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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19세기 조선백자에 보이는 淸代 多角甁의 수용양상과 의미*

Abstract

19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이 다면체 백자병은 기존 조선백자 제작의 전통을 벗어난 새로운 형태이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조망되지 않았던 다면체형 다각병의 출현에 주목하여, 조형적 원류와 함께 제작 양상 및 조형적 특징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 19세기 소비된 다각병의 의미를 고찰하였다.
먼저 그 원류는 양식적 친연성을 통해 정조년간 청 황실의 하사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유리태화법랑임을 밝혔다. 까다로운 제작공정이 필요한 이 병은 수학적 개념, 특히 기하학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제작이 가능한 구조이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287-BC.212)의 다면체를 연구한 매문정(梅文鼎, 1633-1721)의 『기하보편(幾何補編)』등 기하학 서적이 조선에 전래되어 18세기 후반 실학자들의 주요 탐구대상인 점을 고려하면, 기하학에 익숙한 실학자 등이 다면체 병 제작의 최초 도면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함께, 18세기 후반 청을 통해 알려진 이국적이며 화려한 다면체 조형은 ‘근검·절약’이 숭상되는 정조년간의 국정철학 하에 제작과 소비가 지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에는 경제력을 갖춘 하층민의 신분 상승과 소비에 반발하는 양반계층이 ‘고급형’ 기명을 지향하는 다각병을 선택적으로 소비하면서, 전통적으로 공인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조선은 서학에 대한 관심 고조와 신분제의 이완 등으로 급변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다면체 조형의 출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Abstract

This polyhedron white porcelain, which suddenly appeared in the 19th century, is a new form that deviates from the tradition of making white porcelain in Joseon. This study paid attention to the emergence of polygonal bottle, which had not been independently viewed so far, and looked into the production aspects and formative characteristics along with the formative origins. Furthermore, the meaning of polygonal bottle consumed in the 19th century was examined.
First, based on similar stylistically, it was revealed that the origin was a Glass-body painted enamel snuff bottle that was most likely introduced into Joseon as a gift from the Qing Dynasty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This bottle, which requires a tricky manufacturing process, is a structure that can be manufactured only when mathematical concepts, especially geometric theories, are supported. Considering that geometric-related books such as Giha Bobapyeon(幾何補編) by Mei Wen-ting (梅文鼎, 1633-1721), who studied Archimedes’ polyhedron, were passed down to Joseon and were the main targets of inquiry by scholars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possibility cannot be ruled out that Silhak(實學) scholar familiar with geometry were involved in the production of polyhedron drawings.
In addition, the exotic and colorful polyhedron form known through the Qing Dynasty in the late 18th century would have been avoided from production and consumption under the philosophy of government administration of King Jeongjo, where ‘thrift and saving’ were revered. However, it is estimated that in the 19th century, the aristocrats who opposed the rise in the status of the economically powerful lower class and consumption intentionally consumed polygonal bottles, a high-end bowl, to reveal their status. In the 19th century, Joseon was rapidly changing, such as increasing interest in Western studies and relaxation of the status system, and this social atmosphere is thought to have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emergence of polyhedron shapes.

Ⅰ. 머리말

다각병(多角甁)이란 여러 면으로 꺾인 형태의 병이다. 하지만 ‘다각’은 문자 그대로 여러 개의 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각병이 구성되려면 ‘다각형’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각형은 평면도형을 의미하므로 삼각 이상의 평면도형으로 구성된 3차원 입체인 병은 엄밀히 말하면 ‘다면체(多面體) 병’이라 할 수 있다. 최소 4개 이상의 다각형으로 구성된 다면체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공예품에 상용(賞用)되어 구슬, 장신구, 기명 등으로 제작되었는데, 기본적인 정사면체, 정육면체 등을 비롯하여 면이 12개, 14개, 26개 등 다수의 면으로 구성된 다면체까지 다양하다.
우리나라 공예품에도 12면 이상의 다면체 조형의 예가 적지 않게 확인되는데, 가령 신라 안압지 유적에서 출토된 14면 주사위인 주령구(酒令具)는 6개의 정사각면과 8개의 육각면으로 이루어진 ‘깎은 정팔면체(Truncated octahedron)’이다(Fig. 1). 대개 정육면체가 주를 이루는 고대 공예품의 조형을 고려할 때, 고도로 계산된 14면의 다면체는 제작부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14면을 가진 또 다른 조형인 ‘육팔면체(Cuboctahedron)’와 32면을 가진 ‘깎은 정이십면체(Truncated icosahedron)’의 조형을 가진 백자가 이례적으로 19세기 조선백자에 다수 확인되어 주목을 요한다(Fig. 2). ‘육팔면체’와 ‘깎은 정이십면체’는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287-BC.212)에 의해 발견된 다면체로 전자는 8개의 삼각형과 6개의 사각형으로 구성되었고, 후자는 12개의 오각형과 20개의 육각형으로 이루어졌다(Fig. 3).
19세기 조선에 갑자기 등장한 이 다면체 백자병은 고대의 조형에서 상부에 긴 목을 붙여 병의 기형으로 재탄생되었고, 오늘날 학계에서 다각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정확히 육팔면체의 동체부를 가진 이 다각병은 대략 19세기 조선백자에 나타나 목이 없거나 받침이 추가로 붙는 등 약간의 변형을 거친다. 이 기형에 대하여 지금까지 학계는 중국자기의 모방1 혹은 육각병의 형태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보았다.2 즉 각병은 청 자기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산물이거나, 비록 조형의 원류는 청에 있지만 다면체로의 변화는 조선의 자체적인 응용과 발전에 기인한다는 두 가지 관점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기존 각병과 비교했을 때, 제작공정 자체가 꽤 복잡했을 이 다각병이 조선 말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생산·소비되었는지에 대한 문제도 막연히 조·청교류의 영향 정도로 개괄되고 있다.
조선시대 다각형의 백자는 기존 전통을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출현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사각 혹은 직사각형의 평면도형이 횡으로 연달아 이어지며 원기둥을 구성하는 기존의 병과 달리 오각·육각 이상의 도형이 종횡으로 서로 맞물려 구(球)를 형성하는 조형은 분명 발상의 전환 내지는 사고가 환기되는 모종의 물리적인 접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조망되지 않았던 다면체형 다각병의 출현에 주목하여, 먼저 조형적 원류와 함께 제작 양상 및 조형적 특징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 19세기 소비된 다각병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Ⅱ. 다면체 조형과 청대 다각병의 관계

