 중흥사(重興寺)로 이름을 바꾸고 내부에 표충사를 새로이 조성하였다. 이때부터 의승장으로 참전하였던 유정·휴정·영규 3대사를 합사하였으며 조정으로부터 사액(賜額)을 하사 받았다.23
사액사우가 된 표충사에는 파격적인 혜택이 집중되었다. 구성원들은 각종 잡역에서 면제되었으며, 춘추향사 물품과 비용은 물론, 대동미가 면제되는 5결의 토지를 조정에서 지급받았다.24 또한 제향절차 역시 유궁(儒宮), 즉 조정에서 직접 인준하는 서원향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25 제향집행을 위해 서원을 대표하는 원장, 서원의 실질업무를 담당하는 도유사(都有司), 헌관(獻官) 등 일반적인 서원의 직책 외에도, 춘추향사를 총괄하는 도총섭과 승려들을 규율하는 도승통(都僧統) 등 주요 승직이 설치되었는데, 이를 통해 표충사는 경상도 불교계에서 중요한 입지를 점하게 되었다.26
  • 그가 맨손으로 근왕하여 만사에 나아가되 7척의 자기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도산검수를 평지처럼 여긴 것을 본다면, 이것이 바로 선정이 아니겠는가. 그가 지성으로 임금에게 보답하고 하늘에 복수를 맹서하며, 종사를 걱정하고 생령을 구휼하여 중흥의 계책을 힘껏 협찬한 것을 본다면, 이것이 바로 진혜가 아니겠는가. … 그렇다면 그 법이 오륜과 무엇이 다르며, 그 마음이 백성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이 바로 조가가 표충사를 세우도록 명한 뜻이요, 또 상국이 이 기록을 그렇게 명명한 뜻이다.27

  • 표충사의 삼대현사를 향사하는 한 조목은 실로 충성을 표창하고 의기를 장려하려는 조가의 성의에서 나온 것이니, 사당을 세우고 상을 그리고 제례를 모시는 제반 절차를 반드시 신성하게 수정한 뒤에야 듣는 모든 이들을 용동시킬 것이다. 사명 대사의 『분충서난록』 2권도 목판을 얻어서 경사에 진상하고, 또 인쇄하여 팔로의 여러 사찰과 산성에 보내되 도총섭은 묘당이 분부한 사의를 가지고 보낼 것이다. 춘추로 제향하는 날짜는 일체 각 관의 서원의 예에 의거하여 시행하되, 헌관과 유사는 경학과 재지로 명망이 있는 대사를 차정하여 거행하고, 재랑과 축사는 과거에 남북한총섭의 경력이 있는 자를 또 차정하여 시행함으로써 아무렇게나 자리를 메우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이다. 사당을 지키고 제물을 받드는 자에 대해서는, 이미 비국의 관문 안에 잡역을 면제하고 수호하게 하라는 영이 있으니, 그 승도들 중에서 택하여 정할 것이다.28

표충사의 중건에 이어 1739년 문장가 신유한에 의해 『松雲大師奮忠紓難錄』이 개판되었다. 책에는 임진왜란 참전당시에 유정이 주고받은 편지, 공경대부들의 시문(詩文), 그리고 표충사와 관련된 기록들 등 유정의 제자 남붕이 수집한 다양한 자료들이 수록되었다.
특히나 신유한의 발문 「新刻松雲大師奮忠紓難錄跋」 및 공문 「備局甘結關」을 통해, 당시 조정은 유정을 유교적 충신으로 이해하였던 선조대의 인식을 수용하였으며, 유정의 충의를 표창·장려하는 것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표충사 중건과 분충서난록의 간행·배포를 지원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영축산에 암자를 세우고 오래지 않아 대사의 화상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니 신축년 봄의 일이다.29

  • … 3간의 표충사를 지어 청허의 진영을 동쪽 벽에 걸고 사명의 진영을 주벽에 걸고 기허의 진영을 서쪽 벽에 걸었다.3

또한 「表忠庵事蹟記」와 「重興寺表忠祠誌」을 통해 표충사에는 표충암으로 불렸던 시기부터 이미 유정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흥사로 중창될 때 유정을 포함한 3대사의 진영을 봉안하였는데, 유정을 스승인 휴정보다 강조하여 주벽에 걸기도 하였다. 앞서 살펴본 「備局甘結關」의 기록에서도 ‘상을 그린다.’라는 분명한 언급이 있음으로, 유정의 진영은 사액서원 표충사의 대표적인 제례용 초상화로서, 그 조성과 봉안이 매우 중요한 절차였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반부터 유정의 진영은 경상도 일대에서 폭발적으로 조성되었는데, 진영 속의 기록들을 통해 표충사·분충서난록에서 강조하였던 의승장 유정의 모습에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된다. 특히나 양산 통도사 <대광보국숭록대부홍제존자사명당대선사지진(大匡輔國崇祿大夫弘濟尊者四溟堂大禪師之眞)>에는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진찬이, 군위 압곡사 <대각등계홍제존자사명당진영(大覺登階弘濟尊者四溟堂眞影)>에는 유최기(兪最基, 1689-1768)의 진찬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모두 분충서난록에 수록된 것으로 직접적 연관성이 두드러진다.
  • 병석으로 텅 빈 산에 거할 때에는 삭막하여 고목과 사회와 같았으니, 어쩌면 그토록 고요하였던가.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칼을 짚고 일어나서 왜적을 삼대 베듯 베었으니, 어쩌면 그토록 용감하였던가, 불씨는 체만 있고 용은 없다는 말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풍원군 조현명31

  • 백우선을 휘두르니 경예가 흉악한 짓을 그만두었고, 폭포수처럼 웅변을 토해내니 효경이 정성을 바쳤도다. 점잖게 육조의 문답을 나누었고, 백 척의 배에 실어 생령을 구제하였도다. 그 훈공을 기린다면 기린각에 그림을 걸어야 할 것이요, 그 자비를 찬양한다면 황금 털 사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청고한 저 유상이 어찌 칠푼인들 방불할까마는, 삽상한 영령은 천년토록 제향에 감통하시리라. 홍문교리 유최기32

두 진찬은 의승장 유정의 활약상을 찬하고 있으며, 진찬을 작성한 두 인물의 신분이 기재되어 있다. 조현명은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의 공으로 1728년부터 풍원군으로 봉군되었고,33 유최기는 1733년부터 1740년까지 홍문관 교리로 제수되었음으로,34 조현명과 유최기가 진찬을 지은 시점은 표충사 중건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나 유최기는 유상(遺像), 즉 진영에 대한 제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18세기 초반 조정의 인가를 받아 유정을 향사했던 곳은 오직 표충사 한 곳 뿐이었음으로 두 진찬의 대상은 표충사본임을 알 수 있다. 비록 기록이 소실되어 통도사와 압곡사 진영의 조성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두 진영은 분충서난록의 진찬을 차용하여 의승장 유정의 모습을 강조한 예라고 할 수 있다.

