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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08; 2020 > Article
새로 발견된 禪林院址 금동보살입상, 통일기 신라 보살상의 명작

Abstract

통일기 신라 선종의 요람, 억성사에서 2015년 기념비적인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되었다. 발견 장소는 승방터로 추정하는데, 홍각선사가 머물던 장소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보살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우선, 지금까지 발굴된 금동보살상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크며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둘째, 광배와 대좌를 온전히 갖췄을 뿐만 아니라 보살상 자체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제작 당시 작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알려준다. 이는 이곳 절터가 백수십 여 년의 짧은 기간만 유지되고 순식간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셋째,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금동상은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이 보살상은 양식이 현장에 남아있는 홍각선사 관련 석조물과 매우 유사한 데다가, 발견 위치 등을 고려하여, 홍각선사 개인의 願佛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보았다. 이에 따라 이 보살상을 조성한 때를 홍각선사가 이곳 억성사를 중흥시킨 9세기 후반,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가 이곳으로 돌아온 870년부터 그가 입적하기 전인 880년 사이로 판단했다. 이 금동보살입상은 우리나라 불교조각사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기념비적인 시각 자료이다.

Abstract

In 2015, a remarkable gilt-bronze statue of a standing Bodhisattva was excavated at the site of Ŏksŏngsa Temple, an important center of Sŏn School during Unified Silla. The statue was buried at a location that is assumed to have been the monks’ living quarters, where Buddhist Monk Honggak likely resided. The statue is noteworthy in several ways. Firstly, it is the largest in size among currently known gilt-bronze Bodhisattva statues and displays outstanding sculptural technique. Secondly, the mandorla and the pedestal were almost completely preserved that the original design can be fully appreciated. This was possible as the temple stood for a relatively short period of little over one hundred years. Lastly, unlike for most gilt-bronze statues. the exact circumstances of its excavation is known. The close stylistic resemblance to the stone monuments made for Buddhist Monk Honggak, also still at the temple site, and the location of its discovery makes it possible to propose that the statue was a personal votive item of Honggak himself. Accordingly, the production date of the statue can be narrowed down to the late 9th century, when Honggak revived the temple-more specifically between 870, when he came back to the temple, and 880, the year of his death. Conclusively, this gilt-bronze Bodhisattva statue is a valuable visual document in the study of the history of Buddhist sculptures in Korea.

Ⅰ. 머리말

2015년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지에서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되었다(Fig. 1). 보살상의 높이가 38cm, 대좌 높이가 14cm가량이니, 광배를 제외한 크기만도 52cm인 큰 금동보살입상이다. 광배까지 합하면 그 크기는 더욱 커진다. 지금까지 한국에 남아있는 통일기 신라(668-935) 금동보살입상 가운데서는 몇 안 되는 큰 크기의 상이다.1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발굴품으로는 최대 크기의 보살상이다.2 크기도 크지만, 대좌와 광배도 잘 남아있고 상의 도금도 그대로 남아있어 보살상의 가치는 매우 높다.3 년 여에 걸친 보존처리 후 처음 제작했을 당시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그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이 보살입상을 발견한 장소는 원래 승방이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한다. 이 보살입상은 발굴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매몰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1100여 년이 지나 원래 봉안했던 장소에서 그대로 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출토 지점이 명확하다는 점 또한 이 금동보살입상이 한국의 불교조각 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 선림원은 유물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예컨대 이미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보물 제444호), 석등(보물 제445호), 弘覺禪師(814?-880) 탑비의 귀부와 이수(보물 제446호), 승탑(보물 제447호)이 있고,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으로 옮겨진 선림원지 동종 등이 있다. 특히 804년에 만든 동종은 비록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지만, 해인사를 창건한 順應(入唐 766년, ?-?)이 주도해 제작했다는 중요한 명문이 남아있어 초창기 이 사찰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선림원은 고작 백수십 년간만 존속했던 역사가 짧은 사찰이지만, 9세기 불교사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긴 순응, 廉巨和尙(?-844), 그리고 홍각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며 그 계보를 이어간 의미 있는 장소이다.
이 글에서는 주목하려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이곳이 도대체 어떤 사찰이었기에 한국불교사의 비중 있는 승려들이 거쳐 갔는지, 그리고 선림원이 이 사찰의 본래 이름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은 선림원이라고 불리지만, 이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며, 원래는 억성사였다고 본 기왕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살펴본다.3 둘째, 선림원지에 남겨진 유물을 염두에 두고, 이를 2015년 새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과 비교 검토한다. 이를 통해 금동보살입상의 구체적인 제작 시기를 알아보려 한다. 이 금동보살입상과 관련해서는 어떤 문자자료도 없지만, 현장에 남아있는 관련 유물과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9세기 명문이 있는 시각 자료가 적잖아 가능한 작업이다. 특히 9세기는 명문을 통해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불·보살상과 석조물의 예가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도대체 이곳은 어떤 사찰이기에 이토록 아름답고 큰 금동보살입상을 제작 봉안했는지, 그리고 한국불교조각의 큰 맥락에서 이 금동보살입상이 어떻게 위치지어질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4

Ⅱ. 禪林院과 億聖寺, 廉居和尙, 弘覺禪師

선림원지는 설악산 백두대간 자락 구룡령 아래 깊은 계곡인 미천골에 자리 잡았다.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추정 금당지, 조사당지, 승방지, 기타 부속건물지 등 5-6개 동의 건물로 이뤄진 작은 산지가람이다(Fig. 2). 이곳을 처음 발굴한 때는 1985-86년이다. 당시 발굴결과를 통해 이곳 선림원지가 10세기 전반 일시에 벌어진 홍수와 산사태가 사찰이 사라지는 주된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5 이는 발굴 당시 선림원지의 여러 건물터가 모두 같은 형태로 일시에 묻힌 정황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곳 선림원지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지가람이어서 이러한 추론은 타당하다. 자연환경도 그렇지만 발굴된 유물도 9세기로 제한되어 있어 선림원은 짧은 영화를 누리다가 늦어도 10세기 전반에는 폐사된 것으로 본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53대) 神德王(재위 912-917) 4년, 즉 915년 참포, 즉 지금의 영덕 영일만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 물 높이가 20장가량 솟았다가 3일이 지나 멈추었다.”6 20장, 즉 60m가량 높이로 물이 치솟았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엄청난 해일이 있었고, 엄청난 바람과 폭우를 동반했을 것이다. 동해안에서 20km 남짓 내륙에 위치한 선림원지 역시 이때 피해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 선림원지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804년, 즉 애장왕 5년에 조성한 동종이다.7 잘 알려진 것처럼 이 동종은 1948년 10월경 이곳에서 발견되어 이듬해 11월 29일 월정사로 옮겨졌다. 1951년 1월, 옮긴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으로 파손되었고, 종의 파편을 지금은 국립춘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8 동종은 비록 파종되었지만, 안쪽에 양각으로 쓰인 명문이 있어 더욱 중요하다. 804년 선림원종의 명문 전문은 아래와 같다.9
  • 貞元卄年甲申三月卄三日當寺鍾成內之 古尸山郡仁近大朶 紫草里施賜乎古鍾金二百八十廷當寺古鍾金二百卄廷 此以本爲內 十方旦越勤爲 成內在之 願旨是者 法界有情 皆 佛道中到內去誓內 時寺聞賜主 信廣夫人君 上坐 令妙寺 日照和上 時司 元恩師 鍾成在伯士 當寺 覺智師 上和上 順應和上 良惠師 平法□ 善覺師 如於師 □□師 宣司 禮覺師 節唯乃 同說師.10