다각병은 평면도형으로 구성된 입체 조형인 ‘다면체’ 형상이다. 다각형의 면으로 둘러싸였으며, 대개 면의 수에 따라 사면체, 오면체 등으로 불린다. 각 면이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등의 도형으로 대칭을 이루는 다면체의 조형은 대표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BC.427-BC.347)이 발견한 5개의 ‘정다면체’와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13개 ‘준정다면체’로 정리되고 있다.3 이들에 의해 정의된 다면체의 개념은 일찍이 로마제국부터 비잔티움 제국을 거쳐 동쪽으로 전해졌고, 일상생활에도 적용되어 장신구, 구슬, 도장 등 공예품의 형상으로 구현되었다.
예를 들어 기원전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 고대 이집트에서 널리 제작된 연질 도기[Faience] 재질의 주사위는 정삼각형의 면이 20개로 연결된 플라톤의 ‘정이십면체’ 형태로 제작되었다(Fig. 4). 이 주사위의 20개 면에는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여러 메시지가 새겨져 있어, 굴릴 때마다 무작위로 여러 종류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성 조형물이다.4 이후 다면체의 형태는 오늘날의 동유럽 일대에서도 확인된다. 현 우크라이나 케르치(Kerch)에서 발견된 금귀걸이는 아르키메데스의 ‘육팔면체’가 후프의 중앙에 달려 있는데, 이는 5세기 후기 로마 보석에서 파생된 형태로 동게르만족이 세운 옛 동고트 왕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다면체의 동점(東漸)을 짐작케 한다(Fig. 5).5 실제 각 면에 글자 혹은 암호 등의 텍스트를 새겨넣은 다면체형 주사위가 동유럽과는 지리상으로 반대편인 중국에서도 확인된다. 일찍이 기원전 전국시대부터 섬서성 서안의 진시황릉 원내(園內) 출토 석제(石製) 주사위와 서한(西漢)시기 하북성 만성현(滿城縣) 능산(陵山)의 2호 서한묘에서 출토된 <錯金銀鑲嵌銅骰子>등이 대표적이다(Fig. 6). 전자는 아르키메데스의 ‘깎은 정팔면체’이며, 후자는 ‘마름모 육팔면체’의 형태이다. 섬서성과 하북성은 중국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중원지역으로 고대 그리스의 다면체 개념이 이곳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케르치의 귀걸이보다 조금 늦은 남북조시기의 6세기 중반, 중국 섬서성 안강시(安康市) 순양현(旬陽縣)에서 출토된 흑옥[煤精] 도장 <獨孤信多面體煤精組印> 역시 26개의 면으로 구성된 아르키메데스의 ‘마름모 육팔면체’ 형태로 18개의 정사각형과 8개의 삼각형으로 구성되었다(Fig. 7). 그중 14개의 정사각형에 음각으로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고, 그중 ‘獨孤信白書’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서위(西魏, 535-556) 시대 선비족의 고위층 인물이었던 독고신(獨孤信, 503-557)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6 본래 그의 이름은 ‘독고’였으나 서위 대통6년(大統六年, 540) 당시 실권자였던 우문태(宇文泰, 505-556)에게 ‘신(信)’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도장은 늦어도 540년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면체 형태는 7세기 이래 형성된 이슬람 문화와 만나면서 더욱 빛을 발휘하게 된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확인되는 이슬람 건축과 조형물, 그리고 각종 예술품에는 기하학을 위시한 각종 다면체가 상용되었다. 특히 이슬람 세계에서는 상당히 뛰어났던 금속 가공기술을 바탕으로 다면체 조형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활용’과 ‘응용’을 통한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다면체 조형에 장경(長頸)을 부착해 다면체형 병이 제작되었는데, 이란 북동부 지역에 위치한 옛 호레즘 제국(Khwarazmian Empire, 1077-1231)의 청동병은 이의 대표적 예에 속한다(Fig. 8). 장미수 병[Rosewater Sprinkler]7이라 불리는 이 병은 본 고에서 살피고자 하는 육팔면체형 다각병과 조형적 친연성을 보여주어, 명 선덕년간(宣德年間, 1426-1434) 관요에서 생산되고 청대 궁중화가인 양세녕(郎世寧)의 작품 <瓶花圖>에 등장한 <青花牽牛花卉紋折方瓶>(이하 ‘折方瓶’)의 원류로 지목되기도 했다(Fig. 9).8 그러나 일각에서는 두 점 모두 14면을 가진 다면체는 맞지만, 후자는 한 쌍의 상이(象耳)가 달렸고 ‘육팔면체’가 아닌 ‘깎은 정사면체’의 조형이므로 양자 간의 직접적인 관련성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9
다면체 조형을 활용한 공예품은 17세기 ‘신항로 개척 시대(대항해시대)’ 들어 본격적으로 제작되는 경향을 보이며, 도자·목제·유리 등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었다. 이때는 동서 교역이 확대되어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덕분에 서양과 동양 모두 상호 영향 관계에 있었다. 비록 그 수량은 풍부하지 않지만, 네덜란드의 델프트 도기를 비롯하여 박[匏, gourd]이나 자기로 제작된 청대 황실 공예품과 일본의 아리타 청자 등이 확인된다. 현전하는 예를 보면, 모두 14면을 가진 다면체이지만 델프트의 도기는 ‘깎은 정팔면체’이며, 청과 일본의 예는 ‘육팔면체’ 조형의 형태이다. 델프트에서 제작된 다수의 다면체 조형의 용도는 모자나 가발을 거는 걸이로 1658년 델프트에 설립된 그릭공장(The Greek A factory, 1658-1811)의 생산품이다. 이 기종은 17세기 4/4분기에 집중적으로 생산되었으며, 대부분 청화기법의 쉬누아즈리풍 양식을 따르고 있다(Fig. 10).
반면, 육팔면체 조형인 청 기물은 16세기 명 황실의 겹사법랑(掐絲琺瑯)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전체적인 조형은 상술한 선덕관요의 절방병(折方瓶)을 따르고 있다. 청대 들어서는 포제(匏制)기법으로 육팔면체 조형의 호로병이나 비연호(鼻煙壺)가 다수 제작되었고,10 대부분 건륭년간(乾隆年間, 1736-1795)의 작품이다. 특히 육팔면체는 중국 민간에서 ‘八不正’으로 일컬어져11 포제 호로병은 ‘八不正葫芦’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건륭년간의 <乾隆禦賞款折方開光人物紋匏制瓶>은 강희년간(康熙年間, 1662-1723)의 것을 모방·제작한 것이므로,12 ‘육팔면체’ 조형은 강희년간 이래 청 황실 공예에서 널리 유행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Fig. 11). V&A 소장청 건륭년간의 포제 모자걸이(혹은 가발걸이) 역시 앞서 네덜란드 그릭공장의 가발걸이와 조형·구조상 거의 유사하지만, 헤드 부분이 델프트식의 ‘깎은 정팔면체’가 아닌 ‘육팔면체’로 제작되어 수출되었다(Fig. 12). 다만 전세되는 포제 공예품에는 관지가 없어 언제부터 육팔면체 조형으로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6세기 생산된 겹사법랑의 사례로 보아 최소 강희년간 초반인 17세기 중반에는 이미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청 건륭년간에 제작된 〈玻璃胎畫琺瑯福壽八楞瓶〉(이하 八楞瓶)은 또 다른 건륭년간 다면체병으로 청 황실 공예인 화법랑(畫琺琅) 기법으로 제작된 유일한 사례이다(Fig. 13). 포제 공예품이 앞뒤가 한 쌍인 틀을 박에 씌워 성형하는 비교적 간단한 제작 방법이라면, 유리재질의 이 법랑기는 인위적으로 각을 만들고 목과 굽을 별도로 부착하는 등 복잡한 공정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날카로운 모서리와 각 면을 둘러싸고 있는 금장처리는 흡사 명대 경태람(景泰藍)에서 구리편을 녹여 다각면을 서로 이어 붙인 기법이나, 오늘날 면 유리에 동(銅) 테이프를 둘러 납땜을 하는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 유리 팔릉병(八楞瓶)은 팔면체의 동체부에 원형의 긴 목과 굽을 따로 부착한 형태여서 조형적으로 19세기 조선백자 다면체병과 가장 비슷하다.
이처럼 전세되는 작품을 통해 봤을 때, 고대 중국에서 깎은 정팔면체 혹은 육팔면체를 활용한 기명은 명대가 되어서야 처음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세계에서 10세기를 전후로 제작된 상황을 상기하면, 이보다 약 5세기가 지나서야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다. 아직 명·청 시대 상용된 다면체 조형의 기원에 대하여 몇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우선 남경 소재 북송의 대보은사(大报恩寺) 탑 출토 이슬람 유리제 장미수병의 존재는 호레즘 제국의 청동 장미수병 유입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기에, 그 기원을 이슬람으로 보는 견해이다.13 아울러 육팔면체의 이 조형에 대하여 명대의 그것과는 다른 계통으로 17세기 이후 청과 유럽 간의 동서교섭에 의한 서양적 요소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지만, 현재로서는 두 견해 모두 명확한 증명이 어렵다.14