Ⅳ. 사명 유정 진영의 시기별 변화

얼굴은 조선 후기 초상화의 인물표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부분은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입각하여 눈, 표정 등 안면묘사에 가장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으며, 이를 통해서 대상의 삶과 성정(性情)을 집약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의복이나 가구, 신체 등의 요소는 이러한 성정을 강조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35
승려의 초상화이자 제례용 종교화인 진영은 생전의 모습을 토대로 불교에서 권장하는 바람직한 수행자로 인물을 묘사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안면묘사에 있어서는 승려로서의 규칙에 맞게 머리카락과 수염을 말끔하게 체발한 선승의 모습이 일반적이었다.36
그러나 현전하는 유정 진영의 대부분이 입적으로부터 100여 년 이상 시간이 지난 후 조성된 까닭에, 그의 실물을 진영에 온전히 반영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의승장으로 활동하여 일반적인 승려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으며, 나아가 진영들이 의승장으로서의 모습을 강조하였던 표충사·분충서난록의 영향 아래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형태를 답습하기보다는 새로운 도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37
  • “… 내가 일찍이 유정을 묘향산 보현사에서 보았는데, 머리는 깎았으나 수염은 남겨두어 그 길이가 허리에까지 닿았으며 백색이었다.”38

  • “… 영남의 밀양에 표충사를 세워 대사를 제향하였다. … 대사는 일찍이 수염을 남겨 두고 깎지 않아서 그 길이가 허리까지 닿았다. 그 일이 또한 기이한데, 지금 유상이 사당 안에 남아 있다.”39

유정 진영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진영에 수염이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柳夢寅所著於于野譚中記松雲事蹟」에서 유정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생전 유정은 백색 수염을 허리까지 길렀다고 기록하였는데, 후대에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密陽表忠詞松雲大師影堂碑銘并序」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확인되고 있다. 비록 유정이 어떠한 이유로 수염을 길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염은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유정의 모습에 대한 유일한 단서이다.
수염은 크게 콧수염, 아랫입술수염, 턱수염, 옆턱수염, 구레나룻 등 다섯 부분으로 나뉘며, 다섯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있는 것은 연빈수(連鬓鬚), 다섯 부분이 분리되어 흘러내리는 것을 오류수(五綹鬚)라고 하였다.40 승려에게 이처럼 긴 수염을 묘사된 경우는 드물며, 또한 현전하는 임진왜란 이전시기 진영이 부족한 만큼 국내에서 유정의 수염묘사에 대한 기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중국의 나한도의 일부 사례를 통해 단서를 찾을 수 있다.41
명대 정운붕(丁雲鵬, 1547-1628)의 <나한도권 고목선정나한(羅漢圖券 枯木禪定羅漢)> (fig 1)에서는 고목 속에서 결가부좌를 취하고 선정(禪定)에 든 나한이 등장한다.42 나한과 위로 떠도는 나한의 혼백 모두 콧수염, 아랫입술수염, 턱수염이 분리되고 길이가 허리까지 닿는 긴 직삼각형 형태의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부유하는 혼백은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은 나한의 경지를 묘사한 것인 만큼, 수염은 고목·뱀과 함께 오랜 수행과 그로인한 초월적인 힘을 시각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 “간혹 탁이하고 웅준하여 안으로는 유가이면서 밖으로는 선가인 척 하는 우리 대사와 같은 경우는, 이미 그 차이점을 자각하였으면서도 그 설에 구애되어 되돌아오지 못할 수가 있는데, 그럴 때에는 또 반드시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밖으로 드러내어 기위한 공을 스스로 세우게 되는 것이다. 대저 전신은 진상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는데, 대사가 수염을 깎지 않을 것을 보면 대사의 은미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거기에서 벌써 알 수 있을 듯도 하다.”43

또한 유교사회에서 수염은 『孝經』의 구절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중 髮에 속하여, 이를 훼손하지 않고 기르는 것은 곧 유교적 가치인 효(孝)를 행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수염이 내포한 유교적인 의미는 앞서 살펴보았던 임진왜란 활약상, 충의정신과 어우러져 진영에서 의승장 유정의 삶과 성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요소로 활용되었다.44 실재로 윤봉조(尹鳳朝, 1680-1761)는 「奮忠紓難錄跋」에서 표충사 진영을 보며, 수염을 기른 유정의 모습을 통해 안으로는 유가의 사람이었던 그의 공과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현전하는 유정 진영은 화기가 드물어 조성시기, 화승을 특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또한 진영의 대부분이 표충사 중건 이후인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진영 간의 시기차이도 크지 않다. 다만 수염을 포함한 안면묘사와 화제는 비교적 변화 양상이 뚜렷하며, 유정 진영은 이를 기준으로 크게 1, 2,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1기