  • 貞元 20년, 804년 3월 23일에 이 절(當寺)의 鍾을 완성하였다. 古尸山郡의 仁近 大朶의 紫草里가 시주한 옛 종의 쇠[古鍾金] 280廷, 이 절(當寺)의 옛 종 쇠[古鍾金] 220정(廷)을 밑천으로 삼았다. 十方에서 旦越이 되어 완성한 것이다. 바라는 것은 法界 有情이 모두 佛道에 도달하기를 맹서하는 것이다. 이 때 절에서 들으신[聞賜] 분은 信廣夫人이다. 上坐는 令妙寺 日照和上, 담당관은 元恩, 종 제작 장인은 이 절(當寺)의 覺智, 上和上은 順應, 良惠, 平法, 善覺, 如於, □□, 베푼 담당관[宣司]은 禮覺, 節唯乃는 同說이다.11

위의 명문에서 當寺라는 말이 세 차례나 나온다. 지금의 명칭인 선림원의 ‘院’이 아니라 ‘寺’라고 일컫고 있어, 선림원이 원래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큰데, 소상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살펴본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이 종을 제작하는데 ‘고시산군의 자초리가 시주한 종’과 ‘원래 이 절에 있었던 종’이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때 고시산군은 지금의 충북 옥천에해당한다고 한다.12 충북 옥천에 거주하는 자초리가 어떤 인연으로 양양의 사찰의 종 제작에 시주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804년 새 종 제작에 ‘원래 이 절에 있었던 종’도 쓰였던 것으로 보아, 이 사찰이 적어도 804년 이전에 창건되었음은 분명하다.13 기왕의 종을 녹여 804년에 새 종을 조성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역시 명문에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통상 사찰을 중창하거나 일신하고자 할 때 일을 도모했음을 상기하면, 이 무렵 順應(入唐 766년, ?-?)이 새로운 주지로 부임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명문에는 당시 이 사찰의 上和上이 순응이라고 적었다.14 순응은 802년 해인사를 창건한 승려이다. 불국사에 주석했던 神琳(?-?)의 직제자이기도 하다. 신림은 義湘(625-702)의 제자이며, 불국사가 완성되고 제일 먼저 주석하며, 불국사 법회를 주관했다.15 신림은 불국사뿐만 아니라 부석사에서도 활동하며, 부석적손으로서 8세기 불교계에 큰 역할을 했다.16 의상의 손제자이자, 신림의 직제자인 순응이 바로 이곳 선림원과 관련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다. 순응이 802년 해인사를 창건할 때 신라 왕실의 대대적 지원을 받았던 왕실사찰임을 상기하면, 그런 그가 804년 이곳 선림원에서 동종제작을 주관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17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순응은 802년 해인사 창건 후 이곳으로 옮겨와 사찰을 새롭게 일신하는 주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주목할 자료는 886년에 세운 弘覺禪師(814?-880)의 碑다.18 아쉽게도 <홍각선사비>는 깨어져 두 개의 비편만 남았다.19 남아있는 비편도 두 개밖에 되지 않을뿐더러, 온전한 비석의 탁본조차 전하지 않는다. 비록 비석 일부분을 탁본한 것이지만, <홍각선사비>의 탁본은 3점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가장 이른 예는 1655년 무렵 滄江 趙涑(1595-1668)이 편찬한 『金石淸玩』에 실린 탁본이다.20 이때 이미 비석은 파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탁본조차 온전하지 못하여. 사찰명을 비롯해 비석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21 이런 이유로 17세기 중엽 비편의 일부를 탁본하여 수록하는 과정에서 편의상 ‘선림원’ 혹은 ‘선림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본다.22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살펴본다.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선림원이 이 사찰의 원래 이름일까. 현재 이곳을 선림원지라고 부르지만, 창건 당시에도 선림원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살펴본 804년 동종에 ‘院’이 아니라 ‘寺’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원’도 ‘사’와 마찬가지로 사찰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원’은 통상 규모가 작은 사원 혹은 큰 사찰 안의 일부 구역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원’과 ‘사’는 통용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특정 시기에 특정 사찰을 지칭할 때 혼용해서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적어도 9세기 당시 이곳은 ‘○○사’로 불렸다고 봐야 한다. 또 이곳에서 발견된 <홍각선사비>에 홍각선사가 “咸通(860~874) 말에 다시 雪山 억성사로 가서 (마멸) 금당과 불전을 이루었다(밑줄 강조 필자).”라는 문구, 그리고 이 <홍각선사비>가 바로 이곳에서 발견됐다는 점에서 선림원이라고 불리는 이 사찰의 원래 이름은 선학이 밝힌 것처럼 ‘억성사’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23 또 <홍각선사비>와 승탑이 이곳에 세워진 것을 보면 홍각선사는 이곳, 즉 억성사에서 입적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왜, 억성사를 느닷없이 선림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억성사라는 원래의 이름을 두고 후대에 어떤 이유로 선림원이라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답하기 어렵지만, 탁본한 비편의 비문 내용 가운데 “遍詣禪林”, 즉 “두루 선림을 찾았다”라는 문구가 있어 이를 근거로 편의상 붙인 이름이라고 본 견해는 설득력 있다.24
바로 이곳 억성사에는 3명의 주목할 만한 승려가 주석했다. 주석한 시기 순서대로 순응, 염거화상, 홍각선사이다. 이 3명은 9세기 한국 불교사에 큰 흔적을 남긴 승려들이다. 앞서 동종 관련해서 언급한 것처럼 순응은 802년 해인사를 창건했고, 804년에는 이곳 억성사의 上和上이었다. 대표적인 화엄 승려인 순응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곳 억성사는 해인사와 함께 9세기 초에는 화엄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곳을 지켰던 승려는 바로 선종승려인 廉居和尙(?-844)이다. 염거화상은 신라에 선종을 들여 온 道義禪師(入唐 784년)의 직계 제자이다.25 잘 알려진 것처럼 도의가 들여 온 선종은 중국 馬祖道一(709-788)의 洪州宗으로 화엄에 입각한 선종, 즉 화엄적 선종사상이다.26 도의나 염거와 같은 초기 선사들이 처음 화엄사찰에 주석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며, 이후 차차 선종 사찰로 전향시켜 선종의 영향력을 키워 갔다. 그 중심에 있던 선사가 바로 염거화상이며, 그가 바로 이곳에 주석했고, 844년에 입적했지만, 그가 입적한 장소가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다.27 도의가 선종을 처음 들여오는 역할을 했다면, 염거는 선종을 더욱 번창하게 했다. 이곳 억성사에서 염거의 뒤를 이은 보림사 가지산문의 體澄(804-880)과 홍각선사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28
홍각선사의 행적은 그의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쉽게도 그의 비는 많은 부분 결락되어 전문 파악이 어렵지만, 남아있는 비편을 통해 대략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홍각선사는 17세에 출가하여 880년 10월에 입적했고, 당시 승납이 50세였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그는 811-814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Table 1 참조). 출가 직후부터 승납에 포함시키면 814년에 태어난 셈이고, 일반적으로 구족계를 받은 20세부터 계산하면 811년에 태어난 셈이 된다.29 출가 후에는 해인사에 가서 여러 선지식을 묻는다.30 해인사 이후 그의 행적은 분명치 않지만, 염거화상 입적 이전에 억성사에서 염거를 만났고, 그에게 심인을 전해 받았을 것으로 본다.
844년 염거화상 입적 후 홍각선사는 억성사를 떠나 영암사를 거쳐, 園監大師 玄昱(787-868)이 주석하고 있는 고달사로 자리를 옮겼다. 868년에 원감대사가 입적하자 다시 억성사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한다. 하필 억성사로 다시 돌아온 것은 염거화상과의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 동종 제작을 주관한 순응과 ‘해인사’라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통(860-874) 말년, 60세 전후가 된 홍각선사는 억성사로 돌아와 중창 불사에 힘을 쏟았다. 염거화상이 844년 입적하자 그 후 어느 때인가 억성사를 떠났다가 함통 말년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함통 말년을 870년 무렵이라고 보면, 이때부터 880년 10월 21일에 입적할 때까지 햇수로 10여 년간 이곳 억성사의 금당과 香榭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서 소상히 살펴본다. 880년, 67세로 그가 입적한 후 886년 이곳에 그의 비와 승탑을 세웠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곳 억성사는 크게 세 번, 주목할 만한 시기가 있었다. 첫째는 순응이 머물던 804년 무렵, 둘째는 염거화상이 머물며 체징과 홍각에게 의발을 전수하던 840년 무렵, 마지막으로 홍각선사가 이곳을 지키던 870-80년 무렵이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은 그 크기로 보거나 조각 솜씨로 볼 때 이곳의 사세가 번성했을 때 조성하고 봉안했음에 틀림없다. 그때는 이 세 시기 가운데 언제일까.