Ⅲ. 조선백자 다각병의 양상과 특징

18세기 들어 제작되기 시작한 다각의 기명은 문자 그대로 여러 면으로 구성된 것을 의미하며, 통상 사각(四角) 이상의 면으로 구성된 기물을 지칭한다. 조형도 다면체를 포함하여 기둥형 다면체인 각기둥,15 평면, 곡면을 모두 아우른다. 조선백자에 자주 보이는 다각은 대체로 길고 넓은 평면과 곡면을 종횡으로 연달아 이어붙인 꼴로 연적·병·주전자·항아리와 사발 등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에서의 다각 기형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물레질 후 면을 깎아내거나 두드려서 각을 만들었고, 혹은 판 형태로 만들어 각 면을 이어붙이는 판 성형, 성형틀을 이용한 방법이 사용되므로 작업 공정이 한결 더 복잡해진다. 시간과 정성이 더 필요한 이 작업은 인력이 풍부하고 선진 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관요에서 대부분 전담으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19세기 이르면, 평면을 횡으로 연달아 이어 붙인 각기둥 형이 아닌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등의 다각형이 각 변에 붙어 구 형태를 이루는 ‘다면체’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다각병으로 불리는 이 병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르키메데스의 다면체를 따르는 조형으로 전통적인 분원 백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양식이다. 이에 본 장에서는 19세기 조선백자 다면체의 양상과 기형의 모본을 추적해 보고 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선백자에 수용된 청대 다각병

조선시대 다각의 백자는 기존 전통을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출현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조선 후·말기 요업과 자기를 언급하는 여러 기록 중 다각자기를 의미하는 표현은 많지 않다. 다만 18세기 초 문인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두타초(頭陀草)』 중 ‘八面唐壺’라는 명칭과 조선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였던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十面器’의 명칭이 등장하여, 당시 다각자기는 소위 ‘面器’로 통용되었듯 하다.16 이때 ‘면기’는 평면으로 구성된 모든 그릇을 포함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白磁靑畵卍繫文多角甁>을 위시한 다면체병은 대체로 동체부가 총 14면이 맞닿아 있는 육팔면체로 기하학적인 조형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소수지만 14면보다 훨씬 많은 32면의 ‘깎은 정이십면체’ 병도 확인된다. 이 독특한 기형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가 되어서야 ‘면기’가 아닌 별도의 명칭으로 불렸으며, 이는 1930년대 후반 최대 미술품 경매회사였던 경성미술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가 발간한 경매도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매도록에 실린 십수 점의 육팔면체병은 주로 네모난 것의 모를 잘라 낸 형상을 의미하는 切子 혹은 金剛石으로 명명되었으며, 용도는 술병[徳利]으로 정의되었다(Fig. 14).17
경매도록 중의 사진을 포함하여 전세되는 유물의 수량은 대략 20여 점 남짓이다. 그러나 접시나 사발처럼 일상 생활용기가 아닌 이상, 동일한 특수 기명이 수 점 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에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더하면 당시에도 다수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병의 대부분은 육팔면체의 동체부에 사각의 장경(長頸)이 붙어있으며, 낮은 사각의 굽 혹은 목가구의 풍혈(風穴)을 모방한 굽다리가 붙어있다. 전통적인 분원백자에서 볼 수 없었던 이 기하학적 기형은 과연 언제부터 제작되었으며, 그 기원은 어디서 온 것일까?
14면 이상의 다면체형 다각병은 19세기 들어 본격 출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기년작은 물론 출토유물도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기 어렵다. 오로지 장식방법이나 문양을 통해 제작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白磁靑彩花紋多角香爐>는 매화무늬로 생각되는 꽃무늬를 각 면마다 규칙적으로 양각하고, 바탕을 청화로 채색하였다(Fig. 15). 이와 유사한 장식기법은 종로 청진 8지구 유적 І문화층에서 출토된 <白磁陽刻靑彩花紋唾具片>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18 광복 이후부터 현대에 해당되는 І문화층에서 발견되었는데, 유구의 교란이 심각한 상황인데다가 19세기 말엽부터 일제강점기 전사기법 자기까지 동반 출토된 것으로 보아 빨라도 19세기 중·후반경에 이르러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앞서 살펴보았듯이, 다면체 동체부에 장경이 부착된 예는 10세기 이슬람 호레즘 제국에서부터 시작되어 15세기 명나라는 물론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와 청 제국으로까지 확산되며, 다양한 재질로 끊임없는 변용을 거쳐 생산되었다. 조선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8세기 후반 조·청 교류가 급격히 증가하여 조선 도자에도 청대 도자의 영향이 짙게 나타났고, 19세기에 집중적으로 생산된 조선의 다각병 역시 양식면에서 청의 영향을 받았음이 비교적 명확하다.
청의 영향을 받아 영조년간(英祖年間, 1724-1776) 이후 제작 수량이 증가한 각형의 예를 통해 다각병의 전래 역시 짐작해 볼 수 있다.19 <白磁靑花吉祥紋多角甁>은 동체부 4면의 마름모꼴 사각면에 ‘수(壽)’를 그려 넣었으며, 마름모 사각면 위쪽의 양쪽 변과 연결된 정삼각형의 면에는 연꽃·모란·매화와 같은 화훼문이 장식되어 있다. 아래 양변과 연결된 정삼각형 면에는 팔보문을 장식하였고, 윗면에는 복을 상징하는 박쥐문이 그려졌다(Fig. 16). 이 백자 다각병은 청 건륭년간 〈玻璃胎畫琺瑯福壽八楞瓶〉과 양식적으로 상당한 친연성을 보인다. 두 작품을 비교했을 때 기형은 물론 수복문과 꽃무늬의 동일한 문양 소재, 각자 엇갈리는 배치 등은 상당히 유사하다. 문양에 있어 도식화된 원형의 수복문과 그 주변을 둘러싼 넝쿨이나 여의두문의 조합은 건륭년간 이후 자태화법랑에 등장하는 수복문과 그 주변을 반룡문(蟠龍紋)이나 화훼문 등으로 둘러싸는 조합과 유사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필히 모본이 존재했음을 추정케 한다. 물론 조형상 조선 다각병은 사각기둥의 장경과 사각의 안굽이 달려 있고, 청의 유리병은 원통형의 장경과 원통의 높은 굽이 있어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육팔면체의 동체부 중앙에 원형의 ‘수(壽)’ 중심문양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보조문, 그리고 중앙부 주변에 각각 연결된 삼각면에는 연화문이 반복적으로 시문되었는데, 이 구성은 쌍방이 대동소이하다. 화법랑을 이용하여 제작된 이 유리병은 당연히 청궁 조판처(造辦處) 법랑작(琺瑯作)에서 제작된 어용 기물이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화법랑 기법에 유리로 제작된 이 팔릉병을 제외하면, 전세품이든 출토품이든 그 어떤 재질의 화법랑 공예품도 전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건륭년간 양식상 이와 가장 유사한 어요창 자태양채(瓷胎洋彩)에서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현재로서는 이 육팔면체의 팔릉병은 오로지 유리로만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정황 하에, 조선백자가 경덕진 민요품을 모본으로 삼았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조선의 <白磁靑花吉祥紋多角甁> 양식적 모본은 건륭년간의 이 유리태화법랑[玻璃胎畫琺瑯] 팔릉병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조 11년(1787, 건륭 52년)건륭제의 하사품(賞賜品) 중 포함된 유리기[玻璃器]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20 문헌기록 상 건륭제는 정조에게 총 3번에 걸쳐 10여점의 법랑기를 하사하였고, 정조 11년 역시 4점의 유리기와 함께 4점의 양자법랑합(洋磁珐瑯盒)을 하사하였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의 〈白磁靑花吉祥紋多角甁〉과 〈玻璃胎畫琺瑯福壽八楞瓶〉이 양식적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조선 다각병은 모두 갑번으로 제작된 분원 최고 품질의 자기라는 점 역시 이 모본이 건륭제의 하사품이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요소이다. 조선의 다면체형 다각병의 원류가 청에서 전래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 자기가 아닌 유리태화법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 또한 높으며, 이는 19세기 조선백자 다각병의 연원을 밝히는데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조선은 병뿐만 아니라 상단을 제거하여 향로로도 제작하는 등 오히려 조형의 모본인 청보다 육팔면체의 활용도가 높았다. 육팔면체는 총 14면이 서로 맞닿아 있는 고난이도의 조형이다. 수분을 머금은 찰흙으로 편평한 판을 만든 후, 정확히 각을 재어 무너지지 않게 결합해야 하므로 그 공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14면체의 육팔면체를 조립하기 위해서 필히 정확한 도면이 필요했을 것이며, 애써 성형을 마쳤더라도 번조하는 과정 중 갈라지고 뒤틀어지는 상황도 빈번했을 것이다. 오늘날 전하는 십수 점의 육팔면체형 기물을 보면, 각을 이루는 모서리가 상당히 날카롭고 각 면도 매끄럽다. 당시 각병 제작 방법 중 널리 사용된 방법은 판성형과 면깎기 기법이 동원된 물레성형, 그리고 속파기 성형이 병용되었으므로 육팔면체 조형도 이 방식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2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白磁靑畫角甁片>은 경부와 동체부 하부가 파손되어 제작 방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Fig. 17). 이 병은 특이하게도 동체부가 육팔면체가 아닌 32개의 면을 가진 ‘깎은 정이십면체’로 각이 지는 모서리는 다소 둔탁하며 각 면을 이어 붙이기보다는 외면을 깎아내거나 혹은 눌러서 각을 만드는 방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드러난 모서리 부분의 내벽 태토는 접한 흔적을 확인할 수 없고 일정한 두께에다가 표면 역시 매끄러워, 물레로 대략적인 형태를 만든 후 외벽을 깎아 각면처리 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병이 아닌 화로의 경우 내면을 통해 제작방식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각 면이 맞닿는 부분이 접혀 있어 흙판을 서로 이어 붙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Fig. 15). 판성형을 통한 다면체 조형의 제작은 당시 청에서조차 보기 힘든 고난이도의 제작방식으로, 이는 당시 분원의 뛰어난 도제 기술을 반증한다. 또 <白磁靑畫草花文多角甁>은 장경부분이 소실된 상태이나, 드러난 내면을 통해 사각기둥의 장경을 별도로 만들어 동체부에 접합했음을 알 수 있다(Fig. 18). 이런 각병, 특히 여러 도형이 종횡으로 서로 맞닿아 있는 다면체라면 번조 과정 중 뒤틀림에 취약했을 것으로, 서유구가 밝혔듯이 불꽃과 열이 골고루 전해지도록 갑발을 이용하여 제작되었을 것이다.22 이처럼 다면체 조형 기물의 생산은 전통 물레성형 방식의 토대 하에, 정확히 계산된 각도로 면을 깎아 성형을 하고 구연부와 굽을 따로 붙이는 새로운 제작방식을 추구하였다. 이는 19세기 진화되는 분원 관요의 도제 역사 측면에서 중요한 전환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19세기 조선에서의 다각병 유행과 그 의미