1기의 진영은 모두 경상도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18세기 중반까지 조성된 경우이다. 1768년 화승 유성(有成)이 조성한 안동 봉정사 <송운당대선사진영(松雲堂大禪師眞影)>45 (fig 2), 배면에 화기를 통해서 1773년 개조(改造)가 확인되는 밀양 표충사 <사명당대선사진영(四溟堂大禪師眞影)>46 (fig 3) 외에도, 1796년의 화기가 확인되는 대구 동화사 <사명당대장진영(泗溟堂大將眞影)> (fig 4) 등이 있다.47
1기 진영 속 유정은 모두 불자(拂子)를 지물로 한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 의좌상(椅坐像)으로, 전상의(田相衣) 문양이 옷주름에 따라 섬세하게 표현된 홍색가사(紅色袈裟)를 착용하고, 어깨부분에는 고리와 빗장으로 구성된 금속제 가사장식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안면은 붉은 입술에 찌푸린 듯 반쯤 뜨고 있는 눈매와 끝부분이 치켜 올라간 형태의 눈썹인 검미(劍眉)로 묘사되었다. 전체적인 수염의 형태는 연빈수로 콧수염, 아랫입술수염, 턱수염의 분리가 비교적 명확하며, 수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턱수염은 빗질이 되어있는 듯 주름이 거의 없으며 길이는 복부까지 닿고 있다. 이러한 1기 진영들의 도상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 진영은 세부묘사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개성이 두드러진다.
봉정사본(fig 2)은 몸통과 다리에 화려한 장식이 표현된 의자와 바닥의 화문석(花紋席)자리, 상반신에 준할 정도로 풍성한 크기의 불자술, 녹색과 적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된 장삼(長衫)에서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턱수염은 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하단에 구불거리는 주름이 집중되어 있고, 콧수염은 윗부분이 직선으로 퍼져 광대아래까지 넓은 범위로 표현되었다. 턱수염, 콧수염, 옆턱수염은 각기 다른 결로 흘러내리고 있지만, 긴 길이로 인해 모든 수염의 부위가 연결된 것처럼 묘사되었다. 수염 뿐 아니라 세 줄의 미간 주름이 표현되어 유정이 마치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인상을 찌푸린 것처럼 나타내었는데, 이는 족좌대에 두 발을 올리고 오른손으로는 의자 손잡이를, 왼손으로는 불자를 들어 어깨에 기댄 당당한 자세와 함께 의승장 유정의 강인한 인상을 부각시켰다.48
밀양 표충사본(fig 3)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승장 유정을 향사하는 ‘사액서원 표충사의 제례용 초상’으로 명확한 상징성을 가진다. 유정은 봉정사본(fig 2)과 동일한 자세로 표현되었지만 신체비례 및 지물인 불자의 크기가 사실적이며, 짙은 감색의 장삼, 감색으로 구획된 전상의문양의 가사를 제외한 바닥, 의자, 의복 등에 장식문양을 극도로 절제한 것이 특징이다.49 수염은 복부까지 닿는 긴 길이의 직삼각형 턱수염과 턱수염·옆턱수염이 분리되지 않은 점 등에서 고목선정나한과 유사하여 고식의 형태를 보이지만, 콧수염이 길고 완만한 S자 곡선을 그리며 턱수염과 닿고 있어 넓은 면적의 풍성한 수염을 표현하였다.
동화사본(fig 4)은 배경과 바닥을 생략하여 인물묘사에 집중하였다. 유정 진영 중에서도 드물게 장삼을 백색으로 채색하였으며, 전상의 표현과 동심원 등 가사문양을 가장 치밀하게 묘사하였다. 턱수염 묘사에서 표충사본과 같이 고식의 형태를 보이지만, 콧수염이 짧고 간결하게 표현되어 정돈된 느낌을 준다. 또한 의자 위에 결가부좌를 취한 정적인 좌식, 가지런히 모아진 불자 등 다른 요소들에서 전통적인 고승 진영의 표현법에 가까워 수행자, 선승의 면모가 보인다고 할 수 있다.
1741년 조성된 상주 남장사 <삼장탱(三藏幀)>의 명부시왕(冥府十王) (fig 5)은 치켜 올라간 검미, 콧수염이 곡선을 그리며 옆턱수염과 이어지는 묘사에서 표충사본과 유사한 형태가 확인되며, 또한 봉정사본을 그린 유성은 1770년 예천 서악사 <석가모니후불탱(釋迦牟尼後佛幀)>의 지국천왕(持國天王) (fig 6)에서 봉정사본과 동일한 형태의 눈썹과 수염을 묘사하여 주목할 만하다.
시왕·천왕은 모두 법과 질서, 수호와 유관하며 강한 힘과 권한을 지닌 존재들로, 이들의 수염은 오랜 수행을 의미하기보다는 힘과 위엄을 상징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유정은 불자의 몸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했음으로 그 성격이 이들과 매우 유사한데, 이런 점에서 승려의 얼굴에 시왕·천왕의 눈썹, 수염 등 안면묘사를 더하여 의승장 유정의 새로운 도상이 형성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러한 묘사가 유성 개인의 역량인지 혹은 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영축산 화승들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50 후대의 유정 진영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어, 의승장 유정의 상징적인 모습으로 상당한 공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1기의 화제는 짧고 간결한데, 동화사본은 유정을 선승에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하였음에도 의승도대장을 의미하는 ‘대장’이라 기록하였고, 봉정사본·표충사본은 의승장의 모습을 강조하였음에도 ‘대선사’로 기록하였다. 이처럼 진영의 인물묘사와 화제 간의 차이는 양면성을 지닌 유정의 삶을 진영 속에 온전하게 반영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생각되며, 따라서 1기 진영은 표충사 건립 등 유정에 대한 높아진 사회적 관심 속에, 유정의 모습을 구체화함에 있어서 기존의 선승과 새로운 의승장의 두 모습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2. 2기

2기의 진영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경상도 일대와 일부 강원도에 분포하고 있다. 무학·청허·각연 진영과 함께 1781년 중수되었던 함양 용추사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선교도총섭송운대선사지진(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禪敎都摠攝松雲大禪師之眞)>51 (fig 7), 1782년 조성된 의성 대곡사 <유명조선대광보국승대장사명당진영(有明朝鮮國大匡輔國僧大將四溟堂眞影)> (fig 8) 등이 화기가 남아있는 예이다.52 이외에도 1788년 범일국사 진영53 과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척 영은사 설선당 <대광보국숭록대부사명당대선사진영(大匡輔國崇祿大夫四溟堂大禪師眞影)> (fig 9), 1847년 마흘조사 진영 54 과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항 보경사 원진각 <복국우세사명대선사진영(福國佑世四溟大禪師眞影)> (fig 10) 등이 있다.55
2기 진영 속 유정은 1기의 좌안칠분면 구도나 좌식, 의자형태를 바탕으로, 의복, 지물, 문양 등 진영 내의 다양한 요소들에서 보다 강조된 묘사들이 확인된다. 용추사본(fig 7)은 등받이가 낮은 의자형태가 봉정사본과 유사하지만, 불자봉이 매우 길어지고, 어깨에는 금속장식구가 아닌 3단의 영자를 표현하였으며 바닥에는 나무결이 표현된 돗자리를 배치하여 공간을 입체적으로 구성하였다. 영은사 설선당본(fig 9)은 등받이가 넓은 의자와 좌식에서 표충사본의 양상을 수용하였지만, 의자의 장식은 매우 화려하며, 주장자(柱杖子), 염주, 등받이에 걸린 불자 등 새로운 지물들이 표현되었다. 또한 보경사 원진각본(fig 10)은 의자와 좌식, 생략된 바닥과 배경, 가사장식구 등 동화사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길어진 불자봉과 술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반면, 대곡사본(fig 8)은 소상 위에서 가부좌를 취한 소상좌상(小床坐像)으로 표현되었다. 배경에는 초서(草書)를 담은 6폭 병풍을 배치하고, 전체적으로 S자의 곡선을 그리며 화려한 용두로 장식된 불자봉을 표현하는 등 이전시기와는 차별화된 개성적인 도상들로 의승장 유정을 강조하였다.
안면묘사는 1기와 동일하게 붉은 입술에 찌푸린 눈매로 표현되었으며, 용추사본을 제외한 나머지 진영에서 봉정사본(fig 2)의 미간주름 묘사와 끝이 길게 흘러내리는 수미(壽眉) 형태의 눈썹이 확인되고 있어 특징적이다. 수염 역시 1기의 형태와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다 과장되어 풍성하게 표현되었다.
동시기인 1780년대에 조성된 용추사본·대곡사본·영은사 설선당본의 수염은 상호유사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용추사본(fig 7)·영은사 설선당본(fig 9)의 직선형 콧수염은 봉정사본과 유사하며, 여기에 몇 가닥의 흰 수염을 더하여 중~노년기 의승장 유정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대곡사본(fig 8)은 콧수염이 곡선을 그리며 옆턱수염과 연결되어 표충사본과 유사하지만, 연결부위가 희미한 표충사본과는 달리 두 부위가 완전히 결합되었으며, 이 부위가 턱수염의 위를 덮을 정도로 길이가 매우 길게 묘사되었다. 또한 영은사 설선당본(fig 9)에서는 아랫입술수염이 반원을 그리며 콧수염과 닿고 있는데, 대곡사본에서도 이와 동일한 표현이 등장한다.
보경사 원진각본(fig 10)은 2기 진영 중에서도 조성시기가 비교적 늦은 경우인데, 안면묘사는 직선형 콧수염은 봉정사본과 유사하지만, 콧수염과 옆턱수염의 결합되는 부분은 표충사본과 유사하여 1기의 진영들의 영향이 고루 확인된다.
1781년 조성된 문경 혜국사 <신중탱(神衆幀)>의 지국천왕 (fig 11)은 비록 보관을 쓰고있어 옆턱수염이 생략되었지만, 길게 늘어뜨린 수미와 직선으로 펼쳐진 넓은 콧수염과 반원형 아랫입술수염, 흰 수염의 묘사에서 용추사본·영은사 설선당본과 유사하다. 1798년 조성된 양산 통도사 명부전 <시왕탱(十王幀)> 중 제오염라대왕(第五閻羅大王) (fig 12)에서도 수미와 곡선으로 이어진 콧수염·옆턱수염의 묘사에서 대곡사본과 유사한 형태가 확인되어 1기와 마찬가지로 시왕·천왕계통의 눈썹과 수염이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은사 설선당본(fig 9)은 복식에 천왕문첩(天王門貼)을 표현하여 유정과 천왕과의 관계를 더욱 강조하였다. 천왕문첩은 가사 자락에 천(天)과 왕(王)의 글자가 표현된 문양으로, 『불설가사공덕경(佛說袈裟功德經)』의 내용을 통해 수호와 벽사의 의미는 물론, 나아가 가사를 입은 존재가 사천왕을 거느리는 석가모니에 준하는 존엄성을 가진다는 상징적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음이 연구된 바 있다.56
2기의 화제는 보경사 원진각본의 복국우세(福國佑世)처럼 임진왜란시기의 활약상을 함축적으로 의미하는 수식구가 붙거나, 혹은 대곡사본처럼 승대장(僧大將),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와 같이 유정이 제수된 직위를 명시하여 의승장 유정을 전면적으로 강조하였다.57
특징적인 부분은 용추사본·대곡사본·영은사 설선당본에서 유정을 정1품 상계인 대광보국숭록대부 혹은 영의정으로 기록한 점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표충사 비명에서 기록된 유정의 최고품계가 정2품 가의대부인 것과는 명백히 차이가 있는 것으로, 유정에 대한 과장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 7월 13일에 서울에 돌아와 숙배하니, 상이 크게 포상을 가하고 특별히 1품의 직질을 하사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승려가 왕명을 받들고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간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갖춰 보낸 물품과 예우한 절목을 필시 묘당에서 계품하여 시행했을 것인데, 하나의 기록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다. … 두세 가지 부회하는 말이 비록 산림이나 민간에서 나와도 대부분 와전되고 잘못되어 신빙할 수가 없으니 탄식만 나올 뿐 어떻게 할 수 없다.58