Ⅲ.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의 현상, 제작 시기, 특징

이 금동보살입상은 2015년 제3차 선림원지 발굴조사에서 승방지로 추정하는 장소에서 엎어진 채로 발견되었다(Figs. 2, 3).31 이례적으로 광배와 대좌를 온전히 갖춘 보살상이었다. 한국에 금동불입상이 그 숫자가 적잖지만 이처럼 광배까지 함께 발견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32 광배와 대좌를 온전히 갖추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크기가 크다는 점도 특별하다. 광배를 제외한 보살상과 대좌의 높이만 52cm이니, 광배까지 합하면 60cm가 넘는다.33 통상 통일기 신라의 금동불 가운데 30cm가 넘는 상이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귀중한 예이다. 발굴 이후 학계에 처음 소개되는 만큼 보살입상의 현상에 대해 소상히 살펴본다.
보살상, 광배, 대좌는 각각 별도로 제작한 후 결합했다. 광배는 보살상 뒷면의 허리 부근에 돌기가 있어 광배와 연결하도록 했고, 대좌는 양 발 아래 각각 촉을 두어 대좌에 끼우도록 했다(Figs. 4, 5). 발견 당시 왼발은 촉이 그대로 대좌에 끼워진 채로 발만 떨어졌고, 오른발은 발목 부분이 절단되었다. 오른발은 현재 대좌에 꽂혀 있는 상태이다(Fig. 5). 이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목과 팔목에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전신에 영락을 둘렀다. 보관, 목걸이, 팔찌, 영락 장식 등을 별도로 제작하여 부착했기 때문에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각각의 장신구 파편이 대체로 잘 남아있어 원래 모습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Fig. 6). 통일기 신라 보살상 가운데 이처럼 모든 장신구를 별도로 제작하여 몸에 걸치도록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34 심지어 왼손에 든 정병도 별도로 제작하여 손가락에 걸어두었다(Fig. 7). 정병은 고리가 있어 보살상의 손가락에 걸기 쉽도록 했다.
머리카락[菩髮]만 남색 안료로 칠하고 나머지 부분은 개금을 했다. 머리카락에 칠한 남색 안료는 현재 색도 옅어진 데다가 접착력이 떨어져 안료가 부슬부슬 떨어지는 상태이지만, 군데군데 원래의 짙은 남색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눈썹과 눈, 콧방울, 콧수염, 턱수염, 머리카락과 이마를 경계 짓는 발제선, 귓바퀴 등을 먹으로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Fig. 8). 조성 당시에 그려 넣은 먹선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어 불상 조성 초기부터 불ㄹ보살상의 수염을 그렸음을 확인시켜 준다. 아울러 당시 머리카락, 눈, 코, 수염 등을 표현할 때 남색 안료와 먹을 사용했다는 점도 새롭다.
이 보살입상의 얼굴에서 두드러진 점은 오똑한 콧날, 그리고 인중이 두툼하여 아랫입술이 윗입술보다 더 두텁고 튀어나온 것이다. 普照禪師 體澄(804-880)이 개창한 보림사의 858년 철조노사나불과 입매가 유사해 좋은 비교가 된다(Fig. 9). 체징 역시 억성사에서 머문 적이 있으며, 홍각선사와 함께 염거화상을 계승했다. 물론 이처럼 도드라진 윗입술은 보림사 철불뿐만 아니라 통일기 신라 하대 9세기 불·보살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寶髻는 머리카락을 위로 높이 묶어 올린 후, 뒤쪽으로 둥글게 말아 감았다. 그 위에 씌운 화려한 보관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별도 제작했는데, 가운데 원형장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공양보살좌상을 한 구씩 배치했다. 아쉽게도 보관은 온전치 못한 상태이며, 현재 보관의 중앙 원형장식은 보계와 밀착되어 있어 분리가 어렵다. 원형 장식 안에 化佛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좌우의 공양보살좌상은 보계와 분리되어 보관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다(Fig. 10). 이처럼 보관에 화불이 아닌 공양보살좌상을 좌우 대칭으로 표현한 예는 매우 이례적이다. 보관의 오른쪽에는 왼쪽 다리를 접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보살좌상이, 보관의 왼쪽에는 반대로 오른 다리를 접고, 왼쪽 무릎을 꿇은 소위 胡跪坐의 보살좌상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양손으로는 공양물을 받들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보살입상은 옷주름을 입체적으로 표현해 현실적으로 보이게 했다. 상체와 비교하면 하체의 양감은 풍부한 편이며, 왼쪽 무릎을 살짝 구부려 힘을 빼고, 오른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양 발끝은 V자 모양으로 살짝 벌려 섰다. 보살상의 상반신에는 두 장의 천을 둘렀다. 한 장은 양 어깨에 걸친 天衣이고, 다른 한 장은 가슴에 대각선으로 두른 絡腋이다. 천의는 보살상의 가장 일반적인 복식이지만, 낙액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낙액은 條帛이라고도 부르는데, 보통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까지 대각선으로 걸쳐진 띠를 말한다.35 당대 보살상에서는 천의와 함께 낙액을 착용하기도 한다. 중국 당(618-907)에서는 7세기 중엽부터 보살상에 낙액이 보이기 시작해, 8세기 보살상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전반, 칠불암 마애삼존상의 좌우 협시보살상을 비롯해, 감산사 미륵보살상에 이르기까지 낙액을 두른 예가 적지 않다. 낙액은 9세기 보살상까지 지속해서 표현되는데, 인근의 강원도 고성 유점사 능인보전에 봉안돼 있었던 금동보살입상이 대표적이다(Fig. 11). 유점사 상은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지만, 유리건판사진을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점사 보살상은 32.2cm로 상의 크기도 비슷할 뿐만 아니라 엄숙한 얼굴, 풍만한 체구 등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강원도 고성은 이곳과 지리적으로 같은 권역에 속해 있어 좋은 비교 자료이다.