다각병은 19세기 분원관요에서 백자·청화·청재·동채·양각 등 다양한 장식기법으로 생산되었다. 또 14면의 ‘육팔면체’와 32면의 ‘깎은 정이십면체’ 다면체로 제작되었으며, 이는 병 혹은 화로 등으로 응용되었다. 다각형 백자는 18세기 전반 영조년간을 기점으로 본격 생산되기 시작했고,23 병·주전자·항아리 등은 사각을 기반으로 한 기면을 연달아 이어붙인 원기둥형이 대세를 이룬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 오각·육각형의 면이 종횡으로 연결되어 마치 축구공을 연상시키는 ‘구(球)’의 형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동체를 구성하는 면이 늘어난 만큼 각 면의 각도와 길이에 대한 정확한 계산이 요구되므로, 당시 사회적으로 기하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꽤 복잡한 작업 공정이 예상되는 이 병이 19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 유행하고, 또 상당수 제작된 점은 분명 특기(特記)할 만하다.
19세기 조선 다면체병의 조형적 원류라고 볼 수 있는 청의 팔릉병(八楞瓶)은 상술한 바와 같이 유리로 제작된 화법랑 1점만 전세되고 있으며, 유사 기종으로 포제병과 명 선덕관요의 절방병(折方瓶)을 모방한 홍유(紅釉)자기, 경태람 등 소수 전하고 있을 뿐 다량으로 생산되지는 않았다.24 이는 청 황실이 선호하는 취향이 아니었거나, 청 팔릉병의 화려함과 용도를 대체할 만한 혹은 상쇄할 만한 또 다른 공예품이 이를 대체하였을 가능성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팔릉병과 같은 다면체형 다각병은 17세기 후반 청에서 먼저 제작된 것은 사실이나, 실제 가장 많이 활용하고 제작하여 유행을 이끈 나라는 19세기 조선이 유일하였다. 그러하다면 19세기 조선에서 눈에 띄게 다면체 조형의 응용과 확산이 일어난 배경은 무엇일까?
이 다면체형 다각병은 여러 개의 다각형이 서로 종횡으로 맞닿아야만 형태가 완성되는 구조이다. 맞닿는 변의 정확한 길이와 각도 계산, 동체부 중심으로 몰리는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의 비율을 정확히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학적 개념이 필요하다. 특히 기하학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제작이 가능한 구조이다. 오늘날 전세되는 수십 점의 조선 다면체형 다각병은 대체적으로 품질이 뛰어나고 정세하여 분명 분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분원 사기장들이 이런 개념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미 17세기 조선에는 청을 통한 서양 수학이 소개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22-1610)가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이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25 남구만(南九萬,1629-1711)과 홍계희(洪啓禧, 1703-1771)를 비롯하여 북학파였던 이규경(李圭景, 1788-?), 유금(柳琴, 1741-1788) 등 다수의 지식인들은 서양 수학과 기하학을 연구하고 탐구하였다. 심지어 조정에서는 수학과 기하학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훌륭한 인재 육성을 위해 청 황실의 흠천감(欽天監)에서 근무하는 ‘기하학’에 밝은 서양인을 초빙하여, 조선인에게 천문, 운행 궤도, 의기(儀器)의 도수(度數)와 농잠, 의약 등을 가르치게 하도록 청하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였다.26 이런 기류속에서 아르키메데스의 다면체를 연구한 청나라의 연구서 『기하보편(幾何補編)』의 존재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청은 서양 수학이 중국보다 뛰어난 점은 바로 기하학에 있다고 판단하여 여러 기하학 관련 저서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청나라 제일의 천문역학자였던 매문정(梅文鼎, 1633-1721)편찬하여 청 황실의 다면체 조형에 대한 학습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27 이 책에는 조선 백자 다각병에 자주 등장하는 ‘육팔면체’ 조형이 ‘방등(方燈)’이라는 명칭으로 삽화와 함께 정의가 소개되어 있다(Fig. 19). 실제로 다수의 연구자들은 앞서 살펴본 청대 〈유리태화법랑팔릉병〉 등에서 구현된 다면체 조형의 출현 배경에 선교사들에 의해 청에 전해진 기하학 지식과 더불어 매문정의 『기하보편』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고 있다.28 다시 말해서, 청대 공예에서의 다면체 출현은 서양 수학의 기하학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당시 조선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서양 기하학 연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매문정의 명성은 조선에서도 크게 알려졌으며, 그의 저서 역시 조선에 전래 된 것으로 보인다. 매문정과 그의 연구에 대한 언급은 조선후기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는데, 가령 실학자였던 이익(李瀷, 1681-1763)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 중 매문정의 『역학의문(曆學疑問)』이 언급되거나,29 정조 14년(1790) 실학자 서호수(徐浩修)의 『연행기(燕行紀)』 중에도 매문정의 학문적 결실을 극찬한 바 있다.30 18세기 전반 이미 매문정의 명성이 조선에 알려졌고, 그의 저서는 18세기 후반 실학자들의 주요 탐구대상이었다. 이처럼 조선이 기하학 연구에 있어 매문정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는 만큼,31 『기하보편』 역시 조선에 소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청으로부터 전래된 수학과 기하학 개념이 조선의 다각형 백자 제작에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제작을 전담하는 솜씨 좋고 눈썰미 있는 사기장들의 공(功)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14~32면에 달하는 정교한 다면체형 병의 최초 설계는 기하학에 익숙한 그 누군가 혹은 어느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령 분원 소속의 관원이나 실학자 그 누군가가 기하학적 형체의 자기 제작에 어느 정도 개입을 했을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문헌기록의 부족으로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도로 정밀하게 계산된 다면체병 제작 배경에는 조선 사회에 널리 확산된 서양 수학과 기하학 학문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어 조선에서 생산된 육팔면체형 병의 조형적 원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 건륭년간의 유리태화법랑으로 이 사례는 오직 청 황실 법랑기로만 전세한다. 따라서 청 황실의 하사를 통해서만 구득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시기는 공식적 기록을 기준으로 대략 18세기 후반의 정조년간(1776-1800)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어째서 조선은 그 당시에 다면체형 다각병을 만들지 않고, 19세기가 되어서야 제작을 했을까? 이러한 현상은 당시 조선 왕실이 청과 청 문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복잡한 감정과 인식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는 18세기 중엽까지 조선 왕실과 관료들 사이에서 팽배하던 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한결 완화되었고, 청 문물을 ‘사치’로 치부했던 영조의 평가와 달리 조선 지식인들에 의해 청 문물이 적극적으로 평가되며 그 도입이 모색되고 있었다.32 하지만, 사회적으로 점차 청 문물에 대한 경도 현상이 확산되어 가는 것과 달리, 정조원년(1776)의 『景慕宮樂器造成廳儀軌』기록만 하여도 대략 10-15개 정도의 중국 자기만이 사용되어 조정 내 소비는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33 물론 음식이 필요한 연회의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대량의 청 자기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같이 사용되었던 조선 그릇이 3배나 많은 수량으로 확인되니, 적어도 정조원년 전후로 조정에서의 청 자기 사용은 보편화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배경에는 당물(唐物)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사치를 통제하려는 정조의 방침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34 영·정조년간 사치품으로 간주되던 청화백자의 문양과 기형이 점차 화려해지고 기교를 부린 것들이 생산되면서, 정조는 분원에서 제작된 갑기(匣器)나 화기(畵器)의 제작을 엄히 다루는 등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정조17년(1793)에 이르러 갑번의 제조 및 사용을 금지하는 명으로 이어졌다.35 정조의 조선은 화려하며 기교가 가득한 자기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제재함으로써 선대왕 영조의 절검을 숭상하는 국정철학을 계승하여 ‘근검·절약’의 태도를 몸소 보이고자 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하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14면이나 되는 기교가 가득한 다면체형 다각병의 생산은 왕실 차원에 철저히 지양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36
그러나 청 문물에 대한 태도는 19세기 들어 급변화된다. 이때는 청에 대한 다양한 인식이 생겨나는 시점으로, 예컨대 청의 위기적 정세를 지켜보면서 북학론의 사상적 변용이라던가, 서학(西學)을 접하면서 기존의 중화관이 해체되어 청을 객관화하여 보는 시각과 세계관 구축 등이 그러하다.37 인식의 변화는 청 문물의 향유와 소비로 이어졌고, 당시 상황은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冊架圖> 중의 다양한 청 기물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19세기 청 문물에 대한 조선의 개방적 태도로 인하여, 분원에서도 이즈음을 전후로 다면체형 다각병을 집중적으로 생산했으며, 청의 영향이 농후한 이 다각병은 상류층을 중심으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 문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신분·직역(職役)의 상향 이동이 격심했던 조선사회의 구조이다.
18-19세기 사회적으로 중인층의 성장과 상천민(常賤民)이 면역층(免役層)으로 상향 이동이 용인되었고 또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하층민이었던 천민은 노비 신분세습의 완화 혹은 페지, 면천, 속량(贖良) 등이 가능했다.38 일부 상층민은 농업경제력의 증가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경제력을 갖추었고, 부유한 노비 중에는 이를 기반으로 납속면천(納粟免賤)을 받은 이들도 나타났다. 이런 일련의 정책들은 18세기에 들어 가속화되었고, 결국 고종 31년(1894)에는 공사(公私) 노비제도가 혁파되는 등 조선의 전통적 신분제에 큰 변동이 생기게 된다.39 신분이 상승한 이들은 계급에 상관없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양반층에 버금가는 사치를 즐겼고, 이런 상황은 사회의 불안정 초래와 기강의 문란을 이유로 양반계층의 반발을 샀다.40 일례로 순조 7년(1807)의 기록에 따르면 사헌부의 정4품 관직에 있던 장령(掌令) 이약수(李若洙, 1753-?)가 올린 상소에는 장쾌(駔儈, 중개상인)가 사대부의 의관을 착용하는 등 기율(紀律)이 날로 문란해지고 서열이 무너져서 분수에 넘치는 짓이 풍습이 된 상황을 개탄하며, 상하의 구분을 엄격히 하고 존비의 차례를 명확히 해주기를 상소하고 있다.41 다시 말해, 19세기 조선은 급격한 신분제 변동을 겪으면서 계층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었다. 사치품으로 규정되던 분원의 갑기나 화기 사용은 양반 계층은 물론 중하층까지 널리 사용되었고,42 각형 자기 역시 이전처럼 왕실과 양반·상류층에 한정된 것이 아닌 차하위층도 소비할 수 있는 상품으로 실제 그들을 위해 제작되기도 하였다.43
그렇지만 수많은 각형 자기 중 다면체형의 병은 이전과 달리 가장 고난이도의 제작 방법이 필요했다. 또 청화·청채·철채·양각 등 당시 분원관요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장식기법이 더해지면서 독특한 풍모와 화려함이 강조되었다(Fig. 20). 18세기 이래 널리 제작된 각형 자기 중에서도 다면체형 다각병은 제작공정이 한층 까다롭고, 외양상의 화려함 때문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며 여타 다른 기물과 달리 ‘고급형’ 기명을 지향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원류가 진귀한 유리이자 청 황실의 공예였던 화법랑을 모본으로 삼아 청화백자로 번안된 점은 당시 청 화법랑기를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최상의 대안이었을 것이다. 양반계층은 흔한 각병 대신 정교하고 화려한 다면체형 다각병을 의도적으로 소비함으로써, 전통적으로 공인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Ⅳ. 맺음말