분충서난록에 수록된 『芝峯類說』·『於于野譚』·『旬五志』·『就惠所藏文藁』의 내용을 살펴볼 때, 유정에 대한 과장은 당시 불교계와 민간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대산의 승려 취혜(就惠)가 수집한 기록인「五臺山僧就惠所藏文藁中記松雲事蹟」에서는 유정이 포로송환의 공으로 1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사받았다고 전하고 있어,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 등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신유한은 첨언으로 이와 관련한 증거가 없음을 지적하며, 유정에 대한 믿을 수 없는 말이 많음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2기 진영은 1기 의승장의 모습이 주류가 되었으며, 불교계·민간인식의 영향 속에서 진영 내의 도상들과 화제가 강조·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59

3. 3기

3기의 진영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경우로, 이전시기의 진영이 경상도 일대에 집중된 것에 비해,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 넓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1867년 춘담봉은(春潭 奉恩)이 휴정·영규 진영과 함께 조성한 공주 마곡사 <사명당대선사유정진영(四溟堂大禪師惟政眞影)>60 (fig 13), 1904년 조성된 순천 선암사 <선교양종팔도도총섭국일도대선사사명송운당유정지진영(禪敎兩宗八道都總攝國一都大禪師四溟松雲堂惟政之眞影)>61 (fig 14) 등이 화기가 남아 있는 경우이다. 또한 부산 범어사 <대광보국숭록대부양국도총령사명당대선사진영(大匡輔國崇祿大夫两國都惣領四溟堂大禪師眞影)> (fig 15), 공주 갑사 <사명당대선사진영(四溟堂大禪師眞影)> (fig 16), 남양주 불암사 <송운당대선사진영익호사명(松雲堂大禪師眞影謚號泗溟)> (fig 17) 등이 음영, 의습, 바림기법 등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62
3기 진영은 대체로 한 손으로는 의자 손잡이를, 다른 손으로는 지물을 잡은 자세와 바닥에 화려한 문양의 화문석자리를 공통적으로 표현하여 이전시기 진영의 영향이 확인되지만, 마곡사본(fig 13)·선암사본(fig 14)·갑사본(fig 16)은 우안칠분면(右顔七分面) 의좌상, 불암사본(fig 1)은 전신정면(全身正面) 평좌상(平坐像) 등 새로운 구도를 사용하였다. 또한 범어사본(fig 15)에서는 하부는 봉정사본과 유사하지만, 등받이는 표충사본처럼 넓은 변용된 의자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어깨에는 가사고리와 영자가 혼용되고 있으며, 장삼과 가사의 끝단에 화려한 당초문을 장식하거나 선암사본(fig 14)처럼 전상의 문양이 사라지고 의복 전체에 화문(花紋)을 표현하는 등 장식적인 요소가 부각되었다.
눈썹은 검미와 수미가 혼용되고 있으며, 대체로 붉은 입술이 표현되었지만 마곡사본(fig 13)처럼 입술을 채색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한 범어사본(fig 15)과 갑사본(fig 16)은 미간주름과 찌푸린 눈매 등 이전시기의 묘사를 수용하였지만, 마곡사본(fig 13)·선암사본(fig 14)·불암사본(fig 17)은 유사한 눈매를 표현하면서도 미간과 이마의 주름은 생략되었다.
3기 진영의 수염은 풍성한 수염이 강조되었던 2기에 비해, 같은 연빈수 계통에서도 세부묘사의 변화가 많으며 새로운 형태인 오류수가 확인된다. 마곡사본과 갑사본은 영은사 설선당본 계통의 연빈수가 묘사되었지만, 마곡사본(fig 13)은 수염의 길이가 전체적으로 짧고 숱이 적으며, 반대로 갑사본(fig 16)은 콧수염이 매우 과장되어 그 길이가 턱수염에 준할 정도로 길고, 바람에 날리듯 모든 수염부위가 한쪽으로 치우치듯 묘사되었다. 또한 범어사본(fig 15)은 반원형 아랫입술수염과 사각형에 가까운 턱수염의 형태에서 2기와 유사하지만, 옆턱수염이 완전히 분리되어 흘러내리고 있어 차이가 있다.
선암사본(fig 14)과 불암사본(fig 17)의 수염은 전체적으로 짧고 가늘며, 이전시기까지는 묘사되지 않았던 구레나룻을 묘사하여 수염의 다섯 부위를 온전히 갖추고 모든 부위가 따로 흘러내리는 오류수가 표현되었다. 1907년 조성된 여수 흥국사 보광전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의 천왕(fig 18)에서 이러한 오류수가 확인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미간과 이마의 주름이 생략된 점 또한 유사하여, 비록 수염의 형태는 변하였으나 유정과 천왕이 유사한 안면묘사를 공유하는 양상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3기 진영은 관우(關羽), 산신(山神) 등 민간신앙의 도상과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63 군신(軍神)·무신(武神), 혹은 소원성취의 만능신으로 추앙되었던 관우는, 수염을 길러 미염공(美髥公)이라 불렸으며 현전하는 수많은 그림 속에서 가슴 혹은 허리까지 닿는 긴 수염으로 묘사되었다.64 관우의 수염은 다섯 부위가 모두 따로 흘러내리는 오류수로, 특히나 양 옆턱수염과 턱수염이 거의 유사한 크기의 긴 직삼각형 형태로 묘사되어 삼각수(三角鬚)로 불리기도 하였다.6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필사미상관우도(筆者未詳關羽圖)> (fig 19)는 용포를 입은 군왕으로서의 관우를 묘사하였는데 얇은 오류수의 표현에서 선암사본·불암사본과 유사하지만, 치켜뜬 두 눈은 갑사본과도 유사하다.
산신은 산과 마을을 지키는 민간신앙의 무신(巫神)으로, 19세기에 이르러 보살, 나한에 가까운 중생구제의 신령으로서 불교계로 수용되었으며 다수의 사찰 내 산신각(山神閣)이 조성되는 등 크게 성행하였다.66 1918년 조성된 마곡사 영은암 <산신탱(山神幀)> (fig 20)의 산신은 치켜뜬 두 눈과 간격을 두고 명확히 분리된 오류수, 바람에 흩날리듯 치우친 수염묘사 등에서 동일한 화승이 그렸다고 생각될 정도로 갑사본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비단 수염묘사 외에도, 선암사본의 의자 등받이에 걸쳐진 호피, 불암사본의 책갑(冊甲), 도자기, 향로, 시동(侍童) 등 3기 진영에서 나타난 새로운 도상들은 산신탱, 책가도(冊架圖)를 위시한 민화(民畵)의 양상과 유사하여, 3기 진영과 민간인식 사이의 깊은 관계성을 유추할 수 있다.
3기의 화제는 2기와 유사한데, 범어사본은 대광보국숭록대부, 불암사본은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에 병조판서를 추가로 기록하였으며,67 나아가 선암사본은 화제에 팔도도총섭·대선사 등 불교적 지위를, 화기에 선무원일등공신·영의정·이조판서·병조판서 겸 승정원도승지의 관직을 명시하여 유정을 유·불교계를 아우르는 최고의 영웅으로 기록하였다.
특히나 선무공신(宣武功臣)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장수들에게 지급된 훈공인데, 실재 선무일등공신에 책봉된 이들은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유정은 포함되지 않았다.68 이조판서·병조판서 겸 승정원도승지 또한 근거기록이 없음으로 유정에 대한 극도의 과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19-20세기 민간의 설화·전설 속에서 유정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유정에 대한 과장이 3기에 이르러 영웅화·신격화(神格化)에 가까울 정도로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69 1928년 강효석(姜斅錫)이 조선조 인물들의 전기와 일화를 모아 편찬한 『大東奇聞』 중 「惟政敬之如佛」에서 유정이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고 기록한 것을 볼 때, 이처럼 과장된 모습이 당시 민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70 따라서 3기 진영은 이전시기의 의승장 형태를 수용하였지만 수염 등 진영 내 다양한 요소에서 혼·변용이 심하며, 경상도 외 지역화사의 개성이 반영된 새로운 구도나 민간신앙에 영향을 받은 새로운 묘사가 확인된다.