어깨에는 가늘고 긴 천의를 둘렀는데, 천의자락은 팔을 거쳐 몸의 좌우로 길게 늘어지도록 해 보살상이 훨씬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어 보이게 한다. 좌우로 늘어진 천의 자락은 별도로 주조하여 연결했다(Fig. 12). 하반신에는 裙을 걸치고, 그 위에는 腰布를 둘렀다. 요포는 흘러내리지 않도록 끈을 이용해 묶었다. 낙액과 요포 위의 매듭이 매우 굵고 풍성하고 자연스럽게 조각돼 있어 조각 솜씨가 뛰어난 장인이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의 뒷면에는 모두 세 곳에 幅置가 뚫려 있다(Fig. 13).36 폭치는 내형과 외형을 연결하는 용도로도 쓰이며, 제작 후 내형토를 제거할 때도 바로 이 폭치 구멍을 통해 긁어낸다. 상의 내부는 상 제작에 쓰인 내형토를 잘 제거해 내부가 비교적 깨끗한 상태이다. 등과 허리 사이, 낙액이 지나가는 곳에는 광배를 연결하기 위한 돌기가 있다.
광배 역시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Fig. 4). 보살상의 등과 닿는 부분은 그대로 두었지만, 광배의 뒷면은 모두 개금했다. 뒤통수가 닿는 위치에는 원형 판을, 몸이 맞닿는 위치에는 긴 타원형 판을 두었다. 이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넝쿨무늬와 불꽃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광배 정상 부분에는 화불이 있다. 화불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왼손은 왼 다리 위에 두었으며, 通肩 가사에 결가부좌를 하고 타원형 대좌 위에 앉았다. 두광 좌우에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다리를 꿇은 호궤좌의 공양보살좌상이 있다. 앞서 보관 좌우의 공양보살좌상과 같은 자세인데, 다만 광배 좌우의 공양보살좌상은 합장하고 있어 손모양이 다르다.
이 보살입상의 대좌는 상대와 중대, 하대, 그리고 하대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대와 하대는 원형 평면, 하대 받침은 팔각이다(Fig. 5). 상대와 하대 사이에는 짧은 중대가 있다. 상대는 연꽃잎을 두 단으로 중첩했고, 하대는 한 단이다. 이 대좌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두툼한 연잎과 화려한 귀꽃으로 장식한 하대이다. 각 귀꽃의 중앙에는 수정을 감입해 장식했다. 귀꽃에 감입했던 수정이 현장에서 함께 발견되어 이를 알려준다.
대좌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전의 글들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대좌는 제작 시기에 따른 차이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37 이와 같은 대좌의 평면 구성은 석굴암본존상 이후 불좌상과 불입상에 빈번히 쓰였다.38 다만, 같은 구성이라도 8세기와 9세기 대좌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같은 팔각이라도 제작 시기에 따라 하대 팔각면의 선이 다르다. 9세기 대좌는 바닥면의 팔각평면이 팔각 꽃 모양으로 바뀌었고, 하대를 풍성한 귀꽃으로 장식한다. 특히 하대 귀꽃은 금동불뿐만 아니라 석불에서도 마찬가지이며, 9세기 승탑이나 석등에도 애용된다. 다만 이 금동보살입상 하대의 연꽃잎과 귀꽃 모양은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예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을 보인다. 그나마 가장 유사한 귀꽃 모양은 월지(구 안압지)와 인근 홍천 물걸리에서 출토된 불상의 하대에서 찾을 수 있다. 귀꽃의 좌우로 대칭으로 말려 있는 꽃받침이 상당히 유사하지만, 선림원 보살상의 귀꽃은 꽃봉오리가 더 크고 선명하며, 줄기도 길고, 꽃받침도 좌우로 더 많이 벌어졌다(Fig. 14). 하대의 연꽃잎의 크고 살이 오른 모양도 이례적이다. 하대 연꽃잎을 크고 넓적하게 표현하는 예는 863년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867년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하대 등 9세기 대좌 가운데 그 예가 많지만, 이 보살입상처럼 볼록하게 살이 오른 모양으로 표현한 예는 이곳의 승탑, 석등 하대석과 함께 이곳 선림원 불교미술품의 뚜렷한 특징이다.
통일기 신라의 명작인 이 금동보살입상은 언제 제작한 것일까. 명문은 물론이고 관련 문헌 사료도 전혀 없지만, 현장에 남아있는 승탑, 홍각선사의 귀부와 이수, 그리고 석등과 비교를 통해 대략의 제작 시기를 알아보려 한다.39 886년, 즉 9세기 후반에 제작한 홍각선사 승탑은 아쉽게도 대좌만 남았고, 상대 위에 얹혔을 옥개석과 탑신은 찾지 못했었다(Fig. 15).40 다행히 이번 제3차 발굴에서 승탑의 옥개석을 발견했다(Fig. 16). 8각 옥개석인데, 귀꽃은 겨우 1개만 온전하게 붙어 있다. 바로 이 승탑 옥개석 귀꽃과 하대 연꽃잎이 금동 보살상 대좌 하대와 일치한다(Fig. 17). 앞서 언급했듯, 연꽃에 살이 올라 있고, 꽃잎의 꺾임이 심하다. 승탑 하대에 귀꽃은 없고, 대신 옥개석 모서리에 귀꽃을 표현했는데, 역시 보살상 대좌의 귀꽃과 모양이 일치한다(Fig. 18). 이와 같은 귀꽃은 앞서 살펴본 대로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귀꽃과는 차이가 있다. 꽃망울이 선명하고 꽃받침이 좌우로 벌어져 있다. 같은 모양의 귀꽃은 조사당 건물지 바로 앞 홍각선사비 옆에 놓인 석등의 옥개석과 하대에도 있다.
이처럼 보살상 대좌의 연꽃잎과 귀꽃은 현장에 남아있는 승탑, 석등의 귀꽃과 뚜렷한 동질성을 보인다. 이를 근거로 필자는 9세기 후반 무렵 조성한 석물과 유사한 시기에 이 보살상도 조성했다고 판단한다. 이와 관련하여 홍각선사비에 쓰인 다음과 같은 문구를 다시 한 번 주목하려 한다.
  • “咸通末復往於雪山億聖 (마멸) … 成金殿與香榭”41

  • “(홍각선사 이관은) 함통(860~874) 말에 다시 설산의 억성사로 가서 (마멸) … 금당과 樓臺를 이루었다.”