조선후기 출현한 백자 다각병은 전통 분원백자와 전혀 다른 새로운 기형으로 일찍이 청과의 교류 속에서 제작된 신문물이었다. 초기의 다각형 자기는 사각 혹은 직사각형의 평면이 연달아 이어지며 원기둥을 구성하는 형태였다면, 다면체형 병은 오각·육각 이상의 도형이 종횡으로 서로 맞물려 ‘구’를 형성하는 조형이다. 새로운 조형의 출현 배경에는 분명 발상과 인식이 전환되는 모종의 물리적인 접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조망되지 않았던 다면체형 다각병의 출현에 주목하여, 먼저 조형적 원류와 함께 제작 양상 및 조형적 특징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 19세기 소비된 다각병의 의미를 고찰하였다.
조선의 다면체형 다각병은 크게 ‘육팔면체’와 ‘깎은 정이십면체’의 조형을 활용한 것으로 모두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다면체 중 일부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서 유럽,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전해진 동서교류의 견증(見證)인 이 조형에 대하여 과거 학계는 중국자기의 모방 혹은 육각병의 형태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그 원류를 양식적 친연성과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정조년간 청 황실의 하사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유리태화법랑병임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특수한 조형의 이 병이 1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생산된 배경에는 청을 통해 조선에 소개된 서양수학, 그중에서도 기하학에 대한 사회의 높은 관심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예컨대 제작공정에 있어서도 이 병은 수학적 개념, 특히 기하학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제작이 가능한 구조이므로 분원의 사기장들이 이런 개념을 인지한 상태로 제작했다고 보기는 다소 어렵다. 대신 조선 왕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양수학과 기하학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청 공예품에 등장하는 다면체 조형의 구현 배경으로 지목되는 매문정의 『기하보편』이 조선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분원 소속의 관원이나 실학자 그 누군가가 최초의 도면 제작에 간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청 황실 공예인 유리태화법랑이 조선에 유입된 18세기 후반은 정조가 선대왕 영조의 절검을 숭상하는 국정철학을 계승하여 ‘근검·절약’의 태토를 솔선수범하던 시기로 왕실 차원에서 장식성과 화려함이 강조된 사치품 격의 다면체형 다각병 제작이 지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의 상황은 급격한 신분제 변동으로 경제력을 갖춘 하층민의 소비활동이 양반층에 버금가는 사치로 발전하였고, 이런 상황에 대해 양반계층은 신분의 기율이 무너지고 기강이 문란해짐을 이유로 크게 반발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전통적으로 공인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까다로운 제작공정과 청 황실 공예품을 모본으로 삼은 이 ‘고급형’ 기명을 선택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19세기 조선은 서학에 대한 관심 고조와 신분제의 이완 등 급변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다면체 조형의 출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Notes