Ⅴ. 결론

본고에서는 사명 유정 진영이 사액서원 표충사의 건립, 그리고 조선왕실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조성되었음을 확인하였으며, 또한 유정이라는 동일한 인물에 대한 묘사가 시기별로 달라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유정은 청허 휴정의 2세손으로 임진왜란시기 의승장 및 탐적사 등으로 활약하며, 승려의 신분으로서는 드물게 조정으로부터 여러 직책에 제수되었다. 그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던 표충사는 조선왕실의 지원 속에 사액서원으로 격상되었으며, 이는 유정에 대한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인식이 바탕 되었다.
현전하는 유정의 진영은 모두 그가 입적한 1610년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조성되어 생전의 모습을 담기 힘들었으며, 또한 의승장으로서의 삶과 전통적인 진영의 표현법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유정은 실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가변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다만 그가 수염을 길렀다는 기록을 토대로 수염묘사만은 모든 진영이 공유하는 특징이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화제·화기·찬문 등 진영 내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여 유정의 삶과 성정을 온전히 표현하고자 하였다.
1기의 유정 진영은 선승형 수염묘사를 중심으로 의자 위에 결가부좌를 취한 좌식, 대선사라는 화제 등을 통해 불교수행자의 모습과, 천왕·시왕형 수염과 눈썹, 미간 주름의 표현, 대장이라는 화제를 통해 의승장의 모습이 혼재하는 과도기적 면모를 보인다. 2기부터는 천왕·시왕형 수염과 눈썹, 복식에 표현된 천왕문첩 등과 함께 복국우세, 대광보국숭록대부 등의 화제를 통해 의승장의 모습을 강조·과장하는 양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이후로도 지속되지만, 3기부터는 관우, 산신 등 민간신앙계통의 수염묘사, 호피, 시동 등 민화적 도상, 더욱 과장된 화기 등을 통해 강한 민간의 영향 속에서 신격화된 유정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유정 외에도 그의 스승인 휴정을 포함,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던 기허 영규와 뇌묵 처영(雷默 處英) 등 의승장들은 동일한 인물의 진영이 다양한 시기에 걸쳐 조성되어 현전 사례가 풍부하다. 향후 진영에 대한 더 많은 관심으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Notes

1) 문화재관리국 편, 『全國寺刹所藏高僧肖像畵報告書』 (文化財管理局, 1990) 참조.

2) 조선미, 「조선왕조시대의 초상화 연구」 (홍익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80) 참조.

3) 신은영, 「通度寺 佛敎影幀에 관한 考察」, 『경주사학』 15(1996); 박은경, 「선종대본산 범어사 소장 불교미술품 - 고승진영의 현황과 특징」, 『고고역사학보』 17, 18 (동아대학교박물관, 2002); 조수연, 「화승 유성작 진영 연구」, 『강좌 미술사』 26(2006); 김국보·김미경, 「화사 의운당 자우의 고승진영」, 『석당논총』 39(2007); 최엽동, 「한국 근대 불교진영」, 『불교미술사학』 6(2007); 김정희, 「조선 후기 화승의 진영상」, 『강좌미술사』 35(2010); 최경현, 「완주 대원사 소장고승 진영에 관한 고찰」, 「제1회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학술대회 논문집」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2011) 참조.

4) 이은희, 「조선 임진왜란 승병 삼화상의 진영연구-청허, 사명, 기허 진영을 중심으로」, 『다시 보는 우리 초상의 세계-조선시대 초상화 학술논문집』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pp. 197-199.