그가 억성사로 돌아와 억성사의 금당과 누대를 이루었다고 했으니, 당시 홍각이 주축이 되어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이뤄진 모양이다. 880년 60대 후반의 나이에 홍각선사가 입적했고, 886년 그의 비와 승탑이 세워졌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홍각선사의 승탑, 석등 등 이 시기의 석물과 금동보살입상은 여러 가지 점에서 양식 특징을 공유한다. 물론 승탑과 석비는 홍각선사의 입적 후 유물이지만, 금동보살입상은 그가 입적하기 전,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곳에서 한창 불사를 진행하던 870-880년 사이로 제작 시기를 조금 더 좁혀볼 수 있다.
한편, 1985년 제1,2차 발굴조사 당시에도 금당지에서 금동불입상이 출토됐다(Fig. 19). 당시 발견된 불입상은 대좌를 포함한 높이가 9.3cm로 크기가 작고 제작 시기도 7세기 무렵으로 추정한다. 이 불상은 새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과는 제작 시기의 차이도 있고, 봉안용이라기보다는 호지용의 소형 불상으로 보살입상과 함께 비교 고찰하기는 곤란하다.
또 이곳에서 5.8km 거리의 양양군 서면 상평 초등학교 현서분교 교정에 있는 西林寺址 석조 비로자나불좌상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Fig. 20의 왼쪽).42 선학의 주장대로 이 서림사지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억성사 본존불이 맞다면, 함께 비교 고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불좌상은 1965년 상평초등학교 현서분교에서 60m 떨어진 인근 논에 있던 것을 교정으로 옮겨 둔 것이다. 대좌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2.4m인 이 상을 두고, 원래 선림원지 금당에 봉안했던 본존불로 본 것이다.43 이 비로자나불좌상도 양식으로 판단하면 9세기 후반이며, 선림원지와 서림사지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 그리고 이 불상의 지대석 크기가 선림원 금당지의 지대석 기초석 크기와 동일하다는 점을 들었다. 또 1965년 함께 발견하여 교정으로 이운한 석탑이 고려시대 석탑이라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이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원래 이곳 사찰에서 제작하고 봉안했던 것이라면, 고려시대 석탑과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선학은 선림원이 10세기 전반, 갑자기 매몰되자 선림원의 본존불이었던 이 비로자나불좌상을 5.8km나 떨어진 이곳으로 옮겨와 본존불로 봉안하면서 西林寺를 창건했다고 추정했다.44 상이 심하게 파손된 것도 10세기 전반에 일어난 선림원의 산사태와 이후 옮기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파손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45
물론 당시 선림원(억성사)의 성격이나 9세기라는 시기를 고려하면, 선림원 금당의 본존상은 비로자나불상이었을 것이다. 이 서림사지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9세기 후반의 비로자나불’이라는 점만 두고 보면, 선학의 판단처럼 원래 억성사의 본존불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려 초에 산사태로 매몰된 사찰의 금당에서 커다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대좌를 쉽사리 이운할 수 있었을까, 설령 이운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이 불좌상을 본존으로 삼아 새로운 사찰을 창건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억성사라는 의미있는 사찰의 본존이었다고 해도 이미 산사태로 파손된 상을 굳이 어렵게 이운하여, 이를 주존으로 삼아 새로운 사찰을 창건할 필요가 있었을까.
결정적으로,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크기, 같은 형식의 미완성 불상이 서림사지 인근에서 발견되었다(Fig. 20의 오른쪽).46 발견 장소는 서림사지 앞으로 흐르는 개천변인데, 서림사지와는 1.3km가량 떨어진 곳이다. 개천에 굴러 떨어져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한다.47 이 미완성 불상은 불상을 제작하다가 원석이 갈라지자 폐기한 것인데, 이 상과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미완성 불상은 얼굴과 오른손 부위에 심한 균열이 있다. 짐작컨대 제작 과정 중 가장 중요한 부위인 얼굴과 손에 균열이 가자 폐기했고, 이후 새로 제작한 상이 바로 서림사지 상인 것으로 여겨진다. 서림사지 상이 머리를 제외한 불상 높이만 125cm인데, 미완성 불상 역시 127cm로 크기도 동일하다.48 형식도 같아, 두 상 모두 왼손을 위로, 오른손을 아래로 한 左拳印의 비로자나상이며, 결가부좌의 다리 형태도 같다. 비로자나불상의 智拳印 가운데 왼손을 위로 한 좌권인이 그 예가 많지 않다는 점을 상기하면, 미완성 상은 서림사지 상 이전에, 제작하다 실패한 상이라고 봐도 문제없다. 이 미완성 불좌상이 발견됨에 따라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두고 선림원지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이로써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선림원의 본존불이었던 상이 아니라, 선림원과는 별개의 사찰인 서림사에서 9세기 후반 조성해 본존으로 봉안한 상으로 볼 개연성이 훨씬 높아졌다. 관련 내용은 조선 후기에 편찬한 『峴山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시기 서림사는 이미 폐사되었으며, 머리는 임진왜란 때 불을 맞아 떨어졌다고 전한다.49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발견 당시 불상 주변에는 초석이 일렬로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인근에 와편이 산재해 있다.50