1)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일지사, 2000), p. 329.

2) 유제욱, 「朝鮮後期 角形白磁의 硏究」(홍익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 2012), p. 51.

3) 다면체의 유래는 흔히 볼 수 있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등 ‘정다면체’ 5가지를 정리한 플라톤에서 시작된다. 그 뒤를 이어 아르키메데스는 정다면체를 변형하여 32개면으로 이루어진 더 복잡한 13가지의 ‘준정다면체’를 발견했다.

4) 1980년대 이집트의 닥하레 오아시스(Dakhleh Oasis)에서 발견된 예는 20개의 면에 이집트 신의 이름이 데모틱(Demotic, 후기 이집트 문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점술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Christine Alexander. “Accessions of Greek and Roman Antiquities.”, Bulletin of the Metropolian Museum of Art, Vol.32, No.7, N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37, p. 176; Martina Minas-Nerpel, “A Demotic Inscribed Icosahedron from Dakhleh Oasis.”, In Journal of Egyptian Archaeology, Vol. 93, London: Egypt Exploration Society, 2007, pp. 137-148.

5) Damm, Inciser Gürçay, “Huns and Goths: Jewelry from the Ukraine and Southern Russia”, From Attila to Charlemagne: Arts of the Early Medieval Period 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0. pp. 107-109.

6) 14면의 정사각형에는 각각 “臣信上疏”, “臣信上章”, “臣信上表”, “臣信啓事”, “大司馬印”, “大都督印”, “刺史之印”, “柱國之印”, “耶敕”, “信啓事”, “信白箋(箋)”, “密”, “令”, “獨孤信白書”의 인문이 새겨져 있어, 공문이나 서신을 쓰는 상황에 따라 쓰인 인장으로 보인다. 張沛, 「旬陽出土的獨孤信多面體煤精組印」, 『文博』 第2期(西安市: 陝西省文物局, 1985), pp. 95-96.

7) 이슬람 세계에서 ‘향’은 ‘천국의 향기’로 강조되어 종교행사나 모임을 하기 전 향을 피우고, 장미에서 추출한 정유(精油)와 증류수를 섞어서 여과시켜 만든 장미수를 뿌리는 것이 일종의 의식으로 여겨졌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기도를 위해 모스크에 참석하기 전에 자주 향을 피우고 향을 뿌렸다는 기록을 보아 7세기에 이미 장미수 병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Kalay, Hacer Arslan, “A Heritage Reflecting The Elegant Culture of The Ottoman Empire; Censer and Rosewater Sprinkler Specimens in Bitlis Ethnography Museum”, Journal of History Culture and Art Research, Vol. 8 Issue 2, Karabuk/Turkey: Karabuk University, 2019, p. 155.

8) 馬文寬, 「明代瓷器中伊斯蘭因素的考察」, 『考古學報』第4期(北京: 中國社會科學院, 1999), p. 439.

9) 余佩瑾,「多面體造型及相關問題-以乾隆朝玻璃胎畫琺瑯黃地福壽八楞瓶為例」,『國立臺灣大學美術史研究集刊』46期(臺北: 國立臺灣大學藝術史研究所, 2019), p. 66; 하지만 호레즘 제국이 오고타이 칸(窩闊台 汗, 재위 1229-1241)이 이끄는 몽골제국에 의해 1230년 멸망하면서 일 칸국(Il khanate, 1256-1335)이 들어섰고, 그 영향으로 동서교류가 활발히 진행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양자 간의 관계는 향후 깊은 고찰이 요구된다.

10) 포제(匏制)란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 박에 틀을 씌어 그 형태대로 자라게 하는 공예로 본래 민간에서 유행하였다. 기록상 명 만력년간(萬曆年間, 1573-1615)에 이미 포제공예가 민간에서 성행하였으며, 청 강희년간에 황실 공예로 승격되었다. 王世襄, 「談匏器」, 『故宮博物院院刊』 第1期(北京: 故宮博物院, 1979), p. 86; 周曉晶, 「木雕奇葩核雕與範匏器」, 『東南文化』 第12期(南京: 南京博物院, 2003), p. 68.

11) 王世襄, 위의 논문, p. 88.