5) 김동하, 「대구 동화사 소장 <사명당 진영>의 제작자와 제작연대」, 『고문화』 77(2011), pp. 11-20.

6) 서진문화유산·정제문화재보존연구소, 『대구팔공산동화사 소장 보물 제1505호 사명당유정진영 보존처리 및 모사보고서』 (문화재청·대구팔공산 동화사, 2009), p. 41; 嘉慶元年丙辰八月十八日 嶺營奴鄭岑孫 千聖文.

7) 동화사본이 고식으로 표현되었다는 의견은 이전에도 제기된 바 있다. 정우택, 「朝鮮王朝時代 後期 佛敎眞影」, 『다시 보는 우리 초상의 세계-조선시대 초상화 학술논문집』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p. 152;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돌배개, 2009), pp. 564-565.

8) 이용윤, 「麻谷寺 眞影 奉安 殿閣과 19세기 후반 眞影 造成 佛事의 의미」, 『미술사연구』 41(2021), pp. 106-113.

9) 申維翰, 『松雲大師奮忠紓難錄』 (동국대학교출판부, 2015), pp. 6-7.

10) 김영태, 「사명대사의 생애」, 『불교학보』 8(1971), pp. 31-34.

11) 『宣祖實錄』 37권, 선조 26년(1593) 4월 12일; 上以僧將惟政, 累立戰功, 令該曹, 特授禪敎宗判事, 俾有權柄號令, 斬賊僧人, 亦授禪科, 以示褒奬之意.

12) 『宣祖實錄』 57권, 선조 27년(1594) 11월 1일; 以尹斗壽爲判中樞府事, 以正言鄭經世爲修撰, 以僧將惟政爲僉知中樞府事. [緇髡頂玉者, 四五人] 以比安縣監李魯爲正言.

13) 李宜顯, 『松雲大師奮忠紓難錄』 「密陽表忠詞松雲大師影堂碑銘竝序」; ·丁酉倭再逞. 從麻劉二督府. 具有勞勩. 特陞嘉善. 拜同知中樞. 辛丑又築釜山城. 甲辰奉國書徃日本. 諸倭相顧驚憚. 受約束惟謹. 還被虜男婦三千餘口. 復命加階嘉義優錫以奬之.

14) 『宣祖實錄』 83권, 선조 29년(1596) 12월 5일; 惟政, 今在何處? 此人雖曰僧人, 而可用以爲將者. 政, 嶺南人也. 下送於嶺南, 聽元帥節制, 率其僧軍, 使當一隅可也.

15) 休靜, 『淸虛堂集』1권, 『韓佛全』 7, 「贈惟政大師」; 一雙沙門眼 光明照八垓 卓如王秉劒 虛若鏡當臺 雲外拏龍去 空中打鳳來 通方能殺活 天地亦塵埃

16) 太能, 『逍遙堂集』, 『韓佛全』 8, 「賛四溟大師眞」; 天出終南活獅子 閻浮踏殺幾群邪 眞儀廓落淸虛骨 一朶紅蓮火裡葩

17) 申維翰, 앞의 책, pp. 189-209.

18) 이철헌, 「표충사에 대한 유교계와 불교계의 인식」, 『불교학보』 64(2013), pp. 152-154.

19) 김상영, 「청허 휴정의 사문상과 표충사 제향의 의의」, 『한국선학』 33(2012). pp. 181-190.

20) 印悟, 『靑梅集』 권下, 『韓佛全』 8, 「松雲大師祭文」; “… 惟我大師 拔乎其萃 賢而智也 卓乎其流 仁且義焉 … 仁以愛物 則有同方士濟時之略 義以忠君 則無愧功臣 安社之誠.”

21) 許筠, 『四溟堂大師集』, 「四溟集序」; “… 師之詩播譽於詞林. 師之功亦存於重恢. 而師之道已超入如來地.”

22) 정출헌, 「사명당에 대한 사대부들의 기억과 그 시대적 맥락」, 『고전문학연구』 45(2014), pp. 262-264.

23) 이철헌, 「밀양(密陽) 표충사(表忠祠)의 연혁(沿革)에 대한 재조명(再照明)」, 『불교학보』 52(2009), pp. 130-139.

24) 장동표, 「조선 후기 밀양 표충사(表忠祠)의 연혁과 사우(祠宇) 이건 분쟁」, 『역사와 현실』 35(2000), pp. 153-155.

25) 이철헌, 「표충사 춘추제향을 통해 본 승려의 직책과 역할」, 『불교학보』 77(2016), pp. 204-207.

26) 取如, 『括虛集』 券2, 「表忠祠都摠攝案錄重修序」; “命春曺 帖禪門宗師之負輿望者三人 使之營祠事 曰院長 曰都捴攝 曰都有司 又別帖一人曰都僧統 並許以印章治事 而其兼領八路緇髠 則惟都捴攝爲然 皆所以崇本祠 而勸來世也.”

27) 申維翰, 『松雲大師奮忠紓難錄』 「新刻松雲大師奮忠紓難錄跋」; 觀其隻手. 勤王出萬死. 不知七尺之軀. 視刀山劍樹如平地. 卽非禪定乎. 觀其至誠報主. 誓天復讎. 憂宗社恤生靈力贊中興之策. 卽非眞慧乎. … 卽其法與五倫奚異. 其心與百姓奚異. 此朝家命立表忠祠意也. 又相國名是錄意也.

28) 申維翰, 『松雲大師奮忠紓難錄』 「備局甘結關」; 表忠祠三大賢師. 享祀一欵. 實出於朝家褒忠獎義之盛意是置. 建祠繪像享禮諸節. 必須神明修整然後. 可以聳動羣聽是旀. 四溟大師奮忠紓難錄二卷. 亦得刊板. 以爲進上京師. 而亦爲印送于八路諸寺刹諸山城是乎矣. 都捴攝以廟堂分付內辭意. 論開以送爲旀. 春秋祭享日字. 一依各官書院例. 施行是乎矣. 獻官有司段. 經學才知. 有名聞大師. 差定擧行. 而齋郞祝司段. 置曾經南北漢捴攝. 亦爲差定施行. 俾無苟簡充位之弊爲旀. 守廟及祭物奉侍段. 旣有備局關內除雜役守護之令. 則以其僧徒中. 擇定爲旀.

29) 『朝鮮寺刹史料』 下券, 「表忠庵事蹟記」; 本洞靈驚山 不日而成 遂奉安大師畫像 而齋享之 歲舍辛丑春

30) 『重興寺表忠祠誌』, 三大賢師書像及祠宇百廢俱興故日重興寺 … 清虚真影掛其東壁四溟高儀掛于主壁騎虛遺影掛於西壁

31) 趙顯命, 『松雲大師奮忠紓難錄』 「眞贊」; 瓶錫空山 索然若枯木苑灰 何其静也 一日杖釰而起 斫賊如麻 何其勇也吾不信佛氏之有體而無用也 豊原君 趙顯命

32) 兪最基, 『松雲大師奮忠紓難錄』 「眞贊」; 揮羽扇而鯨鯢戢凶 騁舌河而梟獍效誠 居然六租之問答 救了百艘之生靈蹟其勳伐 則畵閣麒麟 贊其慈悲 則金毛獅子 淸高遺像 豈彷彿乎七分 颯爽英靈 佇㬳蠁於千祀 弘文校理兪最基

33) 『英祖實錄』 17권, 영조 4년(1728) 4월 29일; 仁平君 趙顯命, 後爲豐原君.