Ⅳ. 맺음말: 짧은 榮華,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의 의미

통일기 신라 선종의 요람, 억성사에서 2015년 기념비적인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되었다. 광배와 대좌가 모두 결합된 채로 엎어진 상태였다. 발견 장소는 승방터로 추정한다. 아궁이 시설이 있고, 구들장 밑으로 불길과 연기가 나가는 길인 고래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발견 당시의 정황으로 보면, 승방 한켠의 불단에 봉안되어 있다가 화를 면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이곳은 10세기 전반 순식간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상 전신에 걸쳐 개금이 벗겨진 곳 없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도 보살상 제작 후 그리 오래지 않아 땅속에 묻혔음을 알려준다. 발견 지점은 홍각선사비가 있는 조사당 건물지와 가장 인접한 곳이다. 이곳이 승방지가 분명하다면, 어쩌면 홍각선사가 머물던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이 기념비적인 금동보살입상의 위치와 성격을 가늠해보려 했다. 선림원지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우선, 지금까지 발굴된 금동보살상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이다. 특히 우리나라 금동상의 대부분이 불상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보살입상은 그 유례가 드물어 더욱 소중하다. 둘째, 광배와 대좌를 온전히 갖췄을 뿐만 아니라 보살상 자체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제작 당시 작가가 의도했던 모습이 무엇인지 고스란히 알려준다. 이는 이곳 절터가 백수십 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만 유지되고 순식간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셋째,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금동상은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훨씬 크다. 그것도 선종의 요람인 억성사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이라는 점에서 이 보살상은 21세기 최고의 발굴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의 금동불은 그 수량이 적지 않다.51 크기는 5cm 이하의 초소형부터 30cm가 넘는 크기까지 다양하지만, 30cm가 넘는 예는 많지 않다.52 수량은 제법 많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이 가운데 명문이 남아있는 예는 물론이고,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예조차 매우 드물어 우리나라의 소형 금동불이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 그 정확한 용도를 알기 어렵다. 다만, 중국과 일본의 소형 금동불이 대체로 개인의 願佛로 조성하고 봉안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 금동보살입상 역시 유사한 용도로 소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보살상 양식이 현장에 남아있는 홍각선사 관련 석조물과 매우 유사한데다가, 발견 위치 등을 고려하여, 홍각선사 개인의 원불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보았다. 이에 따라 이 보살상을 조성한 때를 홍각선사가 이곳 억성사를 중흥시킨 9세기 후반,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가 이곳으로 돌아온 870년부터 그가 입적하기 전인 880년 사이로 판단했다.
10세기 전반, 선림원은 급작스럽게 매몰되었고 이후 재건은 없었다. 순응, 염거를 비롯해 홍각에 이르기까지 9세기의 대표 선승이 주석했던 당시의 흔적은 고스란히 묻혔고, 1985년 이후 세 차례 발굴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금당지를 비롯해 조사당지, 추정 승방지 등의 유구가 서서히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한편, 한때 억성사의 본존불로 여겨지기도 했던 서림사지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동일한 크기와 형식의 미완성 불상이 인근에서 발견됨에 따라 억성사와는 관련 없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억성사는 통일기 신라 불교사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긴 승려들이 거쳐 간 사찰이다. 이곳은 도의선사의 선사상을 전파한 요람이었으며, 염거, 체징과 홍각 같은 선승을 배출한 설산의 중심 사찰이다. 자그마한 산지가람이지만 도의선사가 머물던 진전사와 20여km 거리로 인접해 있고 서남부 내륙으로는 홍천과, 동북쪽으로 동해안 경로를 따라 올라가면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로도 연결된다. 교통의 편리함, 수행에 유리한 경관, 그리고 앞서 이곳을 지켰던 승려와의 인연 등이 여러 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가도록 했을 것이다. 새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금동보살상 가운데서는 좋은 비교 예를 찾을 수 없지만, 흥미롭게도 지금은 사라진 유점사의 금동보살입상과 매우 닮았다. 하대 귀꽃의 모양은 홍천 물걸리사지에서 발견한 9세기 후반의 금동불입상, 물걸리사지 현장에 남아있는 보물 제544호 대좌와도 좋은 비교가 된다. 이처럼 양식이 서로 유사하기는 하지만, 억성사 불교미술품과는 차이가 있다. 즉, 금동보살입상을 포함한 억성사의 승탑과 석등의 대좌는 하대 연꽃이 매우 도톰하며, 귀꽃을 훨씬 강조하는 이곳 불교미술품만의 뚜렷한 특징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가 이전 글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던 것처럼, 불상과 보살상의 양식은 결코 단선적으로 전개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글에서 필자가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을 9세기 형식과 양식의 전개 과정 속에서 살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흐름이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현장에 남아있는 9세기 후반의 홍각선사 관련 석조물과 대조하는 작업에 비중을 두었고, 그 결과 금동보살입상의 제작 시기를 홍각선사가 이곳을 지키던 870-880년 사이로 좁혀보았다.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금동불 가운데 원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는 예가 별로 없다는 점, 조각 솜씨가 매우 뛰어난 점 등을 감안하면, 이 금동보살입상은 우리나라 불교조각사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기념비적인 시각 자료이다.

Notes

1 물론 통일기 신라 금동불상 가운데 9세기에 제작한 백률사 금동불입상, 불국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그 크기가 훨씬 크다. 이 3구의 국보 금동불을 제외하고 불상이 아닌 보살상 가운데서는 선림원지에서 발견된 이 상이 지금까지는 가장 큰 크기이다.

2 이는 2020년 현재 시점이며, 이후 새로운 발굴을 통해 이보다 큰 크기의 상이 발견될 가능성은 염두에 둔다.

3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성사지의 추정」, 『史學硏究』 55 · 56(1998), pp. 75-88; 권덕영, 「新羅道義禪師의 初期 法系와 億聖寺」, 『新羅史學報』 16(2009), pp. 197-224.

4 필자 역시 이곳의 명칭은 선학의 주장대로 ‘억성사’가 옳다고 판단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세간의 명칭대로 ‘선림원지’라 이름했다. 다만 9세기 사찰의 정황을 일컬을 때는 ‘억성사’라 기술했으니, 혼돈이 없기를 바란다.

5 문명대, 「禪林院址 發掘調査略報告」, 『佛敎美術』 10(1991), p. 164.

6 “夏四月 槧浦水與東海水相擊 浪高二十丈許 三日而止”, 『三國史記』 권12 신라본기 12, 신덕왕 4년조.

7 이홍직, 「貞元二年在銘新羅梵鐘-襄陽雪山出土品-」, 『白樂濬博士還甲紀念 國學論叢』(思想世界, 1955), pp. 457-492(『韓國古代史의 硏究』(신구문화사, 1971), pp. 612-632 재수록); 황수영, 「襄陽禪林院址出土의 新羅梵鍾」, 『文化史學』 10(1998), pp. 7-14; 최응천, 「禪林院址 梵鐘의 復原과 意義」, 『강좌미술사』 18(2002), pp. 55-81.

8 발견 내력은 이홍직, 위의 논문, pp. 457-492을 참조하기 바란다.

9 이용현, 「명문으로 본 선림원종 조성」, 『선림원종·염거화상탑지』(국립춘천박물관, 2014), pp. 54-69.

10 남동신, 「禪林院鍾銘」, 『(譯註)한국고대금석문 3-신라2,발해편』(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pp. 394-396. 이 글에서 인용한 문집 자료는 한국고전번역원(http:/www.itkc.or.kr/itkc/Index.jsp)을, 금석문 자료는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_third/user/main.jsp)을 함께 활용했다.

11 번역문은 이용현 선생(이용현, 앞의 논문, pp. 62-63)의 번역을 참조했다.

12 이홍직, 앞의 책, pp. 621-622.

13 권덕영, 앞의 논문(2009), p. 215.

14 上和上은 眞行法師이라고도 하는데, 사찰을 대표하는 승려를 일컫는다.

15 알려진 것처럼 불국사에는 신림이, 석불사에는 표훈이 처음으로 각각 주석했다. ‘乃為現生二親創佛國寺 為前世爺孃創石佛寺 請神琳表訓二聖師各住焉’ T49n2039.1018a04 『三國遺事』 5 大城孝二世父母; 均如, 『釋華嚴敎分記圓通鈔』 10(『韓國佛敎全書』 4(동국대학교 출판부, 1984), pp. 125c, 506a). 관련 연구는 김지견, 「신라 화엄학의 계보와 사상」, 『학술원논문집 인문사회과학편』 12(1973), pp. 31-65.

16 均如, 『十句章圓通記』 後誌(『韓國佛敎全書』 4, p. 81a). 신림의 부석법회에는 1000여명의 대중이 모일만큼 성황을 이뤘다고 전하기도 한다. 均如, 『釋華嚴敎分記圓通鈔』 10(『韓國佛敎全書』 4, p. 506a). 신림계 불교조각은 임영애, 「불국사의 9세기 神琳系 불교조각」(『미술사학』 37(2019), pp. 35-58) 참조.