12) 余佩瑾,앞의 논문, p. 67.

13) 馬文寬, 앞의 논문, p. 439; 余佩瑾,앞의 논문, p. 72.

14) 何傳馨 主編, 『十全乾隆-清高宗的藝術品味特展』(臺北: 國立故宮博物院,2013), p. 222.

15) 각기둥 역시 다면체의 일부분이지만, 다면체와 달리 위·아래가 구분되고 면이 서로 평행하며 합동인 다각형으로 이루어진 입체도형을 의미한다.

16) 李夏坤, 『頭陀草』 冊三, “……七十老翁身姓朴, 就中稱爲善手匠, 蟾蜍硯滴最奇品八面唐壺眞好㨾.”; 徐有榘, 『林園經濟志』, 「贍用志」 卷2. “廣州官窯 裝匣鉢燒造者爲上 正圓者呼爲鵞卵器 十角者呼爲十面器 不裝匣鉢而燒造者次之 但能爲圓不能作十角八角也.”

17) 경성미술구락부 경매도록은 다음 책을 참고: 김상엽, 『한국근대미술시장사자료집-일제강점기 경매도록』(경인문화사, 2015).

18) 관련 도판은 지면상 다음을 참고: 한울문화재연구원, 『鐘路淸進8地區遺蹟І-유물』(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p. 12, 도13.

19) 방병선, 위의 책, p. 239.

20) 『日省錄』, 正祖11年(1787), 正月23日, “…十二月初四日, 歲幣方物, 無弊呈納, 十九日臣等詣午門前, 依例領賞, 照例折賞, 玲瓏鞍具爲一匹, 貂皮一百張, 各色縀紬五十四疋, 謹爲領受, 又於二十六日, 自軍機所, 奉上諭加賞, 如意一柄, 玉器三件, 磁器四件, 玻璃器四件, 硯二方, 絹箋四十張, 筆二匣, 墨二匣, 洋磁珐瑯盒四件, 雕漆器四件, 亦爲祗受, 當日加賞臣等, 八絲縀各一疋, 絹箋各二卷, 筆墨各一匣, 本年正月初一日…”. 조선의 문헌기록 중 청궁에서 사용된 ‘玻璃胎畫琺瑯’이란 구체적인 명칭은 보이지 않지만, 청궁 하사품 품목 중 玻璃器는 물론 琺瑯甁라는 명칭이 새롭게 등장한다. 주로 품종(혹은 품목) 위주로 간결하게 명칭을 쓰는 조선시대 기록물의 특징을 고려할 때, 유리태화법랑은 ‘유리’ 혹은 ‘법랑’의 명칭으로 간소화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1) 다각병의 제작은 먼저 형태를 만들고 겉면은 면 깎기로 모양을 잡은 후, 속파기를 하여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각병보다 면수가 많고 구의 조형을 갖춘 다면체병의 제작은 두 가지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는 굽을 먼저 제작한 후 그 위에 분할하여 접합한 몸통을 붙이는 방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다면체의 특성상 성형과정 중 쉽게 무너질 수 있고, 또 면끼리의 접착면이 번조 중에 갈라질 수 있는 위험이 크기 때문에 면 깎기와 속파기를 거쳐 굽은 따로 붙였을 가능성이다. 방병선, 앞의 책, p. 329; 유제욱, 앞의 논문, p. 51; 경기도자박물관, 『분원백자전І - 조선후기 청화백자』(경기도자박물관, 2009), p. 66.

22) 註16)과 같음.

23) 다각형 기물은 15세기 후반 조선 전기 전남 광주 충효동 요지, 경기도 도마리 요지 등에서 다각잔편 등이 확인되어 일찍부터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후 18세기 초에 운영된 경기도 남종면 금사리 관요요지를 비롯해서 18세기 후반 분원리 요지에서 다각형의 백자가 다수 확인되고, 또 전세유물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그 유행시점을 대략 18세기 초 이후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京畿道廣州中央官窯: 窯址地表調査報告書』 圖版篇(2000), pp.406-426; 방병선, 앞의 책, p. 239; 유제욱, 앞의 논문, p. 26.

24) 현전(現傳)하는 청 황실의 다면체 조형 공예품 중 선덕관요의 청화절방병은 동시기 금속은 물론 후대의 청까지 모방·제작되는 것으로 보아 가장 대중적인 기형으로 보인다. 비록 본고에서 다루는 육팔면체 혹은 깎은 정이십면체 동체를 가진 병은 〈玻璃胎畫琺瑯福壽八楞瓶〉 1점만 전하고 있지만, 최근 연구에서 청 내무부 조판처의 문건 『內務府造辦處各作成做活計清檔』 중 등장하는 ‘吉利瓶’과 ‘蒺藜瓶’의 어원 및 용례를 추적한 결과, 이 역시 다면체 조형의 기물일 가능성이 높아 당시 더 많은 다면체형 공예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余佩瑾, 앞의 논문, pp. 59-64.

25) 구만옥, 「마테오 리치(利瑪竇) 이후 서양 수학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반응」, 『韓國實學硏究』 20호(2010), p. 310.

26) 『日省錄』 正祖10年(1786), 1月22日, “…且臣聞之. 成大事者. 不避小嫌. 狐疑顧膽. 何事可辦. 今欲斲萬金之璞. 以求工於鄰國. 則曰恐其謀已也. 其可乎. 臣聞中國欽天監造曆西人等. 皆明於幾何. 精通利用厚生之方. 國家誠能授之. 而觀象之一監之費. 聘其人而處之. 使國中之子第. 學其天文躔次鍾律儀器之度數. 農蠶醫藥旱澇燥溼之宜. 與夫造瓴甓. 築宮室城郭橋梁. 掘抗銅取卯玉. 燔燒琉璃. 設守禦火礟. 灌漑水法. 行車裝船. 伐木運石. 轉重致遠之工. 不數年. 蔚然爲經世適用之材矣…”

27) 韓永浩, 「서양 기하학의 조선 전래와 홍대용의 《주해수용》」, 『歷史學報』 第170輯(2001), p. 61.

28) Eugene A. Katz, 金必耀, 「富勒烯、多面體和中國守門獅」, 『數學文化』 第9卷第3期(北京: 清華大學科學史系, 2018), p. 65; 余佩瑾,앞의 논문, p. 77.

29) 李瀷, 『星湖僿說』 第1券, 「天地門·三元甲子」, “…今考梅文鼎暦學疑問其說不同更詳之.”

30) 徐浩修, 『燕行紀』 第3券, 「起圓明園至燕京」, 正祖14年(1790), 9月2日, “…勿菴之精深. 間世一出而不可多得也.”

31) 徐瀅修, 『明皐全集』 第8券, 「記·幾何室記」, “幾何者. 泰西之書之名也. 泰西之書之名而名朝鮮之人之室. 亦已遠矣. 昔泰西人利瑪竇. 浮海朝宗于中國. 以其幾何之書. 譯傳于太學士徐公光啓. 徐公. 明之賢大夫也. 一見之. 知其爲義和馮保之遺也. 與友李之藻. 講明授受. 以至於梅鼎,九薛,鳳祚之徒出.”

32) 김은경, 「朝鮮後期 清 陶瓷의 受容과 認識 變化」, 『韓國學硏究』 66집(2018), p. 55.