34) 『英祖實錄』 35권, 영조 9년(1733) 7월 6일; 兪最基爲校理,; 『英祖實錄』 51권, 영조 16년(1740) 1월 12일; 兪最基爲校理

35) 조선미, 앞의 책, pp. 51-61.

36) 김형우, 『고승 진영』 (대원사, 1990), pp. 6-11.

37) 사찰의 개산조, 고승대덕을 그린 진영은 실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기 어려워 상상을 가미하여 그려지는 ‘상징 봉안’의 사례가 많았다. 신광희, 「조선후기 羅漢圖의 표현과 기법」, 『동악미술사학』 12(2011), p. 140.

38) 柳夢寅, 『松雲大師奮忠紓難錄』 「柳夢寅所著於于野譚中記松雲事蹟」; “… 余甞見政於香山普賢寺. 剃髮存髯. 髯長至帶而白.”

39) 薛永年, 『中國歷代名畵技法精講系列 故宮畵譜: 人物卷 羅漢』 (故宮出版社, 2012), p. 12.

40) 나한(羅漢)은 인간에서 출발하여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존재들로, 인간의 세속성과 불보살의 신성성이 공존하는 존상들이다. 이들의 대다수가 불제자, 수행비구, 고승대덕인 점에서 진영 속의 승려들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며, 나한도는 도상과 표현기법 등에서 조선 후기의 고승진영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신광희, 앞의 논문, pp. 127-128.

41) 신광희, 『한국의 나한도』 (한국미술연구소, 2014), p. 223.

42) 尹鳳朝, 『松雲大師奮忠紓難錄』 「奮忠紓難錄跋」; “間或有卓異雄俊. 內儒而外禪. 如吾師者. 已能自覺其差. 而拘其說而不能返. 則又必因事表見. 自樹其奇偉. 夫以傳神之在眞像者. 而不去其髥髭. 師之微意. 已似有可見矣.”

43) 이용윤, 앞의 논문, pp. 111-113.

44) 성보문화재연구원 편, 『한국의 불화 24』 (성보문화재연구원, 2001), p. 207; 乾隆戊子月日造成于鳳停寺灵庵主事旨閒 良工 有宬

45) 문화재관리국 편, 『表忠寺에 所藏된 泗溟堂遺物』 (文化財管理局, 1971), p. 6; 時維乾隆歲次癸 巳三月日 通政大夫前僧統 崇眼出巳 改造屛

46) 동화사본의 화기는 의자 다리 옆에 위치하고 있어 진영의 일반적인 형태와 다르며, 또한 덧대어 붙였다가 때어낸 자국이 있어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김형우, 앞의 책, p. 83.

47) 봉정사본의 매서운 눈매와 긴 수염은 승병장의 기세와 유관하다. 이은희, 앞의 논문, p. 180.

48) 밀양 표충사 유정 진영은 화기를 통해 1773년 청허·기허 진영과 함께 개조가 확인된다. 그러나 유정 진영의 존재는 신축년(1721)부터 확인되고 있으며, 청허·기허 진영은 가사의 당초문이나 전상의(田相衣)의 구획, 화문석(花紋席) 자리의 표현, 음영표현 등에서 유정 진영과 차이가 있어, 유정 진영의 개조는 이전시기에 조성된 진영을 토대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9) 유성은 1766-1777년까지 경상도·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화승으로, 임한(任閑) 등 영축산 화승집단과 1767년, 1775년 진행된 통도사 불사에 참여하여 깊은 관계를 맺었다. 조수연, 「화승 유성작(有誠作) 진영의 연구」, 『강좌미술사』 26권(2006), pp. 690-694.

50) 고경, 『한국의 불화 화기집』 (성보문화재연구원, 2011) p. 1259; 용추사 <태조왕사무학대화상진영(太祖王師無學大和尙眞影)>의 화기 乾隆四十六年辛丑五月日重修無學淸虛覺然四溟四祖師眞奉安龍庵化華月仁書士性玫住持有衍僧統贊善

51) 고경, 앞의 책, p. 1260; 乾隆四拾七年壬寅四月日 畵員守印普學智淳新晤 供養主富寬 化主普運堂大師德澄 別座淵花堂首座蔡旻

52) 월정사성보박물관 편, 『월정사성보박물관도록』 (월정사성보박물관, 2002), p. 182; 영은사 <창건주범일국사진영(創建主梵日國師眞影)>의 화기 乾隆五十三年戊申五月日 弘勸化碧岩大肩 龍眠信謙助綠張…三綱秩 持 事軌演 僧統慶應 書記八

53) 성보문화재연구원 편, 『한국의 불화 38』 (성보문화재연구원, 2007), p. 232; 보경사 <마흘조사원각대사지진영(摩屹祖師圓覺大師之眞影)>의 화기 道光二十七年丁未三月十一日祖師影像改彩奉安于淸河內延山成道寺設軸齋者

54) 이은희, 앞의 논문, pp. 181-184.

55) 염중섭, 「문화: 한국 전통가사 천왕문첩(天王紋貼)의 발생과 내포의미」, 『溫知論叢』 31(2012), pp. 423-426.

56) 뿐만 아니라, 1792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은해사 백흥암 <홍제존자분충감난사명진(弘濟尊者奮忠勘難四溟眞)>의 분충감난(奮忠勘難) 또한 화제에서 의승장 유정을 강조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신대현, 「高僧 眞影의 讚文으로 본 高僧의 生涯」, 『史學硏究』 90(2008), pp. 148-153.

57) 申維翰, 『松雲大師奮忠紓難錄』 「五臺山僧就惠所藏文藁中記松雲事蹟」; 七月十三日. 還京祗肅. 上大加褒賞. 特賜一品秩. … 我國僧人之奉王命. 使他邦者. 旣無前例. 則其時資送之物. 與禮待諸節. 必自廟堂啓禀施行. 而無一錄傳於世者. … 二三傳會之辭. 雖出於山林閭巷. 而率多訛謬. 不可憑信. 咄咄奈何.

58) 18-19세기 백성들은 불사의 주요한 수요자로 대두되었기에 이들의 인식이 다양한 불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장희정, 『조선 후기 불화와 화사 연구』 (일지사, 2003), pp. 20-30.

59) 성보문화재연구원 편, 『한국의 불화 16』 (성보문화재연구원, 2000), p. 226; 마곡사 <서산대화상휴정진영(西山大和尙休正眞影)>의 화기 化主比丘景星堂快逸 書員 比丘春潭堂奉恩尚悅 丁卯十二月 日 奉安

60) 성보문화재연구원 편, 『한국의 불화 12』 (성보문화재연구원, 1998), pp. 239-240; 宣廟下敎引見以功勞時賜敎旨大將軍惟政宣武院一等功臣領義政吏曹判書兵曹判書兼承政院都承旨者萬曆四十四年乙巳九月十五日下帖 大韓光武八年甲辰六月初七日奉安

61) 이은희, 앞의 논문, pp. 179-193.