17 “조사인 순응대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본받아 대성하는 것을 神琳 碩德에게서 엿보았으며…” 崔致遠, 「新羅伽耶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 900년 집필(최영성 역주, 『최치원전집』 2(아세아문화사, 1999), pp. 284-285, 293-294); 김상현, 「9세기 후반의 해인사와 신라 왕실의 후원」, 『신라문화』 28(2006), pp. 235-264.

18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가산문고, 1994), pp. 122-123; 弘覺禪師碑銘 幷書. 국립춘천박물관, 앞의 책(2014), p. 113.

19 현재 홍각선사의 비편은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국립춘천박물관이 나누어 소장하고 있다. 선림원지에 있는 귀부와 이수는 보물 제4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신은 새로 조성했다. 권덕영 교수는 탁본자료 3점, 비첩 5점을 참고하여 비문의 복원을 시도했다(권덕영, 「신라 홍각선사비문의 복원 시도」, 『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 한국불교문화사상사 상』(가산불교문화진흥원, 1992), pp. 637-643; 권덕영, 「신라 弘覺禪師塔碑 원형 탐구」, 『新羅文化』 32(2008), p. 397). 弘覺禪師碑銘 幷書. 국립춘천박물관, 앞의 책(2014), pp. 112-121.

20 『금석청완』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우리나라 역대 금석문 탁본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남동신, 「 『金石淸玩』 연구」(『한국중세사연구』 34(2012), pp. 361-434) 참조.

21 사찰명이 있는 비편 부분이 없기 때문에, 편찬자에 따라 비의 명칭을 제각기 다르게 적었다. 같은 『금석청완』이라도 4권본(개인소장)과 10권본(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기록했다. 4권본(제1권 20면)에서는 ‘선림사비’, 10권본(제1권 20면)에서는 ‘선림원비’라고 묵서했다(남동신, 앞의 논문, p. 392). 4권본은 1655년 무렵 편찬했지만, 10권본은 “10권본이 17세기 비첩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점에 주목하여 이를 1680년대 후반의 편집으로 추정했는데, 향후 연구에 따라서는 6권본과 같은 18세기 중반까지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남동신, 앞의 논문, p. 421)라고 보기도 한다. 6권본에는 ‘홍각선사비’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22 연구를 통해 추정한 비신의 크기는 가로 94.5cm, 세로 173.5cm, 두께 19.8cm이다. 권덕영, 앞의 논문(1992), pp. 637-643; 권덕영, 앞의 논문(2008), pp. 71-104.

23 선림원의 원래 이름이 억성사였을 것이라고 본 권덕영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는 관련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권덕영, 앞의 논문(1998), pp. 75-88; 권기종, 「弘覺禪師碑文을 통해 본 禪林院」, 『강좌 미술사』 18(2002), pp. 5-16; 권덕영, 앞의 논문(2009), pp. 197-224.

24 권덕영, 앞의 논문(1998), p. 79; 권덕영, 앞의 논문(2009), p. 211.

25 “이에 염거가 雪山 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도의선사)의 가르침을 여니…”, 金薳 撰,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 彰聖塔碑文」(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가산문고, 1994), pp. 106-107). 도의 문도에 대해서는 조범환, 「新羅 下代 道義 禪師의 ‘雪嶽山門’ 開創과 그 向背」, 『신라문화』 34(2009), pp. 231-233 참조.

26 崔致遠 撰, 「大唐新羅國故鳳巖山寺 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幷序」 ‘長慶 초에 道義가 서쪽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 西堂 智藏의 깊은 법력을 보고 지혜의 광명을 서당 지장에게 배워 돌아왔으니, 처음으로 선종을 전래한 스님이다.’ 이지관, 위 책, pp. 302-303. 잘 알려진 것처럼 西堂 智藏은 馬祖 道一의 직계이다.

27 염거화상이 바로 이곳 억성사에 머물렀음은 위 각주 23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그가 어디서 입적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가 말년에 억성사에서 주석했기 때문에 통상 억성사에서 입적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정작 그의 승탑은 원주 흥법사에서 반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염거화상탑지와 탑에 대해서는 강삼혜, 「염거화상탑지와 탑에 대한 고찰」(국립춘천박물관, 앞의 책, pp. 148-185) 참조.

28 체징은 억성사에서 염거(?-844)로부터 법인을 받았다. 도의-염거-체징으로 이어지는 산문을 가지산문, 도의-염거-홍각 이를 설악산문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조범환, 앞의 논문, pp. 219-239.

29 권덕영, 앞의 논문(2009), p. 206.

30 「弘覺禪師碑銘 幷書」, 국립춘천박물관, 앞의 책, p. 113.

31 장정민, 「양양 선림원지 정밀발굴조사」, 『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논문집』 2015-2(2015), pp. 125-130.

32 부조가 아닌 단독상 가운데 광배를 갖춘 상은 그 예가 많지 않다. 통일기 신라 불상 가운데 한국에는 구황동 삼층석탑 순금불입상(국보 제80호, 높이 14.4cm,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첨성대 남편지역(월성 인근) 교각 유구에서 발견된 전체 높이 13cm의 금동불입상(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불입상(국보 제123호, 높이 17.4cm, 국립익산박물관)이 있다. 중국에도 광배를 포함한 전체 높이 28cm의 통일기 신라 금동불입상이 있다. 절강성 영파 천봉탑 지궁에서 출토된 통일기 신라 8세기 작품으로, 현재 중국 절강성 영파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불상은 2009년까지 중국 남송대 불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응천 교수가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여 통일기 신라 불상으로 바로 잡았다.

33 보살입상 가운데 국보 제129호 금동보살입상(54.5cm, 삼성미술관 Leeum), 금동비로자나불입상(52.8cm, 국립경주박물관)도 대좌와 광배를 제외한 보살상만의 크기가 50cm가 넘지만, 두 구 모두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다.

34 물론 일본 호류지 백제관음과 같이 크기가 큰 보살상은 당연히 부속물을 별도 제작하여 부착하지만, 작은 크기의 상은 함께 주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5 일본에서는 조백이라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낙액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조백은 가늘고 긴 띠를 의미하므로,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간 띠를 의미하는 낙액이 보다 적합한 표현이다.

36 이 보살입상처럼 中空式으로 금동불을 조성할 때 외형틀과 내형틀을 고정하는 폭치를 둔다.

37 임영애, 「삼단팔각 연화대좌의 통일신라 수용과 전개」, 『신라문화』 38(2011), pp. 288-294.

38 임영애, 위의 논문, p. 285.

39 이곳의 석조물 가운데 삼층석탑 역시 통상 9세기 후반으로 편년한다. 9세기 전반의 인근 진전사지 삼층석탑의 계보를 이어 제작했다고 보기 때문이다(소재구, 「禪林院址 三層石塔의 조형적 특징과 의의」, 『강좌 미술사』 18(2002), p. 48).