33) 『景慕宮樂器造成廳儀軌』, 正祖元年(1776), 「用還秩」, “…土火爐五坐, 陶罐五介, 常沙鉢九立, 沙大貼二介, 沙甫兒十介, 沙貼匙十七介, 唐沙鉢四立, 唐大貼十介, 紅木五幅甲袱四件, 前排用還…”; 「甘結秩」, “一, 右甘結, 麾·旌·纛, 起畵時, 畵員所用, 畵水筆各四柄, 沙莫子七介, 唐大貼一竹, 沙貼匙一竹半, 文書所用, 白休紙二介,星火進排事., 工曹·盤沙器契·唐沙器契·司贍寺”

34) 김은경, 위의 논문, p. 57.

35) 『正祖實錄』, 正祖17年(1793), 11月27日, “上問司饔院副提調徐邁修曰: “近聞朝臣日用磁器, 皆用匣燔, 至於輿儓下賤, 亦多效之云, 然否?” 邁修奏誠有此弊. 上曰: “例燔之器, 亦足可用, 何必別造匣器乎? 如甁罌盃鍾之屬, 亦皆務尙奇巧, 多有新製云. 卿其言于都相, 另加禁斷, 使之勿復燔造.”

36) 동시에 이와 함께 고민해 봐야 할 것은 비록 청을 통해 다면체에 대한 시각적 인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실제 이를 여러 재질로 실용화할 수 있는 기술의 있었는지 혹은 의도적으로 제작을 하지 않았는지의 문제이다. 조선은 19세기의 다면체형 자기병만 존재할 뿐, 생활 공예품을 비롯하여 건축, 장난감 등 그 어디에서도 다면체 조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명나라와 청나라는 이미 서양을 통해 다면체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洋式’으로 인지되어 자기, 박, 법랑기 등의 공예품을 비롯하여 손등[手燈], 장난감 교구(敎具) 등으로 실용화되고 있었다. 조선에서 자기 재질 외에 다면체형이 제작되지 않은 원인이 기술적 문제인지 혹은 인식의 문제인지는 향후 심도 있는 연구와 고찰이 필요하다.

37) 관련 연구로 다음을 참고: 노대환, 앞의 논문, pp. 23-51;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對淸認識의 변화와 새로운 中華 관념의 형성」, 『韓國史硏究』 제145호(2009), pp. 67-113.

38) 이준구, 「18·19세기 신분제 변동 추세와 신분 지속성의 경향」, 『韓國文化』 19집(1997), pp. 196-228.

39) 『高宗實錄』 卷23, 高宗31年(1894), 6月 28日, “軍國機務處進議案: …. 一, 劈破門閥、班常等級, 不拘貴賤, 選用人材事. …”

40) 『承政院日記』 高宗4年(1867), 4月 29日, “….至於文蔭武堂上之鞍馬服飾踰制者, 一依舊典禁條, 嚴立防限. 京外匹庶, 若胥吏屠沽之賤, 冬綿夏葛之外, 紬屬一切痛禁, 無得新製, 如有冒犯者, 隨現重繩之意, 著爲定式, 行會八道, 丕變侈濫之習. ….”

41) 『日省錄』 純祖7年(1807), 10月5日, “臣所謂紀綱之紊亂者何也 臣嘗聞朝廷爲外方之紀綱 官長爲下民之紀綱 兩班爲常漢之紀綱 長老爲少輩之紀綱 才德者爲愚不肖之紀綱 上以臨下卑以承尊秩秩有序井井不亂 卽古今之通誼也 夫何近來下民以頑拒朝令爲能事 少輩以侮辱長老爲能事 常漢以侵凌兩班爲能事 子弟以悖逆父兄爲能事 愚不肖以輕蔑才德爲能事 紀律日紊等級日壞僭越成習紛競滋 甚文章所以表貴賤 而市井駔儈 皆着士夫之衣冠 科宦所以登人才而 關節顔情能啚終南之捷徑 以至傷倫悖義可驚可愕之事難以 悉擧豈非朝廷之上紀綱紊亂 以致習俗之弊至此極也 耶伏願殿下 嚴上下之明尊卑 之序裁抑倖門杜絶私路賞當其功 罰當其罪 以張四維以勵 一世則紀綱 不期振而自振矣.”

42) 『正祖實錄』 正祖17年(1793), 11月 27日, “上問司饔院副提調徐邁修曰: "近聞朝臣日用磁器, 皆用匣燔, 至於輿儓下賤, 亦多效之云, 然否?" 邁修奏誠有此弊. 上曰: "例燔之器, 亦足可用, 何必別造匣器乎? 如甁罌盃鍾之屬, 亦皆務尙奇巧, 多有新製云. 卿其言于都相, 另加禁斷, 使之勿復燔造. "

43) 유제욱, 앞의 논문, pp. 133-134.

Fig. 1.
〈주령구(酒令具)〉, Juryeonggu Dice(Replica), Silla Dynasty, excavated from the Anapji(Gyeongju Donggung Palace), Gyeongju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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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Joseon’s blue and white made of polygonal shape, 19th century, Joseon Dynasty. The right: National Museum of Korea. The left: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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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The Cuboctahedron and Truncated icosahedron discovered by Archime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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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Faience polyhedron inscribed with letters of the Greek alphabet, 2th-3th century A.D, Roman,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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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Gold Earring, 4th-5th century A .D, Ostrogothic (estimate),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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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錯金銀鑲嵌銅骰子〉, Dice with plating and silver inlaid, Western Han Dynasty, excavated from the tombs of ling shan no.2 at Mancheng , Hebei, Hebei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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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獨孤信(503-557)’多面體煤精組印>, Polyhedron stamp with Dugu Xin(503-557) inscription, Wei and Jin Dynasties, after 540, Shaanxi History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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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Khorasan bronze bottle, 9th-10th Century A.D, Persia, Bonhams Auctions Londo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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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青花牽牛花卉紋折方瓶>, Blue and white Elephant-ear Vase with morning glory Design, Ming Dynasty, Xunder Period, Taiwan National Palac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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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Wig stand, 1686 -1701, Delft, Netherlands, ‘Greek A’ Factory (maker), Victoria and Albe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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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乾隆御賞款折方開光人物紋匏制瓶>,Moulded gourd ‘eight immortals’ bottle vase with incised four characters Qianlong yushang(乾隆御賞), Qing Dynasty, Qianlong Period, Tianjin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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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Hat Stand, Qing Dynasty, Qianlong Periodca, 1750-1790, Victoria and Albe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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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玻璃胎畫琺瑯福壽八楞瓶〉, Glass Octagonal Vase with good-luck and longlife Design, Qing Dynasty, Qianlong Period, Taiwan National Palac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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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백자청채다각병 〉, White Porcelain polygonal bottle with Underglazed Cobalt Blue, 19th century, Joseon Dynasty, in the Gyeongseong misul gurakbu’s illustrated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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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백자청채화문다각향로〉, White Porcelain polygonal incense burner with Underglazed Cobalt Blue and Incised floral Design, 19th century, Joseon Dynasty,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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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백자청화길상문다각병〉, Blue and white polygonal bottle with good-luck and long-life Design, 19th century, Joseon Dynasty,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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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백자청화수복문다각병 편>, shard of White Porcelain polygonal bottle with Underglazed Cobalt Blue and Incised good-luck and long-life Design, 19th century, Joseon Dynasty,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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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백자청화초화문다각병〉, Blue and white polygonal bottle with flowering plant Design, 19th century, Joseon Dynasty,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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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The fangdeng(方燈) described in Wending Mei(梅文鼎, 1633-1721)’s Jihe Bubian(幾何補編) Book. Q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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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Various techniques of white porcelain polyhedral bottles made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the 19th century. The right: Portland Art Museum, Portland, Oregon. The middle: The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The left: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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