62) 유정의 긴 수염과 의승장으로서의 날카로운 모습은 관우도상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Maya Stiller, “The Politics of Commemoration: Patronage of Monk-General Shrines in Late Chosŏn Kore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77, issue 1(2018), p. 93.

63) 관우 신앙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으며, 고종 대 1883년 북묘, 1902년 서묘가 건립되어 널리 퍼졌다. 이후 1908년 국가주도의 관왕묘 제사가 폐지되면서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변모하였다. 강영주, 「조선시대 국난극복을 위한 神像: 서울 관왕묘의 <관우도>」, 『강좌미술사』 57(2021), pp. 193-202.

64) 장준구, 「中國의 關羽圖像 - 明·淸代繪畵에서의 전개와 시대적 변용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76(2007), pp. 92-113.

65) 김용태, 「조선 후기 불교와 민간신앙의 공존 양상-산신·칠성 신앙의 불교화」, 『불교학연구』 61(2019), pp. 84-91.

66) 성보문화재연구원 편, 『한국의 불화 33』 (성보문화재연구원, 2004), p. 229; 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行兵曹判書

67) 『宣祖實錄』175권, 선조 37년(1604) 6월 25일; “其宣武一等, 李舜臣, 權慄, 元均三大將, 爲効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二等, 申點, 權應銖, 金時敏, 李廷馣, 李億祺, 爲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 三等, 鄭期遠, 權悏, 柳思瑗, 高彦伯, 李光岳, 趙儆, 權俊, 李純信, 奇孝謹, 李雲龍, 爲効忠仗義宣武功臣, 各賜爵封君, 凡十八人.…”

68) 민덕기, 「사명당에 대한 역사적 전승 - 그의 渡日 관련 설화를 중심으로」, 『전북사학』 29(2006), pp. 35-41.

69) 姜斅錫, 『大東奇聞』 「惟政敬之如佛」; “… 家康이 聞而發信心하야 敬之如佛하고 克成和好하다 及還에 授以兵判之祿하시니 乞骸還山하야 說偈示寂하니 年六十七이러라.”

70) 姜斅錫, 『大東奇聞』 「惟政敬之如佛」; “… 家康이 聞而發信心하야 敬之如佛하고 克成和好하다 及還에 授以兵判 之祿하시니 乞骸還山하야 說偈示寂하니 年六十七이러라.”

Fig. 1.
丁雲鵬, 『羅漢圖券』, Eighteen Arhats, 17th century, Shanghai Museum(Shanghai Museum, https://www.shanghaimuse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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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Joseon 1768, Colors on Silk, 105×74cm,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328 in Gyeongsangbukdo, Bongjeongsa Temple(“Kkaedarŭmŭi kirŭl kan ŏlgultŭl-han’gukkosŭngjinyŏngjŏn”[Portraits of Ancient Monk], p.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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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四溟堂大禪 師眞影>,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Joseon 18th century, Colors on Silk, 154×126cm,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268 in Gyeongsangnamdo, Pyochungsa Temple(“Hogugŭi taesŏng, samyŏngdang songundaesa”[A Great Sage of Defend The Fatherland, Buddhist Great Master Samyeong-dang Songwoon],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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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泗溟堂大 將眞影>,Portrait of Samyeong Yujeong, Joseon 18 th century, Colors on Silk, 122.9× 78.8cm, Treasure No. 1505, Donghwasa Temple(“Kkaedarŭmŭi kirŭl kan ŏlgultŭl-han’gukkosŭngjinyŏngjŏn” [Portraits of Ancient Monk], p.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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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三 藏 幀>, Tripitaka Painting, Joseon 1741, Colors on Silk, 301x 311.5cm, Namjang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 8, p.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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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釋 迦牟尼後 拂 幀>, Sakyamuni Platform Painting, Joseon 1770, Colors on Silk, 137×187cm, Soak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8, 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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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禪敎都摠攝松雲大禪 師之眞>,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Joseon 1781, Colors on Silk, 101×81.5cm, Yongchu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40, p.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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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守印·普學·智淳·新晤, <有明朝鮮國大匡輔國僧大將四溟堂眞影>,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Joseon 1782, Colors on Silk, 115× 83cm,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427 in Gyeongsangbukdo, Daegok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24, p.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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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大匡輔國崇祿大夫四溟堂大禪師眞影>,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late Joseon Dynasty, Colors on Silk, 95.5× 65cm,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141 in Kangwondo, Woljeongsa Museum(“Wŏlchŏn gsasŏngbobangmulgwandorok”[Collections of Woljeongsa Museum], p.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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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福國佑世四溟大禪師眞影>,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late Joseon Dynasty, Colors on Silk, 129×66cm, Bogyeong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38, p.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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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神衆 幀>, Painting of the Multitude of Deities, Joseon 1781, Colors on Silk, 159.5×146cm, Hyeguksa Temple(“Chikchisŏng bobangmulgwanŭi yumul”[Collections of Jikjisa Museum], p.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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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冥府殿十王幁畵 第五閻羅大 王>, Joseon 1798, Colors on Silk, 119.5× 88cm,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549 in Gyeongsangnamdo, Tongdosa Temple(“T’ongd osasŏngbobangmulgwan sojangyumul myŏngp’um” [Collections of Tongdosa Museum], 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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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四溟堂大禪 師惟 政 眞影>,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Joseon 1867, Colors on Silk, 111×78cm, Magok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16, p.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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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禪敎兩宗八道都總攝國一都大禪師四溟松雲堂惟政之眞影>,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Joseon 1904, Colors on Cotton, 140×85.5cm, Seonam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12, p.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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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大匡輔國崇祿大夫两國都 惣領四溟堂大禪 師眞影>>,Portrait of Samyeong Yujeong, Joseon 1863, Colors on Silk, 123.5×93.0cm,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185 in Busan, Beomeo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32,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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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四溟堂大禪 師眞影>,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late Joseon Dynasty, Colors on Silk, 134×73.7cm, Gapsa Temple(“K-kaedarŭmŭi kirŭl kan ŏlgultŭl-han’guk-kosŭngjinyŏngjŏn”[Portraits of Ancient Monk], 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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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松雲堂大禪 師眞影>, Portrait of Samyeong Yujeong, Joseon 20thcentury, Colors on Cotton, 116.6×95cm, Bulam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33, p.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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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阿 彌陀後 拂 幀>, Amitabha Platform Painting, Joseon 1907, Colors on Silk, 163×128.5cm, Heungguk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11, 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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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筆者未詳關羽圖>, Unknown’s Portrait of Guan Yu, Joseon Dynasty, Colors on Cotton, 72.3×52 .1cm, National Museum of Korea(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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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山神幀>, Painting of the Mountain God, Joseon 1918, Colors on Cotton, 129× 96cm, Magoksa Temple(“Han’gugŭi purhwa” [Buddhist Paintings of Korea]16, p.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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