40 선림원지의 승탑은 일제강점기에 흩어졌던 것을 1965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영호, 「선림원 홍각선사탑의 추정」, 『霞城李瑄根博士古稀紀念 韓國學論叢』(형설출판사, 1974), p. 232; 정영호, 「襄陽 禪林院址에 對하여」, 『美術史學硏究』 71(1996), pp. 204-206. 원래 위치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뒷산 중턱으로 50m가량 올라간 곳이다. 886년에 홍각선사비와 함께 세운 승탑이라고 추정한다.

41 香榭는 누각, 누대를 일컫는다(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가산문고, 1994), pp. 122-123).

42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서림사지 삼층석탑은 역시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120호로 지정돼 있다.

43 문명대, 「禪林院本尊佛像問題와 石毘盧遮那佛像의 硏究」, 『강좌미술사』 18(2002), pp. 17-36(『원음과 고전미』 (도서출판 예경, 2003), pp. 305-318, 재수록).

44 문명대, 앞의 논문(2002), pp. 23-25. 선림원지에서 이곳 서림사지까지의 거리는 4km가 아닌 5.8km이다.

45 문명대, 앞의 논문(2002), p. 26.

46 이 미완성불상은 강원도 문화재위원 홍성익 선생님이 관련 정보를 제공해 주어 알게 되었다. 중요한 정보와 길안내를 자처해 준 홍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47 현재 미완성 불상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 주변에 울타리를 둘러 접근이 어렵다(2020년 3월 13일).

48 미완성 불상은 전체 높이가 173cm인데, 46cm 높이의 머리를 제외하면, 신체는 127cm이다. 상의 크기는 홍성익 선생이 제공해 주었다.

49 『私撰邑誌』 안에 포함돼 있는 『峴山誌』는 강원도 양양의 대표 지방지이다. “西林寺在府西三十里 今廢 今石佛在路傍者卽本寺之主佛云”(『私撰邑誌』 35(奎10977), 규장각자료총서 지리지편, 『강원도읍지』 3(강원도, 1997), p. 73) “西林石佛, 在府西三十里西林古寺之南 其高數丈 頭頸落於壬辰兵火 尙有靈驗 邦人之無子者 閣而祭之卽嗣續 自是以後 祈禱相續而靈應輒至云”(『私撰邑誌』 35(奎10977), p. 84).

50 정영호, 「襄陽郡 黃耳里 塔·像」, 『미술사학연구』 76(1966), pp. 251-252; 신철균·정연우, 「襄陽 西林寺址 石佛坐像 및 三層石塔 調査報告」, 『강원문화사연구』 3(1998), p. 192.

51 신라의 금동불은 5cm 안팎의 상은 주로 탑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10cm 이상은 출토지가 다양하다. 금당지에서도 출토되지만, 강당지 혹은 승방지로 추정하는 건물지에서 출토되는 예도 적지 않다. 금동불상의 크기와 용도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민은 김동하, 「新羅 統一期 小金銅佛像의 類型과 用途에 관한 試論 -경주지역 발굴 출토품 중심으로」(『불교미술사학』 18(2014), pp. 7-41)를 참조.

52 경주에서 발견된 금동불 59점 가운데 전체 높이가 5cm 이하는 15점, 5∼10cm는 16점, 10∼20cm는 14점, 20∼ 30cm 이상은 12점, 30cm가 넘는 것은 단 2점이다. 梁銀景, 「新羅 金銅佛에 대한 分析과 出土址의 性格 糾明」, 『신라의 금동불』(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1), p. 262.

Fig. 1.
<금동보살입상>, Gilt-bronze Standing Bodhisattva, Sŏllimwŏn Site, late 9th century (photo by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below NRICH) Kim Joong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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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선림원지>, Sŏllimwŏn Site (photo by Hanbit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below H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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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출토 상황>, Excavation Situation (2015. 10) (photo by H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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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광배>,Halo (photo by NRICH Kim Joong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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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대좌>, Throne (photo by NRICH Kim Joong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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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금동보살입상 장신구>, Accessories (photo by NRICH Kim Joong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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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정병>, Water pot, kundika (photo by NRICH Kim Joong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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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상호>, Face (photo by Lim Yo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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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상호>, Face, 858, Iron Seated Vairocana Buddha (photo by Pak Tongc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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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보관>, Crown (photo by Lim Yo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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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left)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 Giltbronze Standing Bodhisattva, Sŏllimwŏn Site, (right) <유점사 능인전 금동보살입상> Gilt-bronze Standing Bodhisattva, Yujŏmsa Nŭnginjŏn (photo from Chosŏn’gojŏktobo 5, 1917, pl.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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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天衣 연결 부분, Celestial garments connection (photo by Lim Yo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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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뒷면, Back (photo by NRICH Kim Joong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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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귀꽃> Kwikkot, Corner Flower (from left) ① 금동불입상 Gilt-bronze Standing Buddha, Hongch’ŏn Mulgŏlli, Chuncheon National Museum ② 금동불입상 Gilt-bronze Standing Buddha, Wŏlchi, Gyeongju National Museum ③ 철조비로자나불 Iron Seated Vairocana Buddha, Top’aansa ④ 금동보살입상 Gilt-bronze Standing Bodhisattva, Sŏllimwŏn Site(ⓒ ①② Yŏngwŏnhan saengmyŏngŭi ullim, T’ongilshilla chogak, National Museum of Korea, 2008, pl.118,94,③④ photo by Lim Yo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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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선림원지 승탑>, Monk stupa, National treasure no.447, late 9th century, Sŏllimwŏn Site (photo by Lim Yo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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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새로 발견된 선림원지 승탑 옥개석> Newly discovered roof of monk stupa, Sŏllimwŏn Site (photo by Lim Yo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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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left) Fig. 16의 귀꽃 Kwikkot of Fig. 16, (right) 선림원지 보살상 대좌 귀꽃 Kwikkot of Fig. 5 (photo by Lim Yo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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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left) Fig. 15의 승탑 하대 Lower Floor of Fig. 15, (right) Fig. 5의 하대 Lower Floor of Fig. 5 (photo by Lim Yo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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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선림원지 출토 금동불입상> Gilt-bronze Standing Buddha (left) side, (right) front, 9.3cm, 7th century, Chuncheon National Museum (photo from Hŭlgesŏ kkaeŏnan Kangwŏnŭi shillamunhwa, p.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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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left)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Stone Seated Vairocana Buddha, Sŏrimsa Site, (right) <미완성 비로자나불좌상> Unfinished Stone Seated Vairocana Buddha, Yangyang-gun Seo-myeon Sŏrim-ri (photo by Lim Yo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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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억성사 관련 염거화상, 홍각선사의 행적
Ŏksŏngsa Temple-related activities of Yŏmgŏ & Honggak Buddhist Monk
Yŏmgŏ (?-844) Honggak (814?-880)
830 · Renounce the secular life
· · Haeinsa reside
831-840 Ŏksŏngsa reside ·
844 Enter into extinction ·
· Yŏngnamsa, Hyemoksan Mt. reside
late Xiantong(860-874) · Ŏksŏngsa reside
· Royal invitation
Buddha-work in Ŏksŏngsa
880 · Enter into extinction in Ŏksŏng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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